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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계약 결혼 (4/19)

ㅇㄱㅁㄷ

Chapter 3 : 계약 결혼

결혼식은 생각보다 간소하게 치러졌다. 결혼을 앞두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방문했던 본가에서 화준이 알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던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시온은 차라리 잘됐다며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건 시온의 어머니였다.

웨딩드레스를 벗고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깔끔한 투피스로 갈아입었다.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문을 열자, 시온이 다가와 화준을 에스코트했다. 그가 허리를 감싸고 걸음을 늦추었다.

“여행 장소를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재단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아예 안 가는 건 뭐하고 가까운 국내 쪽으로 가는 걸로 합시다. 괜찮아요?”

“네, 전 괜찮아요.”

시온은 이야기를 마치고 멀지 않은 곳에 대기하고 있던 박 비서를 불렀다. 화준은 그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했다. 시온이 골라 놓은 드레스가 슬림한 디자인이라 아침을 걸러야 했다. 배고프다.

“화경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준이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거리에 도창현 사장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화준은 잠시 시온을 힐끗거리고 도창현에게 다가갔다.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예의상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미안하다, 화경아.”

“…….”

“화경아, 아빠 좀 도와 다오.”

“무슨 일이신데요?”

도 사장은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코끝까지 내려온 안경을 밀어 올리며 뜸을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인수 자금이 모자라. 모레까지 넣지 않으면 지금까지 공들인 게 모두 물거품이 된다. 네가 공 서방에게 말 잘해서 좀 도와 다오.”

다시 한번 자신이 왜 도화경으로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 상기했다. 화준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인상을 찌푸렸다. 돈에 자식의 인생을 팔아먹은 부모님이었다. 사람의 인생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아직도 원하는 게 있다니, 정말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최선을 다해 꾸역꾸역 치미는 화를 눌러 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질긴 끈을 제 손으로 끊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죽은 화경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꿈에 찾아와 구슬프게 우는 아이니까.

“아버지, 저한테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이 결혼까지예요.”

“화경아!! 아빠도 이러고 싶지 않아. 그런데 지금까지 공들여 놓은 게…….”

“장인어른, 무슨 일이십니까?”

불쑥 시온의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화는 중단되었고 도 사장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도 사장은 인상을 굳힌 채, 화준의 손을 붙잡아 손등을 두드렸고 화준은 대답이라도 하듯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우리 화경이, 잘 부탁하네.”

“제가 회사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저와 긴히 하실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고.”

시온은 정중하지만 날카로운 어조로 도 사장에게 말했다. 도 사장은 시온의 말에 움찔하곤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시온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도 사장을 바라보았다. 제 눈치를 살피는 늙은 살쾡이의 눈을 한 그의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시온은 도 사장의 배포만큼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 도화준에게 뭐라 은폐를 지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첫날밤이 지나면 도화준이 남자라는 사실이 까발려지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암묵적인 묵인을 원하는 건가. 이 결혼을 무슨 생각으로 진행시켰을까. 머릿속에 계속 의문으로 남아 제 호기심을 부추겼다.

아무리 약물의 힘을 빌려 육체를 여자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들 완벽하지 못했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화준의 몸을 훑으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화준은 멀어지는 도 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치가 떨리게 싫은 기분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불쾌함을 만들어 냈다. 욕심이 도를 넘어섰다. 도 사장은 공시온과 전혀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화준은 다시 한번 도창현을 설득했다. 자신의 인생은 망가졌을지 몰라도 적어도 모두를 속이는 결혼까지는 막고 싶었다.

‘화경아,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신체 접촉은 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남자라는 사실을 공 서방이 알면 안 돼.’

‘아버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이건 명백한 사기예요. 선우 그룹을 농락하고 사기를 치는 거란 말입니다. 들키면요? 그때는 어쩌시려고 이러세요.’

‘모든 일은 이 아비가 책임질 테니 너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버텨. 만약 네가 남자인 게 들킨다고 해도 크게 떠들지 못할 거다. 선우 그룹 이미지도 있을 테니.’

‘아버지!!’

‘공시온이 이 결혼을 하는 이유는 선우 그룹을 가지기 위해서다. 동생인 공시준을 견제하면서 작은아버지와도 겨룰 힘을 갖는 것. 그런 그가 비밀을 안다고 쳐도 섣불리 널 내치진 못할 게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그 집에서 널 빼낼 생각이다. 공시온도, 너도, 나도 모두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마.’

솔직히 말하면 화준은 아버지의 말을 믿었다. 누구도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일을 해결하겠다는 말을. 그런데 일을 해결하겠다는 아버지는 결국 자신에게 돈을 부탁했다. 뭘 기대한 건데. 화준은 자조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흠, 무슨 일인지 말 안 해 줄 겁니까? 꽤 심각해 보이던데.”

시온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화준은 본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며칠 지켜본 결과 본심과 다른 대답을 내놓으면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도 그는 못 느끼고 있지만 귀 끝이 붉었다.

“그냥 사적인 일입니다.”

“그래요? 그럼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일단 우리는 나갑시다.”

시온은 지금은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추궁해 봤자, 제대로 듣지도 못할 것이다. 화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 허기를 몹시 느꼈지만 제 아버지를 만나고 나니 식욕이 싹 가셨다. 이리저리 시온의 손에 끌려다니며 인사를 하고 나니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돌아다녔더니 발이 아팠다. 화준은 마지막으로 시온의 친구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1층에 기자들이 있을 겁니다. 표정 관리하고 내려요.”

“아직 끝난 게 아닌가 봐요.”

“곧 끝납니다.”

e게ma다

시온은 조금 지친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경호원들이 시온과 화준을 감쌌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시온은 의연한 표정으로 화준의 허리를 감싸고 경호원이 확보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화준은 플래시 불빛이 불편하고 불쾌했다. 그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번쩍거리는 빛이 눈에 닿을 때마다 뭔가 모를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시온은 결혼한 소감을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화준의 뺨에 짧게 입 맞추었다.

느긋한 시온에 비해 화준은 정신이 없었다. 이 지독한 불빛이 마음속 깊은 곳 무언가를 자꾸만 건드리고 있었다. 아……! 화준이 기어이 걸음을 멈추자, 시온이 그의 안색을 살피고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그걸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눈앞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하나씩 번식하는 것처럼 시야를 가득 채우고 제 눈앞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안 돼! 화준은 붙잡은 시온의 손이 마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죽을힘을 다해 꽉 쥐었다. 화준의 정신은 사고가 나던 차량으로 이미 끌려 들어갔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그게 마치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느껴졌다. 시온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재킷을 벗어 화준의 머리 위로 뒤집어씌웠다. 시야가 순식간에 까맣게 물들며 눈을 쏘던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쉴 새 없이 치받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경호원이 미리 열어 둔 차 문으로 화준을 밀어 넣은 시온은 잠시 자리에 서서 간단히 인터뷰에 응했다. 시온이 인터뷰를 마치고 고개를 숙이자, 경호원들이 넓게 자리를 확보했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였다. 시온은 차에 오르기 전 박 비서를 따로 불러 신성 건설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괜찮아요?”

차에 올라서도 재킷 속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던 화준이 인기척에 머리를 끄집어냈다. 약간 상기된 얼굴을 내민 화준은 재킷을 정리해 시온에게 내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감사합니다.”

화준은 제 움직임에 기민하게 신경 써 주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시온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화준은 요즘에도 주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트라우마적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곤란함을 겪었다. 지금도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 주치의는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심적인 부분에 기인한 트라우마라고밖에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화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쉬이 진정되지 않는 손을 꾹꾹 잡아 눌렀다.

“도화경 씨.”

“……네.”

“이제 당신의 보호자는 납니다. 당신 부모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는 거 제대로 알고 있으라고.”

시온은 화준의 손에 손가락을 얽어 넣으며 꽉 붙잡았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늘 가슴 한쪽 구석이 뻥 뚫려 바람이 숭숭 불어 시렸는데, 지금은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보호자, 참 묘하게 힘이 되는 말이었다.

“신발 벗어 봐요.”

“……왜……?”

화준이 발을 감추듯 시온의 반대 방향으로 모아 힘을 주었다. 시온은 작게 코웃음 치고 허리를 숙여 화준의 발목을 잡아다가 직접 신발을 벗겼다. 몸이 차 문 쪽으로 밀리며 두 다리가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화준이 다리를 내리려고 버둥거렸다. 그가 힘으로 발목을 잡아 눌렀다.

“당신이 힘으로 날 이길 수 있으면 움직여요. 그 대신 내가 힘으로 제압하면 그 뒤는 책임 못 집니다.”

시온은 신발을 마저 벗겨 조수석으로 아예 던져 버리고, 커다란 손으로 발바닥을 감싸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아……. 화준의 입 안에서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몇 시간을 딱딱한 하이힐에 갇혀 혹사당한 발이 시원함에 비명을 질렀다.

“앞으로는 단화 신어요.”

“하지만…….”

“그리고 이거.”

시온은 사이드 포켓에서 검은색 봉투 하나를 꺼내 화준에게 내밀었다. 화준은 의아한 눈으로 받아 들고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신용 카드 한 장과 수표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나한테 따로 연락이 오지 않는 카드니까 마음껏 사용해도 좋아요. 카드 한도는 없어요. 그러니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사요. 사치를 한다면 나야 환영이고.”

“아니요! 저는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넣어 두세요.”

“나, 공시온의 와이프답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으로 차고, 두르고, 입어요. 격 떨어지는 거, 난 못 봅니다. 이제 신성 건설의 장녀가 아니라 국내 재계 순위 5위, 선우 그룹의 맏 며느리이자 내 와이프라는 사실 잊지 말아요.”

입으론 날카롭게 일갈하면서도 그의 손은 화준의 발을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화준은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발을 빼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발목을 잡아챘다. 화준은 시무룩한 얼굴로 그의 손에 잡힌 발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카드는 잘 넣어 둬요. 그리고 주치의가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주치의요?”

화준은 금방 강 선생을 떠올렸다. 신성 건설의 전담 주치의를 맡았던 강학민 선생님의 딸이다. 강학민 선생이 지병으로 사망하며 자연스럽게 그녀가 화준의 전담 주치의가 되었다. 지적이며 단아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여성이었다. 처음에는 주치의가 바뀌었다는 소리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소탈하고 털털했다. 화준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사실 역시 미리 인지하고 있어 따로 입을 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화준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저 같이 공감해 주고 같이 아파해 줄 뿐이었다.

“뭐지, 그 황홀한 표정은?”

“네?”

화준이 화들짝 놀라며 열이 몰린 귀 끝을 손으로 문질렀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본인은 알지 못했지만, 눈앞에 있는 시온의 얼굴을 보니 굉장한 표정을 지은 모양이었다.

“주치의가 남자예요?”

“아니에요. 여자분이세요.”

“흠, 여자라……. 언제 상담이에요?”

“이번 주는 신혼여행 때문에 따로 상담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럼 다음 주 상담 때 동행하죠.”

시온은 묘하게 뒤틀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미간을 좁혔다. 황홀하다는 듯이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입매를 사르르 풀어내고 미소 짓는 모습에 배알에 뒤틀렸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부로 도화경은 공시온의 공식적인 와이프다. 제 바운더리로 들어온 순진하고 가녀린 짐승을 잘 키워 볼 생각이었다. 필요한 건 좀 가르쳐서 제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이왕이면 몸의 대화를 잘했으면 좋겠군.

시온은 맹한 얼굴로 오도카니 앉아 있는 화준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 *

시온은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박 비서가 메일로 보내 준 신성 건설에 대한 자료를 검토했다. 도창현은 부도 직전의 자동차 부품 회사를 탐내고 있었다. 규모로 보아 신성 건설이 가져가도 무리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자금이었다.

이리저리 은행권 대출을 알아보고 있는데 여의치 않은지 제2 금융권까지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태블릿 PC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담배를 빼 물었다. 신성 건설에 대한 문제는 조금 시간적 여유를 두고 생각해 볼 생각이었다. 먼저 뒤통수를 칠지, 아니면 일단 맞아 주고 시작할지. 시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매일 쳇바퀴 굴러가듯 똑같은 일상에 찌들어 있던 시온에게 드물게 찾아온 반가운 휴가였다. 일주일이 사흘로 반 토막 나긴 했지만……. 오늘은 재단 일이고 뭐고 다 잊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저기, 계속 전화가 오는 거 같아서요.”

몸을 돌리자, 흰색 샤워 가운을 입고 짧은 머리를 탈탈 털며 서 있는 화준이 보였다. 그가 내밀고 있는 손에는 자신의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담배를 비벼 끄고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넘겨받는 찰나, 그의 손목에서 짙은 절창을 발견했다. 시온은 그의 손을 붙잡아 당기며 손목을 확인했다.

“놔, 놔요!”

“무슨 상처예요?”

“알 거 없잖아요!!”

화준은 테라스 문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몸을 뺐다. 자신의 손에 감겨 있는 피부의 감촉이 선연해서 빨리 그 손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온은 집요하게 더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몸을 당겨 왔다.

“너, 정말 죽고 싶었구나.”

말 한마디에 문을 억척스럽게 붙잡고 있던 화준의 손에 거짓말처럼 힘이 풀렸다. 당기는 힘에 품 안으로 쓰러지듯 안긴 몸을 시온은 세게 끌어안았다. 상처에는 정말 죽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장난으로, 오기로, 허세로, 객기로 그은 상처와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죽을 마음을 담아 세게 그은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늘 화준의 손목에는 밴드형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걸 막연하게 액세서리로만 생각했는데 본질적인 이유는 이 짙은 상흔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놔주세요. 제발요.”

“내 옆에선 절대로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 2년만 악착같이 버텨요. 그다음에는 정말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으로 살게 해 줄 테니까.”

시온이 끌어안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품을 빠져나가 제 손목을 문질렀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였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네 살 때 그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화경을 살려 내고 안식을 얻는 일, 비극에 비극을 더한 공포는 삶의 의지를 앗아 갔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물러서다 보니 벼랑 끝이었고 화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흙먼지가 날리고 숨이 막혔다. 벼랑 끝에서는 떨어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그었지만, 죽지 못했다. 죽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비루한 운명이었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공시온을 노려보다가 이내 눈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여름 날 특유의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날렸다. 공시온과 함께 있으면 늘 예상치 못한 길에 불쑥 들어서고 만다. 늘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길을 걸었던 그의 삶이 공시온으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일탈 같아 후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위험했다.

“기분도 그런데 술이나 한잔합시다.”

“……술 못합니다.”

“내가 가르쳐 줄게요.”

시온은 선뜻 대답하고 화준을 끌어다가 거실 테이블 소파에 앉혔다.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그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가 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를 가득 채운 주종을 훑다가 무난하게 맥주를 선택했다. 평소 맥주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술을 못하는 화준과 어울려 간단하게 마셔 볼 생각이었다. 집어 먹을 마른안주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잔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거품 없이 깨끗하게 따른 맥주를 화준의 앞으로 밀었다.

“마셔 봐요.”

화준은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가 잔을 입가로 가져가 입술을 축이고 내려놓았다. 입 안을 시원하게 적시는 물기의 맛이 오묘했다. 시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제 잔을 채워 단숨에 마시더니 장난스럽게 머리 위로 잔을 털어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준이 조심스레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크게 심호흡한 화준이 단숨에 잔을 비워 내고 시온이 한 것처럼 잔을 머리 위로 털었다.

“잘 마시네. 어때요?”

“목이 좀 따가워요.”

입맛을 다시는 화준의 잔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 이번에는 서로 잔을 세게 부딪쳤다. 쨍강―. 컵끼리 부딪치는 마찰음에 조금 놀란 화준이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어느새 잔을 비우고 컵을 내려놓는 시온을 본 화준이 질세라 맥주를 단숨에 비워 냈다. 여전히 목구멍을 따갑게 자극하는 오묘한 맛이었다.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화준의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어느새 냉장고를 빼곡하게 채웠던 술이 동나고 바닥엔 둘이 모조리 마셔 버린 맥주병이 줄 세워져 있었다. 화준은 어지러운 기분에 소파에 길게 엎드렸다. 살면서 이런 일탈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실수를 하게 되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착실하게 지키며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술 한번 마셔 본 적이 없었다. 헤헤―. 화준은 자꾸 바보처럼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도 모르고 엎드려 손만 꼼지락거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시온이 화준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화준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몸을 돌렸다. 그 찰나, 화준의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던 천 조각이 올라가며 뽀얀 피부를 노출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화준은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시온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으며 시선으로 그를 희롱했다. 뭐, 술에 취한 사람을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근데 매끈하게 빠진 허벅지가 자꾸 시각을 자극했다.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화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장님, 그거 아세요?”

시온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눈으로 그의 뽀얀 허벅지를 핥듯 희롱했다. 짐승을 앞에 두고 순진무구한 매력을 발산하는 화준이었다. 아, 더럽게 꼴리네. 시온은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옮기며 반문했다.

“뭐요?”

“저는 이사장님이랑 하는 모든 게 다 처음이에요. 결혼도 처음이고, 이렇게 술을 마신 것도 처음이고, 또, 누가 나한테 신경을 써 준 것도 처음이었어요. 아! 저한테 입 맞춘 사람도 이사장님이 처음이에요.”

시온은 술기운에 볼이 빨갛게 물들어 헤실헤실 웃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랑 입 맞춘 게 싫었어요?”

무방비. 시온을 앞에 두고 화준은 말 그대로 무방비했다. 시선이 자꾸만 그의 하체에 닿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화준은 천진하게 웃었다. 시온은 자꾸 입이 마르는 기분에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아니요.”

“그럼 좋았어요?”

깊은 한숨을 푹 내쉰 시온은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는 말려 올라간 샤워 가운 자락을 끌어 내려 허벅지를 덮어 주었다. 머리로는 벌써 몇 번이고 그를 범한 주제에 겉으로는 신사인 척하는 꼴이 자신도 우스웠다. 시온은 이번엔 와인 냉장고를 열어 레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그러자 화준이 몸을 일으키며 눈을 반짝였다.

“아직 대답 안 했는데? 나랑 입 맞춘 게 좋았냐고 물었어요.”

“네.”

시선은 와인 병에 두고 감정 없이 대답하는 모습에 시온은 미간을 좁혔다. 술 못 마신다고 하더니…… 그는 아예 혀까지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잔에 절반 정도 와인을 채우고 화준의 앞으로 내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잔을 들어 입 안으로 쏟아부었다.

“맛있어요?”

“맛있는데 떫은 맛이 있어요.”

“더 줄까요?”

“네. 근데 더워요.”

방 안은 조금 서늘할 정도로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술기운이 오른 화준은 더운지 연신 땀을 흘리고, 몸을 옭아매는 샤워 가운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시온은 와인을 홀짝이며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매듭을 풀기 위해서 한참을 낑낑거리다 짜증을 냈다가 체념을 했다가. 시온은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얼굴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매듭을 확 잡아당기고 샤워 가운을 어깨 아래로 끌어 내리는 순간, 시온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하, 씨발. 진짜 좆 같은 것들.”

시온이 거칠게 욕을 뱉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약간 술기운에 풀려있던 정신이 확 돌아온 기분이었다. 하, 이제 도화준이 남자가 맞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정말 자신과 같은 게 붙어 있긴 한 것인지. 화준이 의식하지 않고 샤워 가운을 벗었을 때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약간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가슴 때문이었다.

응당 남자라면 한없이 평평하기만 해야 하는 그곳이 약간 도드라져 있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식을 희생시키고 멋대로 휘둘러 한 인간의 인생을 망쳤다. 서서히 변해 가는 몸을 보며 그가 느꼈을 상실감과 자괴감, 그리고 그때 죽지 못했다는 한탄 속에서 살았을 도화준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시온은 말없이 다가가 그의 흘러내린 샤워 가운을 제대로 여며 주고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화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강아지처럼 순진한 눈을 하고 바라보는 모습에서 애처로움이 묻어났다. 인간의 간악함에 희생당한 순진한 영혼이었다. 그것도 제일 믿고 의지해야 할 부모라는 족속에게.

“도화경 씨, 내 눈 똑바로 봐요.”

“……이사장님.”

“앞으로 2년 동안 도 사장 내외가 당신을 휘두르는 일, 절대로 없을 겁니다. 내가 그렇게 안 둘 거예요. 2년 동안 내 옆에서 살기로 했으니 이제 내 말만 믿어요. 절대 당신한테 해 끼치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요?”

단호한 그의 말을 곱씹으며 화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심장을 세게 두드리는 묘한 울림이 잔잔한 파동으로 이어져 뇌까지 진하게 번졌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화경이 죽은 이후로 이렇게 따뜻하고 걱정스러운 눈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이사장님.”

“……?”

“저, 잘할게요. 잘해 볼게요. 뭐든 가르쳐 주시고 알려 주시면 제가 다 해 볼게요.”

* * *

화준은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에 수면에 젖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머리를 강타하는 지독한 두통에 신음할 새도 없이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무게감에 몸을 뒤틀었다. 으…… 무거워. 눈을 몇 번 깜박여도 사방은 캄캄하고 따뜻했다.

화준은 눈을 반쯤 감고 손을 뻗어 막혀 있는 벽을 더듬었다. 그런데 몰캉한 느낌이 손끝에 닿았다. 어? 화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자, 매끈하게 빠진 목덜미가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벽이 아니라 공시온의 가슴팍이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소리를 죽였다.

시온이 깰세라 몸을 조심히 움직여 고개를 빼냈다. 시야 가득 공시온의 얼굴이 들어왔다. 부드럽게 흩어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리고 풍성한 속눈썹이 가지런히 내린 얼굴이 너무 근사해서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잘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한 얼굴이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었다.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부드럽게 흩어지는 머리카락에 작은 미소가 달라붙었다.

“아침부터 이러는 거 곤란한데.”

시온이 눈을 뜨고 순식간에 화준의 몸 위로 올라왔다. 이불을 걷어 내고 올라온 몸은 드로어즈 한 장만 달랑 걸친 채였다. 머리 양쪽 옆을 짚은 손에서 어깨까지 도드라진 근육이 눈에 보였다. 화준은 멍한 눈으로 시온의 단단한 육체를 훑었다.

“잘 잤어요?”

“네. 이사장님도 잘 주무셨어요?”

“아니요. 난 잘 못 잤어요.”

“왜요? 잠자리가 불편하셨어요?”

시온은 고개를 약간 숙여 화준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하체를 화준의 몸쪽에 세게 문질렀다. 어? 화준은 눈을 크게 뜨고 생경하게 닿는 감촉에 몸을 굳혔다. 시온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다시 한번 하체를 둥글리듯 문질렀다.

“내가 도 닦는 기분으로 밤을 보냈다고.”

“왜요?”

화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시온은 화준의 하체를 가리고 있는 이불을 완전히 걷어 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어설프게 닿아 있던 하체가 완전하게 닿아 딱딱한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화준은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혼자 푹 잔 소감이 어때요?”

“…….”

화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머릿속에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이 온통 살색이었다. 음습한 공시온의 목소리가, 귓가를 뜨겁게 적시는 야한 숨이 제 머릿속을 야금야금 뜯어 먹었다. 화준은 베개 밑으로 얼굴을 밀어 넣고 울상을 지었다.

어젯밤, 레드 와인까지 홀짝이던 화준은 기어코 샤워 가운을 벗어 던졌다.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와인 잔을 홀짝이는 모습을 보며 시온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술기운에 몸이 약간 달아 성욕이 위험하게 넘실거렸다. 그리고 눈앞을 꽉 채우고 있는 화준은 무방비했다.

시온은 혀를 내어 입술을 야릇하게 핥았다.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성욕을 풀어 볼 생각은 없었다. 뭐, 그런 쪽에 취미도 없고. 그런데 무방비 상태인 그는 왠지 묘하게 성욕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새까만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면 확 잡아먹고 싶달까? 도화준 본인이 얼마나 위험한 짐승 앞에 가녀린 자태로 앉아 있는지 전혀 인지 못 하고 있었다. 시온은 손톱으로 와인 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화준은 아는 것도 없고 성적 자극에 대해서는 무지할 정도였다. 술에 취해 멋모르고 접해 본 마약처럼 한 번쯤 자의식이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성을 느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시온은 와인을 홀짝이며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몸뚱이를 훑었다. 쾌락에 젖은 얼굴은 얼마나 야할까. 정액을 뒤집어쓰고 야하게 울어 대는 그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시온은 잔에 남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고 화준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많이 더워요?”

“네에.”

정말 술에 취했는지 화준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다시 와인 병을 들어 잔을 채우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화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혔다. 시온은 그의 몸을 천천히 당겨 제 몸에 기대게 했다. 화준은 의외로 순순히 몸을 기대어 왔다. 나른한 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이거 맛있어요. 막 달아요.”

시온은 연신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는 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화준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 넣으며 천천히 몸을 어루만졌다. 동그란 어깨를 시작으로 잘록하게 떨어지는 허리선을 돌아 호르몬제의 영향으로 약간 도드라진 가슴까지 거침없이 몸을 훑었다. 화준은 와인을 홀짝이며 몸을 뒤척였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몸이 손바닥에 착착 감겼다.

“어때요, 기분이 이상해요?”

“……음, 이상한데 좋아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그를 관찰하던 시온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술에 취한 화준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시온은 화준의 손에서 와인 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시온은 드러난 뒷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화준의 허벅지를 넓게 벌려 안쪽의 여린 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힛, 간지러워, 요오―.”

입가가 느슨하게 풀려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는 그의 몸을 고쳐 잡았다. 겨드랑이 사이로 한 손을 밀어 넣어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넣어 매만졌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숙여 젖꼭지를 희롱하는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또 이런 적은 처음이네. 시온은 속으로 작게 웃으며 보란 듯이 젖꼭지를 꾹 눌렀다가 놓고 집게손가락으로 둥글렸다.

시온은 개인적으로 버진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속된 말로 닳고 닳은 쪽이 취향이라면 취향이었다. 뭐, 누가 몇 번을 쑤셨든 간에 구멍은 구멍일 뿐이었다. 이왕이면 닳고 닳아 테크니컬하고 문란해서 제 성기를 수월하게 물어 줄 구멍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섹스라는 게 상호 간의 쾌락을 얻자고 하는 행위인데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뭐, 지금은 삽입까지는 아니고 정액이 쥐어짜지는 기분이 어떤지만 조금 맛보여 줄 생각이었다.

젖꼭지를 희롱하던 손을 천천히 내려 브리프를 살짝 걷어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브리프 아래에 또 다른 천 조각이 제 손을 막았다. 시온은 의아한 얼굴로 아래를 더듬었다. 성기와 불알 두 쪽을 타이트하게 조이고 있는 천 조각을 매만지자, 화준이 기겁하며 허리를 뒤척였다.

“하, 하지 말아요!”

“쉬이―. 괜찮아요.”

시온은 뒷덜미를 혀로 핥으며 화준을 진정시켰다. 술에 취한 몸이 자극에 버티지 못하고 풀썩 기대어 왔다. 시온은 브리프 사이에 파묻은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목덜미를 진득하니 물었다가 놓으며 온 신경은 손끝에 집중했다. 그리고 손가락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은밀한 구멍 위를 더듬었을 때 그 위에 얇은 끈이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뭐지? 손에 닿는 감촉만으로 형태를 알아채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화경 씨, 내가 기분 좋게 해 줄게요. 엉덩이 좀 들어 볼래요?”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 넣으며 천천히 말을 뱉어 내자, 화준이 얕게 신음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바람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이를 세게 박아 넣고 빨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천천히 화준을 달래며 브리프에 손가락을 걸어 슬슬 끌어 내렸다.

“하, 이거였군.”

시온은 인상을 쓰며 골반 아래를 조이고 있는 천 조각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겼다. 브리프 아래에 감춰져 있는 건 다름 아닌 여자 속옷이었다. 그것도 T팬티라고 불리는, 앞을 간신히 가리는 형태였다. 그것도 따로 특수 제작된 천이 불알과 성기를 제대로 감싸 조이고 있었다.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어도 그의 성기가 도드라지지 않는 이유. 이렇게 아래를 조여 대고 있으니, 쯧.

시온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정말 도화준의 삶을 상상하려고 해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알면 알수록 지독한 늪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거 벗겨 줄까요?”

“흐읏, 내가 벗을래요. 답답해.”

화준의 손이 아래로 향하는 걸 진득하게 바라보며 귓바퀴로 혀를 밀어 넣어 헤집으며 집요하게 그의 정신을 빼앗았다. 이미 타액으로 범벅되어 물기 어린 소리를 내는 귀를 빨고 깨물었다.

“흐읏! 아, 이상해, 요. 읏.”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날카로운 신음을 내지르는 화준은 지독스럽게 외설적이었다. 스스로 속옷을 벗고 숨을 할딱거리자, 시온은 거침없이 그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아―!! 화준이 갑작스러운 자극에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시온은 그를 달래면서 천천히 손을 움직여 성기를 자극했다.

말랑한 살덩이에 불과하던 것이 서서히 힘을 받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귀두를 덮고 있는 껍질을 밀어 올려 요도 구멍을 손톱으로 긁었다. 제 입에서 야릇한 소리가 나오는 게 익숙하지 않은 화준은 어느새 팔뚝을 입으로 물고 가까스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고 있었다. 시온은 화준의 하체를 더 당겨 몸을 밀착했다. 미끈한 쿠퍼액이 흘러나와 성기를 적시고 제 손을 적셨다.

화준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늘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그가 타인의 손에서 사정하는 얼굴은 어떨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화경 씨, 다리에 힘줘 봐요.”

“으윽, 아, 안 돼!”

“내가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말고 일어나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울상을 짓는 그의 몸을 억지로 지탱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시온의 손에는 그의 성기가 잡혀 있었다. 천천히 문지르며 그가 스스로 걷도록 종용했다. 힘겹게 몇 걸음 걷던 화준은 갑자기 사정감이 몰려오는지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성기가 손아귀에서 작게 떨렸다.

시온은 조급함이 일어 허리를 감싸 그대로 들어 올렸다. 침실 문을 열고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화준의 몸을 내려놓았다. 커다란 거울이 그의 음란한 자태를 비추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느낌에 시온은 미간을 찌푸리고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여성의 몸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성의 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오묘한 몸이었다.

표피를 밀어 올리고 귀두를 내놓은 그곳은 온통 분홍색이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색이 고왔다.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몸을 떨어 대는 모습에 아랫배가 빠듯하게 조였다. 손에 약간 힘주어 쥐며 빠르게 흔들자, 화준이 허리를 약간 숙여 저릿하게 퍼지는 사정감을 애써 억눌렀다.

“이, 이사장, 흣, 님! 저, 오줌이 마려운 거 같아요. 흣, 놔, 놔주세요.”

아랫배 근육이 잔뜩 물려 금방이라도 사출할 것 같은 기색이면서 사정과 요의를 구분하지 못한 그는 바들바들 떨었다. 허리를 감싸 제 손을 뿌리치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그를 단단히 붙잡고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날카로운 교성이 방 안에 울렸다. 거울 속에 담겨 있는 도화준은 미치도록 색정적이고 음란했다. 숨이 짙어지고 체향 역시 땀과 묘하게 섞여서 야하게 풍겼다.

“흐읏! 흐, 아, 안 돼!”

정직한 육체가 정신을 배반하고 사출을 시작했다. 점도 높은 뿌연 정액이 시온의 손바닥에 쏟아졌다. 단단하게 몸을 지탱하던 손에 힘을 풀자, 화준의 몸이 스르륵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시온은 탈력감에 힘겨운 숨만 색색 내쉬는 화준의 얼굴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화준은 고운 얼굴에 정액이 덕지덕지 처발린 채 새까만 눈동자를 들어 시온을 바라보았다. 욱신―. 뱃가죽뿐만 아니라 안을 채우고 있는 장기들이 모두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시온은 화준의 어깨를 그대로 눌러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매끈하게 빠진 다리를 잡아 한 번 꼬아 고정하고 허리춤을 풀어 헤쳤다. 아까부터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드로어즈 안에 갇혀 괴로움을 쏟아 냈다. 한 치의 틈 없이 붙은 허벅지 위로 손에 잡히는 화장품을 쏟아부었다. 화장품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시온의 이성은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다.

미끈하게 발린 허벅지 사이로 제 성기를 꺼내 밀어 넣었다. 뽀얗고 부드러운 허벅지를 벌리고 유연하게 미끄러졌다. 삽입을 한 것도 아닌데 마치 그의 은밀한 곳에 성기가 파묻힌 기분이었다. 온몸에 피가 들끓어 올랐다. 눈에도 열기가 몰리고 하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연한 살을 가르고 우람한 성기가 빠르게 안쪽으로 사라졌다가 빠져나왔다.

“흣, 뜨거워, 요. 으윽.”

시온은 몸을 바르작거리며 힘겹게 신음하는 화준의 몸에 몸을 겹치고 추삽질을 이어 갔다. 비록 은밀하고 좁은 구멍은 아니었지만, 이걸로 충분히 절정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흥분의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몸을 길게 겹쳐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허벅지의 연하고 보드라운 살이 성기를 훑어 낼 때마다 지독한 쾌감에 몸이 요동쳤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애처로운 신음만 쏟아 내는 얼굴을 붙잡아 혀를 붙였다. 시큼하고 비릿한 액체가 혀에 달라붙었다. 혀로 얼굴을 핥아 그의 정액을 빨며 허리를 흔들었다. 아아―! 아랫배를 잔뜩 조이며 치미는 사정감에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으, 으―!!

뜨거움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단박에 치고 올라와 순식간에 정신을 집어삼켰다. 이런 가벼운 행위에 제 몸이 나자빠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정직했고 단순했다. 지글지글 끓어 대는 성욕에 시온은 입술을 짓씹고 욕을 갈겼다. 뽀얀 허벅지 위로 정액이 왈칵 쏟아졌다. 시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귀두를 살갗에 문질렀다. 피부가 마찰해서 일어난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허벅지에 하얀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시온은 허벅지에 쏟아진 정액을 손바닥에 적셔 화준의 얼굴에 문질렀다. 두 사람의 정액으로 범벅된 얼굴을 보며 시온은 다시 아랫배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심상치 않은 물건을 손에 넣은 게 분명했다. 고작 이런 가벼운 페팅으로 정액을 싸지를 줄이야. 시온은 자조했다.

“야하네.”

“흐, 끈적, 거려요.”

“그렇게 맹한 얼굴로 사람 꼴리게 하지 말고 눈 똑바로 떠요.”

“흐, 무거워, 요.”

“대답해. 다음에는 이렇게 가벼운 페팅으로 안 끝난다고. 알겠어요?”

시온은 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어깨에 이를 세워 물기도 하고 등을 빨아 진한 흔적을 남겼다. 속을 채우는 뜨거운 열기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미칠 것 같은 기분에 그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 한 번 더 허벅지에 사정했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성욕에 허덕였다. 벌써 두 번이나 사정했음에도 아랫배는 잔뜩 조이고 아릿한 아픔을 만들어 냈다.

시온이 성욕에 피가 마르든가 말든가 화준은 술기운과 깊은 탈력감에 평온하게 눈을 감고 새근새근 숨을 내쉬었다.

* * *

시온은 서울로 돌아가는 일정을 조금 앞당겼다. 그 때문에 화준은 이른 새벽부터 단장을 해야 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다섯 시간이나 이른 서울행이었다. 화준은 거울을 힐끗거리며 시온의 얼굴을 살폈다. 재킷은 걸치지 않은 베스트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신문을 손에 들고 있었다. 공시온은 새벽 6시에 기상해서 가벼운 운동을 한 뒤 8종에 달하는 신문을 모두 정독했다. 차곡차곡 접혀 쌓여 가는 신문을 물끄러미 구경하며 그의 금욕적인 얼굴을 훔쳐보는 게 퍽 흥미로웠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그는 제법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왜, 할 말 있어요?”

화준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얼른 돌리고 화장품 하나를 집어 들고 얼굴로 가져갔다. 허둥지둥거리는 손에 화장대에 올려놓은 펜슬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공시온은 신문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여 제 발밑으로 굴러온 펜슬을 집어 들었다.

“좀 서둘러 줬으면 좋겠는데.”

“네네.”

시온은 몸을 일으켜 펜슬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다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준비를 마친 화준이 몸을 일으키자, 시온도 신문을 접어 한쪽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울로 향하는 내내 그는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심기가 불편한 것 같기도 해서 화준은 눈만 데굴데굴 굴려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땐 당연히 그의 비서실 직원들이 전용 차량을 대기시켜 놓고 기다릴 줄 알았으나, 화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둘은 직접 캐리어를 끌어 택시에 올랐으며 신혼집까지 이동했다. 화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때문에 점점 조바심이 났다. 잘못한 게 있다면 이야기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그는 굳은 얼굴로 태블릿 PC만 쳐다봤다.

“며칠 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집에 못 들어올 겁니다.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지내고 있어요.”

“네, 다녀오세요.”

“양가 인사는 다음 주에 가기로 했습니다.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온은 캐리어만 신혼집 현관 앞에 내려놓고 미리 준비해 둔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화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집에서 하루 종일 게으른 베짱이처럼 배를 두들기면서 놀아도 되고 뭘 해도 좋은데 딱 하나.”

“……?”

“내 허락 없이 당신 부모는 만나지 마요. 들을 이야기라곤 돈 이야기밖에 없을 텐데, 그건 내 선에서 처리하죠. 아, 휴대폰 줘요.”

화준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무런 저항 없이 휴대폰을 꺼내 시온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으로 들어간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 화준이 얼른 주저앉아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시온이 발을 들어 휴대폰을 구둣발로 찍었다.

와작―. 화면이 박살 났다. 그 뒤로도 두어 차례 발을 움직여 휴대폰을 밟았다. 화준은 눈앞에서 망가져 가는 휴대폰을 멍한 얼굴로 지켜봤다.

“아, 이런. 쓰레기가 됐네.”

“일부러 그러신 거잖아요.”

“맞아요.”

조미료가 가감되지 않은 담백한 대답에 화준은 눈을 크게 뜨고 기함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시온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요.”

“왜…….”

“내 개인 휴대폰이에요. 결혼하면서 바꾼 거라 번호를 아는 사람이라곤 아버지와 어머니뿐입니다. 당분간 그걸 사용해요. 내 전화에 당신 부모 전화번호 올리지 말고. 알겠어요?”

화준은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길게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시온은 화준의 침묵을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휴대폰을 그의 손에 쥐여 주고 현관문을 열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시온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속을 데우는 은근한 열기에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 모든 문제는 도화준에게 제 성욕을 쏟아 낸 다음부터 생겼다.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눈을 보는 것부터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간악하고 속이 검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보기에는 너무 순수하고 맑아서 속이 뒤틀렸다.

차라리 뱃속까지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그의 부모처럼 그도 그랬다면 이렇게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텐데. 시온은 쓰게 웃었다. 속을 데우는 이 지랄맞은 열기부터 잠재워야지 다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온은 직접 차를 몰고 한 주상 복합 아파트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손목에 둘린 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 8시 10분. 시온은 지갑 속 시큐리티 카드를 꺼내 현관에 접촉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이, 이사장님.”

문을 열자, 단정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정혁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시온은 정혁의 타이를 잡아당겨 현관에 세게 밀고 그대로 입술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정혁은 고집스럽게 입을 벌리지 않고 시온의 몸을 밀어 냈다.

“입 벌려.”

“이사장님, 윽! 제 의사는 충분히 전달한 걸로 압니다. 이 관계를 끝내고 읍!”

시온은 정혁의 턱을 세게 쥐고 혀를 밀어 넣었다. 정혁은 온몸으로 저항하며 시온을 밀어 냈다. 거센 저항에 잠시 몸을 물린 시온이 흉흉한 눈빛으로 정혁을 바라보았다.

“비켜 주십시오. 출근해야 합니다.”

“네 보스는 나야. 내가 여깄는데 무슨 출근. 구멍이나 제대로 벌려. 그 입에 내 혀가 아니라 좆 물리기 전에.”

* * *

어둑어둑한 저녁이 다 돼서야 간신히 시온이 정혁의 몸에서 떨어졌다. 미끈한 액체로 범벅된 흉물스러운 성기를 몸에서 빼내자 기절한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대충 티슈를 뽑아 닦아 내고 갈무리한 시온은 시각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빼 물고 천천히 목록을 확인했다. 속을 빠듯하게 채우던 지독한 성욕이 가라앉자 머리도 한결 가벼워졌다. 손가락을 슬슬 움직이며 화면을 보고 있던 시온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침대로 기어 올라가 정혁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일어나.”

“으…….”

정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목구멍에 심한 이물감을 느끼고 거세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쿨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구멍에 들끓고 있는 액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정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듯이 달려들어 제 구멍이란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쑤시고 좆을 물린 미친놈이었다.

욱―. 매스꺼움에 입을 틀어막고 욕실을 향해 달리려 했지만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려놓자마자 몸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입 안에 고인 희멀건 액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저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유려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시온이 다가와 정혁의 몸을 부축했다. 하지만 정혁은 그의 손을 강하게 쳐 내고 엉금엉금 기어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하얀 엉덩이를 보자니 억눌러 놓은 욕구가 똬리를 풀어내고 뱃가죽을 조였다. 시온은 무방비하게 풀려 있는 그의 뒤를 구경하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욕실에 당도한 정혁이 변기통에 고개를 처박고 구역질을 했다. 희멀건 액체가 입 안에서 흘러나와 물을 흐렸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이 관계가 진절머리나게 싫었다. 그가 주는 쾌락에 힘없이 휘둘린 기분은 참담했다. 머리는 그를 밀어 내지만 몸은 그러질 못했다. 시온은 욕실 문턱을 밟고 정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혁은 입가에 묻은 기분 나쁜 액체를 손등으로 닦아 내고 변기 레버를 내렸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물이 내려가는 걸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혁아.”

“왜?”

“후회하냐?”

후회? 단어를 입 안에서 굴리며 정혁은 쓰게 웃었다. 이 관계에 대해서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 의무는 보스인 공시온에게 아주 작은 티끌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리는 것이었다. 이 일도 충성심에서 비롯된 행위에 불과했다. 7년간 관계를 이어 오면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늘 제 몸에만 발정하던 그의 곁에 자신이 아닌 타인이 머무르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도화준이 눈앞에 뿌옇게 끼어 있던 안개를 걷어 내고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감정, 자신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 뜨거운 감정이 제 심장을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그래, 후회해.”

시온이 욕실화도 신지 않고 맨발로 욕실 바닥을 밟았다. 허리를 숙여 변기통에 기대어 있는 정혁과 시선을 맞추었다.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올곧게 시온을 담아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후회한다.”

시온의 말에 정혁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후회한다는 말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팠다. 정혁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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