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감정의 발현 (3)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정혁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아직 수면에 잔뜩 젖어 있는 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혁은 눈을 비비며 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누구세…… 이사장님?”
문 앞에는 술에 취한 시온이 서 있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정혁은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으며 시온의 몸을 부축해 집 안으로 들였다. 휘청거리는 그를 간신히 소파에 던져 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의 절반이 간신히 지나가고 있었다.
알지 못했던 감정을 자각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있는데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쩌자는 건데.
정혁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항상 술을 마시면 제집으로 오던 시온이었다. 아마 기사가 당연히 이곳으로 데려다주었을 것이다.
“박정혁.”
“술 취했으면 자라. 네 옷, 옷방에 있으니까 알아서 챙겨 입고 자.”
“너는 내가, 왜 좋은데?”
“사람 좋은 데 이유 있냐. 그냥 좋은 거지. 나도 몰라.”
시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아하는 이유가 거창하게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듣고 보니 정혁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좋은 건 이유가 없었다. 도화준이 “이사장님이 좋아요.”라고 말한 것처럼.
“회사에 무슨 일 있냐. 웬 술이야.”
“그냥 내가 좀 등신 같아서.”
“등신 같은 줄 알아서 다행이네.”
정혁은 빈정거리듯 시온의 말을 받아치며 주방으로 향했다. 술 장식장 제일 아래에 넣어 둔 꿀 병을 꺼내 컵에 담고 물을 부었다.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소파에 널브러진 시온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병원장의 목을 날렸다는 건 수행 비서를 통해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꽤 공들인 일이라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시온이 직접 목을 날렸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시온은 일과 관련된 부분은 철두철미하다 못해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반면에, 정적인 부분에서는 거의 맹탕에 가까웠다. 정혁은 며칠 쉬면서 이 사달이 난 것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 보았다. 그런데 따져 보면 지금까지 지켜본 공시온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하지 못한 놈이었다.
뭐, 형식상으로 여자를 만나고 자리를 지킨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금세 정리가 되곤 했다.
그런 과정들을 반복해 오다 보니 꽤 바람둥이로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렸다. 사실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 본 맹탕인 인간인데…….
연애는 지지리도 못하는 새끼가 섹스는 존나 잘하고 지랄이야.
정혁은 코끝을 찡그리며 잘 풀어진 꿀물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널브러진 시온의 몸을 받쳐 일으키고 입가에 컵을 대 주었다.
“마셔.”
공시온은 얌전히 입을 벌리고 꿀물을 마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둘 중 누구도 속이 편하지 않았다. 시온은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정혁은 익숙하게 테이블 아래에 놓아둔 재떨이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시온은 누워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경준, 한국에 들어왔다더라.”
“……언제?”
“나도 몰라. 나윤이한테 들었어.”
“그래서 술 마셨냐?”
시온은 담배를 입에 물고 희미하게 웃었다. 공시온과 나경준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너무 친해서 둘이 사귄다는 우스갯소리가 날 만큼 항상 붙어 다니고 일상을 공유했다. 그런데 둘 사이가 여자 하나 때문에 크게 틀어졌다. 그 당시 시온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며 여자를 막 만나고 다닌 시기였는데, 하필 경준이 좋아하던 여자와 시온이 우연히 엮이면서 문제가 생겼다.
“너희 둘, 진짜 별거 아닌 일로 그렇게 크게 틀어질 줄 몰랐어.”
“누가 아니래. 난 게이라 여자에 관심도 없는 새낀데.”
“그래도 경준이한테 게이니, 어쩌니 그딴 소리는 하지 마라.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그거 엄청난 약점이야.”
시온이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술기운이 올라 어지러운 머리가 담배를 피우니 지독한 두통을 유발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재킷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들어가서 자.”
“넌 내가 좆 같지도 않냐.”
정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시온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만들어 낸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저 가볍게 몸만 섞고 끝나는 그런 관계가 돼야 했는데,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 억울하고 서러워도 어쩌겠는가. 정혁은 리모컨을 집어 들어 텔레비전을 켰다.
금세 와글와글한 말소리가 섞여 들어 조용한 집 안에 소음을 만들어 냈다. 정혁은 바닥에 앉아 두 다리를 세워 끌어안고 텔레비전에 시선을 두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집 안은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그가 함께하는 일상은 늘 이랬다. 서로에게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존재했다. 그러다가 문득 시온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런…… 미친!
정혁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모자 하나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리고 소파로 다가가 시온의 팔을 붙잡았다. 살짝 잠들었던 시온이 놀라 눈을 떴다.
“일어나.”
“왜?”
“너 결혼했어. 집에 들어가서 자.”
“난 또 뭐라고. 됐어, 피곤해.”
“일어나, 새끼야.”
정혁이 시온의 양팔을 붙잡아 세게 끌어당겼다. 상체를 반쯤 세운 시온이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팔을 비틀었지만 정혁은 고집스럽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집에 가서 자. 나 괜히 오해받기 싫다.”
“누가 널 오해해. 넌 내 비서일 뿐인데.”
정혁은 가슴 아프도록 박히는 말 한마디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온은 소파에 기대어 정혁의 허리를 붙잡아 가까이 당겼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정혁의 몸이 단숨에 끌려왔다. 그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서 있는 게 어색해 몸을 물리려 하자, 허리를 쥔 시온의 손이 그걸 막았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틀어 놨더니 말도 안 되는 대사와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정혁은 속이 타는 기분에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시온은 정혁의 허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겨 배에 뺨을 대고 중얼거렸다.
“회사 복귀해라. 차기 병원장 후보도 생각해 봐야 하는데 나 혼자선 무리고.”
정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렸다. 어쩐지 이 분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서 우리 둘의 관계가 결정될 것 같았다. 어차피 이 감정은 정리해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 따른 책임은 정혁에게 있었다.
정혁은 시온의 곁에 남기로 했다. 감정과 꿈은 별개였다. 공시온을 선우 그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는 일, 그건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자 방법이었다. 후, 깊은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 하루만 더 쉬고 복귀할게. 내가 만든 감정, 내가 정리한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무것도 없었던 그때로 다 돌려놓을 테니까.”
“그래, 7년의 세월도 정리하는데 고작 2년 정리 못 할까. 나 집에 데려다줘라.”
정혁은 씁쓸한 얼굴로 시온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시온이 말한 2년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공시온은 도화준에게 흔들렸다. 단 한 번도 사람에게 흥미라곤 보인 적 없는 그가, 처음으로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는 걸 정작 공시온은 알지 못했다.
* * *
화준은 어린 시절부터 가발 세팅을 도와주던 디자이너에게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치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가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거기에 볼륨감을 강조한답시고 가슴을 꽉 채운 실리콘 패드가 부담스러웠다.
립스틱이 지워질까 싶어 물병에 꽂힌 빨대를 쪽쪽 빨았다. 자꾸 긴장돼서 그런지 입이 말랐다. 시온이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드레스는 공시온과 설전 끝에 오프 숄더로 입되, 롱 드레스 타입으로 입기로 합의했다.
공식적인 행사 자리는 처음이라 긴장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화준은 숨을 깊게 몰아쉬고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작은 클러치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시온이었다.
“여보세요.”
- 데리러 올라갈까요? 아니면 내려올래요?
“제가 내려갈게요.”
- 천천히 내려와요.
화준은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살며시 움켜쥐고 클러치 백을 손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숨을 들이켰다.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아둔 구두에 발을 끼워 넣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시온이 직접 디자인한 수제화였다. 디자인은 심플하지만 착화감에 중점을 두고 제작한 구두라서 발이 무척이나 편했다. 굽도 그리 높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시온이 검은색 턱시도를 차려입고 차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박 비서의 모습도 보였다. 화준을 발견한 시온이 못마땅한 얼굴로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기온이 30도가 넘어서 도시 전체가 지글지글 끓어 대고 있는데…….
“정말 마음에 안 들어.”
“…….”
시온은 투덜거리며 뒷좌석 문을 열어 화준이 차에 오를 수 있게 도왔다. 드레스 자락까지 세심히 정리해 주고 문을 닫은 시온이 정혁에게 담배를 부탁했다. 정혁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시온이 차체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무는 걸 보고 정혁은 운전석 문을 열어 차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박 비서님.”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어컨 온도 좀 낮춰 주시겠어요?”
정혁이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추며 룸 미러로 화준을 힐끗거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몇 주 사이에 굉장히 분위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눈도 잘 못 맞추던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시온의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있는 것도 왠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이사장님께서 사모님의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화준의 시선은 담배를 입에 물고 통화 중인 시온에게 줄곧 닿아 있었다. 괜히 고집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마음이 좀 복잡했다. 통화를 마친 시온이 담배를 입에 물고 차에 올랐다. 무심코 차에 올랐다가 옆에 화준이 있는 걸 보고 곧장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출발하겠습니다.”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온은 피곤한지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았고 화준은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혁은 룸 미러로 둘을 힐끗거리고 줄여 놓은 볼륨을 올렸다. 차 안에는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흘렀다.
“박 비서님, 볼륨 줄이세요.”
정혁이 얼른 볼륨을 줄이자, 운전석과 뒷좌석을 차단해 주는 문이 닫혔다. 시온은 오도카니 앉아 있는 화준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노출이 있는 드레스를 선택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온은 며칠 동안 고민했지만, 이 감정에 대해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시온도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 굳이 결론을 내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게 연민이든 동정이든 사랑이든 전혀 상관없었다. 2년은 무조건 자신의 곁에 있을 테니. 2년이 지난 후에 그때 가서 결론을 내려도 늦지 않았다. 아직 주어진 시간은 충분했기에.
“오늘 책 좀 읽었어요?”
“네. 여행서 봤어요.”
“어느 나라?”
“일본 오키나와요. 정말 예쁘더라고요. 나중에 꼭 가 보고 싶어요.”
“누구랑?”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에 시온이 당황했다. 하지만 화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희미하게 웃으며 작게 말했다.
“이사장님이랑요.”
시온의 입가에 금세 미소가 번졌다. 아주 사람을 들었다가 놨다가 하네. 그래도 자신과 함께 가고 싶다는 말에 시온의 기분이 한순간 풀렸다. 조금 전까지 인상을 구겼던 게 무색할 만큼 기분이 나아졌다.
“곧 도착합니다.”
도착한다는 정혁의 말에 화준은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시온의 옆에 내려놓았다. 시온은 재킷을 입고 단추를 채웠다.
“내가 에스코트해 줄 때까지 차에서 기다려요.”
시온은 말을 짧게 뱉어 내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선우 그룹에서 주최하는 큰 행사이기 때문에 밖에는 기자들이 많았다. 시온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차체를 돌아 차 문을 열었다. 번쩍거리는 카메라 불빛에 화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 쓰지 말고 내려요. 옆에 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화준은 숨을 깊게 마시고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시온이 다가와 화준의 손을 잡아 제 팔에 끼워 넣었다. 단단히 팔을 붙잡았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시온과 함께 포토 존까지 이동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시온이 입을 손으로 가리고 화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미소만 짓고 있어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 단단히 붙잡아요.”
시온은 화준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더니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이리저리 몸을 돌려 카메라에 응했다.
“아내분 구두가 굉장히 특이한데 어디 브랜드입니까?”
기자 하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준의 구두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시온은 기자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능숙하게 대답했다.
“제 아내를 위해서 제가 직접 디자인한 구두입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순식간에 화준의 구두에 집중되었다. 시온은 마치 과시라도 하듯 구두가 잘 보이도록 화준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밋밋하기 짝이 없지만 내일이면 여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구두였다.
“신혼이신데 행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결혼이 이렇게 행복한 줄 알았음 좀 더 빨리 할 걸 그랬습니다.”
시온의 넉살에 기자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 기자들은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시온의 모습에 화준은 속으로 감탄했다. 기자들이 많아 쉽게 휘둘릴 법도 한데 유연하게 분위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시온은 능숙하게 해냈다.
화준은 시온의 팔을 붙잡고 애써 미소 지었다. 어젯밤 시온은 화준을 다리 사이에 앉혀 두고 인터뷰가 있을 거라고 미리 귀띔해 주었다. 카메라도 많을 것이고 엽사가 찍히면 흑역사로 남을 거라는 말도 해 주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아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저희 KNN 의료 재단은 앞으로도 많은 희귀병 환우들을 위한 후원 행사나 자선 행사를 이어 갈 것입니다. 희귀병 환우 보호자님의 고되고 힘든 삶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온은 인터뷰를 마치고 화준의 허리를 감쌌다. 몸을 돌려 선우 그룹 본사 안으로 들어섰다. 걸음마다 따라붙는 카메라 플래시에 화준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간신히 한숨을 돌리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올드한 슈트를 차려입은 무리가 시온을 반겼다. 시온은 정혁을 불러 화준의 에스코트를 부탁했다.
화준은 정혁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직 행사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옆에 붙어 있는 안전 손잡이를 잡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숫자판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3층에 멈추었다.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리자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진한 향수 냄새에 화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이네.”
정혁은 휴대폰으로 시온의 내일 일정을 확인하다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정혁이 놀란 얼굴로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눈앞에는 바이올렛 컬러의 슈트를 입은 나경준이 서 있었다.
“너……!!”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한 정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경준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정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환하게 웃었다. 거의 10년 만에 본 친구의 얼굴에 기쁨보다는 어쩐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국 들어왔다더니 진짜네.”
“어. 일주일 됐다. 잘 지냈냐?”
“나야 뭐.”
“근데 누구?”
정혁의 뒤에 서 있는 화준에게 갑자기 시선이 쏟아졌다. 정혁의 얼굴이 낭패감에 잔뜩 구겨졌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정혁은 한숨을 푹 내쉬고 경준에게 화준을 소개했다.
“시온이 와이프야.”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안녕하세요, 나경준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도화경이라고 합니다.”
경준이 화준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내밀자, 그가 손등에 짧게 입 맞췄다. 화준이 놀라 손을 빼고 몸을 물렸다.
“야!”
“왜? 인사야, 인사. 친구 와이프한테 인사도 못 하냐.”
“미친놈, 진짜 돌았네. 너 공시온 앞에선 절대 그러지 마라.”
정혁은 친구라는 말에 속이 답답해졌다. 공시온과 나경준은 과거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둘은 주먹다짐까지 하다 크게 사이가 틀어졌고 만나 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었다. 적어도 정혁의 생각으론 그랬다. 엘리베이터는 누군가 장난을 쳐 놨는지 층마다 다 멈추었고, 화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침내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멈추자, 정혁이 화준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경준도 옆으로 물러서며 화준이 지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다.
“먼저 나가세요.”
“감사합니다.”
화준은 경준을 은근히 경계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후원의 밤’이라고 크게 쓰인 글씨를 눈으로 읽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화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드레스 자락이 발에 밟히며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아! 짧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 화준이 넘어지려는 찰나, 낯선 손이 화준의 손목을 낚아채며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찔한 향수 냄새가 풍기는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사모님!”
“괜찮아요?”
화준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경준은 희미하게 웃으며 화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준이 놀라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비틀었지만 경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 손 좀 놓지?”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정혁은 욕을 뇌까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오는 시온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온은 경준의 품 안에 갇힌 채 얼굴을 붉히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주변의 시선이 하나둘씩 나경준과 도화준에게로 향했다.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며 힐끗거리는 기분 나쁜 시선에 시온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화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화준은 의외로 쉽게 시온의 앞으로 끌려왔다.
“보는 눈이 많은데 꼭 여기서 그런 유치한 짓을 벌여야겠어?”
시온은 화준의 드레스를 정리해 주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경준이 시온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너야말로 의처증이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정말 혼자 보기 아깝네.”
“뭐?”
“오랜만에 본 친우한테 이렇게까지 격할 필요 있어?”
“친우라, 너와 내가 그렇게 살가운 단어를 쓸 만큼 가까운 관계였나?”
경준은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며 화준을 싸고도는 시온의 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경준과 공시온은 사립 유치원을 시작으로 대학교 입학까지 꽤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 왔다. 서로의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식성, 성격, 여자 취향 등등…….
게다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겪으며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해졌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오산이었다. 단단하게 쌓아 올린 관계는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와르르 무너졌다.
공시온은 경준이 태어나서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여자와 얽혔다. 그 당시 시온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며 이래저래 여자를 많이 만나고 다니던 시기였고, 하필 그때 그녀와 엮이면서 문제가 생겼다. 경준은 그녀와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저 짝사랑하는 상대였을 뿐인데 그땐 소위 말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장세미와 나!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넌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여자한테 관심 없어.’
‘여자한테 관심 없다는 새끼가 세미랑 잤냐.’
‘그건……! 이유는 정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아니, 말해도 네가 이해 못 할 거다.’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난날들을 곱씹으며 경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말뜻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경준은 시온이 장세미와 호텔에 들어간 것도, 그리고 거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오는 것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밤새워 호텔 앞을 지키던 그때의 기분은 지금 생각해도 참담했다.
“어머, 경준이 아니니?”
갑자기 들려온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경준은 머리를 환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우아한 롱 드레스를 입고 숄을 어깨에 두른 한 여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경준은 얼른 표정을 풀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시온과 화준 역시 한 여사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그래. 잘 지냈니?”
“네. 더 아름다워지신 거 같아요.”
“아유, 넉살은……. 우리 시온이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지?”
경준의 시선이 화준을 감싸고 서 있는 시온에게로 향했다. 시온은 잔뜩 인상을 굳힌 채, 경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준은 일부러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요.”
“우리 경준이도 얼른 장가가야지, 안 그래?”
“전 아직 생각 없어서요.”
“그래도 어머니가 많이 걱정하시더라. 좋은 짝 만나서 장가가야지. 우리 시온이도 장가가니까 얼마나 살가워졌는지 몰라.”
살갑다는 말에 경준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아는 공시온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성격이었다. 그런 놈이 장가갔다고 살가워졌다고……. 시온의 옆에 약간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그녀가 다시 보였다.
신성 건설의 장녀, 도화경. 경준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어릴 때 교통사고로 동생을 잃어 큰 충격에 빠졌고, 그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했다. 그녀는 특유의 유약한 느낌과 함께 눈에 띄게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시온은 화준을 바라보는 경준의 시선이 노골적이라 마음이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화준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에 세우고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손에 손가락을 얽어 넣었다. 땀이 축축하게 묻어나는 손바닥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어머니, 이 사람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
“그래, 오랜만에 만났으니 둘이 대화 좀 하다가 들어오렴. 화경아, 엄마랑 들어가자.”
시온은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화준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고 어머니 팔에 그의 손을 넣어 주었다. 천천히 시야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경준을 바라보았다.
“내 주변에서 알짱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옛정을 생각해서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은 없어.”
경준은 가볍게 코웃음 쳤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었다. 지금 공시온은 두려워하고 있다. 일부러 날카롭게 말을 뱉고 있지만, 그 속에 묻어나는 두려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 내가 저 여자랑 놀아나기라도 할까 봐 그래?”
“……그 입, 다물어.”
“와, 도화경 대단하네. 천하의 공시온을 이렇게 벌벌 떨게 하다니…… 정말 궁금하다.”
한껏 빈정거리는 말투에 시온은 당장에라도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차분하게 마음을 억눌렀다.
“궁금해할 필요 없어. 너한테는 과분한 여자니까.”
“그건 내가 직접 겪어 보면 알겠지.”
시온이 신경질적으로 보타이를 잡아당기고 경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막 손을 뻗으려는 찰나, 정혁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해. 내일 신문 1면 장식하고 싶어서 이래? 이사장님 너는 당장 행사장 들어가고, 경준이 너는 나 좀 보자.”
정혁이 경준의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질질 끌려오다시피 엘리베이터에 오른 경준이 짜증스럽게 발을 탕탕 굴렀다. 묵직한 구두 소리가 내부에 울렸다. 정혁은 휴대폰을 꺼내 수행 비서 하나를 행사장으로 올려 보냈다. 정혁은 1층에 있는 사내 카페로 경준을 데려갔다.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왜 시온이 속 뒤집냐고. 너, 그럴 생각도 없잖아. 나는 상황을 제대로 몰라서 뭐라 말하는 게 주제넘겠지만…….”
“나만 당한 게 억울해서 그런다, 씨발. 그 새끼는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꼴 보니까 배알이 꼴려서. 됐냐?”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인데 네가 이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경준은 입을 다물고 미간을 좁혔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밖에 못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한심한 건 한심한 거고,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세미가 공시온의 바지를 붙잡고 처절하게 울던 그날이, 벌써 10년이 지났음에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신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랑의 말을 듣고도 매몰차게 뒤돌아 멀어지던 그 모습에 세미가 처절하게 울었다.
‘경준아, 나 시온이 좋아해. 한 번만 만나게 해 줘.’
경준은 쓰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정혁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가려고?”
“어. 오랜만에 봤는데 너한테 좀 미안하다.”
“그래, 다시 날 잡아서 정식으로 보자.”
* * *
화준은 나윤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화준은 기민하게 시온의 움직임을 좇아 눈동자를 굴렸다. 편안한 얼굴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시온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일까? 나경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분명 시온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다.
“언니, 이거 먹어 봐요.”
화준은 나윤이 내미는 접시를 받아 들었다. 접시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마카롱이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챙겨 주는 나윤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 화준은 조심스럽게 마카롱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입 안에 퍼지는 단맛에 화준이 미간을 좁혔다.
으, 달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화준이 갑자기 접시를 들고 시온이 서 있는 앞쪽으로 걸어갔다. 시온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화준을 발견하고 잠시 양해를 구하고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이거 드셔 보세요.”
“뭐?”
드레스 자락도 잡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오길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더니 고작 용건이라는 게 마카롱을 먹어 보라는 거였어? 접시를 앞으로 내밀고 어서 먹어 보라고 눈으로 말하는 화준을 바라보며 시온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가끔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궁금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먹여 줘요.”
“제가요?”
“먹어 보라며.”
화준은 보라색 마카롱 하나를 집어 시온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금세 입 안으로 진한 단맛이 퍼졌다. 평소 단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약간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화준이 시온의 턱시도 깃을 잡아 가까이 당기고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키스하고 싶어요.”
괴로움을 삼키며 우걱우걱 마카롱을 씹어 삼키던 시온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화준을 바라보던 시온이 갑자기 화준의 허리를 감싸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지금 굉장히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거 압니까?”
“……왜요?”
정말 도화준이 사람 기분을 쥐락펴락하는 데 재주가 있는 건지, 아니면 이런 사람이 주위에 없어서 휘둘리는 것인지 당최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그다지 불쾌하거나 나쁘지 않았다. 시온은 화준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아 지나가는 서버에게 넘겨 주고 손목을 잡아채 빠른 걸음으로 행사장을 가로질렀다.
시온은 행사장을 빠져나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비상계단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사장님, 어디 가십니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혁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시온의 앞을 막아섰다. 시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정혁의 어깨를 밀쳤다.
“비켜.”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혁은 시온에게 손목이 붙들린 채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고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이내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천천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시온은 망설이지 않고 비상계단 문을 열어젖혔다. 정혁은 씁쓸하게 웃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순간을 눈으로 마주할 때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럴래. 정혁은 자조하며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온은 화준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그대로 입술을 맞물렸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입 안에서 살살 풍기는 단내를 핥았다. 화준이 시온의 목에 팔을 감고 적극적으로 입을 맞춰 오자, 시온은 화준의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높아졌다. 화준이 잠시 입술을 떼고 시선을 내려 시온을 바라보았다.
“입술.”
시온이 채근하듯 입술을 약간 내밀자, 화준이 시온의 두 뺨을 감싸고 입술을 머금었다. 마음이 펄펄 끓어오르는 기분에 화준은 눈을 꽉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숨결, 모든 게 화준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반응해 주는 그가 좋았다.
립스틱이 입가에 진하게 번질 만큼 격렬하게 입을 맞추고 턱 끝까지 달아오른 성욕에 숨을 헐떡였다. 시온은 이대로 화준을 끌고 집으로 갈까 생각하다가 자신이 행사 주최자임을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았다.
시온은 화준을 바닥에 내려 주고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엉망인 화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준의 화장을 수정해 줄 사람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윤이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화준의 몰골을 바라보고 혀를 찼다.
“아이고, 아주 불타는 신혼이시네. 여기서까지 그래야 하냐, 어! 인간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까분다.”
나윤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화준을 보고 크로스로 메고 있던 체인 백에서 립스틱과 퍼프를 꺼내 화준에게 내밀었다. 나윤이 작은 거울을 들자 화준은 능숙하게 퍼프를 받아 얼굴을 두드리고 번진 립스틱을 정리하고 덧발랐다. 시온이 먼저 행사장으로 들어가고 나윤과 화준은 외부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우리 오빠, 되게 의외다.”
“네?”
“우리 오빠, 여자한테 진짜 관심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거의 7년 동안 연애 한 번 하지 않던 사람이라 무성욕자나 고자로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제 보니 그건 또 아닌가 보네. 언니, 비결 좀 알려 줘요.”
“비결이요?”
“응! 차갑고 도도한 인간의 콧대를 비틀어 버린 비결!”
나윤의 말에 화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은 시온의 콧대를 비튼 적도 없을뿐더러 시온은 차갑지도 도도하지도 않은 남자였다. 오히려 너무 다정해서 탈인데…….
“화경아.”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화준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나윤도 몸을 일으켰다. 화준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도창현 사장이었다.
“아, 버지.”
“어머, 안녕하세요.”
나윤이 살갑게 다가가 도 사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나윤과 인사했다. 도 사장은 나윤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주면 안 되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했고 나윤은 흔쾌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화준과 도 사장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난동을 부리고 간 뒤 처음 보는 아버지였다.
“잘 지내니?”
“……네. 아버지도 잘 지내시죠?”
“응. 이사장이 많이 도와줘서 회사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단다.”
“다행, 이네요.”
화준은 가슴이 답답했다.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던 신 여사와 돈을 구걸하던 도 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들을 딸로 둔갑시켜 시집을 보낸 것도 모자라 그렇게 추한 작태를 보일 정도로 회사가 중요한지 화준은 묻고 싶었다. 하지만 화준은 입을 조개처럼 꽉 다물었다. 왠지 더 상처 되는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올 것만 같았다.
“이제 다 됐다. 조금만 기다리고 견뎌 주면 곧…….”
“아니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화경아.”
“이 집에서 나가고 말고는 제가 결정할게요.”
도 사장은 눈을 크게 뜨고 화준을 바라보았다. 늘 주눅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화준이 아니었다.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는 게 아니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자신의 의견을 또박또박 내뱉는 모습에 도 사장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전과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앞으로 제 인생은 제가 살고 싶어요, 아버지. 그만큼 했으면 됐잖아요.”
“뭐, 뭐라고?”
화준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잡고 몸을 일으켰다. 도 사장이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화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시온이 있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남았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제 의견을 말했다.
늘 죄책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만큼 했으면 됐다. 화준은 차분하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공시온이 만들어 준 세상에서 화준이 크게 걸음을 내디뎠다.
* * *
힘들게 고른 드레스가 넝마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시온 때문에 화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온은 화준을 돌려세우고 격렬하게 입을 맞추며 옷가지를 벗겼다.
비상계단에서 감질나게 입술 몇 번 빨았다고 달아오른 성욕이 가라앉을 공시온이 아니었다. 몸을 꽉 조이고 있는 드레스에 짜증을 내면서도 그가 다칠세라 조심해서 옷을 벗겼다.
마음이 급해 그마저도 다 벗겨 내지 못하고 속옷은 위로 드레스는 아래로 끌어 내려 그의 가슴을 주무르고 입술을 빨았다. 머리끝까지 뻗친 성욕에 시온이 숨을 헐떡였다.
“씨, 씻을래요.”
“난 상관없는데?”
시온이 화준의 귓불을 핥아 올리며 대답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화준의 귓가로 쏟아졌다. 몸을 잔뜩 움츠리며 고개를 젓자, 시온은 화준의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려 매끈한 다리를 쓸어 올렸다. 시온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겨 내고 싶었지만 화준의 몸에서 떨어지기 싫어 억지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다. 속바지와 팬티에 손가락을 걸어 끌어 내리자, 화준의 몸부림이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으윽, 씻고요. 씻을래요.”
“쉬이― 가만히 있어요.”
팬티 아래에 성기를 감싸고 있는 천 조각 역시 능숙하게 매듭을 찾아 풀어냈다. 그러자 반쯤 발기한 성기가 튕겨 나왔다. 손으로 성기를 쥐고 문질렀다. 시온은 화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보행에 용이하도록 잘라 놓은 부분을 쥐고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찢어진 드레스를 보고 화준이 기함했다. 시온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드레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화준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표피를 밀어 올려 드러난 귀두에 혀를 대고 슬슬 문지르자, 화준이 뒤로 물러서며 벽에 등을 기댔다.
시온은 뺨이 움푹 파일 만큼 강하게 성기를 빨아올렸다. 입 안 가득 채우는 성기가 존재감을 과시할수록 뜨거운 성욕이 온몸을 달구었다.
“으, 하읏……! 자, 흣, 잠깐만, 윽!”
시온의 이가 귀두를 긁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비음이 집안을 울렸다. 화준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주는 자극의 정도가 너무 아찔해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지? 화준은 보라색 마카롱이 시온의 입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 그냥 키스가 하고 싶었다. 저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마카롱이 아니라 자신의 혀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늘 자신이 느끼는 걸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라는 시온에게 그저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화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아래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이젠 빨리 사정을 해서 그가 제 드레스 아래에서 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성기를 빨아 올렸다가 사정의 기운이 몰아닥치면 입 안에서 성기를 빼고 귀두만 혀로 문질렀다.
아! 화준은 배 속이 빠듯하게 조여서 괴로운데 시온은 이 상황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화준의 손이 드레스 아래에 갇혀 있는 시온의 머리통을 더듬었다. 얼굴을 더듬던 그가 이내 시온의 양쪽 뺨을 가늠해서 붙들었다.
“흣, 장난, 장난치지, 말아요.”
시온이 답답함을 느끼며 화준의 손을 밀어 내려는 순간, 그의 성기가 입 안 깊숙이 밀려들었다. 시온은 당황스러움에 눈만 끔뻑거렸다. 그리고 성기가 빠르게 입 안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시온은 화준의 가느다란 허벅지를 붙잡고 몇 번 두드렸지만, 이미 이성을 성욕에 잡아먹힌 화준은 시온의 머리통을 붙잡고 제 성기를 입 안으로 쑤셔 넣기 바빴다.
“아흣, 으으, 흣!”
몇 번의 움직임에 입 안으로 퍼지는 비릿한 액체에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시온은 손바닥을 펼쳐 입 안에 고인 정액을 뱉어 냈다. 드레스에 정액을 대충 닦아 내고 몸을 물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화준의 몸이 벽을 타고 무너져 내렸다.
시온은 그가 굉장히 외설적인 자세로 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가슴을 노출시키고 브래지어는 그 위로, 드레스는 허리께에, 가느다란 두 다리는 양쪽으로 벌어진 채 훤히 드러나 있었다. 거기에 탈력감에 풀어진 얼굴이며 나른하게 감았다가 뜨는 눈까지…….
시온은 화준의 두 다리를 아래로 잡아당기고 몸 위로 기어올랐다. 허겁지겁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갑자기 지독한 갈증이 느껴졌다. 약속한 2년이 지나고 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몸을, 이 얼굴을 타인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열이 뻗쳤다. 막연하게 2년이라는 시간이 마냥 길다고 생각했지만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다.
자신은 정신없이 도화준에게 휩쓸려 가고 있는데 이러다가 2년이 지난 후에 이 순진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연민과 동정이라는 감정이라고 정의해 놓았던 마음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시온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내고 화준을 바라보았다. 풍성한 속눈썹이 가지런히 내려앉은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새까맣고 큰 눈동자가 시온의 얼굴을 담아냈다. 그 순간 시온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도화경, 아니 도화준…….”
“……네.”
“좋아한다고 말해 봐요.”
“이사장님, 좋아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터져 나온 목소리에 시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마음도 잘 몰라서 혼란스러운데, 화준이 말하는 좋아한다는 말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습되어 온 ‘좋아해요’인지, 아니면 정말 좋아해서 ‘좋아해요’인지 구분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시온은 화준의 가슴에 입술을 묻고 젖꼭지를 가볍게 핥았다. 그리고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이렇게 만져 주는 거 좋아요?”
“흣, 네, 좋아요.”
“책 읽는 건 좋아요?”
“네, 좋아요.”
“그럼 나랑 책이랑 동급이네?”
화준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시온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뭔지, 그리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이 뭔지……. 질문을 곱씹을수록 생각은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퍼졌다.
“……책이랑 이사장님은 달라요.”
“그럼 강해령 선생 좋아해요?”
“네, 강 선생님 좋아요.”
화준의 대답에 시온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 굉장히 유치한 짓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책이랑 동급이냐고 묻는 것도, 강 선생을 들먹거리는 것도 모두 유치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시온은 턱시도 재킷을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테이블 위에 있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근데…….”
“……?”
베란다 문을 열어젖힌 시온이 걸음을 멈추고 화준을 바라보았다. 화준은 속옷을 추스르며 몸을 바로 세웠다.
“키스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강 선생님이 아니에요.”
“하……!”
“이사장님이랑 키스하고 싶어요. 자꾸 만지고 싶고 같이…… 읍!”
시온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집어 던지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화준의 목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정말 사람을 들었다 놨다, 쥐락펴락 정신없이 가지고 노는구나, 네가.
화준은 시온의 목에 팔을 감싸고 고개를 약간 틀어 그의 혀를 깊게 받아들였다. 입 안의 여린 살을 살살 핥고 나가는 혀가 못내 아쉬워 목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이 얼마나 뜨거운지……. 화준은 진하게 퍼지는 뜨거운 열기가 내장을 홀랑 태워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화준은 정신없이 시온에게 매달려 신음을 쏟아 냈다. 씻고 싶다는 말을 무시하고 관계를 이어 가려던 시온이 결국 징징거리는 화준의 성화에 못 이겨 침실 욕실 문을 열었을 때 이미 화준은 알몸 상태였다.
문 앞에서 다급하게 셔츠와 바지를 벗는 시온을 바라보며 화준은 뺨을 붉혔다. 옷 속에 감춰진 탄탄한 육체가 드러날수록 화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시온은 욕실장을 열어 젤 하나를 꺼내 욕조로 던져 넣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젤을 따라 화준의 시선이 움직였다.
“이리 와.”
샤워기 레버를 올린 시온이 물이 쏟아지는 아래에 서서 화준을 불렀다. 화준이 가까이 다가가자, 어깨를 감싸고 물 아래로 끌어당겼다. 뒤에서 몸을 끌어안고 한 손을 아래로 내려 화준의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엉덩이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리자, 화준이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몸을 뒤척였다.
“싫어?”
“아, 흐읏! 아니……! 씻고 나서.”
“지금 물 떨어지고 있는데 왜, 이걸로 모자라?”
머리를 푹 숙이고 고개를 젓는 화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 시온이 샤워 볼에 보디 워시를 묻혀 손에 쥐었다. 그리고 화준을 샤워기 아래에서 끌어내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향긋한 장미 향이 코끝에 은은하게 번졌다. 온몸 구석구석을 문지른 시온이 샤워 볼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화준을 벽으로 밀었다.
가슴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화준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시온은 화준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엉덩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구멍을 지분거렸다. 거품이 잔뜩 묻어 미끄러운 아래를 몇 번이나 손으로 훑으며 금방이라도 손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을 듯 손끝에 힘을 주었다.
“흐읏, 씻고! 흣, 해요.”
“요구 사항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시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기어코 손가락 하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부드럽게 삽입된 손가락이 크게 원을 그렸다. 핫! 화준이 크게 숨을 집어삼키며 발끝을 세웠다. 거품이 묻지 않은 귓불을 입에 물고 손가락을 깊게 밀어 넣었다.
거품 범벅인 육체가 맞붙으니 야릇하기도 해서 시온은 꽤 즐거운 기분으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에 반해 화준은 딱 죽을 맛이었다.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숨만으로도 이미 다리가 풀리는데 아래에 들어온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혼을 쏙 빼고 있었다.
“하윽!! 으! 자, 흣! 잠깐만!”
시온이 일부러 포인트를 지그시 눌렀다가 떼자, 화준이 왈칵 울음을 쏟아 냈다. 말랑하던 성기가 바짝 달아오르고 단전에서부터 솟구치는 아찔한 자극에 손톱을 세워 벽을 긁었다. 순식간에 차오른 열기에 차가운 타일에 얼굴을 붙이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여기, 여기를 이렇게 누르면 구멍이 꽉 조여져서 손가락을 끊어 먹을 거 같네?”
“흣, 빨리! 흐, 으응.”
“어떻게 해 줄까?”
시온은 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화준을 샤워기 아래에 세웠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서서 물을 맞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욕조에 던져 넣은 젤을 집어 들고 샤워기 레버를 내렸다. 위에서 쏟아지던 물이 멈추자, 화준은 손을 들어 물살에 쓸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숨이 좀 돌아왔네?”
여전히 배 속에서 우글거리는 성욕은 그대로였다. 화준이 고개를 흔들자, 시온이 다시 화준을 벽으로 밀었다. 차가운 타일에 가슴이 닿아 저릿한 감각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마저도 이제는 제 성욕을 부추기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시온은 젤 뚜껑을 열고 화준의 엉덩이 사이를 벌려 그대로 입구를 밀어 넣었다. 물이 제대로 닿지 않아 여전히 미끈한 거품이 묻어 있는 구멍이 쉽게 입구를 물었다. 튜브를 꾹 누르자, 화준의 몸 안으로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아! 아흣, 이상, 흐윽, 이상해요.”
반쯤 흘러 들어간 젤을 뽑아 바닥에 던지고 그대로 손가락 두 개를 아래로 밀어 넣었다. 미끈하게 젖은 구멍이 별 무리 없이 손가락을 삼켰다. 화준은 발끝을 세우고 몸을 발발 떨었다. 시온이 고개를 숙여 동그란 어깨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내벽을 문지르고 구멍을 넓히는 손놀림이 꽤 능숙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렇게 안아 주고 품어 줬을까. 화준은 갑자기 든 생각에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의 손가락이 포인트만 골라 눌러 대기 시작했다. 이미 벽에 몸이 틈 없이 붙었음에도 화준은 더 앞으로 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만큼 그가 주는 자극은 크고 강했다. 좋으면서 도망치고 싶은 이상한 마음이었다.
화준의 높은 교성이 욕실 안을 울렸다. 시온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래를 정성스럽게 풀었다.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고 아래를 콱콱 쑤셨다. 화준이 왈칵 울음을 토해 내며 주저앉으려는 바람에 손을 앞으로 넣어 젖꼭지를 지분거리던 손을 빼서 허리를 잡았다.
“으윽, 아, 못해. 흣, 아, 안 돼!”
“나랑 세 번도 하고 네 번도 했으면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엄살이야.”
“흣, 이사장님, 하아, 얼굴, 흣, 보고 싶어요.”
타일에 꽉 눌려 있는 화준이 울음을 토해 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시온은 지나치게 솔직한 화준에게 정말 정신없이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순진한 얼굴로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 주세요, 하면 꼼짝없이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렁그렁한 눈으로 부탁하는 그의 말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냔 말이다.
시온의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시온은 손가락을 빼내고 다시 한번 구멍을 확인했다. 그리고 화준의 몸을 돌리고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시온의 목에 팔을 두른 화준은 순식간에 시온의 얼굴이 보이자, 샐쭉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망한 건지, 순진한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시온은 화준의 등을 벽으로 밀어 몸을 지탱하고 손을 내려 자신의 성기를 두어 번 문질렀다.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성기를 쥐고 화준의 구멍에 귀두를 약간 물렸다. 목을 감싸고 있는 화준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약간씩 밀려 들어오는 묵직함에 화준이 허리를 바짝 들었지만, 시온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삽입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 내벽을 훑고 지나가는 단단한 성기의 모양이 다 느껴지는 것 같았다.
“빠, 빨리요! 흣.”
채근하는 목소리에 시온의 차분했던 마음에 불길이 치솟았다. 빠르게 타들어 가는 도화선처럼 마음이 지글지글 끓었다. 단박에 성기를 끝까지 박아 넣은 시온이 화준의 어깨에 입술을 묻고 약하게 깨물었다. 화준은 시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았다.
헛헛한 마음을 꽉 채워 주는 시온이 좋았다.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충족감이었다. 늘 마음에는 찬바람이 불었고, 외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학대당하는 삶 속에서 감히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까지 생각했다.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을 때 그때, 삶의 의지를 잃었다. 삶이 무의미했다. 아니, 숨은 쉬고 있어도 또 다른 자아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도화준도 도화경도 아닌 그런 삶이었다.
아프고 또 아팠던 어느 날, 공시온이 정말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구세주였고, 또 상처 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늘이 화경을 먼저 앞세운 저를 벌하듯 가두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화준은 목 놓아 엉엉 울고 말았다.
“아파? 아파서 그래? 그만할까?”
갑자기 크게 울음을 터뜨린 화준을 보고 당황한 시온이 몸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목에 팔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화준은 시온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때 장난감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화경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집안의 평화를 깨뜨린 것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을 빼앗아 간 것도 모두 자신이었다.
“왜 갑자기 우는 건데? 나는 도화경, 아니 도화준 네가 이럴 때 솔직했으면 좋겠어.”
시온은 홧홧하게 번지는 성욕을 애써 잠재우고 화준의 몸을 힘으로 떼어 냈다. 눈물이 범벅된 채 주저앉아 버리는 화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턱을 감싸 쥐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죄송, 죄송합니다.”
“내가 섹스에 미친 인간도 아니고 괜찮아. 왜 우는지 말해 봐. 뭐가 그렇게 서러운데?”
“……고마워서요. 이사장님이, 나타나서 나를, 구해 줘서, 그래서 그게, 고마워서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만 화준은 시온에게 짐을 주고 싶지 않았다. 2년 후에 제게 등을 돌릴 사람이었고 다시 헛헛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시온은 길게 숨을 내쉬고 동그스름한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화준의 눈동자가 자디잘게 떨렸다. 고마움을 느꼈다기보다는 두려움을 느낀 듯한 눈이라서 시온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이유를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 씻을 수 있지?”
“…….”
“울고 싶으면 실컷 울고 나와.”
시온은 화준의 뺨을 손으로 쓸어 주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욕실에 더 있다간 울고 있는 그를 강제해서라도 성욕을 채우고 말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밟고 내려오며 흉흉하게 위용을 자랑하는 제 성기를 힐끗 바라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도화준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힘없이 나부끼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리고 이 감정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
시온은 담배를 피워 물고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배 속에 남아 있는 성욕을 풀고 싶지만, 자위는 하고 싶지 않아 차가운 물 아래에서 성욕을 잠재웠다. 그 바람에 샤워 시간이 좀 길어졌다.
샤워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오자 소파에는 화준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다 울었어요?”
“……죄송해요.”
시온은 손을 뻗어 화준의 코를 아프지 않게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물론 그렇게 한껏 달아오른 상태에서 분위기를 망친 일은 백번 생각해도 백번 잘못한 일이지만 굳이 그걸 탓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그걸 빌미로 화준을 좀 단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정과 연민 따위가 아니라는 마음을 자각해 버린 탓에 조금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아까처럼 경준이 끌어안았을 때 가만히 갇혀 있을 게 아니라……! 시온은 아까 일을 곱씹으니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누가 끌어안으면 하지 말라고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어떡합니까.”
“네?”
“아까 나경준이 화경 씨 끌어안았죠?”
“그건 제가 넘어지려고 해서…….”
시온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화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만 그렇게 다른 사람 품에 안겨 봐요.”
“안겨도 돼요?”
화준이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장난스럽게 되묻자, 시온은 기가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 질문에 내포된 의미가 얼마나 장난스러운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음에도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비참했다.
“아…… 아니! 안기지 말라는 소립니다. 또 안기면 진짜 혼날 줄 알아요. 알겠어요?”
화준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난다는 말에 환하게 웃어 버리는 화준 때문에 속이 끓는 건 시온이었다. 시온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고 화준에게 다시 신신당부했다.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이렇게 대답해요.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