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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4/14)

외전

한 남자가 갈대를 헤치며 걷고 있었다. 흑비단처럼 새까만 머리칼은 잘 넘겨져 고정되어 있었고, 품이 넓은 정장을 입은 그는 구두에 흙이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정처 없이 걸었다.

풀밭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로 끝없는 갈대의 군락을 걷는 남자는 빛바랜 숲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갈대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 나가고는 있었지만 여기가 어딘지, 왜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나 조급하고 답답했다.

그때 느리게 흔들리던 갈대밭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달려들었다.

“왁!”

가느다란 팔을 크게 펼친 채 장난스레 소리를 지른 여자는 놀라 굳은 남자의 표정이 재밌는지 품에 안긴 채 킥킥거렸다. 구불거리는 고수머리가 웃음에 맞춰 같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남자는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품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털어 낸 여자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봤다. 작지만 날카로운 코와 커다란 눈,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은 그 사람의 것이었다.

서시연.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리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남자는 팔에 힘을 주고 여자를 아프지 않게 끌어당겼다. 몰려오는 그리움과 죄책감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 말 없이 풍성한 머리를 조심스레 쓸었다.

얌전히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서시연은 몸을 움직여 귓가에 입술을 댄 후 작게 속삭였다.

“왜 그래…….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요?”

“뭐?”

“그만 일어나요.”

자꾸만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행복하게 웃는 얼굴과 맞지 않는 말이 서시연의 입에서 나왔다. 그 말을 이해하려 눈을 가늘게 떴을 때, 남자는 번쩍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덜컹거리는 버스 때문에 몸이 한차례 흔들렸다. 가냘픈 어깨가 거의 반쯤 접혀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뗐다.

“깨우지 그랬어.”

“곤히 자고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회사 일이 많이 힘드셨구나. 제가 괜히 배낭여행 하자고 해서…… 그런 거죠?”

시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재욱은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가만 보자, 이제 조금 있으면 도착하지?”

“네. 이제 한 30분 정도만 가면! 우웁…….!”

덜컹덜컹-.

시연은 밝게 얘기하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서둘러 어깨를 두드리려 했으나 잠시 굳어 있던 그가 다시 자세를 바로 한 채 민망한 듯 웃었다.

“이제 괜찮아요.”

“그러게, 비행기로 가자니까. 고집은.”

“이렇게 가는 게 낭만이라니까요! 사장님은 이렇게 안 가 봤죠?! 휴게소도 들려서 감자도 사 먹고! 차에서 간식도 나눠 먹고! 멀미도 좀 해 보고!”

“…….”

“아무튼 그런 거예요……. 다음부턴 비행기로 가요.”

재욱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멀미가 나지 않게 서연의 머리를 자신의 쪽으로 기대게 한 재욱은 먼 곳을 바라봤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밖으로 빠져나오자 눈을 찌를 듯 환한 빛이 쏟아졌다. 순백의 구름 밑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빛을 반사시키며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욱은 식은땀까지 흘리는 시연을 격려하며 바다를 가리켰다.

“와, 사람 진짜 많다…….”

숙소만큼은 무조건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재욱의 주장으로 인해 호텔에 짐을 푼 둘은 바다에 도착했다. 사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다는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재욱은 허탈함에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시연을 데리고 택시를 탔다.

“좀 한적하고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 주십시오.”

꽤 오랜 시간을 달리니 한적한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그 크기는 꽤나 작았지만 거의 사람이 없어서 두 사람이 독차지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신발을 벗고 걷는 거예요.”

아, 뜨거워!

시연은 신발을 벗자마자 팔짝팔짝 뛰면서 달려가 바다에 발을 담갔다. 재욱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군말 없이 신발을 벗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꽤 사나운 바닷바람에 검은 바지와 하얀 와이셔츠가 휘날렸다. 눈썹이 보이게 짧게 자른 머리 위로 손 그늘을 만들며 시연을 찾았다. 왠지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시연에게 다가간 재욱은 피식 웃었다.

“……어! 저기 예쁜 조개가!”

시연은 그대로 옆으로 도망을 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한 번 바라봤다. 짠내와 습기가 불쾌하게 온몸을 적셨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청록빛 바다와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모래는 예민했던 신경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평화롭다.

자신을 짓누르던 짐들에서 일시에 해방된 것 같았다. 그렇게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이런 기분을 느끼니 얼떨떨하기도 했다. 강렬한 여름 태양을 느끼며 눈을 찡그린 재욱은 숨을 깊게 삼켰다.

“후우…….”

이제 막 몸집을 불리는 회사를 책임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족 및 친지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일을 미루고 휴가를 온 것은 재욱에게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이 풍경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속에서 잠시 발을 담그고 있던 재욱은 꽤 멀리 간 시연을 불렀다. 조개를 주우러 간다더니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서시연!”

큰 목소리로 불렀지만 시연은 움찔거리지도 않고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갔다. 재욱은 갑자기 왠지 다급해지는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뜨거운 모래가 발바닥을 달궈도, 신발이 파도에 떠밀려 바닷속으로 사라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가 재빨리 시연을 돌려세웠다.

시연의 깜짝 놀란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쉰 재욱이 물었다.

“뭘 그렇게 봐? 내가 불러도 모르고”

“헉! 부르셨어요? 아니 저기…… 해파리가! 해파리 맞죠, 저거? 큰일 날 뻔했네……. 우리 발 담그지 마요. 그나저나 신발은 어쩌셨어요?”

“…….”

신발을 잃어버린 재욱을 보고 시연은 한참을 웃었다. 시연이 웃는 동안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에 웃음소리가 지워지기도 했다. 재욱은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평생 이렇게 살고 싶어요.”

웃음소리가 꺼지고,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어느새 노을이 지는 하늘을 그대로 담은 바다를 바라보는 시연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시큼털털해 보였다.

“그렇게 살면 되지.”

어쩐지 눈 한 번 깜빡이면 시연이 파도와 함께 사라질 것 같아, 시연을 빤히 바라보며 답을 이야기했다. 시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저 겉보기엔 짙은 갈색 눈동자임에도 무언가 복잡하고 깊은 감정을 담은 시선이 몇 초 동안이나 재욱을 바라봤다.

“그래요.”

평생 함께해요.

쏴아아-.

파도가 거칠게 몰아치는 소리는 어느샌가 갈대가 서로 몸을 부딪치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주변을 돌아봤지만 소름 끼치도록 균일한 갈대들만 있을 뿐, 그리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꿈 한가운데였다. 어디서부터가 꿈인 걸까. 분명 옛날에 바다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까 여긴…….’

기억을 헤집어 보니 낯선 곳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앓던 병이 악화되자 시연을 조금이라도 호전시키기 위해 갔던 별장에서, 시연이 기어코 탈출을 감행했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라 빠르게 기억하지 못했을 뿐.

인근 공장을 들러 관계자와 시간을 보내던 중 시연이 도망갔다는 것을 듣고 그대로 뛰쳐나가 하염없이 찾았던 기억이 났다. 숨이 부족해 갈대밭에 쓰러져 있던 것을, 간신히 찾아 그대로 데려왔던 기억.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과거이고, 현실인지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목청껏 그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환상이며,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밖에 없었다.

***

재욱은 넓은 방에서 옷을 점검했다. 훤칠한 키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했다. 커프스부터 부토니에, 시계까지 찬 뒤에야 그는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고 꽤 오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시연의 고향이었다. 시내에서 향기 좋은 꽃다발을 사고 직접 걸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차림새와 커다란 꽃다발에, 걸어가는 그에게 관심이 쏠렸다. 그중에는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재욱은 신경 쓰지 않고 바람을 느끼며 계속 앞으로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시연의 묘비 앞이었다. 만감이 교차했지만 묵묵히 참으며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벌써 그가 떠나간 지도 일 년이 넘게 지났다. 삶은 너무나 짧고, 젊은 시간은 더더욱 짧았다.

찬란했던 시간은 가고 제게 남은 건 외로움과 비참함뿐이었다. 가진 게 많아도 삶의 목적이 없으니 그저 의미 없게 느껴졌다.

숨을 쉬니 눈을 뜨고 아침을 맞는 것일 뿐, 내일 죽어도 별다른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 다행인 것은 이런 고통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뒤늦게나마 바로잡았으니 이것으로 만족했다.

붙들어 두었던 사람이 떠나고 나선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죽고 싶어서 술을 퍼마시기도 했고 눈물도 났었던 것 같은데, 그때 이후론 예전 일을 기억하는 게 힘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산책을 했다. 별채 옆을 지나가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산들아! 뛰지 말랬지!”

“할아부지.”

다리에 답삭 안긴 아이는 꼬물거리다가 위를 바라봤다. 이림은 허둥지둥 나오다가 재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앗! 죄송합니다!”

“아닐세. 괜찮네.”

재욱은 아이를 번쩍 안아 몇 번 쓰다듬어 주고 이림에게 넘겼다. 별채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말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니 싹수가 노랗다 싶다가도, 귀여웠다.

별채는 폐쇄적이었던 담을 허물고 새롭게 단장했다. 이림은 처음에 그곳을 거들떠도 안 봤지만 산들이가 이곳을 퍽 좋아하는 턱에 가끔 놀러 와 부자끼리의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을 보던 재욱은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고리타분한 시절부터 계속된 악습이 끊기고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이미 손을 탄 곳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이 과거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재욱은 그곳에서 별채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삶에 큰 흉터를 남긴 그의 존재는 내게 느껴 보지 못한 감정들을 일깨워 줬으며, 많은 깨달음을 얻게 했다.

가슴을 졸이느라 잠에 들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누군가를 애정하는 마음 때문에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것은 신명한 것이었으며 어떤 것은 악한 것에 가까웠다.

나붓하게 뜬 검은 눈을 바라보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영혼의 울림을 느꼈으며, 자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연인의 모습을 볼 때는 참담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시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가지고 싶어 조급해했었다. 더 완벽하게 갖고 싶어서.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저질렀고,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지만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반드시…….

***

“아빠 갔다 올게!”

“…….”

철푸덕-.

가만히 서 있던 아이가 갑자기 절을 하듯 앞으로 엎드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아이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안 돼……. 진짜 늦었단 말이야. 유모님이랑 잘 놀고 있어.”

“시러! 같이!”

“수업 가야 해……. 이제 진짜 간다?”

“아…… 안 돼!”

눈물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짧은 다리를 움직여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이림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오늘 학교에 가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아침부터 떼를 썼기에 이미 많이 늦은 상태였다. 출석은 글렀지만 시험에 나오는 부분을 알려 주시는 날이라서 꼭 가야만 했다.

“으아앙……!”

별채를 벗어나기도 전에 처절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한숨을 쉰 이림은 문을 열고 아이를 달랬다. 아무래도 버스로 등교하는 건 포기해야겠다. 신발장에 드러누운 채 뒹구는 아이를 안고 눈물을 닦았다.

아이는 통통한 두 뺨을 씰룩거리면서 애써 울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착잡한 심정과 귀엽다는 생각이 공존하는 머릿속으로,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이와 둘이 어디를 가 본 적이 없다.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 산들이. 아빠랑 여행 갈까?”

“에?”

“둘이서만. 이도한 빼고. 산들이가 떼 안 쓰면 가고.”

비밀 공모를 하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자 산들이가 꺄르르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응! 갈래!”

아이를 달래고 그제야 집을 나선 이림은 급하게 뛰쳐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버스를 타려면 족히 30분은 걸린다. 택시를 불러도 촉박한 지경에 이림은 머릿속으로 어느 루트가 빠를지 정신없이 계산했다.

그때, 한쪽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에서 남자가 나왔다. 그는 이림에게 고개를 숙이며 차 뒷문을 열었다.

“태워 드리겠습니다.”

“네? 아…… 저기…… 그럼 부탁드려요.”

갈팡질팡하던 이림은 결국 차를 탔다. 차는 부드럽게 이동하면서 금세 저택을 빠져나갔다. 손목시계를 한 번 본 이림은 그제야 안심했다. 도한은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하라 했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이도한은 퇴원 후 자택 치료를 받고 있고, 이림은 슬슬 취업 준비에 들어갔다. 도한은 굳이 취업할 필요 없다고 얘기했지만 무조건 회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강하게 얘기하니 도한은 눈치만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믿는 건 아니었지만 도한은 각인 해제의 후유증으로 평생 치료를 받게 되었다.

퇴원하자마자 회사로 복귀한 도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의사가 제발 휴식을 취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해도 그는 듣는 척도 안 했다. 그래도 치료는 꼬박꼬박 받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전의 상태가 얼마나 치명적이었으면, 많이 나아진 지금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회사를 다니는 와중에도 혈색이 있는 건지 신기했다.

이림은 치료가 끝나면 곧장 저택에서 나왔다. 그는 이림이 계속 있어 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림이 자신의 의도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함께 산 지가 오래됐다 보니 표정 한 번만 봐도 속내가 무엇인지 대부분 유추가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치료를 받을 때 몇 번 말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기쁘게 생각하기로 했다.

도한은 자신이 꽤나 신사적으로 아주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림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밥은 먹었어?’

‘……아니.’

‘그럼 집 앞에 새로 생긴 음식점 한번 가 볼까? 거기 네가 좋아하는 고르곤졸라 피자로 유명하다던데…….’

이림은 거절을 하느라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귓등으로 들으며 거절했지만, 비서의 말을 엿들으며 도한이 사실 예약까지 한 상태로 넌지시 물어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 뒤로 거절하는 게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림은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다시 치료를 위해 만났을 때, 도한은 똑같이 밥을 먹자고 물었다.

‘밥 먹었으니까 그만 얘기해.’

‘……진짜? 너 1시 이후에 먹잖아. 지금 11신데?’

‘……바뀌었어.’

‘……그래.’

이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감은 채 치료를 받았다. 미심쩍다는 목소리를 들으니 절대로 얼굴을 보여 주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보여 줘도 무슨 상관인가? 이미 들켰는데.

이쯤에서 그만둘 줄 알았지만 도한은 끈질겼다. 없어서 못 판다는 디저트 가게의 마카롱, 초코 마들렌 등을 잔뜩 가져와 내밀었다. 지우가 휴대폰을 보며 또 예약에 실패했다며 부르짖던 바로 그 가게의 디저트들이었다.

‘이거라도 가져가서 먹어.’

‘……됐어.’

‘그래? 그럼…… 뭐…….’

도한은 제 손에 들고 있던 디저트 팩을 아무렇게나 식탁 위에 던졌다. 꽤 큰소리가 나며 예쁘게 포장되어 있던 아이들이 조금 흐트러졌다.

‘…….’

‘이림아, 내가 오늘은 정말로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았는데, 현지인들도 많이 간다는-.’

‘줘.’

‘응?’

‘달라고.’

결국 그렇게 받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놈이 또 남의 뒷조사를 하는 건지, 정말 소름 끼치도록 원하는 것들만 속속 대령해 왔다.

산들이가 갖고 놀다 부러뜨린 외국제 주문 제작 장난감이라든가, 뒤가 헤지기 시작한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를 한 켤레 대령해 온다든가 하는 식의 물량 공세로 사람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림이 또 의심이 가서 다그쳤더니 도한은 눈치를 보면서도 억울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산들이가 부러뜨렸다는 건 유모가 직접 말해서 알게 됐으며, 운동화가 헤진 건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긴 했지만, 도대체 많이 닳지도 않은 운동화 뒤축을 언제 보고 있었는지 기이할 지경이었다.

‘내가 신뢰를 주지 못한 건 맞지만 이제 그런 짓은 안 해. 그냥 너에 대해선 모두 기억해. 기억하려고 외워서 아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는 거야. 내가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눈이 먼저 너를 쫓고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계속 추궁하는 것도 이상했다. 연락하는 빈도수가 많아지고 점점 더 끈질겨지는 것은 맞았지만, 확실히 뒤를 밟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샤워를 하는데 전화를 한다거나, 교수님의 휴강으로 인해 학교에 가지 않은 이림과 밥을 먹기 위해 대학교로 찾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했습니다.”

잠시 과거에 젖어 있던 이림은 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버스정류장 옆 골목에 차를 주차한 기사가 이림의 손목시계를 흘끔 바라봤다.

“늦으신 거 아닌가요?”

“아, 감사합니다!”

그 제스처에 퍼뜩 일어난 이림은 재빨리 내렸다. 그리고 가방을 단단히 쥔 채 정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캠퍼스가 징그러울 정도로 넓긴 했지만 그나마 수업을 듣는 학관이 정문과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사실 아직도 그와의 관계를 정의할 수는 없었다. 벌써 1년이 넘게 지났지만, 페로몬 치료를 위해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한 적은 있어도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기 때문이다.

도한은 러트가 오면 억제제를 먹었고 이림도 히트 사이클이 오면 억제제를 먹었다. 의사는 거의 애걸복걸하며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도한은 끈질겼다.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것을 알았지만 이림은 굳이 고마움을 느끼진 않았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고민이 커질 뿐이었다.

나는 그때, 그를 얼마만큼 받아들인 걸까. 만약 그가 성적인 접촉을 시도해 오면 밀어내야 할까? 산들이가 물어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나의 상처는 어디까지이고, 치유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 걸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시험공부 열심히 하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두 시간 뒤, 강의가 끝나자마자 책을 챙겨 일어난 이림은 학관 옆 벤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우를 만났다.

“아, 맞다. 나 얼마 전에 일재랑 연락 닿았잖아.”

“……일재?”

이림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일재와는 연락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됐다. 도한이 그렇게 깽판을 치고 나서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하려 했지만, 도한은 그가 잘 살고 있다는 얘기만 꺼낼 뿐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혼자서 찾아보려 열심히 찾아다녀도 일재는 성격상 SNS를 하지도 않았고 전화번호는 바뀐 상태라 도저히 연락할 재간이 없었다. 지우도 연락이 되지 않은지 오래됐다고 하니 반쯤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엉. 회사 들어갔다는데? 우리 맛있는 거 얻어먹으러 갈까?”

“음…….”

막상 갑자기 만나려니 당황스러웠다. 아니, 당황스러움보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도저히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이림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지우가 덧붙였다.

“사실 너 안 오면 밥 안 사 주겠대. 아니, 강요는 아니고…… 에이. 가지 마! 가지 말자.”

“…….”

“걔는 왜 그런 말을 해서는……. 걔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역시-.”

“아니야. 그리고 알잖아, 나…… 알겠어. 그럼 밥만 먹자.”

이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저녁 시간이 되면서 가게는 사람들로 붐비는 상태였다. 대학가에 위치한 고깃집에 앉아 있던 둘은 몰라보게 변한 일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림아, 오랜만이다.”

“응……. 일재야, 안녕.”

정장 재킷을 한 팔에 건 채 들어온 그는 멀끔히 빼입은 상태였다. 회사에서 금방 돌아온 듯 조금 피곤한 모습에 이림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일이 많이 힘들어?”

“원래 처음엔 다 그렇지. 아…… 맞다. 나 조교는 포기했어. 너한테 그렇게 말해 놓고 좀 머쓱하긴 하다. 그래도 교수님이 좋은 조건으로 제의해 주셔서.”

“뭘 머쓱해! 잘된 거지.”

이림은 진심으로 축하했다. 매일 긴 바지에 후드 티만 색을 바꿔 가며 돌려 입으며 피곤한 얼굴로 학교에 등교하기 일쑤였던 일재였지만, 인기가 꽤 많았었다. 뭐든지 중간 이상은 했고 습득도 빨랐기에 그에게는 항상 여유가 있었다.

도한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지만, 그가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다면 일재는 티가 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매력으로 작용한 듯 알게 모르게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많았다.

과묵하고 웃음도 많지 않았던 그였지만 취업을 하고 다시 만난 그는 그전보다는 밝아진 느낌이었다. 역시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나 보다.

어색하던 기분은 사라지고, 어느새 지우를 중심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림은 고기를 몇 점 집어먹기만 하며 대화에 집중했다. 대화가 무르익고 배가 찰 즈음 전화기가 울렸다.

“…….”

예상대로 이도한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전화가 오자 지우와 일재가 이쪽을 바라봤는데,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받지 않았다. 물어보면 곤란해지니까.

“왜 안 받아?”

“응……. 스팸 전화야.”

“그래?”

지우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하던 말을 이어 갔고, 이림을 빤히 보던 일재도 고개를 돌렸다. 밤이 깊어지고 술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지우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일어나자.”

“엉? 아닌데! 아직 다 못 먹었는데……. 맞다……우리 일재 신입이라 피곤하지? 미안 미안……. 일어나자.”

“하하. 그건 맞긴 한데……. 일단 가자.”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기 일보 직전인 지우는 택시를 잡아 먼저 차에 올라탔다.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지우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의 술자리가 즐거웠는지 평소보다 더욱 흥분한 모습이었다. 웃음을 한껏 단 채로 좌석 시트에 몸을 누이는 것을 본 일재는 택시 문을 닫았다.

부우웅-.

“집은 잘 들어가려나…….”

“좀 있다가 들어갔냐고 전화해 봐야겠다.”

“안 받을걸.”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대화가 끝나고, 정적이 찾아왔다. 가로등이 희미하게 길을 밝히고 있는 조용한 밤길은 둘의 정적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정말로 사과해야 할 타이밍이다. 이림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려 다리를 굽혔다. 하지만 무릎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일재에게 팔을 붙잡혔다.

“너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사실…… 그날 일 사과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나 때릴래?”

“하아…….”

일재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이림은 우물쭈물하다가 엉거주춤한 상태 그대로 얼어붙었다. 일재는 힐끗 이림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림이 느릿느릿 앉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네가 때린 것도 아니고. 그 미친놈이 때린 건데 왜 네가 사과를 해?”

“그래도…… 아! 그리고 나 너 찾으려고 많이 노력했어. 그런데 찾기가 쉽지 않더라. 진짜야. 믿어 줘. 너한테 그런 짓 하고 입 싹 닫으려던 거 아니었어.”

“강이림, 그만해. 내가 너 임자 있는 거 대충 눈치는 챘었는데 그래도 좋다고 내가 달려든 거고 그 정도 맞을 건 예상했어. 그게 이도한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그 새끼한테 합의금도 톡톡히 받아 냈으니까 우리 그냥 없던 걸로 치자.”

일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에 이림은 아무 말도 못하고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의 마음을 몰랐더라면 무슨 말이든 해서 어색함을 풀 텐데, 알고 나니 안부를 묻는 것처럼 흔한 질문조차 자꾸만 머뭇거리게 됐다. 그걸 꿰뚫고 있는 일재는 정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도 그 사람이랑 지내?”

“아니……. 같이 지내지는 않아.”

“만나기는 한다는 거네……. 흐음…….”

“…….”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구긴 채 목을 울리는 일재 때문에 이림은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연애를 하는 건 아닌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어떻게 말해도 변명이 될 뿐이다.

‘아니, 내가 왜 변명을 해야 되지?’

하지만 일재의 얼굴이, 날 차고 고른 게 결국 그런 쓰레기냐라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면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아니었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이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보이는 이림의 얼굴을 본 일재는 구겨진 얼굴을 폈다. 자신의 고백을 안 받아 줬다고 이렇게 찌질하게 구는 건 서로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별개로 이림이 걱정됐다. 이도한이 그저 단순무식한 쓰레기였다면 이렇게까지 오지랖을 부리며 걱정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도한은 남을 다루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이성그룹이라는 커다란 대기업을 이끌 내정자로 키워졌지만, 정정당당하게 정면승부를 하는 기질을 가진 건 아니었다.

중요한 네트워크 기술을 인수하기 위해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고 오랫동안 계약해 온 하청 업체의 등에 칼을 꽂기도 했다. 비록 여러 매체에서 분석한 것처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가지를 쳐내며 몸을 불렸기에 성장할 수 있었지만 평가는 매번 갈렸다. 기부나 외국 지사와의 협업은 본인의 얼굴과 이름으로 해 왔지만 때로는 남의 이름을 빌려 모종의 일을 벌이곤 했다. 이것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진실이었다.

물론 이런 기질은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일재도 마냥 뒷담화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남자 밑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것과 바로 옆에서 얼굴을 맞대고 사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이림의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지우도 입을 꾹 닫았고 이림은 자신을 피하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도와줘야 하는 일이 있다면…….

일재는 걸음을 멈추고 벤치를 가리켰다.

“나 좀 술 취해서 그런데, 앉아 있다 갈까?”

“……그래.”

이림은 계속 울리는 전화기를 감추며 말했다. 도로 옆 벤치 주변에는 사람들이 종종 다녔지만 그렇다고 시끄러운 건 아니었다. 자동차들의 소음과 바람 소리에 멍하니 머리를 식히던 이림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는데, 너…… 괜찮은 거 맞지?”

“…….”

“뭐, 널 도와줄 주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 못 할 힘든 일 있으면 도와줄 수도 있어.”

일재는 진지했다. 이림은 그 얼굴을 보면서 새삼 많은 세월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무 살이었던 둘은 어느새 20대 후반이 되어 있었다.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채 후드 티만 입고 다니던 그는 어느새 단단한 뺨을 갖고 있었다. 이도한보다는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우성을 제외하면 알파 중에서도 커다란 체격이었다.

아마 스무 살 때 이후로 계속 컸나 보다.

이림은 고마움을 느끼며 살짝 웃었다. 자신을 아무 대가 없이 도와준다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리고 설령 그가 몇 년 전에 자신을 도와준다고 제안했더라도, 그 손을 잡을 순 없었을 것이다. 일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물어라도 보는 것과 아예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이림은 그제야 경계를 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울 한복판이라 그런지 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새하얀 달이 눈부시도록 환했다.

“우리가 저번에 만났을 때에 비하면 잘 지내는 편이야. 고마워. 그런 말, 해 주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냥 고마워하라고 말한 거 아니야. 정말 뭔 일 있어?”

그는 답답하다는 듯 물었지만 쉽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아마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겠지. 이림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내밀었다.

“산들이야. 귀엽지?”

“혹시…… 네 아이야? ……아니지?”

“맞아.”

“…….”

일재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닫았다. 왠지 착잡해 보이는 모습에 이림은 한숨을 내뱉듯 고백해 왔다.

“나도 너한테 다 얘기하고 싶어. 속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너도 지금 봤겠지만,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예전에는 그걸 바라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내 삶의 목적이 달라졌어. 상황이 변했고 내 생각도 변했으니까.”

“말을 제대로 안 해 줘서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무슨 생각인지 알겠어……. 그렇다고 이해가 가는 건 아니야. 솔직히…… 답답해. 왜 그런 길을 자처하는 건데?”

“글쎄……. 사실 나도 만약 주변에 나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화가 나서 쓰러졌을지도 몰라. 참 웃기지? 나는 절대 저렇게 안 해야지, 하면서 살았는데 누구보다 바보 천치로 살고 있으니까. 옳지 않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만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옳지 않은 걸 알면서도 왜 그만둘 수 없는 걸까…….”

“…….”

“일재야. 뭐가 날 이렇게 만드는 걸까? 뭐가 문제지……. 내 성격? 이도한? 아님…… 그냥 이 거지같은 환경?”

이림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하지만 정제된 감정이었다. 이미 그 의문에 수십 번 깨지고 굴복당한 이림은 밧줄에 묶인 사람 같았다. 어떤 보이지 않는 밧줄에 매여 조용히 슬픔을 이겨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무리 이겨 내려 해도 모두지 이 관계를 끝낼 수가 없어. 그냥 이게 정해진 운명 같아. 미안……. 보기 답답하면 더 이상-.”

“아니야.”

조금씩 느려지는 목소리를 들은 일재는 고개를 저었다. 이림을 설득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 중 일부는 이해가 갔다.

자신도 이림을 향한 마음을 끊어 낼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있고 아이까지 있는 이림을 포기하고 연락을 끊어야 하는데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자꾸만 이림이 생각나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고백을 거절당한 순간부터 아예 관심을 껐어야만 했다.

“함부로 말해서 미안. 자꾸 그 자식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것 같아서 그랬어. 내가 데려다줄게. 이만 가자.”

***

그런 한편, 도한은 안채 중 한 곳에 앉은 채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림에게 다섯 번을 넘게 전화한 것 같은데 단 한 번도 받질 않았다. 마음 같아선 수십 번을 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는 중이었다.

그나마 늦게 온다는 메시지를 받아서 망정이지, 오밤중에 난리를 치며 대학가를 헤맬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자신은 몇 시간 째 언제 오는지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그는 문자 하나 보내 놓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전화하면 분명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예전 같았으면 전화고 뭐고 위치 추적기로 손쉽게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관뒀다.

사실 지금도 붙일까 말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결국 그만두자는 쪽이 조금 더 우세했다. 이미 한 번 신뢰를 잃었는데 다시 한 번 속인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이림은 그때 그 병실에서 이별을 이야기했다. 도한의 통제와 감시로부터의 이별이었고 서로가 잡고 있는 끈이 지금보다 가냘파지길 원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기적과 같은 상황이었기에 도한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대로 이림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과거를 떠올리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비록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시간이 너무도 힘들어서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결국 도한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정오가 넘어간다면 그를 찾으러 나서야만 했다.

-도련님, 강이림 님 들어오십니다.

내선 전화기로 그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안 도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림이 다른 사람과 교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 이렇게 연락을 안 받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돌아 식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그로 가득 차서, 보던 서류도 내팽개치고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재킷과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도한은 재빨리 일어나 옆방으로 건너갔다.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안채는 별채와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따뜻한 색감의 조명을 놓고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으로 맞춘 가구가 놓인 곳은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커다란 창을 열면 쏟아질 듯 흐드러진 벚꽃나무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

이림의 취향으로만 철저하게 꾸며 놓은 방은 도한이 그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할 때 사용되었다. 딱히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은 이림은 계속 그의 제안을 거부해 왔다. 하지만 한 번 방을 보자 계속 생각나기 시작해서, 산들이도 가세한 덕에 이림은 얼결에 그 방에서 살게 되었다.

사실 도한은 자신과 같은 방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기상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사실 애가 닳을 대로 달아 미칠 것 같은 상태였다.

그때 이후로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 왔다. 처음에는 감격스러워서 이림이 무엇을 해도 마냥 좋았다. 그냥 자신의 앞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할 지경이었다. 무심하고 차가운 낯을 봐도 한 번이라도 더 말을 붙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매일같이 새로운 식당을 알아보고, 휴가지를 정해 왔다. 번번이 퇴짜였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연락이 안 되면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알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게 답답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주인을 기다리는 개 마냥 한 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휴대폰도 부숴 버리고 사람을 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뼈 아픈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그렇지만 이 터질 것 같은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림의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어서 계속 호흡을 골랐다.

그렇게 복도에서 몇 분 동안이나 숨을 내뱉던 도한은 이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림을 볼 수 있었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은 이림은 도한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과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니 오늘 술자리가 있었나 보다.

“밤중에…… 무슨 일이야?”

도한은 이림이 알아서 집에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직접 얼굴을 봐야 안도할 수 있었다. 의아한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성큼성큼 다가가 껴안자 이림의 몸이 굳었다. 전혀 힘을 주지 않은 채 손과 어깨만을 사용해 몸을 껴안은 도한은 안도감에 속삭였다.

“전화도 안 받아서…… 너무 걱정했어.”

“……늦는다고 얘기했잖아.”

“문자 하나 보내 놓고?”

“……그럼 뭘 더 해야 해? 이것 좀 놔.”

이림은 도한을 강하게 밀쳤다. 도한에겐 그다지 강한 힘이 아니었지만 그냥 밀려나 줬다. 갑작스럽게 접촉을 했는데도 당황할 뿐, 기분 나쁘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근 1년만의 접촉이었다. 도한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모른 척하며 방에 따라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지금에서야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했다.

그러나 이림은 들어오려는 도한을 노려봤다. 어딜 들어오냐는 표정에 도한은 결국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매몰찬 행동이었지만 도한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의 접촉에도 불쾌해하지 않는 이림의 행동 때문에 가슴이 뛰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도한은 방으로 들어가며 피식 웃었다. 비굴할 정도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제 품새가 웃기긴 했다.

하지만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몇 년 전 자신을 거부하며 죽음을 택하려 했던 그때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천국과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입을 맞추고 싶고 온몸을 깨물고 핥고 싶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의 몸을 삼키고 싶어졌다. 스스로 제어하지 않으면 정말로 그렇게 해 버릴 것 같았다.

이림이 앞에 있지 않으면 그다지 수음도 관심이 없었다. 성욕이 없다시피 살다가도 종종 꿈에 나오는 이림 때문에 몽정을 하기도 했다. 어릴 때 이후론 겪지 못했던 현상을 겪자 어이가 없었다.

친형은 도한이 조금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세한 내막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그는 처음에 도한이 수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포복절도했다. 유흥을 즐기지만 그다지 사람을 믿지 않는 형은 그렇게까지 한 사람에게 매달리는 도한이 이해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도한도 이림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신의 힘으로 회사에 성과를 올리는 데만 열중했을 뿐, 다른 욕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주 꼴값을 해 댄다고 비웃는 형 앞에서도 도한은 태연했다. 그런 일에 자괴감을 느낄 시기는 지났다. 그냥 지금은 이림과 함께 같은 지붕 아래 산다는 것에 행복할 뿐이었다.

들풀과 벌레가 숨죽인 밤, 도한은 한참 동안 달빛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예전의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매달리던 이림이 생각났다. 자신이 감정의 우위에 있다고 믿으며 마음대로 다뤄도 이림은 휩쓸리기만 할 뿐,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달콤하고 오만했던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빈털터리가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이림이 기억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절대 불가능한 영역이다.

의미 없는 가정을 할 바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더 이로울 것이다.

도한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

시간이 흘러 기말고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이는 착하게 떼를 쓰지 않은 채 잘 참고 있었고, 이림은 그런 아이가 기특했다.

그리고 도한에게는 비밀로 한 채 휴가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게 처음이니 멀리 가지 않기로 했다. 시내 외곽의 한 펜션을 빌린 이림은 기사까지 매수했다. 슬슬 말도 할 줄 알고 표현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톡 하면 넘어질 듯 연약하고 작은 아이였기에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험과 여행 준비를 병행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아기용품이나 주의사항을 유모님이 알려 줘서 다행이었다. 학교에서 펜션 예약금을 입금한 이림은 한숨 돌렸다. 도한이 알면 어떻게 될까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골탕 좀 먹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제 딴에는 많이 인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함부로 몸을 건드리지도 않았고, 이림이 매몰차게 식사 자리를 거절해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벌써 2년 가까이 그랬는데도 딱히 화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은근한 접촉이 있었다. 옷에 먼지가 묻었다며 털어 낸다거나 얼굴에 속눈썹이 붙었다는 둥의 말을 하며 아닌 척 접촉을 해 왔다.

너무나 의도가 뻔히 보여서 어이가 없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름이 끼치거나 구역질나는 기분은 아니었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다가도 한 번씩 바짝 다가오는 그의 커다란 몸을 보고 바짝 긴장하다 보면 그 말의 진위 여부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이림 자신도 그와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면 연인이라기 보단 그냥 의리로 사는 가족에 더 가까운 것 같았지만, 다 묻어 두고 연인처럼 지내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이대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한이 알면 기절할 소리였지만 이림은 이 잔잔한 일상이 좋았다. 육체적인 관계도 없고 애정을 주고받지도 않지만 꼭 이 관계를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버리지 않겠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사실 서로를 놓아주는 게 제일 좋은 방향이었고 이림은 손을 놓아 버리며 포기했지만 도한이 끈질기게 붙잡았다.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어떤 기억들은 희미해져 갔다. 만약 아주 예전의 일도 모조리 기억할 수 있었다면 다시 함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압적이었던 도한의 눈빛과 말투가 아주 옛날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그는 얌전했다.

처음에는 도한의 아버지인 재욱의 제안을 듣고 왜 바로 도한을 찾아갔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딱히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도한과 자신을 갈라 놓은 가장 큰 갈등은 바로 결혼이었다. 자신에게는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정부나 되라는 소리였다.

그때 이림은 영혼이 부서졌다.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단순한 상처만 남긴 게 아니었다. 그것은 그대로 속박이 되어 끊임없이 정신을 흔들었다.

그렇기에 재욱이 말했던 결혼은 자신에게 의미가 남달랐다. 오랫동안 웅크려 있던 스무 살의 자신이 알을 깨고 탈출한 것이다. 이림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해방감에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정략결혼이라는 속박이 사라지고 도한은 더 이상 강압적으로 굴지 못하게 됐다. 이제 이림이 해결해야 할 일은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도한과 아이,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씩 천천히나마 그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비록 연인도 부부도, 남도 아닌 애매한 사이가 되어 버렸지만 이림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더 행복했다.

언제든 그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는 주도권이 생겼다는 것은 이림에게 기묘한 해방감과 기쁨을 안겼다.

도한이 죽을 것 같다며 매달려도 용서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문제가 해결되니 다른 문제도 자연스레 풀렸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모든 것이 원상복구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림을 놓아주지 않고 억지로 가둔 건 온전히 도한의 선택이었다. 그 상처가 언제 아물지는 모르겠다.

띠리링-.

[그날 집에 잘 들어갔어? 그날은 내가 많이 실수했다. 미안해.]

일재의 문자였다. 왠지 담담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피식 웃었다. 이림은 답장을 보냈다.

[응. 괜찮아.]

그날 이후로 둘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우 말고도 더 연락하는 친구가 생겼다는 게 기뻤다.

‘친구는…… 아닌가?’

소극적인 이림은 학교 내에서 지우 외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학업 외에도 할 일이 산더미였기에 술자리에 참여하거나 축제를 즐긴 적도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부담스러웠다.

나이도 꽤 많은데 휴학을 몇 년이나 한 상태였으니, 이림은 누가 전해 주지 않아도 자신에 대해서 다들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굳이 변명하기도 싫고 그 관심이 부담스럽기만 해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보니 계속 연락을 이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이기적인 건가?

지우가 그랬다. 관심이 없으면 여지를 주면 안 된다고. 그건 그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행동이라고 했다. 소주를 들이켜며 우는 지우는 같은 과 동기에게 차인 상태였다.

그때는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자신이 하는 짓이 그런 여지를 주는 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해하게 하면 안 되겠지.”

이림은 머뭇거리다 한 개의 문자를 더 보냈다.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이림은 그 문자를 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이렇게 하는 게 일재에게도 좋을 것이다.

***

여행 전날. 이림은 방구석에 싸 놓은 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유모는 계속 산들이와 이림을 걱정했는데, 한참 생각하던 이림은 유모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제가 껴도 될까요?’

‘그럼요. 사실 저도 조금 무서웠어요. 아이랑 둘이 하는 여행, 저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열심히 배울게요.’

그렇게 비밀리에 성사된 여행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히 이림의 몫이었다. 알람시계를 맞추고 지갑도 야무지게 챙긴 이림은 캐리어를 한 번 바라봤다. 셋이 떠나는 여행이라.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왠지 잠이 안 와서 뒤척이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일재였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림은 별다른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림아.

“응?”

-너 취업 자리 알아보고 있다며. 우리 회사 경리 뽑으려고 한다는데, 지원해 볼래?

“어, 정말로? ……근데 나 아직 3학년이라 졸업 학점 채우려면 멀어서…….”

-아…… 맞다, 미안. 왜 까먹고 있었지.

낭패라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이림은 웃음이 났다. 회사 공고가 올라왔을 때 이림이 회계 자격증을 땄고 고학년이라는 것만 급하게 기억해 낸 일재는 다른 것은 다 까먹고 이림에게 허겁지겁 전화를 건 것이다.

부끄러운 듯 말이 없는 일재의 숨소리를 들으니 더 웃겼지만 애써 참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한참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달칵-.

사실 별채에서 살던 버릇 때문에, 문을 잠글 수 있어도 잠그지 않고 살았다. 잠을 자기 전에만 잠가 놓았는데 사실 복도와 저택 담벼락에 사각지대 없이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경호원들이 포진해 있었으므로, 잠글 일이 딱히 없었다.

이렇게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이림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서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누구세요?”

“강이림. 나야.”

불쑥 큰 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표정인 얼굴을 보니 안도감과 동시에 화가 났다.

“왜 마음대로 들어와?”

“네가 노크해도 못 들었잖아. 웃기만 하고.”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느껴졌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어버린 이림은 그가 왜 이러는지 생각해 봤다.

무슨 중요한 할 말이 있었던 건가?

만약 많이 급했던 일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림은 화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근데 무슨 일이야?”

“……방금 누구였어?”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상한 것을 물었다. 역시 별일도 아니었나 보다. 그는 굳이 알려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감시당했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더욱 경계의 눈초리로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쥐었다.

“왜 알려 줘야 해? 별일 아니니까 그만 가. 다음부터는 함부로 들어오지 마.”

“…….”

숙인 고개를 든 도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요즘 자신의 앞에서는 항상 웃는 표정 아니면 유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런 건지, 이림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도한과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그래, 잘 자.”

그러나 도한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인사를 한 후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사달이 일어날 듯 팽팽해졌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이림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한편에 조용히 놓인 캐리어가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짐을 확인하던 와중에 전화를 받았다. 이미 일재와 통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캐리어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방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온 도한이 캐리어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갑자기 해진 운동화 뒤축을 알아챈 그가 떠올랐다.

“…….”

이림은 약간 죽고 싶어졌다.

다음 날, 이림은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짐을 싸서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여행을 갈 뿐이다. 원래는 몰래 가려다가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로 인해 실패하게 됐지만 상관없었다.

그래서 출발하기 한 시간 전, 이림은 도한의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달칵-.

층고가 높은 커다란 방은 화이트 톤의 이림의 방과 비교했을 때 많은 부분이 달랐다. 정말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안 그래도 넓은 방이 더 커 보였다. 사실 말만 방이지 18평이 넘는 데다 주방, 게스트 룸까지 딸려 있으니 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도한은 침대 앞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토요일인데 일이라니. 심지어 지금은 오전 아홉 시였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잠을 제대로 잔 것 같지가 않다.

괜히 머쓱한 느낌에 이림이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도한은 이림이 뻔히 있는데도 아무 말도 없었다. 다시 서류를 바라보는 도한을 보며 이림은 입만 우물거렸다.

당당하던 기분이 전부 사라진 상태였지만 이대로 방을 나가는 것도 웃겨서 이림은 입을 열었다.

“저기, 나 여행 갔다 올게. 산들이랑 유모랑.”

“……셋이서?”

도한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왠지 안도감이 들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 나도 이것만 다 끝내면 갈 수 있으니까.”

“응……?”

이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어딜 가는 건데?”

“어디긴 어디야. 너 가는 데 가는 거지.”

도한은 뻔뻔하게 대꾸한 후 다시 서류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나 당당해서 순간 이림은 자신이 그에게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있었나, 기억을 되돌렸다.

사락사락-.

서류가 넘겨지는 소리와 PC 패드에 손가락이 닿는 소리만이 들리는 방 안에서, 이림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냥 도망가?’

이림은 문을 흘끔 바라봤다.

해 온 짓이 있으니 자신을 잡고 못 가게 막지는 않을 테지만, 도한은 의외로 잘 토라지는 성격이었다. 솔직히 그걸 왜 티를 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모른 척하면 점점 더 일이 커졌다.

평소에는 잘 타지도 않던 스포츠카를 끌고 정문 앞에서 기다린다거나, 하도 밥을 먹으러 가재서 레스토랑에 가면 그곳을 전부 빌려 아늑하게 꾸며 놓았다.

이런 구린 짓을 상당히 질색하는 이림의 반응을 즐기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왜 저래.’

이림은 대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떼어 놓고 가 봤자 자가를 이용해서라도 펜션에 찾아올 놈이었다.

삐지든 말든 알 바는 아니었지만 분명 휴가 내내 아닌 척 졸졸 쫓아다닐 게 분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존심이 상해서 하지도 않을 일이었지만, 도한은 무시하는 쪽이 민망할 정도로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아 했다. 예전처럼 강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림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시도는 해 보기로 했다. 정말로 안 쫓아올 수도 있으니까.

편한 트레이닝 복에 흰 티를 입은 도한은 아무것도 모르고 일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이림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뒤로 걷다가 재빨리 돌아서 뛰었다.

타악-.

우당탕-!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마자 거센 힘에 의해 문이 닫혔다. 등 뒤에서 힘차게 오르내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어깨와 다리, 그리고 머리 위로 뻗어진 도한의 손이 이림의 몸에 조금씩 닿았다.

도대체 언제 온 거지? 방금까지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도한은 조금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이림은 조금 울컥해서 뒤를 돌았다. 도한은 조금 머리가 흐트러진 것 외에는 아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보니 책상 앞이 엉망이었다. 펜이 떨어져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었고 의자는 뒤로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싫어. 난 너랑 안 갈 거야.”

“그래?”

도한은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한쪽 눈썹을 올린 채 다시 한 번 묻던 그는 뒤로 물러나 다시 입을 열었다.

“산들이는 같이 가자고 하던데.”

“……거짓말.”

“물어볼까?”

그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유모, 애 좀 바꿔 줘요.”

-……아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분명 산들이었다. 눈이 커지는 이림을 보던 도한은 다정하게 말했다.

“산들아, 아빠 어디로 가면 돼?”

-……멀라. 빨리 와아.

아이는 칭얼거렸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는데 아무도 보이질 않으니 애가 타는 듯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정말 아이도 도한이 이 여행에 끼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아이를 달래던 도한이 전화를 끊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림의 얼굴을 가볍게 감쌌다.

“아이는 잘못 없어. 우리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거 걔도 알아. 그래서 제 딴에는 열심히 우리 둘이 화해하라고 이러는 거야. 내가 물어보니 우물쭈물하다가 얘기해 준 게 다야.”

아이는 어리지만 감이 날카로웠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부모 둘이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도한의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굳어지는 이림 때문에 티를 내지 못한 아이였지만 많이 애가 탔나 보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진 말고. 그리고…… 네가 싫다면 안 갈게.”

“……다 해 놓고?”

이림은 어처구니가 없는 동시에 짜증이 나서 물었다. 항상 제멋대로 굴어 놓고선 마지막엔 한발 물러난다. 그리곤 선택지를 주는 척하는 게, 상당한 악질이었다.

하지만 도한은 순순히 물러나며 사과했다.

“미안……. 사실…… 심술 나서 그랬어.”

“뭐가?”

“솔직히 말하면, 내 앞에서는 항상 무표정이면서 다른 사람이랑 전화하면서 웃는 게 싫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서 나도 애가 타.”

“…….”

이림은 어제 그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설마 그 얘기인가?

“그건 그냥 취업 자리 소개해 준다는 얘기였어.”

아니, 내가 왜 변명을 하는 거지?

이림은 잠깐 손목을 내려다봤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이젠 정말로 출발을 해야 했다.

“두고 가면, 따라올 거야?”

“……네가 싫다면 안 가.”

애써 실망감을 삼킨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이림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두고 간다는 건 애초부터 같이 가기 싫어서 그런 건데, 그럼에도 또 쫓아오는 건 내가 싫다고 하면 안 간다?

말이 맞지가 않았다. 그만큼 도한도 한계에 몰린 것 같았다. 어쩐지 자포자기의 빛을 띠고 있는 낯을 보니 이림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빨리 나가자. 늦겠어.”

***

“와따!”

산들이는 이림이 보이자마자 쭈그린 몸을 펴고 달려왔다. 또 안아 달라며 팔을 뻗는 산들이를 낚아채듯 안은 건 도한이었다.

마냥 좋다고 안기는 아이를 데리고 차에 탄 도한은 아이를 넘겼다. 이림은 아이를 받아들며 주변을 바라봤다. 유모는 별채에서 천천히 나오며 손을 흔들었다.

“같이 가셔야죠!”

“모처럼 셋이서 오붓하게 보내다 오셔요.”

유모는 처음에는 아이가 걱정되어 갈 생각이었지만 도한이 함께 가니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도한은 어렸을 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을 데리고 많이 놀러 다녔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아이를 어떻게 케어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얼마 전까지 걸음마도 못 하던 아이를 능숙하게 돌봤었다.

그래도 자신이 가서 돌보는 게 편하겠지만 셋이서 가는 게 보기 좋은 그림이었다. 어쩔 줄 몰라 고민하던 이림은 빨리 가라는 유모의 재촉에 결국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도한은 그사이 짐을 옮겨 실은 채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다들 제대로 안전벨트를 했는지 확인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부웅-.

도한은 신호를 기다리며 살짝 옆을 바라봤다. 이림은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고 있는 중이었다. 가느다란 목덜미가 살짝 보이다 다시 머리카락으로 덮였다.

‘머리카락 잘라야겠네.’

사실 방금 전까지도 질투 때문에 미쳐 버릴 뻔했었다. 성질을 많이 죽였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제, 이림의 방 앞에서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정말로 비참해졌다.

지금까지 나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 도한이라고 거절당하는 게 마냥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열 번 중에 아홉 번은 거절하는 이림 때문에 심술이 났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모두 평범한 이벤트였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다 제 손으로 해 온 것이다. 아무도 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그걸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기에, 거절당해도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쌓이고 쌓인 감정이 그 순간 폭발한 것이다. 그래서 노크를 했는데도 답이 없었다는 핑계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쪽에 얌전히 놓인 캐리어를 발견한 순간 이성이 끊어지는 듯했다. 그래도 도한은 이림이 나가라고 하는 소리에 묵묵히 밖으로 나갔다. 정말 조금만 더 있다가는 사달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질문도 없이 나온 것만 해도 아주 장족의 발전이었다. 스스로를 컨트롤하기 힘들어질 때마다 도한은 한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숨만 간신히 쉬며 죽음을 기다리는 이림의 모습이었다.

그때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비록 지금 당장 뛰어 들어가 캐리어를 박살 내고 어디로 갈 생각인지 다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참으며 애써 발걸음을 돌린 그는 다른 방에서 한바탕 소동을 피웠다.

전등 빼고 남아 난 게 없는 방 안에서, 망가진 가구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도한은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집에서 이림과 가장 가까운 존재, 바로 이한림이었다. 본명은 이한림이었지만 어쩐지 집에서는 산들이로 불리는 아이는 정확히 이림과 자신을 반반 빼닮았다.

사실 아이의 이름을 한림으로 지은 건 순전히 자신의 욕심이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이림의 뜻이 담긴 산들이라는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와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한림이라는 이름을 붙여야만 했다.

스스로의 성질을 죽여 가며 얌전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가끔 불쑥불쑥 새어 나오는 소유욕과 질투는 버거운 감정이었다.

아무리 점잖게 행동하려 해도, 더러운 피를 타고 이어진 이성그룹 알파들의 지독한 면은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오메가를 향한 일차원적인 욕망에 천박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들의 본성이었다.

하지만 그 욕망대로 날뛸 수 없었다.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법칙은 그런 욕망을 찍어 누르는 강력한 힘이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숨이 끊기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누군가는 의미가 있다고 했지만 도한이 보기엔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도한은 과거에 했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의 목숨이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림이 없으면 살아갈 의미가 없었기에, 죽음이 두렵진 않았다. 그러나 이림의 죽음은 아니었다.

도한은 피가 솟는 주먹을 대충 닦은 뒤 유모에게 아이를 데려오라 지시했다. 붕대를 감싸 벗겨진 피부를 가리는 동안, 품에 안겨 온 아이가 멀뚱멀뚱 서 있었다.

벌써부터 높게 솟은 코와 진한 눈썹은 자신을 닮았으나 눈은 이림을 쏙 빼닮았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유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이는 도한이 아무 말 없이 빤히 바라봐도 계속 눈만 끔뻑였다. 이림이 보이기만 하면 안기려고 발버둥 치는 것과는 영 달랐다.

아이라서 그런지 숨기지를 못한다. 도한은 피식 웃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림에게 하는 것처럼 살갑진 않았다. 그래도 손짓을 하니 달려와 안겼다.

“한림아, 지금부터 네가 아빠를 도와줘야 하거든?”

“웅…….”

“지금 이림 아빠랑 화해를 하고 싶은데, 아빠가 많이 잘못해서 못하고 있어. 한림이가 도와줄래? 아빠가 뭐 숨기는 거 있니?”

“어…….”

사실 아이는 부모가 사이좋았던 시절을 알지 못했다. 태어날 때 이미 사이가 최악이었기에, 아이는 두 아빠가 서로 좋아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한쪽에 도한 아빠 손을, 다른 한쪽에는 이림 아빠 손을 잡으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아서 얼른 비밀을 내뱉었다.

“여행 가!”

“여행…… 언제?”

“움…… 열 밤……?”

도한은 여러 가지 단어를 내뱉는 아이의 말을 유추해서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림이 아이와 둘이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유모도!”

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기를 들었다. 끌려온 유모는 처음엔 비밀을 지키려 필사적이다가 진실을 얘기했다. 도한이 끈질기게 설득하며 이림과의 관계를 호전시키고 싶다고 애원한 탓이었다.

출발은 내일. 도한은 밤을 새워서 업무를 처리하고, 월요일은 연차를 쓰기로 했다. 비록 전화한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면 어떻게든 나가떨어지게 할 자신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보를 얻는 건 참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다. 쉬운 방법이 있는데 어렵게 돌아서 가려니 좀이 쑤셨다.

하지만 도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이림은 스스로 제 방에 찾아왔다. 시선은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온몸의 신경은 이림을 향해 있었다. 어제 통화했던 사람이 누군지가 여행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졌지만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여행에 따라가리라 선언했다.

이림은 도한이 토라졌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사실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오해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도한은 신경을 한껏 곤두세우고 있다가 도망가려는 이림을 잡았다.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거칠게 일어선 도한은 처연해 보이는 눈을 바라보자마자 거칠어졌던 감정이 사그라든 것을 느꼈다.

결국 이림에게 선택권을 줘 버렸다. 이렇게 무기력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주인의 선택을 기다리는 하인마냥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 내릴 수가 없었다.

이림이 알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당연히 초대되지 않은 사람이 같이 여행을 가는 게 더 이상하다고 하겠지.

맞는 말이었지만 여태 비상식적으로 살아온 도한은 그런 모든 것들이 어려웠다. 혼자 기대하고 준비하다, 이림이 싫다고 하면 모든 것은 가치를 잃어버렸다.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국 도한은 체념한 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림이 예상 외로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렇게 성사된 여행길에 오른 상태에서도 도한은 얼떨떨했다. 이림이 거절할 줄 알고 반쯤 포기한 상태였는데 허락을 해 준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어올라 도한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의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방식이 뭐가 중요한가. 사실 도한은 자존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흔한 재벌들이나 사업가들이 가진 것을 믿고 큰소리를 칠 때, 도한은 하나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해 물밑 작업을 하는 쪽이었다.

그것이 이림에 관한 것이라면, 아예 자존심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를 갖기 위해 연기도 서슴없이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자 지금까지의 발전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되는구나. 도한은 하나를 더 배울 수 있었다. 억지로 휘두르지 않고, 잡지 않아도 곁을 차지하는 방법을 약간이나마 터득한 도한이었다.

***

그들이 향한 곳은 강원도의 한 펜션이었다. 처음 숙소를 잡아 본 이림은 도한의 차가 시내를 지나 한적한 마을로 계속 들어가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차가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놀러 가 본 적이 거의 없으니, 숙소 위치가 교통수단이 좋은지 아닌지 알아보는 이런 사소한 것도 놓치기 쉬웠다. 그냥 깨끗하고 넓어서 덥석 예약해 버렸다.

도한은 그곳에 조리할 수 있는 곳이 있냐고 묻고는 근처 마트를 들려 장을 보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도한을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카트에 과일과 야채, 각종 음료수들이 쌓여 있었다.

마트를 떠나서 도착한 곳은 사진보다 훨씬 예뻤다. 잔디는 잘 관리되어 있었고 모든 방이 깨끗했다. 마당 한편에는 선베드도 설치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놀러 왔다는 기분이 한껏 나는 바람에 이림도 들뜬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바라봤다. 도한의 매의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며 짐을 옮겼다. 좀 외진 곳에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진 않았다.

아이는 한편에 마련된 키즈 풀장을 보고 신이 나는지 팔짝팔짝 뛰었다. 이림이 2층까지 둘러보는데, 어느새 짐을 다 푼 도한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왠지 머쓱해져서 옆으로 다가가 얼쩡거렸다.

“뭐 도와줄 거 있어?”

“아니, 내가 할게. 너는 그냥 아이 좀 돌봐 줘.”

도한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림은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자신도 갈아입었다. 그리고 야외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튜브를 낀 아이는 온몸을 휘저으며 돌아다녔다. 구간마다 물의 높이가 달랐고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으로 오긴 했지만 아직 아이가 혼자 놀기에는 깊었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이림은 아이가 혼자 노는 걸 보다가 가끔씩 놀아 줬다.

간지럼을 태우거나 몸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내리길 반복했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장난치면 장난치는 대로 까르르 웃는 아이는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 하루 종일 웃는 건 처음 봤다.

더운 태양 아래, 시원한 수영장에서 자신의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왠지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하지만 주책맞게 울지는 않았다.

그렇게 30분을 더 있다 보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강타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식탁은 이미 진수성찬이었다. 거창한 요리는 없었지만 모두 그럴싸했다. 도한은 깜짝 놀라 서 있는 이림을 앉히고, 아이의 앞에는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작게 잘라 줬다.

아이는 음식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눈동자를 휙휙 돌리며 둘을 바라봤다. 음식 차가워지기 전에 먹으라고 얘기를 한 도한도 음식 맛을 제대로 못 느끼고 있긴 했다.

단란한 식사라니. 이번 생에는 글렀다고 생각했었다.

도한은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씹는 이림을 보다가 눈이 마주쳐 흠칫 놀랐다.

“맛있네. 고마워.”

“그래.”

이림은 언제나 예의를 지켰다.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와도, 웬만해서는 그랬다. 지금도 군식구로 딸려온 도한이었기에 어쩌면 식사 준비를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제도 마음대로 방 안에 들어간 도한에게 화를 내면서도, 다시 이런 행동은 하지 말아 달라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천성이 그랬다.

하지만 왠지 그럴 때마다 도한은 이상한 충동을 느꼈다. 저 단정하고 예의 바른 얼굴을 허물고 싶다는 욕망. 자신에게 화를 내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이상하고 뒤틀린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보다, 제게 지어 주던 웃음이 배는 더 그리웠다. 언제 마지막으로 웃어 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광대가 약간 솟으며 입꼬리를 휘던 그 얼굴이 그리웠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그 웃음을 되찾을 수 있는 첫걸음이었다. 설령 불가능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림이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고, 이림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이 순간조차 꿈만 같은 상황이었으므로.

하루 종일 차 안에서 몸을 뒤틀고 펜션에서도 실컷 수영을 한 아이는 금세 잠들었다. 그런 아이를 안아 방 한편에 이불을 깔고 눕혔다. 얌전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모습에 아이는 아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림은 설거지를 하는 도한을 힐끔 보고 욕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그런데 머리에 거품을 내던 도중 이림의 팔이 뚝 멎었다.

‘그러고 보니, 잠은 어떻게 자지.’

같은 방에서? 따로?

이림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이 펜션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은 방이 두 개였다. 하나는 아이 방, 다른 하나는 부부 방. 방 이외에도 거실과 주방이 커서 1층의 방은 그게 다였다. 2층에는 다용도실과 빈방, 다락방이 있었다.

2층에서 자야겠다.

이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침대도 없고 이불도 예비로 가벼운 솜이불 하나만 준비되어 있으니, 조금 추울 것 같긴 했다. 그래도 어색하게 같이 잠자리에 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급해져 재빨리 샤워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이림이 머리를 털며 밖을 나오니 도한은 설거지를 끝내고 무언가를 만들어 두고 있었다.

“이게 뭐야?”

“술안주. 한잔할래?”

카나페와 감자튀김까지 다 만들어 두고 제안하는 건, 어떻게 하라는 걸까.

이림은 도한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서 잠깐 거절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상해서 다 버리게 될 텐데 너무 아까웠다.

둘은 밖으로 나갔다. 은은한 조명을 켜고 커다란 선베드에 눕자 캠핑을 온 것 같았다. 이림이 예전에 전단지 알바를 할 때 캠핑장을 광고하는 전단지를 돌렸었는데, 그때 전단지 속 사진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앉아 있던 곳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그때는 감상이랄 것도 없이 휙 보고 바로 전단지를 없애느라 진땀을 빼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와인을 따르는 소리가 들리고, 아직 따끈한 감자튀김과 예쁘게 플레이팅 된 카나페가 놓였다.

이림은 도한을 따라 와인을 들이켜다 눈을 찡그렸다. 역시 술은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조금 진한 포도향이 나는 것 같을 때, 바로 알코올이 혀를 강타했다.

좋지 않은 표정의 이림을 본 도한은 피식 웃으며 이림의 입에 음식을 넣어 줬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림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 그도 조금 놀랐는지 눈이 커져 있었다.

“…….”

“…….”

서로 와인만 홀짝이며 내외하던 도중 커다란 벌레가 이림의 발에 착석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서 언제 안으로 들어가야 괜찮을지 타이밍을 재던 이림은 뭔가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내리깔았다.

“악!”

“뭐야? 왜!”

다른 곳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도한은 큰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림이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한 채 발만 구르고 있었다. 작은 날파리 수준이 아니라 나비처럼 큰 나방이었다.

작은 벌레면 조용히 잡겠지만 손바닥만 한 걸 잡으려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울상이 된 채 기절 직전인 이림을 본 도한은 재빨리 손을 휘둘러 벌레를 떨어뜨렸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던 이림은 자신을 빤히 보는 도한의 시선을 느끼고 올려다봤다.

왠지 웃고 싶은데 참고 있는 것 같다.

이림은 괜히 뚱해져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대화랄 건 없었지만, 아까와 달리 분위기가 나른해졌다. 술이 들어가기도 했고 밤이 깊어지면서 새가 우는 소리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요한 어둠이 수풀 너머에서 둘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을 느끼던 이림은 도한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다 같이 오니까 좋다. 그치?”

“응……. 뭐…….”

“데려와 줘서 고마워.”

“……내일도 엄청 부려 먹을게.”

뚱하게 뱉어진 말에 그가 크게 웃었다. 오늘 대부분의 잡일은 그가 다 했다. 정말로 시중을 들기 위해 온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앉아 있는 모습을 거의 못 봤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려고 해도, 이림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거나 좀 쉬라고 말렸다. 솔직히 지금 당장 자야 할 건 바로 도한이었다. 워낙 멀쩡해 보여서 잊고 있었지만 아니었다.

급히 휴가를 내기 위해 밤을 새웠고,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운전을 했다. 저녁 식사부터 야식까지 만든 그는 짬을 내어서는 설거지를 하거나 쓰레기를 버렸다.

그런데 조금 피곤해 보이기만 할 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우성 알파라 이 정도는 어찌저찌 버틸 수 있다고 해도, 집안일을 처리하는 스킬이 심상치 않았다. 몇 년 정도 자취를 해 본 사람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추하고 있는 이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도한은 그런 이림을 꽉 껴안고 밤이 새도록 놓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언제 또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수많은 노력 끝에 잡은 기회였다.

다른 것보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가 없을 땐 뭘 하고 있는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지 등이 궁금했다.

“방은 안 불편해?”

“응.”

“보통 몇 시에 자?”

“그때마다 달라.”

“…….”

도한은 이림을 빤히 바라봤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전부 단답이었다.

그래서 도한은 최종병기를 꺼냈다.

“두부 보러 갈래?”

“응? 두부는 입양 보냈다며?”

카나페를 집어먹던 이림은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고양이를 키울 당시에는 워낙 신경 줄이 가늘어서 제대로 케어를 해 주지 못했다. 얼결에 떠맡아 버린 것이지만, 그래도 그 사랑스러운 동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몇 년 전, 자신이 대학을 다시 다니기 시작할 때 이 집에서 산들이를 만나자마자 찾은 게 바로 두부였다. 두부는 별채에서 살다가 고용인 중 한 명의 집으로 입양을 갔다고 했다.

꼭 자신이 데려가려 했는데. 이림은 한동안 슬픔에 잠겼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책임감 없는 저 같은 주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 다짐했다.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니까.

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가슴에 묻었는데, 살아 있다고?

“입양…… 그냥 두루뭉술하게는 그렇다는 거지. 고용인들 숙소 한쪽 방에서 키우고 있어. 커다란 방 혼자 독차지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그럼 왜 거짓말한 거야?”

“우리 둘 다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니 별채를 청소하던 고용인이 숙소로 데려가서 맡아 키운 거지. 근데 정들어서 입양된 거랑 마찬가지가 됐으니까.”

이림은 납득 후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어렸을 때 자신이 돌봤다 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했으니 자신은 자격이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방문해서, 부족한 게 있다면 사비를 쓰더라도 전부 지원해 줄 예정이었다.

“됐어, 무슨 염치로. 그냥 한번 키우신다는 분 만나서 필요한 거 있는지 물어봐야지.”

“…….”

“내가 외로워한다고 동물을 데려오진 마. 나는 생각보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거든. 두부도 봐봐. 난…… 능력이 안 돼.”

고개를 숙인 이림은 자조했다. 평화롭던 분위기가 다시금 싸늘해지던 찰나, 도한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췄다.

“강이림, 고양이를 데려온 건 나야.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어. 차라리 날 욕해.”

“…….”

“나도 알아. 이렇게 널 만든 게 나라는 걸. 그래서 너무나 후회스러워. 왜 나는 이제야 깨달은 걸까? 진작 알았다면 널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았을 텐데.”

도한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곪은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서로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아니, 평생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다정한 말을 들은 이림은 입술을 깨물다 결국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도한은 조심스레 어깨를 끌어안아 토닥였다. 이제야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도한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면 아예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기질을 잘 보여 주는 게, 필요한 가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의 방이었다.

그래서 그가 버리고 간 잘못을 주워다 자신이 덮어썼다. 머리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죄책감을 한 아름 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저 멀리 앞서갔던 도한이 발걸음을 돌려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도한은 이림이 품 안에 간신히 들고 있던 감정들을 빼앗아, 자신이 들었다. 먼 길을 돌아 조금이나마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이림은 고개를 들어 눈물범벅인 상태로 도한과 시선을 맞췄다. 눈물로 얼룩져 흉한 상태일 텐데도 그는 계속 이림의 눈물을 닦아 주고 머리카락을 쓸어 줬다.

용서를 비는 와중에도 그의 눈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이림은 그 눈을 보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더 파묻었다.

자신은 술기운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어지럽고 메스꺼워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다.

커다란 몸이 덮쳐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불안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묵살해 버렸다.

도한은 잔뜩 흥분한 채 거칠게 티셔츠를 들어 배를 문질렀다. 말랑하고 납작한 배가 거친 손길에 짓눌렸다. 이림은 본인이 유혹했음에도 무섭도록 거칠게 나오는 그의 행동을 보고 겁을 먹었다. 그냥 입을 맞추고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 싶었을 뿐인데.

덜컥 겁을 먹은 이림의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도한은 애써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대로 와인을 병째 들이켰다. 그리고 이림에게 입을 맞춰 왔다. 이림은 잠깐 발버둥을 치다가 힘을 뺐다. 쓰기만 하던 와인이 조금 달아진 것 같았다.

입을 떼고 이림이 할딱이자 도한은 해롱거리는 그를 안고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에 이림을 조심스럽게 눕힌 후, 달빛에 의지하며 이림의 얼굴을 찾아 입을 맞췄다.

“아…….”

사락-.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와 질척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너무나도 자극적이라서 이림은 눈을 꼭 감았다.

몇 년만의 접촉이었다. 도한은 진정하지 못해 계속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고, 이미 뻣뻣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커다랗게 발기한 성기 때문에 넉넉한 바지 밖으로도 그 윤곽이 선명히 드러났다. 그것을 힐끔 본 이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먹만 쥐었다.

어느새 옷을 전부 벗은 도한은 그대로 이림의 목덜미에 달려들었다. 얇은 목덜미의 피부를 질근질근 씹으며 손으로는 유두를 문질렀다. 은근하고 색스럽게 핑크빛 유두를 문지르다가 갑자기 꾹 잡기도 했다.

“읏……!”

아프기 직전까지 세게 잡으니 쾌감이 극대화됐다. 세게 잡은 유두를 놓고 게걸스럽게 핥으니 이림은 기절하고 싶어졌다.

몇 년 동안 자위도 제대로 안 하고 살다가 갑자기 이런 자극을 맞이하려니 죽을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정말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도한은 작정한 듯 이림의 온몸을 매만졌다. 움푹 팬 배꼽을 괴롭히더니 발가락을 깨물기도 했다. 열이 오른 이림은 신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양다리를 천천히 쓸어 올리며 올라온 도한은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림을 빤히 바라보며 혀를 내밀어 성기를 쓸어 올렸다. 반응을 관찰하듯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거리낌 없이 성기를 빠는 도한을 보며, 이림은 쾌감에 몸부림쳤다.

“아! 아으…… 제발…….”

의미 없는 신음이 조금씩 커졌다. 이림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발가락이 오그라들 만큼 자극적인 쾌감 속에 사정했다. 쾌감에 몸부림치며 헐떡이는 이림을 본 도한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마운팅 하듯 제 성기를 이림의 엉덩이에 비볐다.

도한의 프리컴과 구멍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합쳐지며 시트가 축축해졌다. 구멍도 혀로 빨아주고 싶었지만 너무 급해서 포기하고 이림의 벌려진 입에 손가락을 넣어 휘저었다.

“이림아. 빨리…….”

이림은 도한의 재촉에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손가락을 핥았다. 얼마 가지 않아 입속을 빠져나온 손가락이 구멍 주변을 조심스레 훑었다.

그리고 도한은 바짝 긴장한 이림에게 입을 맞추더니, 그대로 삽입했다.

“아……!”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이림이 몸을 비틀며 침대 헤드 쪽으로 기어가려 하자 그가 재빨리 다독였다. 그리고 귓바퀴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손가락을 휘저었다. 물이 질척하게 튀는 구멍은 처음엔 빡빡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풀렸다.

“넣을게……. 이림아.”

“으응…….”

이림이 작게 대답을 하고 눈을 꼭 감은 채 벌벌 떨며 기다렸다. 그런데 뭉툭한 귀두만 닿을 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아 작게 눈을 떴다.

뭔가 곤란해 보이는 도한의 얼굴을 본 이림은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

“……!”

너무 컸다.

‘저렇게 컸었나?’

도대체 몇 년 전에는 어떻게 한 거지. 그때도 버겁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꽤 오래 풀었는데도 귀두조차 잘 들어가지 않았다.

“진짜…… 안 되겠어. 미안.”

“이림아, 한 번만 해 보고. 응? 진짜 안 아프게 할게.”

“넌…… 양심이 있어?”

이림은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도한은 이미 이성이 나간 상태였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절대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도한은 어둠 속에서 눈빛을 감춘 채 다정하게 이림을 타일렀다. 그리고 그 설득은 반쯤은 정말 사실이었다.

“나 죽을 것 같아……. 정말로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제발 그만두자고 하지 마.”

“…….”

“진짜 한 번만 해 보고 안 되면 그만둘게, 응? 나 한 번도 못 갔어.”

“……알았어.”

이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도한은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아, 다시 식어 버린 이림의 몸을 애무했다. 다시 한 번 절정에 오른 이림이 할딱일 때 그는 삽입을 시도했다.

“아!”

속도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삽입되는 그것은 뜨겁고 단단했다. 이림은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입을 벌린 채 색색 숨을 내쉬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발버둥 치면 도한은 진입을 멈추고 이림의 가슴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삽입을 계속했다. 무식하게 큰 것이 뿌리까지 들어왔다. 이림은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것을 급하게 닦은 도한은 작게 사과한 채로 미친 듯이 허리를 쳐올렸다.

벌써 발기한 상태로 몇십 분을 참았다. 지금까지는 이림을 배려하기 위해 정신력으로 참았다. 그러나 좁고 습한 곳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참을 수 없었다. 도한은 울며불며 매달리는 이림의 입에 입을 맞춘 채, 숨이 찰 때까지 허리를 움직였다.

땀이 흐르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시트를 적셨다. 순수할 만큼 정적이던 입맞춤으로 시작된 접촉은 어느새 음탕하고 진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림아…… 하아…….”

“읏……!”

도한은 자신을 받아 주는 이 여린 몸이 사랑스러웠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연인.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해서, 제 추악한 모습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 미련한 사람.

하지만 후에 매몰차게 자신을 버려도 상관없었다. 도한은 이림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신체 중 하나를 달라 하면 줄 것이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힐 것이다. 죽으라 하면 죽을 것이고, 달라고 하면 전부 내어 줄 것이다.

죽기 전에 그가 내 옆에 있어 준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 약속해 준다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넌 날 떠날 수 없어.

도한은 절정을 느끼며 생각했다. 땀에 절은 발간 얼굴을 보며 입술을 내렸다. 이림을 속박하는 만큼, 동시에 자신도 속박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 것처럼 느껴졌다. 달빛이 환한 밤, 둘은 새벽이 올 때까지 한참 동안 부둥켜안고 있었다.

***

“아야야.”

이림은 부스스 일어나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허리에 근육통 비슷한 통증이 일었다. 어쩐지 팔꿈치와 어깨는 멍이 들어 있었다.

순간 어제 어디 부딪혔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민망한 곳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제 몇 번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오랜만의 접촉은 두 사람 다 미치게 만들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헐떡이다 끝난 것 같았다.

나중에는 쾌감에 절여져 이리저리 힘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진짜 미쳤지.”

그 흔한 키스도 안 하고 살았는데, 한번 불이 붙으니 끝까지 가 버렸다. 거의 4년 만에 한 관계였다.

부끄러워서 절대 나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 옆방의 산들이가 듣지는 않았을까? 그런 걱정이 덜컥 들기도 했다. 시계도 없고 휴대폰은 어디다 뒀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어리벙벙한 상태로 눈만 끔뻑이는데, 누군가 방으로 들어왔다.

도한은 넉넉한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바지 밑에 불쑥 나온 복숭아뼈를 무심코 보다 얼굴을 봤는데, 그가 웃고 있었다. 살살 웃으며 다가오는 도한의 낯빛이 환했다.

“몸은 괜찮아? 내가 뒤처리하긴 했는데.”

한번 몸을 섞어서 그런지 그의 스킨십이 과감해졌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최대의 스킨십이 손잡기였는데. 그마저도 치료를 위해서 그랬던 것이었다.

이림은 아프지 않게 껴안은 채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는 도한이 귀찮았지만 이내 말리길 포기했다. 할 거 다 해 놓고 내외하는 것도 웃겼다.

꼬르륵-.

“배고프구나. 아침 해 놨어.”

“못 일어나겠어.”

“그럼 가져다줄까?”

이림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도한이 손을 놓고 뛰듯이 밖에 나갔고,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왠지 5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림이 의아해져서 비척비척 일어나 문을 열었는데 작은 말싸움이 들렸다.

“쉬…… 그럼 안 돼. 여기서 얌전히 먹어.”

“왜! 시러! 아빠…….”

아이와 그가 말싸움 중이었다. 아이는 어제 잠든 이후로 이림을 보지 못했다. 아빠에게 물었지만 아직 자고 있다는 말만 할 뿐,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결국 꽤 오랫동안 기다린 아이는 도한이 방 밖으로 나오자 그대로 옷 가장자리를 잡고 아빠를 내놓으라 항의하고 있었다.

“산들아…….”

“아빠아…….”

아이는 찌릿거리던 눈빛을 지우고 이림을 향해 달려왔다. 뭐가 서러운지 반쯤 울먹인 채 이림에게 안겼다. 결국 셋이서 식탁에 앉아 점심 아닌 점심을 먹게 되었다. 도한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그렇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가족끼리의 두 번째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짧은 일정이 끝났다. 원래는 2박 3일의 여행이었으나, 갑자기 일정이 잡힌 도한 때문에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도한은 상당히 미안해했지만 이림은 그다지 상관없었다. 두 달이 넘는 긴 방학이 시작됐고 아이도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휴가는 언제든지 갈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이림의 마음은 한없이 가벼운 상태였다. 이제야 마음의 짐을 던져 버린 느낌이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도한과 냉전을 펼친 지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났다. 갓 성인이 되어 멋모르고 사랑에 빠졌던 그는 도한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애정이 앞서니 무심코 넘겼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생기를 잃고 인형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제 안에 남은 건 분노밖에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소모전은 둘의 정신과 마음을 망가뜨렸다. 더 하면 죽을 것 같아서 이림이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진정한 용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또 오랫동안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음식이나 물건을 꺼내고 살랑였다. 매몰차게 거절했지만 어쩐지 마음은 편하지 않았나 보다.

사실은 그를 용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맨날 입으로는 돌이킬 수 없다 단정했지만, 사실은 그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림의 머릿속에서 자신을 탓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또 그 꼬임에 속아 넘어갔네. 어차피 말만 용서 못 한다는 거였구나?’

이림은 그 말도 맞다고 생각했다. 예전이었다면 스스로의 기준을 세운 채, 기준점에서 멀어지면 한없이 자책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자신도 조금 있으면 벌써 30대였다. 젊음은 너무나도 짧았다. 걱정하고 괴로워만 하다가 청춘을 모두 날려 버리지 않았나.

이림은 창문을 내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화창한 하늘과 눈부신 녹음이 온몸을 적셔 왔다.

이림은 그제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비소도 아니었고, 즐거워서 웃는 웃음도 아니었다. 기뻐서 짓는 웃음이었다.

-마침-

[그 별채의 정부 3권]

발행일 2022년 7월 1일

지은이|서찻

펴낸이|김기선

펴낸곳|주식회사 와이엠북스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E-mail|[email protected]

ISBN 979-11-322-6659-4 05810

979-11-322-6656-3 05810 (세트)

값 3,0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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