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맞다** 갠소.공금.재업교환금지. 제발 혼자만 보세요
그래서 난 미쳤다 2
목차
Chapter 9 : 보통의 하루
Chapter 10 : 소리 없이 다가와
Chapter 11 : 네가 없는 곳 (1)
Chapter 12 : 네가 없는 곳 (2)
Chapter 13 : 그리고 남겨진 것들
Chapter 14 : 그래서 난 미쳤다
Chapter 15 : Epilogue
외전 1 : 그날 이후……
외전 2 : 너와 함께한 어느 날
외전 3 : 다시 그곳……
Chapter 9 : 보통의 하루
대한민국 전체가 지글지글 끓어 댄 게 무색할 정도로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온은 한 손에 커피 잔을 들고 창가에 섰다. 비를 좋아하는 화준이 어쩐지 창가에 서서 비 구경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화준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시온은 조바심이 일었다. 이제 2년이라는 기한이 무의미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준을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이 마음 한구석을 채우고 부피를 키워 나갔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결혼을 했고 도화준이라는 신분 대신 도화경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그를 곁에 두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많았다.
처음 이 결혼을 할 때 시온은 화준에게 약속한 게 있었다. 2년 후에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으로 살게 해 주겠노라고. 근데 그때는 화준이 다치든 말든 상관없을 때의 일이었다.
호적을 정정한다는 이야기가 이슈가 되어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공수표를 날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깊어지면서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불특정 다수가 던지는 돌에 맞아 쓰러질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제 인생에 감정이라는 놈이 끼어들면서 여러모로 시온은 곤란함을 느꼈다.
“일단 기다려!!”
“비켜! 이 새끼야! 너도 뒈지고 싶어?!”
문밖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시온은 생각을 털어 내고 커피 잔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불청객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의자로 가지 않고 책상에 약간 기대듯 걸터앉았다. 큰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재킷도 걸치지 않은 나경준이 잔뜩 헝클어진 모습으로 시온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경준을 제지하던 정혁이 낮은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경준은 씩씩거리며 시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정혁에 의해 제지되었다.
“야, 인마!”
“이거 안 놔?”
“나경준, 너 이러는 거 추해.”
“씨발, 저 새끼가 하는 짓은 성인군자고 나는 천하의 쌍놈이냐? 그래?”
“박 비서님, 두고 나가세요.”
정혁은 불안한 눈으로 시온과 경준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시온은 담뱃갑을 집어 들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런데 불을 붙이기도 전에 나경준의 손에 의해 담배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시온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어 경준을 쳐다봤다. 경준은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로 씩씩거렸지만 섣불리 손을 올리진 않았다.
“너! 이거 뭐야?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고!!”
경준은 뒷주머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시온의 앞에 던졌다. 종이 뭉치가 바닥에 흩어지며 글씨가 드문드문 보였다. ‘남경 유전자 연구소’라는 직인이 찍혀 있는 종이를 보며 시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거의 13년 만에 만난 장세미는 자신을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엉거주춤 물러났다. 시온은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신발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막 현관을 지나치던 시온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현관 앞에 걸린 사진에 시선을 두었다.
나경준과 장세미 그리고 문제의 아이가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오랜만이야?”
“어, 어떻게 여길!”
“이 아이 누구 아이야?”
시온의 손끝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장세미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너, 너와는 상관, 상관없는 아이야!”
“그래? 그런데 나경준은 왜 저 아이를 내 아이로 알고 있을까?”
장세미는 겁을 집어먹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두려움이 가득 찬 얼굴을 바라보며 시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턱을 쥐었다. 피하려 하는 장세미의 턱을 세게 움켜쥐고 다시 물었다.
“저 아이 누구 아이야?”
재차 추궁하는 목소리에 장세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시온은 그녀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할 거란 판단이 섰다. 그래서 뒤에 선 정혁에게 욕실에서 칫솔을 수거하라고 명령했다. 정혁이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녀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장세미의 말에 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 자신과 호텔 방에 올라간 건 확실하지만 베드 인까지는 하지 않았다. 당시 시온은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의 육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그렇다고 잠자리를 가진 건 아니었다. 시온이 장세미를 데리고 호텔에 간 것도 자신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일부러 술을 많이 먹여 장세미를 재우고 자신은 다른 방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당황해하는 장세미와 함께 보란 듯이 호텔을 빠져나온 게 전부였다. 그러므로 저 아이의 아빠는 그가 될 수 없었다.
“넌 씨도 모르는 새끼를 내 아이로 사기 치고 지금까지 살았냐?”
“난 그런 적 없어! 그냥,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그래. 넌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소설은 나경준이 썼겠지. 넌 그걸 방관했고.”
시온은 헛숨을 내쉬며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장세미 때문에 나경준과 사이가 어긋난 건 어쩔 수 없지만 아이는 아니었다. 이게 근거도 없이 ‘카더라’로 소문이 나돌았으면…….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나경준이 눈앞에서 알짱거려 준 덕분에 꼬리를 빨리 밟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정혁이 욕실에서 칫솔을 챙겨 나오자, 시온은 몸을 돌렸다. 이 집에서 볼일은 다 끝났다. 그런데 갑자기 장세미가 다리를 붙잡고 빌기 시작했다.
“시온아,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경준이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 나, 경준이 사랑해! 경준이 없으면 나 죽어.”
“죽어? 그럼 죽든가. 삶에 의지가 그것밖에 없으면 죽어야지, 왜 이승에 미련을 둬. 둘이 사랑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시온은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장세미를 세게 밀치며 몸을 돌렸다. 장세미는 처절하게 바닥을 치며 울었다. 경준을 사랑한다면서……. 사랑하면 거짓도 서슴지 않아야 하는 건가. 시온은 순수하게 묻고 싶었다.
출근하는 길에 자신의 칫솔과 나경준의 칫솔 그리고 아이의 칫솔을 보내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그리고 결과지는 두 곳으로 발송되도록 해 두었다.
오늘 아침 도착한 결과지는 역시 예상대로 불일치로 판명되었다.
“내가 언제까지 네 장단에 영문도 모른 채 맞춰 줄 거라 생각했냐?”
“개수작 부리지 말고 이 종이! 이 종이가 뭔지 설명해.”
“눈으로 보고도 못 믿고 등신 같은 소리 할 거면 당장 나가.”
“씨발, 죽여 버리기 전에 똑바로 말해!!”
경준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시온의 아이라는 확신을 하고 지금껏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믿고 싶지 않았다.
“도화경한테 접근한 거, 나한테 이러는 거 다 그 애 때문이잖아. 아니야? 아니면 아니라고 어디 한번 지껄여 봐.”
13년 전 경준을 찾아온 장세미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임신했다고. 그 말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건 호텔에서 함께 걸어 나오던 공시온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아이가 공시온의 아이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괴로웠고 힘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그 아이는……!!”
“그래, 네 성격에 그걸 확인하진 못했을 거야. 겁이 났을 테니까. 10년 동안 머릿속으로 소설 쓰느라 고생했네. 간교하고 간악한 여자한테 놀아난 소감이 어때?”
“입 닥쳐!! 세미를 그렇게 매도하지 마.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엉망인 얼굴로 달려와서 고작 한다는 말이 사랑하는 여자라고? 시온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 추잡한 사실을 알고도 사랑이라는 게 가능한 건가.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더럽게 굴지?
시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누군가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깊게 연기를 빨았다.
“내가 경고하지만 도화경한테 접근하지 마. 눈길도 주지 말고 근처에서 알짱거리지도 마. 내가 이거 들고 해성 그룹 본사로 들어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시온은 유전자 결과지를 쥐고 경준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나경준이 10여 년 동안 장세미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온 것을 보면 이건 그의 약점이었다.
“……하! 지금 협박하는 거냐.”
“너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같다고 생각하지 마. 네 자리, 네가 올라가고 싶어 하는 그 자리, 내가 마음만 먹으면 밟아 버릴 수도 있으니까.”
“…….”
“할 말 다 했으면 나가. 너와 다르게 바쁜 몸이라.”
나경준은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확인할 건 다 했다. 아무리 여기서 미친놈처럼 날뛰어도 결과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의 실수였다. 시온의 말대로 먼저 확인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었다.
시온은 입술을 매만지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경준에게 시선을 두었다. 며칠 전에 거만한 자태로 들어와 도화경을 들먹거리던 때와 전혀 달랐다. 시온은 문을 열고 나가려는 경준의 뒤통수에 대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랑하는 여자, 그렇게 꼭꼭 숨겨 놓고 10년이나 그림자로 살게 하는 게 네 위대한 사랑이냐?”
경준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지만 곧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시온은 코웃음을 치고 담배를 비벼 껐다. 여전히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게맞다**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화준은 책을 읽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날개를 뻗었다.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예뻤다.
화준은 베란다에 있는 티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쳤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이제 날씨가 선선해진 터라 이렇게 베란다에 나와 책을 읽는 것을 즐겼다. 화분이 많아서 그런지 공기 자체가 싱그러웠다.
벌써 시온과 함께 산 지도 5개월이 흘렀다. 불편하기만 하던 침대를 공유하는 일이 이젠 시온이 들어오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더 넉넉하고 편해졌다. 모든 게 평화롭고 즐거웠다. 화준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며칠 전 시온은 선우 그룹의 전무 이사로 발령이 났다. KNN 의료 재단의 선우 병원은 당분간 시온의 어머니가 맡기로 했다. 시온은 화준을 이사장 자리에 앉히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화준은 자신이 없어 고사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거절의 과정에서 조금 문제가 생기긴 했다. 시온은 아예 작정하고 자신을 설득시켜 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화준은 각고의 노력 끝에 그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뭐, 결국에는 말 대신 몸으로 그를 설득시켰지만…… 어쨌든 설득은 설득이었다.
화준은 작게 하품을 하고 책장을 넘겼다. 나른한 기분에 눈가를 비비며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시온이 퇴근하려면 세 시간이나 남았다. 시온을 향한 마음이 깊어지는 걸 말로 표현하진 못하지만,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해령은 이걸 사랑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의미는 여전히 좀 어려웠다. 2년 후면 헤어질 사이에 이런 감정은 사치였다. 시온이 좋긴 하지만 부모님을 떠나서 도화경이 아닌 도화준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시온의 곁에서 행복하면 물론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생각이 많아져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책을 덮어 놓고 턱을 괴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
빌라 앞에 낯익은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화준은 의자를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차에서는 슈트를 단정히 차려입은 공시온이 내렸다. 박 비서와 잠시 대화를 나눈 그가 빌라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화준은 재빨리 베란다를 빠져나와 현관으로 달려갔다.
곧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준은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무작정 그의 품에 뛰어들어 와락 안겼다. 두 팔로 허리를 감싸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응? 무슨 일이야. 고개 들어 봐.”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반가워서요.”
시온은 어깨를 잡아 밀려고 했던 손을 거두고 등을 감싸 안았다. 갑자기 안겨 오길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이내 생각을 지운 시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온은 한참 품에 안겨 있던 화준을 떼어 내고 얼굴을 마주했다. 어머니의 취임 일정이 잡히면서 선우 병원 이사장실을 정리하기 위해 조금 일찍 퇴근했다. 문득 화준을 데려가서 사무실을 구경시켜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선우 병원으로 향하던 차를 돌려 집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반가워하니 기분이 묘했다.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주며 입을 열었다.
“외출 준비해요.”
“어디 가요?”
“음, 도화경이 걷어찬 자리 구경?”
시온은 화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고 슬쩍 웃어 보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화준의 어깨를 잡아 돌리고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사무실 정리를 하고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일단 들어가서 씻고 나와요.”
화준은 엉거주춤 시온의 손에 떠밀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온은 화준의 옷장을 열어 청바지와 흰 티 하나를 꺼내 침대 위로 던지고 긴 머리 가발과 흰색 모자도 챙겼다.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시온은 화장대 의자에 앉아 이메일을 확인했다. 선우 그룹 전무 이사로 발령이 난 직후 외국계 기업인 G 사의 계열사 하나를 인수 합병 하기 위해 총력을 쏟는 중이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라 인수 자금 문제로 속이 좀 시끄러웠다.
피곤한 눈자위를 손으로 꾹 눌렀다가 떼고 몸을 일으켰다. 도화준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문을 열자, 도화준 특유의 부드럽고 간지러운 향이 훅 끼쳤다. 같은 보디 워시를 쓰고 향수는 일절 쓰지 않지만, 그만의 향이 있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을 음미하며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한쪽 테이블에는 책이 여러 권 쌓여 있고 벤치 뒤에 붙어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오늘 읽은 책과 읽을 책 그리고 작은 메모 하나가 붙어 있었다. 시온이 메모를 떼어 눈앞으로 가지고 왔다. 정말 작은 글씨로 ‘이사장님 좋아’라고 적혀 있었다.
시온은 한참 글씨를 바라보다가 기분 좋게 웃고는 종이를 지갑에 챙겨 넣었다. 다시 지갑을 품 안으로 넣었을 때 어쩐지 마음이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벤치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공간을 화준에게 선물한 건 정말 충동적이었다. 무지에 가까운 그에게 뭘 가르쳐 주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 결국 이 공간을 만들어 냈다. 돌이켜 보면 부모가 만들어 놓은 지옥에 갇혀 버둥거리는 그를 꺼내 주기로 마음먹은 것도, 애틋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도 모두 그즈음이었다.
“어디 계세요?”
밖에서 들리는 화준의 목소리에 시온은 서재에서 나왔다. 화준이 찰떡같이 꺼내 놓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서 있었다. 그게 또 이상하게 마음이 간지러워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갈까?”
“……네!”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 시온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 * *
화준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 책상을 정리하는 시온을 바라봤다. 그는 베스트 차림으로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리고, 서류를 하나씩 확인해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정혁이 서류 분류 작업은 자신이 하겠다고 했지만, 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이 귀찮을 법도 하건만 시온은 스스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혁도 시온을 따라 자연스럽게 선우 그룹 전무 이사 비서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도 챙길 게 많았다.
비서를 배려하는 마음에 화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공시온은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구나. 늘 권위적인 아버지만 바라보며 자란 화준이라 조금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심심하죠? 내가 괜히 데리고 왔네.”
“아뇨, 저 괜찮아요.”
“심심하면 내려가서 차라도 마시고 있을래요?”
“이사장님, 그거 정리 다 하시면…… 같이 가요.”
시온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박스에 던져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 호칭으로 부를 겁니까? 나 이제 이사장님 아닌데?”
“……아.”
시온이 일부러 보란 듯이 명패를 집어 들어 흔들고는 박스에 넣었다. 그러자 화준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지금까지는 시온이 이사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서 부르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는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그렇게 부를 수가 없게 되었다.
‘시온 씨’라고 부르기에는 좀 낯간지럽고, 그렇다고 ‘전무님’이라고 부르기엔 그의 부하 직원이 아니라서 좀 망설여졌다.
“여보, 자기, 당신.”
“에?”
“난 셋 중에 하나도 괜찮은데.”
시온이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화준이 앉아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 모두 짐이 쌓여 있다 보니 그는 자연스럽게 화준의 곁에 앉았다. 시온은 화준 쪽으로 몸을 완전히 틀고 소파 위로 다리 한쪽을 접어 올렸다. 팔을 헤드에 올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입가에 장난기가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화준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눌렀다.
“저번에도 이 문제로 한번 이야기한 거 같은데.”
“……그건…….”
시온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화준의 허리를 감싸 바짝 끌어당겼다.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걷어 내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온기가 목덜미에 닿자 화준은 목을 움츠러뜨렸다.
“이, 이사장님도! 약속 안 지키셨잖아요! 읏!”
시온이 입술을 떼고 잠시 기억을 뒤졌다. 반말하는 대신 ‘시온 씨’라고 부르라고 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온은 현재 반말과 존댓말을 반씩 섞어서 쓰고 있었다.
“나는 노력이라도 하고 있잖아. 그런데 화경 씨는 노력도 안 하는 거 같은데?”
“…….”
화준이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자, 시온은 머리카락을 아예 반대편으로 넘기고 목덜미에 쪼는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어느새 화준은 시온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품에 갇힌 자세가 되어 있었다. 시온이 대담하게 화준의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부드러운 속살을 더듬었다.
화준이 기겁하며 그의 손을 밀어 내려고 애썼지만, 시온은 어서 대답이나 하라고 재촉했다. 그의 손이 허리에서 조금씩 위로 올라와 아슬아슬하게 보정 속옷 아래를 더듬었다.
“하! 할게요! 시, 시온 씨!!”
“음, 다시 불러 볼래요?”
시온은 보정 속옷 아래로 손가락을 슬쩍 넣었다. 금방이라도 속옷을 밀어 올리고 마구 살을 주무를 거 같았다. 화준은 몸을 채우는 흥분감과 난처함에 달뜬 숨을 뱉어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온의 입술이 귓불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으며 재촉했다.
“빨리 불러 봐요. 기다리는 사람 숨넘어가겠네.”
“시, 시온 씨. 공시온 씨!!”
하하―. 시온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화준은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고작 이름을 부르는 건데 왜 이렇게 어려울까. 화준은 자책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시온은 손을 빼내고 허리를 단단히 감싸 등에 얼굴을 묻었다. 웃음이 뚝 멈추고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라서 한 줌,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온몸에 들끓는 감정이 자꾸 부피를 키우고 시온을 옭아맸다. 마음이 자꾸만 물음을 던졌다.
‘너, 2년 후에 정말 도화준을 놓아줄 수 있어?’
시온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먼 미래의 일을 벌써부터 고민하는 게 우습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서로에게 느끼는 이 체온과 감정을 시한부로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화경아…….”
부드럽게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에 화준이 얼굴을 문지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시온이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고 몸을 고정했다.
“나는 이 감정이, 이 마음이 두렵기도 합니다. 당신한테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근데…….”
“…….”
“숨기고 싶지도 않아.”
화준은 숨을 들이마셨다. 예상치도 못한 그의 말에 숨이 막혔다. 등 뒤로 닿는 시온의 체온이 고스란히 몸을 뚫고 심장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손을 아래로 내려 허리를 감싸 그의 손을 덮었다. 울음이 목구멍까지 꽉 차올랐다. 왜 이렇게 마음이 이상하고 속이 뜨거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제 몸을 감싸고 있는 공시온이 주는 체온을 잃고 싶지 않았다. 화준은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말했다.
“……강 선생님이, 제가 느끼는 이 마음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화경아.”
“사람들은 내가 도화준이라는 걸 모릅니다. 나는 도화준인데, 도화준은 죽었대요.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기분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나는 늘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 끔찍하니까. 근데…… 시온 씨 곁에 있으면 살고 싶어요. 너무 살고 싶어서…….”
화준은 말을 채 다 잇지도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지 정말 꿈에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늘 죽고 싶었다. 도화준이 아니라 도화경으로 살게 되면서 늘 극한 상황에 놓이면 모든 걸 포기하듯 의지를 접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힘겹게 눈을 뜨면 죽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삶이 무의미했고 이 삶에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죽을힘을 다해서 살고 싶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공시온이 서 있었다.
시온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끅끅― 서러운 울음을 토해 내는 화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눈물을 걷어 냈다. 눈물이 일렁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어쩌면 널 내 욕심 때문에 도화준이 아닌 도화경으로 곁에 둬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나를 믿고 내 곁에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내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 * *
굳은 얼굴로 대회의실에서 나오는 시온을 발견한 정혁이 곧장 뒤로 따라붙었다. 정혁의 기척을 느낀 시온이 익숙하게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넘겨 주었다.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도 하나 풀었다.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세 시간 넘게 이어진 회의로 진이 빠졌다.
“전무님…….”
“말해요.”
“사무실에…… 경준이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경준 말입니까?”
시온은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혁은 우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시온은 출근 전에 보았던 조간신문 내용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해성 그룹 차남인 나경준이 미혼모와의 결혼식을 극비리에 준비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나 회장 성격에 나경준을 그냥 두진 않았을 텐데. 시온은 희미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나경준의 몰골에 시온은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어떻게 얻어맞았는지 머리에는 하얀 붕대를 감고 선글라스를 썼지만 크게 번진 멍 자국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온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두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나경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뒤통수에 날아와 박혔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결재판을 들어 눈으로 확인했다. 시온이 재킷에서 만년필을 뽑아 사인하려던 찰나 경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봤으면 와서 좀 앉지?”
“아, 이런.”
시온은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결재판을 책상에 내려놓고 경준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가 상석에 앉았다. 가까이에서 본 몰골은 더 처참하고 볼만했다.
“몰골이 볼만하네.”
“청첩장이다.”
경준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봉투를 밀었다. 스윽― 밀려오는 봉투를 보며 시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쉽게 넘어간 모양이네. 벌써 청첩장이 나오고 말이야. 나 회장님 성격에…… 의외네.”
“내 결혼식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꼭 초대하고 싶어서 말이다.”
나경준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결혼식에는 참석해야겠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그들을 축복할 마음도 없고, 축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온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봉투를 끌어다가 서랍 속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용건 끝났으면 가 봐. 난 너 같은 한량이 아니라서 바쁘네.”
“너…….”
“……?”
“언제까지 그렇게 기고만장하게 사는지 내가 지켜볼 거다. 남의 눈에서 눈물 빼면 넌 피눈물 날 거다. 내가 장담하지.”
피눈물이 난다라……. 시온은 말을 곱씹으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넌 네 눈에서 피눈물 났냐?”
“내가 왜?”
“모르면 됐고. 그냥 가라. 결혼식은 내 체면이 있으니까 참석은 하겠지만, 축복 같은 건 바라지 마.”
* * *
“왜 화경 씨랑은 술 마실 생각을 못 했지?”
대낮부터 해령과 화준은 어느 선술집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소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화준은 작은 잔에 담긴 소주를 입 안으로 훅 털어 넣고 인상을 찌푸렸다.
“와, 이거 정말 쓴데! 뭐가 이렇게 맛있는 거죠?”
“어! 소주가 맛있으면 곤란한데.”
해령은 빈 잔에 소주를 채워 주며 꼬치 하나를 집어 화준에게 내밀었다. 화준은 내미는 꼬치를 거절하지 않고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떡을 씹으며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해령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상담이 있는 날도 아니었다.
화준은 빈둥거리다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무작정 해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마침 그녀가 월차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고, 화준은 전화기를 들고 한참 한탄 아닌 한탄을 쏟아 냈다. 시온에게 들은 말이 자꾸 마음속을 돌아다녀서 속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정말 어쩌면 널 내 욕심 때문에 도화준이 아닌 도화경으로 곁에 둬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나를 믿고 내 곁에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내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해령은 이런 날엔 소주 한잔을 해야 한다며 화준을 밖으로 불러냈다.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자리를 옮겨 선술집에서 본격적으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화경 씨,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답해 줄 수 있어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면요.”
“음, 성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 없어요? 이사장님도 남자고 화경 씨도 따지고 보면 남자니까. 어, 그러니까 화경 씨가 이사장님을 좋아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나.”
화준은 한 손에는 꼬치 막대를 들고 한 손으로는 소주잔을 감싸 쥐었다. 공시온이 남자인 게 마음에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냥 공시온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아서 그게 딱히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제가 누굴 좋아해 본 게 처음이라서요. 그냥 이사장님 자체가 좋아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이사장님이 화경 씨 첫사랑이구나.”
“첫사랑이요?”
“응. 근데 첫사랑은 실패하는데.”
화준이 누룽지탕을 덜어 해령의 앞에 놓아 주고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고개가 옆으로 약간 기울었다. 거기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왜지? 왜 첫사랑은 실패하지?
“왜요?”
“사랑이 처음이니까 다 서툴러서 실수하게 되니까요.”
“선생님도 첫사랑에 실패했어요?”
“……음, 그러니까 여기서 화경 씨랑 술 마시고 있겠죠?”
해령이 환하게 웃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그러자 화준도 잔을 들어 가볍게 맞대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원하게 입 안에 털어 넣은 소주잔을 머리 위로 털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수록 해령은 화준이 정말 많이 변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화준의 일상은 공시온으로 인해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줄줄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공시온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이사장님이 이렇게 해 줬고 저렇게 해 줬고 그래서 기뻤고 슬펐고.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꿨을 그런 이야기들을 화준을 술술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침울하고 어두운 그림자는 아주 말끔하게 벗겨져 있었다. 어느덧 테이블 위를 채우는 소주병이 다섯 개나 되었다.
“근데 막 무서울 때가 있는 거예요.”
“응?”
“나는, 나는, 있잖아요. 도화경으로 살기 싫어. 내가 남잔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해, 요?”
“그래서 속상해요?”
“당연하죠! 내가, 만약에 도화준으로 살았다면! 아마 이사장님처럼 회사도, 물려받고 교육도 많이 받았을 거, 예요. 그게 너무 아쉽고 부러워요.”
화준은 숟가락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의 눈은 잔뜩 풀렸고 발음도 어눌했다. 해령은 이제 슬슬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준이 몸을 벌떡 일으키고 자신의 몸을 더듬어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하지만 술에 취한 화준은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여전히 벨 소리는 울리고 있었다.
해령이 웃으며 화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자신의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강 선생님?
“네, 잠깐만요.”
해령은 전화기를 화준의 귀에 대어 주었다. 화준은 “여보세요!” 하며 반갑게 전화를 받았고 해령은 반쯤 남은 소주잔을 들이켰다. 화준은 두 팔을 테이블에 올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짙게 떠올랐다. 어쩜 저리 감정에 솔직할까.
해령은 그런 화준의 모습을 살피며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갑자기 화준이 눈가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해령은 숟가락으로 누룽지탕을 휘휘 저으며 풉― 웃었다. 결연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혀가 꼬여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화준의 상태를 시온이 모를 리가 없었다. 곧 전화가 끊어졌는지 화준은 시무룩한 얼굴로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이사장님이 술 마셨냐고 묻는데 내가 안 마셨다고 했어요. 전 왜 그랬을까요?”
“……화경 씨가 이사장님을 좋아하니까 그런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실수하고 싶지 않고, 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우와, 강 선생님은 모르는 게 없어요.”
해령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해령의 휴대폰이 짧은 알림음을 울렸다. 해령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어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공시온이었다.
「지금 어딨습니까?」
해령은 화준의 얼굴을 살피고 오타가 날세라 조심하며 메시지를 작성했다.
「강남역 근처 작은 선술집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온에게서 상호를 묻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지만 해령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화준은 연신 소주잔을 기울이며 헤헤 웃었다. 입 근육이 완전히 풀려 헤실헤실 웃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해령은 휴대폰 카메라로 화준의 얼굴을 담았다.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선생님, 저 졸려요.”
“저도 피곤해요. 근데 화경 씨 보호자가 아직 오질 않아서.”
“저는 보호자가 없습니다.”
화준은 버티기가 힘든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엎드려 버렸다. 해령은 잠시 화장실에 가기 위해 휴대폰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홀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려고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공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온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붙였다.
“내가 가게 상호를 물은 거 같은데?”
“……제가 술에 취해서 제대로 못 봤어요.”
“의도가 다분해 보이지만 넘어가 드리죠. 도화경 어딨습니까?”
해령은 화장실에 가려던 것도 잊고 화준이 있는 테이블로 시온을 안내했다. 시온은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화준과 쪼르르 놓인 술병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미동도 없는 화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화경아.”
“……어어?”
화준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 시온을 바라보았다. 눈을 느리게 몇 번 감았다가 뜨고 그것도 모자라 눈을 비벼 상대를 확인하고 곧장 팔을 뻗었다.
“시온 씨! 우아아아! 공시온이다. 선생님!! 공시온이 나타났어! 우아아아!”
“하, 미치겠군. 강 선생님, 나중에 나랑 따로 좀 봅시다.”
“……저를요?”
“밖에 있는 기사가 집까지 데려다줄 겁니다. 다음에 다시 보죠.”
시온은 쭉 뻗은 손을 찰싹 때리고 등과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화준을 안아 들었다. 가뿐하게 안고 나가는 시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해령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시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나경준이 들이닥쳐 한바탕 속을 뒤집고 간 직후라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오후 5시,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임에도 도화준의 혀는 술에 취해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외출에 대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거나 자유롭지 못한 건 아니지만 오늘 일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 나가서 술을 마신 거야.
시온은 곧장 자리를 정리하고 재킷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 내선을 연결해 정혁을 호출했다. 정혁은 갑작스러운 호출에도 말끔한 모습으로 신속하게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이후 일정 다 취소하고 차 대기시켜요.”
“하지만 G 사 담당자와 만찬은 꼭 참석…….”
“내일! 내일로 일정 미뤄!”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시온이 버럭 소리쳤다. 정혁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수행 비서에게 차를 대기시키라고 일렀다. 시온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시온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빼 물었다가 이내 집어 던지고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기분이 아주 뭐 같았다. 빌어먹을……. 이제껏 단 한 번도 거슬린 적 없는 해령과 화준의 사이가 미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해서도 안 되고, 의심할 건더기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만 어쩐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강해령과 도화준은 겉으로 편한 친구로 보이지만 실상 까고 보면 남녀 관계였다.
남녀 관계, 가장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관계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화준은 게이,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여자를 만날 수도 있는 사람. 생각이 말도 안 되게 뻗치고 있다는 걸 시온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각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가설을 만들어 냈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시각을 확인했다.
“아직 차량 준비 안 됐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내려가시면 됩니다.”
시온은 정혁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벽에 기대서서 구두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렸다. 강해령과 도화준의 사이가 자꾸 신경 쓰였다. 연민이나 동정 따위였던 감정이 어느새 애틋한 마음이 되어 버린 자신의 마음처럼 강해령도 그렇게 바뀌면 어쩌지?
시온은 느릿느릿 떨어지는 숫자판에 고집스레 시선을 고정하고 입술을 물어뜯었다. 왜 갑자기 그들의 관계가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한 일은 자각할 새도 없이 빠르게 부피를 늘려 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시온은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시온을 알아본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그런 인사조차 받아 주지 못할 만큼 심적 여유가 없었다.
“박 비서님은 다른 차량으로 따라붙어요.”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르려던 정혁을 저지하고 일갈했다. 정혁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차 문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시온은 직접 운전대를 잡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작은 선술집이라고 답장을 보내온 강해령은 그 후로 연락을 받지 않았다.
시온은 정혁에게 강남에 있는 규모가 작은 선술집을 파악하라고 전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 머릿속엔 해령과 함께 있는 화준의 얼굴이 떠올라 짜증이 치밀었다. 다른 사람에겐 경계의 날을 세우는 화준이지만 유일하게 해령에게는 관대하고 느슨했다. 그녀를 향한 쓸데없이 헤픈 웃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둘의 관계다. 어쩌면 도화준이 그 지옥 속에서도 살 수 있었던 건 강해령 때문이리라. 강해령이 갖은 꼼수로 도화준의 숨통을 트이게 해 줬으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관계가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삐딱선을 탔다.
몇 군데를 들쑤시고 다니고 나서야 간신히 화준이 있는 술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해령의 얼굴에 억눌러 놓은 짜증이 치솟았다.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건 시온이 심적 여유가 없다는 방증이었다.
시온은 일렁이는 화를 잠시 눌러 놓고 화준의 위치부터 물었다. 일단 도화준의 얼굴부터 확인해야지 이 속이 조금 진정될 것 같았다. 시온은 해령이 안내해 준 테이블로 다가갔다.
소주병이 채워진 테이블과 거기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는 화준이 보였다.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온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 오는 화준의 손을 찰싹 때리고 화준을 안아 들었다. 화준은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품에 안겨 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연신 헤실헤실 웃음을 뿌려 댔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는 건데.”
“공! 시! 온!”
“그런 애교로 안 통합니다. 오늘 진짜 혼날 각오 해요.”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고 낮게 말하자 금세 화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온이 밖으로 나가자 정혁이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차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화준을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채웠다. 얌전히 있으라는 말까지 덧붙인 시온이 몸을 빼려 하자, 화준의 손이 시온의 타이를 낚아채고 물었다.
“나, 혼나?”
“그럼 혼날 짓을 하고도 그냥 넘어가려고?”
“어…… 술 먹은 게 혼날 짓은 아니잖아요.”
시온은 화준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이고 차 문을 닫았다. 아주 말대꾸만 늘어서……. 가을이라고 해도 후덥지근한 기분에 시온은 재킷을 벗어 손에 쥐고 정혁에게 다가갔다.
“술값 계산하고 강 선생 집까지 모셔다드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G 사 미팅 건은 말씀하신 대로 미뤘습니다. 그리고 따로 간소한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유능한 비서를 둬서 다행이야. 먼저 갑니다.”
시온은 정혁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차체를 돌아 운전석 문을 열었다. 정혁은 씁쓸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얼굴이 약간 일그러진 채 고개를 숙였다. 재킷을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진 시온이 운전석에 앉자 화준이 몸을 기울여 왔다. 술기운에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히죽 웃는 꼴을 보자니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애교 부리지 마. 절대 안 통해.”
시온은 일부러 단호하게 말하고 안전벨트를 당겼다. 그러자 화준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잡아챘다. 몇 번 헛손질 끝에 달칵― 구멍에 잘 끼워 맞춘 화준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나 안 취했어요!”
멍한 얼굴로 화준을 바라보던 시온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동을 걸었다. 술 취한 사람들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이 ‘나는 취하지 않았다’ 아닌가? 화준은 정체불명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누가 이런 요망한 짓을 가르쳐 줬어요?”
“드라마 보면 다 이렇게 하던데…….”
“도화경 너, 말이 좀 짧다?”
“공시온 너도 말이 좀 짧다아아.”
말이 짧다는 말에 일부러 뒤를 길게 빼는 화준의 말투에 피식 웃고 말았다. 시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운전대를 부드럽게 돌렸다. 복잡한 골목을 지나 대로로 들어서자 좀 숨통이 트였다. 화준은 시온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차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나도, 운전 배우고 싶어.”
“운전?”
“나도 공시온 태우고 어디 가고 싶다.”
화준이 야릇한 손길로 시온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더듬으며 작게 말했다. 시온은 손길을 내치지 않은 채 턱을 문지르며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도로는 최악의 상태였다.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흠, 다음 주에 학원 등록해 줄 테니까 배워 봐요.”
“진짜로?”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한 번만에 면허를 따면 차 사 줄게요.”
시온은 말과 다르게 이미 머릿속으로 화준이 탈 만한 차량을 떠올렸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색깔은 무난하게 흰색이면 좋을까?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시온이 손을 뻗어 화준의 뺨을 매만졌다. 화준이 기분 좋게 웃으며 시온의 손에 얼굴을 문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나쁠 정도로 속을 채우던 화기가 사그라들어 흔적도 없었다. 도화준이 제 기분을 좌지우지한다는 게 묘했다. 단 한 번도 제 기분을 누군가 좌지우지한 적이 없었다. 하긴 이렇게 마음을 온전히 풀어 놓고 바라본 상대도 없었다.
“우리 어디 가?”
“술 먹으니까 아주 가관이네. 말도 짧고.”
“그래서 싫어? 싫냐고오.”
마침 바뀐 신호에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가속 페달을 지그시 밟을 때였다. 갑자기 화준이 손을 뻗어 시온의 가슴을 슬슬 문지르며 물었다. 시온은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넘기고 숨을 들이켰다. 베스트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 근육을 매만지는 손이 대범했다.
“손 빼지?”
“싫은데.”
“내일 일어나서 나를 어떻게 보려고 이럽니까?”
“……에에. 안 일어날 건데.”
눈이 완전히 풀려서 초점도 안 맞는 주제에 손은 잘도 움직였다. 유두를 손톱으로 긁듯 문지르며 헤헤 웃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화준은 “아, 어지러워.”를 연발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기어코 셔츠 단추를 풀어 손을 밀어 넣은 화준이 호탕하게 웃었다.
시온은 괜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 지금 이러는 게 본인에게 굉장히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듯 화준의 장난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최악의 도로를 뚫고 간신히 빌라 입구로 진입했을 때, 어느새 화준은 색색거리며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시온은 차를 몰고 일부러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아끼는 편이 아니라서 늘 지상 주차장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을 달랐다. 인적이 드문 지하 4층까지 내려가서야 차를 주차하고 벨트를 풀었다. 시온은 화준이 정성스럽게 풀어 놓은 단추를 채우고 화준의 치마를 걷어 올려 보드라운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었다. 틈을 벌리며 안쪽 살을 주무르자, 화준이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지금 눈뜨는 게 좋을 텐데.”
화준은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화준의 의자를 손으로 짚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서서히 좌석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화준은 정신없이 입술을 맞물려 오는 시온의 얼굴을 억지로 밀어 내며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렸다. 고개를 젖히고 숨을 삼키자, 시온이 목덜미를 물었다가 놓으며 혀로 살살 핥아 올렸다. 간지러움에 목을 움츠러뜨리며 깊은 한숨 같은 신음을 내쉬었다. 화준은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치마는 위로 올라가 있고 상의는 반쯤 끌어 내려져 배 쪽에 걸쳐진 채였다. 좁은 차 안에서 몸을 맞대고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흣! 자, 잠깐만.”
“먼저 도발한 게 누군데.”
“지, 집에, 집에 하읏! 가.”
시온의 손이 봉긋하게 튀어나온 가슴을 쥐고 주무르며 고개를 숙여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에어컨 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젖꼭지에 화기를 담은 듯한 뜨거운 혀가 닿으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화준은 까슬까슬한 섬유의 촉감에 인상을 찌푸리며 시온의 어깨를 밀었다. 자신은 거의 반라 상태로 뒤로 젖혀진 좌석에 누워 있음에도 공시온은 바지 버클과 지퍼가 풀려 있을 뿐이었다. 시온이 몸을 겹칠 때마다 옷감에 살이 쓸려 따끔거렸다.
시온은 좁은 차 안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과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조금만 건드려 볼 생각이었다. 차 안에서 장난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러니 도를 넘어서면 안 된다고 주의만 주려고 했다. 그런데 화준이 갑자기 눈을 반짝 뜨고 야살스럽게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물론 그게 의도되지 않은 행동임을 시온은 알고 있었다. 그냥 제 눈에는 그렇게 야해 보였다.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술을 머금고 그의 치마를 완전히 걷어 올려 허벅지의 연한 살을 매만졌다. 손바닥에 찰떡같이 엉겨 붙는 살결을 느끼며 시온은 이때까지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을 좀 더 위로 옮겨 팬티를 만지는 순간, 자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오늘 입은 치마가 타이트한 재질이 아니라 그런지 화준은 속옷을 한 장만 입은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팬티 속으로 손을 넣었을 때 살짝 발기해 모양을 갖춘 성기가 바로 만져졌다. 겉으론 여자 행색을 하고 있지만, 아래는 남자의 성기가 달린 미묘한 상황에 시온의 퓨즈가 뜯겨 나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신이 없었다.
정신없이 상의를 끌어 내려 가슴을 쥐고 치마는 허리까지 걷어 올렸다. 화준의 몸에 입술을 붙이고 물고 빨며 성난 성욕을 표출했다.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온 살들을 물고 빨아 대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하아. 간신히 정신이 들었을 때는 화준이 음란한 자태로 제 아래에 누워 있었다.
팬티 사이로 성기만 노출된 채 제 손아귀에서 실컷 굴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턱 아래부터 가슴까지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난잡하게 찍혀 있었다.
시온은 심장을 쿵쿵 울려 대며 빠듯하게 조여 오는 이상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그제야 간신히 시야가 또렷해지고 정신이 살짝 돌아왔다. 시온은 손에 잡혀 있는 성기를 천천히 문지르며 쿠퍼액이 줄줄 흐르는 분홍색 귀두를 꾹 눌렀다가 놓았다.
화준은 딱 죽을 맛이었다. 사정감이 마구 몰아쳐서 약간만 더 자극을 주면 금방이라도 정액을 쏟을 것 같은데 시온은 귀신같이 그 타이밍을 알아채고 손에 힘을 풀었다. 이젠 아랫배가 꽉 조여 아플 지경이었다.
“누가 이렇게 술 먹고 까불래?”
“흐, 으읏! 제, 하앗, 제발…….”
시온의 손이 또 느릿느릿하게 성기를 쥐고 움직였다. 표피를 끝까지 밀어 올렸다가 놓고는 다시 감싸 쥐고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성기를 문지르는 속도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속이 타는 건 화준이었다. 정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아랫배를 꽉 채우는 사정감에 울음이 터졌다. 두 손을 아래로 내려 시온의 손을 쥐고 허리를 흔들어도 그가 손에서 힘을 빼 버리는 바람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 장난, 으읏! 치지 말고, 하윽.”
“잘못했는지 안 했는지 말해 봐.”
“아, 흣! 자, 잘못, 흐윽, 아! 했어요.”
화준은 목소리를 쥐어짜 시온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성기를 쥐고 문지르는 손길에 화준은 눈물을 쏟으며 애원했다. 결국, 화준이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시온은 집요하게 괴롭혔다. 술기운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가 선사하는 쾌락이 깊고 넓어서 자꾸 울음이 새어 나왔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몸이 더 바짝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좁은 차 안에서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 제약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준은 시온이 만져 주는 족족 뜨겁게 반응하며 몸을 비틀었다. 시온은 천장에 비스듬하게 고개를 꺾고 좌석에 한쪽 다리를 접어 올렸다.
화준의 하체에 성기가 닿았다. 시온은 두 개의 성기를 동시에 감싸 쥐고 천천히 문질렀다. 서로 맞닿은 귀두에서 미끈한 쿠퍼액이 쏟아져 손을 적셨다. 화준이 두 손을 목 받침에 두르고 허리를 살짝 띄워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사정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시온의 얼굴에 열이 잔뜩 몰려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하아, 읏! 시, 흣, 온!”
화준의 날카로운 비명이 차 안에 울렸다. 화준이 온몸에 힘을 잔뜩 주며 힘겹게 사정을 하고 나자, 시온은 화준의 두 다리를 접어 올려 은밀한 구멍에 제 성기를 두어 번 쿡쿡 찔렀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기세로 잔뜩 발기한 성기가 아래를 뚫을 것 같았다. 시온이 구멍에 제 성기를 맞추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미끌미끌한 손이 빠르게 성기를 자극했다. 마침내 검붉은 성기에서 희뿌연 정액이 쏟아져 화준의 회음부를 흠뻑 적셨다.
“후우, 야하네.”
“하, 이, 이상해. 싫어.”
시온은 화준의 입술을 입에 물고 천천히 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회음부에 쏟아진 정액에 손가락을 적셔 아래를 더듬었다. 꽉 조여 문 구멍에 정액을 끌어와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하나가 버겁게 밀려 들어갔다. 화준의 손이 다급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시온이 입술을 떼고 눈을 마주하자, 눈매를 축 늘어뜨리고 애원하듯 말했다.
“집에 가자. 집에 갈래, 집에.”
시온은 대답 대신 퉁퉁 부은 눈 아래를 혀로 가볍게 쓸고 콘솔박스를 열었다. 언젠가 한번 정혁이 콘솔박스에서 핸드크림을 꺼내 바르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온이 다급하게 콘솔박스를 뒤졌다.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던 내부가 엉망이 되고 나서야 제일 아래에 들어 있던 둥그런 틴 케이스 모양의 핸드크림을 찾아 손에 쥘 수 있었다.
“집에까지 가기엔 너나 나나 여유가 없는 거 같은데?”
시온이 씩 웃으며 화준의 반쯤 발기한 성기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시온의 목소리는 담백하지만 담백하지 않았다. 뜨거운 욕구에 숨이 달뜨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온은 크림 뚜껑을 이로 열어 아래로 떨어뜨리고 손가락으로 크림을 듬뿍 떠서 화준의 아래에 발랐다. 윤활제가 있어서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수월하게 손가락이 구멍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두 마디 정도만 밀어 넣고 구멍을 넓히듯 크게 둥글렸다. 쾌락이나 자극을 주기 위해서라기보다 철저하게 삽입을 위해 구멍을 넓히는 데 집중했다. 손가락을 깊숙이 밀어 넣어 뜨겁게 달아오른 내벽을 더듬었다.
내벽을 더듬을 때마다 화준의 엉덩이 근육이 잔뜩 조여들며 내벽도 함께 조였다. 시온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성기를 이 안으로 쑤셔 넣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기 때문에 손길이 다급했다. 삽입 욕구에 까칠하게 마른 입술을 이로 깨물고 속도를 올려 안쪽을 들쑤셨다.
“하읏, 흐, 으윽…… 그만! 흣!”
“쉬이― 착하지? 조금만 더. 응?”
몸을 바르작거리는 화준을 애써서 달래며 시온이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단박에 깊숙한 곳까지 밀려드는 감각에 화준이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켰다. 아……! 내벽을 문지르고 두드리던 손이 어느 부분을 스치자, 아랫배가 꽉 조여들고 날카로운 쾌감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시온 역시 화준의 반응을 예리하게 알아차리고 같은 부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아. 화준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손을 아래로 내려 시온의 손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손가락이 안쪽으로 더 밀려들고 화준의 포인트를 직격으로 찍어 눌렀다.
“아아! 아흣…… 아! 아, 아읏, 안 돼!”
화준의 눈앞에서 불빛이 몇 번이나 번쩍였다. 끔찍한 자극이었다. 온몸의 신경 세포가 아래로 몰린 듯 다른 부위에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준은 시온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머리와 달리 화준의 손은 그의 손을 붙잡고 스스로 아래를 들쑤시고 있었다.
“아! 아, 거기, 흣, 이, 흣, 이상해!”
“좋은 거겠지.”
“으응, 응! 좋아. 하윽…….”
시온이 손가락 마디를 구부려 내벽을 세게 긁자, 화준의 몸이 크게 튀어 올랐다. 시온은 크림이 녹아 범벅이 된 손가락을 뽑아내고 제 성기에 크림을 치덕치덕 처발랐다. 성욕이 온몸을 데운 것도 모자라 뇌수까지 달궜는지 머릿속이 뜨거웠다.
손으로 성기를 몇 번 문지르고 빠끔거리는 구멍에 귀두를 물렸다. 고통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밀려드는 기대감 때문인지 구멍이 꽉 조여들며 귀두를 물었다. 시온은 화준의 젖꼭지를 손에 쥐고 천천히 문지르며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약간씩 밀려 들어갈 때마다 귀두 끝에 닿는 내벽의 느낌만으로 쌀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아파! 흣, 아파. 흐.”
화준이 고통을 참듯 입술을 세게 깨물고 흐느꼈다. 시온은 화준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화준은 손가락을 이로 살짝 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곧 성기가 안쪽으로 더 파고들자, 손가락을 세게 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삽입이 지독스럽게 더뎠다. 안으로 파고드는 그의 성기의 모양이나 온도, 부피, 굵기 모든 게 다 느껴질 지경이었다.
“입 벌려.”
“으응!”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고개를 젓는 통에 어금니에 손이 갈려 고통이 느껴졌다. 화준의 아래를 꽉 채운 성기가 안에서 꿈틀거렸다. 천천히 기둥을 뽑아냈다가 박아 넣었다. 화준의 입이 단박에 벌어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시온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면서 손으로는 입천장을 문지르고 치열을 훑었다. 말랑한 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추삽질을 천천히 이어 갔다. 화준은 고통과 수반되는 쾌락에 눈물을 쏟았다.
“흣, 빠, 빨리! 으윽.”
시온은 입 안을 채우고 있는 손의 방향을 틀어 턱을 움켜쥐고 빠르게 안을 들쑤셨다. 퍽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야살스럽게 차 안에 울렸다. 몸을 들썩일 때마다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둘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없이 서로에게 엉겨 붙었다. 몸은 빈틈없이 맞붙었고 서로의 숨결은 공유되었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지하 4층 주차장에 낯선 인기척이 들린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시온이 격렬하게 몰아붙이던 허리 짓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화준의 뜨거운 숨이 귓가로 쏟아졌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낯선 구둣발 소리가 뒤엉켰다. 이미 차 안은 습기로 가득 차서 외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선팅도 진하게 되어 외부에서 보려고 해도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온은 그제야 자신이 어디서 화준을 범하고 있는지 깨닫고 몸속 깊숙이 파묻힌 성기를 뽑아내고 운전석으로 몸을 굴렸다.
흉흉한 기세로 대가리를 쳐들고 있는 성기를 힐끗거리고 좌석을 약간 밀어 이마를 짚었다. 하아. 고르지 못한 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화준 역시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흐, 왜…… 왜요?”
“집에 가고 싶다며.”
화준이 몸을 반쯤 일으켜 빳빳하게 서 있는 시온의 성기를 눈에 담았다. 도어 포켓에서 휴지를 꺼내 성기를 갈무리하려는 시온의 손을 붙잡고 화준이 몸 위로 올라탄 건 순식간이었다.
화준이 시온의 성기를 붙잡고 스스로 몸을 내렸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성기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바라보며 시온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절경이었다. 한 줌, 숨도 내쉬지 못하고 품어 내는 몸짓에 오금이 저렸다.
“아주 요망해졌어.”
“흣, 좋아! 윽, 빨리. 흐윽.”
시온이 커다란 손으로 화준의 작은 엉덩이를 쥐고 그의 움직임을 도왔다. 검붉은 성기가 그의 구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왔다. 화준은 시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의 위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추삽질에 속도가 붙을수록 화준의 머리가 차체의 천장에 닿아 쿵쿵― 소리를 냈다. 시온은 화준의 머리에 손을 얹어 그의 고통을 최소화했다. 형언할 수 없는 쾌락에 온몸이 잠식되었다. 화준은 손을 아래로 내려 스스로 성기를 쥐고 빠르게 흔들었다. 단단하게 발기된 성기가 왈칵 정액을 쏟아 내자, 시온은 그를 칭찬하듯 얼굴 이곳저곳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하아, 흐, 힘들, 하, 어.”
“조금만, 도화준 조금만, 응?”
화준의 엉덩이를 쥐고 흔드는 손이 빨라졌다. 화준은 몸속 깊숙이 박힌 성기가 심장까지 닿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심장을 콱 움켜쥐고 신음했다. 여기서 딱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극상의 쾌락이었다. 마음과 마음이 동해서 서로의 몸까지 이어졌다.
“하윽, 좋아. 좋아해. 으읏, 흐윽.”
“그래, 나도. 도화준 너야.”
시온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그의 엉덩이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흉기 같은 성기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시온은 속을 채우던 끔찍한 성욕을 화준의 안에 쏟아 냈다. 파정의 순간 화준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울음을 터트렸다. 시온은 마음속을 꽉 채우는 뜨거운 감정과 욕구에 몸을 잘게 떨었다.
* * *
화준은 타는 듯한 갈증과 온몸이 쑤시는 듯한 감각에 눈꺼풀을 느리게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끔찍한 두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아윽―. 화준이 작게 신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눈을 몇 번 느리게 감았다가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라 시온은 옆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화준은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구겼다.
어제, 해령과 분명히 술을 마신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깜깜했다.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시온이 허리에 팔을 감싸 침대로 밀어 눕혔다.
“어디 가?”
“……아.”
“속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시온이 물었다. 화준은 어쩐지 시온의 눈을 보는 게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살살 긁자, 그가 코를 잡아 아프지 않게 비틀었다.
“술주정뱅이, 또 나가서 술 먹어 봐.”
“……제가 어제 실수했나요?”
“하, 실수?”
시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순진한 눈으로 물어 오는 화준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 올라와서도 다시 안아 달라고 보채는 통에 2층까지 가지도 못하고 거실 바닥에서 화끈하게 2차전을 치렀던 상황을 떠올렸다. 요부도 그런 요부가 없을 만큼 사람을 구워삶던 화준이 술이 깨고 나자 더할 나위 없이 순진한 눈으로 사람 속을 뒤집었다. 시온은 반드시 술 먹는 것에 제재를 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나가서 술 먹는 거 금지야.”
“……왜요?”
“왜냐고?”
시온은 스탠드 스위치를 올리고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을 벗었다. 그러자 어깨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화준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물리셨어요? 어디서요? 누구한테요?”
“물렸지, 집에서 너한테.”
“네?”
“아무튼, 나가서 술 먹는 거 절대 금지야. 내 앞에서만 먹어. 원하면 얼마든지 같이 먹어 줄 테니까. 알겠어?”
화준은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화준의 손목을 잡아당겨 일으키고 샤워 가운을 몸 위에 걸쳐 주었다. 시온이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 눕자 화준은 슬금슬금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문을 열었다. 홧홧한 열기를 품은 아래와 허리가 욱신거렸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와 주방으로 들어가 생수 한 병을 꺼내 입에 물고 소파로 향했다. 그런데 현관 쪽에 옷 더미가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화준은 가까이 다가가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분명 어제 자신이 입었던 옷인…… 악! 눈앞을 빠르게 스치는 잔상에 화준은 물병을 떨어뜨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화준은 머리를 감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온과 차 안에서 몸을 섞었던 일과 집 안에서도 그의 품에 안겨 보챘던 일, 그리고 반말로 그에게 대들었던 일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화준은 옷가지에 얼굴을 묻고 웁웁― 소리 없는 아우성을 뱉어 냈다.
나 그냥 확 죽어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