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모든 날, 모든 순간
화준은 집 안에 마련된 도서관 벤치에 팔을 베고 누웠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멜로디가 흥얼흥얼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입 근육이 고장 났는지 제멋대로 입술이 씰룩거렸다.
오늘 아침, 어렴풋이 잠에서 깼을 때 입술로 달콤한 키스의 단비가 뿌려졌다. 쪽쪽― 귀여운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화준이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질끈 감자, 그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언제까지 자는 척할 건데?”
시온의 말에 화준은 한쪽 눈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앞으로 그의 얼굴이 다가와 눈 밑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마다 따끈하게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출근하세요?”
“돈 많이 벌어 올 테니까 잘 놀고 있어요. 퇴근하고 놀아 줄게요.”
“……네.”
시온이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방문을 여는 걸 보고 화준은 얼른 이불을 걷어 내고 그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시온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화준은 파자마 차림으로 현관 앞에 서서 구두를 신는 그를 지켜보았다. 시온이 구둣주걱을 벽에 걸고 도어 잠금을 열었다.
“자! 잠깐만요!”
화준은 신발을 신지도 않고 성큼 시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시온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뒤꿈치를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어젯밤, 시온과 함께 소파에 누워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다녀오세요.”
화준이 머쓱한 기분에 얼굴을 붉히고 뒤로 물러나자, 시온은 화준의 허리를 감싸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표정이 묻어났다. 그중에 가장 선명한 표정은 단연 기쁨이었다. 매력적인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꼬시는데?”
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시온은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꽉 주고 화준을 살짝 들어 슬리퍼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살짝 빨았다가 놓아주었다.
“아침부터 도화경이 꼬셔서 일이 잘될지 모르겠네. 아무튼, 다녀올게요.”
현관문을 여는 시온의 등 뒤에서 화준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문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이 간지러울 만큼 따뜻하고 포근한 기억에 화준은 팔을 벅벅 긁었다. 마음이 괜히 들떠서 집중도 되지 않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펼쳐 놓기만 하고 보지도 않는 책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어 드는 순간, 띠링― 하고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화준은 다시 벤치에 앉아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화경 씨, 상담 일정 좀 상의하고 싶은데 통화 가능할 때 연락 좀 줄래요?」
본가에 있을 때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어서 그런지 상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화준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해령의 번호를 터치했다. 연결음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화경 씨, 오랜만이네요.
“네, 잘 지내셨어요?”
- 응, 잘 지내고 있죠. 화경 씨는 어때요?
“저요……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네요. 상담은 언제쯤이 좋을까요?
“선생님 시간에 맞춰 주시면 될 거 같아요.”
- 그럼 오늘 시간 괜찮아요? 나 병원 옮겨서 정리 중인데…….
화준은 시각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잔뜩 들떠서 책도 눈에 안 들어오니 차라리 이런 날에 해령과 상담한다면 괜찮을 거 같았다. 화준이 괜찮다고 대답을 하자, 해령은 3시까지 선우 병원으로 오라고 말했다.
“선우 병원이요?”
-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럼 이따가 봐요.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화준은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령이 선우 병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참 의외였다. 해령은 대형 병원을 선호하지 않았다. 대형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환자와 제대로 된 상담을 하지 못한다고, 꼭 자유로운 분위기의 중소형 병원을 선호했다. 그런 그녀가 선우 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은 의아함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게다가 그 병원은 시온이 이사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 * *
진료실 옆에 별도로 마련된 준비실에서 해령은 향긋한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고, 화준의 몫으로 아이스티를 준비했다. 아침부터 나와 진료실을 정리했는데도 아직도 어수선한 감이 있었다.
책상 위에 컵을 내려놓고, 한쪽에 쌓아 놓은 그림 카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림 카드를 서랍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고 서랍을 닫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직 정식 진료가 시작되지 않아 문을 잠가 놓은 터라 해령이 직접 문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검은색 모자를 눈까지 푹 눌러쓰고 블랙 진에 무채색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불쑥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
해령이 놀라 뒤로 물러서는 찰나, 화준은 모자를 벗어 자신의 얼굴을 노출했다. 검은색 짧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든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묻어 있었다. 해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싶어 해령은 무심코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수년간 화준과 상담을 하고 심리 치료를 하면서도 이렇게 밝고 환한 웃음을 짓는 화준을 본 적이 없었다. 늘 위축되고 어두운 분위기였던 도화준이 지금은 환하고 달콤한 빛을 머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철수예요.”
암호 같은 이름을 대면서도 화준은 환하게 웃었다. 해령은 말문이 막혔다.
“하, 이게 무슨…….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화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해령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상담하고 관찰해 온 해령에게 지금의 화준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단기간에 사람이 이토록 밝아지고 분위기가 변할 수 있다니……. 어쩌면 이게 도화준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해령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래도록 이런 모습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화준이 안쓰러워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해령은 몸을 돌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눈가를 꾹 눌렀다. 화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해령의 뒤만 서성거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내가 주책이네. 미안해요. 화경 씨, 앉아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해령이 책상을 돌아 의자에 앉았다. 화준도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맞은편에 앉았다. 해령은 텀블러를 열어 커피를 마시고 자꾸 울컥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런데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벅차다고 해야 할까, 네모난 방 안에 갇혀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숨을 몰아쉬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많은 감정을 만들어 냈다.
해령은 신성 건설 사장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사화하려고도 해 봤고 경찰에 신고도 해 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 사장은 기가 막히게 알아서는 기사를 막고 신고를 무마시켰다. 그리고 해령을 향한 따끔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해령은 이 나라에서 돈이 빽이고 권력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그래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해서 늘 그게 늘 미안하고 안타까웠는데 이렇게까지 밝아진 모습을 보니 자꾸 마음이 울컥했다. 해령은 길게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말 좀 해 봐요.”
“……그냥 이사장님이랑 같이 텔레비전도 보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어요.”
“책이요?”
“네. 상담 때마다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렸어요. 이사장님이 방 하나에 책을 가득 채워 주셔서 거기서 한 권씩 읽고 있어요.”
해령은 상담 노트를 펼쳐 날짜를 쓰고 화준의 분위기나 전체적인 느낌을 상세히 기록했다.
“음, 그랬구나. 여러 가지 매체를 접하면서 기분이 어땠어요?”
화준은 앞에 놓인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천천히 떠올렸다.
“부모님 생각이 가장 많이 났어요.”
“응?”
“우물 안에 가두고 감시하느라 나를 자식으로 보지 못했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어요. 생각해 보면 화경이가 죽은 이후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으셨거든요. 만약 평범한 가정이었다면 행복하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상황을 내가 스스로 만들었으니까 그건 후회하지 않아요.”
“내가 항상 말하지만, 그 사고는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진짜 도화경 씨가 죽은 건 화준 씨 탓이 아니에요.”
“……내 탓이에요. 내가 떨어트린 장난감을 줍겠다고 화경이가 안전벨트를 풀었고 그때 사고가 났어요.”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왜곡되는 거예요. 사고 당시 화준 씨는 고작 네 살이었고…… 그 기억은 누군가의 말에 왜곡되었을지도 몰라요.”
화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일부분은 왜곡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손에서 떨어진 장난감과 그걸 줍기 위해 안전벨트를 풀던 화경의 모습은 또렷했다. 슬로 모션을 걸어 놓은 것처럼 몸이 튕겨 나가는 모습이 아직도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화준은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혹여 그 사고가 화준 씨 탓이라고 해도 이제 그 굴레에서 빠져나와야 해요. 언제까지 그 안에 갇혀 자책만 하고 있을 거예요?”
“……저, 빠져나갈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도 정확하게 말씀드렸어요.”
“……아버지한테요?”
“네. 인제 그만하시라고, 이만하면 되지 않느냐고.”
해령은 쓰고 있던 안경을 책상에 내려놓고 팔을 뻗어 화준의 몸을 끌어안았다. 내 아이가 걸음마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면 말문이 트이면 이런 기분일까…….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가만히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기특하고 또 기특했다. 늘 무력하게 부모에게 휘둘리던 그였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말하면 말하는 대로……. 그랬던 그가 아버지께 거부의 말을 했다는 게 신기하고 기특했다.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한마디겠지만 나중엔 도화준 스스로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날이 다가올 것 같았다.
“잘했어요, 정말. 정말 잘했어.”
해령은 화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환하게 웃었다. 사실 결혼을 하고 나서 더 상태가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도화준이 남자라는 사실을……!! 해령이 생각을 이어 가다 말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화준이 쓰러졌던 그날, 시온과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이 화준의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그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대화가 이어졌다. 뭐지……? 이 말인즉슨 공시온이 도화준의 상황을 다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었다는 건데.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음에도 왜 도움을 준 거지? 그런데 거기에 정략결혼을 대입하면 아귀는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화준의 이야기를 시온과 한 걸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공시온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는 문제였다. 해령의 긴 손톱이 책상을 덮고 있는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선생님.”
“네?”
“좋아한다는 게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나요?”
“……음? 쉽게 말해 줄래요?”
“그러니까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근데 딱 한 사람한테만 다른 감정이 느껴져요. 좋아하는데 그게 좀 더 깊다고 해야 하나.”
화준이 손톱 옆 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며 얼굴을 붉혔다. 해령은 금세 화준이 말하는 그 대상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걸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상대는 남자고 계약 결혼에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해령은 벗어 놓은 안경을 다시 쓰고 두 손을 맞잡아 턱을 괴었다.
“다른 감정이라는 게 뭐예요?”
“그게…… 막 여기가 간지럽고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고 또…….”
“얼굴만 봐도 좋고, 기다려지고, 너무 좋아서 불안하고?”
“……어떻게 아세요?”
정말 해령의 말처럼 화준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막 정신없이 좋다가도 문득 2년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그가 자신을 등지게 될 것 같아서 불안했다. 공시온이 바라보는 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그의 커다란 품에 안긴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화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지 시시각각 변하는 화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해령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화경 씨가 사랑에 빠진 거 같네.”
화준은 상담을 마치고 시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온은 잠시 로비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로비에 앉아 시온을 기다리며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사랑’이라고 적어 넣었다. 곧 화면이 바뀌며 검색 내용이 화면에 표시되었다.
사랑: [명사]
1.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2.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3.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음…… 화준은 휴대폰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로 풀어 놓은 정의는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어 하나를 곱씹듯 입 안에서 굴리며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이 뭘까. 시온이 점점 좋아질수록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좋다는 말도 이젠 할 수가 없었다. 처음 시온에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좋다’는 의미에 많은 감정이 들어가지 않아 그 당시 책과 시온은 동급이었다. 그런데 이제 공시온은 책 따위와 비교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무턱대고 ‘좋아해요.’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감정이 깊어졌고, 그런 말이 시온을 무겁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준은 모자를 푹 눌러쓰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얼른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나예요. 지하 3층에 내려가면 박 비서 있을 거예요. 일단 차에 타고 있어요.
“혹시, 바쁘세요?”
- 바쁜 건 아닌데 급하게 검토해야 할 서류가 지금 올라와서. 더우니까 차에 가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화준은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그의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화준도 그들의 무리에 끼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곧 시온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화준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걸렸다.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화준은 무리에 섞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빼곡하게 채워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숫자가 떨어지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 멈추어 섰다. 화준은 모자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박 비서가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화준의 어깨를 붙들었다.
“저기요.”
“……?”
화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눈앞에는 나경준이 눈이 아프도록 화려한 슈트를 입고 서 있었다. 화준은 의식적으로 모자를 고쳐 쓰고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신은 지금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 하필 이럴 때……. 미치겠다.
“나, 알죠?”
화준은 속으로 침착하라고 자기 암시를 걸며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도 위험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경준은 화준이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부터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누굴까. 경준은 고집스럽게 화준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바라봤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얼굴이 누군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아 짜증이 치밀었다. 그때 눈앞에 있는 남자가 손을 들어 어깨를 잡은 손을 밀어 냈다. 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쏜살같이 주차장 쪽으로 달아났다.
“이봐요!!”
뒤에서 다급한 경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준은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잡히면 안 된다.
박 비서와 눈이 마주쳤지만 화준은 무시하고 앞만 보고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혹시나 나경준이 따라오면 어쩌나 싶어 연신 뒤를 확인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차량 진입로를 따라 지하 1층까지 올라와 간신히 숨을 돌렸다. 기둥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최근 통화 목록을 확인하고 다급하게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
“나경준! 하아, 그 사람이랑 마주쳤어요.”
- ……지금 어디예요?
“여기 지하 1층 주차장인데 그냥 택시 타고 집에 갈게요.”
- 거기 있어요. 내가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화준은 숨을 고르고 차량 사이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이제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 가니 제대로 준비를 하고 다녔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직도 정신없이 뛰어 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주차장 특유의 매연 냄새와 후끈한 공기가 코로 몰아닥쳤다. 화준은 휴대폰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꼭 쥐고 시온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그러길 한참……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이 웅웅― 진동했다. 화준은 목소리를 죽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딨어요?
“저, 여기 B1 54번 쪽에 있어요.”
“화경아!”
꽤 가까이에서 들리는 시온의 목소리에 화준이 얼른 몸을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반대편 라인에서 자신을 찾고 있는 시온이 보였다. 재킷도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 정신없이 주차장을 살피는 그를 보는 순간 화준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속을 꽉 채우는 무언가가 제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두렵고 무서운데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벅찰 만큼 좋아서 기쁘기도 했다.
화준은 반대편 라인에서 제 쪽으로 다가오는 시온을 향해 달렸다. 그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죄송해요.”
“후, 괜찮아요?”
“정말 죄송해요.”
시온은 허리를 감싼 팔을 풀고 몸을 돌려 화준과 얼굴을 마주했다. 화준은 눈동자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이 약간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시온은 가쁜 숨을 내쉬고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차량이 지하 1층에 도착했고 시온은 화준을 차에 태웠다. 화준이 안쪽으로 몸을 움직이자, 시온이 팔을 붙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화준의 뺨을 감싸고 말했다.
“아직 일이 덜 끝나서……. 먼저 들어가 있어요.”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가서 씻고 좀 쉬고 있어.”
시온이 다정하게 엄지손가락으로 눈 밑을 한 번 쓸어 주고 차 문을 닫았다. 화준은 얼른 차창을 내려 시온을 쳐다봤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화준의 눈빛을 읽은 시온이 다시 한번 뺨을 감싸고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침에 꼬실 때부터 알아봤어. 일이 잘 안 될 거 같더라니.”
시온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화준은 고개를 푹 떨구고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출발하세요.”
시온이 차에서 한 걸음 떨어지자,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준은 한참을 차창에 매달려 멀어지는 시온을 바라보았다.
시온은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화준의 전화를 받고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곧장 사무실에서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아까워 그대로 비상계단 문을 열고 달렸다.
두 계단씩 밟아 내려가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이나,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놀랐을 도화준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초조함에 입술이 마르고 숨이 막혔다.
뒤에서 와락 안겨 드는 몸을 느꼈을 때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불안해하는 화준과 함께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온은 걸음을 옮기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했다. 그때 시온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 나경준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는데요.
“후, 기다리라고 하세요. 지금 올라갑니다.”
시온은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경준이 무슨 일로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왔을까. 혹시라도 나경준이 도화준에 관해서 묻더라도 평정심을 가지고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후, 깊은숨을 몰아쉬고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비서실 직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숙였다.
“나경준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온이 문손잡이를 비틀자, 소파에 앉아 있던 나경준이 손을 들어 허공에 저어 보였다. 화려한 패턴이 들어간 슈트를 보며 시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갔다 오냐.”
“용건이나 간단히 하고 가라.”
“나 귀국 파티 한다. 올래?”
“미친놈.”
시온은 소파에 앉지 않고 책상 쪽으로 다가가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귀가할 생각이었다. 가서 화준에게 당부할 일도 있고, 놀랐을 그를 달래 주고 싶었다. 아니, 그냥 눈으로 그를 보고 있어야 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너, 그 소문 아냐?”
“뭐?”
“네 와이프 말이야.”
와이프라는 말에 시온의 신경이 곤두섰다. 애써 내색하지 않고 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귀는 예민하게 경준에게 열려 있었다.
“발작이 심해서 사교계에 발도 못 들이는 거라며? 걔 엄마는 이미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는 소리도 있던데, 넌 괜찮냐?”
“개소리 그만하고 꺼져라.”
“아니야? 아니면 내 귀국 파티에서 증명해 보여 봐. 네 뒤로 얼마나 더러운 소문들이 줄줄이 붙어 있는 줄 알아?”
시온은 짜증스럽게 서류철을 덮어 책상 위로 던졌다. 시온 역시 화준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워낙 꼭꼭 숨겨진 채 살아온 사람이라 겉으로 드러나는 게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는 상태에서 덜컥 선우 그룹 장남과 결혼을 했고, 그 때문에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자주 올랐다.
정신병이 있다느니, 벙어리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떠돌았다. 근거 없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차 부풀려졌다. 게다가 화준의 모친인 신 여사의 병원 기록이 드러나면서 호사가들의 입이 바빠졌다.
“그런 소문 따위 신경 쓸 시간 없다.”
“신경 쓰게 해 줄까?”
경준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 전화를 걸었다.
“정 기자님, 해성 그룹 나경준입니다. 내가 재밌는 제보 하나 하려는데.”
“미친 새끼!”
시온은 경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전화를 끊었다. 금세 경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는 ‘데일리 일보 정 기자’라고 떠 있었다. 시온은 휴대폰 소리를 죽이고 테이블 위로 던졌다.
“왜? 이제 소문에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좋아, 그 귀국 파티 참석하지. 하지만 내가 거기에 참석하는 대신 너도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내가 주고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뭐든. 애들한테 다 말해 놓을게. 도화경 씨 꼭 데리고 와라.”
경준은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이 없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시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시온은 그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손잡이를 비틀던 경준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아!”
“…….”
“근데 도화경 동생, 진짜 죽은 거 맞냐? 나 아까 도화경이랑 똑같이 생긴 남자 봤는데.”
* * *ma
화준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시온의 얼굴을 보고 나서 좀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혼자 남겨지자 약간의 공포와 함께 어지러움을 유발했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던 커다란 손, 얼굴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짚는 듯한 나경준의 표정.
짧은 순간이었지만 공포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화준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고 떨리는 손을 꾹꾹 주물렀다.
“괜찮으십니까?”
룸 미러로 화준의 안색을 살피던 정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화준은 작게 괜찮다고 말하고 휴대폰을 한 손에 쥐었다. 그런데 아무리 괜찮다고 자기 암시를 걸어 봐도 몸 상태는 나빠지기만 했다.
극도의 긴장감과 초조함에 화준은 자각도 못 한 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다리를 떨었다. 만약 나경준이 알아차렸으면 어쩌지? 그건 공시온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을 믿어 주고 감싸 주는 시온의 부모님, 그리고 선우 그룹, 신성 건설까지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화준은 자책하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역시 이 일을 처음부터 수락하는 게 아니었다.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떨어졌다.
아!
손톱 옆 까슬까슬한 거스러미를 물어뜯다가 기어코 피를 보고 말았다. 진하게 배어 나오는 피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을까.
“정 힘드시면 다시 병원으로 갈까요?”
“아니요. 저, 정말, 괜찮아요.”
정혁이 기민하게 화준의 상태를 살피며 재차 권유했지만 화준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음을 본인도 느끼고 있지만, 나경준이 있을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차가 빌라 입구로 들어서자 화준은 벗어 두었던 모자를 푹 눌러썼다.
“감사, 합니다.”
화준은 도망치듯 차에서 내려 빌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화준은 귀를 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활이 편안하고 시온이 주는 안락함에 잊고 있던 자신의 상황이 무섭게 상기되었다. 도화준이 아니라 도화경으로 살아야 했던 지난날들, 그리고 그걸 거부하거나 부정하면 신 여사는 가차 없이 손찌검을 했다.
‘네 멋대로 살 거면 이 집에서 나가! 그때 살아난 건 도화준이 아니라 도화경이야! 내 딸! 내 하나뿐인 딸 도화경!! 화준이는 그날 죽었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죽을 딸을 부여잡고 사는 어머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이었고 악마였다.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던 지난날들이 눈앞으로 빠르게 스쳐 갔다.
화준은 현관 앞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숨이 막혔다. 신 여사의 비명이 고막을 찢어 버릴 것처럼 들리고, 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화준은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은 전과 매우 달랐다.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지만, 마음이 달랐다. 전에는 차라리 이대로 영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지독한 삶에는 미래도, 희망도, 꿈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화준은 가차 없이 삶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공시온……. 제 발목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그가 떠올랐다. 살고 싶다. 살고 싶어요.
‘화준아, 가자.’
갑자기 귀여운 원피스를 입은 네 살 화경이가 눈앞에 보였다. 자신이 떨어트린 인형을 소중히 품에 안은 화경이 환하게 웃었다. 화준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화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너무 보고 싶고, 그립고, 만나고 싶던 그 얼굴이 지금에서야 보였다.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안해. 화경아, 미안해.’
‘…….’
‘근데 나, 살고 싶어. 정말 잘 살고 싶어.’
‘…….’
‘이제 간신히 살고 싶어졌어. 차라리 전에 내가 아무런 미련도 없을 때 그때 나 좀 데려가지. 이젠 안 돼, 화경아. 나 못 가. 아니, 안 가.’
화경의 환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분명히 깨끗하고 단정했던 원피스가 순식간에 피를 뒤집어쓰고 찢겼다. 화준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혼몽 상태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화경은 피를 뒤집어쓴 채 눈앞에 있었고 호흡은 점차 식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자신의 멱살을 잡고 깊은 수마에서 건져 냈다.
“도화준!!”
깊은 수마에서 끌어 올려진 정신은 아득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초점을 모으려 해도 자꾸만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뺨을 두드리는 느낌, 애타게 부르는 이름, 그리고 익숙한 향…….
“공, 시온.”
“정신 놓지 마!! 정신 차려!”
화준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희미하게 꺼져 가는 웃음에 시온의 가슴이 무너졌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화준의 몸을 흔들었다.
시온은 나경준이 돌아가자마자 재킷을 챙겨 들고 차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고 막 출발하려는 찰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혁이었다.
“말해요.”
- 사모님 상태가 좀 안 좋으신 거 같습니다. 병원으로 다시 모실까 하다가…….
시온은 정혁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그대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강해령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선 차는 무섭게 질주했다. 아슬아슬하게 신호를 통과하고 과속 단속 카메라를 무시하는 건 예사였다.
빌라 입구에 아무렇게나 차를 주차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도 없었다. 문을 열고 화준의 이름을 크게 불렀을 때 시온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온몸이 경직된 상태로 눈물만 쏟고 있는 화준을 보는 순간,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됐다. 시온은 어금니를 사리물고는 화준의 멱살을 쥐고 강하게 당겼다. 품 안으로 쓰러지는 몸을 붙잡고 뺨을 두드렸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시온은 모든 걸 다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무능하거나 나약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정말 무능하고 나약하다고 느꼈다.
* * *dda
화준은 간신히 고비를 넘기고 평화롭게 잠들었다. 해령도 지친 얼굴로 돌아가자 집 안에는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시온은 담배를 입에 물고 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이사장님.
“해성 그룹에 투자한 개미 명단 싹 쓸어 와요. 한 명도 빠짐없이, 단 몇 주라도 가지고 있으면 모두 긁어 오세요.”
- 알겠습니다.
“그리고…….”
- 네.
“장세미…… 뒷조사 부탁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부터 통장 내역까지 털 수 있는 건 다 털어 와요.”
시온은 나경준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앙금이 남았다 한들 10년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이러는 게 영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마른세수를 했다. 정신없이 달려온 바람에 아직 회사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 따로 서류를 검토해 봐야 하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략결혼을 하고 난 뒤, 화준을 화경으로 살게 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도화경으로 살아왔던 삶에 자신이 2년만 더 얹혀살겠다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런데 도화준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처음에는 카메라 플래시에 놀라 몸을 휘청거렸고, 작은 접촉 사고에 정신을 잃었고, 게다가 오늘 일까지……. 시온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속이 답답하니 담배 생각만 간절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몸을 일으켜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온은 나경준이 말한 귀국 파티에 화준을 동반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서 이런 상황을 또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경준이 이죽대겠지만 그건 감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존심에 좀 생채기가 난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속에서 부아만 치밀겠지.
시온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2층을 한번 힐끗거렸다. 곤히 잠들어 있을 화준이 궁금했지만, 괜히 깨우고 싶지 않아 소파에 주저앉았다. 쌓여 있는 서류철 중 하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시온은 요즘 선우 병원에서 선우 그룹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었다. 화준과 약속한 2년 안에 후계 구도를 공고히 다져 놓을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동생인 시준과 경쟁 구도에 서야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시온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만년필을 집어 결재란에 사인해서 한쪽에 내려놓고 다른 결재판을 집어 들었다. 잡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내용을 검토하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그리고 사실 내용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온은 결국 결재란에 사인하지 못하고 서류철을 덮었다. 정신이 2층에 가 있으니 1층에 있는 육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온은 발소리를 최대한 죽여 2층 계단을 올랐다. 곤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만 잠깐 보고 괜찮은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조심히 문을 열자, 침대에 있어야 할 화준이 보이지 않았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화준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욕실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시온이 다급하게 문손잡이를 돌려 보지만, 굳게 잠긴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문 열어요. 도화경! 문 열어.”
주먹으로 문을 두드려 보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온은 열쇠가 어딨는지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다시 한번 크게 고함쳤다.
“문 열어!!”
하지만 욕실 문은 굳게 닫힌 채 물소리만을 내뱉었다. 시온은 다급하게 1층으로 내려가 서랍을 열어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분명히 어딘가에 둔 기억이 있는데. 시온의 손길에 가지런히 정리된 서랍 속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간신히 맨 아래 서랍에서 열쇠를 찾아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여전히 욕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쇠를 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시온은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화준은 욕조 안에 옷을 다 입은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고정된 샤워기에서는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화경!!”
“…….”
시온은 물을 잠그고 욕조 안에서 화준을 끌어내 바닥에 눕혔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시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이를 악물었다. 정말 죽기라도 할 작정이었어? 시온은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도화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시온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시온은 화준의 옷을 벗기고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감쌌다.
넋이 빠진 사람처럼 허공만 바라보는 화준을 품에 안고 욕실에서 빠져나와 침대에 눕혔다.
“왜 이러는 건데?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래?”
“…….”
“나경준을 만난 건 아무 일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 괜찮을 겁니다.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이사장님…….”
줄곧 허공을 향해 있던 눈동자가 움직여 시온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온은 숨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동자에 묻어나는 감정이 너무 절박하고 안타까워서 그 눈을 오래 마주할 수 없었다.
“저는…….”
“…….”
“괜찮을 거예요.”
화준의 떨리는 목소리에 시온은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화준이 직면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알 수는 없으나, 단 하나…… 도화준이 억지로 상황을 견디고 두 발로 일어서려고 한다는 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시온은 화준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래, 괜찮아질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될 거야.”
시온이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게맞다**
“몸 안 좋으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요. 그래도 생신인데 가 볼래요.”
사흘을 꼬박 앓은 화준은 어제 간신히 기력을 찾고 거동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회복했다. 그런데 조금 전 시온이 출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 들어 귀로 가져갔다. 발신인은 아버지였다.
- 오늘 네 엄마 생일이다. 저녁이나 한 끼 하자꾸나.
시온의 인상이 단박에 구겨졌다. 성인이 된 이후 한 번도 어머니의 생신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 잊어버리다니. 그건 시온이 도화준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사흘을 꼬박 열이 펄펄 끓어 오르고 힘겹게 숨을 내쉬는 화준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시온은 무서울 정도로 분노했다.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화준의 부모를 향한 분노였다. 극악무도하다는 말로도 표현되지 않았다.
도대체 도화준이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 왔을지, 그리고 그때마다 그의 부모는 어떤 식으로 그를 방치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시온은 화준의 손목에 난 긴 절창에 입술을 묻고 애타는 속을 진정시켰다.
“이사장님, 출근하세요.”
“아…….”
화준이 브리프 케이스를 집어 시온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온은 화준을 바라보았다. 사흘 밤낮을 꼬박 앓더니 눈에 띄게 살이 내리고 피부도 푸석거렸다. 그게 또 안쓰러워 한참이나 그의 앞에 서서 뺨을 쓸었다.
“화경 씨 힘들어서 안 되겠습니다. 못 간다고 말씀드릴게요. 다음에 찾아뵈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아, 아니요! 저 갈래요. 어머니 뵙고 싶어요.”
“웬 고집이야.”
“저, 어머니 좋아요. 항상 엄마한테 미움만 받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안 그러시잖아요. 이사장님이 참 부러워요. 다정하고 따뜻하신 분이 어머니라서 너무 부러워요.”
시온은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얼굴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어도 속에서는 부아가 치밀어 열이 차올랐다. 부럽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과 처연함이 묻어났다.
어미의 사랑이 고팠을 아이가 얼마나 어미에게 사랑을 구걸했을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을 떼지 않고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화준은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의 시선이 강렬하고 뜨거워서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녀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시온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신발을 신고 현관 앞에 섰다. 멀뚱멀뚱하게 바라보는 화준에게 허리를 숙여 뺨을 내밀자,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내심 서운한 기분이 들었지만 시온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꾹 눌렀다. 그러자 화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내밀어 그의 뺨에 짧게 입 맞췄다.
다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온은 이 평화를 절대 깨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열자, 벽에 기대서 있던 정혁이 몸을 바로 하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정혁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철을 시온에게 내밀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시온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뭡니까?”
“장세미 씨에 관한 자료입니다.”
“회사에서 보고받아도 될 텐데 여기까지 온 이유라도 있습니까?”
“보십시오.”
시온은 정혁에게 브리프 케이스를 넘기고 서류철을 펼쳐 들었다. 첫 장에는 장세미의 최근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클립에 꽂혀 있었다.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얼굴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서류의 첫 장에는 별 내용이 없었지만, 뒷장에는 아주 기가 막힌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장세미와 나경준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뭐야, 이거?”
“나경준과 함께 1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집 일을 담당하던 메이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확실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한국에 함께 들어온 것으로 파악되었고 아이도 있다고 합니다. 근데…….”
“……?”
“아이의 나이가 한국 나이로 열두 살이라고 합니다.”
시온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정혁을 바라보았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정혁은 옆으로 비켜섰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는 시온을 바라보며 정혁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자신도 자료를 수집하다 아이의 존재를 알았을 때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침 일찍 찾아온 이유 역시 이것 때문이었다.
“하, 정혁아. 이거 뭐냐? 이거 내가 애 아빠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일단은. 장세미 호적에만 올라가 있는 애라 확인은 필요할 거 같다.”
“확인?”
시온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정혁에게 서류철을 넘겼다. 정혁은 시온의 표정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시온의 입가에는 미소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정혁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시온이 손을 뻗어 이마를 살짝 밀었다.
“장세미랑 배가 맞은 적이 없는데 무슨 확인을 해.”
“뭐?”
“왜 나경준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이제 좀 알겠네.”
시온은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세미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나경준은 자신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장세미는 누구의 아이인지 입을 다물었을 것이고. 나경준은 진실이 두려워 유전자 검사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를 그저 사랑으로 감싸는 척 연기를 하며……지금까지 왔고, 그 분노는 고스란히 영문도 모르는 시온에게 쏟아졌다. 그 바람에 애먼 도화준이 쓰러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온은 담배를 길게 빨았다. 폐 속 깊은 곳까지 닿았다가 빠져나가 흩어지는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박 비서님, 장세미 어디 살던가요?”
“……논현동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로 갑시다.”
출근까지 미루고 장세미를 만나겠다니. 정혁은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공시온이 보통 또라이는 아니라는 거였다. 정혁은 작게 인상을 쓰고 시온이 탈 수 있게 뒷좌석 문을 열었다.
* * *
“어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아유, 우리 화경이도 왔네.”
“안녕하셨어요.”
커다란 꽃다발을 받고 기뻐하는 한 여사를 보며 화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제 봐도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모습이 전형적인 부잣집 사모님 같은 느낌이었다. 사용인이 다가와 화준의 가방과 케이크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시온은 익숙하게 화준의 허리를 감싸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화경이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니? 시온이가 또 손댔니?”
“아, 아니요! 너무 잘해 주세요.”
시온은 기가 막혀서 헛숨을 내뱉었다. 화준의 얼굴에 있던 그 상처는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숨을 삼켰다.
“그래? 우리 아들이 잘해 줘?”
“네, 잘해 주세요.”
시온은 멋쩍게 웃으며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목까지 채워진 단추도 하나 풀었다. 한 여사는 나란히 앉은 시온과 화준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는요?”
“곧 들어오실 거야.”
“아 참! 내 정신 좀 봐. 김 실장, 준비해 놓은 거 가지고 와요.”
곧 검은색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여자가 보석 케이스 몇 개를 들고 왔다. 그러더니 눈앞에 번쩍거리는 보석을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입이 딱 벌어질 만큼 고급스러워 보이는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까지……. 그리고 작은 상자 하나는 한 여사가 직접 열어 화준의 앞으로 밀었다.
“이건 시온이 할머니가 나한테 물려주신 거야. 이제 우리 화경이한테 물려줘야겠지?”
“아…….”
한 여사는 케이스 모두를 화준의 앞으로 밀어 주고 환하게 웃었다. 결혼 전 화준에 대한 소문이 워낙 좋지 않아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본 화준은 착하고 마음이 여린 예쁜 아이였다. 말수가 적고 조용한 타입이긴 하나, 그만큼 구설수가 없을 거라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건 엄마가 주는 선물이야. 예쁘게 끼고 다녀. 그리고 우리 시온이, 잘 부탁한다.”
“가, 감사합니다.”
화준은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에 손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엄마가 살아 있음에도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을 도구로만 사용하려고 하는 그녀의 욕심과 패악에 하루하루가 절망적이기만 했는데, 한 여사가 퍼부어 주는 사랑은 너무 따뜻하고 살가워서 가슴이 벅찼다.
가끔 전화를 걸어와 먼저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길에 문 앞에 반찬을 놓아 주고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화준은 시온을 좋아하는 것처럼 한 여사와 공 회장을 마음속으로 깊이 존경했다. 갑자기 사용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아버지 오셨나 보다.”
한 여사의 말에 시온은 풀어 놓은 단추를 다시 채우고 타이를 똑바로 고쳐 맸다. 사용인들이 정렬해 있는 현관으로 화준과 함께 나가 앞에 섰다. 곧 문이 열리고 공 회장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보, 잘 다녀왔어요?”
“생일 축하해요.”
커다란 꽃바구니를 내밀며 환하게 웃던 공 회장이 화경과 시온을 발견하고 더 환한 웃음을 지었다. 특히 화경에게는 더 살갑게 손을 잡으며 반갑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우리 화경이 왔구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집에 누가 있어야지. 저 사람도 나도 바쁜데, 뭐. 마음 쓰지 마라.”
살가운 대화 속에서 화준은 자꾸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화경이 진짜 살아 있었다면 이런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준의 기분을 아는지 시온이 손을 아래로 내려 화준의 손을 꼭 쥐었다.
식사하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뚝뚝한 시온도 오늘만큼은 환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적절하게 맞췄고, 한 여사도 매우 기분 좋은 생일을 즐기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과를 할 때쯤 시준이 귀가했다.
시준은 형수님, 이라고 깍듯하게 화준을 대했다. 시준이 잠시 시온을 호출해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고, 거실에는 화준과 시온의 부모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 시온이, 정말 재미없지?”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화준과 시온의 신혼 생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화준은 손가락으로 볼을 살살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공시온은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기보다 생각이 많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배려 넘치고, 다정하기만 한 사람인데.
“아니요. 이사장님, 너무 친절하고 다정하세요.”
“화경이가 아직 호칭을 제대로 못 고쳤구나.”
“아…… 시온 씨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게 잘 입에 붙지 않아서요.”
“나도 그랬어. 처음에는 공 사장님, 공 사장님, 했다니까. 굳이 고치려고 하지 마.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여보, 라고 부르게 되니까.”
여보라는 말에 화준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대화하는 내내 시온의 부모님은 화준을 배려했다. 최대한 화준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높은 담장만큼이나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대화가 너무 술술 흘러가서 오히려 당황한 건 화준이었다. 화준은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마음은 바위가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웠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중에 혹시나 자신이 여자가 아닌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크게 실망하실까 두려웠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화준의 생각이 깊어질 때쯤 시온과 시준이 다이닝 룸에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시온은 잠시 화준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선우 그룹 본사로 발령 내 주십시오.”
“……재단은 어떻게 하고?”
“재단은 어머니께서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 얘! 엄마 손 뗀 지 오래됐다. 그리고 엄마도 노후를 즐길 권리가 있어.”
“그럼 형수님이 맡는 건 어때?”
시온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화준을 바라보았다. 화준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 의사를 표했지만 시온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대기업은 족벌 경영이었고 국민의 질타를 받는다고 해도 잠깐이었다.
시온은 화준이 사회 경험을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재단 사람들은 시온에게 우호적이었고, 자신이 언제 개입해도 상관없는 자리라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화준의 멘탈이었다. 지금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휩쓸리는 화준이 잘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반기를 들 생각은 없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네.”
“이사장님!!”
시온은 당황한 화준을 바라보며 집게손가락을 입가로 가져다 대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그가 안쓰럽지만 시온은 일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본사 적당한 자리로 발령 내 주시면 그 문제는 따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나는 화경이가 재단 맡는 거 반대하지 않는다. 이참에 호사가들 입도 다물게 하고 여러모로 좋은 생각 같구나.”
화준은 본가에서 나오자마자 먹먹한 기분에 눈물을 글썽였다. 자꾸만 와르르 무너지는 가슴을 애써 다스려 보지만 역부족이었다. 시온의 부모님이 주는 사랑이 크고 따뜻해서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시온은 화준을 조수석에 태우고 차체를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왜 울어?”
“저, 너무 죄송해서 안 되겠어요. 속이고 있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시온은 운전대를 붙잡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줄줄 눈물을 흘리는 화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이드 포켓에 꽂힌 티슈를 꺼내 내밀었다. 시온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었다. 만약 화준을 향한 마음이라도 없었다면 무슨 수를 낼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솔직한 심정으론 도화준이 당장 뛰쳐나가서 미친놈처럼 맨바닥에서 앞 구르기를 한다고 해도 마냥 기쁘기만 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시온의 마음은 화준에게 관대했다. 이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한 진심이었다. 시온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화준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너무 잘해 주시는데 혹시라도 제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시면……. 너무 끔찍해서 눈앞이 캄캄해요. 그분들께 상처를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 화경 씨가 더 잘 알잖아요.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시온은 말을 맺으며 블랙박스 속 메모리 카드를 빼서 재떨이에 버렸다.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화준은 연신 훌쩍거리며 눈물을 찍어 냈고, 시온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한적한 공원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조수석으로 다가가 화준의 손을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온 화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좀 걸읍시다.”
시온은 화준의 손에 깍지를 꼈다.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온기에 화준은 시선을 내려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죄책감에 사로잡혀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만 하던 기분이 상승 곡선을 그렸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난 어릴 때 굉장히 외로웠습니다. 부모님 두 분 다 바쁘셨거든요. 아버지는 할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고 직접 경영하느라 바쁘셨고, 어머니는 지금 내가 맡은 재단을 운영하고 계셨어요. 내 뒤치다꺼리를 해 주는 건 박 비서 아저씨나 아주머니뿐이었고.”
시온은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로 화준을 이끌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견딜 정도였다. 화준은 시온의 곁에 붙어 그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밑에 딸린 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형과 오빠 노릇을 해야 했죠. 그게 얼마나 힘들고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버겁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뭐, 지금은 다정하고 여유 넘치는 분들이지만 내가 어릴 땐 안 그랬습니다. 무섭긴 또 얼마나 무서웠는지…….”
화준은 걸음을 멈추고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희미하게 남은 씁쓸한 기색을 읽어 내고 다른 한 손으로 시온의 손을 덮었다. 그러자 시온이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 부러워하지 말라고.”
울컥 치미는 감정에 화준은 눈을 꽉 감았다. 시온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코를 문지르고 싶었지만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바람에 화준이 입은 원피스가 가볍게 나부꼈다.
“이사장님.”
“……말해요.”
“저번에 밖에서, 키스,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시온은 미간을 좁히고 화준의 말을 곱씹었다. 그게 언제였지? 맥주를 마시면서였나? 희미한 기억 속에서 화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밖에서 진하게 키스도 해 보고. 내가 도화준이랑 밖에서 키스하면 이상하지만 도화경이랑 키스하는 건 이상할 게 없잖아요.’
머릿속을 스치는 한 조각의 기억에 시온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화준이 손을 풀어내고 시온의 허리를 감싸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거…….”
“……?”
“지금 해 주세요.”
시온은 어쩐지 심장이 아픈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심장을 쿡쿡 찔러 대는 느낌에 미간을 좁히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깨끗하고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여 머릿속을 훑었다.
2년이라는 시한부 계약, 이 감정은 2년이 지난 후 단칼에 잘라 낼 수 있을까.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슴이 터지도록 쿵쿵거리는 두근거림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싶었다.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화준의 입술을 머금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얽혀 오는 혀를 감싸 빨아당겼다. 입 안에서 뒤엉키는 타액처럼 화준과 시온의 마음도 격렬하게 뒤엉켰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향해 맹렬하게 달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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