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11)화 (11/114)

#11

“…잠이 안 오네.”

승오를 그렇게 보내고 난 의진은 홀로 남은 숙소 방 안에서 쉴 새 없이 뒤척거리고 있었다. 매일 승오와 한 몸처럼 붙어 지냈던 침대는 광활한 바다 같이 넓게 느껴졌고 거실은 필요 이상으로 큼지막했다.

따뜻한 품에 안겨 토닥이던 그때가 갑자기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의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때도 이 자리에서 승오가 물어봤었지. 승오 딴에는 엄청나게 생각하고서 한 말이었을 텐데. 지레 겁을 먹고 거절하고야 말았다. 그 순간엔 일시적인 공포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승오의 얼굴이 지금 와서 보이는 것도 같다.

“보고 싶다….”

어쩌면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나를 승오가 실망하진 않았을까. 괜찮다곤 했지만, 속으로는 나를 원망하고 있진 않을까.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요동쳤다.

승오를 배웅했던 날. 그의 옆에 다른 가이드가 섰을 때 느껴졌던 묘한 기분이 의진의 죄책감을 더욱 건드리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근사했던 승오는 의진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잘 다녀올게.’

‘…미안해.’

‘뭐가 미안해. 밥 먹고 잘 자고 있어.’

꽉 끌어안아도 전투복이 두꺼워서 승오의 체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따라나서겠다고 하면 됐을 텐데. 막상 입이 안 떨어졌다. 겁쟁이였던 거지.

의진은 후우우,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매일 짧기만 했던 밤이, 오늘은 자책과 걱정으로 버무려져 끝없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소파에서 선잠 들었던 의진은 버릇처럼 도훈의 사무실로 향했다. 민폐라는 걸 알면서도 승오의 생각으로 머리가 지배되면 자연스레 찾아오게 됐다. 그와 있으면 편했고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트레이너 방과 다르게 특별한 보안 장치가 없는 도훈의 방문은 누구라도 열 수 있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틈으로 도훈이 올 줄 알았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잠을 못 자서 뒤척이느라고요.”

“왜 잠을 못 잤어요?”

도훈은 의진의 말에 금방 걱정스러운 안색을 지었다. 의진은 벌떡 일어나 커피포트에 물을 담으려는 도훈을 보고 슬쩍 미소 지었다. 그가 있어 다행이었다. 만일 정신적으로 기댈 사람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승오를 찾아 무단 외출을 감행했을지도 몰랐다.

평소 우릴 때 나는 것과 다른 향이 나자 의진은 살금살금 도훈에게로 향했다.

“홍차가 아니네요?”

“의진 씨가 잠을 못 잔다고 하니 오늘은 캐모마일을 마시는 게 좋겠어요. 카페인이 없어서 불면에 좋거든요.”

향긋한 꽃 냄새에 의진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선생님이라도 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뜨겁게 끓여진 물을 부어 티백을 올렸다가 내리던 도훈이 고개를 들어 의진을 바라봤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얼굴. 여전히 승오가 그리운 모양이었다. 가만히 의진을 지켜보던 도훈이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

“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걸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선생님께 정말 고마워요. 늘 징징거리는 것도 다 받아주시고….”

언뜻 다 우려진 차를 들고 테이블로 간 도훈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의자 옆에 서 있는 의진의 마른 손목을 붙잡았다. 한 손에 감기는 따뜻한 체온. 도훈은 순간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일단 차를 마시는 게 좋겠어요.”

“네에. 잘 마실게요, 선생님.”

하얀 볼을 부풀려 큰 숨을 뱉어낸 의진이 차 표면에 번지는 잔물결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도훈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운 소매 안으로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숨겼다. 방금 닿았던 의진의 피부가 손 주름을 타고 스며든 것 같았다.

“승오 씨는 잘 해내고 있을 거예요.”

“그렇겠죠. 그런데, 자꾸 걱정되네요.”

도훈은 고개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표시를 전했다.

“한번 결정했으면 줏대 있게 밀어붙일 줄도 알아야 하는 건데. 왜 저는 후회가 될까요?”

차가 다녀간 입술이 열기로 붉어져 있었다. 의진은 데워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손톱으로 자기 손등을 긁기 시작했다. 어느새 붉어진 손등을 발견한 도훈이 손을 뻗어 맞잡아주었다.

“…그만큼 의진 씨가 승오 씨를 생각한다는 뜻이겠죠.”

“어차피 승오는 지금 제가 이러는 것도 모를 텐데요.”

그렇지. 영원히 모른 채 사라질 수도 있겠지. 도훈은 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켜냈다. 어쨌거나 승오는 버려진 ‘도시’에서 죽을 목숨이었다. 천음이 그곳에 있는 한 그럴 것이다.

“승오 돌아오면 같이 와도 돼요?”

“…언제든지요.”

의진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인 도훈이 대답했다. 밝게 웃는 얼굴 위로 승오의 죽음에 오열하는 의진이 그려졌다. 도훈은 쓰고 있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도훈의 따뜻한 대답에 의진은 이미 국위 선양하여 승오가 돌아온 듯 설레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뭔데요?”

도훈은 사랑이란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받아본 적도, 해본 적도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의진이 승오를 생각할 때마다 짓는 표정과 말투, 달아오르는 귀 끝의 변화가 신기했다. 제가 의진에게 갖는 호기심과는 달랐다.

“좋아한다는 건, 어떤 거죠?”

“네?”

“승오 씨를 얘기할 때마다 의진 씨는 뭐랄까, 되게 행복해 보여요.”

“…아, 그런가요?”

못 보일 걸 들켰다는 듯 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더 불태웠다. 숨기려 해도 티가 나는 거구나. 도훈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선생님도 연애해보셨을 거 아니에요!”

“……음.”

“설마 이 잘난 얼굴로 모쏠? 말도 안 돼.”

“모쏠…?”

도훈이 의진의 말을 따라 하자 의진은 커다란 눈을 접으며 꺄르르 웃어댔다. 모든 걸 알고 있을 법한 사람인데,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도훈은 영문도 모른 채 의진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런 잘난 선생님을 아무도 안 채갈 수가 있어요? 대박 충격이다.”

“그야, 여유가 없기도 했고… 굳이 그런 걸 할 생각이,”

“제가 어떻게 알아봐 드릴까요? 우리 센터에 미혼인 선생님이 몇이나 있었지? 제가 서울 토박이라 다른 센터에 친분은 없어요.”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센터 내 직원들을 전부 브리핑하고 있는 의진은 나름대로 신나 보였다.

“신입 에스퍼들 맡아주시는 김쌤은 어떠세요? 성격이 좀 더럽긴 한데 인정은 많으시거든요. 예전에 저 훈련 힘들어서 울고 있을 때 초콜릿도 챙겨주셨는데! 아, 선생님이랑 좀 나이 차이가 나려나?”

조잘거리는 목소리는 또 듣기 싫은 게 아니어서. 그만해도 된다는 말을 하려던 도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의진이 하고 싶은 대로 두기로 했다.

“전 나이 차이는 상관없어요.”

“그래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선생님이니까 아깝지 않은 사람으로 소개해 드려야죠! 잠깐만 있어 봐요!”

급기야 휴대전화를 꺼낸 의진은 주소록을 훑으며 골몰했다. 도훈은 멋대로 터지는 웃음을 깨닫고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선생님은 어떤 스타일이 좋아요?”

의진의 물음에 도훈은 난처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런 거 없어요.”

“에이, 그래도요. 취향 없는 사람은 없다고요.”

주소록을 물색하던 의진은 휴대전화를 쥐고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은 자신을 바라보는 의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밝고,”

의진은 밝았다. 워낙 밝아서 그런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게 무척이나 잘 보였다.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그리고 숨기는 것을 어려워했다. 싫고 좋음이 확실한 그런 선명한 사람이었다.

“키는 저보다 작고,”

“뭐야, 생각보다 엄청 구체적인데요?”

“…그리고 눈동자는 밤색이면 좋겠어요.”

도훈의 마지막 말에 의진은 턱을 잡고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양한 감정 변화를 지켜보는 도훈의 시선은 흐트러짐 없이 의진을 향하고 있었다.

“흠! 어렵지만, 제가 잘 구해볼게요! 제가 또 별명이 서울 큐피드예요. 모르셨죠?”

팔꿈치로 도훈을 콕콕 찌르던 의진이 미지근하게 식은 캐모마일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울함을 덜어내려 아무 이야기나 하다 보니 어느새 훈련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쌤, 오늘은 훈련 좀 살살해주시면 안 돼요?”

“그건 제 권한이 아닌걸요?”

클립보드를 들고 훈련실로 향하는 도훈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던 의진이 우는 소리를 하며 옆으로 따라붙었다.

“거짓말. 선생님이 프로그램 짜는 거잖아요.”

“하하. 그렇지만 저는 훈련 보고를 해야 하는 사람인 걸 잊으시면 안 돼요.”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훈련실로 들어가면서까지 웃음꽃을 피웠다. 물론 지금도 천음이 제가 내는 목소리를 감지하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의진의 앞에서라면 제아무리 천음이라도 자신을 건들지 않겠지. 도훈은 알량한 기대에 자신의 의무도 잊었다. 의진도, 도훈도 잠시나마 모든 걸 잊고 웃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천음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도훈과 의진의 목소리를 듣고 비죽였다. 가느다란 입꼬리가 올라가며 그들이 담화를 비웃는 듯했다. 평소 감정 변화가 크게 없던 도훈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사사로운 농담과 끊임없는 웃음. 천음에겐 낯설기만 한 것들이었다.

“애송이랑 놀아나더니 본분까지 잊은 모양이군요. 말을 듣지 않는 충신이라니….”

웃음 짓던 얼굴이 차갑게 돌변했다.

“나태해진 정신을 바로 잡아줄 때가 머지않았네요.”

도훈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할 만큼 의진과 함께 있는 순간이 즐거웠다. 어둡고, 칙칙하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태양 아래 누워 햇볕을 쬐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적당히'가 되지 않았다. 자꾸만 경계 그은 선을 넘게 됐다.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히 짐작할 수 있었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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