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 네가 없는 곳 (1)
시온은 두 대의 휴대폰을 나란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정혁을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혁이 옆구리에 서류철 몇 개를 끼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여느 때처럼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시온에게 다가와 챙겨 온 서류철을 내밀었다.
“이리 와서 앉아요.”
시온은 마른 입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으며 그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관찰했다. 그의 숨소리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에 정혁의 시선이 닿았다. 그런데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눈빛 하나 떨리지 않는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완벽한 포커페이스인가, 아니면 모르는 걸까. 시온은 그가 내미는 결재판을 받아 들었다.
“리조트 부지 답사는 잘하고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위치가 좋아서 최대한 빨리 착공할 생각입니다.”
“내일 보고서 양식 따로 올리겠습니다.”
시온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내용을 확인하고 재킷 앞쪽에 꽂아 놓은 만년필을 뽑아 사인을 휘갈겼다. 그리고 다시 결재판을 정혁에게 내밀었다. 사실 시온은 약간 혼란에 빠졌다. 분명 두 개의 휴대폰 중 하나는 도화준이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정혁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만약 통화 내역서를 정혁이 조작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까슬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매우 편안한 얼굴이었다. 시온은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끌어다가 양손에 쥐었다.
“이 휴대폰은 도화경이 쓰는 겁니다.”
시온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정혁은 별 감흥 없는 눈으로 그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개통해 드린 거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 말 없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 나한테 보낸 통화 내역과 실제 통화 내역이 다르던데.”
정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시온을 마주 보았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이내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전무님께서 미리 지시해 놓으신 사항이 아니었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정혁은 휴대폰을 시온의 앞에 밀었다. 흠? 시온은 몸을 앞으로 내밀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정혁의 개인 메일이 아닌 선우 그룹 전무실 공식 메일이었다. 최상단에는 통신사에서 보낸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어제 전무님께서 통화 내역 조회를 지시하신 직후 공식 메일로 통화 내역이 도착했습니다. 저는 전무님께서 미리 지시하신 사항인 줄 알고 따로 확인하지 않고 바로 보내드렸습니다만, 문제가 있는 겁니까?”
“그래서 너는 이 일에 전혀 상관이 없다?”
“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전무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혁은 딱 잘라 말했다. 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래 시온이 말을 낮추면 정혁도 말을 낮추는 게 일반적이지만, 현재 정혁은 그 기본조차 되지 않았다. 눈에 띄게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시온은 집요하게 시선을 보내며 정혁을 추궁하고 있었다. 어떤 누구보다 제일 가까운 위치에서 시온을 보며 자라 왔기 때문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온은 턱밑을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도리어 자신의 결백함이라도 증명하려는 듯 시선을 마주치고 허리를 곧게 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요청하지도 않은 자료가, 그것도 개인 메일도 아닌 공식 메일로 도착했다라. 평소의 정혁이라면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혁은 의심도 하지 않고 그 메일을 고스란히 자신에게 넘긴 것이다. 정혁에 대한 의심이 짙어졌다.
“내가 지시하는 모든 일은 박 비서님 개인 메일이나 혹은 내 개인 메일로 오는 게 일반적입니다만. 한 번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볼 법한데?”
“……오늘 아침 회장님 비서실에서 급한 호출이 왔고 회장님을 뵙고 내려오느라 좀 정신이 없었습니다.”
“회장실에서? 이유는?”
“전무님께서 왜 갑자기 리조트 부지 답사를 결정했는지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모님께서 동행하셨는지, 나경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갑자기 튀어나온 의외의 인물에 시온의 얼굴이 굳었다. 공 회장은 지금껏 한 번도 시온의 개인적인 일정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직속 비서인 정혁을 불러 일정에 관해서 물었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점점 파고들수록 미궁에 빠지는 듯한 기분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내일 출근 즉시 회장실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시온은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토독토독―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공 회장의 호출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런 각오 하나 없이 거제도행을 무작정 결정하진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누가 화준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정혁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정체를 의심하고 목을 조이고 있다는 건데…… 누굴까. 시온은 깊은숨을 내쉬고 시선을 내리깐 채 앉아 있는 정혁에게 말했다.
“통신사에 연락해서 제대로 된 통화 내역 가지고 와. 그리고 비서실로 걸려 온 전화에 대해서도 사람 써서 제대로 파악해. 혼자 움직일 생각 하지 말고 사람 써. 그리고 이거…….”
시온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화준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정혁에게 내밀었다. 정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일단 휴대폰을 받았다. 그 순간 시온이 정혁의 손을 쳐 올려 휴대폰을 허공 위로 띄웠다. 정혁이 놀랄 새도 없이 공중에 뜬 휴대폰은 시온의 손바닥에 세게 얻어맞고 전면을 채우고 있는 장식장 유리를 부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사무실을 울렸다.
“경고야. 넌 나를 배신하면 안 돼. 내가 아무리 쓰레기 짓을 하고 시궁창을 굴러도 넌 절대로 배신해서는 안 돼. 저기 처박힌 게 휴대폰이 아니라 네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래야 할 거야.”
박정혁에 대한 의심을 거둔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 게임에서 움직일 수 있는 말은 박정혁뿐이었다. 정혁은 충직한 비서의 모양새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명심, 하겠습니다.”
정혁은 약간 지친 얼굴로 서류철을 모아 옆구리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오후에 급하게 보고받은 내용을 떠올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 시온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눈을 감고 있었다.
“전무님.”
“……?”
“말씀하신 매일 TV의 숨겨진 주주는 나경준이라고 합니다.”
온기라고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침대를 가만히 손으로 문지르며 화준은 얕은 숨을 내쉬었다. 요즘 시온은 회사가 바쁜 모양인지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거제도에 다녀온 이후로 보지 못했으니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화준은 나름 시온을 보기 위해서 늦은 밤까지 안간힘을 쓰며 기다려 보지만, 어느새 소파에 기대어 잠들기 일쑤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라면 분명 시온을 기다리다가 지쳐 잠들어도 항상 눈을 뜨는 건 2층 침실이었다. 시온이 꼬박꼬박 집에 들어온다는 거겠지?
화준은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으슬으슬한 게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해령과 상담 예약이 잡혀 있는 날이라서 외출해야 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콜록콜록― 목구멍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기침이 연신 터져 나왔다. 화준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훔쳐 내고 화장대 앞에 앉아 긴 머리 가발을 눌러썼다. 요즘은 아무리 가까운 곳에 나가더라도 가발을 착용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자신이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임을 알고 있다는 게 불안했다.
기운이 없어 메이크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간단하게 기초화장을 하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색을 더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할 때마다 목구멍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단단히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목에 작은 스카프를 둘렀다. 목을 따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어 보고 가방을 손에 들었다. 터덜터덜 기운 없는 걸음으로 현관 앞에 섰다.
신발장을 열어 마땅한 신발을 찾아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러다가 눈에 익은 구두 하나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언젠가 시온이 선물한 구두였다. 오프 숄더 드레스를 입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툴툴거리던 시온의 모습이 떠올라 희미하게 웃었다.
화준은 망설이지 않고 신발에 발을 끼워 넣었다. 집 안을 한번 둘러보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가볍게 날렸다. 화준은 깊은숨을 몰아쉬고 가볍게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어디 가십니까.”
건물과 외부를 연결해 주는 출입문이 열리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다가와 화준의 앞을 막아섰다. 화준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눈을 크게 떴다. 화준의 반응에 놀란 건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는 공 전무님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남자가 다급하게 신분증을 꺼내 확인시켰음에도 화준은 겁을 집어먹고 조금씩 더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화준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화준은 가방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전화기에 대고 상황을 설명했고 곧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
- 화경아, 내 말 들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시온의 목소리에 화준이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고 다가오자 남자가 스피커 모드를 끄고 화준의 손에 전화기를 쥐여 주었다. 화준은 남자를 향한 경계심을 풀지 않고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여, 여보, 여보세요.”
- 나야.
화준은 전화기를 두 손으로 쥐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심장은 정신없이 뛰어 대고 목소리를 꽉 잠겨 나오지도 않았다.
-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나쁜 사람들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밥은 먹었어?
“왜, 왜…… 왜 안 와요?”
-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보고 싶어요.”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바쁜 시온에게 괜한 피해를 주게 될까 봐 전화기만 들었다가 놓은 게 여러 번이었다. 막상 시온의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공허한 마음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와 눈물이 되어 흘렀다.
억지로 괜찮은 척, 멀쩡한 척,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빈자리를 느끼며 홀로 보내야 했던 날들이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보고 싶어요.”
전화기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화준은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다시 한번 시온을 불렀다. 그래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입술을 하도 씹어 피가 배어날 때쯤 전화기를 타고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갈게.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뱉어 내고 전화기를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화준은 외출을 포기하고 다시 계단을 밟아 집으로 들어갔다. 이유 모를 무력감이 찾아와 화준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음이 무겁고 힘들었다. 분명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괜찮았다. 그런데 시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화준은 한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공시온과의 이별을 이젠 상상도 할 수 없음을 느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거실로 들어가 바닥에 누웠다. 콜록콜록― 쏟아지는 기침에 인상을 찌푸리며 열감이 느껴지는 이마를 짚었다. 아까보다 훨씬 열감이 높아졌다. 색색―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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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경!”
시온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화준의 몸을 안아 올려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손바닥을 채우는 열기를 느꼈다. 화준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고 상대를 확인했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온의 모습에 손을 뻗어 와락 안았다.
“가, 지 마. 가지 마.”
목소리가 꽉 잠겨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준은 필사적으로 시온의 몸에 매달렸다. 이게 자신에게 내려진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시온은 화준의 등과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안아 들었다. 화준은 혼곤한 와중에도 끊임없이 시온의 존재를 확인하고 매달렸다.
시온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화준이 불안해하는 요소를 빨리 제거해 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화준이 편안해질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화준은 전혀 다른 곳에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나는 그저 널 위해서…….”
“고, 공시온.”
“그래, 나 여깄어.”
화준의 곁에 사람을 붙여 둔 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였다. 불특정 인물이 화준의 신변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수상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시온은 시온 나름대로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불안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전화를 받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화준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무너졌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고 싶어요.’
울음을 꾹꾹 삼키고 애원하는 목소리에 시온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회의를 중단하고 차에 오를 때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과속 단속 카메라도 무시한 채 속도를 높였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화준을 발견하자마자 심장은 발밑으로 툭 떨어졌다.
“화경아, 여기 눕자.”
화준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침실에 올라와서도 화준은 제 목에 두른 손을 풀지 않고 매달렸다. 숨이 얼마나 뜨거운지 귓가에 숨이 닿을 때마다 눅눅함이 느껴졌다.
“갈 거잖아. 가 버릴 거잖아.”
“안 가. 네 옆에 있을게. 절대로 아무 데도 안 가.”
화준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팔에 힘을 풀었다. 시온은 화준을 침대에 눕혀 놓고 재킷을 벗어 한쪽에 놓았다. 거추장스러운 가발을 벗겨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자신의 이마와 비교해 가며 열을 체크하던 시온은 수건을 물에 적셔 화준의 이마에 얹어 놓고 서랍을 열어 해열제를 찾았다. 자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던 화준은 약 기운에 취해 금세 새근새근 잠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그새 살이 내린 얼굴을 가만히 쓸었다. 아무리 바쁘고 일이 많아도 꼬박꼬박 집에는 들어왔다.
하루의 피로가 잠든 화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라 무리를 해서라도 귀가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늘 소파에서 자신을 기다리다가 지쳐 잠들었을 화준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시온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시온은 화준이 깰세라 다급하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소리부터 죽였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시온은 이불을 끌어다가 코끝까지 덮어 주고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왔다.
“말해요.”
정혁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한 시온은 은밀하게 자기 일을 해 줄 사람을 고용했다. 공식적인 부분은 정혁에게 듣고 진위는 고용인을 통해서 확인했다.
- 매일 TV의 숨겨진 주주는 말씀하신 대로 나경준이 맞습니다.
“흠, 그렇군요.”
- 나경준의 비서를 포섭해 알아본 결과 나경준은 2세 계획으로 바쁜 것 같습니다. 유명 한의원을 찾아 전국을 유랑 중이랍니다.
시온은 1층으로 내려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경준은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말인가?
매일 TV의 존재가 시온의 귀에 들어온 건 정혁의 입을 통해서였다.
비서실로 수상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할 무렵, 매일 TV의 한 기자가 선우 그룹 본사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붙잡혔기 때문이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매일 TV가 그 전화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모자라 나경준이 숨겨진 주주라는 사실이 더해졌을 때는 거의 확신했다. 그런데 그가 2세를 갖기 위해서 전국 한의원을 유랑 중이라니,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시온은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돌고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온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다른 건 없습니까?”
- 신성 건설에 대한 자료는 만나서 직접 드리겠습니다.
시온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거리고 2층 쪽에 시선을 두었다. 약을 먹고 잠든 화준이 깨려면 몇 시간은 있어야 할 테니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30분 후에 저번에 만났던 곳에서 뵙죠.”
- 네, 알겠습니다.
시온은 2층으로 올라가 곤히 잠든 화준을 확인하고 재킷을 챙겨 입었다. 아직도 열감이 느껴졌지만 평온한 얼굴을 한 그의 뺨에 짧게 입 맞추고 방에서 나왔다.
* * *
화준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몸을 뒤척이며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테이블 위 자신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회장님’이라는 글씨가 떠 있었다. 화준은 얼른 이불을 걷어 내고 똑바로 앉아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 나다. 지금 만날 수 있니?
“네? 아, 네.”
- 기사 보낼 테니 회사로 좀 오너라.
지독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시온이 따뜻하게 안아 주는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 눈앞을 어지럽혔다. 보고 싶다. 몸이 아프니까 더 시온이 보고 싶었다.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린 화준은 약 기운에 취한 몸을 추슬러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땅에 발이 닿자마자 눈앞이 핑 돌았다. 목구멍을 긁어 대는 기침도 여전했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열기 때문인지 입 안이 모래가 든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화준은 침실을 벗어나기 전 휴대폰을 집어 들어 다시 한번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회장님’이라고 선명하게 찍힌 글씨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몽롱한 머리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깊은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드레스 룸에서 원피스를 꺼내 속옷부터 하나씩 챙겨 입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몸이 축축 늘어지고 열이 화끈하게 올랐다. 원피스 매듭을 짓고 한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쓸었다. 흥건히 묻어나는 물기에 힘없이 웃었다.
간단히 메이크업을 마친 화준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화준은 코를 문지르고 휴대폰을 꺼내 시온의 전화번호를 화면에 띄웠다.
회장님을 만나러 가면 본사로 들어갈 테니 잠시나마 시온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꿈에서처럼 시온이 따뜻하게 안아 준다면 이 공허한 마음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
화준이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떠올랐다. 화준은 발코니 쪽으로 다가가 밖을 확인했다. 빌라 앞에는 대형 세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아마 공 회장이 보낸 것 같았다.
“여보세요.”
- 공 회장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네, 금방 내려갈게요.”
화준은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고 얼른 몸을 움직였다.
밖으로 나오자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차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화준은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숙여 차에 올랐다. 기사는 문을 닫아 주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누군가와 잠시 통화를 했다. 화준은 창밖에 시선을 두고 눈을 감았다. 아직 열감이 느껴지는 몸 때문이었다.
“저기…….”
“네?”
“회장님께서 휴대폰을 받아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휴대폰 좀 주시겠습니까.”
화준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별말 하지 않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넘겨주었다. 남자는 화준의 휴대폰을 넘겨받아 글러브박스에 넣었다.
차는 천천히 빌라를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섰다. 청아한 녹음을 머금었던 나무들은 어느새 울긋불긋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을을 실감하며 화준은 좌석 시트에 몸을 기댔다. 열 때문인지 자꾸 목이 말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어서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공 회장님의 비서, 유철중이라고 합니다.”
선우 그룹 본사 앞에 차가 서자,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유 비서가 가까이 다가와 뒷좌석 문을 열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화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유 비서를 따라 올라간 최상층의 회장실은 복도부터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먼지 한 톨 없는 대리석 바닥을 걷는 내내 숨이 막혔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유 비서는 화준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그쪽으로 다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무리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디론가 움직였다. 화준은 감흥 없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유 비서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회장실로 이어지는 문을 활짝 열었다. 스산할 정도로 내부에 사람이 없었다. 화준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비서 데스크를 지나 또 다른 문 앞에 섰을 때 유 비서는 화준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화준이 놀랄 새도 없어 회장실 문이 열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공 회장이 보였다. 공 회장은 화준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러 감정들이 교차하는 표정에서 화준은 이유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수없이 상상하고 생각했던 그 상황 ……. 화준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문손잡이를 잡았다.
“이리 와서 앉아라.”
“……자, 잠깐만요. 저, 전무님부터 뵙고 싶어요.”
“두 번 말하기 싫다. 이리 와서 앉아라.”
화준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정말 수없이 상상했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음 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극한의 공포에 토기가 올라왔다. 화준은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네가 도화경인지, 아니면 도화준인지만 확인하면 된다.”
화준은 공 회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으로 시온의 얼굴이 빠르게 스쳤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어.
“……저, 저는, 회장님, 저는…….”
“나는 네가 누구든 널 탓할 생각이 없다. 너도 어쩔 수 없었겠지.”
공 회장은 애잔한 눈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았다. 참 꽃같이 예쁜 아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인사를 온 날부터 어쩐지 자꾸 마음이 가서 특별히 아끼고 어여삐 여겼다. 그런데 어젯밤 받은 전화 한 통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 살 때 죽은 건 도화준이 아니라 도화경이다. 지금 당신의 며느리로 살고 있는 건 도화준이다.’
처음에는 장난 전화쯤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연달아 문자 메시지로 도착한 사진들을 보고 기함했다. 공 회장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감쪽같이 사람을 속인 화준을 당장 불러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몇 개월 동안 지켜본 화준은 심성이 착하고 유약했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 악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이 집안에 들어왔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공 회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 회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화준을 회사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닙,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화준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울음이 터졌다. 끅끅― 울음을 삼키려고 해도 자꾸만 죄송하고 또 죄송한 마음에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공 회장은 착잡한 마음으로 화준의 머리꼭지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네 부모의 간악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지. 하지만 네가 그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게다. 만약 이 일이 언론에 알려진다면 선우 그룹의 명성 역시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 말이다. 나는 내 새끼들도 중요하지만 이 회사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정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 죄송합니다.”
“시온이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게지? 네가 남자라는 걸.”
“저, 전무님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제가 다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전무님은, 전무님은, 몰라요.”
화준의 울음소리가 거세졌다. 시온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적어도 시온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 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영특하고 기민한 아들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이 일을 제안한 것도 제 아들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준은 필사적으로 시온을 변호하고 있었다.
“시온이 곁에 있고 싶은 게냐.”
“……네. 염치없지만 정말,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엉엉 울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는 공 회장의 눈빛이 짙어졌다. 심성이 고운 아이라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미 도화준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까지 접근해 올 정도면 시한폭탄이나 진배없었다. 공 회장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고개 들어라.”
화준은 중후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른 손으로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지우고 상체를 세웠다. 죄송한 기분이 들어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감기 기운 때문에 정신없는 머리를 다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네가 시온이 곁에 있는 건 독이 될 게다. 시온이는 장차 선우 그룹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놈이다. 그런 놈에게 약점 같은 게 있으면 안 된다.”
“회장님…… 저, 전무님이 너무 좋습니다. 이런 마음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눈물이 범벅인 채, 제 아들놈이 좋다고 말하는 화준이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악조건이라면 뭐 어떻게 해 보겠다만, 성별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공 회장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네가 시온이를 떠나는 조건으로 신성 건설과 네 부모에게 이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마. 그리고 시온이의 자리도 흔들지 않겠다. 그럼 되겠니?”
뺨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흘렀다. 화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신성 건설을 무너뜨려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부모였다. 만약 화경이가 그렇게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행복한 삶을 꿈꾸었을 가족이었다.
“……회장님.”
“……?”
“염치없지만, 정말 염치없지만 전무님 곁에 딱 일주일만 있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 *
시온은 신성 건설에 관한 자료만 넘겨받고 곧장 귀가했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째 밤낮으로 일하다 보니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소파 테이블에 서류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화경……!”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화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열이 펄펄 끓는데 대체 어딜 간 거야. 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세면대에 남은 물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 몸으로 어딜 간 거야!
시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입구에 세워 놓은 가드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외출하기 전 그들을 돌려보낸 일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화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아도 연결음만 들릴 뿐, 받지 않았다. 아직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딜 간 거야. 시온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 온기를 체크했다. 온기가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나간 지 얼마 안 됐다는 소린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시온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혁이었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체념한 듯 얼굴을 굳히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입니까?”
- 회사로 좀 오셔야겠습니다.
“오후 일정 모두 취소하라고 했을 텐데요.”
- 조금 전에 사모님께서, 회장실로 올라가셨습니다.
“뭐? 회장실에 왜?”
- 잘은 모르겠으나 비서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유 비서를 제외한 비서실 사람들이 모두 밖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회장실 층의 CCTV 역시 회장님 지시로 꺼진 상태입니다.
시온은 전화를 끊고 빠르게 집에서 나왔다. 회장님이 비서실 직원 전원을 내보내고 유 비서만 남기고 일을 처리할 때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공 회장이 화준과 독대를 할 만한 상황, 그건 딱 하나뿐이었다. 만약, 화준이 남자라는 사실을 공 회장이 알고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차에 올라 스타트 버튼을 누르는 손이 벌벌 떨렸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주무르며 자동으로 연결된 블루투스를 통해 정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혁을 의심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긴 연결음 끝에 정혁의 목소리가 차내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상황 주시하고 최근에 회장실에 낯선 사람이 드나든 적이 있는지 상세하게 알아봐. 지금 가고 있어.”
- 회장실 앞에 경호팀이 막아서고 있어서 접근하기가 힘듭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 혹시…….
정혁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 시온은 고함을 질렀다.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마! 입 닥쳐!”
시온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운전대를 세게 내려쳤다. 모든 게 다 불안하고 두려웠다. 살면서 이렇게 두려운 적은 없었다. 모든 걸 다 누리고 살아온 인생이라서 이런 두려움 따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어떤 누구보다 볼품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도화준을 잃게 될까 봐, 정말 마음속 깊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 다칠까 봐……. 그리고 처음으로 도화준을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을 뼈아프게 후회했다. 시온은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도화경!”
끼익―! 차 바퀴가 노면과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시온은 안전벨트를 허겁지겁 풀고 차 문을 열어젖혔다. 유 비서와 함께 로비를 빠져나오던 화준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화준은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공시온…… 공시온,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넌 왜 말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시온은 화준의 어깨를 감싸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풀썩 안겨 오는 몸에 열기가 화끈하게 묻어났다. 몸을 떼어 내 이마를 손으로 짚어 열감을 체크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온은 이를 악물었다. 콜록콜록― 화준이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쏟아 냈다.
“괜찮아?”
“네, 네.”
“일단 병원으로 가자.”
“집에, 가고 싶어요.”
시온은 화준의 상황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몸이 아파도 특정된 병원으로밖에 갈 수 없었다. 시온은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옆에 서 있는 유 비서를 바라보았다. 유 비서는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얼굴로 시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로 아버지께서 화경 씨를 부른 겁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유 비서를 제외한 모든 비서실 직원이 밖에서 대기했다던데.”
“회장님과 작은, 사모님께서는 독대하셨습니다.”
유 비서의 말에 시온이 실소했다. 절대 공 회장은 유 비서를 물리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아니었다. 공 회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그래서 어딜 가나 수족처럼 유 비서를 데리고 다녔다. 시온이 본격적으로 추궁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화준의 손이 소맷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시온은 잠시 유 비서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려 조수석 차 문을 열었다. 화준은 얌전히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했다. 차 문을 닫은 시온이 유 비서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오세요.”
“……죄송하지만 내일부터 회장님의 해외 출장 일정이 있습니다.”
시온은 까슬까슬하게 올라온 턱수염을 슬슬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화준을 호출한 다음 하필 내일부터 해외 출장이라니, 불쾌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하지만 유 비서는 곧은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래요, 그럼 출장 다녀와서 다시 봅시다.”
시온은 찝찝한 기분을 삭이며 차에 올랐다. 시트에 힘없이 몸을 기대고 있는 화준의 이마를 짚은 시온이 욕설을 뱉었다. 이마가 불덩이였다. 시온은 해령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집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화준을 바라보던 시온이 간신히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았다.
“괜찮아?”
“졸려, 요.”
“열이 심해.”
화준은 땀이 흥건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훔치고 희미하게 웃었다. 시온과 함께할 시간이 앞으로 딱 일주일밖에 없었다. 정신이 혼곤한 와중에도 곁에 있는 시온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감고 있어도 잊어버리지 않게 정말 많이 봐 둬야지. 화준은 고개를 돌려 운전대를 잡은 시온을 바라보았다.
“왜? 많이 아파?”
“아니요. 그냥, 좋아서요.”
마침 신호에 걸려 차가 정차했다. 시온은 실없이 웃는 화준의 뺨을 가만히 쓸어 주고 다시 한번 열을 체크했다. 손바닥 아래로 뜨끈한 열기가 느껴져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렇게 아픈 사람을 불러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굳이 화준에게 묻고 싶지 않았다.
파리한 안색만 봐도 좋지 않은 이야기가 오간 게 분명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유 비서를 족치면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온 씨.”
“응?”
“우리 여행 가요.”
“갑자기?”
“저, 오키나와 가고 싶어요.”
시온은 머릿속으로 일정을 떠올리고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렸다. 갑자기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화준의 눈빛에는 애절함이 뚝뚝 묻어났다.
“콜록― 가면 안 돼요?”
꼭 가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시온은 곧장 정혁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연결음이 길지 않게 들렸을 때 무뚝뚝한 정혁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시온은 잠시 차를 갓길에 세우고 전화기를 귓가로 가져갔다.
일정을 조율해서 시간을 낼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정혁은 단호하게 안 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긴 본사에 들어오면서 업무량이 많아졌고, 참석해야 하는 행사나 회의도 많아졌다.
“다음 주로 미룰 수 있는 건 미뤄서 타이트하게 조정도 안 됩니까?”
-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일본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일정으로.”
- 흠, 아무리 타이트하게 잡아도 하루 정도밖에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시온은 화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루 만에 다녀오기에는 좀 아쉽겠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었다.
화준은 기대에 찬 얼굴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끝으로 문지르고 입을 열었다.
“일정이 타이트해서 하루밖에 시간을 못 낼 거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 아니면 시간을 좀 더 주면…….”
“아니요! 갈래요. 하루라도 갈래요.”
화준은 다급하게 외쳤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차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목소리를 크게 낸 화준은 견디기 힘든지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감기 낫고 나서 가자.”
“……아니요, 빨리 갈래요. 빨리 가고 싶어요.”
“왜 이렇게 조급한 건데? 대체 이유가 뭐야.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셨어?”
화준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회장실에서 나오기 전 강 회장과 약속한 게 있었다. 시온에게는 말하지 말 것, 일주일이 지나면 조용히 떠날 것. 강 회장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어차피 애초부터 시온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일주일밖에 없다면 그 시간을 허투루 허비하기 싫었다.
화준은 조금이라도 시온과 얼굴을 마주하고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콜록콜록― 다시 매서운 기침이 쏟아졌다. 시온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화준의 뺨을 쓸어 주고 재킷을 벗어 몸 위에 덮어 주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오키나와 가는 건 몸부터 회복하고 나서 그때 생각해 보자.”
“언제 가실 수 있는데요? 그때까지 무조건 나을게요. 네?”
“화경아.”
“언제 되시는지 먼저 알려 주세요.”
“박 비서랑 다시 이야기해 보고 알려 줄게.”
“이번 주에, 이번 주에 꼭 가야 해요.”
시간이 있을 때 많은 걸 해 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조급하게 무엇을 하려니까 마음이 바빴다. 게다가 몸까지 좋지 않으니 더 조급함이 일었다.
시온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운전대를 돌렸다. 차가 유연하게 도로로 들어섰다. 차선을 변경하면서도 눈으로는 연신 화준을 살폈다.
빌라 앞에 도착하자, 해령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앞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시온을 발견한 해령이 차로 다가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좌석에 힘없이 몸을 기대고 있는 화준을 발견한 해령이 안쓰러운 눈으로 화준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네. 언제부터 그랬어요?”
“선생님, 저 아파요.”
뜨거운 숨을 색색 몰아쉬며 아프다고 말하는 화준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게 이상해서 시온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전화기를 들고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해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준의 몸을 부축해 차에서 끌어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차에서 내린 화준은 저만치 떨어져서 통화 중인 시온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정말 잘생겼죠?”
“실없긴. 화경 씨 진짜 많이 아픈가 보네.”
해령이 작게 웃으며 화준을 부축해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화준이 현관 앞으로 다가가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화준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쾅―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화준은 서러운 울음을 토해 냈다.
“화경 씨, 왜 이래? 괜찮아요?”
“선생님, 저, 시온 씨 정말 좋아해요.”
“알아요.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까 봐?”
“좋아서 여기가 너무 아파요. 보고 있어도 자꾸 보고 싶고 마음이 막 이상해요.”
화준이 심장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힘겹게 소리쳤다. 처음부터 예정된 이별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막연하게 시간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날의 안일했던 자신을 탓하며 화준은 눈물을 쏟았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 눈앞에서 끝도 없이 흩날렸다. 안 그래도 열이 오른 화준의 얼굴에 울음이 더해지면서 더 붉게 달아올랐다. 해령은 화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끅끅― 서러운 눈물을 토해 내며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은 화준의 사랑은 어쩌면 금지된 것이리라. 남자의 몸으로 여자인 척 모두의 눈을 속이고 있는 이 사랑의 끝은 배드 엔딩이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말리고 싶지만 화준에게는 이 감정 또한 너무 애틋하고 특별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울지 말아요. 울면 열이 올라서 더 안 좋아. 응?”
“선생님, 사랑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아픈 거예요? 너무 아파요.”
해령은 화준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근데 그게 마냥 힘들고 아픈 것만은 아니잖아요. 좋고, 행복하고, 기쁘고,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고, 모든 사람이 다 겪는 아주 흔한 반응이에요.”
“근데 사랑하는데 헤어져야 한다면요?”
“네?”
해령이 놀란 눈으로 화준을 바라보았다. 화준의 얼굴이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도어록에 불이 들어왔다. 화준은 해령을 향해 집게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문을 열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시온이 다급하게 화준의 몸을 끌어 올렸다. 해령도 엉덩이를 툭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시온은 눈물범벅인 화준을 품에 끌어안고 해령에게 물었다. 해령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비척비척 소파로 걸어가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수액을 비롯한 각종 주사기와 앰풀, 알약 들이 들어 있었다. 해령은 가방 끝을 만지작거리며 화준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사랑하는데 헤어져야 한다면요?’
해령은 그 말뜻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저 둘은 헤어짐을 논하기에는 너무 애틋했다. 공시온이라는 거대한 남자는 화준을 품에서 놓지 않고 어르고 있었고, 화준은 시온의 품에 기대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저런 둘이 헤어진다고? 해령은 속으로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남자와 남자라는 핸디캡에도 둘은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있었다. 해령은 끝이 정해져 있는 사랑을 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화준은 하루를 꼬박 앓아누웠다.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을 만큼 혼곤함이 이어졌다. 열이 끓어오르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도 화준은 끊임없이 시온의 존재를 찾고 그를 확인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고 가여운지 시온은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의 곁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고요하고 아득한 밤이 지나고 밖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시온은 곤히 잠든 화준의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시온은 몸을 완전히 일으키지 못했다. 화준의 손이 셔츠 자락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시온은 다시 의자에 앉아 셔츠 자락을 꽉 붙잡고 있는 화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절박하게 구는 건데? 뭐가 널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거야?
시온은 착잡한 얼굴로 화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직 분란을 만드는 존재의 윤곽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사람을 풀어서 백방으로 찾고 있지만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손에 쥐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뭐 하나 제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없었다. 아버지께서 화준을 따로 호출한 일도, 모든 게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듯한 기분에 불쾌하기만 했다.
긴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시온은 조심스럽게 화준의 손가락을 펼쳐 셔츠 자락을 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출근 준비를 마친 시온은 다시 침실 문을 열었다. 훈기가 도는 방 안에는 화준의 살 냄새가 가득했다. 침대맡으로 가까이 다가가 두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평화롭고 잔잔한 느낌이 좋아서 시온은 눈을 떼지 못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올렸다.
“시, 시온 씨.”
“깼어?”
화준은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고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시온이 보였다. 시온은 손을 뻗어 화준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 열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어제보단 훨씬 좋아졌다.
“열 좀 떨어졌네.”
“출근, 하세요?”
“목 아프면 말하지 마.”
화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목을 매만졌다. 열은 내렸지만 목이 따끔거리는 건 어제보다 훨씬 심해진 기분이었다. 콜록―. 기침이 간헐적으로 쏟아졌다. 시온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화준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따가 강 선생 한 번 더 들르라고 할 테니까 주사 맞아.”
화준은 대답 대신 몸을 반쯤 일으키고 앉아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시온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옆을 채우는 든든함에 화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고 넉넉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준은 손을 뻗어 시온의 손에 손가락을 얽어 넣었다.
커다랗고 투박한 손이지만 화준은 이 손을 좋아했다. 자신의 외로움을 어루만져 준 유일한 손이었다. 일주일, 공 회장과 약속한 일주일 중 하루가 지났다. 늘 더디기만 하던 시간이 갑자기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곁에 있고 싶어. 함께 있고 싶어. 사랑받고 싶어. 또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
화준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맞잡은 손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화준을 바라보던 시온은 시각을 확인하고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풀어냈다. 화준은 절박한 심정이 극에 달했다. 가파른 정상을 뛰어 올라가는 것처럼 빠르게 맥박이 뛰었다. 시온은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출발해도 약간 늦은 감이 있었다. 화준과 짧게라도 여행을 다녀오려면 며칠 동안은 착실하게 회사에 나가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다녀올게.”
“……안 가시면 안 돼요?”
“웬 어리광이야.”
화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자꾸 시온을 붙잡았다. 조금이라도 오래 그와 있고 싶었다.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많이 봐 둬야 하는데. 화준은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온전치 않은 시야를 억지로 다잡으며 시온의 품에 안겨 들었다.
“같이 있고 싶어요.”
“…….”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