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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계약의 시작 (2/19)

Chapter 1 : 계약의 시작

시온은 맞선을 마치고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정략결혼이라. 까슬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조금 전 상황을 곱씹었다. 21세기에 정략결혼을 고집하는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간 자리였다. 가서도 그렇게 흥미로움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고 결혼을 파투 낼 생각이었다.

유언을 어기고 경영권을 가지고 오려면 유언장 무효 소송을 내고 그 외 부가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하겠지만,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덜컥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정략결혼을 파투 낸 뒤의 일이 꽤 성가시고 뭐, 시간도 오래 걸리겠지만 늙어 죽기 전까지는 가져오겠지 싶었다. 그런데 선 자리에서 꽤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짜증스럽던 기분이 말끔하게 개고 맞선 자리는 제법 즐거워졌다. 노란 트레이닝복을 위아래로 입고 사자 머리인 채 이를 쑤시는 몰골을 보면서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신성 건설이라……. 시온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을 이어 갔다. 기업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고 기반 자체도 제법 튼튼하게 다져 온 회사였다. 3대에 걸쳐 꽤 탄탄대로를 걸어왔기 때문에 평판이 좋은 기업으로 평가되었다. 기업 이미지 광고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송출되고 있었고, 소비자 신뢰도 역시 좋은 편에 속했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신성 건설 도창현 사장이 욕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온 건설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탄탄대로를 걷던 신성 건설까지 휘청이고 있었다.

도 사장은 사업을 확장할 때마다 투자자들에게 공수표를 날렸다. 자신의 고명딸이 선우 그룹의 장남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이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라니.

시온은 머리를 환기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선우 그룹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할아버지께서 유언으로 남긴 신성 건설 도화경과 결혼을 해야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절대로 안 된다고 했던 그 결혼, 어쩌면 이게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 전에 없던 호기심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박 비서님, 신성 건설에 아들이 있었습니까?”

박 비서는 신호에 걸린 사이 서류철을 들어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네, 도화경과 도화준 둘이 쌍둥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24년 전 교통사고로 도화준이 사망한 걸로 알려졌습니다.”

“24년 전이면 어릴 때군요.”

“당시 네 살이었다고 합니다.”

“신성 건설에 대해서 자세히 좀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도화준의 사망 기점으로 달라진 게 없는지, 있다면 어떤 게 있는지. 사고도 좀 파 보고.”

“네, 조사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이름이 도화준이겠군. 시온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창문을 내렸다. 여름으로 넘어가기 전, 봄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코끝을 간지럽혔다.

선우 그룹 2대 회장인 공만석은 죽기 전 장손인 시온의 혼처를 정해 주고 눈을 감았다. 신성 건설의 장녀인 도화경, 그녀와 결혼하지 않으면 선우 그룹을 물려받을 수도,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다고 유언장에 명기했다.

시온이 군대에서 제대할 때까지 그것은 극비에 부쳐졌다. 그리고 시온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인 3대 회장 공명한은 시온에게 유언장을 보여 주고 사실을 알렸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시온은 말도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며 현실을 부정했지만, 공 회장은 시온의 카드와 차량, 현금을 묶어 버리는 초강수를 뒀다. 시온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았다. 그것도 국내 재계 순위 5위 안에 드는 기업의 장남이.

‘할아버지의 유언이다.’

‘아버지,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잖아요. 그런 유언장 따위가 뭐라고 이러십니까.’

‘할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궈 오신 회사고 돈이다. 내가, 그리고 네가 호의호식해 가며 살 수 있었던 건 다 할아버지 덕분이다. 그러니 그분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 게 맞다.’

고작 사흘. 백기를 든 건 시온이었다. 돈 한 푼 없이 집에서 쫓겨난 시온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공 회장은 시온의 계좌를 비롯한 모든 카드와 차량, 그리고 회사 출입까지 철저히 막았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손을 벌리기도 싫었다.

결국 시온의 나이 서른네 살이 되면 신성 건설 도화경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카드와 차량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게 벌써 7년 전 일이었다. 시온은 청명하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담배를 길게 빨았다. 실제로 도화경을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결혼을 엎어 버릴 생각이었다. 시온의 성향은 안타깝게도 스트레이트가 아니었다. 여자에게 반응하지 않는 몸이었다. 취향인 남자에게 벌떡벌떡 서는 좆이 여자만 보면 요지부동이었다. 신은 참 공평하기도 하시지. 시온은 자조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룬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도화경을 구워삶든가, 아니면 빌든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도해 이 결혼을 파투 내는 게 맞선의 목표였다. 그런데 맞선 장소로 가기 전 잠시 들른 화장실에서 도화경을 보고 말았다. 그것도 남자 화장실에서.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장실에 들어서자,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 차림인 예쁘장한 남자가 긴 머리 가발을 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옅게 화장을 했는지 입술이 반짝거렸다. 가발을 고정하느라 언뜻언뜻 드러나는 목선이 가늘고 예뻤다. 유약한 선을 가진 남자는 제 타입이 아니었지만 남자는 묘하게 시선이 잡아 끌었다. 시온은 소변기 앞에 서서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라고 하기에는 선이 고왔다. 그렇다고 또 여자라기엔 좀 부족해 보였다. 세면대 거울을 보며 가발을 고정하고 있던 남자는 옆 사람이 힐끗거리자, 얼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까스로 가발을 고정한 그가 머리에 손을 올리고 마구 문지르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망가져 머리카락이 부스스해지자 그는 대충 손가락으로 빗고는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버렸다.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맞선 장소에서 그 별 이상한 놈과 다시 조우했다. 그것도 자신의 맞선 상대로……. 다행히 도화경은 자신을 화장실에서 보지 못한 듯했다. 결혼하자는 말에 기함하는 그 얼굴이 자꾸 떠올라 입 근육이 씰룩거렸다.

“회장님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본사로 들어오라는 전갈이십니다.”

“차 돌려요.”

시온은 작게 하품을 하고 시트에 몸을 묻었다. 이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에 단비가 되어 줄 도화경, 아니 도화준이 다시 보고 싶었다.

* * *

선우 그룹 본사로 차량이 들어서자, 몇몇 이사들이 나와 허리를 숙였다. 시온은 나른한 얼굴로 차에서 내려 이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사들은 모두 공 회장이 만들어 준 시온의 세력이었다.

“이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본사에도 자주 들러 주십시오.”

“제가 재단 일로도 바빠서 말입니다.”

“뭐든 열심히 하시는 모습, 참 보기 좋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이사장님.”

“하하, 과찬이십니다.”

허례허식 가득한 인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무리는 로비를 통과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박 비서가 미리 잡아 둔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리고 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온은 박 비서에게 살짝 눈짓하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뒤이어 이사들이 타려고 하자, 박 비서가 손을 들어 그들의 출입을 막았다. 당황한 얼굴이 역력했지만, 그들은 순순히 물러섰다. 시온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서서 싱긋 웃어 보였다. 천천히 문이 닫히며 그들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런 것 좀 하지 말라니까.”

“정보가 어떻게 새어 나간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회장님 비서실 인원 중 하나겠죠. 색출해서 치워 버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최상층까지 오른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시온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회장실로 이어지는 복도는 깔끔하고 단아한 느낌을 풍겼다.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공 회장이 질문할 법한 리스트들을 뽑아 나열했다. 그다음은 공 회장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리스트를 나열했다. 결혼하는 조건으로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 하나를 받아 낼 생각이었다.

“오셨습니까? 이사장님.”

공 회장의 수족인 유 비서가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시온은 그 뒤로 보이는 비서실 직원들을 눈으로 훑었다. 나를 귀찮게 하는 놈이 누굴까. 입 안에서 혀를 느릿하게 굴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는 사이 유 비서가 깔끔한 동작으로 회장실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시온은 시선을 거두고 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 시온이 왔구나.”

“맞선은 잘 보았고, 결혼은 내달 내로 할 예정입니다.”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구나.”

“뭐,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습니다.”

공 회장은 소파에 앉으며 시온에게 자리를 권했다. 시온은 공 회장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유 비서가 커피와 홍차를 가져와 각각 내려놓고 사라졌다.

“내달 식을 올리려면 서둘러야겠구나.”

“어차피 예단이나 예물은 생략할 생각이라서…….”

“예단은 몰라도 예물은 해야지. 명색이 우리 집안 맏며느린데.”

“어머니께서도 예단과 예물은 생략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시온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 군더더기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급하게 하는 결혼이고 정략결혼이라 크게 소문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머니께서도 신성 건설의 딸과 결혼하는 걸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터라 그런 건 알아서 생략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집안에 들어오는 첫 며느리에게 해 주고 싶은 게 많았다. 제 아버지인 공만석 회장과 신성 건설 고(故) 도병준 사장이 막역한 사이였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공만석 회장 대에 두 집안 중 어느 한쪽이라도 딸이 있었다면 이 정략결혼은 그때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집안 모두 아들만 셋이어서 정략결혼은 이뤄질 수 없었다. 고(故) 공만석 회장은 도병준 사장이 죽기 전, 꼭 자신의 손자인 시온과 도병준 사장의 손녀, 화경을 결혼을 시키겠노라고 약속했고, 그게 지금에서야 성사될 터였다.

공 회장은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내 시온의 앞으로 밀었다. 시온은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고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서 검은색 카드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이게 뭡니까?”

“화경이가 사고 싶어 하는 건 다 사 주거라. 원래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잖니.”

공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런데 시온은 카드를 다시 봉투에 넣어 정중하게 공 회장에게 내밀었다. 고작 이런 카드 따위로 자신의 희생을 보상받을 수는 없었다. 원하는 건 이런 카드 따위가 아니었다.

“제가 원하는 건 따로 있습니다.”

“흠, 그래?”

“화랑 미술관.”

“……?”

“저에게 주십시오. 제가 맡아서 운영해 보고 싶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시온이 서른 살 때부터 호시탐탐 노려 온 미술관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공 회장은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몸집이 워낙 큰 미술관이라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원치도 않는 정략결혼을 하게 될 아들을 위해서 크게 쏘기로 마음먹었다. 시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쉽게 화랑 미술관을 손에 쥐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곧 홍보팀에서 결혼에 대한 공식 자료를 뿌릴 예정이다.”

“저, 오늘 맞선 봤습니다. 지금 막 결혼할 사람 얼굴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다음 달에 식을 올리려면 지금 빨리 서둘러도 늦다.”

공 회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말속에서 고압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시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자기 품 안에서 짧게 진동하는 휴대폰을 느끼고 화면을 확인했다. 스케줄 알림이었다. 병원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온은 공 회장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회장실을 뒤로했다. 올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동선으로 움직였다. 박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로비를 가로지를 때 안내 데스크 쪽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회장님과 못 만나십니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으면 절대로 만나실 수 없습니다.”

“만나서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만나야 한다고!”

시온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안내 데스크 직원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평온하던 시온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완전히 미쳤군.”

* * *

화준은 신경질적으로 가발을 벗어 집어 던지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놈은 정신 나간 놈이 맞다. 추녀의 몰골을 한 자신을 보고도 결혼하자고 말하는 남자가 제정신일 리 없다.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며칠 전 네일 케어를 받은 손톱이 자비 없이 뜯겨 나갔다.

이 결혼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도화준이라는 이름 대신 도화경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껏 살아오긴 했지만, 결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인 자신이 모든 사람을 속이고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략결혼이라길래 어디 반푼이가 나오려나 했더니 웬 연예인 쌍싸대기를 올려붙일 만큼 잘생기고 근사한 놈이 나왔다.

‘합시다, 결혼.’

미친……!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잘생기고 근사하면 뭐 해, 눈이 등신인데. 공시온을 속으로 화끈하게 까 대며 끓어오르는 화를 삭였다. 화준은 씩씩거리며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에 붙여 놓은 노란색 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 방 안의 인테리어가 벌써 서너 번은 더 바뀌었지만, 저 천장에 붙은 별은 아직 그대로였다. 화준은 작게 이름을 불렀다.

“도화경. 화경아…….”

그날의 사고에서 화경이 아닌 자신이 죽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 빌어먹을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억울하고 원통하고 비통했다.

―똑똑.

“화경이 방에 있니?”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에 화준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집어 던져 놓은 가발을 허둥지둥 눌러썼다. 핀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흔들렸지만, 성격 급한 어머니께서 먼저 문을 열어젖혔다.

“어, 어머니!”

“화경이…… 너!”

갑자기 화준의 뺨으로 매서운 손이 날아들었다. 짝―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그 바람에 대충 눌러 놓은 가발도 벗겨져 날아갔다. 화준은 뺨을 감싸고 하얗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내 말을 뭐로 듣는 거니! 누가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도화경! 너는 도화경이야! 장차 선우 그룹의 안주인이 될……!!”

“어머니!!”

“넌 내 딸 화경이야!! 화경이라고!!”

어머니의 발악 같은 비명이 방 안에 울렸다.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몸까지 부들부들 떨어 가며 화경이를 찾는 어머니는 필사적이었다.

사고가 났던 그날, 화경과 화준은 외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사이가 유난히 좋았던 남매는 서로의 장난감을 쥐고 흔들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음주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와 차를 추돌했다. 그 시각 화경은 화준이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린 장난감을 줍기 위해 안전벨트를 푼 상태였고, 화경은 추돌과 동시에 전면 유리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화준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도화준이 도화경으로 바뀐 후였다. 정작 사망한 건 화경인데 서류상 화준이 사망한 걸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도화준은 이상한 죽음을 맞이했다. 화경이 그 자리에서 사망한 만큼 화준 역시 크게 다쳤다. 어린 나이에 다섯 번이나 차가운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충격으로 인한 조현병을 얻은 후였다. 망상, 환청, 와해된 언어, 정서적 둔감 증상을 겪었고, 밤에는 미친 사람처럼 온 집 안을 다 헤집고 다녔다. 밤마다 구슬프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화준도 따라 울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아팠다.

어머니께서는 몇 달을 그렇게 아프다가 다행히 약물 치료로 많은 호전을 보였다. 집 안은 다시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난데없이 화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여자 옷을 입히고, 예쁜 인형을 사다 주고, 화준을 여자처럼 꾸미기 시작했다. 화준은 그녀의 살아 있는 마론 인형이 되어야 했다.

‘넌 화준이가 아니라 화경이야. 내 딸 화경이라고. 죽은 건 화경이가 아니라 화준이야. 알겠니?’

어머니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세뇌하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화준이 아니라고 소리치면 가차 없이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화준 스스로 화경이라는 걸 인정할 때까지 매질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2차 성징이 시작될 때쯤엔 호르몬제를 맞고 성장판이 강제로 닫히는 주사를 맞았다. 식사는 거의 하지 못했다. 키가 크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늘 영양 부족에 시달렸다.

화준은 철저히 여자로 길러졌다. 학교도 가지 못했고, 공부 역시 엄두도 못 냈다. 간신히, 아주 간신히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할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된 이후로 나름대로 반항도 해 봤다. 집을 뛰쳐나가고, 가지고 있는 여자 옷도 모두 찢어 버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발작을 일으키며 끔찍하게……. 사지가 뒤틀려 경련하는 어머니 앞에서 화준은 늘 무력했다. 화경이 죽고 난 뒤 화준은 알게 모르게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또 자신의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어머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화준은 가발을 뒤집어쓰고 어머니께 잘못했다고 울며 빌었다. 하루하루가 화준에게는 처절했다. 그리고 최근에 왜 자신이 도화준이 아닌 도화경으로 길러졌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정략결혼, 그것도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대기업과의 정략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요. 제가 어떻게 남자와 결혼을 해요!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어요.”

“화경아, 엄마가 미안해. 우리 딸, 엄마가 정말 미안해.”

“어머니!! 저는 화준이에요!! 똑바로 보세요!!”

“아니야!! 화준이는 네 살 때 사고로 죽었어. 화경아, 내 딸 화경아.”

초점 없는 눈으로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어머니를 세게 밀치고 화준은 집을 뛰쳐나왔다. 가발은커녕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 그대로였다. 이제 누가 알아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24년을 어머니의 뜻대로 어머니의 인형으로 살아왔다. 인생을 모두 저당 잡혀서 처절하게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며 살아온 날들이었다. 이제는 더 못 하겠다. 정말 넌덜머리가 나서 못 하겠다. 이 지긋지긋한 인형 놀이를 이번에는 제대로 끊어 낼 생각이었다. 설사 어머니가 돌아가신다고 해도.

화준은 그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선우 그룹 본사로 향했다. 창밖으로 흩어지는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차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한가롭게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도, 따뜻한 햇볕 아래를 걷는 일도 모두 화준에게는 어렵기만 한 일들이었다.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카드로 택시비를 계산하고 높은 건물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마치 하늘 끝에 닿을 만큼 높은 건물이 위용을 자랑했다. 화준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로비를 가로질러 안내 데스크로 다가갔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공, 공 회장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회장님을요?”

데스크 직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화준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차림에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남자.

“회장님과 미리 약속되어 있으신가요?”

“아니요. 하지만 꼭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은 미리 약속되어 있지 않으면 만나 뵐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데스크 직원은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로 화준에게 말했다. 하지만 화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 결심이 집으로 돌아가면 또 힘없이 무너질 게 뻔했다. 택시 안에서도 몇 번이나 마음이 흔들리는 걸 억지로 다잡았다. 이 망할 결혼을 깨려면 한시라도 빨리 공 회장을 만나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지금이라도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의 삶을 살고 싶었다.

“만나게 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

“회장님과 못 만나십니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으면 절대로 만나실 수 없습니다.”

“만나서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만나야 한다고!”

직원은 정중한 태도로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화준은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히든카드랍시고 쥐고 있는 카드는 공 회장을 만나지 못하면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화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이 지독하고 끔찍한 삶을 깨 버리고 싶다. 제 인생이 박살 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여기서 또 뵙네요.”

화준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는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공시온이 서 있었다. 화준은 눈을 크게 뜨고 의식적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지금은 가발도 쓰지 않았는데……!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시온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유로운 얼굴로 데스크로 다가가 따로 회장실에 보고를 올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화준의 손목을 붙잡았다. 화준은 시온에게 제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사고 회로가 멈추어 버렸다. 넋이 나간 채로 그의 손에 끌려 차에 태워졌다.

시온은 화준을 차 안에 밀어 넣고 밖에 서서 담배를 태웠다.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의연한 척하고 있지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겁도 없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필터까지 타 버린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비볐다. 차체를 돌아 반대편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출발해.”

차는 그대로 회사를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섰다. 안정적으로 도로에 들어서자 시온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화준은 마치 발가벗겨져 시온의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가발도, 옷도, 화장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의 얼굴을 하고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저는, 그러니까, 저는…….”

“하아, 그쪽이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화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알고 있다고? 어떻게? 언제부터? 아니, 그런데 결혼하자는 말을 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공시온은 자신이 남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으며 이 사실을 알고도 결혼을 제안한 이유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아연실색한 화준의 얼굴을 힐끗거린 시온은 차창을 조금 열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메케한 연기가 금세 차 안에 퍼졌다. 화준이 입을 가리고 작게 기침하자, 시온은 혀를 차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차창을 활짝 열어 담배 연기를 날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요. 그렇게 눈만 데굴데굴 굴리지 말고.”

“제가 남자인 걸 어떻게 아셨는지…….”

“짐작만 했고 지금 확인 사살을 해 본 건데, 일단 맞네요. 맞선 보러 가기 전에 화장실에서 그쪽 봤습니다. 지금 그 복장이었죠. 가발을 머리에 쓰면서 짜증을 부렸고.”

화준은 낭패감에 인상을 구겼다. 선을 보는 문제로 어머니와 크게 다툼이 있었다. 남자의 몸으로 여자인 척 선을 보고 결혼을 한다는 게 화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명백한 선우 그룹에 대한 기만행위였다. 그래서 결혼을 엎을 생각으로 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세팅해 준 모습 대신 엉망진창인 몰골로 선 자리에 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준비를 호텔 화장실에서 했는데……. 낭패감에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공 회장한테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고 결혼은 없던 일로 해 주시면…….”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네?”

시온은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당기고 옆자리를 차지한 화준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반문하는 화준의 턱을 쥐고 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다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빼는 모습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제 조부께서 신성 건설 장녀 도화경 씨와 결혼하지 않으면 선우 그룹을 물려받을 수도, 제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다고 유언장에 못 박아 둬서 결혼은 무조건 해야 합니다.”

“화경이는 24년 전에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 유언은 무효예요. 제가 회장님을 뵙고 사죄드리겠습니다.”

“지금 호적상 살아 있는 건 도화준이 아니라 도화경이잖습니까. 그러니 이 결혼은 진행해야 합니다. 서로 피곤하게 굴지 말고 쉽게 갑시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남자인 내가 어떻게 공시온 씨와 결혼을 하냔 말입니까!!”

시온은 흡연 욕구를 꾸역꾸역 눌러 삼키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허울뿐인 와이프라도 제 사람이 될 사람이라 정중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려고 했는데. 시온은 몸을 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았다. 예정에 없던 감정 소모에 짜증이 치밀었다.

“이봐, 내가 지금 시간이 많아서 당신이랑 말장난하는 거 같아? 당신이 내 아버지를 만나 사실을 밝힌다고 쳐. 그럼 내 아버지가 아, 그러냐. 알겠다, 할 거 같아? 선우 그룹이 그렇게 우스워 보여? 그리고 신성 건설 당신 아버지가 어떤 공수표를 던지고 다니는지 알고나 있어?”

“……?”

“본인의 고명딸이 선우 그룹 나 공시온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공수표를 띄우면서 투자자를 모으고 있다더군. 자, 그럼 이제 계산을 해 볼까? 그 전에 당신 집에서 어떤 의도로 도화준을 도화경으로 키웠는지부터 따져 봐야겠군.”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박 비서님, 이거 혼인 빙자 아닌가요? 죽은 딸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것도 남자를 여자로 둔갑시켜서 맞선 자리에 내보내고 이거 의도가 너무 명백하잖아.”

박 비서는 룸 미러로 뒷좌석을 힐끗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시온이 자신에게 대답을 원하고 던진 물음이 아니라는 걸 박 비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온의 말은 거침없었다. 마치 준비라도 해 놓은 사람처럼 막힘없이 말을 뱉었다. 화준은 눈앞이 하얗게 물드는 착각이 들었다. 시온이 언급한 사항들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무작정 이 결혼을 엎어야 한다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벼랑 끝이랑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이 정략결혼을 빌미로 투자자를 모으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 읊어 줘?”

“그, 그만, 그만하세요.”

“선우 그룹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면 더 치밀했어야지.”

시온은 어쭙잖은 신사 행세를 집어치우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화준이 옆에서 기침하든가 말든가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 지독한 흡연 욕구부터 해결해야지 제정신으로 화준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은 벌어졌고, 그 일을 수습하는 건 본인과 도화준이 될 것이다. 시온이 필터까지 타 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자,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기침을 한 화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크고 동그란 눈 안에 갇힌 물기가 작게 일렁였다. 시온의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현실을 직시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렁그렁한 눈을 바라보며 시온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화준이 결혼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무언가 굉장한 미끼를 던져야 했다.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시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 *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화준은 창문을 열고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창밖으로 뻗어 나간 화준의 손목에 절창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금세 손바닥에 빗물이 작게 고였다. 어릴 때부터 비가 오는 날을 참 좋아했다. 축축하게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몸에 닿으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엔 하루 종일 창문에 매달려 비를 구경했다.

웅웅― 갑자기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누구지? 화준에게 휴대폰은 전자시계 혹은 게임기일 뿐이었다.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부모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침대로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공시온’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아……. 화준은 입술을 한번 꾹 깨물었다가 놓고 화면을 밀었다.

“여보세요.”

- 공시온입니다.

“네, 이름 떠서 알고 있어요.”

- 밖에 비 오네요. 비 오는 거 좋아해요?

화준은 침대에 누워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고 몸을 웅크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시온의 목소리와 부드럽게 섞여 기분 좋게 들려왔다. 나른한 기분에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 내 말 안 들려요?

“아…… 비 오는 거 좋아합니다.”

- 그럼 나랑 드라이브할래요? 맛있는 저녁 사 줄게요.

“아뇨, 졸려서요.”

그러자 수화기를 타고 시온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화준은 자신이 실수한 건가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 도화준 씨는 사람을 상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네요.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한가하진 않을 텐데.

“…….”

- 그럼 용건만 간단히 하죠. 사실은 보도 자료가 좀 필요합니다. 3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하는 연인 설정이니 협조 좀 하세요.

화준은 눈을 의식적으로 깜박이며 시온의 말을 곱씹었다. 며칠 전, 시온의 차에서 그와 결혼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그 대신 조건이 붙었다. 2년, 2년만 결혼을 유지해 주면 해외로 나갈 수 있게 시온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집과 철저히 분리되어 도화경이 아니라 도화준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말에 화준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신성 건설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도 약속받았다. 그의 혀는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의 혀처럼 유려하고 달콤했다. 앞으로 2년만 더 도화경으로 산다면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화준은 베개를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네, 알겠습니다. 나갈게요.”

- 한 시간 후에 집 앞으로 데리러 가겠습니다. 예쁘게 하고 나와요.

화준은 끊어진 전화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하고 나왔다. 한 시간 안에 준비하려면 조금 촉박했다. 짧은 머리카락을 바짝 말려 툭툭 털어 내고 거울 앞에 앉았다.

* * *

“예쁘네요.”

시온이 커다란 골프 우산을 든 채 희미하게 웃었다. 화준은 프릴 디테일의 리본 블라우스와 옅은 핑크색 튤립 스커트를 입고 작은 체인 백을 들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더 화사하게 입어야 한다며 어머니께서 직접 골라 준 옷이었다. 보자마자 예쁘다고 말하는 시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놀리는 기분이었다. 남자인 몸으로 이렇게 여장을 하고 다니는 게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화준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번졌다. 시온은 화준의 손을 잡아 우산을 붙들게 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화준의 어깨에 덮었다. 그의 온기가 묻은 재킷이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다.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가 순식간에 더 가까워졌다. 시온은 화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작게 속삭였다.

“웃어요. 사방에 기자들이에요. 그렇다고 의식은 하지 말고. 내가 문 열어 주면 차에 자연스럽게 타요.”

“네.”

시온은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고는 우산을 제 손으로 가져갔다. 그는 능숙하게 화준을 에스코트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여전히 그는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화준이 몸을 숙여 차에 오르려고 하자, 그가 손을 뻗어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신경을 썼다. 탁―. 차 문이 닫히고 그가 차체를 돌아 운전석 문을 열 때까지 화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타인의 세심한 배려가 낯설고 어색했다.

시온은 우산을 정리해 뒷좌석에 놓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손으로 뺨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준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망설이지 않고 지름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펼쳐진 건 다른 의미로 가시밭길이었다. 처음 말도 안 되는 객기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던 도화준의 패기와 배포는 어디 갔는지, 결혼을 합의하고 난 뒤로는 심각할 정도로 소극적이고 저자세로 시온을 대했다.

시온은 운전대를 잡았다가 놓고 갑자기 화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화준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밀어 냈다. 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 집안 내력인가? 시온은 움직임을 무시하고 안전벨트를 당겨 잠금쇠에 끼워 넣었다. 화준의 입에서 작게 탄식 어린 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잡아먹어요?”

“아, 아니요. 그건 아닌데…….”

“아닌데?”

“비가 와서 그런가 후덥지근하네요. 좀 더운 거 같아요.”

정신없이 방황하는 그의 눈동자가 보기 안타까워 추궁하는 걸 멈추었다. 시온은 에어컨 온도를 약간 낮추고 운전대를 잡았다.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여 시야가 확보되자 차는 유연하게 도로로 들어섰다. 차 안에는 고요한 적막만 감돌았다. 딱히 공통된 주제가 없으니 둘 사이에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화준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여장을 하고 시온을 만나는 게 조금 불편했다. 주치의인 강 선생을 제외하고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시온이 유일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 공시온과 함께 하는 모든 일이 처음이었고 유일했다. 휴대폰 번호를 아는 사람도, 이렇게 드라이브를 하는 것도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정말 이래도 될까?

“식성을 아직 파악하지 못해서 무난하게 한정식으로 예약해 뒀는데, 특별히 못 먹는 거 있어요?”

시온의 질문에 화준은 머리를 굴리며 자신이 못 먹는 걸 떠올렸다. 뭐, 식성은 무난한 편이었다. 다만 당근을 싫어한다는 거? 뭔가 당근의 식감이 싫어서 늘 김밥을 먹을 때도 당근을 빼고 집어 먹었다.

“……당근?”

“그건 못 먹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거 같네요.”

시온이 피식 웃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음식에 당근이 들어간 게 있으면 다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전화 건 곳이 식당이거나 비서쯤 되는 모양이었다. 괜히 번거롭게 만든 거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사장님은 특별히 못 드시는 거 있으세요?”

“전 딱히 없는 거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막 가리는 성격은 아니에요.”

화준은 어쩐지 지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당근을 말한 것도 괜히 후회되는 기분이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실례가 되는 말일지 모르지만 궁금해서, 물어봐도 됩니까?”

“……네.”

“도화준 씨 몸이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아…… 어릴 때부터 발레나 필라테스 같은, 몸 선을 만드는 운동을 주로 해서 그렇습니다. 약물이나 주사 힘도 빌렸고요. 그 때문에 목젖도 드러나지 않았어요.”

마침 차가 신호에 걸리고 시온은 고개를 돌려 그의 목을 바라보았다. 정말 여자의 목처럼 매끈하게 빠져 있었다. 괜히 제 목에 달린 혹을 한번 문지르고 웃었다. 정말 남자가 맞긴 한 걸까. 또 한편으로는 도화준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호르몬 주사를 맞았겠군요.”

“솔직히 말하면 어릴 땐 내가 무슨 주사를 맞는지도 몰랐어요. 그저 막연하게 그 주사를 맞으면 내가 정말 여자가 되어 가는 거 같았으니까 짐작만 했던 거죠.”

주사를 맞기 시작한 건 열세 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외국인 의사가 집에 방문했고, 의사는 팔을 끌어다가 주사를 놓았다. 혈관을 타고 약물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게 너무 아파서 울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 후로는 어머니가 주기적으로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지금까지 맞아 온 주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남성 호르몬 억제제와 여성 호르몬제였다. 그 외에도 수십 개의 약물이 몸속으로 흡수됐다.

“부모님 원망 많이 했겠네요.”

화준은 쓰게 웃었다. 원망도 많이 했고 죽을 결심도 많이 했다. 이렇게 사는 게 너무 버거워 손목을 긋기도 했고,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안정제를 모아서 한꺼번에 입으로 털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지독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준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버리자, 시온도 입을 닫고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차 안에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 흐르며 침묵의 빈자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한참 도로를 달리던 차가 고즈넉한 풍경의 한 기와집 앞에 멈추어 섰다. 화준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려고 하자, 시온이 그걸 만류했다.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곧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뒤쪽에서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자신들이 탄 차를 잔뜩 비추기 시작했다. 아마 그들은 기자 무리일 것이다.

“화창한 날 찍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날씨가 안 좋아서 기자님들이 고생이네요.”

“이것도 저들의 복이죠. 내가 내려서 차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어요.”

화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시온이 차에서 내려 우산을 꺼내 아까처럼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화준이 신은 구두가 바닥에 닿자, 우산이 바짝 다가왔다. 기자들이 있음을 인식해서 그런지 자꾸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한 우산을 쓰고 시온과 함께 한정식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뭔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밀폐된 차 안보다는 훨씬 편한 마음이 들었다.

“이사장님 오셨습니까.”

정갈한 한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다가와 시온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시온은 환하게 웃으며 여성과 인사를 나누었다.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식사는 바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뇨, 식전 차부터 마시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시온은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담배 연기에 기침을 하던 화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참에 담배를 가르쳐 볼까 하는 짓궂은 상상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고운 얼굴이 담배를 물고 있는 건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담배를 케이스 안에 집어넣고 입에 물을 머금었다. 화준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방 안의 인테리어를 살폈다. 평소 인테리어 쪽에 관심이 많은 그는 식당에 놓인 액자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아, 신혼집은 생각해 봤어요?”

“신혼집이요?”

“지금 내가 사는 빌라가 있긴 한데, 거길 좀 손봐서 신혼집으로 사용해도 되고, 아니면 마음에 드는 지역에 아파트가 있다면 그쪽으로 가도 됩니다. 어차피 집은 내 쪽에서 준비하는 거니까 부담 없이 말해요. 돈이라면 차고 넘칩니다.”

“전 딱히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2년만 살 집이고 넓은 평수도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2년이었다. 2년 정도만 살 집이면 굳이 큰 평수도 필요 없고, 그냥 둘이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 지낼 정도의 집이면 충분했다. 화준이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물끄러미 시선을 내렸다. 그에게 결혼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두 집안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도피였다. 어머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2년 후에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을 대비해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화준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빌라, 아파트, 주상 복합, 전원주택 골라 봐요.”

“……저는 빌라가 편합니다. 좀 조용한 빌라로.”

“음, 그건 나랑 취향이 같네.”

시온은 휴대폰을 집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 일대 프라이빗한 빌라로만 몇 개 골라 보라고 지시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식사 하는 내내 대화는 묘하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거의 대화를 주도하는 건 공시온이었고 화준은 거의 작게 웃거나 짧게 대답하는 편이었다.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던 시간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 시온은 원치 않았지만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좋은 관계로 지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찌 됐건 간에 도화준은 공시온 호적에 배우자로 이름을 올릴 상대였다. 어쨌든 2년을 함께해야 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마음을 써 줄 생각이었다.

화준은 상을 물리고 디저트로 나온 과일 접시를 보며 뺨을 긁적였다. 과일이라면 정말 신물 나게 많이 먹어서 보기도 싫은 음식 중 하나였다. 간단하게 커피가 나올 줄 알았더니 얼굴 두 배만 한 접시에 각종 계절 과일이 예쁘게 담겨 나왔다. 시온이 포크로 파인애플을 찍어 가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작게 인상을 썼다. 그가 기민하게 제 표정을 캐치해 물음을 던졌다.

“왜요, 파인애플 싫어해요?”

“아니요. 드세요.”

애써 시선을 피해 보지만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큼한 과즙이 터지면서 미각을 자극하는 상상에 혀가 괜히 따가운 기분이었다.

“과일 안 좋아하는구나. 말을 하지 그랬어요.”

시온이 직원을 호출해 차를 주문했다. 곧 향긋한 매실차가 화준의 앞에 놓였다. 희미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상견례는 집안 어른들끼리 따로 약속을 잡아 만나실 겁니다. 제가 시간을 도저히 낼 수가 없어서. 그리고 결혼 준비도 제 비서가 담당할 겁니다.”

“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생략하기로 했던 예물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우 그룹 첫 며느리라고 아버지께서 신경이 쓰이시나 봅니다.”

“……네.”

화준은 ‘첫 며느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건 정말 시온의 말대로 사기였다. 남자인 몸으로 여자인 척 남의 집에 들어가서 며느리 행세를 한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도화준 씨.”

“…….”

“다른 생각 하지 마세요. 이미 결정한 걸 번복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마치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날카롭게 일갈하는 목소리에 목을 움츠렸다. 시온은 한쪽에 걸어 둔 재킷을 벗겨 팔에 걸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화준 역시 몸을 일으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화준 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팔짱 껴요.”

“……?”

“……3년이나 연애한 설정이라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이따가 들여보내면서 키스도 할 겁니다.”

“뭐라고요?”

화준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키스라니.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준이라는 이름 대신 화경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누군가와 교제를 하거나 신체적인 접촉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여자의 외형은 하고 있지만 속은 남자지 않은가.

“저…….”

“말해요.”

“남잔데요.”

“알아요.”

여상한 낯으로 대답하는 시온을 바라보며 화준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남자라니까? 와, 이 새끼 보통 또라이가 아니구나. 제멋대로 시온에 대한 결론을 내려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취향은 여자보다는 남자 쪽이라서.”

“예?”

“정말 순진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내가 도화준 씨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을 결정한 게 고작 회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

“만약 맞선 자리에 나온 게 진짜 도화경이었다면 난 결혼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온은 화준의 손을 잡아 제 팔에 끼워 넣었다. 엉거주춤하게 팔짱을 낀 모양새가 되었다. 뒤죽박죽 말이 흘러들어 와 머릿속을 헤집었다. 무슨 말이야, 이게……. 화준은 어릴 때부터 워낙 단절된 생활을 해 온 터라 약간 사회성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시온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도 똑같은 맥락으로 생각했다. 사회성이 결여되다 보니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런데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시온은 잠시 화준을 처마 밑에 세워 두고 별도로 마련된 흡연 구역 쪽으로 향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시선은 화준에게 두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화준과 함께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문제점이 제법 많이 발견되었다. 그중 제일 큰 문제는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저 질문하는 법이 없었고 질문에 대답하더도 거의 다 소극적이고 단답형이었다. 음식에도 뚜렷한 취향을 나타내지 않았다. 뭐랄까, 무색무취의 느낌이라고 해야 될까. 시온의 고민이 깊어졌다. 폐쇄적으로 살았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필터 끝까지 타 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휴대폰을 꺼내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이사장님.

“스피치 강사 하나 알아보세요. 입 무겁고 단기간 속성으로 주입할 수 있는 사람으로.”

- 알겠습니다. 사진은 실시간으로 전송받고 있습니다. 언제쯤 기사화할까요?

“시간 끌 필요 있겠어? 준비되는 대로 뿌리세요.”

시온은 통화를 하면서도 화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빨리 오픈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결혼하면 알게 될 일이었다. 다만 도화준이 불안해하는 기색을 보이길래 서로 비밀 하나씩 주고받았다는 의미로 말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도화준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작은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담배를 비벼 껐다.

시온은 화준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밀어 내고 우산 안으로 들어와 섰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제가 남자라는 사실을 잊으신 거 같아서요. 옷은 이렇게 입고 있지만 저는!”

갑자기 시온의 손이 화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단숨에 몸이 밀착되고 뜨거운 숨이 얼굴로 확 쏟아졌다. 그리고 우산이 담장 쪽으로 기울어졌다. 화준이 놀라 그의 몸을 밀어 내려 했지만 허리를 감싼 손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예민한 콧속으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흘러들었다.

“옷을 그렇게 입었을 땐 도화준이 아니라 도화경임을 잊지 말아요. 주위에 카메라가 많습니다. 숨은 천천히 쉬고 자연스럽게 표정 풀어요. 웃을 수 있으면 더 좋고.”

화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담장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우산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눈 감지 말고 나 똑바로 봐요.”

화준은 고개를 들어 시온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까맣고 순한 강아지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시온이 고개를 숙여 화준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아……! 화준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세상이 멈추고 숨도 멈췄다. 시온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화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눈 감지 말랬지, 누가 숨 쉬지 말랬습니까?”

화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리고 딸꾹,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화준이 다급하게 입을 막아 보지만 딸꾹거리는 소리는 연달아 튀어나왔다. 딸꾹,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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