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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소리 없이 다가와 (11/19)

Chapter 10 : 소리 없이 다가와

정오가 가까워졌을 무렵 화준은 침대 속에서 빠져나와 기지개를 켰다. 찌뿌둥한 몸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쳤다. 화준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일 밤, 시온에게 시달리고 있는 터라 점점 기상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뻐근한 허리를 톡톡 두드리고 다시 침대에 엎드려 베개 밑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했다. 게임 알림 몇 개와 그리고 해령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번 주 상담 일정을 하루 미뤄도 되냐는 내용이었다.

화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몸을 굴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술을 먹고 시온에게 꼬장 아닌 꼬장을 부린 이후로 시온은 화준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밖에서 먹는 술도 안 되고, 해령과 상담 외 사적으로 만나서도 안 되고, 상담이 끝나면 곧장 귀가해야 한다. 그나마 마음을 나누는 상대인 해령과의 소통을 끊어 버릴 기세로 닦달하는 그에게 항의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숙지시키는 타이밍이 아주 저질스러웠다. 몸이 한껏 달아올라 삽입을 앞두고 있을 때라든가, 아니면 실컷 시온의 손에서 성기가 문질러진 채 사정을 앞두고 있을 때라든가. 그럴 때마다 시온은 “내가 널 사랑해서 그래.”라는 말로 은근하게 화준을 재촉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휴―. 화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불 더미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뻗어 끌어왔다. 그리고 화면을 콕콕 터치해서 해령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 괜찮아요.」

시온을 향한 마음이 커지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제 생활을 전반적으로 구속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특히 인간관계에 대한 부분은 더욱더 그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가 없이 자라 온 탓에 늘 사람이 그리웠다. 그리고 해령과 나누는 대화, 고민…… 이런 것들을 혼자서만 끙끙 앓기에는 좀 버거웠다. 그렇다고 시온에게 이런 제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화준의 한숨이 깊어졌다.

화준은 시온의 엄하지만 끈적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한 기분에 괜히 귀를 한번 문질렀다. 시계를 힐끗거리고 뻐근한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와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반찬 통이 빼곡했다. 며칠 전 시온의 어머니께서 가져다준 반찬이었다.

화준은 그녀를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가 주는 사랑이 너무 포근해서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와서 그런지 그녀가 주는 사랑이 달가웠다. 마치 어머니라는 사람에 의해 받아 온 상처를 그녀가 대신 어루만져 주는 기분이었다.

화준은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어 한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루한 연결음이 길게 흐르진 않았다.

- 화경이니?

귓가에서 편안하게 퍼지는 목소리에 화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 그래, 무슨 일 있니? 혹시 우리 시온이가 속 썩이니?

“아뇨. 밥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어머니가 생각나서요.”

화준은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랑을 퍼부어 주는 한 여사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 있었고, 굳이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 우리 화경이는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니. 우리 나윤이도 그래야 할 텐데.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 아직 식사 전이면 엄마가 밥 사 줄까? 이따가 경준이 결혼식도 가야 하니 엄마랑 있다가 가면 될 거 같은데.

“결혼식이요?”

- 그래. 오늘 시온이 친구, 경준이 결혼식이잖니. 혹시 시온이가 말 안 해 줬어?

화준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전혀 들은 기억이 없었다. 시온과 경준의 사이가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친구 이전에 기업 간 교류 문제라 무시할 수 없는 행사일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제가 준비해서 본가로 찾아뵐게요.”

- 그래, 알겠다.

화준은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온이 나경준의 결혼식을 왜 말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시온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지웠다. 바쁜 그를 괜히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화준은 꽤 오랜 시간 손에 쥔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역시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시온은 커다란 체경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며칠 전 전속 디자이너에게 의뢰한 슈트가 완성됐다는 소식에 부티크를 찾았다.

“이 드레스는 어떻게 할까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화준과 나경준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제 생각을 바꾸었다. 보고만 있어도 닳아서 없어질 거 같은데 그를 타인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요 며칠 찝찝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화준의 치수에 맞추어 제작된 블랙 드레스에 시선을 잠시 두었다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그건 따로 포장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드레스를 들고 물러나자 정혁이 한 걸음 크게 다가와 옷깃을 매만졌다. 시온은 그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손을 쳐 내고 직접 옷깃을 만졌다. 정혁은 허공에 뜬 손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매일 TV에 대한 자료는?”

“백방으로 알아보는 중입니다.”

“아직도?”

시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거울에 비친 정혁을 바라보았다. 비서 특유의 약간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네이비 컬러의 단정한 슈트를 입고 서 있는 그의 표정이 아주 찰나의 순간 무너졌다. 기민하게 표정을 알아차린 시온은 미간을 좁혔다.

박정혁은 비서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편이라 일과 관련해 실수를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실수가 잦아졌다. 회의 참석을 앞두고 중요한 서류를 놓고 오거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아예 잊어버리거나. 그가 가지고 오는 자료 역시 빈틈이 많았다.

박정혁이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게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뭘까. 시온은 까슬까슬한 수염을 문지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박정혁.”

시온의 목소리에 마법이 풀린 공주처럼 꼿꼿이 서 있던 그의 자세가 풀어졌다. 정혁은 잠시 시온을 등지고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가 뗐다.

“요즘 무슨 일 있냐?”

“…….”

“하루면 거뜬히 할 일인데 질질 끄는 것도 그렇고, 일에 집중도 못 하는 거 같은데 영 눈에 거슬리네.”

시온은 피팅을 마친 재킷을 벗어 파이프 행거에 대충 걸어 놓고 시각을 확인했다. 아직 결혼식까지 여유는 있었다. 느긋한 얼굴로 소파에 걸터앉은 시온은 정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정혁은 입술을 깨물고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시온의 앞으로 다가왔다.

“문제가 뭐야?”

“아직 업무 시간입니다, 전무님.”

“개소리 집어치우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시온은 아예 작정이라도 한 듯 손목에 두른 시계까지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커프스단추를 끄르고 소매를 한 번, 두 번, 세 번 접어 올렸다. 정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화려한 샹들리에 쪽에 두었다.

“말 안 해?”

“……사실은…….”

“……?”

“며칠 전에 비서실로 전화가 걸려 왔어. 도화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뭐?”

소매를 접어 올리던 시온이 손을 멈추고 시선을 정혁에게로 향했다. ‘도화준’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전화가 반복적으로 걸려 오고 있고 늘 다른 번호, 그러니까 선불 폰이나 대포 폰으로 추정되는 터라 추적도 안 되고 있어.”

“……왜 나한테 보고 안 했냐?”

“일단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히면 보고할 생각이었지. 당사자가 아닌 나도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데 너는 오죽할까 싶어서.”

정혁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온의 앞으로 내밀었다. 시온은 다급한 손길로 전화기를 집어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사무실로 걸려 온 전화를 추적한 내용이 빼곡했다.

시온은 답답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었다가 이곳이 실내임을 깨닫고 담배를 부러뜨려 손에 쥐었다. 도화경도 아니고 도화준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나돌아선 절대로 안 된다.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 누가 이런 장난질을 하는 것인지, 목적이 뭔지. 만약 그쪽에서 돈을 원하면 원하는 대로 집어 주고 치워 버려.”

“……시온아.”

“……?”

“만약 이 일이 언론에 알려진다거나 하면 어쩔 거냐.”

시온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도화준, 처음에는 연민이었고 동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각할 새도 없이 시온은 화준에게 깊게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순수하고 꾸밈없는 그의 마음에 흠뻑 젖어 있었다.

굳고 단단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진 이 감정이 올곧게 도화준에게 닿았다. 2년이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사이지만 2년 후에 그를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좋은 것만 주고,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하고 싶은데 만약 그런 상황과 마주한다면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시온은 답답한 마음에 타이를 느슨하게 잡아 풀었다. 감정이라는 놈은 앞뒤 가리지 않고 직진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이 마음에 브레이크를 거냔 말이다. 시온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너한테 7년 동안 몸 바쳐 가며 구설을 막은 건 아무것도 아니냐.”

“그 이야기가 지금 왜 나와.”

“내가 그렇게 해서까지 필사적으로 구설을 막은 건 네 자리, 네가 앞으로 걸어갈 자리에 흠집 하나 내기 싫어서였다. 내가 비서로서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전부라고 그때는 생각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만약, 도화준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면 너는 가차 없이 고개를 돌려. 그게 7년 동안 네 밑에서 헐떡거렸던 나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 테니까.”

시온은 코웃음 쳤다. 이미 공시온의 세상은 도화준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화준이 보고 싶어서 마음이 간지러운데, 가차 없이 고개를 돌리라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던진 돌에 머리가 깨져 피 흘리는 도화준을 모르는 척하는 게 가능할까. 지금 시온의 마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온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커프스단추와 시계를 손으로 쓸어 모아 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화경아, 왜 안 들어가고 있어?”

정적을 깨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시온과 정혁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계단 앞에는 연하늘색 원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넋을 놓은 화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시온의 어머니가 함께 서 있었다.

시온의 얼굴이 낭패감에 사납게 일그러졌다. 시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화준에게 다가갔다. 지금까지 정혁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온이 가까이 다가가자 화준은 주춤주춤 걸음을 물렸다.

“도화경.”

“……자, 잠깐만! 거기 멈춰요!”

시온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화준을 바라보았다. 화준의 거부의 말에 시온의 심장이 산산조각이 나 부스러지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화준을 바라보는 시온의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화준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이며,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온을 놀라게 해 주려고 어머니와 함께 부티크에 왔다. 어머니는 잠시 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올라온다기에 그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2층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밟는 걸음걸음에 두근거림이 흘러넘쳤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현실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처절한 고백이고 부탁인 그 말에 화준은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7년 동안 네 밑에서 헐떡거렸던 나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 테니까.’

다른 이야기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차라리 듣지 말걸, 여기에 오지 말걸.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정혁을 대할 때마다 어쩐지 불편한 마음이 들더라니, 그 이유를 이제 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는 분명히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화준은 그의 날 선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그저 불편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런 비밀이 숨어 있었다. 화준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이켜 보면 정혁의 시선 끝에는 늘 시온이 닿아 있었다. 그게 그저 충직한 부하 직원의 마음이라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7년, 절대 쉽게 볼 시간은 아니었다. 도화준이 공시온에게 정신없이 빠져든 건 고작 몇 개월에 불과했다. 그런데 7년이라니. 7년이면 없던 마음도 생길 법한 기나긴 시간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화경아, 먼저 내 말 좀 들어 봐.”

시온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화준은 다가오지도 못하고 자리에 멈추어 선 그를 바라보고 욱신거리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깊게 심호흡하고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옆에 선 한 여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저 몸이 안 좋아서 결혼식에 참석 못 할 거 같아요.”

한 여사는 잠시 침음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알아채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한 여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화준은 가차 없이 몸을 돌려 계단을 빠르게 밟아 내려갔다. 탁탁― 구두 소리를 하릴없이 듣고 있던 시온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화준의 뒤를 쫓았다. 화준이 막 매장 문을 밀었을 때 시온은 그의 손목을 간신히 낚아채고 돌려세웠다.

“이야기 좀 해! 아니, 내 말 들어.”

“……나, 나중에요.”

“후, 혼자 생각하면 오해만 깊어져. 내가 다 이야기할 테니까 나랑 지금 이야기해.”

시온은 화준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떤 말로 그를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 하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손목을 약하게 비틀어 손을 빼려는 화준의 움직임도 무시하고 빠르게 걸었다.

지하 특유의 텁텁한 공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시온은 뒷좌석 문을 열어 화준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답답한 가운데 화기가 들끓었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반대편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알아.”

“내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인 척하는 것보다 지금이 더 혼란스러워요.”

힘겹게 말을 잇는 화준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었고 시선은 올곧게 앞을 향해 있었다. 고집스럽게 앞을 바라보는 눈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말을 담고 있는지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시온은 물러설 곳이 없음을 느끼고 깊게 심호흡했다.

“그래, 다 설명할게. 정혁이는 친구이자 내 비서야……. 그러니까 7년 전,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방황했어. 원치도 않는 결혼을 해야 했으니까.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워서 흥청망청 살았어.”

“…….”

“그런데 내가 방탕하게 사는 걸 한 기자가 눈치채고 따라붙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걸 안 정혁이가 제안을 해 왔어. 그래서 너랑 결혼하기 전까지 관계를 맺었고……. 근데 지금은 다 정리됐어.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조차 없었어.”

화준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억지로 눈가에 힘을 주고 눈물을 참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2년이 지나면 박 비서처럼 ‘정리’라는 말로 깨끗하게 떨어져 나가게 되겠지.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7년이라는 세월도 시온에게는 쉬웠으니 2년은 더 쉽게 느껴질 것이다.

화준은 공시온이 섹스를 할 때 얼마나 다정하고 근사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옷 속에 꼭꼭 감춰 놓은 완벽한 육체와 손길……. 사정을 할 때 어떻게 얼굴이 일그러지는지, 어떤 체위를 좋아하는지도. 은밀한 사생활이라고 믿었던 일들이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화준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닿고, 손이 닿고, 뜨겁게 달아오른 육체가 닿아 하나가 되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정말 다 깨끗하게 정리됐어.”

“2년 후에, 아니 이제 1년하고 몇 개월이네요. 그 시간이 지나면 저도 박 비서님처럼 이사장님의 기억 속에서, 생활에서 정리되겠죠. 저는…….”

“도화경.”

“그래요, 저는 도화경이에요. 속은 도화준이면서 껍데기만 도화경인……. 남자인 제가 여자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완벽한 여자는 아니잖아요!”

시온은 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완전히 생각이 틀어진 화준에게 지금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설득을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득한답시고 괜한 말을 더 했다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시온은 고개를 젓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화준을 보낼 수는 없었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물고 있는 화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탓이기에 이 엉킨 실타래는 온전히 공시온 본인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깊게 한숨을 내쉰 시온이 뒷좌석에서 내려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화준이 놀랄 새도 없이 시온은 시동을 걸고, 그냥 바퀴가 굴러가고 운전대가 돌아가는 대로 무작정 차를 몰았다.

시온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힘들어할 화준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도 아예 꺼 버리고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작은 룸 미러 속에 비친 화준을 바라보며 답답한 속을 애써 다스렸다.

화준은 꽤 오랜 시간 침음했다. 도로의 소음에 묻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온은 애가 탔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서 바스러져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말 한마디도 어려웠다. 화준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디까지 상상의 나무가 뻗어 나갔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모든 게 다 조심스러웠다.

“집에 가고 싶습니다. 결혼식에도 참석하셔야 하잖아요.”

“그깟 결혼식 따위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너야. 네가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딜 가.”

어르듯이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에 화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인데…….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기지 않았다. 7년. 머릿속에는 7년 동안 공시온의 시선을 오롯이 받았을 정혁이 채워져 있었다.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와 몸을 섞고 감정을 섞었을 정혁이 못 견디게 미웠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 아니, 그런 거 하지 마. 차라리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 내가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화준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응시했다. 빠르게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공시온으로 꽉꽉 찼던 속이 휑하니 빈 것만 같았다.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지나자, 시온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화준의 모습이 불안함을 가중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했다.

“박 비서님과 이사장님은…….”

“화경아.”

“……연인이었네요.”

갑자기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시온은 차선을 변경해서 약간 속도를 늦추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정혁이한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 걔를 연인이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만약 연인이었다면 나는 정략결혼을 선택하지 않았겠지. 너와 몸도 섞지 않았을 거야. 네 말 하나에 이렇게 일도 다 제쳐 두고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리고 또…….”

“…….”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시온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공시온이 누군가의 앞에서 절절매며 이런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심정은 절박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맹렬하게 뛰어 대는 심장을 도화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이 가슴에는 너밖에 없다고, 너만 살 수 있다고, 내 정답은 너라고…….

화준은 시온의 대답을 듣고 난 뒤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윽한 눈으로 창밖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또다시 영겁의 시간이 흘렀다. 숨 막히는 침묵에 시온은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었다. 또 한참 만에 화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면 박 비서님을 내칠 수도 있는 건가요?”

“어.”

시온은 망설이지 않았다. 비서는 새로 구하면 되지만 화준은 새로 구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룸 미러로 화준을 바라보자, 그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 웃음이 해괴해서 시온의 고개가 반쯤 기울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즐거운 것도 아니고, 통쾌한 것도 아닌 비틀린 웃음 같아 보였다. 그럴수록 시온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이사장님이…….”

곧잘 ‘시온 씨’라고 부르던 호칭이 다시 ‘이사장님’으로 돌아왔다. 화준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뱉어 내려고 노력했다. 가슴이 먹먹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억지로 정신을 다잡고 입술을 움직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그를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제멋대로 판단할 것만 같았다.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화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말씀하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저는 이사장님을 떠날 거예요.”

시온은 브레이크를 밟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넘기고 룸 미러로 화준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 속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으로 살게 해 주겠다는 그 약속, 꼭 지키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시온은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약속을 지켜 달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 걸까……. 이 이상의 감정을 거절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실망했다는 의미일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다.

시온은 장시간 운전으로 뻑뻑해진 눈을 문지르며 룸 미러를 힐끗거렸다. 어느새 화준은 좌석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긴장감으로 바짝 조였던 근육들이 느슨하게 풀렸다. 차를 멈추고 조금 쉬고 싶지만 달리던 차가 멈추면 화준이 깰까 싶어 그대로 속도를 유지했다.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지금 위치를 확인했다. 어느새 대전을 지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마땅한 곳을 떠올리던 시온은 거제도로 목적지를 정했다. 선우 그룹에서 리조트 사업을 시작, 구상하며 사전 답사지로 정한 곳이었다.

시온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스케줄이 무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 중요한 건 회사가 아니라 도화준이었다. 오해하는 부분을 확실하게 풀어 주고, 그에게 확신을 심어 줘야 했다.

자신의 애정이 그에게 닿아 있음을, 이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2년 후에 닥칠 현실적인 일들도 알려 줄 셈이었다.

시온은 곤히 잠들어 있는 화준을 힐끗거리고 운전대를 고쳐 잡았다.

곤히 잠들었던 화준이 눈을 뜬 건 거제도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어둑어둑해진 창밖을 감흥 없는 눈을 바라보았지만, 통영 톨게이트를 지날 때는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동자는 잠잠해졌다. 화준은 별말 하지 않고 무심하게 창밖만 바라보았다.

시온은 일 때문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리조트로 차를 몰았다. 들어가기 전 간단하게 식사를 권했지만 화준은 고개를 저었다. 시온은 화준을 혼자 남겨 두고 객실을 빠져나왔다. 예정 밖의 거제도행으로 내일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정리가 꼭 필요했다. 리조트 1층에 있는 카페에 앉아 중요한 보고를 받고 또 일정을 얼마나 미룰 수 있는지도 기민하게 논의했다. 마침내 시온이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객실을 나선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시온이 조심스럽게 객실 문을 열었을 때 화준은 창문을 매달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눈에 담고 있었다.

작열하던 태양이 사라진 밤은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온이 재킷을 벗어 화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제야 화준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시온을 바라보았다.

눈매를 축 늘어뜨리고 눈 안 가득 슬픔을 담고 있는 화준을 보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시온은 화준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수많은 감정이 빠르게 교차했다. 시온의 품 안에 오롯이 갇힌 화준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힘겹게 울음을 토했다. 눈물에 두려움, 떨림, 불안, 사랑까지 모두 휩쓸려 나와 시온의 가슴을 적셨다. 두 팔로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고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한 번만 날 믿어 줘. 실망시키지 않을게.”

“…….”

“정말이야.”

“만약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

“알려지면 그때는, 정말 그때는 박 비서님 말대로, 가차 없이 고개를 돌려요.”

화준은 천천히 그의 품을 밀어 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약간의 틈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화준을 바라보았다.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공시온이 드넓게 펼쳐 놓은 포근한 세상에서 빠져나와 제대로 현실을 마주한 화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처연하고 서글퍼 보여서 시온은 화준을 다시 끌어당겨 안았다.

“도화준, 잘 들어.”

“……하지 마요.”

“들어.”

“…….”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난 널 외면하지 않아. 아니, 못 해! 너는 나, 외면할 수 있어?”

화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시온의 몸을 감싸 안았다. 지금 안겨 있는 이 품 안이 화준이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방공호였다. 화준의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왜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는지……. 화준은 뺨을 그의 가슴에 문지르며 조금 전 상황을 천천히 떠올렸다.

시온이 잠시 일 처리를 위해 룸을 비웠을 때였다. 화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허망한 눈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색감이 뒤엉켜 오묘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색처럼 제 마음도 뒤섞여 속이 답답했다.

갑자기 침대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전화기를 집어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화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도 이런 전화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화준이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이내 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화준은 의아해하며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도화준 씨 되십니까?

도화준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화준이라는 이름은 타인에게 들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화준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전화기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누구시죠? 누구신데 제 동생을 찾는 거죠?”

- ……도화준.

“당신 누구야?”

- 네가 도화준이잖아.

확신에 찬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화준이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전화는 허무하게 끊어졌다. 채 20초도 되지 않는 짧은 통화였다. 두 다리가 후들거려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테이블을 한 손으로 붙들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귓가에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약간의 기계적인 음성이 섞인 것같이 느껴졌다.

‘네가 도화준이잖아.’

‘네가 도화준이잖아.’

‘네가 도화준이잖아.’

갑자기 숨이 꽉 막혔다. 시온과 결혼하고 난 뒤 그가 주는 것들이 너무 강렬해서 잠시 현실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생각했더라도 그가 대수롭지 않게 넘겨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이런 전화를 받고 나니 정신이 없었다.

공시온이 여자가 아닌 남자와 결혼한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화준은 머리를 감싸 쥐고 낮게 신음했다. 그제야 뒷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잊고 있던 정혁이 시온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도화준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면 너는 가차 없이 고개를 돌려. 그게 7년 동안 네 밑에서 헐떡거렸던 나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 테니까.’

화준은 허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한 말이 이런 의미일 줄이야. 이미 정혁과 시온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가차 없이 고개를 돌리라는 말이 심장을 옥죄었다. 하지만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는 정혁의 말대로 자신을 등지고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수긍이 가는 말임에도 가슴이 미어졌다. 화준은 애써 눈물을 삼키고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는 2년이 아니라 내일 당장 끝날 수도 있었다. 이 관계가 둘 중 누구도 아닌 제삼자로 하여금 종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화준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공시온과 함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화준은 불덩이처럼 달궈진 마음을 숨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 *

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그는 입을 다물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시온은 흡연 욕구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담배를 집어 들고 발코니로 연결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습한 기운이 셔츠 사이로 스며들었다.

슬리퍼를 신고 테이블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시온은 화준이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제법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자 더할 나위 없이 무기력해졌다. 말을 하는 것보다 입을 다물어 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환하게 웃던 그 모습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담배를 길게 빨았다가 내뿜고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다에 시선을 두었다. 어쩐지 화준이 곁에 있음에도 멀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게 단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시온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유리창 너머에 있는 화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얼굴은 마치 어머니 앞에서 무기력하게 뺨을 맞던 그때와 똑같았다. 세상을 다 잃은, 희망도 꿈도 없이 모든 걸 놓아 버린 그때의 그 모습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시온은 필터 끝까지 타 버린 담배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화준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와 품 안으로 와락 안겨 들었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시온의 몸이 충격으로 뒤로 약간 밀렸다.

“공시온.”

“…….”

“공시온.”

“네 앞에 있어.”

“공시온!!”

화준은 답답하고 복잡한 속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편안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논둑이 터진 것처럼 한꺼번에 몰아친 진실과 직시한 미래에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억울하고 비통했다. 한 줌, 숨을 쉬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자그마치 24년을 누이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왔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끔찍했다. 그 지옥을 버티고 버텨 이제 조금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그런 생각들이 산산조각이 나 발밑에 나뒹굴었다.

화준은 시온의 옷깃을 세게 움켜쥐고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온이 만들어 준 세상이 점차 눈앞에서 하나씩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온은 화준을 감싸 안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화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 줄게. 참지 마. 뭐든 잘 배우겠다고 했잖아. 소리치고 싶으면 소리쳐.”

“나는……!!”

“그래, 잘했어.”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칠 거 같은데, 이제 간신히 행복해지고 있는데, 왜 나를, 왜 이렇게 나를……!!”

화준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화준은 시온의 허리를 감싼 손을 풀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삶이 너무 한탄스러워서, 이런 행복 하나 허락해 주지 않는 하늘이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왈칵 터졌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자신에게 주어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

가슴에 커다란 폭탄 하나를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시온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는 화준의 턱을 가볍게 쥐어 들어 올렸다. 천천히 드러나는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에 가슴이 지잉― 울렸다. 뭐가 널 그렇게 불안하게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떨고 있어?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혁이 일 때문에 그래?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야. 설사 내가 정혁이를 사랑했다고 쳐도 그건 과거일 뿐이야. 지금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아직도 모르겠어?”

“……공시온.”

“…….”

“……나, 죽고 싶어. 무섭고 두려워!”

“도화준!!”

시온의 큰 목소리가 객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고작 그따위 과거사로 죽음을 입에 올리는 화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온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화준을 등지고 섰다. 죽고 싶다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 사고 회로를 누군가 싹둑 잘라 버리는 것 같았다.

침착하자고 억지로 마인드 컨트롤을 해 보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속에서 들끓는 화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 지금 크게 실수한 거야.”

시온은 억지로 화를 억누르며 말을 뱉었다. 입을 열 때마다 뜨거운 게 울컥 치미는 기분이었다.

“……미안합니다.”

화준은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네가 도화준이잖아.’

귓가를 맴도는 그 잔인한 목소리가 화준의 숨통을 조이고 발목을 붙잡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기꺼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신은 행복해서도 행복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객실 안에는 미리 주문해 놓은 음식들이 온기를 잃은 채 볼품없이 놓여 있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커프스단추를 떼어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고 소매를 접어 올렸다. 한숨을 푹 내쉬고 차게 식은 음식들이 담긴 식기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트롤리에 올렸다.

시온은 객실을 한번 둘러보고 발코니로 나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과 함께 비릿한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화준은 밤새 끅끅― 서러운 눈물을 쏟았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울음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시온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준을 토닥거렸다. 그러다 화준의 눈물이 꼭 박정혁과 관련된 일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원망의 대상이 자신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화준이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나서도 한참이나 발코니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생각이 많다 보니 약간의 두통이 일었다. 시온은 손목시계를 힐끗거리고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일어나 봐.”

침실로 들어온 시온이 이불을 걷어 내려고 하자, 화준이 고집스럽게 이불을 붙잡았다. 시온은 이불을 잡은 손에서 힘을 약간 풀었다가 불시에 세게 잡아당겼다. 이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화준이 보였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워 있는 화준을 보자 깊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무슨 일 때문인지 말이라도 속 시원하게 해 주면 좋겠건만 넌 도대체!! 시온은 폭주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 두 시간 후에 여기서 출발해야 해. 일단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 좀 하자.”

“조금만 더 있다 가요.”

화준은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을 쏟아 낸 탓에 입 안이 마르고 기운이 없었다. 약간 몸을 들어 올려 시온이 붙잡고 있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이불을 힘으로 당겨 봤지만 시온은 어림없다는 듯이 이불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화준이라는 이름을 타인의 입에서 들은 그 순간이 마치 구간 반복을 해 놓은 것처럼 끊임없이 재생됐다.

시온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말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대립했다. 공시온에게 괜히 무거운 짐이 되기 싫었다.

회사 일로도 버거워하는 그에게 자신까지 짐을 얹어 주며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후―. 결국 화준은 시온의 매서운 눈초리를 버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시온이 침대에 걸터앉아 다시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시온이 화준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화준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피곤함이 약간 묻어 있긴 하나 여느 날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화준은 넓은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아직은, 그 시간마저 앗아 가지 않았으니.

화준은 무릎걸음으로 시온에게 다가갔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온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시온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화준의 움직임 속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불을 놓은 화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휴대폰을 손에 쥐는 일이었다. 침대를 느릿하게 기어오는 지금도 그의 오른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마치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딱 틀린 부분만이 부각되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전화기에 집착하지 않는 그였다. 가끔 전화를 걸어도 2층에 놓아두고 도서관에 있어서 받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시온은 손가락으로 턱 아래를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룸서비스 시켰는데 먹고 씻을래? 아니면 씻고 먹을래?”

가까이 다가온 화준의 허리를 감싸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퉁퉁 부어 붕어 눈이 된 그의 눈가를 가볍게 핥았다. 간지러운지 화준이 얼굴을 찌푸리며 목을 쑥 뺐다.

“씻고 먹을래요.”

“그래? 그럼 씻고 밥 먹을까?”

시온은 화준의 두 팔을 자신의 목에 감게 하고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을 소중하게 끌어안아 욕실 앞에 놓아주고 말했다.

“씻고 나와. 휴대폰은 이리 주고.”

시온이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내밀자 화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떨렸다. 또다시 전화가 올 수도 있었다. 전화를 시온이 받는다면……. 화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온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화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렸다.

‘저 휴대폰에 뭐가 있구나.’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되어 갔다. 시온은 손바닥을 접어 화준의 어깨를 감싸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씻고 나와.”

화준이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시온은 방금까지 환하게 웃던 미소를 거두고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 방식대로 알아내면 그만이야. 시온은 빠른 걸음으로 침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집어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네, 전무님.

“지금 당장 내 명의로 된 전화기 두 대의 통화 내역 뽑아서 메일로 보내세요.”

- 알겠습니다. 언제쯤 서울로 올라오실 계획이십니까?

“두 시간 후쯤 출발할 겁니다. 그리고…….”

- …….

“당분간 휴가계 쓰고 쉬어요.”

- 공시온!!

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가 들렸다. 시온은 수화기를 잠시 떼었다가 다시 붙이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혁이 쉬게 되면 업무에 마비가 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 그리고 은밀한 기밀까지도 그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업무 지장은 피할 수 없었다. 그걸 또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시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은 결단을 내렸다. 아니,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밤새 서럽게 울음을 토해 내던 화준이 눈에 밟혀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화준이 중요했다.

-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회사 따위 중요하지 않다는 거냐.

“……중요하지. 중요한데, 지금은 도화경이 더 중요해.”

-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이겠지.

“입조심해. 그 이름 함부로 올리지 마.”

- 네가 뭐라고 해도 나 휴가계 못 쓴다. 그리고 신성 건설 조짐이 좋지 않다. 어쩌면 도산할 수도 있겠어.

도산이라는 말에 시온의 미간이 구겨졌다. 도 사장이 화준을 팔아 받아 간 돈만 해도 벌써 수백억에 이르고 있는데 도산이라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식 팔아서 돈을 챙겼으면 회사라도 잘 건사할 것이지,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기분에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도산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게다가 아직 언론까지 흘러 들어가진 않았지만, 현장에서 인부 두 명이 추락해서 사망한 후 잠정적 건설 중단이다.

시온은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현장에서 사고가 나서 인부가 사망하게 되면 상황은 매우 복잡해진다. 계약해 놓은 공사 장비들과 인부들, 게다가 입주가 늦어지면 배상해야 하는 금액까지. 못해도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십억을 손해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상황이 이 지경인데 괜찮겠어?

정혁의 질문에 시온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 상황에서 정혁의 부재는 조금 위험했다.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건 정혁이 유일했다. 정혁을 잠시 쉬게 해서 화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보겠다는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후, 일단 보류하고 통화 내역이나 뽑아서 보내.”

시온은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창현 개새끼…….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 * *

짧은 알림음과 함께 도착한 메일을 확인한 시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혁이 보내온 통화 내역에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걸려 온 통화 내역이 없었다. 그 흔한 스팸 전화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화준이 꺼내 놓은 휴대폰 화면에는 분명히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으로 통화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게 뭘까? 시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앉아 있는 화준의 머리꼭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전, 샤워를 마치고 나온 화준이 할 말이 있다며 시온을 불러 앉혔다. 마침 룸서비스가 도착해서 음식을 앞에 놓고 화준과 마주 앉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해.”

화준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고 수저를 들었다. 식사 분위기는 무겁게 흘러갔다. 화준은 간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수프만 휘휘 저어 몇 숟갈 떠먹었다. 다른 음식에는 일절 손도 대지 않고 수저를 놓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시온은 그의 접시를 바라보고 미간을 좁혔지만, 냅킨을 집어 입가를 닦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무슨 말인데?”

“사실은…….”

화준은 어렵게 입을 떼고도 한참이나 망설였다. 시온에게 이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아닌지……. 어느새 몸을 앞쪽으로 숙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온이 보였다. 화준은 입술을 세게 물었다가 놓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어제 이사장님이 잠시 객실을 비우신 사이 저한테 이상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나한테, 도화준이냐고. 내가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그랬어요. 어떡해요? 이제 어떡해요?! 다 들통이 날 겁니다!”

화준은 말을 하면서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터뜨렸다.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 그의 손에는 여전히 휴대폰이 꽉 쥐어져 있었다. 시온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휴대폰을 달라고 말했다. 테이블 위로 올라온 휴대폰을 집어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정말 어젯밤, 전화가 걸려 온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혁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시온은 정혁이 보내 준 통화 내역 자료와 화준의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봤다. 분명 휴대폰에는 통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자료에는 없다라…….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정혁이 의도적으로 숨겼거나 자료가 넘어올 때부터 누락되었거나. 둘 다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사장님은 물론 선우 그룹까지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그나저나 이런 전화가 오면 바로 나한테 말했어야지, 왜 혼자 끙끙 앓고 있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시온은 두 개의 휴대폰을 내려놓고 입가를 슬슬 문질렀다. 몸을 일으켜 화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전화를 건 인물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놀란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온은 화준의 몸을 아예 틀어 자신 쪽으로 향하게 했다.

“고개 들어 봐.”

“……무서워서 죽겠어요. 회장님이나 사모님 두 분 모두 저에게 너무 잘해 주시는데 혹시라도 그분들이 아실까 봐, 저한테 실망하실까 봐 미칠 거 같아요.”

“그래, 네 마음 알아. 그런데 어제 네 행동은 아주 잘못된 거야. 죽고 싶다고 하질 않나, 이런 일이 있을 때 즉각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건 정말 잘못된 거야. 내가 알아야지 수습을 하지. 안 그래?”

“죄, 죄송해요.”

시온이 화준의 뺨을 감싸 시선을 마주했다. 촉촉하게 젖어 일렁이는 눈동자가 어쩐지 처연해 보였다. 시온은 화준의 어깨를 감싸 안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저항 없이 안겨 오는 몸을 소중히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칠 거 같은데, 이제 간신히 행복해지고 있는데, 왜 나를, 왜 이렇게 나를……!!’

시온은 화준을 품에 꽉 안고 그의 절절하고 처절한 절규를 되새겼다.

* * *

“회사 잠깐 들렀다가 올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시온과 화준이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저녁 7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화준을 바라보자, 그가 울상을 지었다.

“……안 가시면 안 돼요?”

시온은 하룻밤 사이에 살이 내린 화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한 번도 이렇게 어리광을 부린 적 없는 화준이라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소매 끝을 붙잡고 흔드는 손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온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화준이 불안해하는 부분을 확실하게 정리해 주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찾아 주려면 한시라도 빨리 정혁을 만나야 했다.

눈매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올려다보는 화준의 까만 눈동자에 제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금방 다녀올게.”

“……박 비서님이랑 함께 계실 거잖아요.”

화준의 말에 시온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정혁과의 일을 화준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 일이 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문의 전화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된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온은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오는 화준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앞으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약속할게.”

“……그래도 자꾸 신경 쓰여서.”

“일과 관련된 부분이나 개인적인 부분까지 박 비서가 다 관리하고 있어서 지금 당장은 박 비서를 내치기가 어려워. 네가 조금만 이해해 주면 안 될까?”

화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온의 그림자처럼 늘 그의 뒤를 지키고 있는 정혁을 떠올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싫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는 시온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많이, 좋아해요.”

화준은 이런 고백을 하는 순간도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이런 고백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이 한탄스러웠다. 손에 가진 게 많았다면, 영리하고 똑똑하기라도 했다면…… 시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화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심장을 간질이는 고백에 시온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의 머리카락에 짧게 입 맞추고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나도, 나도 그래. 2년 후에 널 도화준으로 세우고 싶지 않을 만큼 내 마음이 그래.”

화준은 그의 품에 안겨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서 마음이 찡 울렸다. 도화준으로 세우고 싶지 않다는 말은 도화경으로 계속 남아 있길 바란다는 뜻이겠지. 화준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2년 후에는 도화경이 아닌 도화준으로 세상에 서고 싶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벗어 던지고 오롯이 도화준이라는 사람으로 세상에 두 발로 서고 싶었다.

“늦었다. 얼른 들어가서 쉬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게.”

“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화준이 차에서 내리고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였다. 갑자기 다급하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온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수석 창문을 내렸지만 화준은 보이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 쪽은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이었다.

눈을 댕그랗게 뜨고 선팅이 짙은 안쪽을 바라보는 화준이 귀여워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자, 화준의 손이 불쑥 안으로 들어와 넥타이를 잡아챘다. 어! 놀랄 새도 없이 입술에 화준의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떨어지자 얼굴 가까이 솜털 같은 숨결이 느껴졌다.

“다녀오세요.”

살짝 부딪친 입술을 떼 내고 화준이 인사를 건넸다. 시온은 가만히 화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써 미소 짓는 얼굴에 자꾸 슬픔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시온은 온기가 닿았던 입술을 혀로 핥고, 손을 뻗어 화준의 목덜미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이런 앙큼한 짓은 누구한테 배웠어?”

“……드라마 웁!”

화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온이 그의 입을 막았다.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입 안의 점막을 천천히 훑었다. 화준은 입 안으로 파고드는 혀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가 선사하는 키스는 늘 황홀하고 달콤했다. 이 행복이,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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