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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우리 둘만 아는 (5/19)

Chapter 4 : 우리 둘만 아는

시온이 정혁의 집을 나온 시각은 오후 9시가 넘어서였다. 나오기 전 정혁의 휴대폰을 강탈하듯 빼앗아 비서실에서 들어온 보고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보고의 대부분은 일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별 두 개, 세 개……. 업무의 중함에 따라 표시된 별을 확인하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별 다섯 개? 이렇게 중요한 보고가 있단 말인가. 의아한 얼굴로 늘어져 있는 정혁을 힐끗거렸다. 그는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신성 건설 도창현 사장님께서 사모님과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다고 꼭 만나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매우 위중한 사안으로 판단되어 따로 페이지를 작성합니다. 목소리에 다급하고 초조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모님이라 함은 도화준일 것이다. 어쩔까. 시온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도창현에게 뒤통수를 한 대쯤 맞아 줄 의향이 있었다. 이제 선우 그룹과 사돈이 되었으니 그는 더 기세등등하게 독사처럼 움직일 것이다. 이쪽으로 몇 개쯤 고소가 들어온다고 해도 유연하게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신혼여행에서 본 화준의 몰골이, 그의 말투가 자꾸만 신경을 긁었다. 시온은 화면에서 삭제 버튼을 찾아 누르고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시온아.’

‘시답지 않은 개소리 할 거면 나중에 해라.’

‘…….’

‘며칠 동안 여기서 머물 거니까 그렇게 알아. 비서실에는 내가 따로 연락하지. 박정혁 비서실장의 휴가계는 내 선에서 처리했다고.’

‘그래, 우리 이 관계 끊어 내지 말자. 어디가 끝인지 한번 가 보자.’

시온은 옷을 챙겨입고 정혁의 집에서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혁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편하게 사용해 온 몸이고, 결혼을 했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처음부터 감정 없이 시작한 관계였다. 필요에 의해서 관계를 했고 강요한 적도 없었다. 모든 인간관계는 계산적이었고 감정이 배제된 채 맺어 왔다. 정혁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정혁은 대외적인 방패막이로 쓰기 적절했다. 그 누가 남자 비서인 정혁과 몸을 나누는 사이라는 걸 상상이나 할까.

시온은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고 피식 웃었다. 생각을 지워 내고 휴대폰 화면을 긴 손가락으로 쓱 문질렀다.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번호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그토록 시온을 찾아 대는 도창현의 번호였다. 연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도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공서방인가.

“예, 장인어른. 비서실 통해서 연락받았습니다. 화경 씨 일로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 자네 어디에 있는가? 내가 지금 자네 있는 곳으로 가겠네.

“아닙니다. 제가 가죠. 어디에 계십니까?”

- 그럼 회사로, 회사로 오게나.

“네,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시온은 정중하게 전화를 끊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운전대를 잡았다. 도 사장에게 뒤통수 한 대쯤 맞아 주려고 했던 생각을 전면 수정했다. 도화준을 볼모로 제가 먼저 그의 목줄을 틀어쥘 생각이었다. 시온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 * *

화준은 거실 소파에 누워 시계 초침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벌써 사흘째 시온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낮에 안부를 묻는 전화가 오긴 하지만 통화는 길지 않았다. 그저 의무적인 안부 인사였고, 제 대답을 듣고 나면 그는 오늘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정말 회사 일이 바빠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무슨 실수를 해서 들어오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준은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못할 속앓이에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진짜 이상하네.”

시온과 함께한 신혼여행을 되짚어 보지만, 딱히 짚이는 일은 없었다. 다만 함께 마신 술,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어졌고 드문드문 생각이 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날 시온과 부끄러운 행위를 한 건 확실했다. 눈앞을 뒤덮는 살색의 향연, 그건 또렷이 기억에 있었다.

자신이 너무 서툴러서 기분이 상한 건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딱히 거부감이 들거나 불쾌감이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제 몸은 그를 좋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화준은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보며 시끄러운 속을 애써 다스렸다.

화준은 속으로 날짜를 가늠해 보다가 다음 주 상담 예약을 잡아야 함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명함이 어딨더라. 슬리퍼를 질질 끌고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한번 힐끗거리고 계단 옆에 있는 제 방문을 열었다. 허리를 숙여 서랍을 열고 안쪽을 뒤적였다. 어딨지? 분명히 가지고 왔는데…….

한참을 뒤적이던 손이 종이 단면을 스치며 따끔한 아픔을 느꼈다. 아……. 화준은 인상을 구기며 베인 손을 감싸 쥐었다. 붉은 피가 배어났다. 화준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다른 손으로 서랍을 뒤졌다. 제일 아래에 깔린 명함이 눈에 보였다. 명함을 꺼내 드는 순간, 겹쳐져 있던 다른 명함 한 장이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KNN 의료 재단 이사장 공시온」

화준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명함을 집어 들었다. 맞선을 보던 날 시온이 건넨 명함이었다. 명함은 꼭 공시온처럼 정갈하고 딱딱한 정자로 채워져 있었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시온의 명함을 만지작대던 화준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홀린 듯이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뚜르르―. 이어지는 연결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 내가 무슨 짓을……. 화준은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종료 버튼을 누르고 침대로 휴대폰을 던졌다.

미쳤어! 화준은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던져 놓은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보나 마나 시온일 것이다.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침대에 던져 놓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공시온이었다.

받지 말까. 뭐라고 하지? 쿵쿵 뛰어 대는 심장이 쪼그라들 지경이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전화했었네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 흠, 목소리가 이상한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저도 모르게 수화기 속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사락사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화준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을 그를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신문을 볼 때처럼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 있겠지.

- 화경 씨?

“아! 그게 그러니까, 어……! 전화번호를 입력해 놓으려다가 잘못 눌러서…….”

- 그래요? 다른 할 말은 없고?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은 집에 들어오세요?’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말이 얼마나 주제넘은지 알고 있었다. 화준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시무룩한 눈동자가 책상 위에 놓인 강 선생 명함을 발견했다.

“저…… 주치의 면담에 동행하신다고 해서요.”

- 흠.

“굳이 안 가셔도 되고 저 혼자 다녀와도 됩니다.”

- 언제 갈 건데요?

“강 선생님 일정에 맞춰서 진행해야 될 거 같아요. 바쁘시면 저 혼자 다녀올게요.”

- 그럼 그럴래요? 미안해요, 약속 못 지켜서.

“아닙니다.”

그 뒤로 몇 마디가 더 오갔지만 화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한 기분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우울한 기분이 드는지……. 화준은 애써 괜찮다고 자위하며 책상 위에 올려 둔 명함을 집어 들었다. 시간만 괜찮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강 선생에게 상담을 받고 싶었다.

상담을 하면서 속에 꽉 들어찬 무거운 마음을 좀 내려놓고 싶다.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귀로 가져갔다. 뚜르르― 하는 지루한 연결음이 이어지고 마침내 그녀가 “강해령입니다.” 하고 전화를 받았다.

“강 선생님, 저 도화경입니다.”

- 어? 화경 씨!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혹시 오늘 시간 되세요?”

- 아, 화경 씨는 소식 못 들었구나. 저 잠시 쉬고 있어요. 병원 옮기려고 준비 중이라서요.

“……그럼 당분간 상담은 힘들겠네요.”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다. 조금 전 시온의 전화도 그렇고 해령도 그렇고. 울적한 기분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뺨을 문질렀다.

- 화경 씨, 지금 뭐 하고 있어요? 밖에 나올 수 있어요?

“네?”

베개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고 반문했다. 정말이요? 해령이 주치의를 맡은 후로는 가끔 만나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셨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특히나 더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피곤함에 절여 잠들고 싶었다.

- 도화경으로 나올 거예요, 아니면 철수로 나올 거예요?

“저, 철수요.”

화준은 해령과 약속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철수로 나가겠다는 의미는 여장하지 않고 모자와 마스크로 위장하고 만나겠다는 의미였다. 본가에서 해령과 철수로 만날 땐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먼저 해령이 어머니에게 개인 면담 요청을 해서 눈을 가리면 화준은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미리 포섭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버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트롤리를 타고 집을 빠져나왔다.

집에 들어갈 땐 해령의 옷을 입거나 사는 쪽을 택했다. 남자로 살고 싶은 욕망은 늘 속에서 들끓었다. 어쩔 수 없이 여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속은 남자의 몸이었다. 이건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화준은 씁쓸하게 웃곤 욕실로 들어갔다.

* * *

“철수 씨!”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끓었다. 화준은 택시에서 내려 횡단보도로 향했다. 맞은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화준은 해령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연한 핑크빛 원피스에 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해령이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우리 잘생긴 철수 씨, 얼굴 좀 보여 줘요.”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해령은 반갑게 화준을 맞이했다. 환하게 웃으며 마스크를 살짝 내려 뽀얀 얼굴을 노출했다. 해령은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전보다 살이 약간 더 내리고 눈 밑이 퀭해 보였다.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네요. 얼굴이 까칠해요.”

“아니에요.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해령이 화준의 팔에 제 팔을 끼워 넣으며 몸을 붙였다. 화준은 어색하게 몸을 굳히고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녀의 친구가 한다는 카페로 들어갔다. 해령은 양해를 구하고 스터디 룸으로 꾸며 놓은 곳으로 화준을 이끌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커피 마실 거죠?”

“네, 저는 단 거…….”

화준이 마스크를 벗어 내려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오늘은 혀가 아릴 만큼 단 게 마시고 싶었다. 한참 만에 돌아온 그녀는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함께 커다란 접시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수플레 팬케이크였다. 시각과 후각을 단번에 자극하는 엄청난 비주얼에 화준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

해령은 포크를 화준의 손에 쥐여 주고 재촉했다. 그녀의 재촉에 마지못해 팬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입 안으로 퍼지는 단맛이 혀끝을 녹여 버릴 것 같았다. 작게 인상을 쓰며 포크를 내려놓자, 해령은 입술을 삐죽이며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선글라스도 벗어 내려놓고 무테안경을 꺼내 썼다. 준비를 끝낸 해령이 화준의 얼굴을 살폈다.

“뭐 하면서 지냈어요?”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식을 하고 그랬어요.”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겠네요?”

화준은 포크를 접시 한쪽에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쥐었다. 해령에게 상담을 받는 이 시간만큼은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이었다. 제 속에 있는 답답함을, 힘듦을 끄집어내서 치유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화준은 좋아했고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는 편이었다.

“결혼식 마치고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어요. 그런데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하니까 그 불빛이 추상적인 무언가로 변하는 거 같았어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눈이 아플 정도로 채워져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게 꼭 헤드라이트 불빛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이사장님이 손을 잡아 줬어요. 그래도 진정되지 않더라고요. 근데 그 사람이 재킷을 벗어서 내 머리 위에 덮어 줬어요. 온통 새까맣게 변하니까 거짓말처럼 마음이 차분해지더라고요.”

“큰일 날 뻔했네요. 화준 씨 같은 경우, 트라우마가 복합적으로 형성된 케이스라 상황을 특정할 수가 없어요. 작년에는 예상치도 못한 첨단 공포증으로 발작을 일으킨 적도 있어서 계속 예의 주시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요.”

해령은 포크를 들어 팬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이 세상의 트라우마라고 일컫는 모든 트라우마를 안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지만 잠재된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튀어나와 화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작년에 첨단 공포증으로 발작을 일으킨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찾아갔을 때 해령은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어머니의 뺨을 치고 싶었다. 화준은 쓰러져도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비밀을 알고 있는 특정 의료진만이 화준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었다. 그 특수한 사실 때문에 화준은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발작에도 생사를 넘나들었다. 해령은 늘 불안했다. 트라우마를 잘 넘길 수 없는 환경에 사는 그라서 더 마음이 쓰였다.

“철수 씨 결혼했잖아요. 그건 어때요?”

화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이 결혼이 싫지만 어떤 의미로는 화준의 삶을 안정시켰다. 밤마다 구슬프게 들려오는 어머니의 울음도, 도화준이라는 인간 자체를 거부하고 도화경이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 안에서 쉴 수 있었다. 제 삶을 온전히 즐기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적으로 안정되었다.

“지금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아요. 히스테릭한 기분도 많이 나아졌어요. 편해요. 다만…….”

화준은 입술을 깨물고 뜸을 들였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말하기가 불편해서 그런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편하게 말해도 돼요.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상담에는 거짓이 들어가면 안 돼요. 내가 철수 씨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판단할 수 있게 솔직하게 말해야 해요.”

화준은 시온을 떠올리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해령은 화준을 닦달하지 않고 차분히 그의 입술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꼬박 15분을 머뭇거리던 그가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이게 이상해요. 아니, 이상하다는 건 아는데, 그런데 자꾸…….”

“…….”

“그 사람이 신경 쓰여요.”

* * *

화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해령과 저녁까지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늦어 버렸다. 만약 어머니께서 아시면 난리가 나겠지만 지금 제 삶을 간섭할 사람은 없었다.

운동화 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리며 빠르게 변하는 숫자판을 멍하니 바라봤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추고 화준은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도어록을 열어 놓고 보니 그제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밀번호!

화준은 아직 신혼집 비밀번호를 모르고 있었다. 늘 이 문은 화준이 아닌 타인이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낭패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떡하지? 화준은 현관문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해령과 함께 제법 긴 거리를 걸은 탓에 다리도 아팠고, 지금 당장 어디로 이동하지도 못할 테니 일종의 체념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11시 13분. 공시온은 오늘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본가로 갈 수도 없었다. 지금 차림을 어머니께서 보신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화준은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리를 끌어 모아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졸려……. 화준은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눈을 감았다.

“화경 씨.”

누군가 몸을 흔드는 느낌에 화준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수면에 잠식되어 있던 눈이 흐릿하게 사물을 인식했다. 환하게 들어온 불빛 아래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수면에 잠식당한 머리가 현실로 빠르게 돌아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도화경.”

재차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눈가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거짓말처럼 검은색 슈트를 입은 공시온이 서 있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고 옆으로 비켜섰다. 시온은 굳은 얼굴로 화준을 지나쳐 현관으로 다가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들어가요.”

“아, 네!”

화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 공시온은 오늘도 집에 못 들어온다고 일찍 자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왜 공시온이 여기에 있는 거지? 손가락을 세워 뺨을 살살 긁으며 신발을 벗는 그를 지켜보았다. 시온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났다.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도 푸석푸석했다.

화준은 그의 모습에 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렇게 피곤하고 어두운 얼굴로 집에 들어온 날에는 아버지께서 어김없이 화를 내셨다.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화를 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화준은 몸을 움츠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시온이 걸으며 화준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끌어당겼다.

“앉아 봐요.”

“네? 저, 내일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누누이 말한 거 같은데.”

아까보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에 화준이 덜컥 겁을 집어먹고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시온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화준 역시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얼른 이야기를 마치고 들어가 쉬고 싶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강 선생님…… 그러니까 주치의 상담이 오늘 급하게 잡혀서요.”

시온은 재킷을 벗어 한쪽에 내려놓고 커프스단추를 끄르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렸다. 옹골차게 들어찬 근육이 꿈틀거렸다. 화준은 그의 행동과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럼 왜, 밖에 있었어요?”

“……제가 집 비밀번호를 숙지하지 못했어요.”

“뭐요? 비밀번호 몰랐으면서 나한테 왜 전화 안 했어요? 나 안 왔으면 계속 밖에 있을 생각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시온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았다. 뭐가 저리도 죄송한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시온은 자정이 가까워졌음을 깨닫고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뻐근한 몸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쳤다. 벌써 사흘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흘 밤낮으로 꼬박 신성 건설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시온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서류를 대충 쓸어 모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쓰고 있던 무테안경도 벗어 내려놓고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시온은 신혼여행 직후 도창현 사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신성 건설에 투자를 결정했다. 이 빌어먹을 일 때문에 제 계획을 전면 수정하고 사무실에 틀어박혔다.

투자하는 건 제 선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부분이지만 시온은 이 일을 공식화할 생각이었다. 만약 도창현이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대로 회사에서 대응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일종의 보험이었다. 그러면 투자를 하기에 적당한 회사인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사업체의 규모와 자금 사정, 자금 출처 등 이래저래 검토할 부분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료가 방대해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신성 건설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인수한 회사가 몇 개 있지만, 그중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건질만 한 건 제약 회사와 중국에 기반을 둔 주방 기기 회사뿐이었다. 딱 빈 수레가 요란한 꼴이었다. 만약 도창현이 도화준이 남자임을 히든카드로 꺼내 들었을 때를 대비하는 작업이었다. 아들을 딸로 둔갑시켜 결혼까지 시킨, 욕심이 뱃속에 가득 찬 비정한 인간이었다. 노친네가 공 서방이라고 부를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살이 잔뜩 붙은 뚱뚱한 혓바닥에도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시온은 느슨하게 당겨 놓은 타이를 머리 위로 벗겨 내고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텅 빈 것을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담뱃갑을 손으로 구기고 내선을 눌렀다.

“담배 가지고 와요.”

- 네, 이사장님.”

시온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강행군을 이어 온 탓에 미약한 두통까지 일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온은 눈을 감은 채 손만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에 담배 한 갑이 놓였다.

“이사장님.”

응? 시온이 눈을 뜨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눈앞에 서 있는 건 정혁이 아니라 정혁을 보필하는 수행 비서였다. 아무리 시간이 늦어도 시온이 퇴근하기 전까지는 절대 퇴근하는 법이 없는 정혁이었다. 이런 심부름 또한 정혁이 하는 게 기본이었다.

“박 비서 어디 갔습니까?”

“네, 조금 전 확인할 게 있다고 급하게 나갔습니다.”

“급하게 나갔다니…… 흠, 알겠습니다. 나가 봐요.”

시온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길게 담배를 빨고 짙은 어둠이 깔린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형형색색 어둠을 밝히고 있는 불빛들이 퍽 아름다웠다. 시온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서 휴대폰을 끌어다가 익숙한 번호를 화면에 띄웠다. 박정혁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보고도 없이 뛰어나간 걸 보면 급한 일, 아니면 개인적인 일인데, 어느 쪽일까. 지루한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 네, 이사장님.

“보고도 없이 어디 갔을까?”

-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나왔습니다.

“개인적인 일입니까?”

시온은 대답을 기다리며 필터까지 탄 담배를 비벼 끄고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주변의 소음이 적은 걸 보면 차 안이거나 집일 텐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 사실은 빌라 관리인에게 연락이 와서 잠시 나왔습니다.

“빌라?”

- 네. 사모님, 께서 집에 안 들어가고 현관 앞에 계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해.”

- 제가 가서 상황 파악하고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거기서 멈춰요……. 박 비서님은 거기서 퇴근하세요. 내가 집으로 가죠.”

시온은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고 재킷을 챙겨 입었다. 정말 이래저래 신경을 긁는 위인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면 될 텐데, 그 기본적인 것도 하지 못하는 얼간이었다.

씨발―! 짜증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차 문을 열고 브리프 케이스를 집어 던지고 곧장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알 수 없는 짜증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사흘 동안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신성 건설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면서도 이렇게 짜증이 난 적은 없었다.

피곤이 한계치를 넘어서도 괜찮았다. 늘 이렇게 살아온 인생이어서 계획대로만 시간이 흘러간다면 몸이 피곤한 건 괜찮았다.

다만 견딜 수 없는 건 자신의 시간을 이렇게 멋대로 먹어 치우는 일이었다. 도화준의 얼굴을 보면 왜 이러고 있느냐고 소리치고 크게 화를 낼 생각이었다. 제 시간을 잡아먹는 도화준이 못마땅했다. 그리고 ‘도화준’이라는 사람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 또한 짜증스러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센서 등이 주변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 도화준이 현관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온 모양인지 외출복 차림에 모자까지 깊이 눌러쓴 채였다.

색색― 공간을 울리는 숨소리에 시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센서 등이 꺼졌다. 주변이 까맣게 물들었다. 정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 마음은 도대체 뭘까. 왜 자신은 여기까지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려온 걸까. 시온이 몸을 움직여 센서 등을 밝혔다. 환한 빛 아래 도화준이 있었다. 도화준이라는 이름 대신 도화경이라는 이름으로, 남자의 몸임에도 여자로 길러져야 했던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동정이라고밖에 정의하지 못하겠다. 그래, 이건 동정이다.

시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체력 소모를 하는 것보다 감정 소모를 하는 게 훨씬 더 피곤했다.

“좀 영악하게 살 수는 없는 겁니까? 남 생각하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좀 이기적으로 살아 볼 생각은 없어요?”

“…….”

“전화 놔뒀다가 뭐 할 건데? 내가 그쪽을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미련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죄…….”

“죄송하다는 말, 듣기 싫으니까 그 정도만 해요. 그 입은 앵무새처럼 죄송하다는 말밖에 못 합니까!”

시온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러 참으며 이를 갈았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가, 또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가 기분이 제멋대로였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가 도화준과 눈이 마주치자 시온은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화준은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크게 화낼 일도 아닌데 시온은 과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됐건 간에 자신이 잘못한 게 맞지만,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영악하게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어떤 게 영악한 건데? 화준은 묻고 싶었다.

“이사장님.”

화준을 등지고 서 있던 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화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크게 심호흡했다.

“뭐든 알려 달라고, 잘 배우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가르쳐 주세요. 이렇게 화만 내지 마시고요.”

“다시 말해 봐요.”

시온의 입술을 비집고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분명 화준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평정심이 묻어났지만, 그의 손은 아니었다. 주먹을 얼마나 꽉 쥐고 있는지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말 한마디 하는 게 당신한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사장님이 화를 내시는지. 그러니까 가르쳐 주시면 제가 배울게요.”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네?”

“내가 가르쳐 주면 배우겠다는 그 말, 책임질 수 있냐고.”

시온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화준의 앞으로 다가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화준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려고 했지만 시온이 먼저 손목을 잡아챘다. 손을 달래듯 어루만지며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엔 손톱이 파고들어 자국이 짙게 남아 있었다. 시온은 손을 오므리려는 움직임을 제지하고 자국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어루만졌다. 조금 전까지 불같이 치솟았던 짜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기분이 아주 제멋대로 널을 뛰었다.

“휴대폰은 연락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나는 공식적으로 도화경 씨의 남편이자 보호잡니다.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전화해요.”

“……그래도 이사장님은 바쁘시니까, 제가 괜히 불편하게…….”

“이 상황이 더 불편하고 짜증 난다는 건 생각 못 합니까? 내가 직접 해결 못 할 상황이라고 해도 날 위해서 움직여 줄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요. 며칠 지켜보다가 고쳐지지 않으면 사람을 붙일 겁니다.”

화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자 보호자’라는 말이 가슴 한가운데에 콱 박혀 미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어울리지 않는 말임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화준은 넋을 놓고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일 저녁에 본가에 갈 예정입니다. 7시쯤 데리러 올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네.”

“이번엔 울면 안 됩니다. 마음 단단히 하고 나와요.”

시온은 매만지던 화준의 손을 놓아주고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화준은 그가 사라지자 기운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씻어야 했지만 기운이 없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모자를 벗어 내려놓고 고개를 젖혀 높은 천장을 바라봤다. 샹들리에가 저런 모양이었구나. 새삼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예쁘단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 공시온과 함께 있는 밤이었다. 비록 침실은 따로 쓰지만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며 화를 내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사람들 모두 그저 불쌍하다고 위로하고 안쓰러워하기만 했다. 기분이 묘했다. 화준은 눈가에 힘을 주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발소리를 죽이고 욕실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나왔다. 짧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소파에는 시온이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캔 맥주 하나가 들려 있었고, 막 씻고 나왔는지 샤워 가운 차림이었다.

“맥주 한잔할래요?”

“……아, 네.”

“이리 와서 앉아요. 맥주 좋아하는 거 같아서 일부러 술장고도 따로 들여놨는데, 왜 하나도 안 마셨어요?”

화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방 한쪽에 놓인 커다란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집으로 사람이 들이닥치던 순간을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가발도 쓰지 않고 편안한 차림으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갑자기 방문자를 알리는 벨 소리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마 수명이 5년쯤 줄었을 것이다.

대충 가발을 눌러쓰고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는 거대한 냉장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직원이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설치하고, 들고 온 맥주로 냉장고를 빼곡하게 채웠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화준은 어제의 기억을 더듬으며 차가운 캔 맥주를 집어 들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가발 써요? 안 귀찮아요? 기르면 되잖아요.”

시온의 물음에 화준은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가발을 쓸 때마다 귀찮고 번거롭지만, 이 짧은 머리카락을 고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고 화준이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이에요.”

“흠?”

“어릴 때는 길렀죠. 어머니께서 아침마다 저를 앉히고 머리카락을 빗겨 주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저는 여자도 아닌데 이런 머리카락이 저를 여자로 만드는 거 같아서. 그리고 어머니께서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실 때마다 진짜 화경이라고 믿는 거 같아서 홧김에 어머니 앞에서 가위로 잘라 버렸어요.”

“큰 용기가 필요했겠네.”

“근데 어머니께서 떨어진 머리카락을 붙잡고 막 우시는 거예요.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통쾌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또 저는 남자니까 머리카락이 짧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머리를 짧게 자르게 된 거예요. 어머니는 지금도 끔찍하게 싫어하시지만, 이게 제가 낼 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예요.”

화준은 희미하게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온 힘을 다해서 발버둥 치고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했다. 제발 그만해 주길, 포기해 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방 안 가득 채우는 가발 더미에 파묻혀 숨죽여 울어야 했다.

“화경 씨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나 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살지 못했을 텐데…… 대단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합니다.”

“……이사장님이 꼭 저를 이 지옥에서 건져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으로 살 수 있게 꼭…… 도와주세요.”

화준의 까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일렁였다. 절박하고 필사적인 애원이 시온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를 알면 알수록 숨이 막혔다. 연민과 동정이 어설프게 뒤섞여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2년 뒤에 꼭 날개를 달아 날려 줄 생각이었다. 도화경의 그림자에 가려 산 지난날을 꼭 보상해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잔뜩 무거워진 분위기에 시온이 맥주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난 7년 전에 정략결혼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선우 그룹의 장남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였죠. 얼마나 황당하던지……. 싫다고 난리를 치니까 아버지께서 돈줄을 막고 차 키를 빼앗으셨죠. 내가 만약 게이가 아니었다면 쉬운 일이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죠.”

“근데 게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여자한테 안 꼴려서?”

시온이 경쾌하게 답을 내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화준은 맥주를 마시면서 시온을 따라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공시온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다. 매사에 늘 당당하고 자존감도 높았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하고 이행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만난 건 열 손가락에 꼽히지만, 그가 보여 준 모습은 화준이 동경하는 남성상이었다. 자신도 남자로 자랐다면 회사 경영을 공부하고 후계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이 나라에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흠이고 흉이죠. 그런데 한 여자의 인생을 내 욕심 때문에 망치기 싫었어요. 그래서 맞선 자리를 엎으러 간 거였고.”

“그런데 왜 저랑…….”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이라서? 그리고 또 우리는 상호 합의하에 계약이 이루어진 사이니까요. 근데 난 도화경 씨가 이렇게 처절하게 살아온 줄 모르고 음흉한 꿈을 꿨죠. 밖에서 진하게 키스도 해 보고. 내가 도화준이랑 밖에서 키스하면 이상하지만 도화경이랑 키스하는 건 이상할 게 없잖아요.”

* * *

화준은 9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어제 오랜만에 해령과 신나게 돌아다닌 탓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게다가 시온과 맥주까지 마시고 잠들었더니 얼굴이 엉망이었다.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고 방문을 열었다. 어? 적막감이 깔려야 할 집 안에 텔레비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한 손에 머그잔을 든 시온이 눈앞을 지나쳐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거 꿈인가. 나, 아직 꿈꾸고 있나? 화준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일어났어요?”

“어…… 출근 안 하셨어요?”

“사흘 꼬박 회사에서 밤새웠더니 피곤해서 쉬기로 했습니다. 씻고 나와요. 아침 먹읍시다.”

화준은 뺨을 긁적이며 욕실 문을 열었다. 밤새 베개에 눌려 엉망인 머리가 거울에 비쳤다. 화준은 물을 묻혀 대충 머리를 정리했다. 이런 몰골로 마주하다니. 대충 세수를 하고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 안에 넣으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하루 종일 어떻게 같이 있지? 진짜 미치겠네. 칫솔을 물고 변기통 위에 올라앉았다. 손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시온은 여느 때처럼 6시에 일어나서 간단히 러닝 머신을 달렸다. 샤워하고 나오자 7시,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신성 건설에 대해서 최종 투자를 결정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막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방문을 여는 찰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는 선우 그룹 투자 총괄 이사였다. 시온은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전화를 받았다.

“네, 공시온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선우 그룹 투자 총괄 이사 박준태입니다.

“말씀하세요.”

- 다름이 아니라 신성 건설에 대한 투자를 잠시 보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요?”

- 노사 분쟁이 터질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 인상안을 놓고 노사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였는데, 노 측에서 판을 키운 모양입니다.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시위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보고받죠.”

시온은 전화를 끊고 박 비서에게 짧게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하루 쉬겠다는 내용이었다. 곧 알겠다는 메시지가 도착했고 시온은 가차 없이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휴무를 통보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도창현은 초조함에 치를 떨게 될 것이다. 신성 건설은 투자금을 받지 못하면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한 도산 위기였다. 그럼 그 불똥은 당연히 도화준에게 튈 것이다. 멍청할 정도로 착한 화준이 도창현에게 맥없이 휘둘릴 게 뻔했다. 그 악마 같은 것들이 도화준을 궁지로 몰아넣고 닦달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을 이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시온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옷을 벗어 드레스 룸에 던졌다. 하루쯤 쉬지, 뭐.

화준이 욕실로 들어가고 나자, 투자 총괄 이사가 예고한 대로 뉴스에서 신성 건설의 노사 갈등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시온은 혀를 끌끌 차며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뉴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자세하게 보도했다. 그때 마침 욕실 문이 열리고 화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온은 얼른 리모컨을 집어 들어 채널을 바꾸고 몸을 일으켰다.

“아침 먹어야죠?”

“네. 이사장님 드셔야 하잖아요.”

시온은 주방으로 다가가 냉장고를 열었다. 집안일을 해 주는 아주머니가 준비해 놓은 반찬들과 국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미역국은 전자레인지에 넣어 데우고 밥솥을 열어 밥을 펐다. 순식간에 뚝딱 차려진 밥상을 보고 화준은 정말 순수하게 감탄했다.

“앉아요.”

화준이 시온의 맞은편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식사는 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화준은 이렇게 단둘이 식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사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늘 식사는 혼자 했다. 뭐, 식사라고 해 봤자 풀때기 몇 개 씹는 게 전부였다. 시온이 먼저 숟가락을 놓고 물을 마셨다. 화준이 시온을 힐끗거리고 밥 먹는 속도를 올렸다. 입 안 가득 밥을 떠 넣고 우물거리는 화준을 힐끗거린 시온이 혀를 찼다.

“천천히 먹어요. 입도 조그만데 무리하지 말고.”

화준은 멋쩍게 웃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시온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 커피 머신을 작동시켰다. 곧 향긋한 커피 향이 퍼졌다. 멸치볶음을 집어 막 입에 넣는 찰나, 시온이 머그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때 여행 가서 말입니다. 술 취해서 나랑 뭐 했는지 혹시 기억해요?”

쿨럭―! 화준이 다급하게 입을 막고 컵을 집어 들었다. 연신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시온이 혀를 차며 물을 더 채워 주었다.

“그게 사레까지 들릴 정도로 충격적인 질문이에요?”

“아니요. 그게 너무 갑자기 물어보셔서.”

“기억나요, 안 나요?”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기억납니다.”

“좋았어요?”

“예? 아, 저는 그러니까…….”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온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 화준 쪽으로 몸을 반쯤 기울였다. 화준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슬로 모션을 걸어 놓은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침에도 이렇게 잘생길 수 있구나. 화준은 속으로 감탄하며 뭐에 홀린 사람처럼 시온을 바라보았다.

- 현관에서 호출이 왔습니다.

고개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울린 알림 소리에 시온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화준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인터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온이 시야를 막아서며 2층으로 등을 떠밀었다.

“내 방에 들어가 있어요.”

“집에 누가 왔어요.”

“도화경 씨 보호자는 나예요. 알고 있죠? 내 말만 들어요. 아래에서 큰소리가 나도 절대로 내려오지 말아요. 말 잘 들으면 상 줄게요.”

다시 한번 방문자 알림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시온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준이 2층 방 쪽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버튼을 터치해 출입구의 도어를 열었다. 시온은 느긋한 표정으로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네모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얼굴을 확인한 순간부터 짜증이 치밀었다. 어지간히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투자 보류 통보를 한 지 이제 겨우 두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올 정도면……. 담배를 길게 빨고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때 마침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시온이 입매를 굳히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화경아!!”

문을 열자, 희게 질린 화준의 어머니가 쓰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도창현이 굳은 표정으로 따라 들어왔다. 시온은 인상을 구기고 몸을 돌렸다. 신 여사가 악을 쓰듯 화준을 부르는 목소리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시온을 발견한 도 사장이 신발도 벗지 않고 달려와 손을 붙잡았다.

“공 서방,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투자 보류라니!”

“뉴스 안 보셨습니까? 노사 분쟁이 크게 터졌던데, 투자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신성은 무너질 걸세.”

“……지금으로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시온은 여상한 어조로 대답하고 손을 밀어 냈다. 아직도 도 사장의 뱃속은 욕심으로 뒤룩뒤룩 살이 올랐다. 가지고 있는 회사 몇 개만 정리해도 어느 정도 유지가 될 텐데…… 그건 어지간히 놓기 싫은 모양이었다. 시온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소파에 앉았다.

“화경아! 화경아!!”

현관 앞에 주저앉아 화준을 부르는 신 여사의 목소리에 거침이 없었다. 거의 정신을 반쯤 놓고 화준의 찾아 대는 작태를 시온은 철저하게 방관했다. 도화준이 스스로 내려오지 않는 이상, 이 집에서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은 도화준이 미치지 않은 이상 내려오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스스로 무덤을 파진 않을 테니.

“공 서방, 우리 화경이를 봐서라도 투자를 좀 앞당겨 주게나.”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급해서 그러네. 투자 금액 일부라도 지원해 주면 내가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힘 좀 써 주게나.”

도 사장은 자존심도 내려놓고 시온에게 매달렸다.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이 무슨 짓까지 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판을 무너뜨릴 순 없었다. 선우 그룹에서 투자만 받을 수 있다면 자존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음이 초조해서 그런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시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고, 속이 타는 건 도 사장뿐이었다. 그리고 이 침묵에 소음을 내는 건 정신을 반쯤 놓아 버린 신 여사였다. 하지만 도 사장 역시 그녀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공 서방, 다시 한번 생각해 주게나. 내가 이리 부탁하네.”

“투자를 결정하는 건 제가 아니라 저희 회삽니다. 회사에서 재가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도 자네가 조금만 힘을 써 주면 되지 않는가. 제발 부탁하네.”

절박한 도 사장의 목소리에 비명 같은 신 여사의 음성이 섞여 들었다. 시온의 시선이 현관으로 향하자, 도 사장이 다급하게 달려가 제 부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신 여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기어코 그녀가 도 사장의 뺨을 세게 쳤다. 짝―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지만 도 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신 여사가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도 사장을 바라보았다. 도 사장의 입에서 탄식 같은 숨이 흘러나왔다.

신 여사는 화준이 결혼하고 나자, 발작의 정도가 빈번해졌다. 처음에는 얌전하게 지내는 거 같더니 화준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보,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 우리 화경이 좀 보게 해 줘, 제발!! 우리 화경이 보고 싶어.”

신 여사는 두 손을 모아 빌며 화준을 찾아 댔다. 도 사장은 맞은 뺨을 감싸고 몸을 일으켰다.

“공 서방, 우리 화경이 어딨는가?”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곳까지 몸도 안 좋아 보이는 여사님을 모시고 온 저의가 뭡니까?”

시온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딱딱하게 내뱉는 말에 도 사장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사실 집에 공시온이 있을 거라고는 계산하지 못했다. 다만 화준은 늘 제 어미에게 약했으니까, 그 착한 것이 이런 어미의 모습을 보면 시온에게 잘 말해 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화경이를 보러 가자는 말에 신 여사는 두말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화경이를 너무 보고 싶어 해서 어쩔 수가 없었네.”

“화경아! 내 딸 화경아!!”

신 여사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시온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 집에 자신이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이 집에 혼자 있을 도화준만을 생각하고 데리고 온 거겠지. 시온은 씁쓸하게 웃으며 현관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신 여사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제 상식선에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계단을 밟고 뛰어 내려온 화준이 저를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범벅된 채로 뛰어 내려온 그는 제 어미에게로 다가가 몸을 끌어안았다. 시온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신이 이해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화준은 정신없이 신 여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영혼까지 갉아먹는 그 목소리가 제 심장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피를 낼 때까지 참았다.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서 참았다. 하지만 화준은 제 어미를 저버리지 못했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생활을 영위하게 한 장본인지만, 제 어미였다. 네 살 때 화경을 잃고 정신을 놓아 버린, 비정하지만 불쌍한…….

“어머니, 일어나세요. 저, 여깄어요.”

“너…… 너!!”

신 여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 사장의 얼굴 역시 경악에 물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준은 아침에 일어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가발도 쓰지 않고 그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그 얼굴을 바라보는 신 여사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마치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입만 벙긋거리며 손가락질했다.

시온이 인상을 풀고 피식, 흥미로운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화준을 믿은 자신이 멍청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할 줄이야. 아니지. 도화준이 등장함으로써 비밀은 다 폭로되었고, 도 사장이 히든카드로 도화준을 들이밀지 않게 되었으니 더 잘된 일인가? 그런데 순간 나른하던 시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짝―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화준의 고개가 돌아갔다.

“너, 너, 너!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신 여사가 정신을 완전히 놓고 화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준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손찌검에 무력하게 당하고 있었다. 흔한 방어조차 하지 않고 휘두르는 손에 이리저리 얼굴이 돌아갔다. 그는 그저 허망한 눈으로 제 어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건 학습된 폭력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신 여사를 제압할 힘은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무력하게 투항했다. 이리저리 머리가 흔들리고 그녀의 손에 얼굴이 찢기고 상처가 나도 그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고 있었다.

빌어먹을……! 시온은 느긋하게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양손을 마구 휘두르는 신 여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하시죠.”

도 사장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맥없이 화준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다만 그 시기가 빨라졌을 뿐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도화경 씨, 내 말을 뭐로 들은 겁니까? 당장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요.”

“하지만 제 어머니세요. 진정될 때까지만.”

“일어나. 씨발, 정말 다 엎어 버리기 전에 말 들어!”

“이거 놔! 너는 내 딸, 화경이야! 놔! 화경이라고!!”

화준의 고운 얼굴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신 여사의 손목을 쥐고 있는 시온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집구석이 아주 개판이었다. 부모라는 자들이 제 욕심만을 위해서 자식의 인생을 망친 것도 모자라 반성하는 기미조차 없다니. 치가 떨렸다. 시온은 깊게 숨을 내쉬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신성 건설에 대한 지원은 화준과 결혼을 조건으로 계약된 내용이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집안이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화준은 여전히 신 여사의 앞에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두 번 말 안 합니다. 2층으로 당장 올라가요. 신성 건설을 내 손으로 박살 내 버리기 전에 지금 당장!!”

“……이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천둥이 치는 것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시온의 목소리에 화준이 몸을 일으켰다. 화준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정말 사는 게 무의미하고 힘들어서 모든 걸 다 놓아 버리고 싶었다. 차오르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고 연신 허리를 숙였다. 이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한탄스러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일그러졌다. 도화경이 아니라고, 나는 도화준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올라 숨이 막혔다. 화준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온의 손에 잡혀 울부짖는 어머니를 등졌다.

“잘했어. 그대로 올라가요. 내가 가르쳐 주면 잘 배우겠다고 했죠? 그럼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해 봐요. 당신은 이 상황이 쪽팔리고 괴로워야 해. 나한테 이런 모습 보였다는 거 쪽팔려 해야 한다고. 내 말 이해했으면 뒤돌아보지 말고 가요.”

화준은 그대로 한 걸음씩 천천히 앞만 보고 걸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어머니를 등져 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화준은 어머니의 처절한 울음을 무시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새끼 새처럼 그렇게 부모의 세상 속에서 빠져나와 제 세상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도 사장님은 저와 하실 이야기가 많을 거 같은데, 그 전에 신 여사님 좀 먼저 처리하시죠. 기다리겠습니다.”

**이게맞다**

오후가 되어서야 시온이 화준을 불렀다. 소파로 쭈뼛쭈뼛 다가와 앉은 화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재깍재깍 소리를 내는 시계만이 이 공간의 침묵을 깨뜨렸다. 시온은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화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손톱에 긁혀 생채기가 나고 얻어맞은 뺨은 부풀어 올랐다. 게다가 또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고. 하, 시온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내려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내려왔어요?”

“……죄송합니다.”

“내가 죄송하다는 이야기 듣자고 묻는 걸로 보입니까?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했는지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해 봐요.”

손가락만 꼼지락대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화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온의 매서운 눈과 마주치자 그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피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잖아요. 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세요. 그러다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신 인생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었는데 그들이 밉지도 않아요? 억울하지도 않아요? 당신, 지금 나한테 시집온 거라고. 남자인 나한테 남자인 네가! 모르겠어?”

“…….”

“후,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원망하고 버려도 시원찮을 판에 거기가 어디라고 뛰어나와요, 나오기를!”

“……이해 안 되실 거예요. 저도 제가 이해가 안 되는데, 이사장님이 절 이해하신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시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진정시켜 놓은 마음이 다시 일렁였다. 모든 게 다 비정상적이었다. 비정상적인 집안에서 비정상적인 교육을 받아 와 도화준마저 비정상인 건가? 씨발―!!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노력해도 제 상식선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력하게 손찌검을 당하던 도화준이 자꾸만 눈앞을 어지럽혔다. 신경을 끄면 속이 편할 텐데 그건 또 그거대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공시온은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다. 남의 일 따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저 순하고 맹한 눈이 자꾸만 시온을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게 한다. 차라리 물질적으로 채워 주면 끝나는 그런 상황이라면 좋았을 텐데……. 이래저래 속이 시끄러웠다.

“나는 도화경 씨가, 아니 도화준 씨가 제대로 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제 나한테 그랬죠? 이 지옥에서 꺼내 달라고. 나는 그런 거 못 합니다.”

“……그게 무슨!”

화준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물기가 어려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시온이 천천히 다가가 화준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 시선을 제대로 맞췄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지옥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요.”

* * *

한참 몸을 뒤척이던 화준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환해진 방 안 풍경이 낯설어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화준은 화장대 의자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턱을 들어 이리저리 상태를 살폈다.

얼굴은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손톱에 긁혀 여기저기 생채기가 생겼고 뺨은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늘 끼시는 반지에 잘못 맞았는지 눈 밑에는 푸른 멍이 들었다. 휴, 화준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삶은 네 살 때부터 비틀려 있었다. 희미하게 남은 화경과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머릿속에서 각색에 각색을 거듭했다. 하지만 포인트는 정확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화준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떨어지는 순간 이 인생도 바닥에 나뒹굴었는지 모른다.

유아 시트가 따로 마련되지 않은 차량, 떨어진 장난감, 와앙― 우는 자신을 달래며 안전벨트를 풀던 화경의 하얀 손, 그리고 사고.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화준은 마른세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조여들어 흉통이 일었다.

‘그 지옥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요.’

공시온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 선택한 결혼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삶을 위한 투자였다. 이건 공시온과 상호 간 협의로 맺어진 계약이었다. 그리고 이 계약에 화준의 삶이 걸려 있었다.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으로 사는 삶. 그래서 더 절박하고 절실했다.

‘도화경의 삶이 아니라 도화준의 삶을 살고 싶지 않아요?’

‘…….’

‘이런 치마나 가발, 당신과 어울리지 않잖아요. 그쪽이 2년만 나에게 협조해 주면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시온의 말을 듣는 순간, 숨이 콱 막혔다. 평생 화경의 인생을 대신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고립되고 무기력한 삶, 이게 제 운명이라 믿었는데 그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그래서 2년을 허락했다. 도화경으로 사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자신하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 걸어 나오는 법을 알았다면 벌써 걸어 나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화준은 알지 못했다. 어떤 걸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혼자서 걸어 나올 수 있을까.

화준은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공시온은 제게 너무 어려운 숙제를 던져 주었다.

* * *

화준은 발목을 가리는 긴 원피스를 입고 소파에 앉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커다란 책장이 벌써 일곱 개나 들어갔는데 눈앞으로 책장 하나가 더 스쳐 갔다.

조금 전, 시온이 출근했음을 확인하고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한가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1층 현관에서 방문자를 알려 왔다. 화준은 응답도 하지 않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대충 가발을 뒤집어쓰고 손에 집히는 원피스를 입었다.

상처가 난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상황과 마주했다. 전화해 볼까……. 분명 편하게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게, 그것도 공시온과 통화를 하는 게 화준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네이비 슈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화준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시온의 비서였다. 박정혁……이라고 했던가. 결혼 전 이런저런 일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게 다 뭔지 아세요?”

“방 하나를 도서관처럼 꾸미라는 지시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도서관이요?”

“네, 세계 명작 동화부터 에세이, 만화, 역사, 정치, 여행, 요리, 자기 계발서까지 출판사 20여 곳에서 엄선된 도서들로 채워질 예정입니다.”

화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시온은 왜 갑자기 이런 기행을 선보이는 걸까. 뺨을 의식적으로 문지르며 가만히 책장들로 채워지는 방 안을 바라보았다.

정혁은 소리 없이 입을 벌려 숨을 마셨다. 속이 답답해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공시온과 어차피 안 되는 관계였다. 끝이 닿아 있는 관계를 이어 가면서 잠시 착각한 것뿐이라고 애써 마음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렇게 도화준을 막상 마주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정혁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 이 관계를 시작할 때 시온과 약속한 것이었다. 이 관계는 천천히 끝이 날 것이다.

정혁은 차분하게 공시온이 지시한 사항을 잠시 되새기고 말문을 열었다.

“배우고 싶은 게 있는지도 여쭈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박 실장이나 박 비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이제 집 안으로 카트에 실린 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십 권의 책을 힘겹게 나르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화준은 잠시 박 비서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방으로 가 음료수를 꺼내 잔에 따랐다. 사람 수대로 음료수를 따라 가지고 나온 화준의 눈동자가 잠시 방황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권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준은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혁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음료수를 권했다.

“박 비서님, 저는 방에 들어가 있을게요. 가실 때 노크 한 번만 해 주세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화준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나. 정혁은 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작업 상황을 점검했다.

화준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얼른 문을 열고 달려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집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화준은 슬리퍼를 끌고 도서관이라고 명명한 방문을 열었다. 와……. 화준의 입에서 순수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책은 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학교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뭐, 교과서를 제외하고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었으니……. 화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화준의 걸음이 오랫동안 동화 섹션에 머물렀다. 손을 뻗어 책을 꺼내려고 할 때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공시온이었다. 화준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화면을 밀었다.

“여보세…….”

- 지금 어머니께서 그쪽으로 가고 계세요. 빨리 준비해요!

다급한 목소리에 화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향했다. 얼굴을 두드리는 손놀림이 분주했다.

하, 미치겠네. 손톱자국이나 눈 밑 멍 자국은 어떻게 커버가 되는데 부어오른 뺨은 도무지 수습되지 않았다. 화준은 쓰고 있던 가발을 벗고 굵은 웨이브 가발을 착용했다. 핀으로 제대로 고정하고 머리카락으로 뺨을 가려 보았다. 어쩌지……. 화준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진짜 울고 싶어졌다.

화준이 거울 앞에서 사투를 벌이다 지쳐 널브러졌을 때, 집 안에 초인종이 울렸다. 1층 현관에서 온 호출이 아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인터폰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시온의 어머니가 보였다.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리고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준은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현관으로 다가가 잠금쇠를 풀었다.

“오셨어요.”

“잘 있었니? 얘!! 너 얼굴이 그게 뭐니?”

“아, 그게…… 그러니까…….”

화준의 손이 다급하게 뺨을 감쌌다. 역시 가발 따위로는 역부족이었다. 한 여사는 인상을 굳히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명령했다.

“당장 시온이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청천벽력 같은 말에 화준은 손톱을 질근질근 물어뜯었다.

한 여사는 들고 온 쇼핑백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집 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방문을 하나씩 열어 볼 때마다 그녀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2층까지 모두 둘러본 한 여사의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머니!”

2층 계단을 막 내려오던 한 여사와 헐레벌떡 뛰어온 시온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한 여사는 서둘러 달려온 시온의 얼굴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에 앉았다.

“말씀도 없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너에게 든든한 정보통이 있나 보구나. 내가 호출한 건 조금 전인데.”

“그건…… 후, 아무튼 어쩐 일이세요?”

한 여사는 앞에 나란히 서 있는 화준과 시온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략결혼이라는 게 집안과 집안 간의 결합이라 정작 결혼 당사자들은 사랑 없이 사는 게 대부분이긴 하나,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자신도 수 십 년 전 아무것도 모른 채 정략결혼을 했지만, 아이도 셋이나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지 않은가.

“각방 쓰니?”

“얼굴 보고 한 달 만에 결혼했습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결혼을 했으면 한방을 써야지. 그리고 화경이 얼굴, 왜 저러니? 시온이 네가 손댔니?”

“아니요!”

화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거실에 울렸다. 시온은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당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화준이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한 여사의 눈매는 가늘어진 채 시온에게 향해 있었다. 시온의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상황은 상상해 보지 않아서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널 그렇게 키웠니? 어디 여자한테 손을 대!!”

시온은 변명을 포기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 서 있는 화준이 더 전전긍긍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러다가 울겠네. 시온은 졸지에 아내 때리는 파렴치한 가정 폭력범으로 찍혀 약 30분간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 여사의 매서운 질책에 시온은 입술만 질근질근 물어뜯었다.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어머니, 저 다시 나가 봐야 해요.”

30분간 얌전히 잔소리를 듣던 시온에게 한계가 찾아왔다. 가정 폭력은 생각하지도 않고, 한 일도 없음에도 한 여사는 거듭 강조에 강조를 덧붙였다. 한 여사는 그제야 손목에 둘린 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며 시온에게 당부하고 몸을 일으켰다. 화준은 울상을 지으며 한 여사의 뒤를 따랐다.

신발을 신던 한 여사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짧게 용건을 말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1층에 있는 침대를 수거하라는 내용이었다.

“각방은 안 된다. 노력은 해 보고 각방을 쓰더라도 써야지. 결혼하자마자 각방이라니!”

화준의 절망한 얼굴을 보며 시온은 피식 웃었다. 거의 나라를 잃은 듯한 얼굴로 제 어머니를 바라보는 게 퍽 우스웠다. 시온은 화준을 위해서 나서 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가정 폭력범으로 찍혀 어머니께 잔소리를 들은 것이 억울해 입을 다물었다.

“반찬은 냉장고에 잘 넣어 뒀다가 챙겨 먹고. 화경아…… 시온이가 속 썩이면 전화하렴. 엄마가 혼내 줄게.”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한 여사가 화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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