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야.”
“어?”
한가로운 점심시간, 은후가 의진의 평화를 깼다. 소스에 잘 버무려진 미트볼 하나를 숟가락으로 쪼갠 의진이 뭐냐는 의미로 눈을 치켜떴다.
“너, 주승오 얘기 들었어?”
“뭐?”
사귄다는 게 벌써 거기까지 들어갔나. 앞서 걱정한 의진은 봉긋한 광대를 손등으로 매만지며 되물었다.
“S급으로 승격했대.”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의진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말 같지도 않은…. 쥐고 있던 숟가락을 식판에 두고서 종이컵에 담긴 물을 들이켰다. 은후는 의진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새로운 정보를 계속해서 주입했다.
“무슨 소리긴. 네 에스퍼가 승격됐다고! 지금 센터 난리 났잖아. 너는 그것도 모르고 뭐 했냐?”
“지의진.”
승오가 나타나자 은후의 우렁찬 목청이 저절로 쪼그라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의진이 고개를 살짝 올려 들었다. 언제 와있었는지 복잡한 표정을 한 승오가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승오가 식당에 등장하자 시선이 한 곳으로 꽂히는 게 의진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천장에 고정된 수십 개 백색 형광등이 순식간에 무대 위에 매달린 핀 라이트로 뒤바뀌었다. 모든 조명은 승오를 향해 쏠려 있었다.
“어, 승오야.”
“밥 다 먹었어?”
“응. 대충.”
“그럼 잠깐만.”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의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평소에도 승오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지만, 감정이라는 게 있었다. 비언어적 표현이라고 했던가. 기쁠 땐 의진의 눈을 부드럽게 바라본다거나, 화날 땐 시선도 맞추지 않는다거나.
“무슨 일 있어?”
“일단… 방으로 가자.”
하지만,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복잡한 얼굴. 표정에 대한 감상처럼 승오의 머릿속 또한 복잡해 보였다. 곧 방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품에 안았다.
“우리 승오가 갑자기 왜 이러지? 나랑 연애하는 게 그렇게 감흥 없는 일이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승오는 의진을 만나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일단 섹스 시발점을 위한 키스가 아닌 보통의 키스를 먼저 하고 싶었다.
느긋하게 입술을 겹치고 벌어지는 잇새 숨을 느끼며 따뜻하고 물컹거리는 혓덩이를 만끽한 다음 얇은 입술을 번갈아 괴롭히는 그런 귀여운 장난. 색색 호흡을 몰아쉴 때쯤 등급 승격 이야기를 나누며 살을 조물거리는 야살스럽지만, 애정 어린 행위들.
“나 이번에 승격됐어. S급이래. 센터에서 그렇게 갈망하는 등급.”
“그럼 이제 레드카펫…이 아니지 꽃길 걸을 일만 남았는데 왜?”
하지만 등급 심사를 끝내고 곧장 전략 기획팀에 불려가 제안을 하나 받게 됐다. 평소 얼굴 보기 힘든 팀장이 직접 나서서 전한 말이었다.
‘아시다시피 신흥 조직인 도시는 우리를 비롯해 국가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어. 가이드의 납치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정보팀에서 밝혀낸 건 없다고 봐도 될 수준이지. 무슨 말인지 아나?’
또각, 또각. 반질거리는 구두 등이 형광등에 비쳐 순간 반짝였다. 뒷짐을 진 채 승오 주위를 거닐던 그는 존재만으로도 중압감이 상당했다. 승오가 고개를 숙이자 가까이 걸어왔다.
‘도시에 추적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내는 것.’
‘…….’
‘정신계 S급 에스퍼라면 나는 가능할 거라고 보는데.’
‘…….’
‘물론 혼자 수행하게 두지는 않아. 파트너로 붙여진 공식 가이드와 동행해도 좋고, 원한다면 직접 가이드를 채용할 수 있게 해주지.’
승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팀장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어린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사실 제안이라기보다 임무 배정에 가까웠다.
‘에스퍼의 명예를 높일 영광스러운 기회가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조국을 위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부디 최선의 최선을 다 해주게.’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학습된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승오가 고개를 수그리며 답하자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방을 나갔다. 가이드 채용까지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승오는 그 순간 의진을 떠올렸다.
“할 얘기가 있어.”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라 이젠 연인 사이였다. 그렇기에 승오는 의진에게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가이드들을 납치하고, 배를 갈라 장기를 끄집어낸다는 조직이 바로 ‘도시’였다. 신원이 노출된다면 가장 먼저 타겟이 될 사람은 의진일 게 뻔했다.
S급 에스퍼와 100%에 육박하는 가이딩 효율을 보여주는 가이드. 온몸에 꿀을 발라놓은 채 개미집 앞에 내놓는 꼴이었다.
“승오야.”
승오는 제게 안겨있는 의진을 내려다봤다. 이전엔 눈을 맞추는 것조차 조심했었다. 저도 모르게 의진의 생각을 읽게 될까 봐. 의진은 승오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훈련실에서 씻고 오지 말라니까.”
“찝찝한데 어떻게 그래.”
“여기서 씻으라고. 거기 샴푸 냄새 별로야.”
“…다음부터 그럴게.”
평소 같았으면 뭔 상관이냐고 이마나 밀어댔을 승오가 고분고분 의진의 투덜거림을 받아주었다. 그 사소한 변화조차 우리가 연인이라고 인식시켜주는 거 같아서 비시식, 또 한 번 웃음이 새는 의진이었다.
“그리고 원래 훈련 끝나면 알잖아. 우리 항상 하던 거.”
“…….”
승오는 반 뼘 아래서 눈을 빛내는 의진을 보다가 가방을 발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리 무겁지 않은 무게가 풀썩 꺼지자 의진은 곧바로 승오의 점퍼 깃을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인 승오 입술에 초옥, 촉. 쪽. 총 세 번의 짧은 입맞춤을 한 의진이 천천히 멀어졌다.
“어때. 충전이 좀 됐어?”
입술에 닿았던 따뜻한 감촉을 되새기던 승오는 의진의 뒤통수를 살며시 붙잡고 다시 키스했다. 놀란 기색도 없이 벌어지는 잇새로 혀를 미끄러뜨리고 부드럽게 훑어내리니 으응, 하는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살점이 비벼지자 승오는 베베 꼬여있던 머릿속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진과는 숨만 뒤섞고 있어도 심신이 평안으로 가라앉았다.
얇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은 승오는 허리를 펴고 의진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승오의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흩날렸다. 의진도 그 손길이 싫진 않은지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이윽고 소파에 자리한 승오는 의진을 곁에 앉혀두고는 TV를 켰다.
“할 얘기라는 게 뭔데?”
“…….”
요란스러운 자막과 함께 웃긴 장면이 리플레이 되는 과정에서 급하게 속보 뉴스가 겹쳐졌다. ‘도시’ 소행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국가 소속 B급 가이드가 강원도 화천 센터에서 실종됐다는 내용이었다.
“등급을 다시 매기고 나서,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팀장님이랑 얘기를 나눴어.”
의진은 일정한 톤을 유지한 채 속보 브리핑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름 모를 기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실비아 국방부 장관은 ‘도시’ 언급은 또 다른 자극이 될 뿐이라며 언론 보도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근 다른 기관에서…
3분이 채 안 되는 속보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텔레비전에선 우스운 상황극이 이어졌다. 그제야 의진은 다시 승오를 쳐다봤다.
“설마…”
의진의 과한 설렘과 승오의 응축됐던 애정이 결합해 폭발된 결과였다. 누군가는 사랑을 능력 향상의 기폭제라고 했다. 서로의 감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에 비례한 에너지는 상상 그 이상의 것을 창조해낼 것이라고도 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시너지는 절댓값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임무를 하나 받게 됐어.”
승오도 의진과 똑같이 몸을 틀었다. 다소 위험한 동행을 제안해야 해서 그런지 수시로 입이 말랐다. 승오는 테이블에 놓인 탄산수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까 전 나왔던 ‘도시’를 추적하는 일이야. 그쪽 정보가 워낙 없다 보니까 정신계 에스퍼들이 자료 기반을 다져줘야 해.”
“추적?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그 주위를 계속 침투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게 우리의 일이니까.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는 거.”
정부가 이곳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승오도, 의진도 교육생 시절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것이었다.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는 이유도 정해져 있었다. 나라를 위해. 조국을 위해. 평화를 위해.
“그건 그렇지….”
의진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명을 거스른다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찍 죽고 싶지도 않았다. 막말로 자신이 원해서 가이드가 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에스퍼에게 에너지를 부여할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상위 가이드에 들어 서울 센터로 입소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 차라리 개허접한 C급이었으면 좋았을걸. 그럼 한적한 곳으로 배정받아 보이는 풍경이나 즐기고 그런저런 에스퍼들이랑 신나게 떡이나 쳐댔을 텐데. 예상했던 것보다 실력이 월등한 게 문제였다.
“동행할 가이드를 내가 선택할 수 있대. 파트너라 해도 무조건 같이 가는 건 아니고.”
“……응.”
“넌 어때? 난,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암암리에 가이드끼리 도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에스퍼와 가이드를 속속 데려가는 정체 모를 ‘도시’에서 가이드의 능력을 물질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 그 실험으로 가이드가 잔인하게 죽어 나가고 있다는 것.
아까도 국방부 장관은 가이드 실종에 대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었다. 어쩌면 그 구전설화 같은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의진은 덜컥 겁이 났다. 만약 가이딩으로 인해 등급까지 오른 에스퍼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다음 표적은 자신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싸늘해졌다.
“무서워.”
“…뭐?”
“솔직히 말해서 지금에야 뉴스에 나온 거지. 저것도 일부 지역엔 송출되지 않을 수도 있어. 가이드가 사라진 거, 처음 아니잖아.”
“…….”
승오도 알고 있었다. ‘도시’가 뻗치는 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엄지를 입에 갖다 댔다. 여린 살을 툭, 툭 끊어내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너, 등급도 올랐다며. 그걸 ‘도시’에서 알게 됐다고 생각해 봐. 날 잡아다 배라도 가르려 들지 않겠어? 서울에서 실종될 가이드가 내가 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그 말은,”
“정말로 네가 걱정돼. 그런데, 나는 나도 걱정돼.”
“…….”
의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런데도 섭섭함은 좀처럼 숨겨지지 않았다. 이해와 실망이 넘실대는 얼굴은 꽤 복잡해 보였다. 승오가 입을 꾹 다물자 의진은 금세 생채기가 난 엄지를 입에서 빼내었다.
“모르겠어, 승오야. 너를 보내고 싶지도 않고, 죽으러 가고 싶지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