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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 그래서 난 미쳤다 (15/19)

Chapter 14 : 그래서 난 미쳤다

신성 건설은 하루아침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시온은 신성 건설의 비리를 하나씩, 하나씩 세상에 공개했다. 아파트 공사 중 인부가 사망한 사건을 시작으로 업무상 횡령 및 배임, 부실 공사, 비자금, 불법 자재 사용 등등 도창현의 시커먼 속을 샅샅이 파내어 만천하에 공개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바로 도화준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선우 그룹에서는 즉각 정략결혼임을 실토하고 도화준이 남자인 사실은 전혀 몰랐다며 도리어 피해자라고 입장 표명을 했다. 선우 그룹 대응 팀에서는 기사를 덮기 위해 아이돌 열애설과 모 연예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터뜨렸지만 이미 도화준에게 쏠린 시선은 쉬이 흩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시온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상황을 보고받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이 연신 깜박였다. 공 회장이 비서실이 아닌 개인 전화로 계속 전화를 걸어 오고 있었다. 시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피곤함에 얕게 두통이 일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신문을 끌어다가 머리기사를 읽었다.

「도화준, 그는 희대의 사기꾼인가, 아니면 가련한 돈의 희생양인가?」

빌어먹을―. 시온은 조용히 신문을 내려놓았다. 얼마 전부터 공 회장의 개들이 시온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드림팀 사무실로 걸음 하지 않았다. 갑자기 공 회장의 수하들이 움직이는 게 수상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시온은 화준을 추적하던 사람들에게 몸을 숨기라고 지시하고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처럼 연기했다.

드림팀은 새벽 시간을 이용해 시온의 집 위층으로 거처를 옮겼다. 새벽 내내 드림팀 회의를 하고, 두어 시간 눈을 붙였다. 회사는 늘 제시간에 정상적으로 출근했다. 철저히 공 회장을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제, 마침내 공 회장이 마음을 놓았는지 수하들은 철수했다. 시온은 주위에 따라붙는 차량과 시선이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위층으로 향했다.

“전무님, 이것 좀 보십시오.”

문을 열자마자 윤민이 다급하게 달려와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시온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윤민은 시온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서류철을 펼쳐 내밀었다. 시온은 서류철을 힐끗거리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고 서류철을 낚아챘다. 종이에는 화준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메일 내용을 인쇄했는지 상단에는 보낸 이의 이름과 메일 주소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스타 뉴스?”

“네. 인원 철수하면서 친한 기자들 몇한테 말을 흘려 놨더니 바로 제보가 왔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제주도라고 합니다. 모슬포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꼬박 한 달 만이었다. 시온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드디어 꼬리를 밟았다. 해외에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제주도라니……. 한 달 동안 전국을 이 잡듯이 뒤져도 잡히지 않던 그가 기자의 눈에 포착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시온은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기자가 도화준을 알아보고 사진을 찍을 정도면 그가 그만큼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요즘 시온은 도화준의 호적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도화경이 아닌 도화준으로 돌려 주고 싶었다. 그게 그가 가장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도화준이 돌아와 호적 정정 신고를 한다면…… 화준은 비난의 화살을 받고 희대의 사기꾼으로 낙인찍힐 게 뻔했다.

고민이 깊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도화준이 받을 타격을 줄일 수 있을까. 그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떨까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어차피 이 일이 세상에 공개되면 도화준은 수면으로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역시 도창현과 같이 싸잡혀서 욕을 먹을 게 뻔합니다.”

“…….”

“아예 이 일도 함께 터뜨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런저런 이슈들과 함께 터진다면 조금이라도 타격을 덜 받을 테니까요.”

시온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득과 실을 계산했다. 생각은 길게 이어졌다. 도화준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도화준은 얼마 전 자신과의 이혼으로 구설에 올랐고 이번 일이 터지면 어차피 언급될 것이다. 대중의 뭇매를 맞을 때 한꺼번에 맞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한꺼번에 기사가 터지고 자기 일까지 기사화된다면 도화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요?”

“……일단 도화준에 관한 언론 자료는 미리 준비해 놓으세요. 풀지 안 풀지는 나중에 결정하겠습니다.”

깊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종이 위에 인쇄되어 있는 도화준은 생각보다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구나. 내 곁에서 떠나면 숨죽여 울기만 할 줄 알았더니. 씁쓸한 마음과 안도하는 마음이 섞여 속이 시끄러웠다.

삑―. 내선 전화 알림 소리와 함께 시온은 정신을 차리고 저도 모르게 입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손을 뻗어 내선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 강해령 씨라는 분이 전화 연결을 원하십니다.

“강해령? 연결해요.”

뒤집어 둔 휴대폰을 끌어당겨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부재중 목록에 강해령의 전화번호가 네 개나 찍혀 있었다. 시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가 놓았다. 그와 동시에 내선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공시온입니다.”

- …….

“강해령 씨?”

- 저…….

통화 목록을 건조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시온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도화준?”

- …….

“너, 도화준이지? 그렇지?”

-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어디야? 어떻게 지내? 아픈 데는 없어?”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어 오는 숨소리에 시온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꼬박 한 달 만에 걸려 온 전화였다. 조급한 마음에 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풀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듣고 있어?”

- 온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욕합니다.

“욕먹을 짓을 했으니까. 넌 아직도 그 빌어먹을 집구석에 미련이 있어?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 저도 압니다. 아는데!! 그래도 제 부모님이잖아요. 전무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잖아요. 신성 건설 건드리지 않겠다고, 지원해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시온은 서랍을 열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고 필터를 이로 짓씹었다. 말도 안 되는 약물에, 옷에, 학대에, 고유의 성(性)까지 버리게 한, 부모라는 이름이 가당치도 않은 것들을 부모라고 칭하는 화준에게 화가 치밀었다.

“내 말, 똑바로 들어. 네가 남자라는 사실을 내 아버지께 알리고 돈을 뜯어 간 게 도창현이야. 나한테서 더 이상 돈이 나오지 않으니까 내 아버지를 찾아간 거라고. 게다가 박 비서까지 꼬드겨서 널 협박하게 했어……. 널 불안하게 했던 모든 일은 네 아버지가 계획한 거야.”

- 마, 말도 아, 안 돼.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어 오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지 거친 숨소리가 전해졌다. 시온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래도 그들이 네 부모야? 돈에 자식을 파는 게 부모냐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도대체 언제까지 그들의 그림자 속에 갇혀서 살 거야. 아직 넌 그 우물에 살고 있어! 그 지긋지긋하고 좁은 그 우물에 살고 있다고!!”

- 거, 짓말, 거짓말!! 하지 마세요.

화준의 울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시온은 낮게 신음했다. 그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손에 쥔 담배를 꺾어 재떨이에 던져 넣고 숨을 골랐다.

안타깝기도 하고, 등신 같기도 하고 정말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 깔린 그리움이라는 놈은 연신 도화준을 불렀다.

보고 싶다고. 보고 싶어 죽겠다고.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 네가 어딨는지 다 알아.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널 끌고 올 거야.”

- 전무님, 아니라고 해 주세요. 아버지가 그런 게 아니라고, 아니라고 해 주세요.

“도화준, 정신 차려.”

- 나는 그래도, 난, 자식이잖아. 씨발, 내가 자식이잖아!! 내가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해. 얼마나 더!

“화준아, 도화준.”

끅끅― 울음을 삼켰다가 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가 감당이 되지 않아 또다시 놓아 버리는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한참 흐느껴 울던 화준이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

힘겹게 울음을 삼키는지 말이 뚝뚝 끊어져서 들렸다. 시온은 얼른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마음 같아선 데리러 가고 싶지만, 회사에서 추이를 지켜보며 즉각 대응해야 하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은 시온이 유일한 컨트롤 타워였다.

“네가 원하면 뭐든 다 해 줄 수 있어. 오기만 해.”

- …….

“보고 싶어.”

* * *dda

화준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울음을 쏟아 냈다. 문밖에 있는 해령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화준을 불렀지만, 거기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서러웠다. 정말 완벽하게 부모로부터 내쳐진 것 같아서 눈물이 쏟아졌다. 부모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극악무도할 수 있을까. 만약 자신이 죽고 화경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됐을까. 삶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해도 이 답답하고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내 말 똑바로 들어, 네가 남자라는 사실을 내 아버지께 알리고 돈을 뜯어 간 게 도창현이야. 나한테서 더 이상 돈이 나오지 않으니까 내 아버지를 찾아간 거라고. 게다가 박 비서까지 꼬드겨서 널 협박하게 했어……. 널 불안하게 했던 모든 일은 네 아버지가 계획한 거야.’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제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어떻게 부모가 돼서 돈에 자식을 팔아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돈을 챙기자고 치부까지 들출 수가 있을까. 이제는 정말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자신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공시온.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난 자신을 기다리고 보고 싶다고 말해 주는 사람은 오직 그 사람밖에 없었다.

화준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어지러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정말 세상을 향해 두 다리로 올곧게 혼자 서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었다. 성별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도 시온이 밝혀 줘서 오히려 홀가분했다. 시온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아버지를 만나서 확실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질긴 연도 끊어 내고 싶었다. 화준은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별장을 떠나기 전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화준은 마음을 정리하고 곧장 공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지루한 연결음 끝에 기계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공 회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벌써 세 번이나 했지만 공 회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전화를 다시 걸었다. 마침내 공 회장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 바쁘다.

“바쁘셔도 들으셔야 합니다. 회장님과 저와의 계약은 이미 깨진 것 같습니다. 신성 건설의 안위를 보장해 주신다고 해서 전무님과 헤어졌는데, 신성 건설이 박살이 났습니다.”

- 너! 시온이 녀석이 망가지는 걸 보고 싶은 게냐.

“회장님…… 전무님 그냥 망가뜨리세요. 그리고 망가진 그분, 저한테 주세요.”

- 이놈이!!

공 회장의 노성에 화준은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전화기를 붙잡은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래도 준비한 말을 모두 끝내고 싶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고쳐서 써 볼게요. 그분이 고장 난 절 고쳐 쓴 것처럼 저도 그렇게 해 볼게요.”

* * *

“정말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그럼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아니다, 그냥 무조건 연락해요.”

해령은 화준을 붙들고 신신당부를 했다.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전 한참을 방에 틀어박혀 울던 그가 갑자기 서울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짐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그는 별말 하지 않고 휴대폰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보는 건 모두 신성 건설에 관한 기사들이었다.

금방이라도 과호흡을 일으킬 것처럼 호흡이 불안정해서 해령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화준을 관찰했다. 화준은 온 힘을 다해서 정신을 다잡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우리 온이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요.”

이동장 안에는 온이가 낑낑대며 새카만 눈동자로 화준을 바라보았다. 앞발로 철창을 긁는 게 안쓰러웠다. 화준은 이동장을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열고 온이를 꺼내 품에 안았다. 연신 낑낑거리며 애처롭게 바라보는 게 마음에 쓰였다.

“온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어. 금방 데리러 올게.”

낑낑―. 온이가 싫다는 양 머리를 손바닥에 비비고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불안해하는 온이를 한참 안아 주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해령과 인사를 나누고 크게 숨을 마셨다. 이제 정말 시온을 만나러 간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북적거리는 로비를 바라보며 화준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지내다 보니 공항에서도 그렇고, 여기에서도 그렇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후, 화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흔들리는 시선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사장실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두근거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하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페인트를 퍼부어 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번졌다. 호기롭게 지르긴 했는데……. 모자를 한번 벗었다가 다시 눌러쓰고 숨을 골랐다. 긴장감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이사장실 앞은 고요했다. 비서가 있어야 할 데스크는 텅 비어 있었다. 화준은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소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시온이 서 있었다. 검은색 슈트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화준.”

시온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꾹꾹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화준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시온의 얼굴을 감쌌다. 한 달 사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살이 내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숨이 막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떠나지도 않았을 텐데. 어리석었다.

그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원망하며 화준은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왜 울어?”

눈물부터 쏟아 내는 화준의 머리를 감싸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뜨겁게 품 안에 안겨 오는 그의 몸을 느끼고 나서야 긴장감과 불안감에 미칠 것 같았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됐다. 이제 다 됐다. 시온은 모자를 눌러쓴 머리 위로 입술을 찍어 누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준이 사라진 그곳, 오키나와 이시가키 공항에서 멈추어 있던 시온의 시간이 지독한 침묵을 깨고 그제야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심장이 화준의 심장에 반응하고, 한동안 죽어 있던 눈이 또렷하게 화준을 담아냈다. 고작 한 달이 꼭 10년 같았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무의미했고, 힘겨웠다.

“저, 전무님.”

“또 직함으로 부르네. 힘들게 고쳐 놨더니.”

“죄송,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네 발로 돌아왔으면 난 그걸로 됐어.”

됐다는 말은 마치 마법 같았다. 화준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꽉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코끝에 감도는 시온의 향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그토록 그리워한 품이었다. 떨어져 있던 그 시간 동안 시온을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매시간, 매분, 매초, 늘 시온이 그리웠다. 이 커다란 품도, 그의 체취도, 투박하지만 다정한 손도 모두 다 그립기만 했다.

“얼굴 좀 보여 줘.”

시온은 화준을 품에서 떼어 내고 턱을 살짝 쥐었다.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벅차올랐다. 원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금세 그리움으로 변모해 마음을 울렸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도화준이 허상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허상처럼 제 마음을 괴롭히고 훌쩍 떠나 버리는 그림자가 아니라 진짜 도화준이 제 곁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거 꿈 아니지?”

“……죄송해요.”

시온은 두 손으로 화준의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머금었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마음이 벅차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 달 동안 힘겹게 버텨 온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됐다. 그냥 이걸로 됐다. 그에게 그간의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 나를 믿지 못했느냐고, 왜 나를 떠났느냐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그걸로 됐다.

“저, 회장님께 말씀드렸어요.”

한시라도 떨어지는 게 불안해서 화준을 허벅지 위에 앉혔다. 한참을 숨죽여 울던 화준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첫마디를 내뱉었다. 시온은 허벅지 위에 앉힌 화준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뭘?”

“……회장님이 전무님 망가뜨리면 제가 고쳐서 써 보겠다고. 그러니까 마음대로 하시라고.”

“회장님이 날 망가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야?”

“전무님께서 저와 결혼을 생각한 것도 선우 그룹을 원했기 때문이잖아요. 만약 선우 그룹을 못 가진다면…… 아!”

갑자기 시온이 손을 뻗어 코를 붙잡고 흔들었다. 손을 떼어 내려고 해도 시온은 고집스럽게 코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파요.”

“이게 아파? 나는 네가 사라지고 나서 훨씬 더 아팠어.”

화준은 가만히 시온을 바라보았다. 시온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져 있었다. 화준은 손을 옮겨 그의 이마를 엄지로 문질렀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게 다 무서웠다. 아들을 딸로 둔갑시켜 세상을 속인 자신의 부모와, 정략결혼까지 불사한 시온의 안위가 정말 걱정스러웠다.

자신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 버리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까 봐,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죄송해요.”

“그래도 용기 있게 잘 말했네. 숙맥처럼 빌빌대고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더니. 고장 나면 고쳐 쓰겠다고? 그럼 아버지께서 날 고장 내 주시길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고장 내 달라고 빌어야 하나?”

“…….”

“고장 난 나를 네가 어떻게 써 줄지 정말 궁금해.”

시온은 표정을 풀고 화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품에 안고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아 자꾸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만약에 이게 꿈이라면 깨고 나면 너무 아플 것 같아 깨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이마를 대고 가볍게 문질렀다.

“전무님.”

전무님이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어 화준을 바라보았다. 호칭으로 또 한 번 씨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

“…….”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시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피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화준이 도 사장을 만나 봤자 도움 될 게 없었다. 목숨을 구걸하며 화준에게 비수를 꽂을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게 될 텐데, 그걸 제 눈으로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끝까지 막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그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얼굴을 보니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말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상처받게 될 거야. 도창현이 어떤 인간인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전무님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근데, 저 꼭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차라리 나한테 해 주면 내가 만나서…….”

화준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상처를 받는 것도, 그리고 이 악연을 끊어 내는 것도 모두 자신의 몫이었다. 이건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자, 시온은 한숨을 푹 내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을 귀로 가져가는 걸 지켜보던 화준이 조심스럽게 시온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시온이 손목을 잡아채고 다시 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꽤 오랜 시간 앉아 있어서 다리가 아플 법도 한데, 시온은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통화를 마친 시온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집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내일 오전에 검찰로 출두한다고 하니까, 이따 저녁때 볼 수 있으면 보고, 아니면 내일 검찰로 가야 할 것 같아.”

“……검찰 출두를 그렇게 빨리 하나요?”

“신성 건설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고, 하루에도 청원이 몇 개씩 올라오니까 검찰도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아버지 입김도 좀 작용했고.”

화준은 공 회장을 떠올리고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투닥투닥 통화를 하던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공 회장은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외출이나 통화를 허락받을 때마다 공 회장은 엄한 목소리로 안 된다고 단칼에 잘랐다가도 한참 애걸복걸하면 이내 알았다며 사용인을 붙여 주곤 했다.

“무슨 생각 해?”

“……전무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 회장님께서 많이 챙겨 주셨어요.”

“아버지가?”

“네. 정말 아들처럼 대해 주셨어요. 마지막이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좋으신 분 같았어요.”

시온은 피식 웃고는 서랍에서 담배를 꺼냈다. 화준이 그렇게 사라지고 난 뒤, 흡연량이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늘었다. 시온은 화준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금방 엉덩이를 일으킬 줄 알았던 화준이 고집스럽게 앉아 있자, 시온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웬 고집이야.”

“회장님이 전무님 담배 많이 피우신다고 걱정하셨어요.”

“뭐? 그런 이야기도 했어?”

시온은 손에 쥔 담뱃갑을 다시 내려놓고 물었다. 늘 공 회장은 시온과 시준을 비교하면서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랑이었다. 시준은 일로 뛰어나지만 융통성이 없는 게 탈이라고 했고, 시온은 너무 잘나서 탈이라고 했던가. 화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때마다 그 모든 상황이 부럽기만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화준이라서 그저 신기하고 부러웠다.

“아버지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은 안 하고? 왜 옆에 잘 있는 널 나 몰래 빼돌려서 이 사달을 내.”

시온은 억지로 화준의 몸을 밀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시온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화준이 사라졌던 한 달이 제게는 끔찍하기만 했다. 술과 담배가 아니면 버티지 못할 만큼 힘겨웠다. 만약 그의 부재가 더 길어졌다면 약물에까지 손을 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가 약한 건 아니지만, 그만큼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마음은 뜨거워서 죽을 것 같은데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공허하고 허무하기만 했다. 시온은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제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이게 꿈이 아님을 확인했다.

화준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 순간, 뒷주머니에서 웅웅―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해령이었다.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전화기를 타고 온이가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여보세요.”

- 화준 씨, 온이가 너무 짖어서요. 뭐가 불편한지 계속 짖기만 해요.

“아……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데리러 갈게요.”

화준은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시온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온…… 제주도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자꾸 짖어서 선생님이 곤란하신가 봐요. 데리러 가야 될 거 같아요.”

“강아지도 키웠어?”

“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제가 가서 데리고 올게요.”

“같이 가.”

* * *

화준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시온이 손을 뻗어 손을 맞잡았다. 온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시온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도창현이 밀항을 시도하다가 검거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시온은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렇게 추악할 수가 있는지. 화준에게 말을 전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워낙 심적으로 약한 사람이라 충격을 받을 수도 있어 에둘러 말했다. 화준은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그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의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화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정말 아버지라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수많은 죄를 지어 놓고 도망치려 하는 비겁함에 치가 떨렸다.

인천으로 향하던 차는 급하게 방향을 틀어 다시 서울로 향했다. 강남 경찰서로 이관되어 조사가 진행된다는 뉴스가 속보로 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대면할 생각에 입이 자꾸 말랐다.

시온은 잠시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 손을 뒤로 뻗어 미지근한 물 한 병을 화준의 손에 쥐여 주었다. 화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뚜껑을 열어 물을 마셨다.

영겁의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차 안에는 지독한 적막감이 내려앉아 공기가 무거웠다. 마침내 저 멀리 경찰서가 보였다. 하지만 둘러싼 취재진을 보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차가 경찰서 앞에 당도하고 화준은 창문 밖 세상에 시선을 두었다.

기자들과 카메라가 장사진을 쳐서 포토 라인까지 침범하고 난리였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성이 오가는 현장을 바라보며 화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못 들어갈 거 같아요.”

“진입은 확실히 어려워 보이네.”

시온은 잠시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더니 차를 몰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는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차는 한적한 도로 쪽으로 빠졌다. 한참 만에 차가 멈춘 곳은 인적이 드문 도롯가였다. 의아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자, 그가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멀리 수갑을 찬 아버지와 남자 셋이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도 생각할 새가 없었다. 화준은 정신없이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아버지!”

도창현이 얼른 고개를 돌려 화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화준을 향해 뛰다시피 걸어와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두 손을 내민 쪽은 화준이 아니라 서둘러 뒤따라온 시온이었다.

“이보게, 공 서방. 나 좀 도와주게. 공 회장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 내가 속이 바짝바짝 타고 있어. 어떻게 공 회장님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화준은 입을 꾹 다물고 하염없이 아버지의 추악한 얼굴을 눈에 담았다. 너무 끔찍하고 경멸스러워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모든 비리가 세상에 까발려지고 바닥까지 끌어내려졌음에도 도창현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끝까지 이렇게 추악한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지 몰랐다. 화준이 시온과 도창현의 사이에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아버지, 이 사람 이제 우리와 상관없어요. 저희 이혼했고 제가 남자라는 사실이 온 세상에 다 밝혀졌어요. 이제 다 끝났다고요!!”

“끝나긴 뭐가 끝나!! 아니야, 끝나지 않았어. 신성 건설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아!! 절대로!! 공 서방, 나 좀 도와주게나. 자네라면 할 수 있지 않나. 제발…….”

도창현은 제 앞을 가로막는 화준을 밀치고 시온의 앞으로 달려갔다. 힘에 밀려 휘청거리는 화준을 가까스로 붙잡은 시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창현이 시온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화준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시온을 보는 것마저 부끄러웠다.

“도화준, 정신 차리고 하고 싶은 말 다 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으면서 왜 입 다물고 있어!”

화준은 입술을 깨물고 시온의 앞에 고개를 처박고 엎드려 있는 도창현을 바라보았다. 살려 달라는, 도와 달라는 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화준은 시온의 손을 밀치고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고작 이러려고, 이런 모습을 보여 주려고 저를 남자가 아닌 여자로 키우셨어요? 얼마나 더 추악해질 건데요? 얼마나 더 밑바닥을 드러낼 거냐고요!”

“화, 화경아.”

“화경이는 24년 전에 죽었고 아버지 눈앞에 있는 저는 도화준입니다. 24년 동안 단 한 번도 저를 화준이라고 불러 준 적이 없으니 이름마저 잊으신 건가요? 저는 화경이 그림자에 가려서 살아도 죽은 것처럼 살아야 했어요. 돈이 그렇게 중요하셨어요? 돈이 그렇게!!”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부모라는 작자는 어린 화준을 살아도 죽은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가까스로 돌아왔을 때도 짙은 절망감만이 화준을 더 낮은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입 닥쳐!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사랑하는 내 딸이 죽고 내 여자가 미쳐 돌아 버렸는데 내가 무슨 짓을 못 해!!”

표독스러운 외침에 화준이 주춤주춤 몸을 물렸다. 갑자기 들려온 비보는 모든 걸 다 바꾸어 놓았다. 선우 그룹과 정략결혼이 예정된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도창현은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욕심으로 꽉 찬 마음이 무서운 선택을 하게 된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화준이 죽고 화경이 살아 있는 걸로 서류는 조작되어 있었다. 자신이 한 짓이지만 실감 나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침대에 송장처럼 누워 있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죄책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신미연, 아이 엄마가 정신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화경을 찾아 헤매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픈 가슴을 퍽퍽 쳐 댔다. 미연이 화준에게 딸 이름을 부르는 걸 보고 도창현은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화준에게 화경의 인생을 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순전히 제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나중에 돈으로 보상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일을 이토록 크게 키웠고 그 속에서 제 욕심도 살을 불려 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은 끝도 없이 손아귀를 뻗쳐 왔다. 목표치에 도달하면 새로운 목표치가 생겼다. 조금만 더는 끝이 없었다. 상황이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욕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네, 아버지께 중요한 건 어머니와 화경이뿐이었죠. 저 같은 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그냥 인형 따위에 불과했습니다. 근데 저도 아들이잖아요. 아버지 피가 제 몸 안에 흐르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비정할 수가 있으세요.”

시온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제 할 말을 하는 화준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저 멀리 몸을 물리고 있던 형사들이 시계를 손으로 가리키며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시간이 없다는 시온의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도창현이었다. 회상에 젖어 있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다시 늘어졌다.

“도와주게나. 제발 날 좀 도와주게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네. 내가 가진 재산 다 줄 테니 무혐의만 받게 해 주면…….”

시온은 다리를 털어 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인간의 추악함은 끝이 없었다. 아직 할 말이 많았지만 화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으로 준비한 말을 입 안으로 곱씹었다. 그런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준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시온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도 사장님이 가진 그런 푼돈, 저한텐 필요 없습니다. 비리와 더러움이 묻어 있는 그딴 돈이라면 더더욱. 근데.”

시온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도창현을 힐끗거렸다. 추악함이 흘러넘쳐 주변 바닥을 적시는 것 같았다. 자비를 베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저 인간의 바닥을 화준에게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뭐,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다 하겠네. 제발 나 좀 살려 주게.”

“아들의 인생을 짓밟은 아비로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선우 그룹 법무팀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화준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하지만 도창현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키고 화준의 손을 붙잡았다. 수갑이 채워진 손이 불편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땀으로 흥건한 손이 감겨들어 오는 순간 화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화경아, 아니 화준아. 미안하다. 이 아비가 다 잘못했다. 너에게 너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날 조금만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네가 화경이로 살아 준 덕분에 네 어미가 여태껏 살아 있잖니. 넌 언제나 착한 아이였으니 이번에도 이 아비의 말을 들어줄 거라 믿는다.”

눈물이 차올라 코가 시큰거렸다. 화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그의 손을 밀어 냈다. 철컥― 수갑 소리가 듣기 싫게 울렸다. 당연히 저를 밀어 내지 못할 거라 생각한 도창현의 얼굴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저는 앞으로 제 인생을 살 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꼭두각시가 아닌 저 도화준의 삶을, 살 거예요. 그리고 저…….”

“……화준아.”

“24년 전에 죽은 화경이처럼 저도 죽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건강하세요.”

화준이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 허울뿐인 가족이란 굴레에 갇혀 등신처럼 살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만큼 했으면 자식으로 해야 할 도리는 충분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준이 먼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도창현은 시온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살려 달라고, 사과했으니 법무팀을 붙여 달라고. 시온은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그를 세게 밀쳐 넘어뜨렸다.

“인간의 추악함이 어디까진지 잘 봤습니다. 도화준이 한 말, 무슨 뜻인지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이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주겠네. 제발 공 회장님과 전화 한 통만 하게 해 줘. 부탁일세.”

“당신이 내 비서를 시켜서 도화준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사실을 알렸다는 걸 알고 있어. 그리고 내 아버지께 거액을 받아 챙겼지. 어떻게 인간을 탈을 쓰고, 그것도 아비라는 작자가 아들의 인생을 짓밟은 것도 모자라 그걸로 장사를 해?”

“나는! 나는 그런 적이 없네. 믿어 주게나.”

“믿어 달라고?”

시온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불법적인 경로로 손에 넣은 도창현의 통화 내역과 인화한 사진 뭉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 촤르륵― 흩어진 사진 속에는 공 회장의 비서가 도창현의 차에 보약 박스를 넣어 주는 사진도 있었다. 그 외에도 보약 박스를 열어 5만 원권을 확인하는 도창현의 모습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공 회장의 비서 사진이 있었다. 도창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래도 아니라고 잡아떼실 겁니까?”

“……박정혁 그자가, 그래, 그자가 한 거야!”

“정말 파렴치한 인간이네. 박정혁이 당신에게 받은 메일 내역, 통화 목록, 음성 파일까지 모두 나에게 넘겼어. 내 비서는 영악한 놈이라서 살 구멍을 미리 준비해 뒀더라고.”

시온이 자조적인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휴대폰을 꺼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제야 도창현이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이 도화준을 그 작은 우물에 가두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처럼, 이젠 내가 버러지 같은 당신을 감방에 가둘 거야. 그 차가움 속에서 얼마나 사람이 비참해지는지 한번 느껴 봐. 그 속에서 도화준이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 살았는지, 그 기분이 얼마나 엿 같은지 한번 느껴 보라고.”

시온은 저만치 떨어져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형사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형사들이 다가와 도창현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도창현의 비명이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살려 달라고 고함치는 목소리가 귓구멍으로 흘러들었다.

아들까지 팔아 축적한 재산들은 이제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욕심에 희생당한 화준만 불쌍한 상황이었다. 시온은 씁쓸하게 웃으며 멀어지는 차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 *

화준은 사흘을 꼬박 앓아누웠다. 솜이불을 겹쳐 덮고 있으면서도 와들와들 떨어 대는 통에 시온의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해령은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몸살이라고 간단하게 병명을 정의했다. 뭐가 그렇게 쉽냐고 소리쳐도 해령은 익숙하게 화준의 팔에 링거를 달아 주고 약봉지를 시온의 손에 쥐여 주었다. 화준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끙끙 앓기만 했다. 가끔 소리 없이 울기도 했다. 그가 베고 누운 베개는 눈물에 축축하게 젖었다가 마르길 반복했다.

시온은 묵묵히 화준의 곁을 지켰다. 호되게 앓고 나면 그의 삶이 제대로 돌아오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열기가 잔뜩 묻어난 수건을 갈아 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바짓가랑이를 물고 낑낑대는 하얀 강아지가 눈에 보였다. 허리를 숙여 강아지를 품에 안아 들었다. 녀석도 화준이 아픈 걸 아는지 연신 낑낑거리며 울어 댔다.

“넌 이름이 뭐냐.”

강아지 이름을 해령에게 물어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저 화준이 깨어나면 물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시온은 강아지를 그냥 ‘강아지’로 불러야 했다. 거실로 나온 시온이 러그 위에 강아지를 내려놓고 사료를 꺼내 밥그릇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강아지는 밥그릇을 쳐다보지도 않고 화준이 있는 방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너나 나나 처지가 참 비슷하네.”

시온은 푸념 섞인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사료 몇 알을 집어 강아지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 손바닥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리는 걸 지켜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저도 입맛이 없어 커피 몇 잔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하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침실 문 앞으로 다가가 몸을 말고 엎드렸다. 시온은 고개를 돌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려나……. 비 오는 날을 유난히 좋아하는 화준이었다. 창밖으로 손을 뻗어 내리는 비를 손바닥으로 받아 내며 좋아하는 그 모습이 몹시 보고 싶었다.

시온이 몸을 막 일으키는 찰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소파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끌어다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시온입니다.”

- 그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저 몰래 도화준 빼돌리실 거면…….”

- 일없다.

“왜 전화하신 겁니까?”

시온의 목소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도화준을 빼돌린다면 그때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선우 그룹의 몸통을 날려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 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 네가 정말 사랑하는 아이라면 절대로 놓지 말아라. 너 같은 놈한테 과분한 녀석이지만 둘이 그렇게 좋다면 나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마. 대신, 선우 그룹은 포기하거라. 전자나 금융 쪽 하나 맡아서 조용히 살아.

“정말, 정말이십니까. 도화준,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 선우 그룹을 포기하라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거냐.

“감사합니다.”

- 그래. 내가 그 애를 겪어 보니 그래, 그런 아이라면 널 맡겨도 안심이 되겠지. 시간 내서 둘이 회사로 한번 오너라.

시온은 전화를 끊고도 믿을 수가 없어 제 볼을 꼬집었다. 따끔하게 아픔이 느껴지는 걸 보면 이건 꿈이 아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앞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있던 강아지가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고요하게 잠든 화준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아버지께서 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시겠대. 나 같은 놈한테 넌 과분한 놈이라고.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왕왕―!! 늘 낑낑거리며 애달프게 울어 대던 강아지가 갑자기 짖기 시작했다. 시온이 몸을 돌려 강아지를 안아 올리려고 해도 완강하게 거부하며 왕왕 짖기만 했다. 왜 저러는 거지? 시온은 강아지가 화준을 향해 짖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고요하게 잠든 줄만 알았던 화준이 눈을 뜬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준아!”

“…….”

“괜찮아? 아픈 건 어때?”

“……회장님이, 큽.”

목이 꽉 잠겼는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시온이 얼른 물을 따라 화준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물을 힘겹게 넘긴 화준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회장님이 정말 반대, 하지 않으시겠대요?”

“그래. 나중에 회사에 한번 오라고 하시더라.”

화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왕왕―. 제 존재를 알리려는 듯 크게 짖는 소리에 화준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이불에 둘러싸여 있다가 몸을 일으키니 한기가 들었다. 침대 아래로 팔을 내려 온이를 향해 내밀었다.

“온아, 이리 와.”

그러자 온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화준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보드라운 털을 문질러 주자 온이가 눈을 감으며 기분 좋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강아지 이름이 뭐라고?”

“아…….”

“다시 불러 봐. 얘 이름이 뭐라고?”

화준이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자신의 이름을 짐승에게 갖다 붙였다고 화를 내면 어쩌나 싶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꿎은 온이 머리만 쓰다듬었다. 한참을 망설이자, 시온이 재차 채근했다. 화준은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고는 대답했다.

“오, 온이요.”

“온이? 내 이름의 온은 아니겠지……?”

“맞아요. 기분 나쁘시면 바꿀게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화준이 귀여워서 시온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작은 생명에게 제 이름을 붙여 주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르며 자신을 기억했을 화준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강아지 불러 봐.”

“네?”

“불러 보라고.”

시온이 화준의 품에 안긴 온이를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주인의 품에 안겨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온이가 놀라 낑낑거리며 침대에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입술만 질근질근 씹으며 망설이는 얼굴을 바라보던 시온이 아예 온이를 안아 저만치 물려 버렸다. 그리고 손으로 온이의 이동을 차단했다. 낑낑―. 애처로운 소리가 연신 들렸다. 화준은 숨을 깊게 마시고 힘주어 이름을 불렀다.

“온아, 이리 와.”

그러자 강아지보다 시온이 먼저 품에 와락 안겼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화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새 부쩍 자란 새카만 머리카락이 하얀 침대 위로 쏟아졌다.

“다시 불러 봐.”

“온아.”

화준이 손을 올려 시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작게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침대 아래에 주인의 품을 빼앗긴 온이는 낑낑거리고, 커다란 덩치로 화준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시온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배 안 고파?”

“……조금요.”

시온은 화준의 이마를 짚어 열을 체크했다. 아침보다 열이 많이 떨어진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요?”

시온은 고개를 들고 화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도주의 우려가 있어서 구속 수사 중이야. 그리고 어제 신 여사, 네 어머니가 기자들 앞에서 난동을 피웠어. 신 여사도 혐의가 있어서 조사를 받아야 하지만 아마 정신 감정을 통해 정신 병원으로 옮겨질 것 같다.”

화준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예상한 일이었다. 신 여사는 정신적인 치료가 꼭 필요한 사람이지만 쉬쉬거리며 치료를 받느라 입원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은 신 여사일지도 몰랐다. 죽은 화경이를 안고 평생을 살아온 그녀에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치료를 받아 남은 삶은 화경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여기 있어, 죽 데워 올게. 죽 먹고 약 먹자.”

“……전무님은요?”

“나도 밥 먹어야지.”

“아니요, 그거 말고……. 괜찮으신 거예요?”

시온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말고 화준을 바라보았다. 불안해하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했다. 시온은 팔을 뻗어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얌전히 몸을 맡겨 오는 화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작게 말했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나중에는 이 마음을 후회할지언정 지금은 그래. 선우 그룹도, 돈도, 권력도 아무것도 필요 없어.”

“죄송합니다, 정말…….”

“됐어. 난 네가 네 발로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만 생각할 거다.”

화준은 더욱더 품 안으로 파고들며 울컥 치미는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제 인생에서 정말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은 공시온 하나뿐이었다. 목적이 있어서 시작한 인연이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좋아해요.”

시온은 품 안에서 화준을 떼어 내고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일렁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고개를 숙여 입술을 머금었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아직도 의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 같았던 도화준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뭘까. 이렇게까지 모든 걸 다 버릴 만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뜨겁게 엉켜 오는 혀를 입술을 모아 빨며 화준의 몸을 밀어 침대에 눕혔다. 지금도 몸이 달아서 미칠 거 같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 온몸이, 온 마음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동정에서 시작된 감정이 사랑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사랑은 참 이상했다. 단 한 번도 도화준을 사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다. 다만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온 세상에 도화준뿐이었다. 눈에 담는 게 행복하고, 그를 떠올리며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도 좋았다. 제 마음에 차지 않는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가도 얼굴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사르르 풀어지고 말았다.

서로의 마음이 얽히고설켜 혼란한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끝은 온전한 마음이 서로에게 닿는 뜨거운 사랑이었다. 한참 만에 떨어진 입술에 서로의 타액이 묻어 번들거렸다. 화준은 약간 거칠어진 숨을 색색 내뱉으며 시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입가에 번진 타액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 순간, 시온이 입가에 닿은 손을 꽉 붙잡고 뜨거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싸우고, 화내고, 웃고, 떠들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네가 내 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비록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이라 힘들지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이 없도록 내가 잘해 볼게.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내가 그렇게 해 볼게.”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배어났다. 화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를 네 유일한 가족으로 받아 주면 안 될까?”

기어코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물만 줄줄 눈가를 타고 흘렀다. 귀로 흘러 들어가 웅덩이가 생길 만큼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가족. 지금까지 화준의 삶에서 가족은 너무 끔찍하고 잔인한 존재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를 잘라 버리고 홀로 서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시온이 기꺼이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가슴이 금방이라도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꾸역꾸역 치미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화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 가족이 되어, 주세요.”

시온은 화준을 일으켜 품에 꽉 안았다.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이제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관계는 아니지만, 마음에서 보이지 않는 선이 흘러나와 서로의 몸을 꽁꽁 묶는 것 같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어둡던 창밖에서 어느새 따사로운 햇살이 비쳤다.

마치 이 둘의 사랑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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