#14
의진은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인 승오의 곁에서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건물 파편에 깔리면서 생긴 다리 골절과 햄스트링 파열, 오른쪽 팔꿈치 부근 신경 손상이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죽음과 직결되는 급소 부위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수술은 시기적절하게 이루어졌으니 이제 승오를 낫게 하는 건 온전히 의진의 몫이었다. 에스퍼에게 병원은 그저 치유 이음새 역할을 할 뿐이었다.
“승오야, 좋은 아침.”
가습기 물을 채워온 의진은 습도 조절을 위해 기계를 만지작거렸다. 으음….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입구에서 하얀 연기가 퍼져 나왔다.
“누구 병간호는 처음이라서 서투네.”
멋쩍게 웃어 보인 의진이 잠든 승오 곁에 앉아 중얼거렸다. 어제저녁 수술을 마치고부터 줄곧 눈을 감고 있는 승오였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작게나마 뜨였던 승오의 눈이 꿈결처럼 떠올랐다. 설마 이대로 눈을 뜨지 않는 건 아니겠지. 괜한 불안감에 의진은 손을 뻗어 생채기 난 손등을 어루만지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이딩을 하기 전 아주 잠깐이었지만 마주친 승오의 눈빛이 밤새도록 아른거렸다. 자신이 모르는 시간이 담긴 짙은 눈빛.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엄지로 도드라진 손등뼈를 쓸어 만지던 의진은 다른 팔에 얼굴을 묻었다.
못다 한 사과가 엎드린 목울대로 꾸역꾸역 올라왔다.
*
또다. 또 그 꿈이었다. 승오는 까맣던 시야가 갑자기 환해지는 걸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빛은 의진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도훈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입을 맞췄고 격렬하게 서로를 더듬었다. 도훈의 손이 의진의 마른 몸을 쓰다듬고 주물렀다. 의진은 그 손길에 간간이 몸을 떠는 것으로 흥분을 나타냈다.
‘하아, 읏! 응… 선생님, 아! 사랑해요.’
‘승오 씨보다 더요?’
‘네, 으읏, 네…. 흣! 정말이에요. 아, 더, 더 들어와 주세요. 네?’
자신은 게스트였다. 초대되지 않은 이방인. 두 사람이 함께 몸을 들썩일수록 승오는 나락으로 빠져갔다. 불안과 증오가 지저분하게 점철된 나락에서 하염없이 의진을 부르고 있었다.
‘의진…아…. 지의진…!’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는 의진에게 닿지 못했다. 활짝 벌린 다리가 도훈의 허리짓에 나비처럼 흔들렸다. 허억. 허억. 아아! 그때 도훈이 뒤를 돌아봤다. 얕잡아보는 듯한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의진을 울렸다.
‘당신이 졌어요.’
의진의 하얀 발가락이 갓 피어난 꽃잎보다 처연하게 벌어졌을 때, 승오는 끈질긴 나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
“승오야!”
승오가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건 곧 울음을 터뜨릴 기세의 의진이었다. 그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현실과 몽중을 구분하려 애를 썼다. 그러니까 조금 전 악몽 같았던 장면은 정말 악몽이, 맞았다. 승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갑자기 몸을 막 뒤틀길래 잘못된 줄 알고… 근데 비상벨을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 거야….”
“……지의진…?”
“하아, 다행이다. 의사 선생님 불러올…,”
의진이 말은 제 얼굴을 더듬는 승오의 행동에 끝마치지 못했다. 사막에서 물을 찾아 모래를 헤집는 사람처럼 승오의 동작은 필사적이었다.
“의진아….”
제 앞에 있는 의진이 신기루가 아닌 실제임을 확인한 승오가 바싹 마른 승오 목소리로 의진을 불렀다. 승오의 건조한 목소리에도 의진은 안도했다.
“…승오야.”
승오의 의식이 돌아오면 호출해달라는 담당 의사의 부탁이 있었다. 데스크로 가려 몸을 일으키는 의진의 손목을 붙잡은 승오가 그를 당겨 안았다.
“보고 싶었어, 미치도록.”
틀어놓은 가습기가 승오의 목소리까지는 적시지 못한 모양이었다. 쇳소리 비슷한 소리가 승오에게서 새어 나왔다. 의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가 더 보고 싶었어. 미안해, 승오야….”
뜨거운 한숨이 어깨 근처로 퍼져갔다. 의진은 제 곁에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라앉았던 심장이 제 자리를 되찾는 듯했다. 승오는 제게 안긴 의진을 한쪽 팔로 끌어안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오늘부터는 훈련 나와야 해요. 승오 씨가 병실에 있다고 해서 의진 씨까지 훈련 제외되는 건 아니니까요. 알겠죠?
“네에…. 오후에 가면 되죠?”
─네, 점심 먹고 두 시에 훈련실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이따 봬요.”
승오와 손장난을 치며 내부용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던 의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통화를 끊자 승오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 도훈 트레이너?”
“응. 너 간호 핑계로 며칠 빠졌더니 호출 연락.”
상급 에스퍼가 이용하는 1인용 병실은 회진을 돌 때도 불쑥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마음 놓고 애정행각을 펼치는 게 가능했다. 의진을 꼭 끌어안고 있던 승오는 손깍지를 끼는 의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안 가면 안 돼?”
“훈련인데 어떻게 안 가.”
확실히 의진과 있으니 승오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어 갔다. 드레싱을 해주던 닥터도 남다른 회복력에 놀랐더랬다. 그래도 아직 재활까지는 무리가 있어서 며칠 더 병실 신세를 져야 했다. 훈련 시간을 확인하는 의진이 승오의 입맞춤에 살짝 웃었다.
“그럼 트레이너를 바꾸는 건?”
“멀쩡한 선생님을 왜 바꿔?”
“…그런가.”
의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승오를 바라봤다. 아직도 예전의 활기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전보다는 나아진 얼굴이었다. 마주 본 자세로 승오의 얼굴을 감싼 의진이 먼저 키스했다.
“…….”
맞물린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잇새로 의진의 혀가 밀려 들어왔다. 가만히 있는 혓덩이를 콕콕 건드리고 감아올리던 그는 승오가 키스에 응하자 목에 팔을 둘렀다.
실로 오랜만에 하는 키스였다. 가이딩이 목적이 아닌, 그저 서로를 느끼기 위한 행위라고나 할까.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이 식도를 넘어가고 도톰한 입술을 더운 숨으로 빨아들이고. 입술을 비비는 것만으로도 귓불이 따끈해져 기분이 좋았다.
“으응….”
의진은 굴곡진 입술을 부드럽게 감쳐 무는 승오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짧게 앓았다. 병실에서 이러고 있는 꼴이 조금 웃기긴 했지만 뭐 어떠하리. 츄읍…. 엉망이 된 호흡을 고르려 얼굴을 떼자 젖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승오는 입술을 작게 벌린 채 눈을 내리깔고 숨을 내쉬는 의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뿐한 손으로 좁은 턱을 쥐고 들었다. 어느 정도 호흡을 되찾았으니 다시 혀를 섞을 시간이었다.
“하아, 숨 막혀.”
끈적한 키스 때문인지 양감 다른 입술 사이로 얇은 은사가 늘어졌다. 부끄러운 듯 손등으로 닦아낸 의진이 다른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승오는 의진을 끌어안고 따뜻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훈련 가지 마.”
“안 돼, 가야 해. 가야 네가 더 빨리 낫지.”
“……보내기 싫다.”
의진은 환자복을 입은 승오의 너른 어깨를 쓰다듬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키스 마크가 남지 않을 정도로 입을 맞추던 승오가 눈을 치켜떴다.
“왜 웃어?”
“너 귀여워서. 맨날 어른인 척, 나보다 형인 척 굴더니 완전 애가 따로 없네. 동영상 찍어 놓고 싶다.”
“찍어놔. 대신 가지 마.”
“어쭈우? 그건 안 돼.”
“왜 안 되는데.”
승오가 불만인 표정으로 허리를 세웠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치자 의진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이유야 뻔하잖아, 당연히…. 방황하던 의진의 밤색 눈동자가 붕대가 퉁퉁 감긴 승오의 팔과 다리를 내려다봤다.
“평소 하던 거 절반밖에 못 하니까 속 터져서 그러지. 내가 얼른 너 회복시켜서 우리 숙소로 데려가고 만다.”
의진의 적나라한 속내에 승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큭큭 댔다. 그리고는 한쪽 팔로 의진의 허리를 감아 반대쪽으로 눕히고는 훈련복 지퍼를 끌어 내리려 손을 올렸다.
“뭐, 뭐해!”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나 멀쩡해.”
지퍼를 반쯤 내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화들짝 놀란 의진이 황급히 승오를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얼굴이 승오의 눈엔 무척 귀여워 보였다.
“미, 미쳤나 봐! 의사 선생님 허락 없이는 하, 하지 말랬거든! 무리 올 수 있다고….”
“섹스가 제일 좋은 가이딩 아니었어?”
“그건 그런데 너는 아직 수술 회복이 덜 됐으니까….”
받아낼 수 있는 몸 에너지가 평소와 달라 크게 흥분하면 쇼크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워낙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서 성행위는 당연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술실로 옮기고 나서 담당 의사가 곧바로 의진에게 당부했었다. 승오는 그때 잠을 자고 있었기에 부끄러움은 전부 의진이 감내해야 했다.
살짝 민망했던 며칠 전을 떠올린 의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음 같아선 확 덮치고 싶었던 때가 부지기수였지만 어떡하겠나. 하지 말라는데. 팔자에도 없던 독수공방의 나날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 트레이너한테 훈련받아서 덜 회복된 거 같아.”
승오가 은근슬쩍 도훈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반쯤 내려진 훈련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의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야. 도훈쌤이 얼마나 능력 좋은데.”
“……아니라니까.”
의진은 승오가 그간 괴로워했던 악몽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자꾸만 도훈을 깎아내리는 게 조금 불쾌했다. 그만큼 도훈은 의진에게 있어서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도훈쌤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튼, 나 훈련 갔다 올게! 미리 가 있어야겠다. 혼자 심심하겠지만 잘 놀고 있어! 알았지이?”
침대에서 폴짝 내려온 의진은 점점 굳어가는 승오의 얼굴을 몇 번 쓰다듬어준 뒤 병실을 나왔다.
“…….”
의진이 문을 닫고 나가자 승오는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