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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감정의 발현 (1) (6/19)

Chapter 5 : 감정의 발현 (1)

한 여사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1층 방에서 침대를 강탈하듯 가져간 뒤 화준은 시무룩한 얼굴로 텅 빈 방 안을 바라보았다. 당장 오늘 밤부터 어디서 자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현재 이 집에서 침대가 있는 방은 2층 시온의 침실뿐이었다.

소파에서 잘까, 아니면 바닥에서 잘까.

침구까지 깨끗하게 쓸어 간 바람에 덮을 것도 없었다. 미치겠네. 화준은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방 안을 서성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똑똑.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화준이 화들짝 놀라 문을 바라봤다. 그제야 시온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온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슈트를 벗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침대가 수거되는 걸 지켜보더니 이후에는 계속 도서관으로 명명한 방 안에 머물렀다. 혼자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쿵쿵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이따금씩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들렸다. 화준은 엉망인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고 문을 열었다.

“나랑 할 이야기 없어요?”

“……?”

“멀쩡한 사람, 파렴치한 가정 폭력범으로 만들어 놓고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겁니까?”

시온의 표정에 웃음기가 배어 있고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났다. 화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뺨을 붉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진실을 말하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이유가 어떻든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해요. 듣기 싫습니다. 그 문제는 밝혀 봐야 서로 좋을 게 없으니까 입을 다문 겁니다. 뭐, 그 바람에 화경 씨는 침대를 뺏겼잖아요.”

시온이 화준의 뒤로 보이는 방 안을 눈으로 훑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침대를 언급하자 화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온의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화준은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어디서 잘지는 조금 있다가 생각하고 이리 와 봐요.”

시온이 화준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그가 화준을 데려간 곳은 도서관이라고 명명한 방이었다. 문을 활짝 열자, 투박하기만 하던 방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책장 앞에는 각각 작은 메모지로 장르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작은 창문에는 빛을 가리기 위한 블라인드가, 텅 비어 있던 공간에는 긴 벤치가 하나 놓였다. 또 벽에는 작은 화이트보드도 부착되어 있었다.

“앞으로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는 거예요. 일단 동화로 시작해 봐요. 책도 흥미가 있어야지 읽는 거니까 한번 흥미부터 붙여 보고 다른 것도 천천히 읽어 봐요. 저쪽에 보면 여행서도 많아요. 2년 후에 어떤 나라에 가서 살고 싶은지도 한번 찾아보고.”

“……절 위해서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럼 이 나이에 내가 동화 읽을까. 도화경 씨가 말한 그 지옥은 깊고 단단해서 내가 깨트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나와야 해요. 먼저 간접 경험부터 해 봐요.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당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있는지 직접 느껴 보라고.”

늘 강요당하는 삶을 살아온 화준에게는 이 모든 게 어색하고 낯설었다. 스스로 결정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을 어머니께서 다 관리해 주셨기 때문에 모든 면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었다. 화준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다가 빼곡히 채워진 책장을 바라보았다.

“책이 더 필요하다면 다른 방도 내어 줄 수 있으니까 열심히 읽어 봐요. 이번에는 뭔가 성과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스피치는 때려치우는 걸로 합시다. 불만 없죠?”

화준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시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커다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책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화준이 가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귀엽기도 해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온은 벤치에 걸터앉았다. 앞으로 이 벤치에 앉아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낼 화준을 상상했다. 화준이 이렇게나마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책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다줄지는 미지수지만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 주고 싶었다.

“난 화경 씨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마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나 한탄하는 마음도 생길 거고,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도 들 거예요. 근데…….”

“…….”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한테 생기는 변화는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겁먹지 말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어 봐요.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화준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화준에게 삶은 늘 고되고 힘들고 아픈 것이었다. 누군가 길을 열어 준 적도 없었고, 오로지 부모님의 뜻대로 강요당해 살아왔다. 무력함을 느꼈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도피를 하는 게 제게 유일하게 주어진 선택지라고 믿었다. 그런데 공시온은 화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든 열심히 배우겠다고 했죠? 이게 내가 주는 첫 번째 숙제예요. 열심히 읽어요.”

화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이라는 게 많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지만, 시온이 마음을 써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어디서 잘 거예요?”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듯 시온의 목소리에 경쾌함이 묻어났다. 결연한 눈으로 책장을 바라보던 화준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울상을 짓는 얼굴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시온은 빙글빙글 웃으며 기민하게 화준의 표정을 살폈다. 눈꼬리가 축 늘어지고 입매도 조금 내려간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화준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소파에서 자면…….”

“신혼여행 가서 같이 잤잖아요. 그때 불편했어요?”

“……아, 아니요! 근데 이사장님이 불편…….”

“그럼 올라와요. 이불도 뺏긴 거 같은데.”

신혼여행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화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화준의 머릿속에 시온의 뜨거운 숨이…… 제 몸을 만지던 음험한 손이 떠올랐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몸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화준은 그날 이후로 가끔 샤워하면서 시온이 제 몸을 매만졌던 것처럼 손으로 유두를 문지르고 성기를 비볐다. 그럼 성기에서 말간 물이 새어 나와 손바닥을 적셨다. 그런데 꼭 그렇게 몸을 만지고 나면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랄까. 화준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손바닥으로 뺨을 매만졌다.

“무슨 상상을 하길래 얼굴이 빨개졌어요?”

“아! 아니요.”

“그럼 욕실은 1층에서 사용하고 2층으로 올라와요.”

시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고 담백하게 말을 뱉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귀까지 빨개져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아랫배가 살짝 당겼다. 그래도 ‘아무것도 몰라요’에게 성기를 세우고 싶진 않았다.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는 시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화준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화준은 시온이 앉았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방 안을 훑었다. 특유의 종이 책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같은 집 안에 머문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그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건 더 겁이 났다.

화준의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화준이 결심하듯 주먹을 꽉 쥐고 방을 나섰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욕실로 들어갔다.

시온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30분……. 천천히 움직이는 초침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의연한 척하고 있지만 시온도 마음이 복잡 미묘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실감 나지 않던 결혼 생활이 이제 조금 실감이 난달까?

―똑똑.

시온이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화준이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은 채 서 있었다. 향긋한 보디 워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들어와요.”

화준이 쭈뼛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온의 개인적인 공간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어머니께서 오신 그날에도 차마 그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실에 머물렀다. 철저히 그만이 사용하는 공간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방의 유일한 출입자는 집안일을 해 주는 아주머니뿐이었다. 방 안에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어 공기가 쾌적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방황하던 화준이 침대를 보자,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시온의 침대를 감싸고 있는 침구는 화준이 직접 고른 것이었다. 본가에 갔을 때 온통 파란색이던 그의 방 안을 떠올리며 파란색 침구를 골랐다. 자신이 고른 침구가 씌워져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좀 묘했다.

시온은 팔짱을 끼고 서서 화준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시온은 이불을 걷어 내고 먼저 침대에 몸을 들였다. 그러자 화준이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시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리 와서 누워요. 안 잘 거예요?”

“……아! 네.”

화준은 반대편으로 걸어가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들였다. 눕는 순간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 깊게 숨을 내쉬었다. 시온과 나란히 누워 한 이불을 덮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화준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한 침대에 시온과 함께 누워 있다는 사실과 낯선 잠자리가 불편해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 몸을 뒤척이던 화준이 고른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자, 시온은 작은 스탠드를 켰다. 조도를 최대로 낮추고 팔을 괴어 잠든 화준을 바라보았다. 풍성한 속눈썹이 가지런히 내려앉아 평화롭게 잠든 얼굴이 퍽 예뻐 보였다. 천천히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지자, 화준이 간지러운 듯 코를 찡그렸다. 보드라운 피부가 시온의 손바닥 아래에 감겨들었다.

요즘 며칠 바빴더니 성욕이 끓었다. 하지만 화준과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지 않았다. 순진한 얼굴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일 때면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붙잡고 헐떡이고 싶지 않았다. 뭐, 눈이 돌아 버린다면 또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시온은 침대에 화준과 함께 누워 있으니 비로소 결혼한 게 실감이 났다. 2년 후면 제 곁에서 멀어질 사람이라 정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시온이 화준에게 느끼는 감정이 하찮은 동정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작은 일 하나에도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시온이 겁도 없이 화준의 인생을 마구 흔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온은 그의 인생이 너무 기구하고 안타까워서 구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사람답게는 살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돈과 명예와 삶이 적절하게 섞여 평탄하게 살아온 제 삶과 판이해서 자꾸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시온은 몸을 숙여 고요하게 잠든 화준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잘 자요.”

시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곁에 도화준이 있다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몸도 섞지 않은 상대와 이렇게 같은 침대를 공유한다는 게 우스웠다. 시온은 스탠드를 끄고 눈꺼풀을 내렸다.

그렇게 시온과 화준의 어색하고 따뜻한 밤이 천천히 흘렀다.

화준은 가지런히 꽂힌 책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마땅한 책을 찾았다. 그러다가 책을 하나 꺼내 벤치에 걸터앉았다. 하루의 일과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화준은 이 공간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책을 읽는 게 익숙하지 않아 몇 문장 읽는 것도 힘들었다.

두어 장 읽기도 힘들어 포기하고 방을 나서기 일쑤였지만, 매일같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번에 집중할 수 있는 페이지 수가 늘어 갔다. 처음에는 글씨가 큰 동화책을 읽었고, 이제는 간단한 문장이 담겨 있는 시집이나 수필집을 읽었다. 책을 읽는 가이드는 모두 시온이 해 주고 있었다.

시온과 같은 침대를 쓴 지도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시온은 매일 밤 침대에 누워 화준에게 오늘 뭘 읽었는지 물어봤다. 그럼 화준은 대답을 하다가 서서히 잠들었다.

불편하고 낯설기만 하던 시온의 침대는 이제 편안하고 안락한 잠을 선사했다. 그리고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면 시온의 커다란 손이 제 가슴을 토닥였다.

‘괜찮아.’

그렇게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화준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화준은 책을 덮고 화이트보드에 오늘 읽은 책과 페이지 수를 적었다.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어서 읽을 생각이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긴 생머리 가발을 착용했다. 그리고 그 위에 검은색 야구 모자를 썼다. 가발은 가까운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벗을 생각이었다. 가발을 담을 가방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여전히 날씨는 더웠고 거리는 지글지글 끓어 댔다.

화준은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섰다.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약속 장소를 확인했다. 저번에 해령과 만난 그 카페였다. 스터디 룸으로 꾸며진 공간이 있어서 대화하기도 좋았고, 혀를 녹여 버릴 만큼 단 수플레 팬케이크도 일품이었다. 단맛을 상상하며 화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신호가 바뀌고 화준이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타이어가 노면에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끼익……!! 화준이 엉거주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화준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괜찮으세요?!”

차 문을 열고 남자가 달려 나와 화준의 몸을 부축했다. 금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화준이 남자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차에 직접 부딪힌 건 아니라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 멈추어 선 차에 놀라 넘어진 것뿐이었다. 하지만 몸이 덜덜 떨렸다. 교통사고에 큰 트라우마가 있는 화준이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자꾸만 몸이 떨렸다.

“일단 병원으로 가서…….”

“아, 아니요. 괘, 괜찮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겠어요.”

“정말, 정말 괜찮아요.”

화준은 몸을 부축하고 있는 남자의 손을 밀어 내고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두 손을 마주 잡아 억지로 꽉 쥐자, 조금 떨림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리고 시야도 온전치 않았다.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화준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싫다는데 강요도 못 하겠고……. 혹시 어디 아프거나 문제가 있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화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화준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손을 들어 모자를 푹 눌러썼다. 일부러 크게 숨을 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해령이 늘 강조한 부분이었다. 호흡이 곤란해지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니 늘 호흡 조절에 신경 써야 한다고. 화준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의 떨림도 여전하고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우려하던 상황까지 가진 않을 모양이었다. 다시 신호가 바뀌고 화준은 천천히 주위를 살피고 발을 내디뎠다. 지하철을 타고 갈까 하다가 괜히 밀폐된 공간에 있다가는 문제가 생길 것 같아 택시를 잡아탔다.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화준의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머리와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눈앞이 자꾸만 하얗게 물들었다. 화준은 머리를 고집스럽게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카페 안에는 인위적인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살인적인 더위 탓에 카페 에어컨이 쉬지 않고 돌았다. 해령은 출입문과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창밖 풍경을 구경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화준과 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마침, 카페 문이 열리고 긴 생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쓴 마른 몸이 보였다. 해령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화준이었다. 그런데 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하며……결정적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해령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화경 씨! 왜 이래요? 무슨 일이야?!”

무릎이 풀썩 꺾여 안겨 오는 몸을 해령이 단단히 붙들었다. 화준은 해령의 얼굴을 보자 긴장하고 있던 정신과 몸이 느슨하게 풀린 모양이었다.

“화경 씨!! 정신 차려 봐요.”

“선생님…….”

“호흡해요! 정신 놓지 말고 천천히 숨 쉬어 봐요!!”

“……선생님, 제 옆에 화경이가 없어요.”

화준의 눈동자가 까뒤집히면서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다리가 완전히 풀려 해령의 몸을 덮쳤다. 해령이 가까스로 받치고 있던 몸을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달려와 부축했다.

“119 부를까요?”

“아뇨, 스터디 룸으로 옮겨 주세요. 좀 쉬면 괜찮을 거예요.”

“예?”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해령의 말에 반문했다. 사람이 쓰러졌는데 무슨 소리냐는 의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해령은 가방을 뒤져 전에 다니던 병원의 의사 신분증을 꺼내 보여 주었다.

“나 의사예요. 이 사람 전담 주치의고요. 확인했으면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르바이트생의 도움으로 스터디 룸으로 화준을 옮겼지만, 그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땀범벅인 몸을 덜덜 떨었다. 화준의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야 하나……. 해령의 고민이 깊어졌다. 화준은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외부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 크게 당황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트라우마를 건드릴 만한 자극이 조금이라도 더해지면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해령은 화준의 모자와 가발을 벗기고 물수건으로 땀범벅인 얼굴을 닦아 냈다.

해령은 몸을 뒤척이는 화준이 떨어질세라 벽 쪽으로 최대한 화준의 몸을 밀고 앞에 생겨난 틈에 앉았다. 고민이 점점 깊어졌다. 화준을 아무 병원에나 데려갈 순 없었다. 하필 이때 해령은 휴직 상태였고…… 지인에게 부탁하자니 요즘에는 사방이 다 CCTV라 위험 부담이 컸다. 그렇다고 화준의 어머니에게 연락하기는 싫었다.

흐으……. 괴로운 신음을 쏟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화준을 바라보며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화준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령이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결혼했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신경 쓰여요.’

그래, 독버섯 같은 그 여자보단 낫겠지. 화준의 휴대폰을 열어 연락처 목록을 뒤졌다. 역시나 전화번호는 단출했다. 그중에 ‘공시온’이라고 적힌 이름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렀다. 해령은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만약 공시온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화준의 어머니께 연락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러다가 발작이라도 오면……. 해령은 입술을 꽉 깨물고 전화기에 귀 기울였다.

- 어디예요?

“아! 안녕하세요. 저, 도화경 씨 주치의, 강해령이라고 합니다.”

- 흠, 무슨 일이시죠?

‘어디예요?’라고 가볍게 묻던 목소리가 180도 달라져 딱딱하고 무겁게 해령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해령은 손을 뻗어 화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며 정글 같은 가방을 뒤적였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화경 씨랑 상담이 있어서 만났는데……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도움 좀 요청하려고…….”

- 문제요? 거기가 어딥니까?

그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해령은 차분하게 카페 위치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었다. 문제가 생겼다는 말에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위치부터 물었다. 사실 화준이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화준이 잘 버텨 줄지, 힘들어하지는 않을지, 그리고 상대가 화준을 이해해 줄지. 그런데 생각보다 매우 순조롭게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겉으로만 보면 화준은 집에서 생활할 때보다 훨씬 더 나아 보였다.

해령은 화준을 보살피며 그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해령의 속이 타들어 갔다. 괜히 열받아 화준의 부모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 어떻게 사람의 얼굴을 하고, 그것도 자식의 인생을 이따위로 망가트릴 수가 있어! 해령의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그때 화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름을 확인하고 해령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스터디 룸을 빠져나와 홀로 나가자 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휴대폰을 들고 초조한 눈으로 사방을 훑고 있었다.

“공시온 씨?”

방황하던 시온의 시선이 일순간에 해령에게 박혀 들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해령을 지나쳐 닫혀 있는 문을 열었다. 해령이 시온의 뒤를 따라 스터디 룸으로 들어왔다.

“화경 씨, 정신 차려 봐요.”

시온은 의자에 길게 누워 있는 화준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에어컨이 서늘할 정도로 돌고 있음에도 화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게다가 몸의 떨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겁니까?”

“저도 잘……. 오자마자 쓰러진 거라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강해령 씨? 짐 챙겨서 따라오세요.”

시온이 재킷을 벗고 화준을 안아 들자, 해령이 재킷을 집어 화준의 얼굴에 덮었다. 해령을 한번 힐끗거린 시온이 그대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해령은 자신의 소지품과 화준의 짐을 챙겨 시온의 뒤를 따랐다.

“앞에 타요.”

시온이 화준을 데리고 뒷좌석에 타고 해령은 조수석에 올랐다. 운전석에는 따로 기사가 타고 있었다. 시온이 목적지를 짧게 말하자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해령은 가방을 품에 안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심신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도화경, 정확히 상태가 어떤 겁니까?”

“……음, 정확한 상태라고 정의할 것도 없어요. 워낙 사회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주변 환경이나 상황에 타격을 많이 받아요. 사회성 자체가 좀 부족하다고 보시면 돼요.”

“흠?”

“저희 아버지께서 주치의로 계실 땐 화경 씨는 외출도 못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책도, 텔레비전도 못 보게 하고 그냥 방 안에 가둬 놨어요. 방에 작은 창문이 있는데 그걸로만 세상을 구경했다고 하니 말 다 했죠, 뭐.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편이에요. 제가 처음 화경 씨를 상담했을 땐 정말 최악이었거든요.”

시온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빌어먹을 것들, 그들의 추악한 행태를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어서 이가 갈렸다. 동물을 사육하는 것보다 더 잔인하고 사악하게 화준을 묶어 두었다.

“……호전 가능성은 있는 겁니까?”

“전에는 없었어요. 워낙 부모가 정신병자라.”

해령이 실소했다. 해령은 그들을 부모라고 칭하는 것도 소름이 끼쳤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을 사리사욕을 위해 철저하게 입맛대로 키웠다. 자유를 강탈하고 삶을 조종했다.

“화경 씨는 현재 독립적인 주체라고 볼 수 없어요. 지금까지 부모가 모든 걸 결정하고 간섭했으니까요. 화경 씨 어머니는 화경 씨가 결혼하고 나서 상태가 더 악화됐어요. 손에 쥐고 휘두르던 장난감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재밌네요. 이참에 아예 미쳐 버리면 좋겠군요.”

“저는 사실 결혼하고 난 뒤 화경 씨 상태가 더 나빠질 거라고 예상했어요. 의존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어머니와 떨어지면 분리 불안 같은 걸 겪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예상과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건 공시온 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다는 의미겠죠?”

시온은 부드럽게 화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낮게 웃었다. 몸의 떨림도 잦아들고 아까보다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시온은 화준의 손에 제 손을 엮어 넣어 감싸 쥐었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앞으로 화경 씨의 건강 상태나 변화에 대해 일절 그쪽 집안에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오늘처럼 저에게 연락하시면 됩니다. 이제 도화경 씨의 보호자는 그들이 아니라 접니다.”

* * *

화준은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갈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느리게 몇 번 눈을 감았다가 뜬 화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몇 시지?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휴대폰을 찾아 더듬거렸다.

손가락에 걸리는 휴대폰을 집어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10시. 아……!! 불현듯 머릿속으로 짧은 잔상이 스쳤다. 분명히 강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몸을 벌떡 일으키고 앉아 휴대폰을 뒤졌다. 최근 통화 목록에 낯선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보호자」

화준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번호를 확인했다. 이건 시온의 번호였다.

“깼어요? 몸은 좀 어때요?”

“이사장님…….”

시온이 검은색 샤워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늘 시원스레 이마를 드러내던 것과 달리 지금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시온은 침대에 걸터앉아 작은 스탠드를 켰다. 은은하게 퍼지는 주홍색 불빛을 바라보았다. 시온이 재차 몸이 괜찮은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조금 무거운 기분이었다.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가 놓으며 시온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교통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시온이 협탁 위에 놓인 명함을 집어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드문드문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해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가벼운 사고가 있었고, 또 택시를 탔고, 그 후에…… 기억이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의 기억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화준을 바라보는 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고는 불쑥 손을 뻗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사고 경위는 이미 가해자에게 다 들었어요.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요?”

“아…… 부딪힌 건 아니었어요.”

화준이 변명하듯 말을 뱉어 냈다. 변명이라기보다 이건 진실이었다. 몸이 직접 차량에 부딪힌 것도 아니고 다친 것도 아니었다. 그건 또렷하게 기억났다.

“내일 나 출근할 때 같이 병원 갑시다. 강 선생이 내 병원으로 올 겁니다. 남편이 병원 이사장인 거 잊었어요?”

“나, 남편이요?”

“우리의 공식적인 관계는 부부예요. 내가 남편, 화경 씨가 내 와이프잖아요. 아니에요?”

시온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화준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남편이니 와이프니 하는 그런 말은 언제 들어도 낯간지러웠다.

“배 안 고파요?”

“…….”

화준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배고프다. 하지만 벌써 10시가 넘었다. 어머니께서는 오후 6시 이후로 물 이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했다. 아주 어릴때부터 지켜 온 규칙 같은 것이었다.

화준이 열다섯 살 때쯤, 너무 배가 고파 냉장고를 열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입에 넣은 적이 있었다. 생고기도 뜯어 먹고, 간장게장의 껍질도 뱉지 못하고 그대로 삼켰다. 당시 한창 성장기였던 화준은 어머니의 철저한 감시 속에 음식량을 조절했다. 그래서 그런지 위장을 채우는 음식이 너무 좋아서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그런데 다음 날, 어머니는 크게 화를 내고 화준에게 음식을 일절 주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어기고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였다. 자그마치 닷새나 물만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거의 빈사 상태가 되어서야 어머니는 묽은 죽을 그의 입으로 흘려 넣어 주었다.

한참 고민하던 화준이 고개를 저었다. 시온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안이었다. 조금 전, 해령이 집을 나서기 전 시온에게 한 말이 있었다.

‘깨어나면 배고플 텐데, 아마 화경 씨는 배고프다는 말도 못 할 거예요.’

‘……?’

‘신 여사가 6시 이후로 먹을 걸 주지 않았거든요. 화경 씨는 거기에 오래 길들어져 왔고, 그래서 아마 말하지 못할 거예요. 안쓰러운 일이죠.’

설마설마했는데 고개를 젓는 화준을 보자 화가 나기는커녕 웃음이 났다. 하, 그 더러운 집안을 어떻게 박살 내지?

시온은 화준의 손목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불 더미에 파묻혀 있던 화준이 엉거주춤 시온을 따라나섰다. 문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겼다. 화준의 위장이 요동쳤다. 배 속에서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입 안에 침이 고이고 식욕이 당겼다.

“이래도 배 안 고파요?”

“…….”

화준이 고개를 저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도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시온은 화준을 소파에 앉혀 두고 주방으로 들어가 정갈한 식기가 올려진 작은 상을 들고 나왔다. 그대로 그걸 화준의 무릎 위에 올리자,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시온은 일부러 모른 척하고 식기의 뚜껑을 하나씩 열었다. 장조림과 몇 가지의 젓갈 그리고 전복죽이 소담히 담겨 있었다. 화준은 요동치는 위장에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침 그만 삼키고 먹어요.”

“……정말요?”

“어서 먹어요.”

시온이 손수 숟가락을 집어 손에 쥐여 주자, 그제야 화준은 환하게 웃으며 죽 그릇에 숟가락을 담갔다. 허겁지겁 죽을 떠먹는 화준을 보며 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순식간에 죽 한 그릇을 뚝딱 비운 화준이 혀로 입가를 핥았다.

“맛있어요.”

“앞으론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프다,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말해요. 눈치 보지 말고. 음, 내가 내는 두 번째 숙제예요. 내가 귀가하면 하루에 하나씩 감정 표현을 말로 해 보는 거예요. 보기는 이미 줬고, 한번 해 볼래요?”

“지금이요?”

“네,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지금 기분도 좋고, 생각나는 것도 좋고.”

시온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빼서 손가락에 끼웠다. 대답만 듣고 곧장 담배를 피우러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그의 고민이 길어졌다. 흡연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담배를 피우고 와서 들어야 하나, 시온이 진지하게 고민할 때 불쑥 화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요.”

한참을 고민해서 내놓은 답변이 귀여워서 시온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깜찍한 대답을 내놓을 줄이야. 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저…….”

“대상이 없는 거구나.”

“아니요. 좋은 건 이사장님이요.”

손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가 데굴데굴 굴러 저만치 물러났다. 시온은 담배를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화준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화준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시온의 표정을 살폈다. 시온과 함께 있으면 뭐라고 딱 정의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이 일렁였다. 공시온은 제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건데……. 화준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다시, 다시 말해 봐요.”

“좋아요.”

“하.”

시온은 짧게 숨을 뱉어 내고 화준을 등지고 섰다. “좋아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한 점 거짓도 묻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온은 자신이 생각하는 ‘좋아요’의 의미와 화준이 생각하는 ‘좋아요’가 다를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좋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말해요?”

“……저, 그렇게 멍청하진 않습니다.”

“그럼 지금 나한테 무슨 짓 한진 알아요?”

“네?”

화준이 말간 얼굴로 되물었다. 시온은 몸을 돌려 화준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와락― 품에 안겨 오는 몸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아랫배가 잔뜩 조여들며 성욕이 치밀었다. 마음속 깊이 묻어 둔 욕망이 대가리를 쳐들고 흉흉한 기세로 시온의 음심을 자극했다.

이런 순수하고 깨끗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시온의 주위에는 늘 질척하고 난잡한 상태에서 좋다고 매달려 오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것도 섹스 도중에 헐떡이는 숨과 함께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 말이 천박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화준의 좋아한다는 말은 그것과 매우 달랐다.

욕심이나 목적이 담기지 않은 담백하고 순수한 말이었다. 도화준은 계산적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하면 상대가 좋아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 사람을 돋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과 말은 시온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이사장님…… 이거 좀 불편해요.”

시온이 어깨를 감싸고 있는 팔을 풀어내자, 화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린 시온이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몸의 반응은 정직하다 못해 아주 칼 같았다. 시온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짧게 일갈했다.

“먼저 방에 들어가서 쉬어요. 오늘 피곤할 테니.”

“……저, 그것도 좋아요. 신혼여행 가서 한 거, 이사장님이 저 만져 주는 거 좋았…… 웁!!”

빌어먹을……! 시온은 화준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말랑한 입술에 제 입술을 붙이고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도화준은 자각이나 하고 있는 걸까. 도톰한 아랫입술을 머금고 천천히 혀를 굴렸다. 머릿속에는 이미 본 적 있는 화준의 몸뚱이가 그려지고 있었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갈 것인가. 시온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물고 빨던 입술을 놓아주자, 화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화준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며 시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죄짓는 기분이라 그러는데…… 정말 괜찮아요?”

“저는 좋아요. 이사장님이 좋아요.”

정말 미치겠네. 시온이 화준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새까만 눈동자에 물기가 스며들어 한층 더 깊어 보였다.

“난 안 멈출 거고 화경 씨는 아플지도 모르는데?”

“……잘 배울게요. 잘할 수 있어요.”

화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성기를 쥐고 흔들었지만, 횟수가 늘어 갈수록 머릿속에 공시온이 떠올랐다. 얼굴, 손, 몸, 목소리. 성기를 쥐고 그를 떠올린다는 게 너무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화준은 숨을 깊게 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시온의 얼굴에는 여러 종류의 감정이 빠르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갑자기 화준이 소파를 밟고 올라섰다. 시온과 눈높이가 같아졌다. 시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자, 화준은 그대로 목에 팔을 둘러 입을 맞추었다. 입술만 맞대고 가만히 있자, 시온이 몸을 물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후회하지 마요.”

화준은 어떻게 방 안까지 들어왔고 옷이 벗겨졌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발가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에 열이 잔뜩 올라 마치 뜨거운 불판 위에 올려진 고기 같았다.

시온은 화준의 봉긋하게 도드라진 가슴을 쥐고 빨았다. 옅은 갈색을 띤 유륜을 삼킬 것처럼 집요하게 혀를 놀렸다. 부드럽게 입 안을 채우는 피부의 감촉은 잡생각을 휘발시켰다. 속을 채우던 죄책감도, 그의 도발을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도 모두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저 이 육체가 제 손아귀에서 달궈지는 걸 느끼며 정신없이 몸을 탐했다.

“하, 으읏…… 아파요!”

시온이 젖꼭지를 이로 살살 짓씹었다가 놓으며 강하게 빨았다. 화준은 젖꼭지가 똑 떨어져 그의 입 안으로 삼켜질 것만 같았다. 화준이 두려움에 손을 뻗어 시온의 머리를 밀어 내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방 안의 공기가 탁했다. 부유하는 숨에도 마치 색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방 안에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지만 이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 멈춘다고 난 분명 경고했어요.”

시온은 화준의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쥐고 귓불을 물었다. 흐응― 소리를 내며 몸을 바르작거리는 화준을 살살 달래며 천천히 귓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귀에도 홧홧한 열기가 묻어 있었다.

시온의 입 안으로 열기가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열기가 다시 화준에게로 흘러들었다.

“아아! 이, 흣, 이상해…… 윽, 요.”

시온은 무섭게 치미는 욕구를 억지로 누르며 최대한 다정하게 그의 몸을 안았다. 하지만 모든 게 처음인 화준이 따라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혀가 귓속을 파헤치듯 깊숙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혀를 쑤셔 넣는다는 말이 정확했다.

시온은 이 육체에 뚫려 있는 모든 구멍에 제 것을 다 쑤셔 넣고 싶었다. 화준은 온몸이 녹아 흐물거리는 기분이었다. 고작 귀를 빨렸을 뿐인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 느껴 본 자극이 생경했다. 그가 손을 내려 성기를 콱 움켜쥐었다. 두 눈을 꽉 감고 있던 화준이 눈을 크게 뜨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으윽!”

그가 성기를 감싸고 있는 표피를 밀어 올렸다. 그러곤 맑은 액체를 흘리고 있는 귀두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손가락에 미끈한 액체가 묻어났다. 화준의 손이 허공에서 헛손질하며 파들거렸다. 시온은 자지러질 듯 신음하는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화준이 저도 모르게 혀를 시온의 입 안으로 밀어 넣자, 그가 입술을 모아 혀를 빨았다. 그 바람에 화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시온은 입 안까지 깊숙이 입술을 밀어 넣으며 혀를 빨았다.

“으응, 읏…….”

“이 정도로 벌써 울면 이따가 어쩌려고?”

화준은 화들짝 놀라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언제 울음이 터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훌쩍였다. 아픈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난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하지만 시온은 혀끝으로 눈가를 가만히 핥아 주고 성기를 쥐고 있는 손을 움직였다.

시온의 손은 성기에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을 빨고 갈비뼈를 확인하듯 뼈의 곡선을 타고 혀를 움직였다.

뱃가죽이 꽉 조여들며 온몸이 경직되었다. 흐윽, 쌀 거 같아―! 화준이 도리질 치며 발을 버둥거렸다. 화준은 샤워를 하며 몇 번 자위를 한 터라 이게 요의인지 정액이 나오려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그가 손으로 표피를 끝까지 밀어 올리자, 분홍빛 성기가 드러났다. 시온은 망설이지 않고 혀를 내어 귀두 끝을 핥았다.

“아아! 더, 더러워요. 읏. 아, 안 돼.”

화준은 몸을 버둥거리며 시온의 머리를 떼어 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가 화준의 허리를 두 손으로 쥐어 고정하고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혀끝으로 요도를 자극하며 입술을 모아 귀두를 빨았다. 화준의 울음 섞인 교성이 한순간에 높아졌다. 손을 올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감싸 쥐고 혀를 움직였다.

“하읏, 나와, 흣, 나와요!!”

화준이 두 손으로 시트를 꽉 그러잡고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참으려고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화준은 탈력감을 맛볼 새도 없이 성기가 시온의 입 안에서 굴려지는 느낌에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가 천천히 입 안에서 성기를 빼내고 입을 벌려 안에 고여 있는 희뿌연 액체를 확인시켰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다물고 삼켰다. 목젖이 크게 일렁이는 게 보였다. 먹었어……! 화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놀란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다시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입 안에 고였던 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온은 입 안에서 퍼지는 비릿한 맛을 음미하며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타인의 정액을 먹어 본 것은 처음이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뜨거운 숨을 색색 내쉬는 화준을 바라보며 시온은 엉망으로 풀려 있는 샤워 가운을 벗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유려하고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화준의 시선이 시온의 가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더니 얇은 이불을 끌어당겨 제 가슴을 가렸다.

“빨아 볼래요?”

시온은 제 성기를 쥐고 두어 번 쓸었다.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해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가 흉포한 기백으로 손아귀에서 굴려졌다. 화준이 엉금엉금 기어 침대 끝으로 다가와 엎드렸다. 시온은 화준의 턱을 받쳐 입가에 성기를 대고 툭툭 두드렸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귀두가 치아를 쓸며 입 안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작은 자극만으로도 아랫배가 잔뜩 조여 아릿한 아픔이 밀려들었다. 마음은 조급한데 상대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 몸이 달았다.

“입 벌려서 넣어 봐요.”

시온의 목소리가 흥분감에 잘게 떨렸다. 화준은 고분고분하게 입을 벌려 시온의 귀두를 살짝 물었다. 입술을 모아 물고 가만히 시온을 올려다보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온은 화준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허리를 슬슬 밀었다.

우웁!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이 잔뜩 벌어지고 성기가 목구멍까지 단숨에 침입했다. 격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시온은 화준의 턱 아래를 손으로 매만져 주며 그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화준은 성기를 물고 도리질 쳤다. 이미 역함을 느껴 버린 입 안이 성기를 거부했다.

화준이 뒤통수를 고정하고 있는 손을 밀어 내려고 손등을 할퀴고 몸을 버둥거렸다. 시온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절반 정도밖에 삼키지 않은 성기로 쩔쩔매고 있는 것도, 제 딴에는 거부한답시고 굴려 대는 혀도 모든 게 다 자극으로 돌아왔다. 시온은 성기를 물고 있는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틈을 벌렸다. 그리고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타액에 흠뻑 젖은 성기가 번들거렸다.

“입 벌리고 혀 내밀어요.”

화준은 코를 훌쩍이면서도 시온이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시온은 그의 뒤통수를 다시 붙잡고 혀에 제 성기를 비비기 시작했다. 입 안으로 성기가 밀려들어 갈 때마다 치아에 선단이 긁혔다. 고작 혀에 몇 번 성기를 비볐다고 성감이 고조되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강한 사정감에 이를 악물었다.

화준의 뒤통수를 꽉 잡아 고정하고 빠르게 입 안을 드나들었다. 무성욕자도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제 성기를 힘겹게 물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없던 성욕도 생길 것만 같았다. 그만큼 도화준은 자극적이고 야했다. 순식간에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화준의 입 안에서 성기를 뽑아내고 손으로 빠르게 흔들었다. 아랫배가 아프도록 조여들었다. 시온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흐으, 이사장님…….”

시온은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화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배 속에 꽉 들어찬 욕구가 한 차례 해소되자 이제 좀 시야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스탠드 전원을 올렸다.

“그만할래요?”

“……뭐가, 뭐가 더 남았나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화준은 가만히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움직일 때마다 따끔했다.

“이제 시작인데?”

“정말요?”

화준의 물음에 그가 피식 웃었다. 시온은 바닥에 떨어진 샤워 가운을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 짜증스럽게 서랍장을 열어 젤과 콘돔을 꺼내 침대 위로 던졌다. 끝까지 가지 못했다는 나름의 심술이었다. 화준은 입가를 매만지며 침대 위에 떨어진 물건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온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가운의 매듭을 제대로 지었다. 더 이상의 관계는 무리일 거라고 판단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미 많이 지친 화준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연신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는 꼴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 펠라를 하면서 찢어진 모양이었다.

“담배 좀 피우고 올게요. 쉬고 있어요.”

“이사장님.”

“……?”

“해요.”

“응?”

“이제, 시작이라고 하셨잖아요.”

시온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는 걸까. 뜨거운 욕정과 함께 마음에 화기가 치솟았다.

“참 맹랑하네.”

“…….”

“도화경 씨, 그 입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내가 쉬라고 할 때 그냥 입 다물고 침대에 누워요.”

“왜요?”

화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반문했다. 까만 눈동자에 순수한 궁금증이 묻어났다. 시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욕을 뇌까렸다. 해소되지 못한 성욕에 배가 욱신거리고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더 이상의 자극은 이쪽에서 사절이다.

“하, 그럼 내가 담배 피우고 올 동안에 재주껏 아래를 풀어 놓든가. 거기, 노란 튜브 있죠? 그걸로 풀어 봐요.”

시온은 그대로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베란다까지 나가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멈추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화준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니 그럴 마음이 가셨다.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시온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연달아 두 대를 피우고 몸을 일으켰다.

간단히 샤워하고 잘 생각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손잡이를 천천히 돌리는 순간, 방 안에서 낮은 흐느낌이 들렸다. 시온은 문을 다 열지 않고 벌어진 문틈으로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침대 위에는 화준이 모로 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튜브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뒤로 숨겨져 있었지만, 그가 뭘 하는지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온은 문틈 사이로 펼쳐진 자극적인 장면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간신히 잠재운 성욕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시절 우연히 어머니와 아버지의 색사를 봤던 그때처럼, 절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았다.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시온은 참지 않고 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도화선에 불을 댕긴 건 도화준이었다. 심지를 타고 빠르게 타들어 가는 성욕에 시온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침대로 다가가 화준의 몸을 바로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그 바람에 뒤에 감춰져 있던 화준의 손이 액체로 범벅이 된 채 눈앞에 드러났다.

“……이, 이사장님, 몸이 이상해, 요. 흣!”

화준이 겹쳐 오는 시온의 몸을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시온은 매듭을 풀어 입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벗을 줄 알았으면 입지도 않았을 텐데. 시온은 자조하며 곧장 손을 내려 화준의 아래를 더듬었다. 치덕치덕 발린 액체에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시온은 눈물범벅이 된 화준의 눈가를 혀로 살살 핥았다. 간지러운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의 귓불을 물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튜브를 고집스럽게 쥐고 있는 화준의 손을 붙잡아 제 손바닥 위로 올렸다.

“짜 봐요.”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와 닿았다. 화준은 정신이 없었다. 아래를 더듬고 있는 시온의 손이 억지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던 그곳을 스칠 때마다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이 혼란한 와중에도 시온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화준이 손에 힘을 주며 튜브를 눌렀다. 하지만 귀를 헤집는 그의 혀 때문에 손이 미끄러졌다. 그러자 시온이 손을 겹쳐 쥐고는 튜브를 눌렀다.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젤은 시온의 손바닥에 닿자마자 미끈한 액체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히 기회를 줬고 그걸 발로 차 버린 건 그쪽이에요.”

시온은 짧게 일갈하고 손을 내려 화준의 구멍을 더듬었다. 분명히 스스로 쑤셨을 구멍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시온은 화준의 몸을 뒤집어 무릎을 꿇게 하고 상체는 침대에 붙였다. 탐스러운 엉덩이가 솟아올라 젤로 번들거리는 아래가 눈앞에 드러났다. 시온은 화준의 엉덩이에 입술을 붙이고 구멍을 벌려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으읏!”

화준은 얇은 이불을 끌어당겨 입에 물었다. 시온의 손이 제 아래에 들어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크게 원을 그리듯 내벽을 휘저었다. 열이 몰려 눈가가 뜨거웠다. 시온의 숨이 자꾸 은밀한 아래에 닿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아름답고 고운 시온의 얼굴이 제 아래에 닿아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엉덩이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다른 생각도 하고, 여유롭네?”

“흐읏, 아니! 흣…….”

시온이 빠듯한 구멍을 벌리고 두 번째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입으로 엉덩이를 세게 물었다. 화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시온은 엉덩이 살을 베어 물고 혀를 굴렸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부드러운 살결을 물었다가 놓으며 진득하게 핥았다. 내벽을 휘젓는 손가락에 약간의 발열감이 느껴졌다. 시온이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젤에 시선을 두었다. 로고와 함께 커다랗게 ‘핫젤’이라고 쓰여 있었다. 시온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가락으로 안을 들쑤실 때마다 체온이 점점 올라가는 것 같았다.

“흐읏, 아아!! 읏!”

시온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빠르게 안쪽을 들쑤셨다가 입구까지 빼내어 구멍을 넓혔다. 내벽을 더듬고 젤을 좀 더 짜 내 내부에 진득하게 펴 발랐다. 이미 상상 속의 저는 화준의 아래를 들쑤시고 있었다. 마음은 초조하고 급한데 화준의 몸은 영 반응이 시원찮았다.

고통스러운 신음만 쏟는 그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내벽을 찬찬히 더듬었다. 그때였다. 손가락을 깊숙이 밀어 넣어 내벽을 더듬는 순간, 화준의 상체가 약간 튀어 오르며 숨을 멈추었다. 내벽의 야살스러운 살들이 손가락에 들러붙어 꽉 조여 물었다. 시온이 재차 그곳을 확인하듯 손끝으로 문지르자, 화준이 주먹을 쥐고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숨 쉬어요.”

“흐앗! 흐! 시, 싫어! 으윽.”

시온은 실없이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틈을 벌려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숨을 참고 끙끙거리던 화준이 숨을 확 뱉어 내고 자세를 무너트렸다. 아래로 처진 엉덩이를 따라 시온의 손도 아래로 떨어졌다.

화준은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속이 찌릿찌릿했다. 홧홧하게 속을 데우는 열기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시온의 손이 닿았던 그곳에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악! 시온의 손이 다시 한번 그곳을 문질렀다. 시야가 한순간에 확 좁아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입가를 타고 침이 질질 흘렀다.

좋은 거 같기도 하고, 불쾌한 거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아래를 들쑤시는 시온의 손이 빨라졌다. 찔꺽찔꺽,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화준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이런 음란한 소리가 들린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아래를 꽉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빠지고 뜨거운 열기를 담은 뭉툭한 무언가가 구멍에 닿았다.

“힘 풀어요. 정말 다칩니다.”

시온은 귀두가 닿는 것만으로도 구멍이 확 좁아 드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쥐고 넓게 벌렸다. 약간의 마찰로 부은 구멍에 귀두를 약간 밀어 넣어 물리자, 화준의 몸이 크게 튀었다.

“으윽!”

귀두를 꽉 조여 물고 몸을 굳힌 화준 때문에 시온이 인상을 쓰며 엉덩이를 세게 붙잡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조여든 구멍을 한번 내려다보고 그대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몸을 비트는 화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욕을 뇌까렸다. 더할 나위 없이 발기해 표면이 우툴두툴한 성기가 내벽을 밀어 올리며 안쪽으로 틀어박혔다.

“하윽, 으…… 아, 아파! 으읏.”

시온은 상체를 들어 올리며 울부짖는 화준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안이 꽉 조여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성욕이 흉포하게 날뛰었다. 화준은 입만 뻐끔거리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불기둥이 제 몸을 두 갈래로 찢어발기는 기분이었다. 한 줌,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흐윽, 아, 아파요. 흑, 으흣!”

“윽, 사람이 도망칠 기회를 주면 도망치는 겁니다. 앞으론 뒤도 보지 말고 달려서 도망쳐요. 알겠어요?”

화준의 귀로 그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명만이 귓가를 때리고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두드렸다. 시온은 엉덩이를 벌려 깊게 쑤셔 박힌 성기를 천천히 뽑아냈다. 입구에 귀두가 걸리자, 망설이지 않고 성기를 박아 넣었다. 화준의 울음이 애달프게 방 안에 흩날렸다.

이젠 멈출 수도 없었다. 심지는 이미 타서 없어지고 폭발한 성욕만이 시온을 지배했다. 온몸을 달구는 이 지독한 성욕의 시발점이 도화준이라서 미칠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에 순진해 빠진 이 몸이 폭발할 것 같은 성욕을 불러일으킬지 몰랐다.

시온은 화준의 상체를 누르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물흐물하게 녹은 젤이 화준의 불알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약간씩 풀어지기 시작한 구멍이 천천히 제 성기를 삼키고 또 삼켰다.

“흐윽…… 흣, 그만! 하윽…….”

화준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온통 붉은색 페인트가 부어진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숨이 막혔다. 그가 주는 고통이 점차 이상한 감각을 만들어 낼 때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배 속에서 요동치는 욕구에 스스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뒤를 쑤시는 거대한 성기에 맞춰 손을 흔들었다. 귀두를 덮고 있는 표피를 밀어 올리고 빠르게 흔들었다. 엉엉 울음을 뱉으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말이 맞았다. 시온이 손가락으로 문질렀던 안쪽 깊은 곳에 성기가 닿을 때마다 몸이 펄쩍펄쩍 튀어 올랐다.

“으으…… 모, 못 참겠어요! 흣, 이, 이사장님.”

시온이 화준이 붙들고 있는 성기 위로 손을 겹쳐 잡고 빠르게 흔들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꽉 조여들며 끔찍한 쾌감이 몸을 덮쳤다. 혼자 욕실 벽에 기대어 하던 자위와 차원이 달랐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눈앞이 까맣게 점멸되었다. 온몸의 피가 아래로 모여들었다.

시온은 손에 흩뿌려진 정액을 화준의 얼굴에 문질렀다. 정액을 얼굴에 문지르는 건 시온의 시그니처 같은 거였다. 얼굴에 정액이 잔뜩 발린 채 가쁜 숨을 내쉬며 누워 있는 걸 지켜보는 것도 꽤 즐거웠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그런 얼굴을 자신만 보고 있다는 것도 자극적이었다.

화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시온은 탈력감에 늘어지는 화준의 몸을 단단히 붙잡고 빠르게 구멍을 드나들었다.

“하윽, 읏…… 그만! 흐윽.”

시온은 스퍼트를 빠르게 올렸다가 다시 천천히 안쪽을 들쑤셨다. 화준의 체력 안배를 위해서였다. 이미 화준의 체력은 바닥이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소리도 많이 질러서 눈은 퉁퉁 붓고 목은 잔뜩 쉬어 거친 소리가 났다. 허리를 숙여 화준의 등에 입을 맞추며 몸을 어루만졌다. 손을 앞으로 뻗어 젖꼭지를 쥐고 문질렀다. 손아귀에 착 감겨 오는 탄력 있는 피부 감촉이 좋았다.

시온은 화준의 아래에서 성기를 거둬들이고 그의 몸을 바로 눕혔다. 허벅지를 밀어 올려 사이에 자리 잡고 풀어진 구멍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막힘없이 안쪽까지 단박에 쑤셔 박히는 느낌에 화준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입을 벌렸다. 안을 꽉 메우는 생경한 감각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아래를 채우는 압박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온은 화준의 팔을 잡아 제 목에 걸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머금었다. 아랫입술을 입술로 조이며 허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빠르게 안쪽을 드나들기 시작하자 화준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시온은 혀로 눈가를 핥으며 절정으로 치닫는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화준이 느끼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문지르며 눌러 놓은 성욕을 풀었다.

화준의 가느다란 두 다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화준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끼며 시온의 목에 건 손에 힘을 주고 매달렸다. 그 바람에 시온의 몸에 매달린 꼴이 되자, 시온이 그대로 허리를 잡아당겨 허벅지에 앉혔다.

단숨에 깊어지는 삽입점에 화준의 몸이 크게 튀어 올랐다. 시온은 다리를 펴고 앉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화준의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후우, 힘들어요?”

“더, 흣, 못 하겠어요. 으윽.”

시온이나 화준이나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시온은 화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꽉 쥐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자 화준이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흐느껴 울었다. 이런 자극은 처음이었다. 배 속을 채운 흉기 같은 성기가 안에서 빙글빙글 돌려지는 느낌은 끔찍하게 좋았다. 내벽의 살들이 성기를 잔뜩 조여 물어 함께 비벼지는 느낌이었다. 시온은 스스로 움직여 보라고 시키고 싶었지만, 말없이 화준을 밀어 눕히고 빠르게 아래를 들쑤셨다. 거의 몸이 접히다시피 들어 올려진 그가 입을 빠끔거리며 힘겹게 호흡을 삼켰다.

빠르게 올라오는 절정에 시온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발끝부터 시작된 자극이 순식간에 치고 올라와 머리끝을 두드렸다. 마침내 시온이 화준의 몸속에 정액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준의 날카로운 비명 같은 신음이 방 안을 흔들었다.

시온은 화준의 속을 꽉 채운 채 느긋하게 후희를 즐기며 몸 곳곳에 입술을 붙였다. 제법 만족스러운 섹스였다. 정신을 놓지 않고 버틴 화준이 기특해서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씻고 잡시다.”

“……그냥 잘래요.”

시온은 아래로 손을 내려 몸속에 틀어박힌 성기를 천천히 뽑아냈다. 절절 끓던 욕구를 풀고 나니 몸이 한결 가뿐했다. 시온은 체구도 작고 가벼운 축에 속하는 화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살 좀 쪄야 할 것 같은데.”

“저기…… 이사장님.”

“……응?”

화준이 반쯤 수면에 젖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뜸을 들이는 동안 시온은 화준을 욕조에 내려놓고 물을 틀었다. 마개가 막혀 있는 욕조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

“……말이요.”

“말?”

“네에……. 편하게 하시면 안 돼요?”

시온은 욕조 물이 금세 탁해지는 걸 바라보며 화준의 몸을 들어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말 편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왜?”

“이사장님이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까요.”

“내가 말 놓으면 화경 씨는 나한테 뭐 해 줄래요?”

“……음, 모르겠어요.”

“그럼 화경 씨도 이사장님 말고 시온 씨나 시온 오빠라고 부를래요?”

화준은 ‘오빠’라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잠잠하게 눈을 감았다. 현재 도화준은 대외적으로 여성이었고 그걸 부인할 수는 없었다. 화준의 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시온은 그런 화준이 귀여워 코를 한번 꼬집어 주고 말했다.

“시온 씨라고 불러 봐요.”

“……전 그냥 이사장님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그럼 말 편하게 하는 건 없던 일로?”

“아…….”

화준은 한숨을 푹 내쉬고 눈꺼풀을 살짝 들어 시온을 바라보았다. 알몸인 채로 한쪽 다리를 굽히고 앉아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근사했다. 이 남자는 뭘 해도 다 근사하고 멋있구나. 시온이 화준의 손을 잡아 욕조를 붙잡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시온이 시키는 대로 욕조를 붙잡자, 시온의 손가락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금세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속을 채우고 있던 액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온 씨라고 불러 봐요.”

화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입을 벙긋거렸다가 다물기를 몇 번. 시온의 강렬한 눈빛에 화준은 작게 이름을 불렀다.

“시, 시온 씨…….”

안 그래도 붉은 뺨을 더 빨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부르는 화준의 목소리에 대화가 끊겼다. 시온은 수건걸이에 걸려 있는 수건을 바닥에 깔고 화준을 눕혔다. 밤이 지독하게도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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