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작전 일시는 3월 17일 14시 00분부터 3월 27일 16시 00분까지. 총 열흘간 진행되며, ‘도시’의 구체적인 위치, 그곳에서 육성되고 있는 군대의 규모, 조직의 헤드. 우리는 이 세 가지 정보를 수집할 것을 우선한다.”
“네, 알겠습니다.”
뒷짐을 지고 선 팀장은 비서가 건네는 금장 배지를 들었다. ‘EGI’ 로고 주변으로 화려한 월계수가 펼쳐진 배지는 국가의 중요 임무와 전투에 참전하는 군사에게 주어지는 징표였다. 일종의 책임 의식 같기도 했다. 각 잡힌 정장을 입은 팀장이 승오를 포함한 에스퍼들에게 그 배지를 달아주었다.
승오는 왼쪽 가슴에 빛나는 배지를 내려다보곤 뒷짐 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건투를 비네.”
작전은 이러했다. 정확한 위치는 지속적인 전파 교란으로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어 근방까지 파악된 상태였다. 전략기획팀은 그곳 주변에 기지를 은닉시킨 보호막이 생성되어 있으리라 추측했다.
“C-01. 600m 앞 14시 방향 배리어 확인 완료.”
“C-01. 600m 앞 14시 방향 배리어 확인 완료. 모두 대기.”
물리 에스퍼들이 해당 위치까지 전진한 다음 그 보호막을 교묘히 흐트러뜨리면 나중에 투입될 투시 능력 에스퍼가 그곳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는 게 목적이었다.
“주승오, 준비됐어?”
최전선에 배치된 S급 에스퍼 태준이 승오에게 물었다. 빛 능력 에스퍼인 태준이 전선을 뚫고 진입로를 확보하면 승오를 포함한 후발대 인원들이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그중에서 승오는 넓은 시야로 사위를 살피며 혹시 모를 피습을 인지해야 했다.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땐 소속원들의 머릿속에 침입해 직접 그들의 신체를 움직여 안전을 확보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쏟아질지도 모르는 적군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도 정신계 에스퍼 몫이었다.
“응. 신호하면 진입할게.”
“오케이.”
그러므로, 현재 국내에 현존하는 정신계 에스퍼 중 가장 최상위 계급 승오의 부담이 상당했다. 타인을 컨트롤 한다는 건 상당한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것과 더불어 한 번 능력을 사용했을 때 실패 또한 없어야 했다.
‘미안해. 나, 아직은 두려움이 더 큰 거 같아.’
작전 개시를 목전에 두고 승오는 의진이 한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이번 작전에 많은 최상위 등급 에스퍼가 투입되는 만큼,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됐다. 그 때문인지 승오의 컨디션은 최고조에 달했다. 의진이 꽤 힘을 쓴 모양이었다.
“…….”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은연중에 의진이 수락할 거라고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공허함은 무슨 수를 써도 떨어지지 않았다.
“카운트하고 진입하겠습니다. 오퍼레이션 카운트 개시.”
태준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에스퍼들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조금 더 진심을 강하게 피력했다면 지금 내 곁에 있었을까. 승오는 허리를 낮게 숙이며 온갖 생각에 사로잡혔다.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순간에 의진을 떠올리니 감정이 널을 뛰었다.
“셋.”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 서울로 돌아갈 때쯤이 되면, 오히려 그가 여기 없다는 걸 감사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되면 널 여기 둔 게 다행이었다고 말하며 안도의 숨과 함께 으스러질 정도의 포옹을 해줘야겠다. 승오는 제 앞에 서 있는 요원들을 바라보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제 의진을 잠시 잊어도 될 것 같았다.
“둘.”
“승오 님, 집중.”
센터에서 붙여준 가이드가 승오에게 말을 건네왔다. 이름이 뭐였더라. 세훈? 세운? 세준? 확실하지 않은 이름을 되새기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집중할 시간이었다. 머릿속을 점령한 의진을 뒤로 미뤄야 했다. 모두가 살기 위해서.
“하나. 작전 개시.”
기대를 품고 승오는 ‘도시’의 연구실을 향해 발을 박차고 뛰어갔다. 한 번도 내디뎌보지 않은 도시의 회색빛 그림자를 향해.
*
승오를 배웅하고 트레이닝룸으로 복귀한 의진은 멍한 얼굴로 허공만 바라봤다. 경보만도 못한 속도의 러닝머신이 천천히 회전했음에도 의진의 발걸음은 그마저도 쫓아가지 못했다.
‘역시 따라갔어야 했나….’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 두려움이 앞섰던 대답이 이제야 후회가 밀려들었다. 의진은 푹푹 구부려지는 무릎을 똑바로 펴고 숨을 내쉬었다. 승오의 기나긴 발자취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돌이표 같은 러닝머신도. 무엇하나 따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혼자 남아있었다. 혼자 덩그러니.
-덜컹
러닝머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의진은 트레드밀 끄트머리에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순식간에 사위가 갸우뚱해졌다.
“괜찮아요?”
“어….”
의진은 등허리에 전해지는 차가운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넘어지지 않게 의진을 받쳐준 건 도훈이었다.
얼이 잔뜩 빠져 있는 의진을 안은 도훈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운동할 땐 집중. 그러다 다치면 큰일이잖아요.”
도훈은 한쪽 팔을 뻗어 팽팽 돌아가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시끄럽게 가동됐던 러닝머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소음을 줄여나갔다.
“그러게요…. 감사합니다.”
천천히 러닝머신에서 내려온 의진은 마른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동그란 정수리가 보이자 도훈은 비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의진 씨가 개인 운동하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요?”
“헤헤…. 어차피 숙소 가도 혼자거든요.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요.”
“하긴… 작전은 며칠간 수행한다고 했으니, 지금은 치열하게 도시와 싸우는 중이겠네요.”
“네, 그렇죠.”
승오의 빈자리가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도훈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전담 트레이너이기도 했고 고민 상담 이후 물꼬가 트여 소소한 담소까지 나누는 상대가 된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의진의 남은 시간을 채워주는 건 도훈이었다.
저녁 시간이 지난 체력단련실은 의진과 도훈 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작전이 진행되고 있는 탓에 인원이 비기도 했고 일정 속 훈련이 고강도이다 보니 개인 정비 시간엔 쉬는 게 우선시 됐다.
“어쩐지 전보다 더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네요.”
“아, 티 나나요?”
“의진 씨 생각은 얼굴에서 다 보이니까요.”
머쓱하게 웃은 의진은 벽 가까이에 있는 미니 벤치에 앉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전에 승오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생각은 얼굴에서 다 보인다고. 승오를 생각하니 또 여러 감정이 떠밀려 들어왔다. 그걸 떨쳐내기 위해 반사적으로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반바지 아래로 흔들리는 다리가 퍽 가늘었다.
“요즘엔 어떤 고민이에요?”
의진과 한 뼘 간격으로 거리를 벌리고 앉은 도훈이 몸을 틀면서 물었다.
“…그냥. 승오 생각이죠, 뭐.”
도훈은 파트너 이름을 부르는 의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승오를 얘기할 때면 작은 입술을 가만 놔두질 않았다. 가끔 손톱을 틱틱 뜯기도 했으며 밤색 눈동자는 이리저리 굴러다니기도 했다. 작은 얼굴에 다양한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
“따라가지 못해서 죄책감이라도 드는 모양이에요.”
“네, 맞아요. 겁이 많아서 무작정 못 가겠다고 하긴 했는데 후회가 돼요. 그냥 같이 따라갈걸…. 또 그러다가도 내가 지금 여기에 있어서 드는 생각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옹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래저래 복잡하네요.”
푸우우-. 볼을 크게 부풀리다 한숨을 내쉰 의진을 빤히 쳐다보던 도훈은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맞은 편에 설치된 거울 벽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진 게 여실히 비쳤다.
“의진 씨는 승오 씨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도훈의 다정한 말씨에 의진은 힐끔 옆을 바라봤다. 그리고서 승오를 떠올렸다. 매일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던 나날들부터 뜨겁고 짜릿했던 정사, 이따금 숙소 옥상에서 나란히 고개를 들고 별을 눈에 담던 것까지. 오만 것이 다 파노라마가 되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나갔다.
“…네. 많이 좋아해요. 같이 지내면서 많이 깨달았어요. 승오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애구나, 하고요. 아, 선생님이 보셨을 땐 별로 안 그래 보였을 수도 있겠다. 워낙 낯가리는 애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도훈은 자신을 잔뜩 경계하던 승오를 떠올렸다. 보통의 파트너를 대하는 감정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예상보다 더 깊은 듯 보였다. 사랑, 이라고 부르던가. 저런 감정을. 승오를 생각하며 키득거리는 의진의 붉은 귀 끝으로 시선을 옮긴 도훈은 낯선 단어를 혀에 굴렸다.
‘…주승오는 후방 지원이랬지. 그럼 살아 돌아올 확률이 높겠군.’
의진의 둥근 어깨에 손을 올린 도훈이 웃는 얼굴로 위로를 건넸다.
“승오 씨는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어느 정도 사실이 섞인 말이었다. 이미 천음과 그의 군대는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긴 후였다. 아마 그들이 ‘도시’를 쳐들어갔을 땐 시체를 태우고 남은 잿더미와 허물어져 가는 건물들이 반겨줄 것이었다.
“그렇겠죠? 그랬으면 좋겠어요. 돌아오는 날 내가 미안했다고 싹싹 빌 거예요.”
흐음. 도훈은 조금은 밝아진 의진의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무릎에 팔꿈치를 고정한 채 턱을 괴고 있던 도훈은 재잘대는 이야기를 들으며 손을 뻗었다. 어정쩡하게 뛴 운동에도 앞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길고 고운 손가락이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기죽어있지 말아요.”
이것 또한 반만 사실이었다. 승오와 함께 있던 의진은 누가 봐도 생기가 돌아 보일 만큼 반짝인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모습이 보기 싫은 건 아니었다. 어느새 많이 자란 머리카락 뒤로 보이는 침울한 눈빛도 마음에 들었다.
속도감이 떨어진 행동도, 가끔 멍한 표정을 짓는 얼굴도. 도훈에게 새로운 호기심을 안겨다 주었다. 그도 처음 느껴보는 부분이라 정확히 어떤 단어로 명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금 이기적이어도 나쁠 거 없잖아요?”
도훈의 손길이 떨어진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자리를 되찾았다. 의진은 도훈의 옅은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괜히 앞머리를 다시 정돈했다.
“의진 씨는 웃는 얼굴이 훨씬 예뻐요.”
도훈은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도훈의 말은 어느 한 음절 빠짐없이 의진에게 꽂혀왔다. 수려한 미모를 감상하던 의진이 그를 따라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요?”
“네, 그렇게요.”
맞은편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은 어느덧 조금의 틈도 없이 가까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