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 Epilogue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시온의 말대로 우리는 싸우고, 화내고, 웃고, 떠들고 서로 사랑하며 시간을 함께했다. 그러는 사이 시온의 곁에는 새로운 비서가 생겼다. 정혁의 부재에 대해서 화준이 집요하게 물었지만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국에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혁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나. 아니, 돌아오더라도 시온의 곁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평화로운 나날들 가운데 화준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변호사와 오랜 논의 끝에 호적 정정 신청을 하기로 했다. 이미 시온이 제 성별에 대해 세상에 폭로해 놓은 상태라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단 하나, 부모 동의서가 문제였다. 시온은 이런 동의서 따위가 왜 필요하냐며 변호사를 닦달했지만, 꼭 필요한 서류라는 단호한 대답만 돌아왔다. 화준은 용기를 내서 동의서를 받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면회를 거부당했다.
결국,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화준은 침대에 누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신 여사의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는데 그쪽으로 한번 가 보는 건 어때?”
시온이 베개를 밀어 내고 제 무릎을 내주며 물었다.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넘겨 주며 부드럽게 묻는 음성에 화준은 눈을 깜박였다.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병든 분이었다. 화준이라는 이름보다 화경이라는 이름에 더 집착한 그녀였기에 약간 겁이 났다.
“아마 허락 안 해 주실 거예요.”
“밑져야 본전이지. 내일 시간 비워 놓을 테니까 같이 가.”
화준은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 때문인지 눈만 감으면 자꾸 악몽에 시달렸다. 결국, 퀭한 얼굴로 눈을 뜬 화준은 비실비실 욕실로 향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자, 시온이 침대에 누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온이가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리 와.”
“빨리 다녀오고 싶어요.”
사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서 여유가 없었다. 불안한 얼굴을 한 화준의 말에 시온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시온을 기다리는 내내 화준은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어머니를 만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거의 보지 못했고 일이 터지고 나서는 아예 보지 못했다.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고서야 시온이 욕실에서 나왔다. 시온은 그런 화준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한빛 정신 병원. 화준은 고개를 들어 병원 이름을 확인하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격리 병동에서 나와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증거였다. 병실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시온이 묵묵히 손을 잡아 주고 있지만 떨림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병실 앞에서 도착하고 나서도 화준은 한참을 망설였다. 보다 못한 시온이 손을 꾹 쥐었다가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떨지 마.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화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 문을 두드렸다. 환한 햇살이 드는 병실 안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다. 침대 위에 하얀 환자복을 입고 앉아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신 여사는 전보다 많이 야위긴 했지만,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어머니.”
“……화준아.”
심장이 발아래로 덜컥 떨어졌다. 늘 화경이라고 부르던 어머니였다. 단 한 번도 화준이라고 불러 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제 이름을 불러 줄 거라 상상하지 못해서였는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신 여사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화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네 엄마로 살지 못해서 미안해.”
“어, 어머니.”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화경이는 죽었는데 왜 그걸 인정 못 했는지, 왜 너한테 그렇게 큰 상처를 주었는지. 미안하다.”
화준은 어머니를 안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미안하다고 사과한 어머니는 시온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 시온은 화준에게 괜찮겠냐고 몇 번이나 물어본 뒤 병실에서 나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어머니가 화준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내 욕심에 널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죽으려고 결심을 했어. 그래서 병원에 이야기해서 네 아빠를 만나러 갔단다. 그날 네 아빠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화경이가 죽고 나서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지.”
고백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회한이 서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고여 있는 눈물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어머니는 떨어지는 눈물에 다급히 눈가를 두드렸다.
“네 앞에서 주책이다. 호적 정정 신청을 할 거란 소리는 들었다.”
“저는 화경이가 아니라 화준이잖아요.”
“그래,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해 줄게. 너도 이제 네 인생 찾아 살아야겠지. 그리고 화준아…….”
“…….”
“엄마도 아빠도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제 다신 찾아오지 마라.”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마음이 이상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부모의 늪에서 막상 빠져나오려고 하니 개운한 마음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답답했다. 품 안에 넣어 둔 서류를 꺼내 어머니께 내밀었다. 빨리 이 병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머니는 펜을 들어 필요한 내용을 채우고는 다시 화준에게 내밀었다. 화준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가 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종이를 접어 다시 품 안에 넣은 화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병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마음이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숨쉬기도 곤란할 만큼.
“화준아.”
막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려던 화준의 손이 멈추었다. 다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울컥 치미는 감정에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화경이가 죽은 건 사고였어. 네 잘못이 아니야. 죄책감 같은 게 아직 남아 있다면 여기에 다 놓고 가렴.”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토록 듣고 싶어 한 말이었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그건 사고였다고. 화준의 몸이 바닥으로 털썩 내려앉았다. 기어코 눈물이 터지고 서러웠던 지난날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왜 이제야 인정하시는 건데요! 차라리 평생 인정하지 말지! 내 탓이고 나 때문에 화경이가 죽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사시면 제가 원망이라도 하죠. 이제 와서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요. 나는……!!”
화준의 고함에 시온이 병실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화준을 발견한 그가 몸을 부축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차마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화준은 울부짖었다.
“끝까지 이기적이시네요. 사람이 어쩜 그렇게 한결같으세요!!”
“화준아, 엄마는 그게 아니라…… 네가 조금 더 편안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에…….”
“용서 같은 거 못 해요. 절대 안 해요!!”
화준은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선명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 병실을 빠져나왔다. 탁―. 시온이 따라 나와 병실 문을 닫았다.
“괜찮아?”
화준은 고개를 저으며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화경이 죽은 건 분명히 사고였음에도 어느 순간 모든 화살은 화준에게 쏟아졌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버거운 죄책감이었다.
‘너 때문에 화경이가 죽었어. 네가 그때 장난감을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화경이는 죽지 않았어. 너 때문이야, 너! 너 때문이라고!’
그 죄책감은 몸이 자라고, 생각이 자란 후에도 무게가 줄기는커녕 더 버겁게 다가왔다. 어머니가 미쳐 버린 것도, 아버지가 돈만 밝히는 욕심쟁이가 된 것도 모두 화경을 죽인 자신의 탓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그 죄책감 때문이라고.
지금에 와서 그걸 사고라고 인정하는 어머니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화준은 끅끅 서러운 눈물을 쏟아 내며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시온이 말려 보려 했지만 화준은 막무가내였다. 손이 터져서 피가 바닥을 적실 때까지 그는 눈물을 쏟으며 큰 소리로 울었다.
* * *
오른손에 하얀 붕대를 감은 화준이 담담한 얼굴로 법원으로 향했다. 시온은 가만히 화준의 손을 잡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담담한 척해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법원 앞에는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시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서류를 움켜쥐고 차에서 내렸다. 시온이 등장하자 뒤따라온 차량에서 경호원이 내려 재빨리 그를 둘러쌌다. 기자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면서도 연신 셔터를 눌렀다.
“법원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법원에는 왜 오신 거죠?”
시온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빙 둘러싼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의문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시온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오늘 시온이 맡은 임무는 기자들의 시선을 끌어모아 화준이 편히 법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도화경과의 혼인 무효 소송을 진행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이혼하신 걸로 정리가 된 게 아닙니까?”
“정리는 됐습니다만, 불쾌한 마음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 결혼을 아예 없었던 걸로 만들 생각입니다.”
“오늘 도화준 씨가 호적 정정 신청을 한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시온은 기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계단을 밟아 올랐다. 경호원들이 기자들의 진입을 막으며 승강이를 벌였다.
시온이 기자들의 발을 묶어 놓는 동안 화준은 변호사와 함께 후문을 이용해 법원으로 들어섰다.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인지를 붙인 서류를 접수하고 마지막으로 서류를 확인하는 직원의 얼굴을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며 화준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접수 확인증이 들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온이 터벅터벅 다가와 화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도화준.”
그로부터 6개월 후, 화준의 호적은 도화경이 아닌 도화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주민 등록증도 새롭게 발급되었다. 2였던 숫자가 1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렸다. 도화경의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 신분을 찾은 도화준의 삶이 시작되는 경이로운 날이었다.
죽음을 인정받지 못한 채 25년을 고통받았던 그녀에게 이름을 돌려주고 본래의 성과 이름을 찾은 나는 도화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