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의진은 그날을 기점으로 한껏 뻣뻣해진 승오와의 관계가 너무도 불편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거절’이라는 벽은 잊어내기가 힘든 법이었다. 물론 매일 같이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입을 맞췄지만 어색함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승오는 등급 승격과 동시에 각종 극한 상황을 대비한 훈련에 투입됐다. 그 말은 즉, 잠자리가 아니라면 말 한마디 섞을 시간도 없었다는 거였다. 연애 시작한 지 3일 만에 두 사람은 주말부부로 전락했다.
“뭐야. 왜 이렇게 다 죽어가? S등급 에스퍼 가이드가.”
“말도 꺼내지 마.”
“왜?”
“아, 그냥.”
자기 몸집만 한 백팩을 벤치에 내려놓은 의진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손금이 닳도록 만져댔던 구릿빛 피부와 조각조각난 복근이 시야에 동동 떠다니는 지경이 됐다. 금욕 생활은 도무지 저와 맞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나날이었다. 까슬한 입안을 다신 의진은 고개를 젓고선 캐비닛을 열었다.
“왜, 승오 얘기 하도 들으니까 지겹냐?”
은후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쿡쿡 의진을 찔러댔다. 은후의 말대로 승오가 S급으로 승격되자 덩달아 입방아에 오른 사람이 바로 의진이었다. 평생 받아보지도 못할 관심을 요 며칠간 분에 넘치도록 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승오와 의진의 관계는 더 발전하지 못했다. 그 빌어먹을 ‘도시’만 아니었어도 축하를 빌미로, 아니면 이왕 승격된 거 새로운 등급까지 역사를 만들자는 빌미로 붙어먹을 수 있었다. 그 빌어먹을 도시만 아니었어도!
“뭐래. 걔가 S급이지, 내가 S급이냐? 귀찮아.”
“어쭈우? 아, 늦겠다. 나 먼저 들어간다!”
“어엉….”
시간을 확인한 은후가 헐레벌떡 개인 훈련실로 들어갔다. 의진도 기둥에 걸린 시계를 흘깃 보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승오가 말한 7일의 유예기간 중 오늘로 3일. 벌써 절반가량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의진이 고개를 젓고 캐비닛으로 시선을 옮겼다. 캐비닛 가장 깊은 곳엔 전에 봤던 광고 속 콘돔이 두 상자나 쌓여 있었다. 혹시 몰라서 구매해뒀던 건데. 이거 언제 써보냐. 옷걸이에 걸린 푸른색 훈련복을 느릿느릿 빼내던 의진 뒤로 상쾌한 허브향이 훅, 끼쳤다.
“안녕하세요.”
“에?”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조심스러운 손짓에 의진이 휙 뒤를 돌았다. 인사를 건넨 당사자는 눈을 한 번 동그랗게 뜨더니 곧 눈가가 다 접힐 정도로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어울리기 힘든 은색 머릿결이 안경테에 몇 가닥 걸쳐진 것조차 멋스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제게 건네는 미소 너머로 상투스가 울리지만 않았지 가히 천사의 미소 같았다.
“아, 오늘부터 새로 근무하게 된 가이드 트레이너 김도훈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아…. 네. 지의진입니다. 반갑…습니다.”
도훈은 의진의 인사에 여전히 웃음을 짓고선 악수를 청했다. 의진은 내민 손을 바라봤다.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커다란 손이 인상적이었다. 의진도 곧장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따뜻한 얼굴과 달리 차가운 체온에 의진이 흠칫 놀랐다.
“마침 처음 맡게 된 가이드가 의진 씨네요. 같이 들어가면 되겠어요.”
“네, 같이 들어가요. 잘 부탁드려요.”
의진의 차트가 꽂힌 클립보드를 흔든 도훈이 또 한 번 밝게 웃었다. 숫자 2가 적힌 훈련실로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갔다.
“여기 들어오자마자 말해주더라고요. 의진 씨가 A등급 에스퍼를 S등급으로 승격시켰다는 거요.”
“아…. 원래 소문이 빨리 도는 곳이에요. 물론 승오가 희귀 케이스긴 하지만.”
의진은 스틱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고 서서히 올라가는 전자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에너지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훈련이었다. 새로 추가된 프로그램이라 바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도훈은 의진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발견하곤 가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오늘은 그냥 간단한 검사랑 인사만 하려고 온 거니까요.”
“아, 고맙습니다.”
고정대에 스틱을 꽂아 넣은 의진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손가락이 살짝 스쳤는데, 톡 쏘는 감각이 서로에게 느껴졌다. 깜짝 놀란 의진은 흠칫 몸을 떨었다. 도훈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정전기인가 보네요. 제가 좀 건조한 편이라 정전기가 많이 나는 편이에요.”
“그런가 봐요. 놀래라….”
손가락을 슥슥 문지르는 의진을 향해 도훈이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 있던 곳에서도 외과수술만 거의 했었어요. 마취제를 쓰는.”
“그럼 의사 선생님이셨네요?”
“그런 맥락이죠.”
그런 맥락?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의진이 한 번의 사이클이 끝나자 이마 주변을 닦으며 내려왔다. 숨을 몰아쉬며 500mL 생수병을 단숨에 들이킨 의진이 와그작 페트병을 구기면서 슬쩍 물었다.
“도훈 트레이너님은 어느 센터에 원래 계셨었어요?”
의진의 훈련 기록을 꼼꼼히 적어가던 도훈은 앞을 한 번 쳐다봤다가 의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잘생기셨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춘 호박색 눈동자에 도훈을 감상하는 의진의 얼굴이 그대로 담겼다.
“원래는 에스퍼가 아닌 분들을 상대로 병원을 운영했었어요. 국가 소속이 아니라.”
“어? 그런데 어쩌다가 이쪽으로 오신 거예요?”
“으음.”
볼펜 뒤축을 아랫입술 밑에 갖다 댄 도훈이 눈을 찌푸렸다. 저것도 잘생겼어. 의진은 하얀 피부에 난 솜털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음. 그게 지금 얘기하기엔 조금 긴 이야기라, 나중에 기회가 되면 천천히 들려줄게요. 아, 의진 씨가 못 미덥다는 뜻은 아니고.”
“아니에요! 그냥… 좋으신 분 같아서 말 붙이려고 한 거예요. 환영한다는 뜻으로….”
당황한 낯빛으로 변명을 시작한 의진을 빤히 바라보던 도훈은 고른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환히 웃었다. 의진의 광대가 홧홧해졌다. 이건 애정이라기보단 동경 비슷한 열감이었다. 이렇게 잘생기고 선한 사람을 처음 보면 누구나 그럴 거라고, 의진은 생각했다.
“하하! 의진 씨는 붙임성이 정말 좋네요. 저는 되게 경계할 줄 알았는데 환영까지 해줄 줄이야.”
“…그럼 다행이고요…. 첫인상이 중요한데 너무 바보처럼 보인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다가가기 쉬워서 전 오히려 안심했어요.”
도훈의 다정한 대답에 의진이 푸스스 웃으며 일어났다. 잠시 절전 됐던 기계는 의진의 맨발이 닿자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꽂아놨던 스틱을 쥔 의진은 계기판 가운데 깜빡거리는 불빛에 집중했다.
“…….”
순식간에 훈련에 몰두한 의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훈은 튀어나왔던 볼펜 뒤축을 눌렀다. 잉크가 엉킨 펜 심이 적혀있는 숫자 아래로 다시금 기록을 남겼다. 가이드 지의진, A급, 에너지 생성 능력 A+, 재생 능력 A, 방사 범위 넓음, 1회 유지 시간은 10분 내외. 파트너 에스퍼와 접촉 시 에너지양과 재생 능력은 향상될 것으로 사료됨.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할게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이마께에 맺힌 땀을 닦아낸 의진이 가뿐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훈은 클립보드 집게를 빼내어 기록한 자료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의진 씨,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네?”
“제가 아직 얘기를 튼 분이 별로 없어서요. 점심 식사 같이해도 괜찮을까요?”
도훈의 얼굴은 호의를 불러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선량한 얼굴에 선량한 심성까지. 의진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번 달 식단표까지 프린트해서 갖다 줄 의향이 넘쳐 흘렸다.
“당연하죠! 저희 센터 밥 진짜 맛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식당 중간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갓 지어진 포슬한 볶음밥을 가득 떠 집어넣은 의진은 깨작이는 도훈을 보고 친히 반찬을 숟가락에 얹어주었다.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네, 고마워요.”
의진의 친절에 도훈은 빙긋 웃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스몰토크를 주고받으며 경계의 벽을 차차 허물어가던 중 도훈이 넌지시 대화 주제를 바꿨다.
“의진 씨 파트너분은 여러모로 바쁘시겠네요.”
“으음, 아무래도 그렇겠죠. 많이 불려 다니더라고요. 저도 이렇게 주변에서 달달 볶아대는데… 당사자는 오죽 피곤할까 싶어요.”
허기가 졌는지 숟가락을 움직이는 속도가 재빠르던 의진은 승오 생각을 하니 브레이크가 걸린 모양이었다. 볶음밥 중앙을 벅벅 긁으며 대답하는 어깨가 살짝 늘어졌다. 도훈은 물끄러미 의진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때일수록 의진 씨가 더 힘이 돼주어야죠. 에스퍼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없어서는 안 될.”
“그런가요…. 그렇지도 않은 거 같은데. 아! 승오가 정신계 에스퍼인 거, 아시죠? 요즘 제가 생각이 많아졌는데 승오가 제 생각을 읽어버릴까 봐 좀 쫄리는 것도 있긴 해요.”
정신계, 에스퍼? 도훈은 그 말을 듣고 쥐었던 숟가락을 내렸다. 천음이 죽인 프락치가 미처 캐내지 못했거나 아니면 숨겼거나 했을 정보일 텐데 아무래도 후자가 확실해 보였다. 천음은 고의를 정확히 구분해낼 줄 알았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도훈은 웃으며 마른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제 머릿속을 헤집기라도 한다면, 모든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생각을 읽는 상대를 대할 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되죠.”
도훈의 나긋한 목소리에 의진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예전엔 막 먼저 생각 읽어달라고 보챈 적도 있긴 한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싶네요. 하하….”
볼을 긁적이는 의진을 빤히 보던 도훈은 한 숟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식판을 옆으로 슬쩍 밀어두었다. 좀 더 그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승오 씨와 조금 각별한 사이인가요?”
“네?”
불시에 관계성을 물어오는 질문에 의진의 작은 얼굴이 화륵 불타올랐다. 모두가 아는 사실임에도 도훈에게 확답하려니 괜한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살짝 냉전 아닌 냉전 중이기도 하고.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연인으로 뒤바뀌는 팀이 적지는 않으니까요.”
“그, 그렇죠…. 아무래도….”
“의진 씨가 승오 씨를 말할 때 표정을 보면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에요.”
장난 섞인 도훈의 말에 의진은 손사래를 쳤다. 그 행동은 강한 긍정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웃음기 띤 얼굴로 도훈은 앞으로 어떻게 의진에게 접근해야 할지 방향을 굳혀갔다. 그들이 하는 건 아직은 풋풋하기만 한 애정이었다.
그러나 그게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랑으로 변한다면, 다소 곤란했다. 느껴본 적은 없지만, 사랑은 어떠한 것보다 위대하다고 여러 곳에서 늘 떠들어대곤 했으니까.
그러니 그들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랑을 하기 전에, 승오의 능력이 더 강력해지기 전에 도훈이 손수 잘라낼 생각이었다.
“저, 많이 티 나나요? 그래도-”
“지의진.”
의진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 근처로 승오가 다가왔다. 도훈은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묘한 스파크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