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 조율 (3/19)

Chapter 2 : 조율

시온은 책상 위에 다리를 꼬아 올리고 아침나절 박 비서가 가지고 온 서류를 집어 들어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도화준과 도화경에 대한 자료였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길수록 내용은 흥미로웠다. 도화준은 4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걸로 신고가 되어 있었다. 사고 이후 화경은 은둔형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학교는커녕 사회 활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사고 충격으로 몸이 약해 사교 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위장막도 적당히 쳐 두었다. 철저하게 도화경은 베일에 싸인 채 쉬쉬대어 왔다. 오죽하면 유명한 강남 뚜쟁이조차도 도화경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 시온은 서류를 내려놓고 내선을 눌러 박 비서를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 비서가 옆구리에 서류철 하나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내일 조간신문에 나갈 기사 내용입니다.”

시온은 서류철을 받아 대충 책상 위에 던져 두고, 화준에 대한 자료를 손으로 밀었다.

“생각보다 내용이 빈약해서 읽을 만한 게 없더군요.”

“죄송합니다, 워낙 폐쇄적인 집안이라. 다른 루트로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시온은 서랍에서 4등분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박 비서 앞으로 밀었다. 박 비서는 종이를 집어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머리꼭지가 계약서로 시작되는 종이였다. 박 비서의 시선이 잠시 종이에 닿았다가 시온을 바라보았다. 시온은 까슬한 수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여상하게 웃었다.

“변호사 통해서 서류 작성하고 두 통 준비하세요.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세요.”

“……이 결혼, 진행하실 겁니까?”

시온은 대답 대신 조간신문에 실릴 기사가 들어 있는 서류철을 펼쳤다. 굵은 글씨로 인쇄된 문장을 눈으로 훑었다.

「재벌 스캔들 KNN 의료 재단 공시온 이사장 열애! 상대는 신성 건설 고명딸 도화경.」

굵은 글씨 아래에는 시온과 화준이 함께 우산을 쓰고 걷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시온은 담배 케이스를 집어 담배를 꺼내 물고 몸을 일으켰다. 박 비서가 약간 옆으로 비켜섰다가 이내 시온을 따라 소파 테이블 쪽으로 이동했다.

“정혁아.”

박 비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렇게 공적인 시간에 시온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그들은 명백한 갑과 을의 관계였다. 옛날부터 정혁의 집안은 시온의 집을 보필해 온 비서 집안이었다. 정혁은 인상을 작게 쓰고 그의 왼쪽에 앉았다.

“아직 업무 시간입니다.”

“넌 이 사람이 여자 같아 보여?”

“비서에게 묻는 겁니까, 아니면 친구 박정혁에게 묻는 것입니까?”

“둘 다.”

시온은 담뱃재를 재떨이에 떨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박 비서는 머릿속으로 도화준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누가 봐도 완벽한 여자의 몸이었다. 분명 도화경은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그는 도화준이 아니라 도화경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 두 눈을 몇 번이나 비비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는 완벽에 가까웠다. 여장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여자 같아 보였다. 정혁은 입술을 물었다가 놓고는 말했다.

“송구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나는 이 결혼을 딱 2년만 유지할 생각이고, 그사이에 선우 전자를 비롯한 선우 몸통을 내 손아귀에 넣을 생각이야. 그러려면 도화준이 필요해.”

“다른 방법도…….”

“마른 길이 있는데 굳이 진흙 길로 가는 건 무모하잖아.”

“……주제넘지만 이 결혼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신성 건설 도 사장과 그의 부인은 아들을 딸로 둔갑시켜 키울 만큼 야망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2년 결혼 생활이 무난하게 끝난다고 해도 문제가 될 여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화준 역시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모르고요.”

시온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박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정혁은 주위를 의식하면서도 소파에서 내려와 익숙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시온은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놓고 지그시 시선을 내렸다. 뺨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손이 단정하게 조여 있는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정혁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평온한 얼굴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너, 질투하냐.”

“……아니야.”

“그럼 이 관계가 박살 날까 봐 두려워?”

“시, 시온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의 관계도.”

시온의 손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성적인 뉘앙스를 품자, 정혁이 그의 손을 밀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시온이 순순히 몸을 물려주며 피식 웃었다. 늘 단정하고 금욕적으로 보이던 정혁의 얼굴이 지금은 느슨하게 풀려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시온은 정혁의 팔을 강하게 낚아채고는 반대편 소파로 몸을 쓰러뜨렸다. 소파에 쓰러지듯 몸이 무너진 정혁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야차같이 덮쳐 오는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혁의 손에 얽혀 있는 손가락이 마치 족쇄처럼 느껴졌다.

* * *

화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재벌가의 스캔들이라며 시온과 화준의 열애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던 그날, 선우 그룹은 두 사람이 내달 결혼 예정이라며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결혼식은 급물살을 탔다. 이미 방에는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가 한쪽 벽에 걸려 있었고, 서랍 속에는 시온의 비서가 집에 찾아와 도장을 받아 간 계약서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화준은 서랍을 열어 깊숙이 넣어 둔 봉투를 꺼냈다. 4등분으로 정확하게 접혀 있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갑은 공시온이었고 을은 도화준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이름이 쓰인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미 죽어 버린 번호지만 도화준의 주민등록번호도 적어 넣었다. 도화준……. 아련하게 가슴속에 남아 있는 이름이 자꾸만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건 선우 그룹을 상대로 벌이는 엄청난 사기극이었다. 만약 이걸 공 회장이나 공 회장 부인이 알게 된다면 신성 건설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이 결혼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공시온도 그걸 원하지 않았다.

‘이건 무모한 일입니다. 하루면 발각될 일이에요. 지금이라도 멈춰 주세요.’

‘이렇게 대대적으로 보도가 됐는데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선우 그룹에서 과연 네 정체를 안다고 해서 널 어떻게 할까? 아니, 공시온부터 쉬쉬거릴 거다. 속아서 결혼했다는 일이 알려지면 공시온한테도 치명타가 될 테니까. 넌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정략결혼이라 너한테는 관심이 없을 거다.’

서로의 목적에 의해 철저히 희생당하고 있는 건 바로 도화준이었다. 화준의 인생은 이미 오래전에 부모님께 저당 잡혀 있었다. 그 사고가 나던 날부터 지금까지. 화준은 책상 위에 올려진 작은 액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화준과 화경이 네 살 때 찍은 사진이었다. 장난감 하나를 두고 둘이 티격태격하다가 화준이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 사진이었다. 화경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막연하게 차오르는 그리움이 눈물방울이 되어 흘렀다. 보고 싶다, 도화경.

―똑똑.

노크 소리에 화준은 다급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후, 길게 숨을 내쉬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어? 화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문 앞에는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어떻게…….”

“왜 전화 안 받아요? 몇 통이나 했는지 압니까.”

시온은 짜증스럽게 타이를 당기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함께 식사하고 난 뒤 꼬박 보름만이었다. 화준은 그를 보자마자 짧은 입맞춤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얼마나 곤혹스러웠던지.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니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로 말을 뱉었다.

“난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서 삽니다. 이런 일로 내가 직접 움직이게 하지 마세요.”

“죄, 죄송합니다.”

“휴대폰 어딨어요?”

화준이 허둥지둥 베개를 들어 올려 그 아래에 깔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밝히자 ‘부재중 전화 24통’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낭패감에 귀까지 붉게 물들었다. 자기 전에 무음으로 돌려놓은 게 화근이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화준을 보는 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군.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어떤 준비를 말씀…….”

“풀 세팅하려면 어느 정도 걸리냔 말입니다.”

“하, 한 시간 정도요.”

서슬 퍼런 목소리에 화준은 주눅이 들었다. 왜 갑자기 나타나서 화를 내는지,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주눅이 들어 목을 쑥 집어넣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시온은 부아가 치밀었다. 주 4회씩 스피치 강사를 붙여 놨음에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준비하고 나와요. 차에서 기다릴 테니까.”

“네.”

화준은 빨리 공시온이 이 방에서 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눈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쪼그라들어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시온이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붙잡자, 화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순간 화준은 깊은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시온은 차에 올라 담배를 연달아 피워 물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공 회장이 갑자기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며 연락해 왔다. 그것도 도화경을 참석시키라는 명령이었다. 결혼 전 얼굴이라도 보고 며느리를 맞고 싶다는 공 회장의 고집에 시온은 예정되었던 스케줄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화준 때문에 일정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박 비서, 병원장 미팅 취소하고 내일 다시 잡도록 하세요.”

“9시 미팅 약속이라 그때까지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정은 이미 다 채워진 상태라 여유가 없습니다.”

“언제부터 내 말에 토 달았습니까.”

“알겠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조율해 보겠습니다.”

시온은 이래저래 예민한 상태였다. 결혼식이다 뭐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고, 거기에 따라붙는 축하가 매우 성가셨다. 결혼식에 신혼여행까지 다녀오려면…… 일주일 정도 공백이 생기는 터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피곤함에 질려 버린 눈이 뻑뻑함을 호소했다.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요즘이었다.

“사모님 나오십니다.”

“사모님?”

“공식적인 호칭이 될 겁니다.”

시온은 코웃음 치며 차 문을 열고 내리는 박 비서를 바라보았다. 짙은 감색 슈트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정중한 태도로 뒷좌석 문을 여는 그는 누가 봐도 신사였다. 저런 금욕적인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을 시온은 알고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아랫배가 확 조이는 듯한 느낌에 인상을 작게 찡그렸다. 화준이 차에 오르고 뒷좌석 문이 닫히자 그제야 시선이 화준에게로 옮겨 갔다. 하얀색 원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제법 화사해 보였다.

“평창동 본가로 모시겠습니다.”

박 비서가 천천히 가속 페달을 밟으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시온은 피곤함에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잠깐 눈이라도 붙일 셈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뭐가 이렇게 강렬한지 얼굴이 뚫릴 지경이었다. 시온은 눈도 뜨지 않고 물음을 던졌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

“할 말 있으면 해요.”

“아, 아, 아니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라고 부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시온은 속으로 혀를 찼다. 결국,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매만졌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목소리까지 떠는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본가에 도착하려면 족히 30분은 걸릴 테니 시간을 충분했다.

“왜 그렇게 떨어요?”

“아뇨, 저는, 괘, 괜찮습니다.”

“도화경 씨,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요.”

시온은 계약서 항목에서 호칭에 대한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갔다. 도화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단히 못 박았다. 그게 버릇이 되면 공식 석상에서도 화준이라고 부르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처음부터 버릇을 제대로 들이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시온의 물음에도 화준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건 딱 질색이었다.

“말 안 할 겁니까?”

“저한테 왜…… 화나셨는지…….”

“화……? 내가?”

화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씻으면서도,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화장을 하면서도 그게 의문이었다. 무슨 이유로 화가 나서 저렇게 무서운 눈을 하는지. 마치 어머니의 눈처럼 가늘게 뜨고 매섭게 저를 노려보는 그 눈이 섬뜩할 정도였다.

“화난 건 아니에요. 일정이 좀 꼬여서 짜증이 났을 뿐이지. 그것 때문에 그래요?”

“…….”

“신경 쓰지 말아요. 화난 건 아닙니다.”

“……네.”

“그리고 도화경 씨, 당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제대로 파악을 못 한 모양인데, 어디 가서 그렇게 주눅 들어서 어깨 늘어뜨리지 마세요. 대외적으로 도화경 씨는 나, 공시온의 와이프이자, 선우 그룹의 큰며느립니다. 어디 가서 기죽지 말고 다녀요. 그 꼴은 내가 못 봅니다.”

시온은 화준과 다르게 자존감이 높은 편이었고 프라이드 역시 대단했다. 선우 그룹의 장남으로 살아온 인생에 거리낄 게 없었다. 돈이면 돈, 물질이면 물질, 사람이면 사람, 원하는 모든 걸 당연하게 누리고 살아왔다. 그런 시온의 아내라면 지금까지 그가 누려 온 모든 것을 함께할 자격이 있었다.

“도착 5분 전입니다.”

어느새 차가 익숙한 동네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온은 느슨히 풀어 놓았던 타이를 조이고 재킷 어깨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탁탁 떨어냈다. 마침내 차가 멈추고 박 비서가 먼저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화준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랗고 단단한 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집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박 비서님, 집에 다녀와요. 오늘 밤이 길 텐데.”

“……이사장님!”

질색하며 인상을 찡그리는 정혁의 얼굴을 보며 시온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댔다. 전화하겠다는 뜻이었다. 시온은 화준의 허리에 손을 얹고 익숙하게 집 앞으로 다가가 벨을 눌렀다. 곧 누구냐는 물음도 없이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편하게 해요, 편하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내가 눈치껏 대답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거대한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마치 거대한 수목원이 펼쳐진 것 같았다. 각종 나무와 꽃들이 산들산들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한쪽에는 시원한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런 엄청난 규모의 집이었다. 정신없이 고개를 움직이며 집 구경을 하는 화준을 바라보며 시온은 피식 웃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생물체였다. 아까까지는 바들바들 떨더니 지금은 어디 견학이라도 온 꼬마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화준을 배려해 느린 걸음으로 현관까지 다가서자, 사용인들이 나와 정렬해 있었다. 평소에도 큰 소리를 내는 걸 극도로 꺼리는 시온을 잘 알기에 사용인들은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오냐, 어서들 오너라.”

백발이 성성한 남자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화준은 그가 시온의 아버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시온과 똑 닮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화준은 얼른 자세를 똑바로 하고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도, 화경이라고 합니다.”

“오냐, 반갑다. 나는 시온이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화준은 낯선 분위기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은 탓에 어른을 대하는 게 어색하고 꺼려졌다. 심지어 상대를 속여야 하는 처지라 더더욱 불편한 마음이 컸다. 다행히 시온이 화준을 뒤로 세우고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께서도 익히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이 사람이 워낙 몸이 약하고 사회생활을 하지 못해 낯가림이 심합니다.”

“흠, 그래. 그건 들어서 알고 있다만, 상태가 심한 건 아니고?”

공 회장의 시선이 시온의 뒤쪽에 서 있는 화준에게 박혔다. 화준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상태가 심한 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공 회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시온이 왔니.”

안쪽에 문이 열리더니 화려한 패턴의 롱 드레스 타입의 치마를 입은 한 중년 여성이 나와 시온과 가볍게 포옹했다. 그녀가 시온의 어머니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시온이 의무적으로 포옹에 응하며 어머니라고 불러 확인시켜 주었다. 그녀가 이번엔 화준에게 다가와 가볍게 몸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굉장히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시온의 코끝을 스쳤다.

“반가워요. 나는 시온이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도, 화경입니다.”

화준은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자리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 정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온통 머릿속엔 빨리 밥 먹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시온에게 식사가 준비될 동안 방 구경이나 시켜 주라며 등을 떠밀었다. 시온은 마지못해 화준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돌자마자 보이는 응접실에는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중앙에 부모님께서 앉아 계시고 그 뒤로 시온을 비롯한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가 서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무척 화목해 보였다. 화준의 집에는 흔한 가족사진 하나 없었다. 워낙 어릴 때 화경이 사고로 죽었고, 그 후로는 거의 우환이 든 것처럼 끔찍한 나날이 이어졌으니 그런 걸 찍을 경황이 없었다.

“이리 와요. 내 방 보여 줄게요.”

화준은 슬리퍼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화준은 낮은 감탄사를 뱉었다. 침대를 감싸고 있는 시트와 이불, 벽지, 의자, 책상,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 모든 게 다 파란색이었다.

“좀 미친놈처럼 보일까 봐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지금은 여기에 살지 않아요. 고등학교 때까지 지내던 방이에요.”

“……예뻐요.”

“좀 정신병자 같죠? 그때는 이게 내 나름대로 반항 같은 거였어요. 파란색으로 꾸며 달라고 아버지 어머니를 조르는 게. 지금은 색깔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파란색을 좋아하긴 하세요?”

“굳이 꼽자면?”

화준은 시온의 방 침대 시트 정도는 파란색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온 방 안이 파랗게 물들어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근데 또 묘하게 차가운 느낌을 주는 탓에 괜히 추운 기분이 들었다. 문득 어린 시절 방을 파란색으로 꾸며 달라고 요구하는 시온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화준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드리워졌다. 시온은 화준의 손을 당겨 침대에 앉혔다. 하얀색 원피스가 파란 시트와 대비되어 유난히 더 하얗게 보였다. 누워 자고, 일어나고, 남자가 되어 갔던 침대에 도화준이 앉아 있으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시온은 혀를 내어 입술을 핥고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앉아 있는 도화준을 쳐다보았다. 오도카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괜히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 성욕은 어떻게 풀어요?”

“에에?”

화준의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들으면 안 될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것을 보며 시온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자위 한 번 안 해 보고 살았겠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준은 성에 대해서 무지한 편이었다. 성에 대해 가르쳐 주는 사람도, 접할 매체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그런 욕구를 제대로 느껴 보지도, 즐겨 보지도 못한 비루한 인생이었다.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에 시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손가락을 입술 가까이 가져가 이에 짓눌린 입술을 풀어냈다. 손끝에 스치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진짜 산 넘어 산이네. 그 나이 먹도록 뭐 했어요?”

“이런 이야기 좀 불편, 합니다.”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지만 시온은 개의치 않았다. 결혼 생활 일부라면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성적인 부분은 한 번쯤 제대로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상대가 노멀이니 그렇게 강요할 생각은 없었는데 제법 구미가 당기는 얼굴이었다. 정갈하고 고고한 얼굴에 정액을 뒤집어씌우면 어떤 얼굴일까. 남들은 절대로 모르는 그런 얼굴을 알고 싶었다.

“결혼하면 더한 것도 해야 할 텐데?”

“……그, 만하세요!”

“입 다물어요. 여기 내 집입니다. 큰 소리 내지 마요.”

화준이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시온은 차갑게 일갈하고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화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차분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아까보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이렇게 입고 있다고 해서 여자는 아닙니다. 저는 남자고…… 그런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결혼까지 한 내가 호텔에 드나들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 물음에 화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퍽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한참 만에 대답을 내놓았다.

“그게 불편하시면 제가 나가 있을 테니 집에서…….”

이번에는 시온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장난으로 시작한 대화가 제법 깊어졌고 듣고 싶지 않은 말까지 들어 버렸다. 어차피 박 비서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호텔에 드나들어도 구설에 오를 일은 없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집을 비워 줄 테니 알아서 성욕을 풀어라?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 취향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걸 자꾸 까먹네. 그리고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집에서 하라는 그 말.”

“네……. 미리 말씀해 주시면 제가 본가에 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결혼한 새 신부가 매일 밤 친정으로 간다라. 호사가들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은 말이네요. 그냥 집에 있어요. 어차피 우리, 침실도 공유하지 않을 사인데 그럴 필요 있어요?”

“…….”

“집에 내가 누굴 데리고 와 떡을 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로 알아듣겠습니다.”

시온의 말에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화준은 멍청한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시온은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원피스에 먹물을 퍼붓고 싶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나 두고 보자고.

식사는 대체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식사를 마칠 때쯤 시온의 동생인 시준과 나윤이 함께 귀가하면서 조용하던 집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시준은 화준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지만, 나윤은 ‘새언니’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굴어 왔다. 오빠들 틈바구니에서 늘 외롭게 살았다는 그녀는 화준에게 쇼핑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자면서 살갑게 다가섰다. 화준은 약간 소극적인 태도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화경을 떠올렸다. 만약 화경이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모습들이 하나둘씩 오래된 필름처럼 천천히 흘렀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희미한 기억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어! 내가 뭐 실수했나 봐. 어떡해, 오빠.”

“새아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준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순간 눈물이 투두둑 손으로 떨어졌다. 화준을 지켜보던 가족들은 물론 본인도 당황해 얼른 눈물을 닦아 내 보지만 한번 터진 울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소리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잠자코 앉아 상황을 관망하던 시온이 화준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새아기가 결혼을 앞두고 심란한 모양이구나. 시온이 네가 많이 챙겨 주렴.”

시온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준을 현관 앞에 잠시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준은 스스로도 왜 이렇게 울컥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꾸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윤의 모습에서 화경의 얼굴이 보였을 뿐인데. 현관 앞에 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화준에게 시온의 어머니가 다가왔다. 그리고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결혼 앞두고 심란한 게 많을 거야. 이걸로 옷이라도 한 벌 사 입고 기분 전환하렴. 다음에는 웃으면서 보자꾸나.”

화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멍하니 한 여사를 바라보았다. 한 여사는 인자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봉투를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는 화준의 손을 붙들고 괜찮다고 말했다. 다 괜찮다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한 여사는 짠한 마음에 손을 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고 어깨를 토닥였다. 화준은 자꾸만 울컥울컥 치미는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이 감정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저 멀리 화준의 가방과 재킷을 든 시온이 천천히 걸어왔다. 화준은 한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빠져나와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족이란 건 이런 거였어? 가족은 이렇게 따뜻하고 좋은 거였어? 울컥 치미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화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지금까지 알지 못한 그런 감정들을 더 알게 될까 봐 무서웠다.

“일어나요.”

시온은 바닥에 허망한 얼굴로 앉아 있는 그를 붙잡아 바로 세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맞추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 비서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차에서 내렸다. 잔뜩 굳은 얼굴로 대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시온이 앞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화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낮지만 날카로운 음색이 귓가로 날아들었다.

“나윤이 보니까 진짜 도화경이 생각나기라도 했어요?”

“…….”

“도화경이 살아 있었다면 나와 이렇게 지랄맞게 엮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게 억울해서 이럽니까?”

화준은 치미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억울한 건 맞지만, 지금은 억울한 게 아니라 막연히 속을 채우는 답답한 그리움과 시온의 가족의 따뜻함 때문이었다. 아무리 꾹꾹 눌러 참아도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원망을 하고 가슴을 쳐도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어머니와 늘 처절하게 싸우고 굴복하는 삶을 살아온 화준이 본 가족의 모습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죄송, 합니다. 억울한 게, 억울한 게 아니라…….”

시온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도화준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애처롭게 떨리고 눈물을 훔치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시온은 몸을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미칠 것 같던 기분이 수그러들고 다른 감정이 마음속을 채웠다. 어쩐지 안쓰럽고 애잔한 마음이 들어 마음 한쪽 구석이 저릿하게 울렸다. 시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고 잠시 숨을 골랐다.

“안아 줄까요?”

“네?”

화준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자,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시온은 깊은숨을 푹 내쉬고 두 팔을 화준을 향해 벌렸다.

“이 품이라도 괜찮으면 빌려줄 테니 이리 와요.”

화준은 멍한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시온은 지극히 평범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화준은 충동적으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눈앞에 있는 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저 위로받고 싶었다. 고작 두 걸음, 하지만 화준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분명히 저 품 안에서 울고 싶은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준은 시온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시온이 성큼 한 걸음 크게 내디뎌 화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빌려준다는데도 못 받아먹는 팔푼이네.”

시온은 두 팔로 화준을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넓고 따뜻한 품 안에 갇힌 화준은 조용히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박 비서가 하염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정혁은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암막 커튼이 쳐져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방 안을 한번 둘러보고 침대 아래에 떨어진 샤워 가운을 집어 몸에 걸쳤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지독하게 혹사당한 허리가 욱신거렸다. 간신히 침대를 빠져나와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방 안을 빠져나오자 그제야 깊은숨이 흘러나왔다. 정혁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이닝 룸으로 들어갔다. 한쪽 진열장을 열어 손에 집히는 양주와 잔을 꺼냈다. 마개를 제거하고 잔에 채워 다급하게 입 안으로 쏟아 넣었다. 빌어먹을 공시온……! 다정하게 화준의 몸을 끌어안는 그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벌써 몇 년째 공시온과 넘지 말아야 선을 넘고 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공시온의 성향을 알게 된 건 7년 전, 정략결혼 이야기가 나오면서였다. 그때 공시온은 마치 봉인 해제된 사람처럼 문란한 일탈을 일삼았고, 눈치 빠른 기자 하나가 따라붙었다. 다행히 정혁이 먼저 알아채서 손을 쓸 수 있었지만, 다시 기자가 따라붙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정혁의 목표는 공시온을 선우 그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오점 하나 남기지 않고 선우 그룹의 오너 자리에 앉히고 싶었다. 그래서 이 일을 먼저 제안했다.

‘일단 해결은 했지만,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너만, 괜찮다면 그거…… 나랑 해.’

시온의 눈빛이 짙어지는 순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시온의 집에서 관계를 맺었고 그게 벌써 7년이 흘렀다. 제 보스가 구설에 오를세라 결정한 일이었지만 몸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고통받을 때는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홀가분했다. 그런데 조금 전 공시온이 화준을 부드럽게 감싸고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제까지, 아니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홀가분하다고 느꼈던 그런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지독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박정혁 인생에 공시온은 그저 친한 친구이자 회사의 상사였고 제가 섬겨야 할 보스일 뿐이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있는 사이라고 해도 그것뿐이었다. 그랬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그 순간 치미는 기분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가 둘을 떼어 놓고 화준의 뺨을 치고 싶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공시온은 늘 이 관계를 비즈니스 파트너쯤이라고 못 박았다. 저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이었다.

화준을 데려다주고 그의 집에서 몸을 섞으면서도 화준을 뜨겁게 안던 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서 정사의 절정에서 참지 못하고 시온에게 묻고 말았다.

‘도화준한테 마음 있어?’

후희를 즐기며 등을 어루만지던 시온이 손길을 멈추고 작게 웃었다.

‘도화준 아니고 도화경이라고 불러. 도화준이라는 이름은 지워.’

‘말해 봐, 시온아. 도화경이든 도화준이든 그 사람한테 마음 있어?’

‘새삼스럽게 왜 이래?’

‘왜 대답 못 하는데?’

‘바람난 남편 취조하는 마누라 같군.’

시온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마음이 초조한지 모르겠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몸을 추슬렀다. 시온의 아래에서 혹사당한 몸이 벌벌 떨렸지만 정혁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는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정혁아.’

‘……?’

‘도화경이 뭐라고 한 줄 아냐?’

‘…….’

‘내가 결혼하고도 호텔에 드나들어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집에서 하래, 파트너 불러서. 맹랑한 건지 순진한 건지. 그래서 나, 너 데리고 집에서 한번 하려고.’

‘미쳤어?’

‘그 얼굴이 맹한 거 같은데 또 은근히 사람 꼴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

시온은 담뱃재를 떨어내면서 여상하게 웃었다. 회상을 하듯 말을 곱씹고 그를 떠올리며 웃는 모습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정혁은 이불을 끌어다가 덮고 모로 누웠다. 왠지 모를 비참함이 온 마음을 뒤덮었다. 7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정혁은 베갯잇이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숨죽여 울었다. 그런데 공시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옆자리에 누워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개새끼……. 7년 동안 몸을 섞은 사이라면 없던 마음도 생기기 마련이거늘, 어쩜 그리 매정하고 냉정한지 가슴이 시커멓게 타 버릴 지경이었다. 후, 정혁은 깊은숨을 내쉬고 잔을 들었다. 아직도 심장이 따끔거렸다. 공시온과의 관계를 이제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왜 안 자고 나와서 청승이야.”

검은색 샤워 가운을 입은 그가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섰다. 정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시온은 정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잔을 빼앗아 입 안으로 쏟아부었다.

“박정혁, 넌 생각이 많은 게 문제야.”

“시온아, 우리…….”

“말해.”

“……이 관계, 그만하자. 나, 네 비서로 열심히 일할 거야.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모자람 없이 서포트할게.”

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팔을 뻗어 정혁의 앞에 놓인 술병을 끌어다가 잔을 채웠다. 콸콸 채워지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그리고 잔을 정혁의 앞으로 밀었다.

“마셔.”

“이사장님.”

“아직 내 사생활은 안 끝났어. 호칭 똑바로 해. 내 공적인 공간에서 꼴사납게 쑤셔 박히고 싶지 않으면.”

시온은 날카롭게 일갈하고 그대로 몸을 일으켜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다시 혼자 남겨진 정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계의 끝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정혁은 시온이 밀어 준 잔을 집어 들어 입 안으로 쏟아부었다. 알싸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쏘며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 * *

결혼을 하루 앞두고 화준은 짐을 챙겨 신혼집이 될 청담동의 한 빌라로 이사했다. 100평대의 복층 구조로 이루어진 빌라는 굉장히 프라이빗한 곳이었다. 텅 빈 집 안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홀로 앉아 있으니 비로소 결혼이 실감 났다. 눈으로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급하게 마련된 집치고 제법 인테리어나 소품들이 공들인 티가 났다. 특히 거실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가 마음에 들었다. 깊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집을 그린 추상적인 그림인데, 어쩐지 분위기가 고요하고 잔잔해서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덩달아 잔잔해지고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화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자신을 화경이라고 칭하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이었다. 하지만 화준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선가 그녀가 나타나 제 머리의 가발을 끌어 내리고 뺨을 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찌 됐건 간에 태어나서 처음 가져 보는 자유였다. 늘 어머니의 감시 속에서 철저히 여성으로 길러졌던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그렇게 길러져서 결국 이렇게 남자의 몸으로 남자와 결혼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왔다.

갑자기 웅웅―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준은 상념을 깨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온이었다. 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이사 잘했어요?

“네, 덕분에요.”

- 이사 소감은 그게 다예요?

“아…….”

소감이라, 뭐라고 말해야 하지? 화준은 머리를 굴리며 말을 쥐어짜 보지만 별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이따가 데리러 갈 테니까 저녁이나 같이하죠.

“네, 준비할게요.”

- 오늘은 그냥 모자 쓰고 마스크 하고 나와요. 가발도 쓰지 말고.

“아, 그래도…….”

- 감시하는 어머니 품에서 벗어난 자유, 하루쯤은 즐겨도 되잖아요.

자유, 자유라는 말에 괜히 심장이 뛰었다. 도화경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도화준의 삶.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날. 화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퇴근 후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는 끊어졌다.

화준은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전까지 짐 정리에 열을 올렸다. 옷을 하나씩 꺼내 차곡차곡 정리했다. 옷장을 채우고 서랍을 채우는 건 금방이었다. 마지막으로 화경과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정리를 끝냈다. 후,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아 내고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때 마침 시온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30분이면 도착한다는 말에 화준은 얼른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거울 앞에 섰다. 가벼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서 있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본연의 모습을 찾았음에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안녕하세요.”

“타요.”

박 비서를 대동하지 않고 직접 운전대를 잡은 시온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화준은 일부러 시온이 문을 닫기 전에 재빨리 차 문을 닫았다. 남자의 외형을 한 상태에서 이런 호의는 사양하고 싶었다. 시온의 눈썹이 반사적으로 꿈틀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체를 돌아 운전석 문을 열었다.

“초밥 어때요?”

“괜찮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약지에는 몇 주 전에 맞춘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화준은 아직 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손가락을 문지르며 그의 손가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남자의 손이었다. 투박하고 두툼한…….

“대외적으로 행복한 새신랑이라 어쩔 수 없이 낀 겁니다. 뭐, 내일이면 결혼반지로 바뀌겠지만. 마음 쓰지 마세요.”

매번 느끼지만 공시온은 독심술을 하는 것 같다. 속에 담아 둔 질문을 쏙쏙 읽어 거기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머리를 짓누르는 가발도 없고 얼굴을 가리는 두꺼운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외출을 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타인과 함께.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공시온이 말한 ‘자유’를 누렸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시온은 어디론가 차를 몰았다. 집 방향과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으며 보여 줄 게 있다고 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미술관이었다. 차가 주차장으로 부드럽게 진입했다.

“정략결혼의 대가로 아버지께서 주신 미술관입니다. 뭐, 정확히는 제가 달라고 한 거지만.”

“아…….”

“커피나 한잔 마시고 갑시다.”

시온과 나란히 걸어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미술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 사람 대신 CCTV가 지켜보고 있겠지. 시온이 지갑에서 시큐리티 카드를 꺼내 단말기에 접촉했다. 와아……! 화준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렇게 규모가 큰 미술관은 처음이었다.

“둘러보고 있어요. 커피 가져올게요.”

시온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화준은 정말 넋 놓고 작품을 바라보았다. 찬찬히 걸음을 걸으며 작품을 감상하던 화준이 한 작품 앞에 멈추어 섰다.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그린 인물화가 걸려 있었다. 추상적이기도 하고, 누군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화준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왼쪽으로 기울어지기를 반복했다. 머그잔 두 개를 들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온이 작게 웃음 지었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요.”

“왜 기분이 이상할까?”

“색이 많이 들어가서 화려한 느낌이 강하지만 얼굴이 쓸쓸해 보여요. 그린 사람이 좀 슬펐을 거 같아요.”

시온은 머그잔 하나를 화준의 손에 쥐여 주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림을 그린 장본인은 바로 시온이었다. 시온은 이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상황을 잠시 떠올려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당시 홀로 유학 생활을 하던 때라 외로웠고,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 주저 없이 그린 그림이었다. 사실 시온은 지루한 회사 경영보다는 미술 쪽에 관심이 더 많았다. 지금도 주머니 속에는 몽당연필이 들어 있었다. 정물화처럼 사실에 바탕으로 그리는 그림보다 생각에 생각을 더한, 사실에 추상을 더한 그림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시온은 충동적으로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손바닥보다 작은 몽당연필을 꺼내 화준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하지만 곧 시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자신만의 비밀이었다. 경영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사실은 경영보다는 미술에 관심이 많은 미술 학도였다는 걸 최측근인 박 비서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걸 도화준에게 보여 주는 걸까. 마음이 이상했다. 화준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몽당연필에 관심을 보였다.

“이게 뭐예요?”

“……친구요.”

“……? ”

“회의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으면 연필을 꺼내서 그림을 그려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회의는 끝나 있죠. 나한테는 꽤 재밌는 친구예요.”

**이게맞다**

화준이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회의 시간에 딴짓을 하는 시온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근사하고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몽당연필을 쥐고 무언갈 그리는 모습 역시 그답지 않았다.

“내가 이 미술관에 그쪽을 데리고 온 이유는…….”

“…….”

“2년 동안 나에게 협조를 잘해 준다면 대가로 이 미술관을 주겠습니다.”

“아니요. 이런 대가는 과분합니다. 저번에 작성한 계약서대로만 이행된다면 전 다 괜찮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가가 사르르 풀려 황홀한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단단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시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시온이 머그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화준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선이 고운 허리가 손아귀에 잡히고 숨이 가까워졌다.

“나랑 결혼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

“2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일 겁니다. 내키지 않아도 잘 지내 봅시다.”

“네.”

시온은 고개를 숙여 화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화준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허리만 꼿꼿이 세웠다. 뜨겁고 말랑한 입술이 목덜미에서 한참을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이 밤이 지나면 도화준은 공시온의 아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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