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 너와 함께한 어느 날 (18/19)

외전 2 : 너와 함께한 어느 날

칼바람이 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포근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열어 둔 창으로 사근사근한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화준은 손에 낀 장갑을 벗고 텅 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시온과 1년 넘게 산 이 집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공간이 익숙해지고, 시온과 가까워지고. 이 집 안에서 웃고 울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의미가 있는 집을 떠나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해?”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기는 느낌에 화준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늘 딱딱하고 단정한 슈트만 고집하던 시온이 오랜만에 편안한 옷차림으로 집 안을 활보했다. 헤어 제품을 발라 고정하던 머리카락도 자연스럽게 이마 아래로 흩어져 있었다. 10년은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에 화준이 작게 웃었다.

“왜 웃어?”

“형이, 귀여워서요.”

“형이라고 하니까 좋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라 화준이 멋쩍게 웃었다. 잠시 시온을 떠난 이후로 시온 씨라고 부르던 호칭이 다시 전무님으로 돌아왔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침대 위에서 시온이 기발한 호칭이 떠올랐다며 삽입 직전 정신없는 화준에게 말을 걸었다. 온몸이 달아올라 정신없이 뜨거운 숨만 뱉어 내는 화준에게 형이라고 불러 보라며 형 타령을 시작했다. 아래에 귀두만 살짝 넣었다가 몸을 뒤로 물리고는 불러 보라며 재촉에 재촉을 거듭했다.

화준은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시온이 형.”이라고 불렀더니 그 결과 며칠 허리가 뻐근한 채로 지내야 했다. 그런데 형이라는 호칭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시온 씨’라고 부를 때는 왠지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형이라고 부르니 왠지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한번은 화준이 잠에서 덜 깬 채로 “형아~.” 하고 불렀더니 시온이 미친놈처럼 달려들어 입술을 덮쳤다. 호칭, 그게 뭐라고……. 화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짐은 다 나간 건가요?”

“어. 아쉬워?”

“조금요.”

“그래도 공시온 주니어는 엄청나게 좋아하던데.”

공시온 주니어라는 말에 화준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온이는 몸집이 커질수록 어째 하는 짓이 시온과 똑 닮아 갔다. 화준에게 집착을 보이는 것도, 잠이 없는 것도, 취향이 확고한 것도 모두 시온과 똑 닮았다. 사실 이사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모두 온이 때문이었다. 온이를 데리고 산책은 다니고 있지만 답답한 집 안에서 지내게 하는 게 늘 마음이 쓰였다. 제주도의 별장은 넓은 마당이 있어서 온이는 늘 신나게 뛰어놀았다. 가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때가 그리운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시온이 먼저 이사를 제안했다. 전원주택으로 이사하는 게 어떻겠냐고.

“이삿짐 차 움직이네. 우리도 출발하자.”

“네.”

“새로 산 침대가 튼튼한지도 테스트해 봐야 하니까 저녁때까지 정리를. 도화준!”

화준이 얼른 시온의 품을 벗어나서 저만치 달아났다.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뒤를 돌아보는 화준의 얼굴에 편안함이 묻어났다.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고 고비를 넘긴 후 맞이한 편안함이었다. 시온은 집 안을 빙 둘러보며 처음 화준을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런 관계가 될 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저 필요에 의한 관계라고만 생각했는데…….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화준과 함께 있으면서 제 생활도 많이 안정되어 갔다. 마음이 넉넉해져서 그런지 조급함이 없었다. 정혁을 떠나 보낸 뒤 한동안 업무 마비가 오긴 했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빈자리를 인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일을 진행하고 처리했다. 다만 빈자리를 인정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다. 박정혁이 꽤 오랜 시간 자신을 보필하며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힘을 실어 준 일이 제법 많았다는 걸, 그가 떠나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자신을 위해서 힘써 준 그였다. 그때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을 때 시온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고 그를 밀어 냈어야 했다.

“형, 빨리 내려오세요.”

열어 둔 창문으로 화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시온은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준이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사를 하는 기분이 퍽 이상했다. 늘 혼자서 이사를 했던지라 누군가와 함께 이사를 하는 게 어색했다. 하지만 그게 나쁘거나 싫지 않았다. 도화준이라면 그와 함께하는 모든 게 다 좋았으니까.

* * *

화준은 원목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온이가 마당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집으로 이사한 지 나흘이 지났고 밤마다 침대를 테스트한다는 명목하에 시온의 아래에서 괴롭힘을 당한 게 나흘이었다. 뻐근한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화준 씨.”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미 온이가 그녀에게 달려가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

“뭐야, 사람 초대해 놓고 이렇게 넋 놓고 있는 거예요?”

“죄송해요. 제가 요즘 피곤해서.”

해령은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아양을 피우는 온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혓바닥을 내밀어 해령의 뺨을 핥는 온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커피 드릴까요?”

“아니요. 오래 못 있어요. 잠깐 화준 씨 얼굴 보고 건강 체크 좀 하려고 왔어요.”

“건강이요?”

해령은 온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을 뒤적였다. 상담 수첩을 꺼내고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화준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정신적으로 호전을 보인다고 해도 꽤 오랜 시간 세뇌를 당하고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했다.

“요즘 기분은 어때요?”

“이사하고 나서 좀 정신이 없었지만, 그냥 편안한 거 같아요.”

“공 전무님이랑 관계는 좋아요?”

“네, 좋아요.”

“최근에 생긴 큰 변화 같은 건 없어요? 걱정되는 일이나 힘든 일 같은 거?”

“음, 변화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전무님을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해령은 펜으로 글씨를 휘갈기다가 고개를 들어 화준을 바라보았다. 워낙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다 하던 사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그의 목소리에 설렘이 잔뜩 묻어났다. 아이처럼 기뻐한다고 해야 할까. 해령은 그의 표정을 세심하게 수첩에 메모했다.

“그리고 개강을 해서 바빠질 거 같아요.”

“전무님이 또 수면제를 처방받으러 오시겠네요.”

매일 밤늦게까지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는 화준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 작년에는 직접 수면제를 처방받아 간 시온이었다. 해령은 가볍게 웃고 수첩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워낙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화준이라 사실 질문할 것도 없었다.

“화준 씨, 나 남자 친구 생겼어요.”

“진짜요? 어떤 사람이에요?”

화준이 눈을 반짝이며 몸을 당겨 앉았다.

“내과 의사예요. 대학 동긴데 선우 병원으로 옮기면서 다시 만났어요. 알고 보니까 요놈이 나를 예전부터 좋아했다는 거 있죠.”

“선생님도 그분 좋아해요?”

“음, 나쁘진 않아요. 착하고, 매너 좋고, 돈 잘 벌고, 인성 좋고.”

“완벽한 거 아닌가요?”

해령은 화준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음, 이게 좀 별로예요. 나 심각한 얼빠거든요.”

해령이 손바닥을 펼쳐 턱 밑에 대고 두어 번 흔들었다. 아……. 화준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건 전무님이 완벽하죠. 잘생겼지, 돈 많지, 매너 좋지, 화준 씨한테 잘하지, 키도 크고.”

“전무님은 성격이 좀 괴팍해요.”

“괴팍하다고요?”

해령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화준은 진심이라는 듯이 비장하게 주먹을 쥐고 테이블을 두드렸다.

“삐지기는 또 얼마나 잘 삐지는지 몰라요. 마음이 요만해서 제가 무슨 말만 하면 삐져요.”

“전무님, 의외다.”

“대외적인 이미지에 다들 속고 계신 거죠.”

“항상 화준 씨한테 다 맞춰 주고 챙겨 주고 하는 것만 봐서 잘 몰랐네.”

화준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다 시온의 진짜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소심하고 쪼잔한지. 그리고 괴팍한지. 두 팔까지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시온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삐지는 이유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래서 삐지고 저래서 삐지고. 성격도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아까는 좋았다가 지금은 나빴다가 당최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요.”

그런데 해령은 난감한 얼굴로 화준의 뒤에서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시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화준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시온을 험담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시온은 그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해령이 안 되겠다 싶어 화준을 말리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 시온이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가로 가져갔다.

미치겠네! 정말!

“그래도 막 싫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그치?”

“그렇긴 한데, 너무 자주 삐지면 얼마나 피곤한지 아세요? 달래 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툭하면 삐져요, 아주.”

해령은 본능적으로 가방을 집어 들고 품에 안았다. 여차하면 뛰어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시온이 뒤에서 화준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해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화준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시온을 올려다보고 또 밖으로 달려나가는 해령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잘 삐져?”

“……형아, 그게 아니라요.”

화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시온은 어깨를 감싸 안고 화준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어쩐지 집 안으로 들어가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화준은 문 앞에서 문손잡이를 붙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저, 안 들어갈래요. 싫어요.”

“나 진짜 삐진다.”

화준은 문손잡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니,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퇴근할 시간은 절대 아니었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냐고. 화준은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힘으로 버티겠다는 건가?”

“형, 제발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무 말도 안 했으면 들어와.”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음…….”

문손잡이를 붙잡고 시작된 실랑이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결국, 시온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화준을 번쩍 들어 안는 순간, 문 앞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시온은 얼른 화준을 바닥에 내려놓고 바로 섰다.

“아버지.”

화준 역시 놀란 얼굴로 공 회장을 바라보고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화준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똑바로 섰다. 공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쳐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로 시온의 어머니가 굳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온은 얼른 화준의 손목을 붙잡고 공 회장의 뒤를 따랐다. 일언반구도 없이 갑자기, 그것도 이사한 집으로 찾아온 게 불안함을 가중했다. 화준은 아예 얼어붙어 멍한 얼굴로 시온이 이끄는 데로 발만 굴렀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둘 다 앉아라.”

시온은 화준을 데리고 공 회장의 좌측에 나란히 앉았다. 맞은편에는 한 여사가 한심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에 화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기사가 나고 단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도 들지 못하는 화준을 바라보던 공 회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시온이 네놈은 뭐 하느라고 집에 한번 오질 않아!”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저에게 부양 가족이 생겨서요.”

“뭐! 이놈이!”

공 회장의 손이 허공으로 들렸다가 이내 내려왔다. 다 큰 자식 놈을 팰 수도 없고 입이 말랐다. 도 사장이 구속되기 전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의견을 전했음에도 시온은 삐딱선을 탔다. 강제로 이혼을 시키고 도화준을 빼돌린 것에 대해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건지. 기가 막혔지만, 공 회장은 잠자코 시온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코빼기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 보여 주지 않았다. 풍족하고 편안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이 무슨 날벼락인지. 참담한 현실에 혀를 내둘렀다. 잠자코 앉아 있던 화준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도화준!”

시온이 놀라 화준을 말려 보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한테 욕하셔도 되고 때리셔도 괜찮습니다.”

“차라리 욕을 하세요. 때리시진 마시고.”

“형! 가만히 있어요.”

시온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공 회장은 팔불출 같은 아들놈의 모습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두 분을 속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평생 사죄하면서 살겠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자꾸 목이 메었다. 두 분께 받은 사랑이 하해와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는 것조차도 죄송스러웠다. 저질러 놓은 일을 용서받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사죄드리고 싶었다.

“일어나거라.”

“하지만…….”

“시온이 저놈 얼굴 보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찾아온 것뿐이다. 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놈이 이렇게 무책임해서야, 원! 그리고 나는 널 그때 제주도로 보내고 난 뒤에 다 용서했다. 네가 우리 집에 와서 보여 준 진심이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그걸로 됐다. 마음 쓰지 마라.”

공 회장은 화준을 제주도로 보내고 마음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늘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던 화준의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나중에 모든 일을 다 듣고 나서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그래서 둘 사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인정해 줄 생각이었다. 남들에게는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집에서라도 그들의 관계를 인정하고 보듬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으니.

“아버지, 진심이십니까?”

시온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다른 단어는 다 기억이 안 나도 ‘용서’라는 단어 하나만은 또렷하게 뇌리에 남았다. 하지만 일전의 일로 앙금이 남은 시온의 귀에는 곱게 들리지 않았다.

“나도 네 아버지와 같은 생각이다. 아휴, 어린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를 보면서 얼마나 죄스러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저 어린것이 얼마나 무서웠겠어.”

“……죄송합니다.”

한 여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화준에게 다가가 두 손을 붙들었다. 자식이라는 게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정략결혼을 시킨 것도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괘씸하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생각해 보니 저 아이 또한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었다.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차라리 악랄하고 못된 놈이었으면 그냥 욕이나 실컷 하고 잊어버리겠지만, 너무 착한 아이라 그러지도 못했다. 계속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았다. 또 아들놈이 좋다는데 그게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떠랴. 망측스럽고 이해도 되지 않는 관계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내 아들 녀석의 행복.

“아들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할 테니, 집에 와서 밥도 먹고 해. 그리고…….”

“…….”

“엄마 보고 싶으면 와도 돼.”

“감사, 감사합니다…….”

“우리 시온이가 때리면 엄마한테 전화하렴.”

한 여사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저 아이의 몫이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건 분명하지만 제 자식이 저리 좋아하는데 그거 하나 못 져 줄까 싶었다.

“어머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때린 건 제가 아니라…….”

시온은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때리며 답답함을 호소했지만 한 여사는 시온을 향해 눈을 흘겼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 죄송합니다.”

“네가 무슨 죄겠니. 어른들의 욕심에 희생당한 거지. 괜찮다, 아가.”

화준을 바라보는 한 여사의 눈빛에는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린 화준을 한 여사는 품에 안았다. 화준은 따뜻한 품에서 서럽게 울었다. 좋으신 분들을 속였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쏟은 화준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한 여사는 눈가를 손으로 다정스럽게 닦아 주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러자 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다 큰 성인 남자 엉덩이를 두드리십니까.”

“형!”

“으이그, 속이 저리 좁아터져서 저걸 어디다가 쓸꼬.”

공 회장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온은 그러거나 말거나 화준의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옆으로 당기고 퉁퉁 부은 눈부터 확인했다.

**이게맞다**

한 여사는 사람을 불러 준비해 온 음식들을 나르라고 명령했다. 곧 식탁 위에 수십 개의 반찬 통과 냄비 두 개가 놓였다. 화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한 여사는 그중 몇 개를 뒤적거리더니 화준이 평소에 좋아하던 멸치볶음과 진미채볶음 뚜껑을 열었다.

“우와, 맛있겠다.”

“이건 해물탕이야. 저번에 왔을 때 잘 먹길래.”

“감사합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엄마한테 연락해. 보내 줄 테니까.”

화준은 또다시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화준은 한참이나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온이가 놀아 달라고 옆에 와서 낑낑거려도 그걸 알아채지 못할 만큼 넋이 나가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제 뺨을 꼬집어 봤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이렇게 빨리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배웅하고 들어온 시온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화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방문에 놀라기는 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하는 일이었다.

“괜찮아?”

“마음이 무거워요.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고.”

“다 잘된 거야.”

시온은 화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가득한 반찬 통을 차곡차곡 쌓아 냉장고로 옮겨 넣었다. 화준의 마음이 무거운 것처럼 시온의 마음 역시 무거웠다.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정리를 마친 시온이 맥주를 하나 꺼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화준.”

작은 목소리로 불렀음에도 화준이 이내 알아듣고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바닥에 앉아 있는 시온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맥주를 꺼내 그의 곁에 주저앉았다. 말없이 맥주 캔을 따 입가로 가져갔다. 서로 맥주 한 캔을 비울 때까지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빈 캔을 손아귀에 쥐었다가 떨어뜨린 시온이 새로운 맥주를 꺼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제가 잘할게요.”

“…….”

“형한테도, 어머니 아버지께도 제가 잘할게요.”

시온은 픽― 웃음을 흘리고 화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도화준을 만난 건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에게 반응해서 마음의 꽃이 피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모든 순간순간이 다 소중했다. 성장해 나간다는 건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화준은 그 의미 있는 일을 한 걸음씩 해 나갈 것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화준과 함께 있으면 시커멓게 그을린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시온은 화준의 손을 꽉 쥐었다. 다시는 놓고 싶지 않은 손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감사합니다.”

“그런데…….”

“……?”

“내가 그렇게 잘 삐져?”

화준은 시온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손을 뿌리치고 거실로 내달렸다. 시온은 캔 맥주를 내려놓고 화준의 뒤를 쫓아 달렸다.

“잡히면 오늘 안 재운다. 각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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