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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네가 없는 곳 (2) (13/19)

Chapter 12 : 네가 없는 곳 (2)

시온은 소파에 앉아 담요를 몸에 둘둘 말고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에 같이 나가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걸 그냥 두고 나올 수가 없어 함께 출근했다.

화준의 등장으로 비서실이 잠시 소란스러워졌지만 화준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사무실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다. 시온이 비서실에 따로 부탁해서 준비한 죽을 먹고 감기약을 먹은 화준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시온은 벗어 둔 재킷을 들어 화준의 몸 위에 덮어 주고, 그의 앞에 앉았다.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화준을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했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에 자세히 보아야 보일 법한 점이 있고, 미간 사이에는 희미한 흉터가 있었다.

몇 달을 함께 지내면서도 이렇게 자세히 얼굴을 관찰한 적이 없어서 모두 처음 발견한 것들이었다. 시온은 손을 뻗어 코를 아프지 않게 쥐었다가 놓았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에 화준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잔뜩 일그러진 화준의 미간이 제자리를 찾고 다시 평화로움을 얻을 때가 돼서야 숨을 푹 내쉬었다. 시온은 발소리를 죽이고 문 쪽으로 다가가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문 앞에는 서류철을 안고 있는 정혁이 보였다. 정혁은 시온을 지나쳐 곧장 책상으로 다가가 서류를 올려놓았다.

“빠른 검토가 필요한 서류들입니다.”

“알겠습니다. 나가 봐요.”

시온은 서류철 하나를 집어 들어 의자에 풀썩 앉았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기안을 검토하고, 승인하고, 재고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시온이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음에도 책상 앞에 서 있는 정혁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온은 서류철에 시선을 두고 있는 척 시선을 힐끗거려 그의 행동을 기민하게 살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명패에 닿아 있었다.

“아직 용건이 더 남았습니까?”

“사모님을 굳이 사무실까지 모시고 온 이유가…….”

시온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덮고 다리를 책상 아래로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화준이 어느새 소파 팔걸이를 베고 누워 잠들어 있었다. 시온은 느린 걸음으로 화준에게 다가가 흘러내린 옷을 세심하게 덮어 주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내가 내 와이프를 회사에 데리고 오는 데 문제 있습니까?”

“……하지만 어제 회장님이 부르신 일도 있고, 이래저래 상황이 좋지 않은데 왜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소리 낮춰.”

시온은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무모?”

“……지금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상한 전화가 걸려 오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다 불 확실한 상황인데, 굳이 이렇게 직원들 보란 듯이 대동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해, 알아들었으니까.”

시온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화준을 향한 마음이 깊어져서 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숨소리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함께 가겠다고, 가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는 화준을 달래서 그냥 두고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금세 토라져 입술을 쭉 내밀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사람 관계에서 공시온은 명백한 ‘을’의 입장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나가 보세요.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시온은 정혁이 사무실에서 나갔음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화준을 바라보았다. 여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명백한 남자였다. 곤히 잠든 얼굴 위로 남자라는 사실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워 떠는 얼굴이 겹쳐졌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준이 다치거나 심적으로 상처받지 않길 원했다.

“시, 온 씨?”

“깼어?”

화준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온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켜 테이블을 돌아 화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굽혀서 몸을 내리자, 화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목에 팔을 두르고 안겨 들었다.

시온은 마음이 벅차올라 숨이 막혔다. 수없이 사람을 만나 오면서도 이토록 강렬하고 뜨거운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순진해 빠진 이 몸에 뜨겁게 발정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허덕거리는 자신이 낯설었다. 시온은 자조하며 화준의 어깨를 밀어 얼굴을 마주했다. 소파에 누워 고개만 옆으로 돌린 채 올려다보는 눈이 새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감기는 좀 어때?”

“……괜히 따라왔나 봐요.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해요.”

시온은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정혁과 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화준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정말요?”

“응, 정말이야.”

시온은 조심스럽게 뺨을 쓸어 주고 이마를 매만졌다. 열이 어느 정도 떨어지고 혈색을 되찾은 얼굴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잃고 싶지 않았다. 하나를 가지면 두 개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의 간사한 마음처럼 시온의 마음에도 욕심이 피어올랐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화준의 삶을 포기하고 도화경으로서 자신의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화경아.”

“……?”

“이게 내 욕심이라는 거 잘 알아. 근데 자꾸 욕심이 나.”

“무슨…….”

“지금처럼 도화준이 아닌 도화경으로 평생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

화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시온을 만나고 도화경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은 화경에게 이름을 돌려주고 도화준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앞에 서고 싶었다. 누군가를 자꾸 속여야 하는 게 너무 버거웠다. 시온을 사랑하는 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

“이건 사랑하고 말고 문제가 아니라, 내 삶에 관한 거니까요.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화경 씨, 그만 울자. 또 열나겠어요.”

해령은 한숨을 푹 내쉬고 서랍에서 손수건을 꺼내 화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책상 위로 뚝뚝 떨어졌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진료실에 들이닥친 화준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해령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어 열을 체크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만큼 울음을 쏟아 낸 뒤라 열감이 상당했다.

“일단 해열제 먹고 좀 누워요.”

“선생님, 저 너무 힘들어요. 그 사람이랑 헤어지기 싫은데 정말 미치겠어요. 공시온이랑 어떻게 헤어져요. 헤어지기 싫어요.”

“그럼 공 전무님한테 다 사실대로 털어놔요. 하나도 숨김없이 도와 달라고 말해 봐요.”

화준은 먹먹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도움 한 번 되지 못하고 늘 시온을 곤란하게 만든 화준이었다. 그런데 그의 앞길까지 막고 싶지 않았다. 선우 그룹의 주인이 되고자 정략결혼까지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 꿈을 제 손으로 꺾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어요. 회장님께서…….”

“회장님 말고 공 전무님만 생각하면…….”

“제가 남자라는 사실을 아세요. 신성 건설과 공 전무님의 안위를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거래를 했어요.”

“……!”

“저한텐 며칠밖에 시간이 없어요.”

해령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본인의 일이 아님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어제부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화준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퍼즐이 맞춰져 가는 기분이었다.

해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준의 지난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이 아팠다. 삶의 의지가 없어 간신히 죽음의 문턱에서 끌고 나온 게 여러 번이었다. 이제 조금 웃고 행복해지고 있는데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해령은 화준에게 다가가 가만히 끌어안았다. 무거운 쇳덩어리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 일을 직접 겪은 화준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화경 씨, 울어요. 차라리 펑펑 울어서 다 쏟아 내 버리자. 응?”

“왜, 왜 나한테만 이럴까요?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한 걸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예요? 내가 화경이를 죽게 해서 벌받는 걸까요?”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요.”

“그때 죽었어야 하는 건 난데, 내가 없어져야 했는데. 만약 그랬다면 엄마도 아빠도 모두 행복했을 거예요. 내가, 죽어야, 했는데…….”

해령은 다급하게 화준을 품에서 떼어 내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점차 뻣뻣해져 가며 동공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해령은 화준의 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화경 씨, 정신 놓지 마요. 이거 아니야.”

화준은 또다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결혼하고 난 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증상이었다. 해령은 다급하게 화준의 뺨을 두드렸다. 육체적으로 아픈 건 약으로 치료하면 되지만 정신적으로 대미지를 입는 건 차원이 달랐다.

현재 화준은 감기로 몸이 아픈 데다가 정신적인 타격까지 심하게 입은 상태였다. 화준은 이미 약물에 많이 노출된 상태라 해령은 아주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되도록 약물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화경 씨, 공 전무님 곁에 있어야지. 공시온 봐야지. 정신 놓으면 못 봐요. 알지?”

“공, 시온. 공시, 온.”

“그래, 공시온. 그 사람이 누구예요?”

“내가, 많이, 좋아해요.”

위태롭게 팔걸이를 붙잡고 몸이 경직돼 가던 화준이 천천히 힘을 풀며 소파에 쓰러지듯 기댔다. 그리고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해령도 깊은숨을 몰아쉬며 진료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일도, 살아가는 것도 뭐 하나 쉽지 않은 그가 가여웠다.

* * *

화준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드넓은 창공과 솜사탕 같은 구름을 헤치며 날고 있는 비행기에서 화준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얼굴을 했다.

시온은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거의 사흘 내내 회사 일에 매달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하면 화준은 신발장 옆에 기대앉아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그게 밤이든, 새벽이든 상관하지 않고 화준은 고집스럽게 시온을 기다렸다. 그리고 화준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품 안에 안겨 ‘좋아한다’고 말할 때면 고단한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요 며칠 시온에게 화준은 비타민이었고 영양제였다.

“그렇게 좋아?”

“네, 정말 좋아요.”

“좀 질투 나려고 하는데?”

“시온 씨랑 함께 가서 정말 좋아요. 꿈꾸는 거 같아요.”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수줍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설렘이 잔뜩 묻어났다. 진작에 시간을 내서 여행을 다닐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시온은 화준에게 머문 시선을 거둬들이고 서류철을 펼쳐 들었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서 불가피하게 선우 그룹 전용기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덕분에 목적지인 이시가키 공항으로 곧장 갈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일정이 짧아서 오키나와 본섬에서 벗어나 이시가키섬에서 머물기로 했다. 시온은 쌓여 있는 서류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하게 일정을 잡는 바람에 아직도 검토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다. 도착해서 늦은 저녁을 먹고 산책이라도 하려면 이동 시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시온은 화준을 힐끗거리고 이미 힘없이 흩어진 집중력을 끌어모아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화준은 반대편 좌석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는 시온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에 휙휙 돌아가는 만년필이 늦어졌다가 빨라졌다가를 반복했다. 화준은 아예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시온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참 근사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화준은 아련한 눈빛으로 시온을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이제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지나면 그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일주일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화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그와 헤어질 생각만 하면 가슴이 꽉 막히고 눈물이 차올랐다.

‘화경아, 아빠가 부탁할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우선 공 회장이 시키는 대로 떠났다가 뒷일은 그 후에 생각해 보자.’

‘아버지!’

‘신성 건설은 여기서 도약하지 못하면 다 끝이야. 그러니까 제발, 화경아. 아빠 말, 무슨 말인지 알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버지께 연락해 보았지만 돌아온 건 날카로운 비수였다.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에 콱 박혀 빠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부모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비정할 수 있는지 화준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마치 세상에 버려진 미운 오리 새끼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하늘이 너무, 너무 예뻐서요.”

화준이 허둥지둥 생각을 환기하고 눈앞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며 어쭙잖은 핑계를 댔다. 시온은 서류철을 덮고 만년필을 정리해 한쪽에 밀어 놓았다.

“이젠 눈도 깜빡 안 하고 거짓말하네?”

시온이 몸을 일으켜 화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널찍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화준은 난처함에 인상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시온이 몸을 더 숙여 집요하게 시선을 보냈다.

“왜, 왜 그러세요?”

“난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어. 너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나와 함께 의논하고 생각했으면 해.”

“…….”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크다는 거 알아. 그런데…….”

시온은 손을 뻗어 뺨을 감싸고 끌어당겼다. 화준이 의식하지 않고 질근질근 씹고 있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거짓 하나 없는 도화준이잖아.”

화준은 뺨을 감싸고 있는 시온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 맞추었다. 따뜻한 온기가, 감정이 고스란히 입술에 닿는 기분이었다. 화준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뜨겁게 쏟아지는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올곧게 마주했다. 마음이 너무 뜨거워서 다 타 버릴 것 같았다. 이 마음을 전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화준은 시온을 향한 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고마웠던 것도, 힘들었던 것도, 사랑하는 것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시온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게 화준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인생이 너무 버거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시온 씨를 만나고 나서는 늘 살고 싶었습니다. 지난날의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화경, 아니 화준아.”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거라곤 내가 쉬는 숨밖에 없어요.”

“…….”

“그래서 내가 가진 숨까지 다 주고 싶을 만큼 좋아합니다.”

가진 게 숨밖에 없다고 말하는 화준의 표정은 절박했다.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늘 시온에게 폐만 끼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이 숨이라도 받아 준다면 모두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애틋하게 다가오는 마음에 시온은 화준을 끌어안았다.

“네가 가진 게 왜 없지? 나 있잖아.”

“…….”

“나 공시온을 가졌는데 그걸로 모자라?”

시온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며 화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을 숨기지 않고 꾸밈없이 뱉어 내는 말이 가슴에 꽉 들어차, 머리가 뜨거웠다.

처음 봤을 때 화준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다. 부모의 학대에 자존감도 낮고 금방이라도 삶을 포기할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이제 좁은 우물에서 빠져나와 넓은 세상에 두 다리로 우뚝 섰다. 시온은 무엇보다 그게 너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오롯이 혼자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지옥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라고 했을 때 당황하던 그때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은 달랐다.

“좋아해요.”

“그래. 나도 많이 좋아해.”

화준을 품에서 떼어 내고 눈을 마주한 순간 기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착륙한다는 목소리에 시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해변 산책까지 마친 두 사람은 호텔로 향했다. 시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산책하는 내내 꽉 맞잡은 손에 희미하게 열기가 남아 가슴을 간지럽혔다.

화준은 차창에 매달려 풍경을 눈에 한가득 담았다. 시원한 바람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자꾸 시선을 빼앗았다. 시온은 브레이크를 천천히 밟아 속도를 늦추고 화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화준이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웃었다.

“어릴 때 있잖아요. 놀이터에 진짜 가 보고 싶었어요. 시소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고, 그네도 타고, 모래 장난도 하고 싶었는데 한 번도 해 보질 못했어요.”

“……놀이터?”

“네, 알록달록한 놀이 기구가 예뻐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요.”

시온은 쓸쓸해 보이는 화준의 얼굴을 힐끗거리고 운전대를 세게 움켜쥐었다. 입 속으로 놀이터를 중얼거리며 사방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이런 관광지에 놀이터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온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는 사이 화준은 창턱에 턱을 괴고 풍경을 눈에 담았다. 헤어짐이 가슴 아픈 건 사실이지만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던 이곳에 시온과 함께 올 수 있어서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이별은 저만치 밀어 두고, 지금은 이 상황을 오롯이 즐기고 함께하고 싶었다.

아마 마지막이 될 여행이니…….

시온은 해안 도로가 아닌 주택가로 보이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작은 놀이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한참을 키 작은 집들을 지나다 보니 한적한 공원이 보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앞에 작고 아담한 놀이터가 있었다.

“놀이터네. 저기 가 볼까?”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화준이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놀이터에 탄성이 터졌다.

“어? 진짜네.”

화준은 얼른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뛰다시피 내려 놀이터로 곧장 달렸다. 시온은 휴대폰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시온은 차체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도화준과 함께 있으면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들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원래 시온의 계획은 편안하게 호텔로 들어가 오붓하게 와인을 마시고 잠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한국도 아닌 일본의 관광지에서 놀이터를 찾아 이곳에 서 있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거지?

시온은 담배를 길게 빨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마침 화준이 몸을 돌려 시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화준의 환한 미소에 그런 의문 따위는 금세 사라졌다. 지금 당장 느끼는 이 기분이 좋고 행복했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시온은 차량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놀이터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화준은 그네에 올라 슬슬 흔들리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화준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날렸다.

“밀어 줄까?”

“살살요.”

시온은 재킷을 벗어 기둥에 걸어 두고 화준의 등 뒤로 다가가 그네를 밀기 시작했다. 화준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그넷줄을 쥐었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허공에 뜨는 기분은 참으로 이상했다. 몸이 붕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속이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하고.

“재밌어?”

“시온 씨도 타 봐요.”

화준이 발을 바닥에 톡톡 쳐서 그네를 세웠다. 시온이 뭐라 거절할 새도 없이 막무가내로 그를 그네에 앉혀 놓고 등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시온은 앞뒤로 움직이는 그네에 멍하니 앉아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온 역시 놀이터에서 놀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 타 보는 그네였다.

어릴 때 워낙 노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놀이터에서 논다는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서른이 넘어서 이런 그네를 타게 될 줄이야. 시온은 실없이 웃고는 모래 바닥에 발을 끌어서 그네를 세웠다.

“호텔로 갈까?”

시온이 화준의 허리를 은근히 감싸며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화준은 아쉬운 눈으로 놀이터를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채운 화준이 희미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자신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신경 써 준 시온에게 한 감사 인사였다. 하지만 시온은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기껏 채웠던 안전벨트를 풀고는 몸을 기울였다.

“그럼 키스해 줘.”

“키스요?”

화준은 얼른 주변을 살폈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이기도 하고 늦은 밤이라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입술을 내밀고 눈을 감고 있는 시온을 바라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뚝뚝하고 냉기가 뚝뚝 떨어지던 사람이 이런 얼굴로 키스해 달라고 조르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화준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입술이 막 떨어지려는 찰나, 시온이 화준의 목을 감싸고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마음이 벅차오르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서로의 거리가 불과 1cm도 되지 않았다. 살짝만 움직이면 서로의 코가 부딪칠 것 같았다. 시온은 입술을 약간 내밀어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 말했다.

“좋은데 불안한 느낌이 뭔지 알아?”

“…….”

“마음 같아선 네 손을 잡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나도 이런 기분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온 씨.”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네가 책임져야 해.”

시온은 목을 감싼 손을 약간 당겨 입술을 머금었다. 마른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점막을 핥고 그의 혀를 입 안으로 빨아 당겼다. 화준은 울음이 치밀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 둔 감정이 울컥 차올라서 가슴을 적시고 눈시울을 적셨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애처롭게 삼켰다. 곧 떠나야 할 사람과 남아야 할 사람의 마음이 뒤엉켜 화준을 괴롭혔다.

* * *

쾅! 문을 열어젖힌 시온은 화준을 벽으로 밀어 입술을 머금었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하고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화준을 안고 싶어서, 미치도록 그를 품 안에 가두고 확인하고 싶어서 속이 들끓었다.

마침내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온은 애써 눌러 놓았던 마음을 풀고 화준을 안았다. 화준도 적극적으로 옷을 벗고 시온에게 매달렸다.

“하아, 미치겠어. 정말 미칠 거 같아.”

“빨리요. 흐, 빨리요.”

채근하는 목소리에 시온은 정신없이 그의 목덜미를 빨고 드러난 살결에 입술을 묻었다. 입 안으로 들어온 살결이 마치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시온은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는 정신을 애써 붙잡았다.

정말 이성을 잃고 화준을 안아 버리면 크게 다칠 것 같았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선로를 달리는 기관차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자제력이 바닥을 보였다.

“재촉하지 마, 안 그래도 미칠 거 같으니까. 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괘, 하아, 괜찮아요. 어서요. 응?”

화준은 시온의 셔츠를 밀어 올리고 드러난 맨살에 입술을 묻었다. 보드라운 살결을 혀로 핥으며 시온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엉덩이에 대었다. 이미 스스로 옷을 벗어 던진 화준은 나체 상태였다. 시온은 두 손에 잡히는 엉덩이를 꽉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화준이 뿜어내는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아이가 모유를 먹듯 달라붙어 자신의 젖꼭지를 빨고 있는 화준을 내려다보고 시온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온몸에서 들끓고 성욕을 부채질했다. 정말 이러다가 화준을 다치게 할까 봐 겁이 났다.

“자, 잠깐만.”

시온은 달라붙어 있는 화준의 몸을 밀어 내고 숨을 골랐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화준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의 손을 잡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걷는 걸음걸음마다 진한 정욕이 묻어나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침실 문을 연 시온이 힘을 줘 손목을 당겼다. 흥분감에 뜨겁게 달아오른 육체가 품 안으로 풀썩 쓰러지듯 안겨 왔다. 화준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시온이 화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오늘은 네가 울어도 못 놔줄 거 같으니까 각오해.”

화준은 말없이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이 이별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하지 못하게 엉망으로 범해지고 싶었다. 시온은 그의 몸을 감싼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에 눕혔다. 잔뜩 흥분한 사람치고 지나치게 정중했다. 몸 위에 올라탄 시온이 천천히 입술을 시작으로 온몸 구석구석을 빨고 핥아 댔다.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올수록 화준의 턱이 들리고 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하아, 그냥, 흣, 넣어 주면, 읏!”

볼품없는 성기가 시온의 입 안으로 들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화준은 손을 내려 억지로 그의 머리를 밀어 내 보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혀를 움직였다. 아! 뜨거운 감각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치고 올라왔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조이고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기운이 몰아쳤다.

“아아! 읏, 제, 발!”

한계점을 넘은 쾌감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화준은 두 손으로 시트를 꽉 쥐고 스스로 허리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능이었다. 시온은 입술을 모아 성기를 꽉 조여 물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귀두만 살짝살짝 빨았다가 금세 입을 크게 벌려 성기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

“흐읏, 비, 흣, 비켜.”

참을 수 없는 사정감이 몰아치고 아랫배가 꽉 조여 왔다. 아, 안 돼. 그의 입 안에 갇힌 성기를 빼내려 화준은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시온은 입술을 더 조이며 사정을 유도했다. 마침내 시온의 입 안에 비릿한 액체가 퍼지기 시작했다. 화준은 상체를 약간 세웠다가 금세 탈력감에 몸을 늘어뜨렸다.

시온은 입 안을 채운 액체를 손바닥에 뱉어 낸 다음 화준의 아래에 치덕치덕 문질렀다. 그의 손이 천천히 회음부를 문지르고 구멍을 매만졌다. 정액이 빠르게 말라 갔다.

투박한 손가락 하나가 아래를 벌리고 몸속으로 밀려들었다. 화준의 동공이 저절로 확장되었다. 몇 번이나 시온과 몸을 섞으면서 겪었던 행위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낯선 느낌이었다. 침대에 엎드려 시온을 받아 내고 있는 화준의 입에서 날카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시온은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포인트만 쾅쾅 때려 박는 통에 눈앞이 흐려지고, 몸을 가눌 힘까지 모두 빼앗아 갔다. 침대를 짚고 몸을 지탱하던 팔이 풀썩 꺾여 상체가 침대로 쓰러졌다.

엉덩이만 바짝 쳐들고 있는 자세가 되자, 시온은 목을 긁는 듯한 신음을 쏟으며 화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빠른 속도로 아래를 들쑤시는 감각에 화준은 입을 틀어막았다.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으, 하읏, 처, 천천히, 흣!”

손을 뒤로 뻗어 시온의 몸을 두드렸지만, 그는 도리어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삽입점이 깊어졌다. 내장을 밀어 내고 자리를 잡은 성기가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고개를 떨구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의 깊이였다. 정말 이러다가 정신이 나가 버릴까 봐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만, 흣, 그만.”

“각오하라고 했잖아.”

목소리가 갈라져 볼품없이 새어 나왔다. 벌써 몇 번의 사정을 했음에도 몸을 태우는 듯한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신경 줄이 날카롭게 당겨졌다. 시온은 팔을 놓아주고 몸을 앞으로 숙여 화준의 등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마치 불구덩이에 던져진 것처럼 몸이 끓어 댔다. 안고 있음에도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으윽, 얼굴, 흣, 얼굴 볼래.”

버둥거리며 애원하는 화준의 몸에서 성기를 빼내고 몸을 뒤집어 바로 눕혔다. 눈물로 범벅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화준을 보자 무섭게 욕구가 치받았다. 다리를 밀어 올려 벌어진 구멍을 확인하고 성기를 삽입했다. 매끄럽게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성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고개를 숙여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입 안에서 몇 번이고 굴려진 젖꼭지가 꼿꼿하게 서서 입 안을 채웠다. 혀로 감아 꾹 찍어 누르자, 화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왜 이렇게 갈증이 나는지 시온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준과 몸이 연결되어 안고 있음에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이를 세워 젖꼭지를 깨물자 화준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 아파요. 흐, 아프다고.”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지 모르겠어. 이유를 모르겠어. 화준아. 도화준!”

애처롭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준은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아무리 숨기고 또 숨기려고 해도 이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화준은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괜찮다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꽉 막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온의 허리에 다리를 감싸고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쾌락에, 그리고 슬픔에 화준은 큰 소리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다시없을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화준에게 시온은 온 세상이 자신을 버리고 저주한다고 생각했던 때 한 줄기 빛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거짓으로 일관되어 온 삶마저 진실이라고 믿게 할 만큼 행복한 날들이었다.

몸속을 헤집는 그의 열기에 화준은 크게 숨을 삼켰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렀다. 화준은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시온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물렸다.

시온은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지독한 사정감에 몸이 덜덜 떨렸다. 마음까지 더해진 섹스는 큰 충족감을 선사했다.

화준의 혀를 빨며 매섭게 몰아쳤다. 퍽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방 안을 울렸다.

“하아, 우웁! 으, 읏, 읍.”

혀뿌리를 뽑을 생각인지 시온은 혀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포인트만 쾅쾅 내려찍어 화준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아랫배가 잔뜩 조이고 쿠퍼액이 질질 새어 나왔다. 아아! 순식간에 눈앞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지독한 사정감에 아래를 꽉 조이며 시온의 팔뚝을 붙들었다. 그 순간 그도 움직임을 멈추고 깊숙이 성기를 박아 넣었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화준의 몸 이곳저곳에 입술을 찍어 누르며 나른한 후희를 즐겼다. 아직도 불안한 마음이 들끓었지만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씻겨 줄까?”

손으로 화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다정스레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화준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몸속 깊이 박혀 있는 성기를 빼내고 화준을 침대에 눕혔다. 시온은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대로 그의 옆에 누웠다.

품 안으로 화준이 슬금슬금 기어들어 왔다. 시온은 품 안에 느껴지는 온기에 희미하게 웃었다. 몸을 모로 누워 화준을 끌어안았다. 색색― 내쉬는 숨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시온 씨.”

“응?”

“웃어 봐요.”

뜬금없는 말에 화준을 품에서 떼어 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어서 웃어 보라며 채근하는 목소리에 시온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화준은 손을 뻗어 눈꼬리를 문질렀다.

“됐어?”

“웃을 때 여기가 이렇게 휘어요.”

“넌 더 예뻐.”

“여기에 작은 점이 있네요.”

짙은 눈썹에 파묻힌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점이었다. 화준이 손끝으로 점을 훑자, 시온이 미간을 좁혔다.

“넌 여기에 점이 있지.”

시온은 화준의 빗장뼈 아래에 난 점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화준이 늘 착용하는 보정 속옷 바로 위에 있어 그의 몸을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은밀한 점이었다. 시온이 고개를 숙여 점을 핥았다. 화준은 한숨 같은 신음을 뱉어 냈다. 마음이 술렁거렸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우리에게 시간은 많아. 네가 도화준 신분을 찾는다고 해도 난 너 못 놔줘. 이제 그럴 수가 없어.”

“……정말 행복한 거 같아요.”

손을 뻗어 시온의 얼굴을 감싼 화준이 작게 말했다. 두근두근 심장의 기분 좋은 떨림을 느끼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 심장도 내일이면 싸늘하게 식어 문드러질 것이다.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화준은 고요하게 눈을 감았다.

* * *

“미안해, 갑자기 일정이 잡혀서. 도착하면 전화할게.”

“…….”

“화났어?”

화준은 고개를 저었다. 오전에 갑자기 시온의 해외 출장이 결정되었다. 전무로 취임하고 나서 계속 공들인 회사가 계약 의사를 극적으로 전해 왔다. 그래서 급하게 베트남으로 가야 했다. 일정을 다음 날로 미뤄 보려고 했지만, 그쪽에선 오늘 계약을 주장하고 있어서 미룰 수가 없었다. 화준을 혼자 서울로 보내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규모가 제법 큰 계약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같이 못 가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다음 달쯤에 휴가 낼 테니까 여행 한 번 더 다녀오자.”

어르고 달래 보지만 화준의 굳은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시온은 결국 한적한 도로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몸을 돌려 화준의 턱을 쥐고 끌어당겼다.

“그냥 너랑 같이 서울로 갈까?”

“아니요.”

“근데 왜 그러는데? 하루 떨어지는 거잖아. 아니면 출장 같이 갈래?”

“죄송해요.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요.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시온은 화준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의 미열이 있었다.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벗기려고 하자 화준이 손을 들어 막았다. 화준은 퉁퉁 부은 눈 때문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껏 시온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일방적인 이별을 하고 떠나야 하는 마음이 미어졌다. 시온이 이런 결정을 하고 떠난 자신을 미워할까 봐, 이 뜨거운 마음마저 곡해할까 봐 걱정됐다.

“시온 씨.”

“응.”

“제 마음은 진심이에요. 정말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어요. 비록 내 삶은 다 거짓이지만 이 마음은 정말 진심이에요.”

“알아. 그래서 고마워.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워.”

“다른 건 의심해도 되지만 내 마음은 의심하지 말아 줘요. 꼭.”

화준은 혀를 굴려 입 안을 느리게 문질렀다. 시온은 고개를 숙여 화준의 입술에 입 맞추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출국 절차를 마치고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시온의 휴대폰이 계속 울렸지만, 그는 무시하고 화준의 손을 꽉 잡았다. 화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쳐다봤다. 이제 정말 이별이 실감 났다. 예정에 없던 일정에 조금 더 빨리 헤어지는 게 마음 아팠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시온이 있는 집 안에서 혼자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다.

“시간 다 됐다. 들어가.”

“건강하게 다녀와요.”

“하, 뭐야. 하루 떨어지는 건데, 뭐가 이렇게 애달파.”

시온이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부러 장난을 걸었다. 하지만 화준은 웃지 않았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화준은 몸을 일으켜 캐리어를 끌었다. 시온은 화준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잘 지내요. 안녕. 정말 고마웠고 미안해요.’

화준은 그의 품에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이제 정말 이별이었다. 치미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몸을 돌렸다.

“전화할게.”

시온의 목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앞만 보고 걸었다. 캐리어 바퀴가 요란하게 구르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화준은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몸을 돌려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안녕……. 고마웠어요.’

시온은 화준이 출국장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침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베트남 출장에 관련한 보고 사항이 많아서 통화가 제법 길어졌다. 출국 시간이 가까워지자 통화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뻐근한 몸을 툭툭 두드리며 몸을 일으키는 찰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해령이었다.

“여보세요.”

-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내가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지 알아요!!

귓가를 쨍하게 울리는 음색에 시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해령은 마치 연락 두절한 남자 친구를 닦달하듯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까?”

- 내 말 잘 들어요. 나 정말 내 의사 생활 다 내려놓고 당신한테 말하는 거야. 화경 씨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불쌍하잖아! 이제 간신히 행복해졌는데 또 힘들어지면 그 사람이 죽어, 정말 죽어 버릴 거 같아서.

시온은 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풀고는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해령의 입에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이 나오면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요. 무슨 일입니까?”

- 당신 아버지가 화경 씨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리고 화경 씨한테 떠나라고 했대요.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다고 그랬어요.

“……뭐라고?”

- 화경 씨 잡아요……. 제발 잡아 줘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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