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끝에서 (13/14)

13. 끝에서

이림은 의식을 잃은 기간 동안, 깊은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가끔은 더욱 어두운 심해에 웅크려 있기도 했고, 누군가가 억지로 의식을 깨우려는 행동에 낚시질을 당한 물고기처럼 강제로 수면 가까이 끌려가기도 했다.

익숙한 향기가 무의식을 깨우려 문을 두드리면 그 얼굴이 떠올라, 묻었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수면 위를 바라보기도 했다.

잘생긴 얼굴과 날렵하고 커다란 몸.

그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를 좁혀 오면 도한이 내뿜는 존재감에 숨이 막혀 왔었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이질적이기까지 한 그는 이림의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종류의 사람이었다.

대학생 때 우연히 엮이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이름조차 알지 못했을 정도로 까마득히 멀고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만사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다가도, 다른 면에서 평범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도한을 보면 내심 입 안이 씁쓸했다.

그것이 자신과 도한의 차이라고 세상이 비웃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미치도록 좋았다. 동생을 돌보느라, 살림에 돈을 보태느라 평생 억눌려 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자신이 도한을 만나 사랑하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그의 약혼식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시 그 풍랑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만 결국 도한의 손안에서 놀아났던 나날들.

자신에게만은 언제나 다정하고 나긋나긋했던 도한은 이림이 가져 보지 못했던 아늑함을 안겨 줬다.

비록 그 끝은 감금이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은 모두 이도한과 함께였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신의 삶에 통렬함을 안겨다 준 그는 아마 죽기 전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토록 싫다고 몸부림쳤으면서 이제 와 나쁘지 않았다니. 이림은 흘러가는 의식 속에서 작게 웃었다.

이건, 그래. 죽기 전에 남기는 회한이었다. 죽음을 바라보면서 아쉬움에 괜스레 바래 버린 추억들을 한 번씩 꺼내 보며, 좋은 부분만 기억해 내는 거겠지.

‘이게 네가 원하던 거잖아! 이제 그렇게 해 주겠다고! 제발 눈 좀 떠……!’

눈을 감으려는데, 누군가가 자꾸만 제 목덜미를 움켜쥐고 물 밖으로 꺼내려 한다. 목이 졸리는 감각에 몸부림치자 안 그래도 기력 없던 몸에서 모든 힘이 쭉 빠졌다.

정말로 죽는다.

허무하게 다가온 죽음이었지만 이림은 오랫동안 안식을 기다려 왔기에 반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았다.

“이림 씨? 정신이 드세요?”

이림은 물먹은 듯 멍멍한 머리를 느끼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빛에 눈이 시려 몇 분 동안이나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여…… 긴.”

“병실입니다. 의식을 잃고 계신 건 열흘 정도 되셨네요. 아주 위험했습니다.”

“네……. 근데 제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힘없는 몸과 메마른 입술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눈꺼풀과 입술만 움직이길 몇 차례.

의사는 개의치 않고 혓바닥과 눈동자를 살피는 등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청진기를 거두며, 그는 몇 가지를 당부했다.

“각인이 풀렸으니 환자분도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물리치료도 병행할 예정이니 오늘은 푹 쉬세요.”

“네? 잠깐…….”

“이림 씨.”

누군가 문을 열고 나타나 이림의 말을 끊었다. 순간 깜짝 놀라 문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도한의 비서가 복잡한 심경을 누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네……. 감사해요. 근데 갑자기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그…….”

이림은 돌려서 물어봤지만 비서는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제 할 말만을 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앞으로 이성그룹은 이림 씨의 자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명함으로 연락 주세요.”

“네…….”

이림은 후들거리는 손을 들어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이림이 뭘 물어볼지 알지만 대답해 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이, 비서는 몇 가지 사진과 서류를 꺼냈다.

“우선 사진 속 주택은 현재 회장님의 개인 사유지인데, 이번 분기 내로 이림 씨 명의로 돌리려고 합니다. 나중에 다시 제대로 설명 들으시겠지만 일단 가계약서 받으시고요. 주거래 은행 알려 주시면 그쪽으로 다음 달부터 매달 생활비가 입금될 겁니다.”

“네……? 아니…… 잠깐만요. 주택이요? 다 무슨 소리예요? 전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이림 씨.”

비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안경을 벗었다. 금속테 안경이 사라지자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사무적인 태도였던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전 자세한 이야기는 못 해 드립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시간부터 이림 씨가 자유로워지셨다는 것과 그에 대한 보상을 받으실 수 있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도 이림 씨가 겪은 고통과 아픔이 이 정도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압니다. 그리고 상무님의 행방도 궁금하시겠죠. 하지만 그것은 제 권한 밖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감사하게 받을게요.”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일이고, 원치도 않은 일을 당하셨으니 더더욱 그러셔야죠.”

마지막 말은 비서의 개인적인 사견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이림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흠…… 큼, 그럼 몸조리 잘하시고요. 퇴원하고 이번 달 내로 입주하시면 됩니다.”

탁-.

문이 닫혔다. 그 하얀 문을 한참 보던 이림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의식이 돌아오며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 이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그냥 눈을 감았다.

***

‘각인이 풀리면서 환자분이 의식을 찾게 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부작용으로는 메스꺼움이나 어지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 히트 사이클은 각인하셨던 분 말고 다른 분이랑 매칭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몸이 안정될 때까지는 억제제를 드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저…… 의사 선생님…… 어떻게 각인이 풀린 거죠?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게 아니라고 배웠는데…….’

이림은 비서에게 묻지 못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했다.

하지만 의사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마도 입막음을 했겠지.

이림은 며칠 전 일을 떠올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이도한…….”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 뒤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림은 그들을 찬찬히 관찰했다. 도한이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을까?

아무렴 집에도 CCTV를 달았던 미친놈이었는데, 사람을 심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 휠체어에 탄 여자와 휠체어를 끌며 여자에게 살갑게 말을 건네는 남자.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환자복을 입은 아이들, 급하게 뛰어가는 의사와 레지던트들.

그중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림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은 있어도, 대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림은 터지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무슨 망상이람…….’

이림은 왠지 달아오르는 얼굴을 숙이며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와 누웠다. 째깍째깍. 나붓한 정적 속에 초침 소리만이 가득했다. 이림은 눈만 한참을 깜빡이다 몸을 뒤척였다.

“아!”

어깨 쪽에 강한 통증이 느껴져 몸을 일으켰더니 펜이 굴러 떨어져 있었다. 언제 떨어져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체중으로 누르고 있다 보니 자국이 패일 정도로 제법 아프게 눌렸다.

“멍 들겠는데…….”

이림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꽤 크게 비명을 질렀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여전히 VIP실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들도 사라졌고 도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색하고 기묘해서, 이림은 제 팔을 한 번 쓸었다.

***

달달달-.

“그럼 들어가세요.”

“아, 네!”

이림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차가 골목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것을 멍하니 보다가 뒤를 돌아 커다란 단독주택을 올려다봤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잘 정리된 마당이 보였다. 푸른 잔디 한쪽엔 목련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그네 의자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이곳이 맞는지 주소를 확인한 이림은 카드 키로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와…….”

2층집은 아니었지만 대신 높은 층고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침대 프레임이나 거실 테이블 등 인테리어 대부분은 원목 느낌을 냈지만, 욕실은 뉴트럴 톤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이런 집에 살아도 되는 걸까…….”

이림은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할 텐데.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병원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폰 개통과, 복학 신청이었다.

학업을 끝마치고 싶지만 이도한이 방해할까 봐 걱정하는 이림을 보고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럴 일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학교에 연락해 보세요.’

그다음은 아주 순조로웠다. 이림은 학교 홈페이지에서 복학 신청란을 누르며 커피를 마셨다. 접수되었다는 알람을 본 그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눕혔다.

모든 게 물 흐르듯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껏 별채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아무와도 얘기하지 못하고 살았던 게 다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유로웠다.

가끔씩 침대에 누워서 그와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한 번씩 미치게 궁금할 때가 있었다.

‘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 각인은 어떻게 풀었대요? 지금 뭐 하고 지내는지 아시나요?’

하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것을 물어보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이 도한의 안부를 물었다는 것을 당사자가 안다면? 다시금 별채로 끌려갈 것 같았다.

그래서 가족에게 연락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오랫동안 감금당하고 감시당했기에 이 집 안도 그가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을 때 이림은 도리질을 쳤다.

“이렇게 생각해선 끝도 없어. 그래……. 가족들한테는 나중에 해 보자.”

산들이는 잘 지낼까.

하나의 걱정이 사라지자 다른 걱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마지막으로 그 애를 봤던 게 언제더라……. 자신의 앞날만 챙기기 급급해서 이제야 생각이 났다.

사실은 죽으려고 했을 때도,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에도 마지막으로 생각났던 게 그 작은 얼굴이었다.

고이 품었지만 결국 생이별을 했을 땐 정말 별채에 처음 갇히게 됐을 때보다 충격이 컸다. 비록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지만, 아마 자신은 그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까.

이렇게 혼자가 되고 여유가 생기니 자꾸만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 저택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계속 다른 걱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가. 친했다 생각했던 경호원에게 겁탈을 당할 뻔하고 아이를 임신하고, 그 집에서 옛 친구를 만나고, 각인까지…….

한꺼번에 많은 일이 몰려오자 몇 가지는 아예 저 밑으로 가라앉아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쨌든 다들 날 원망하겠지.

이림은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푹신한 매트리스와 이불이 몸을 부드럽게 감쌌음에도 이림은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

시간이 흘러 개강 날이 다가오자 이림은 어색하게 거울 앞에 섰다. 어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잘랐더니 심히 어색했다.

“그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원래도 숫기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바깥출입을 못 하다 보니 사회성이 더 떨어진 상태였다. 다시 학교에 나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저 멀리 보이는 학교를 살펴봤다.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하얀 건물들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껴서 이림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바뀐 곳도 많고 아닌 곳도 많았다. 이곳은 이랬었지, 저곳은 저랬었지, 하며 혼자 추억에 젖다가 후다닥 학과 사무실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어?”

“지우……?”

“이…… 이림아…….”

지우는 학과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 무언가 서류를 잔뜩 든 그는 돌덩이처럼 굳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의 그를 찬찬히 살폈다. 단정한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지우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둘은 할 말을 잃고 서로만을 바라봤다.

잠시 후, 둘은 학교 내 카페에 앉아 있었다. 둘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항상 마음에 돌덩이를 지고 살아왔던 이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잘…… 지냈어?”

“응……. 너도?”

그리고 다시 대화가 끊겼다. 불편한 침묵이 계속되던 와중, 결국 이림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지우야. 그때 별채에서 있던 일은…… 내가…… 정말 미안했어.”

이림은 힘겹게 그 말을 끝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우는 대답이 없었다.

날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났구나.

이림은 각오했던 일이었음에도 아파 오는 가슴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니, 지금은 지우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그가 잘못됐다면 더 이상 제정신으로 살아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림은 정말로 도한이 자신을 놓아줬다는 확신이 들면 지우와 가족부터 찾으려고 마음먹었었기에, 지금 그가 멀쩡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 정말 다행인 거야.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있을 때, 지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림아. 사과할 필요 없어. 나 거기 돈 받고 들어간 거야. 나도 그렇게 착한 새끼 아니야.”

“…….”

“아니……. 나야말로 사과해야지.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알면서도 돈이나 받아 챙기고…….”

점점 자괴감에 젖어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들으며 이림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지우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자신만큼 지우도 많이 마음고생을 했나 보다. 항상 활달하고 쾌활했던 지우였기에 이런 모습은 아주 낯설었다. 하지만 왠지 안심돼서 밝게 말하려고 애썼다.

“왜 그렇게 얘기해……. 그만해.”

“나, 사실은 네가 도망가지 않았으면 했어. 그 사람…… 존나게 무서웠으니까. 하…… 나 진짜 쓰레기다.”

“지우야.”

“…….”

“왜 자꾸 그렇게 얘기해. 나 네가 없었으면 진작 못 견뎠을 거야. 그리고 나 도망가게끔 도와줬잖아……. 네가 위험해질 게 뻔했는데…….”

“흡…… 이림아…….”

지우의 고해성사에 이림의 눈매도 눈물로 젖어 들었다. 안도감과 슬픔이 전신을 감싸 왔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한산한 학교 카페 안에서, 둘은 꺼이꺼이 울었다.

이림은 그제야 진심으로 세상에 감사함을 느꼈다. 여태껏 분노와 죄책감으로 목구멍이 꽉 막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는데, 이제야 누군가 숨통을 열어 준 기분이었다.

‘살아 있었어……. 지우가 살아 있었어…….’

이림은 지우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

정수는 이번에 개강을 맞은 평범한 경제학과 3학년이었다. 이제 슬슬 취업 걱정을 해야 했기에, 이번 학기는 아주 지루하고 재미없는 학교생활이 될 예정이었다.

죽상을 지으며 걸어가는 정수에게 같은 과 친구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야야. 이번에 2학년으로 복학하는 오메가 아냐?”

친구의 흥미 가득한 목소리에 정수는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신입생 사냥도 모자라 이제는 복학생 사냥인 건지. 정수는 자신의 친구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내 알 바?”

“진짜…… 너 가서 놀라지나 마라.”

“너나 그만해라. 쯧쯧쯧.”

그 대화를 한 이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정수는 첫 전공 시간에 만난 그 소문의 오메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드르륵-.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모두의 고개가 문으로 돌아갔고, 그 정적이 계속되자 결국 정수도 고개를 돌렸다.

하얀 얼굴을 가진 그는 평범한 차림이었다.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고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는데, 그 옷차림은 지금 당장 캠퍼스 안에서만 스무 명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평범했다.

하지만 얼굴이 평범하지 않아 그 대비가 더 두드러졌다. 사람들은 계속 쳐다보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까먹었는지 곁눈질을 해 가며 수군거렸다.

강이림은 외모 말고도 다방면으로 튀는 사람이었다. 일단 2학년으로 복학했는데, 20대 후반이라는 것. 그리고 4학년인 지우 선배와 친구 사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소문은 금세 퍼졌다. 그리고 별별 말도 안 되는 추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돌 데뷔하려다 무산돼서 복학한 거다, 어디 재벌 집 정부로 들어간 거다 등등,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돌았다.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이림은 꿋꿋하게 학교에 다녔다. 겉모습과 달리 친절하고 수줍음 많은 이림의 성격은 처음엔 시기 어린 눈빛을 보내던 사람들한테도 호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만큼 경계심도 많아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면 도망치기 일쑤였다.

긴 눈꼬리와 나긋나긋한 말투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긴장감이 돌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무심한 성격이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비춰 주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꽤 힘들었겠네.’

사람들 사이에 묻혀 식당에 들어가는 이림을 보면서 정수는 커피를 마셨다. 다가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 보이는데 괜히 다가가 봤자 자신은 무심한 그의 성격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이림도 들이대는 사람들을 보며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학교 오는 재미는 있겠네.’

정수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이림은 사람들을 피해 지우와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우는 대학교에 휴학 제도가 없었다면 자신은 진작 자퇴했을 거라며 지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것은 이림도 마찬가지였기에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자꾸만 불편한 감각이 몸을 찌르는 듯해 고개를 돌렸다.

휙-.

“뭐야. 왜? 어떤 새끼가 또 쫓아와?”

“으응……. 아니.”

이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화제 전환을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근데, 호주 다녀왔다며?”

“응. 이도한 그 새끼한테 죽는 거 아닌가 했는데 나중에 사례금까지 얹어 주더라. 그래서 학자금 대출 다 갚고 잠깐 다녀왔지. 목숨 건 보람이 있었네.”

“…….”

“아…… 그렇다고 너 고생하는 거 아는데 혼자 처 놀겠다고 간 건 아니야. 사실 이도한이 너 찾으러 다닐까 봐 나 밖으로 뺑이치게 한 거지.”

급하게 변명하는 지우를 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랬구나. 지우는 자신이 오해할까 봐 안절부절못했지만 이림은 오히려 안심이 됐다.

‘그때 그 사진은 지우가 아니었구나.’

안심이 되다 못해 의뭉스러워졌다.

너무 도한을 오해했던 걸까. 어쨌든 만약 도한이 지우에게 험한 짓을 했다면 자신은 더더욱 고립되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림은 자꾸만 누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편안하게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설마 정말 이도한인 건가?

요즘 들어 이림을 피곤하게 만드는 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사람들의 관심이고 두 번째는 묘하게 꺼림칙한 시선이었다.

지우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림은 다시 한 번 그 느낌을 받아 뒤를 돌았다.

하지만 바쁘게 하교하는 학생들만 있을 뿐 이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따라오는 듯한 사람은 없었다.

“…….”

이림은 뛰다시피 걸으며 학교를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다.

첫 번째는 그럭저럭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다. 비록 개강 파티에 와라, 술자리에 와라, 동아리에 들어와라 등등의 제안을 매일같이 거절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마치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설마…… 이도한?’

이림은 가슴이 쿵쿵쿵 뛰는 느낌에 잠시 호흡을 골랐다.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망상까지 이어지자 이림은 고개를 저었다. 숨을 고르고 허리를 편 이림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검은 차량 한 대가 멈춰 섰다.

“……!”

설마. 설마…….

“타겠나?”

각진 어깨와 형형한 눈빛. 예순이 넘었음에도 행동이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제 본모습을 감추고 뱀같이 구는 도한과 달리, 그의 아버지는 매스컴에서 자주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조폭이라고 오해했을 정도로 보는 이로 하여금 숨 막히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도한에게 잡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설마 날 또……?’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려는 이림의 등 뒤로,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와주려는 것이니 타게. 나도 아쉬울 거 없는 사람이니, 이번에 거절한다면 두 번은 없을 줄 알고.”

무심한 목소리는 오히려 도망치려던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림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듯 멍한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그리운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차는 한참을 달려 서울 외곽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왔다. 고풍스럽지만 세련된 느낌이 드는 레스토랑은 통째로 빌렸는지 직원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그래서.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고?”

“……네.”

이림은 그걸 당신이 물어볼 자격이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예의상 한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대답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이림의 행동이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말았다.

그마저도 도한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처음에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형질이나 단단한 육체는 모두 이 남자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이림은 천천히 물었다.

“절 도와준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자네가 낳은 아이, 보고 싶지 않나?”

“……!”

“산들이…… 말하는 겁니까?”

“……이름이 뭐라고?”

남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이 뭐냐니……. 그럼…… 설마.’

“죄송하지만 아이 이름이 어떻게 되죠?”

“호적 상엔 이한림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것 참. 의견 차이가 있었나 보지?”

그 사람은 진짜…….

이림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고집불통인 이도한은 이름을 산들이로 짓지 않았나 보다.

‘그럼 그렇지…….’

남자는 대충 상황을 눈치채고 커피잔을 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뭐…… 그 문제는 개명을 해도 되는 것이니 차차 생각하도록 하고……. 그래서 아이를 볼 생각이 있냐 물었네.”

“그런 걸 왜 물어보십니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이림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도망칠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더니 이제 와서 선심 쓰듯 물어보는 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눈을 들어 이림을 마주 봤다.

도한을 만나고 산전수전 다 겪어 봤다 생각해 온 이림이었지만 첨단이 날카로운 창처럼 예리한 눈동자를 보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애가 자꾸만 자네를 찾아서 말이야. 실제로 오랜 시간 함께했던 것도 아닌데……. 그 칭얼거림 때문에 아주 곤욕을 치르고 있다지. 그리고 겸사겸사 자네에게도 좋은 제안인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온 거지.”

이림은 실소가 나오는 것을 참았다. 결국엔 아이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니 찾은 것이다.

그 사실에 미안함과 분노가 동시에 일었다. 솔직히 제가 아이를 낳았지만 실제로 함께 한 시간은 배 속에서의 열 달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으니, 자신을 잊었다고 보고 있었다.

“…….”

“그리고 지금에야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의무라도 있는가? 나도 그리 떳떳한 놈이 아닌데 자식들의 사생활까지 관여해 대면 그놈이 참도 얌전히 있었겠군.”

억울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맞는 말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이성그룹은 말도 안 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이 이상 말싸움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림은 한 가지 희망을 붙들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아이와 같이 사는 건…….”

“……흠”

남자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하지만 아이에 대한 애착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사실 아이가 이림을 찾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배 속에서부터 연결되어 형성된 유대감도 있지만, 이림이 없을 때 도한이 저택에 들르기만 하면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언제 찍었는지 꽤 앳되어 보이는 사진부터, 얼마 전에 몰래 찍은 사진까지 수십 장이었다.

카메라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얼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 심지어 얼굴이 찍히지도 않은 뒷모습까지.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빤히 사진을 바라보다 한참을 쥐고 놓지 않기도 했다.

옹알이를 할 때부터 보여 주고 제 부모라는 것을 끊임없이 자각시켜 주니 아이가 이림을 찾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한번 떠보기로 했다.

“다 버리고 도망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키우고 싶다……. 자네도 말과 행동이 다른 것 같군. 만약 세상을 살면서 또 자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이번에도 버리고 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

이림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엄청난 수치심이 몸을 강타했다. 머리를 누가 한 대 강하게 맞은 듯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를 낳자마자 엄청난 애착이 생겼다거나 책임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도한과 자신의 외모를 쏙 빼닮은 아기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였지만…….

‘……하지만 나는? 그러면 나는?’

내 삶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 아이에게 묶여 지긋지긋한 삶을 계속 이어 가야 했을까?

세상은 저보고 아이를 돌보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그리고 이림도 이 새로운 생명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의무와 책임이 항상 완벽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미 수년의 감금 생활로 자신의 정신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런 자신이 아이 옆에서 지혜롭고 다정한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기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자신의 옆에 있는 것보단 도한의 곁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이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비록 완벽한 가족은 될 수 없지만, 그 아이는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이 있었는지 까먹을 정도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고급스런 옷을 입고 값비싼 음식만을 먹으면서. 가끔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르지만 결국엔 잊게 될 것이다.

이림은 더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에 남자는 혀를 찼다.

아무 말 않고 고개만 숙인 처연한 그 모습에 그리운 얼굴이 겹쳐졌다. 순간 낯익은 과거가 남자의 시야를 방해했다.

처음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망쳤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가냘픈 몸에서 심장이 뛰지 않고, 그녀가 영안실로 들어갈 때까지도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파괴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수십 년의 제 삶이 통째로 부정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남에게 호감을 사는 법은 쉬웠다. 아니, 그것만큼 쉬운 것도 없었다. 대를 거듭하며 쌓인 부는 아무리 써도 끊임없이 늘어날 뿐이었고 그는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차지했다. 그렇다 보니 평생을 살면서 제 눈에 거슬리게 행동하거나 짜증 나게 구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을 제외하고.

그 여자만큼은 도저히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싸우다가도 환한 불빛 아래서 드러난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면 제정신이 아니게 된 것이 패착이었다.

분명 그러면 안 되는데. 어느새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금단이 열린 것처럼 빠져들어 감정의 골에서 우왕좌왕했다. 무인도에 고립된 사람에게 화려한 보석은 아무 값어치가 없는 것을 모르고, 자신의 옆에 있어 준다면 무엇이든 바치겠다 맹세했다.

결국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사람이 사라진 세상을, 남자는 의무로 살아 나갈 뿐이었다. 제 밑으로 딸린 자식들을 위해, 자신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그렇기에 자신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아들 이도한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비록 둘을 떨어뜨려 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이도한이 각인을 파기하게 되면서 그의 아버지인 자신도, 집안사람들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상황은 역시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현재 이도한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원래 각인이란 건 오메가의 동의를 얻은 알파가 목을 깨물어 페로몬을 주입하는 행위였다. 그 순간부터 각인된 오메가는 제 짝의 페로몬만 맡을 수 있으며, 히트 사이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알파는 비교적 그 제약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말이 오메가의 동의지 사실상 알파 혼자서 강제로 각인할 수도 있었기에, 그렇게 각인당한 수많은 오메가들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거나 평생을 고통받으며 지냈다.

대물림의 과정에서 오메가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고, 각인을 막을 순 없을지언정 스스로 죽을 것인지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강이림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도한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원래 각인을 파기하기 위해서는 수술을 받거나,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사망해야 했다.

이도한이 뛰어내린 병실은 아파트 3층 높이였고, 도한은 잔디에 떨어졌기에 다행히도 목숨이 위중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애초에 불안정했던 각인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파기되자 도한에게 어마어마한 부작용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지금 이림은 생기가 넘쳤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가끔 그늘 어린 표정을 짓긴 했지만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가끔 짓는 미소는 아무 일도 겪지 않은 평범한 사람처럼 평온했다.

이림은 그것이 별채에서 벗어난 까닭이라고만 생각했지만 형질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얽혀진 각인이 파기되면서 파기한 주체인 도한이 모든 부작용을 흡수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혀를 찼다.

나약한 새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쩌면 자신도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한심한 결과로. 연인을 두고 바보같이 죽는 상황 말이다.

남자는 계획을 바꿨다. 물론 처음에 이도한에게 저 아이를 놓으라고 권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사실 그게 모두에게 좋은 길이었다. 원래부터 고분고분한 아이는 아니었기에 아비가 말했다고 바로 따를 위인은 아니었으나, 제 말이 결정적이었던 건 맞았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 병원 의료진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불안정한 각인 중 알파의 자해를 통한 각인 파기란 그 연구 자료나 판례가 극히 드물었다.

있다 해도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21세기 이전의 일이 낭설처럼 기록되어 있었고 그 이후에는 각인을 하는 사람들도 흔치 않았으며, 각인 파기 수술의 도움을 받았기에 이런 사례는 국내에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치의에게 검사를 받고 수술에 들어가도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마당에 제 성질머리에 못 이겨서 뛰어내리니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도한은 더 이상 다른 오메가의 향을 맡을 수도 없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도한의 페로몬 샘이 열렸다 닫히니 주변을 지나가던 열성 오메가나 열성 알파가 기절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러트 때 약을 먹고 있긴 했지만 간헐적으로 발작을 하거나 며칠 동안 잠에서 깨지 못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대로 간다면 목숨을 잃는 것은 보나마나였다.

유일한 방법은 각인했던 오메가와의 접촉뿐.

자신은 정말 이 아이를 자유롭게 해 주려 했다. 자신이 했던 최악의 선택을 바로잡기 위해. 하지만 이 아이의 자유 따위가 자신의 자식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이 정도면 세상이 둘을 갈라놓지 못하게 하는 것 같군.’

남자는 씁쓸히 웃었다. 저 오메가 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제 자식을 살려야 했다. 그래서 미끼를 던졌다.

“선택은 자네가 하게. 일단 한번 보러 오는 게 좋을 듯하네.”

가만히 앉은 이림을 뒤로하고 가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흰 달이 밝게 빛나는 것을 한참 올려다봤다.

비록 괴로웠던 시간이 행복했던 시간보다 훨씬 길었지만 그마저도 추억이 되어 버렸다. 바스라진 추억을 안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이기적으로 행동한 과거의 행동에 대한 속죄일 것이다. 그마저도 이기적인 속죄지만.

***

그 만남 이후 이림의 머릿속은 계속 엉망인 상태였다.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라고?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모두 이도한의 함정이 아닐까?

한밤중에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울 때면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한 후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음날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점이었다.

나를 찾는다잖아. 부모로서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어도 아이가 찾는다는데…….

이 복잡한 문제 때문에 이림은 도무지 학교생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들었던 강의도 대충 필기만 끄적이며 멍을 때렸고, 종종 점심시간을 놓쳐 주린 배를 부여잡고 집에 오기도 했다.

그렇게 결정하지 못한 채 열흘이 지났다. 지우는 핼쑥한 이림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야! 너 왜 이래!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괜찮긴 뭐가! 너 완전 얼굴이 반쪽이다. 안 그래도 말랐는데 더 마르니까…….”

“하하…….”

이림은 어색하게 웃다가 골똘히 생각했다.

그래, 지금 자신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지우였다. 그럼 지우에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도한을 무서워하는 지우에게 다시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우와 함께 학교를 다니며 그런 문제와 관련된 건 입도 뻥긋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기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림은 눈을 내리깔고 책을 편 채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지만 도저히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스무 살에 그렇게 되면서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연락은 다 끊겼고, 가족들과도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게 가끔은 자기 자신의 목을 옥죄는 듯했다.

‘그래. 가족들에게만은 연락해 보자.’

짝짝!

뺨을 친 이림은 조심스럽게 전화번호를 눌렀다. 손에 식은땀이 흥건해지고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길어질수록 이젠 차라리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안절부절못하던 사이, 수신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어…… 엄마…….”

-누구…… 이림…… 이? 정말 너야?! 아이고, 이림아! 이놈의 자식! 너 어디야!

엄마는 울고 화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도 이림은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이림의 눈에도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제야 자신이 엄마 아빠의 가슴에 얼마나 큰 못을 박았는지 실감이 났다. 물론 이렇게 된 게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을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림은 거실에 앉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꺽꺽 울었다. 그동안의 고생과 설움이 눈 녹듯 내려갔다.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악몽에서 깨어나듯, 모든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

엄마가 불러 준 주소는 원래 살던 주택 맞은편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 앞이었다. 몇 번이고 주소를 확인한 이림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가족들을 만난다는 게 더 긴장되는 일이었기에 금세 잊었다.

하지만 중앙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몸을 적셔 왔다. 엄마에게로 뛰어가면서 그간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져 가는 기분이었다.

이림을 보며 허물어져 가는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림이 아는 엄마가 맞았다.

따뜻한 품 안에 안기자 이림의 마음 또한 무너져 내렸다.

엄마가 지금 사는 집이라고 소개한 곳은 아주 화려했다. 저택만큼은 아니었으나 이정도 형편에서 살려면 로또를 두 번 맞아도 무리일 것이다. 이림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감추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여전히 눈시울이 붉은 엄마는 예쁘게 깎은 사과를 가져왔다.

“고마워.”

“많이 먹고. 왜 이리 말랐어?”

“…….”

“……그나저나. 넌 어떻게 된 건지 엄마한테 말 못 해 주는 거야?”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음에 아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 사라진 건지, 어디 있는 건지, 무엇이 문제였던 건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울며불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방에 박혀 한 달 내내 나오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됐다. 왜 사라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이제는 살아 있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만약 아이가 살아 돌아오게 된다면, 이림을 붙들고 다그치지 않기로 수천 번을 다짐해 왔기에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조심스럽게 말의 물꼬를 텄다.

“너 사라지고 나서 너희 아버지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 그래도 평생 한 장사도 접어야 하는 마당에 아들놈까지 사라지니 안 쓰러지고 배겨?

너희 학교도 찾아가고 경찰서도 찾아가고, 집 다 뒤져서 전화번호부 찾아서 동창들까지 전화 싹 돌렸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 멀쩡하게 학교 다니던 애가 사라졌는데 다들 짜 맞춘 듯이 모른다니까 소름이 다 끼치더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

“그래서 일단 실종신고하고 네가 있었다는 장소들 CCTV 돌려보고 있는데, 글쎄 어느 남정네들이 집 앞에 찾아왔더라니까.”

“설마…….”

격앙된 엄마의 말을 조용히 듣던 이림은 입을 막았다.

“자기들이 지금 너를 보호하고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 같지도 않는 말을 하는 거 있지? 그래서 내가 뒤집어엎고 난리도 아니었지. 몇 번이나 신고했는데 전혀 통하지가 않더라…….”

“그…… 그래서?”

설마 또 말 안 듣는다고, 엄마에게 해코지한 건…….

이림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그렇게 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한숨을 쉬다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안 통하니까 자기들 멋대로 은행 대출을 갚아 줬더라.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 은행 보안이 그렇게 허술한 건지……. 남의 개인정보를 막 그냥.

너 찾으려고 몇 달을 헤매니까 자금도 떨어지고, 당장 집 월세도 못 낼 판이었어……. 게다가 네 동생이 막 수험생이 됐을 때라…….”

엄마는 조금씩 말을 띄엄띄엄하기 시작했다. 이림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엄마를 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괜찮아. 여기 들어와서 살게 된 건 정말 잘됐어. 난 엄마 아빠가 어떻게 됐을 줄 알고…….”

“흐윽…… 미안하다……. 미안해.”

도리어 사과를 하는 엄마의 모습에 이림은 안절부절못했다. 엄마를 달래다 보니 곧 연락을 받고 온 동생과 아버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가족들이지만, 그들의 품에 안긴 순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포근함이 이림의 전신을 감싸 왔다.

오늘 자고 가라는 엄마의 말에 오랜만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이림은 긴 눈을 깜빡이며 이곳저곳을 훑어봤다. 방이 더욱 커진 것과 개인 화장실이 딸려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자신의 방이었던 것처럼 제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는데…….”

어지간히 적적하셨나 보다. 이림은 어깨를 으쓱이고 침대에 누웠다. 무드 등을 켜고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깜빡이니 자연스럽게 생각의 부산물이 공중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누군가 도와주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잘 해결되어 가고 있었다. 부모님도 멀쩡하게 살아 계시고 친구들도 무사하다. 어째서인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왜 자기를 의심했냐고 추궁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이렇게 해 줄 줄 알았으면서, 왜 거짓말을 했던 거야?

이림이야말로 다시 도한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거실에서 동생과 엄마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장사 일에 힘겨워하는 모습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의 엄마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젊어진 것 같았다. 동생 또한 이림이 사라진 충격에 시험을 망치고 재수를 했다고 했지만 더욱 좋은 대학에 가게 되었고, 졸업 후 대기업에 다닌다고 했다.

무엇이 저렇게 재밌는 걸까. 이림은 행복하면서도 조금 외로움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도 저 식구 중 한 명인데.

이도한을 너무 미워했던 탓일까? 가족들이 행복해 보이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조금이나마 그를 덜 미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인을 해치지 않고, 원만하게 풀어 나갔다고 말했다면…….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그래. 어쨌든 모든 게 잘 해결되고 있다. 이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마주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도한의 죄, 그리고 강이림의 죄를.

***

이림은 거대한 저택 앞에 당도했다. 직접 이 정문을 열고 들어오게 될 줄은.

이곳에 도착하는 택시에서 발을 내리기 전까지 계속 망설였지만 이미 초인종을 눌렀으니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띵동-.

-……누구세요?

“저…… 강이림이라고 하는데요……. 오늘…… 그…….”

왜 이렇게 바보같이 말을 더듬는지.

이림은 입술을 짓이기며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그러나 횡설수설한 말을 잠자코 듣던 여자는 금세 말의 본질을 깨닫고 밝게 말했다.

-어머. 애기 도련님 만나러 오신다는 분? 잠깐만 기다리세요.

덜컹-.

그 말을 끝으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커다란 대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림이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가자 알파들이 차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타시죠.”

“네…….”

그들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검은 차량의 뒷문을 열었다. 이림은 한 손에 바구니를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뒷문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넓은 부지를 보는데, 서 있던 어린 알파 몇이 이쪽을 힐끗힐끗 바라보다 뒷머리를 맞는 것이 슬쩍 보였다. 몸은 커다랬지만 하는 짓은 철부지 같아 이림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그렇게 걸어가기에는 멀고 차를 타기엔 비교적 짧은 시간을 달려 저택 앞에 도착했다. 남자가 신분증 인식과 지문 인식 등을 하는 동안 이림은 침만 삼켰다.

조금 있으면 만난다. 내가 버린 자그마한 생명을.

모든 사실을 안 부모님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다독였지만 여간 충격을 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잿더미가 되어 버린 과거였으나 그 시간을 지나왔다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것이 사라진 만큼 많은 것이 생겼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쪽으로 오시죠.”

이림은 안내하는 고용인의 뒤를 따라 익숙한 길을 걸었다. 천천히 걷다 보니 푸른 대나무 숲이 머리를 살랑이고 있었다.

“이곳은…….”

“이림 님은 익숙하시려나요?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도련님 방으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고용인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림은 그 명랑함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벙이다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걸었다.

정말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상당히 낯이 두꺼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곱게 다듬어진 길을 걸어 고즈넉한 별채 앞으로 도착했다. 항상 별채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정문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을 줄이야. 이림은 저택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보다 더 긴장되기 시작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들어가고 싶지 않아.

점점 패닉 상태에 빠지고 있는 이림을 보지 못한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을 연 것처럼 전혀 다르게 바뀐 별채가 이림을 반겼다. 물을 잔뜩 머금어 싱그러운 자연 잔디 위 깔린 돗자리에서 자그마한 아이가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나풀거리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서히 고개를 돌린 아이는 처음엔 고용인을 보다가 그 뒤의 이림을 바라봤다.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순간 이림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대로 도망쳐 옆 담벼락에 기대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그에 놀란 고용인이 뛰어와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림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갑자기…….”

“헉…… 저기…… 네……. 근데 지금 제가…….”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도저히 되지가 않았다. 도한을 닮은 얼굴도 그렇지만, 왜 이제 왔냐는 듯 순한 눈동자가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아 보이는 이림의 모습을 빤히 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제가 주제넘은 것 같긴 하지만…… 도련님이 오랫동안 기다리셨어요. 사실, 얌전하시긴 한데 조금 문제가 있으시거든요…….”

“네? 문제요? 저는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이림은 덜컥 겁이 나 그를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고용인은 얼굴을 풀지 않고 점점 더 심각하게 말했다.

“사실은…… 너무 얌전하시고 말도 잘 들으시는데, 표현을 거의 안 하시고…… 울지도 않으시고. 유일하게 반응하는 게…….”

“……설마.”

“네. 이림 씨 사진만 보여 주면 자꾸 잡으려고 하고 옹알거려서 걱정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만나고 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눈앞의 오메가는 척 봐도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부성애가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오메가들은 임신을 하자마자 부성애가 생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다 근거 없는 속설일 뿐이었다. 사람마다 그 차이가 있으며 부성애가 생긴다고 해도 모두 다 똑같이 강하진 않았다.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이곳까지 왔지만 그보다 더한 죄책감에 금방이라도 졸도할 지경인 이 오메가를 어떻게든 꼬드겨 도련님 앞으로 대령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였던 고용인은 조용히 눈을 빛내며 이림의 대답을 기다렸다.

눈치가 귀신같은 고용인의 심리전에 이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게요. 망설여서 죄송해요.”

“죄송할 일은 아니구요. 이제 가실까요?”

고용인은 부드럽게 등을 밀며 재촉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내딛고 고개를 든 이림은 여전히 자신을 빤히 보는 아기를 바라봤다. 이제 두 살 남짓 된 아기는 의외로 이 상황을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것이, 자신은 아닌 것 같았다.

“어머. 이림 씨!”

“유모님……?”

별채의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이림을 보고 반갑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 와중에 팔을 쭉 뻗는 아기를 조심스레 껴안고 천천히 걸음걸이를 늦추며 걸어와 말을 건넸다.

“아이고, 이게 얼마만이야. 더 예뻐지셨네요.”

“하하…… 잘 지내셨어요? 유모님이 돌보고 계셨군요.”

“그렇죠. 제가 제발 좀 은퇴시켜 달라고 해도, 참. 계속 맡기시네요. 그래도 우리 도련님 너무 귀여워서 힘들다는 생각은 없어요.”

이림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마치 할머니와 손자 같은 모습에 이림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자꾸만 품 안으로 숨으려는 모습에 왠지 모를 씁쓸함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뭘 잘했다고 이래. 이기적이다, 나.’

이림이 자괴감에 빠지기 전에 유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집 안에서 차라도 한잔하죠!”

마주 앉은 유모는 시시콜콜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림도 편하게 대답했다. 학교가 경사져서 꽤 오르기 힘들다든지 매일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이라든가, 요즘 유행어라든지 하는, 쓸데없는 유모의 질문에 성실히도 대답했다.

하지만 이것이 유모만의 배려라는 것을 이림 또한 알고 있었다.

대화가 끝날 때마다 조심스레 아기를 바라봤지만 이림을 빤히 보다가도 팩 고개를 돌리는 아기 때문에 만질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림은 실망하지 않았다.

홍차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수다를 떨던 둘은 아기가 경계심이 사라져 꾸벅꾸벅 잠이 들 즈음에야 말을 멈췄다.

“어머, 잠들었네. 이제 만져 보셔요.”

“아니, 아니에요.”

이림이 손을 저으며 물러나자 유모는 더 권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지금이야 익숙하지 않겠지만, 이곳까지 온 이상 도련님과 이림은 빠르게 가까워질 것이다.

다음 날, 이림은 다시 저택을 찾았다. 아직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지만 그 빵빵한 볼을 가진 순한 아이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별채 안에서 아장아장 걷던 아이는 이림을 보자 뒤뚱거리며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벽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신발을 벗는 그를 바라봤다.

이림은 어색하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한림아, 아빠한테 와야지.”

“…….”

“아빠가 미안해. 그동안 안 찾아와서. 응?”

이림은 진심이 담긴 사과를 했다. 아이는 그를 곁눈질하며 빤히 바라보다 슬그머니 나왔다. 낯선 사람을 보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경계가 가득했다.

유모는 그릇을 정리하다 둘을 보고 조용히 움직임을 멈추고 아기를 지켜봤다. 두 손을 모은 채 우물쭈물하던 아이는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이림의 눈을 바라봤다.

긴 속눈썹이 팔랑이며 눈동자를 드러냈고, 그 검은 눈동자에 이림이 비쳤다.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이림은 저도 모르게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갑자기 안겼지만 아기는 발버둥 치지 않고 얌전히 안긴 채 눈만 굴려 댔다.

멀어지면 그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차라리 생각나지 않았으면, 하고 이기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의 끈은 자꾸만 자신의 몸을 끌어당겨 어떤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도한의 뜻대로 된 것들도 있었지만 이림의 뜻대로 이뤄진 것도 있었다.

길고 긴 싸움의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새 생명이 태어나,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이 소모전을 끝낼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

“이제 가야겠다. 우리 아기, 잘 있어.”

작은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은 이림은 짐을 챙겨 일어났다. 장난감을 쥔 채 멀뚱하게 올려다보던 아이의 얼굴이 밖으로 향하는 이림을 보고 그가 간다는 것을 알아채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으이잉…….”

“내일 또 올게, 응?”

벌써 한 달째 매일 찾아오는 이림에게 낯을 가리지 않게 된 아이는 이제 이림이 간다고 할 때마다 떼를 쓰기 시작했다.

유모의 또 시작이라는 표정에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이림도 내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같이 살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에게도 있으니까. 유모는 별채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지만 이림은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이곳은 살아 숨 쉬는 새장 같은 곳이었다. 자신이 쓰던 물건, 몇 년 동안 기르던 식물, 읽었던 책들…… 모든 것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바로 어제까지 이곳에 머문 것 같이 느껴졌다. 너무나 포근하고 안락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는 장소였다.

이 좁은 집 안에서 만족하고 살았다니. 하지만 이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저택은 기품 있고 차분한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었지만 언제나 정글과 같았다.

이 집 주인들의 성격이 까다로운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하는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으니 그들이 예민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복도에는 먼지 한 톨 없었고, 일반인은 꿈도 못 꿀 값비싼 가구들도 3년에 한 번씩 교체되었다. 꽃병의 꽃들은 무조건 생화만 사용하였으며, 드넓은 마당을 쓰면서도 집 안에선 개미 한 마리 못 기어 다니도록 철저하게 관리해야만 했다.

처음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다반사였지만 그렇다고 금세 짐을 싸 들고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어딜 가도 이 일을 하면서 이만큼의 봉급은 받기 힘들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고 우아한 곳에서 지내더라도 폐쇄적인 이곳에서 수십 명이 함께 모여 살게 됐으니 파벌이 생기고 싸움도 종종 생겼다. 하다 하다 할 게 없을 땐 이림의 뒷담화도 아무렇지 않게 했으니, 하여튼 이곳은 제정신은 아니었다.

미숙하고 연약한 이림의 성격과 몸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이 저택을 거부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쉴 때까지 우는 아이를 안쓰럽게 보던 이림은 유모가 하는 손짓을 보고 재빨리 나갔다.

‘아이를 키울 능력이 됐다면…….’

아이를 품 안에 안은 순간부터 아무것도 중요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시작해야 할까.

‘그럼 일단 졸업부터…… 잠깐. 아직 졸업하려면 몇 년이나 남았는데.’

이림은 안절부절못하며 땅만 보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미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해서 눈 감고도 길을 외울 정도였으니 아무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어 생각을 멈춘 채 고개를 들었다.

“……!”

노을이 하늘을 집어삼켜 모든 것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풀벌레가 조금씩 울기 시작하고,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파고들다 옆으로 사라졌다.

신기루 같은 인영이 담벼락에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림은 멍하니 도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내린 머리카락, 스러지는 빛에 반사되어 더욱 환하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는 분명 자신이 아는 도한이 맞았다. 무표정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도한은 마치 인형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환영을 보고 있는 건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도한에겐 전보다 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바람에 조금씩 흐트러지는 머리칼과 옷자락을 보니 정말 몇 달 전 그 사람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무표정했지만 조금 쓸쓸해 보이는 표정은 아름답지만 인간미 없는 외로운 저택과 닮아 있었다.

큰 키와 넓은 어깨는 그대로였지만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마른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 봤자 그 거대한 몸에서 근육이 조금 빠진 것뿐이었지만, 따스한 빛이 사라지고 푹 패인 눈가는 병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바보 같은 생각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분위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도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이림이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렸다.

“지금 가나 보지?”

의외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평범했다. 잔뜩 긴장한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이림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우리가 평범하게 안부나 물을 사이였던가?

“당신 만나러 온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어쨌든 내가 있는 곳에 스스로 온 건 맞잖아.”

말장난 같은 대꾸에 이림은 울컥해서 더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저 미친놈이 갑자기 회까닥 돌아서 다시 저를 별채에 집어넣는다면 이림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림은 잔뜩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도한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선으로 이림의 움직임을 뒤쫓았다. 어딘가 독기가 빠져나간 듯한 모습에 이림이 이대로 뛰어나가면 잡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사이 묵직하지만 또렷한 저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밖에서 나가 사니 그렇게 좋나?”

“…….”

“네가 그렇게도 원하던 거였잖아. 날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그렇게 나가길 원했잖아.”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이림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악랄할 수 있는지, 정말 어딜 보고 저딴 인간을 사랑해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림은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에 머리를 짚었다.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만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도발에 걸려들어 봤자 손해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대로 등을 돌린 이림의 등에 대고 도한은 다 포기했다는 듯이 작별을 고했다.

“그래. 가 버려. 더 이상 난 이곳에 없을 테니까.”

그 말에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가던 이림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의 주인인 도한이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건 무슨 의미인 걸까.

‘궁금해하지 마. 그냥 가!’

하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림의 머릿속에 가족들과 지우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과 이도한 때문에 험한 꼴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물론 고통스런 시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도한이 그 이상으로 보상해 왔다는 것이 왜 지금 생각난 걸까.

그것에 대해 물어보려 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도한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별다른 대화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금세 어둠이 드리워지고, 이림의 주위로는 적막만이 맴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림은 급하게 떠나려 했던 것이 무색하게 한참이나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

정말로, 이도한은 그 뒤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굴었던 게 무색하게 도한은 찝찝한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림은 자기가 꿈을 꾼 게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했다.

사과를 쥔 채 멍하니 굳어 있는 이림을 보고 유모가 말을 걸었다.

“이림 씨, 이런 건 저한테 맡기시라니까요. 근데 뭐 하시고 계세요?”

“아…… 아무것도 아녜요.”

이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칼을 움직였다. 유모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손뼉을 쳤다.

“우리 이러지 말고, 밖에 좀 바람 좀 쐬러 나갈까요?”

“네……?”

“경호원을 동행하면 이 앞 산책로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도련님도 이제 슬슬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때도 됐잖아요. 어차피 다섯 살 때부터 유치원에 가긴 할 거지만.”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어머, 물론이죠.”

유모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주민들을 위해 지어진 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용 시설이기는 했지만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워낙 적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아기는 커다란 유모차에 탄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헥헥대며 뛰어다니는 강아지,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커피를 든 채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들. 한림이보다 한두 살 많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까지.

공원에 있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건 아이들이었다. 두 명의 아이들이 서로 공놀이를 했는데 몇 번 주고받다 보니 그 공이 이림이 있는 곳까지 또르르 굴러 왔다.

아이들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저 멀리서 아이들의 부모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이림 또한 인사를 하며 공을 주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 우와! 엄청 예쁘게 생겼다!”

“야아……! 엇…… 되게 귀엽게 생겼다! 몇 살이에요?”

여섯 살쯤 된 아이들은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유모차 안으로 고개를 박았다. 동생을 말리던 아이도 어느새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으응……. 이제 두 살 돼.”

“내가 훨씬 형아네! 아…… 여자앤가?”

“하하. 남자애야.”

이림은 웃음을 참으며 말해 줬다. 아이들이 오지 않자 그들의 부모가 다가와 그들의 목덜미를 잡았다.

“요놈의 자식들! 엄마가 목 터지게 부르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해? 어머, 죄송해요. 애들이 너무 귀찮게 했죠?”

“아니에요. 아이들이 참 활발하네요.”

“실례했어요. 그만 가자! 가서 저녁 먹어야지. 아빠가 기다리잖니. 어서.”

“에에? 조금 더 있다 가요!”

아이들은 발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팔을 걷어붙인 채 아이들을 질질 끌고 가는 엄마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이들은 고개만 돌린 채 이곳을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돗자리에 도착해서도 뭐라 뭐라 불평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자리를 정리한 뒤 손을 내밀자 즐거운 얼굴로 그 손을 잡았다.

형제는 한 명씩 부모님의 손을 잡은 채 저 멀리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이림의 눈에는 어쩐지 자꾸만 그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는 온통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뿐이었다. 이곳이 상상 이상의 부촌이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보기 드물었고 대부분 40대 이상인 것 같았다.

그렇다 보니 연인들보단 자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림은 씁쓸함에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아이에게 소중한 어떤 것을 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고쳐 보고 싶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림은 유모차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머리카락을 쓸어 줬다.

“한림아, 아빠가 어떻게 해야 할까?”

“…….”

“한림이도 아빠가 둘이었음 좋겠어?”

“둘…….”

아이는 이림을 멍하니 보다가 그대로 따라 했다. 자신의 말을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긍정을 하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그때 커피를 사러 갔던 유모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경호원과 함께 온 그녀는 시원한 스무디를 건네며 말했다.

“아유. 이제 여름이네요.”

“제가 가도 됐었는데요. 힘드시게.”

“아니에요. 이 나이에 벌써 그럼 큰일이죠. 그건 그렇고 이곳 분위기 좋죠?”

“네……. 그렇네요. 아까 어떤 아이들이 왔다 갔어요. 한 여섯 살쯤 됐는데-.”

이림은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생기 있는 얼굴에 유모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쳐 줬다.

“……그래서 그 아이들 어머니가 질질 끌고 가셨는데 너무 웃기더라고요.”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인가 봐요. 부러워라.”

갑자기 유모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혼잣말처럼 무언가를 작게 흘렸다.

“우리 작은 도련님도 아드님 크는 걸 보셔야 하는데……. 어휴…… 참……. 죄송해요. 나이 먹고 주책이야.”

“네……? 갑자기 무슨……. 이도한 말씀하시는 거예요?”

“죄송해요. 이림 씨가 겪은 일 다 알면서…… 나이를 먹었더니 노망이 났는지……. 작은 도련님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 생각하니 자꾸만…….”

유모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림은 멍하니 유모를 보며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작은 도련님이라면……설마…….

그리고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요?”

유모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본인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말을 시작했다.

“사실 저도 제대로 들은 것은 아니에요……. 극비에 부쳐진 일이라 저번 주까지만 해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죠. 그런데 집 안에서 점점 이상한 말이 돌기 시작하더라고요. 무슨 이상한 병에 걸리셨다나……? 어차피 작은 도련님 상태가 위태로운 마당에 더 이상 숨겨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왜 이제야…….”

“어디가 아픈 건데요? 언제부터요? 예?!”

“확실한 건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어디가 아프시고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기정사실화된 이야기죠.”

“말도 안 돼……. 우성 알파에다, 나이도 젊은데……. 전 그런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어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인데-.”

이림은 혼란에 빠졌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어진 듯 감각이 희미해지고, 유모의 목소리조차 귓바퀴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것처럼 겉돌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매여 살면서 언제나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도한도 죽이고 싶었다. 분노와 고통스러움, 슬픔 등이 꾹꾹 눌러 담겨 언제나 그 하나만을 향해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보단 어떻게 하면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그가 후회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

결국 마지막에는 모든 것에 지쳐 죽음을 선택했지만, 죽음의 바다를 건너다 돌아온 이림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기면서 다시 모든 것을 돌아보게 됐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을 걸까.’

이러면 안 되잖아. 나에게 미안하다고 빌어야지. 속죄하고, 우리의 아이에게도 잘못했다 빌어야 하잖아. 누구 마음대로 죽는다는 거야.

분명 이런 마음일 것이다. 이기적이고 멋대로 굴어 놓고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비겁하게 도망치는 이도한이 미워서 생기는 마음일 것이다.

이림은 애써 공허한 마음을 무시하려 입술만 꽉 사리물었다.

그때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가 손을 덮어 왔다.

“이림 씨.”

“…….”

“솔직히 병 주고 약 주고 있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누가 뭐래도 이림 씨를 응원하고 있어요. 이건 그냥…… 도련님이 제가 이십 년이 넘도록 봐 온 자식 같은 분이라 저도 모르게 뱉어 낸 말일 뿐……. 사실은 도련님을 걱정하는 것만큼 이림 씨를 응원하고 있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그건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죠. 사실은 모두들 같은 방향을 보며 기대를 걸고 있지만, 그것은 과거의 연장선일 뿐. 다시 덮어 봤자 언젠가는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테죠.”

“흐윽…….”

“도련님은 쉽게 포기하실 분이 아니세요. 지금 내린 결정은 아마 도련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일 거예요. 아마…….”

이조차도 다 가짜일지도 모르지만.

유모는 차마 이 말은 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태생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사람을 입맛대로 조종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자식처럼 그를 키워 온 유모마저도 가끔씩 두려울 때가 있었다. 애정을 얻기 위해 애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결과적으로는 좋든 싫든 자신의 편에 서도록 만들었다.

유모는 우는 이림을 달래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되든지 결국 모든 것은 권한 밖이었다. 둘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곳은 없었으며 그럴 자격도 없었기에, 그저 좋게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적막이 감도는 안채에는 가끔 새 지저귀는 소리와 풍경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따스한 햇빛이 환상처럼 아름다운 방 내부를 비추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경호원들은 익숙한 얼굴에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뛰어온 이림은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무슨 용건이십니까?”

“회장님……! 회장님 좀 뵈러…… 하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예의 없는 건 둘이 똑같군.”

경호원의 보고를 들은 그는 한숨을 쉬며 신문과 차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터라 당황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려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윽고 한달음에 달려온 이림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둘째 아들놈 때문에 온 건가?”

“……네.”

“흠. 그럼 긴말하지 않겠네. 일단 앉게.”

“잠깐만요……. 그 전에 제게 할 말 없으세요?”

이림은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였다.

또 당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핏줄들.

이림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다 들켰으면서도 남자는 느릿하게 차를 들었다.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이 때문에 이 집에 들어오고 나면 어떻게든 이도한과 마주칠 것이고, 언젠간 그의 병까지 알아챘을 것이다.

남자는 이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입꼬리만 올린 채 물었다.

“그 애가 걸렸다는 병은 거짓이 아니야. 그리고 애초에…… 내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나?”

“…….”

“난 자네가 아이를 봤으면 했던 거고…… 그 아이도 아비를 보고 싶어 했고. 그냥 물어보지 않았으니 말을 하지 않았던 거라고 치면 되겠군.”

이림은 황당함에 잠시 말을 잃었다. 허탈함에 그대로 굳어 버린 그를 흘끔 보던 남자는 나직하게 앉기를 권했다.

“박 팀장. 차 좀 내오게.”

“전 그래도 마음 안 바꿀 겁니다. 저는…… 저는!”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뭐…… 뭐라고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사람을 꼬드길 땐 언제고, 이제는 미련 없다는 듯 포기해 버린다. 아무리 이림이 오기를 부리며 싫다고 했어도 이 남자에게는 이도한이 소중한 자식일 텐데, 그의 목숨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상식선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애원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식이 잘못했어도, 꼴도 보기 싫더라도 죽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누구보다 추잡하고 비굴하게 애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체념 어린 표정을 한 번 짓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다. 결국 도한 또한 하나의 장기 말에 불과했던 걸까?

“그게…… 끝입니까.”

“무슨 대답을 원하지? 그놈을 도와주는 것도 싫다, 죽게 내버려 두는 것도 싫다.”

“…….”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림은 머리가 아파 와서 잠시 비틀거렸다.

그래, 어쩌면 저 사람의 말대로 내가 바보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끝내 끊지 못하는 머저리.

남자는 찻잔을 내려놓고 먼 곳을 바라봤다. 주름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지만 진한 눈썹이나 깎은 듯이 깊은 눈썹뼈 아래 형형한 눈동자는 과거의 영광을 잠시나마 비추는 거울이 되어 있었다.

“자네가 겪었던 건…… 아버지, 조부, 증조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한참 전부터 내려온 악습이지.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교육받았듯, 나의 아버지도 조부에게 가르침을 받았겠지. 이 이상한 관습에 대해서 말이야.”

“잘못된 걸 알았다는 겁니까? 알고도 그랬다고요?”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알면서도 하는 거지. 빼앗을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 한 거지.”

남자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고 자체가 자신과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하면 안 됐어. 시대가 변하면서 오메가의 위치가 달라지고, 그들을 짐승이 아니라 반려인으로 대하면서 점차 그 악습이 흔들리기 시작했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

“오메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의 진심을 갈구하는 순간부터 이 악습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는 거겠지. 난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 사람을 잃고 나서야……. 그래서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뿐이다. 그래서 이도한에게 널 포기하라고 했다.”

“……!”

하지만 이도한은 당연하게도 그 말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상태에 대한 설명도 추가로 들을 수 있었다. 이림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지금 이성그룹 재단 병원에 있으니까 직접 상태를 보고 싶다면 가 보도록 해.”

“……갈 일 없어요.”

“됐으니 나가 봐.”

남자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다시 신문을 펼쳤다.

굳은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온 뒤, 어떻게 별채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이림은 유모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재로 가 컴퓨터를 켰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시간을 많이 때웠던 것 같다. 별채에 살았을 시절, 이곳에 빽빽이 꽂힌 책들을 찢기도 하고 서류들을 구겨서 바닥에 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림을 다정하게 걱정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한 증오로 온 마음이 시커멓게 타 버렸음에도, 어째서 이런 과거가 애틋한 듯 떠오르는 걸까? 누군가 자신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해도 마땅히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일은 없다. 이렇게 쉽게 뒤를 돌아볼 것이었다면 아이를 버리고, 목숨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림은 숨을 몇 번 천천히 내쉰 후 무언가를 검색했다.

<각인 파기 부작용>

검색 결과는 많이 나오지 않았다.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일반 검색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고, 영어로 해외 사이트에서 검색하자 영어로 적힌 논문들이 나왔다. 하지만 번역기까지 돌리며 고생한 결과 어느 정도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가 목을 물어 각인을 했고, 이림의 몸이 방어적으로 변하면서 목숨이 위태로워졌고……. 강제로 각인이 파기가 되면서 얻은 부작용들은 소름 끼치는 것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그가 여태 지켜 오고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은 물거품이 되어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지금도 그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겠지. 내가 아이와 놀고 이 별채에서 낮잠을 자고 학교를 다니는 순간에도…… 계속.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이림은 멍하니 있다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파들거리는 입꼬리는 얼마 가지 않아 천천히 내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앞에서 실컷 웃어 주고 싶은데, 목이 꽉 막혀 숨조차 쉽게 뱉어낼 수 없었다…….

그렇게 도한의 흔적이 남은 서재에서 이림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이림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

화창한 주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은 이림은 커다란 건물 앞에 서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한국대 부설 대학 병원으로 그 위용만큼이나 높게 지어진 건물은 맨 위층을 바라보려면 한참 고개를 꺾어야 했다. 그러다가 목이 아파 올 즈음에는 다시 바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지만 도저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겠다. 그렇게 수십 번을 고민하다 끝내 도한을 만나기로 했지만, 병원 앞에 서니 정말로 맞는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이림은 입술만 깨물다 뒤를 돌아 야외 벤치에 털썩 앉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다. 분명 앞으로 달려가는데 계속 넘어지는 느낌. 자꾸 누군가가 발목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은 우연이겠지만 두 번째부터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분명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벗어나지 못한 걸까.

네가 없는 곳으로 도망쳤는데, 왜 자꾸만 내 귓가에 너의 소식이 들려오는 걸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이것도 다 이도한의 계획인 건지, 아니면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왔다. 모든 것을 의심하며 절대 오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어둠 속에서 생각에 깊이 잠길 때면 항상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이 마지막인데. 정말로 후회 안 할 거지? 영원히 못 볼 텐데…….

그 목소리는 한 번 시작되면 잠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들렸다.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딱 한 번만 찾아오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허공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악연은 쉽게 끊어질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달아나려 했건만 이제 와서 미련이 있는 듯 구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체득된 습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높은 듯한 체온과 부드러운 머리카락. 잠결에 스치면 부드럽게 감겨 오는 손가락. 제 몸을 끌어안으며 내던 나지막한 웃음소리까지. 그 체온과 목소리가 한순간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잊혀진 채, 가끔 자신의 추억 속에서 살아나겠지.

이런 생각이 끝날 때면 덜컥 겁이 났다.

어떻게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는지. 이림은 새벽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자조했다. 그는 육체만 가둬 놓은 것이 아니었다. 몸은 멀리 떨어져 나갔지만 이림의 정신만은 여전히 그 별채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끊어 내려면, 이도한의 죽음을 눈앞에서 봐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힘겹게 왔건만 막상 정말로 이도한의 얼굴을 본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그러나 오늘 돌아간다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 것 같아서 이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어떤 일 때문에 오셨죠?”

“아…… 여기 이도한이라는 환자 있나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강이림입니다.”

직원은 전화기를 들고 무언가를 속닥거리더니 이윽고 이림에게 몇 층으로 가라고 안내를 했다.

맨 꼭대기 층으로 가면서, 이림은 역시 지금이라도 내려가야 하나 끊임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미련이 충돌하며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만약 이곳에 지우가 있었다면 정신 좀 차리라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하고 아파했으면서 제 발로 그곳에 찾아가는 게 말이 되냐고. 분명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어릴 때 드라마에서 자꾸 상대방에게 끌려가는 미련한 주인공이 이해가 가지 않고 답답해서 짜증이 났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인공이 바보 같은 행동을 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이림은, 처음부터 감정으로부터 도망쳤다.

이도한을 마주칠 때마다 날뛰었던 감정을 모른 척하며 휘말리지 않기 위해 피해 다녔다. 결국 마주치자 그가 자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그렇게 천천히, 고통스럽게 감정에 물들었다.

없애고 싶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아파하는 만큼 이도한도 괴로웠을 것이다.

상념에 빠져든 사이, 맨 위층에 도달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의아함과 경계심을 담고 이림을 내려다봤다. 그중에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밀쳐 내고 앞으로 다가왔다.

“강이림 씨?”

“네?”

“아, 소개가 늦었죠. 안녕하세요. 이성그룹 자택에서 근무 중인 이경훈이라고 합니다. 전에 몇 번 뵌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네에…….”

“혹시 이도한 씨 보러 오셨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지금-.”

“아! 아뇨! 그러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보고 가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림의 간절한 부탁에 경훈은 고민했다. 하지만 익히 아는 사이고 이미 아래에서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경훈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을 따라 복도를 걷자 잠시 뒤 한 병실 앞에 도달했다. 경훈이 카드를 찍자 자동문이 열리고, 이림은 얼결에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일 마치고 가십시오.”

“아…… 예.”

경훈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자동문이 서서히 닫혔다. 자동문 앞에 여닫이문이 하나 더 있었다. 텅 빈 방에서 혼자가 된 이림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기계음과 가습기 소리가 웅웅대며 울리는 커다란 공간 한가운데 기다란 인영이 누워 있었다. 베이지 톤으로 조화롭게 배치된 가구들과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깨끗한 창은 이곳이 병원이 아니라 고급 빌라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한 남자를 보자마자 전부 잊혀졌다. 불안하게 뛰던 이림의 심장은 점차 벅차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가자 인형처럼 눈을 감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도한이 보였다.

깨끗한 침대에 하얀 병원복을 입은 채, 긴 속눈썹을 드러내며 고요히 누워 있는 그는 숨을 쉬는 게 맞는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점점 상체를 숙이던 이림은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슴과 코에만 집중하느라 도한이 눈을 뜬 것도 몰랐다.

“…….”

“……악!”

이림이 기겁을 하고 떨어지자 도한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생명을 받은 인형처럼 순식간에 눈을 뜨고 소년처럼 웃는 도한을 멍하니 바라봤다.

푸석푸석한 머리나 병원복이 헐렁해질 정도로 마른 도한은 여전히 병색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지만 얼굴에 그려진 웃음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눈가를 휜 도한은 이림의 얼굴이 굳어질 때까지 계속 웃었다.

결국 이림이 씩씩대며 일어났다.

“뭐가 그렇게 웃긴데?”

“하하. 네가 보러 왔으면서 왜 귀신 본 사람처럼 굴어?”

“난 당신이 의식을 못 차린 줄 알았어. 그래서…….”

“…….”

도한은 웃음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보지 않아도 이림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보였다. 눈앞의 그림자가 조금씩, 쉴 새 없이 움직였으니까.

실제로 지금도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쓰러지기도 했고, 그렇게 기억이 끊긴 게 두 번이었다.

이림의 앞에서 충동적으로 몸을 던졌을 때, 사실 죽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림을 지상에 남겨 두고 한심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일 점점 숨이 약해지는 이림을 보고 있는 것도 끔찍하게 괴로웠다. 막다른 길에 들어서 점점 숨통이 조여지던 도한은 생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의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이림에게 해 왔던 일들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웠고, 봐 왔기 때문에. 그러나 언제부턴가 견고한 진리가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회로 찌들어 늙어 버린 아버지. 서시연의 죽음. 혐오와 분노로 가득한 이림의 눈빛. 모든 것들이 자신이 틀렸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생에 처음 느끼는 강렬한 끌림에, 그저 이림을 옆에 끼고 뒹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을 향하는 애정 어린 눈동자와 대비되는 이림의 빈한한 처지를 본 도한은 이미 그 게임에서 승리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예상했던 상황과 반대로 흘러갔다. 생각대로 따라 주지 않는 이림에게 짜증이 난 도한도 몇 번이나 이림을 버리려고 했다. 출장을 핑계로 며칠 동안 별채를 비우거나 일에 파묻혀 회사에 살며 애써 잊어 보려 했다.

자신이 뭐가 못나서 오메가 하나 버리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자만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결국 별채로 기어들어 갔다. 이림이 물든 만큼 자신도 물들었다. 그것을 인정하자 도한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애정에 목마른 한심한 알파 한 명이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제 와서 놓아줄 수도 없었다. 미칠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정신이 한계까지 몰린 도한은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뛰어내린 후 싸늘한 바람을 느끼면서, 그는 순간 이대로 전부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만약에 이대로 죽지 않는다면 자신은 또 이제껏 해 왔던 지독한 짓을 반복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 싶었다. 이림이 괴로운 것은 싫었지만 그가 자신의 옆에 없는 것도 못 견디는 이중적인 감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도 지쳐 버렸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땅으로 뛰어내렸으나 죽지 못했다. 결국 도한이 가야 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든 가질 것이다. 더럽고 추잡해 보일지라도, 끝까지 쫓을 것이다. 그리고 붙잡게 된다면 둘 다 심장이 터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품 안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며 도한이 느릿하게 말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진 모르겠지만 위험한 상태는 맞아. 눈 뜬 이후로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은 맡을 수가 없고, 각인 상대의 페로몬을 맡지 못하면 죽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

“그런……! 그럼…… 내가 있어 줘야 하는 거야?”

됐어. 도한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도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난…… 네 옆에 있어 주지 못하는데…….”

이도한은 황당함에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망설이는 이림을 바라봤다.

방금 뭐라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목소리에 도한은 할 말을 잃었다.

“강이림. 넌 내가 죽길 바라는 거야?”

“……그건 아니야. 하지만 이때까지 네가 나한테 했던 짓은 어떻게 되는데?”

이림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원망을 담아 말했다.

“나 거기에 감금되고, 아이까지 임신했어. 그게 보통 사람이 겪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 난 그 일로 죽으려고까지 했다고. 그런데 지금 본인만 중요하다는 거야?”

“내 목숨이 중요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랬다면 뛰어내리지도 않았어.”

“……그럼 어쩌자는 거야. 나만 모른 척하고 다시 별채로 들어가라고?”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

도한은 절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쉽게 얘기하지 못하고 주먹만 꽉 쥐고 있었다.

이림은 어지러운 느낌에 옆에 배치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가 하는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다음이라는 기회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도한은 찡그리던 표정을 서서히 풀고 손목에 힘도 뺐다. 다시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생기가 사라진 도한은 이림이 아닌 다른 곳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다섯 살 때, 우리 집에 사는 여자를 보고 엄마라고 했다가 크게 혼이 났어. 그 사람은 내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의 정부였거든. 날 보면 항상 상냥하게 이름을 불러 주고 먹을 것을 쥐여 주며 장난을 쳤으니까. 온화하고 상냥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지. 그래서 엄마라는 소리가 나왔나 봐.”

“…….”

“그 말을 들은 친어머니한테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난 후에 나는 더 이상 별채에 가진 않았지만 이상함을 느끼긴 했어. 저 여자는 누구일까. 엄마가 아니면 누구일까. 내가 아버지에게 묻자 아버지는 자신의 연인이라고 했어.

그리고 어머니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 적어도 내 앞에서는 말이야. 나의 형제도, 유모도, 수행원들도, 집에서 그림자처럼 일하는 고용인들도……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어. 나를 혼냈던 사람도 어머니가 유일했으니까.

내가 이상함을 느낄 때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나를 세뇌했어. 언제부턴가 나도 그게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내게 어떤 부분이 맞고 틀린지 얘기해 주지 않았어.”

“…….”

“네가 좋았고 옆에 두고 싶었지만, 내가 배운 방법은 이런 것뿐이었어. 사실…… 모두 다 변명일 뿐이겠지. 난 그냥 글러 먹은 놈이니까. 하지만…… 널 사랑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도한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말을 멈췄다. 이상한 긴장감이 둘을 감쌌다. 이런 이야기가 거짓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리고 계속 조용하던 이림이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거…… 잘 느껴져. 나도 솔직히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선배.”

“…….”

도한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오랜만에 듣는 존칭에 때아닌 추억에 젖었다.

앳된 티가 나던 스무 살의 이림과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자신. 졸업을 코앞에 뒀으면서도 넓은 학교에서 어떻게든 그를 찾아냈고, 아닌 척 몇 번이나 도와줬다. 평소 하지도 않는 짓들을 하며 졸졸 쫓아다녔으면서도 그게 좋아해서 그랬다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빛바랜 추억은 사라지고, 믿고 싶지 않은 현실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도한은 말하지 않아도 왠지 이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럼 날 정말 버리겠다는 거야? ……아니지?”

이림은 눈을 피했다. 그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비굴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빛나던 사람은 사라지고, 내일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연약한 이만이 제 앞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그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 도한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그도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단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침착하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다급하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 정말로…… 언제 죽을지 몰라. 다음 주가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어. 의사에게 물어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

도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이림의 얼굴을 살핀 도한은 입술을 씹었다.

“내가 그렇게 미워?”

“그런 게 아니잖아. 어차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봤자 또 같은 결과만 나올 뿐이야. 나도 당신이 죽는 건 싫어. 하지만…….”

“내가 이제 안 그런다고 했잖아. 별채에서 나가고 싶다면 나가서 살아, 학교도 다니고 싶으면 다녀. 다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그 말 뒤에 숨겨진 말이 있겠지.

“내가 영원히 사라져도 된다는 거지?”

“……미안해.”

이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괴롭히는 건 도한의 몫이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마치 자신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림도 마음만은 조급했다. 이 세상에서 도한이 사라지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를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악한 마음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원래대로 대학을 다니고 아이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안정기에 들어갔건만 이 상황은 끝이 나질 않았다.

간절한 그의 애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그가 죽든 말든 이곳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금의 미련이 자꾸만 이림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꾸만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때까지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지금 당장은 마음대로 하라고, 옆에만 있어 달라고 하지만 도한이 다시 자신을 죽음까지 몰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이림이 머리가 터져라 갈등하는 사이, 미동도 없던 그가 서서히 일어났다. 도한의 향기가 어렴풋이 나는 것을 느낀 이림이 고개를 들자 그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림이 당황스럽고 놀라 도망가려 하자 커다란 손이 허리로 들어왔다. 정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는데 예상 외의 단단한 힘에 굳어 버렸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멈칫한 것도 잊고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왜 이래……! 이거 놔!”

“나…… 너한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 없어. 그냥…… 다시 한 번 새로 시작할 기회를 줘. 일 년만…… 아니, 반년만!”

이림이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밀어낼수록 도한은 점점 더 숨 막히게 옭아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꽉 껴안자 이림은 포기하고 간신히 색색거렸다.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를 기껍게 받아들이는 몸과 달리, 머리는 그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왜 이곳에 왔는지, 그를 만나서 어떻게 해야만 할지 머리가 아프게 고민했던 문제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아서 이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이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니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강의실 구석에서 잠든 자신을 깨우는 손길에 일어나 악몽이었다고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애틋한 마음과는 별개로, 다른 쪽은 그에 대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 비록 처음 별채를 벗어났을 때보다는 많이 안정적으로 변했지만 그렇다고 몇 년간 당해 온 감금 생활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다.

그곳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감시당해 왔고 고용인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감았던 눈을 뜬 이림은 눈앞의 도한을 바라봤다. 커다란 몸을 기대 채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의 이목구비는 날카로웠지만 초췌했다. 방법은 딱 한 가지다. 눈까지 꼭 감은 도한을 보던 이림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매일 이곳에 찾아올게.”

“……정말?”

“그래. 하지만 당신과 다시 합치겠다는 건 아니야. 치료 목적으로. 솔직히 매일은 못 올 것 같고. 의사가 권장하는 텀이 있을 거 아니야. 그때마다 한 번씩 올게.”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응? 나 정말 후회해……. 한 번 더 뛰어내리면 되겠어? 어떻게 하면 마음을 바꿀 거야. 아니, 어떻게 해야 기회라도-.”

“억지 그만 부려. 붙잡겠다고 말도 안 되는 말 지껄이는 건 이제 그만해.”

이림은 냉정하게 일어났다. 끝끝내 손가락이 계속해서 옷깃을 붙잡았지만 이림은 도한의 손을 떼어 냈다.

“나 때문에 죽었단 소리 듣기 싫으니까 하는 거야. 그럼 잘 지내. 나한테 언제 오라고 문자 보내고.”

달칵-.

이림은 차마 도한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한 채 태연한 척 밖으로 나갔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숨길 수 있었다.

그를 만나서 억척스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보니 아직 멀었다.

스스로도 왜 감정에 잠겨 벅차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추스르고 병원을 빠져나갔다. 밖은 어느새 쌀쌀한 어둠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병원 밖에 선 이림은 그 싸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자유가 됐을 때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쁨이 와닿지 않았다. 모든 게 의심스러웠고 꿍꿍이를 알 수 없는 그의 아버지를 보는 것도 불쾌했다.

항상 끌려가는 수동적인 인간. 자신에게 붙은 수식어였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갑자기 바뀔 순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에서야 시큼털털하고 후련한 감정이 드는 것은, 분명 과거의 자신보다는 지금의 자신이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며칠 뒤, 이림은 그의 비서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아, 네!”

-상무님께 잘 전달받았습니다.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눠도 괜찮으실까요?

그렇게 약속 날짜를 잡게 되었다. 휴대폰 지도로 병원 앞 카페의 위치를 찾은 이림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비서는 단정했지만 조금 피곤한 모습이었다.

“앉으시죠.”

“네…….”

“일단 자세한 건 의사에게 가서 들으셔야 할 것 같은데,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삼 일에 한 번 정도, 한 시간 이상 함께 있으셔야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보상을 할 계획도 있습니다.”

“아니요. 보상 같은 건…….”

“보상을 목적으로 오신 게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첨언하자면, 제대로 받아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미래를 위해서요.”

“네…….”

“그럼 이제 가실까요?”

비서는 사무적으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림이 얼결에 같이 일어나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3일에 한 번이라. 꽤 자주 와야 하는구나.

하지만 병원에 도착해서 만나게 된 주치의의 말은 비서와 달랐다.

“일단 지금 환자분이 위험한 상황이라 매일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하루 종일 같이 있으시는 게 좋구요. 최소한 매일, 하루에 네 시간은 함께 있으셔야 합니다.”

“네?”

“상황이 좋아지면 삼 일에 한 번, 혹은 물약으로 대체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가능하게 만들 순 있지만 그건 최소 육 개월 뒤라고 봐야 할 것 같네요.”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이 당황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확고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이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길다면 긴 상담을 마치고, 간단한 검사를 끝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지치는 느낌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병실 문을 연 이림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뿅뿅-.

“……뭐 해?”

“왔어?”

도한은 기다란 몸을 누인 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순간 방을 잘못 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광경이었다. 원래 병실에 오래 있다 보면 지루해지고 여러 가지 안 하던 취미를 갖게 된다는 말을 듣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생전 보지 못한 상황에 이림은 기가 막혔다.

도한은 이림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휴대폰을 던지고 일어났다.

‘비싼 기종일 텐데…….’

침대 밖으로 떨어진 휴대폰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꺼졌다. 최소 금은 갔다.

아픈 게 맞긴 한 것 같은데, 썩은 얼굴 거죽 상태와는 별개로 환하게 웃는 눈과 입을 보니 가끔 연기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이림은 보고 싶었다면서 마음대로 몸을 껴안는 그를 밀치다가 도저히 되지가 않아서 포기하고 안겨 있었다.

윤기가 사라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비비는 도한의 이마를 보면서, 조용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다. 너랑 이렇게 좋은 시간 보내는 게. 나 진짜 마음이 편해졌어.”

“허…….”

대놓고 비웃는 이림의 코웃음을 바로 옆에서 들었음에도 그는 눈을 감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림은 냉정히 말하며 어깨를 밀었다.

“난 치료를 도와주러 온 거지,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가겠다는 건 아니었어.”

“알아……. 근데 이렇게 붙어 있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인걸. 얘기 못 들었어?”

“정말……?”

이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했다. 확실히 그의 말이 틀린 것 같진 않았다. 주기적으로 페로몬을 흡수하려면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스킨십도 효과가 있긴 하겠지.

하지만 왠지 탐탁지 않은 느낌에 괜스레 도한을 노려봤다. 다시 두 팔을 벌려 허리를 끌어안으려던 도한은 동작 그대로 굳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냐는 듯 동그랗게 떠진 눈에 이림은 그냥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어차피 말로 못 이긴다.

때마침 벨이 울렸다. 이때다 싶어 있는 힘껏 그를 밀치고 문을 열었다. 힘을 쓰느라 상기된 표정의 이림 앞으로, 침착한 표정의 주치의가 간호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일단 하루에 두 번씩 집중 치료가 필요합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이 패치를 붙이고 경과를 살펴봐야 하고요. 상황이 많이 심각하니, 배우자 분께서 많은 도움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네.”

배우자 아닌데…….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이림은 애써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병실 밖으로 나가 회복실로 내려가기 위해 준비했다. 옷을 갈아입고 금속 액세서리를 빼는 동안 도한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본 이림은 조금 짜증스레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나와.”

“응…….”

도한은 그 말과 동시에 천천히 일어섰다. 이림은 침대에서 일어난 도한을 보고 문을 열고 나왔는데, 그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병실이 크다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은 아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자꾸만 자신을 시험하듯 구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얼굴을 구긴 이림이 한 소리 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벽을 짚고 선 이도한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아…… 미안……. 조금만 쉬었다 가자.”

“……왜 이래? 괜찮아?”

문 앞에서 벽에 기댄 도한의 얼굴이 창백했다. 몸을 구긴 채 입으로 호흡하는 그의 목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깜짝 놀라 그를 부축한 이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다가 너스 콜을 하려 했다.

하지만 도한은 손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일어나서 걸으면 이래.”

“뭘 얼마나 걸었다고……. 지금 당장 사람 부르자. 응?”

“나 입원하고 나서 걸어서는 처음 밖에 나가는 거야. 그래도 네가 어제 하루 종일 같이 있어 줘서 이만큼 좋아진 거고.”

“너…….”

“미안한데. 저기 휠체어 좀 가져다줄래?”

이림은 입을 달싹이다가 재빨리 휠체어를 폈다. 처음에는 어떻게 펴는지도 몰라서 우왕좌왕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둘을 찾으러 온 간호사에 의해 상황이 종료되었다.

휠체어에 탄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한의 안색이 방금 전에 비해선 많이 좋아졌다. 긴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모습을 보면서 이림은 침을 한 번 삼켰다.

‘많이 안 좋긴 한가 보네…….’

매일 장난스럽고 밝게 대하니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간호사는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면서도 주의사항을 끊임없이 읊었다.

“들으셨겠지만 지금부터 회복실에 들어가서 치료 시작할 예정이고요. 한 시간 뒤에 잠시 휴식 시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지금 페로몬이 안정되지 못해서, 환자분께서 밖으로 나가시면 곤란하시니까 회복실 안에만 계시고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절 부르세요.”

정신없이 대답하면서 도착한 회복실에는 커다란 기계가 놓여져 있었다. 수술대 같은 자리에 누워 채혈을 하고 알 수 없는 패드를 붙였다. 괜히 겁이 나 옆을 보자 이미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도한과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

걱정 마.

입이 빠끔거렸다. 도톰하지만 바싹 마른 입술을 멍하니 보던 이림은 그대로 천장으로 시선을 피했다. 형광등의 빛이 눈을 찔렀다. 하지만 곧이어 불이 꺼지고 둘만 남게 되면서 기묘한 정적이 둘을 감쌌다.

하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같은 방에 함께 있으면서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있었을까. 팔에 무언가를 잔뜩 붙였지만 가끔 따가운 느낌만 들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눈이 깜빡깜빡 감기면서 잠이 오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잠을 이기지 못하고 닫히면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치료와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새 시험 기간이 다가왔지만 매일 같이 병원에 있다 보니 이림은 공부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말이 4시간이지, 도한이 징징거리며 옷자락을 놓지 않을 때가 많아서 아침에 가도 밤늦게 집에 도착하기 일쑤였다. 자기 몸이 아프다는 둥, 심심하다는 둥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정말 주먹이 올라가는 것을 참느라 고생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을 만큼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말로 타일러 보기도 했고 화를 내보기도 했으나 그 고집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허약한 몸이 견디지 못해 이른 저녁에 잠에 빠지면 슬금슬금 빠져나올 수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2주간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도한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는 한쪽 팔에 깁스를 차고 있었는데 그것도 붕대를 푼 상태였다.

갈비뼈에 금이 간 건 아직 낫지 않았지만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을 때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꾸 귀찮게 구는 도한을 피해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에 뜨면, 도한은 침대 헤드에 기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 고개를 돌려 이림을 바라봤지만 그때마다 보였던 아무것도 볼 게 없는 창문 밖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많이 낯설었다.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다지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지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데도 왜 자꾸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걸까.

“왔어?”

답답한 마음을 안고 문을 열자 또 그가 벌떡 일어났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자꾸만 일어나려는 모습에 이림이 성큼성큼 다가가 살짝 어깨를 눌렀다.

“됐어. 앉아 있어. 나 시험공부 해야 하니까 말 걸지 마. 아직 의사 선생님 오기까지 40분 정도 남았지?”

“……그럼 내 옆에서 해.”

도한은 불만스런 얼굴로 자신의 옆을 두드렸다. 얼굴을 찡그리고 무언의 거절을 표시해도 뻔뻔하게 옆을 두드리길 몇 분. 침대를 내려치는 반복되는 소음에 이림은 결국 벌떡 일어나 간이침대를 폈다.

‘저 원수를 믿은 내가 바보지. 어디 카페 같은 데서 공부하고 올걸.’

카페에서 40분 정도 공부하고 나오기엔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 치료 전 짬 좀 내서 공부해 보려고 했더니.

막상 공부를 시작하자 그는 이림을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

“나도 그 수업 들었었는데. 이분은 중간 퀴즈에서 다 내셔.”

“……졸업한 지 한참 지났는데 뭘 안다고.”

“족보라는 게 괜히 있겠어?”

도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웃음기는 없지만 어쩐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집중하지 못하고 책을 덮은 이림이 소리쳤다.

“할 거 없어? 게임이나 하든가.”

“재미가 없네……. 내가 헛짓거리한다고 상무직에서도 쫓겨나고……. 일단은 병가 처리한 상태지만, 평생 제 구실은 못 하고 살겠지.”

자꾸만 부정적으로 말하는 도한을 본 이림은 다시 한 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그렇게 뛰어내리고도 멀쩡할 줄 알았어? 이만하길 다행이지. 그리고 이참에 말해 두는데, 네가 나한테 했던 말들 사실 다 변명이고 핑계야.

아무리 그렇게 교육받았다고 해도 다들 너처럼 행동하는 건 아니야. 고등학생 정도만 되면 적어도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게 되잖아. 그럼에도 선배는 그 길을 선택했어. 누구도 탓하지 마.”

“네 말이 맞아. 사실 지금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도 기적이지. 그때의 난 뭐가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만만했을까.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로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요즘 들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너한테 이런 모습 보여 주기 싫었는데. 그냥 요즘은 너무 비관적으로 사는 것 같아. 몇 년 전의 내가 제일 싫어하던 인간 군상이었는데 말이야.”

도한은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했다. 예상 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잔뜩 날을 세웠던 이림도 기운이 빠졌다. 그런 말을 듣고자 꺼낸 얘기는 아니었다.

‘아닌가. 듣고 싶어서 그랬나?’

정적이 흐르고, 이림은 애먼 침대 시트만 쥐어뜯었다. 치료만 아니었어도 이 불편한 공간에서 도망치는 건데. 참다못해 밖에서 기다리기 위해 일어서려는 사이 간호사가 등장했다.

이제는 눈 감고도 길을 외울 수 있을 만큼 길에 익숙해진 이림은 바닥만 본 채 발걸음을 옮겼다. 간호사와 레지던트들은 불편한 침묵에 괜히 눈동자만 떼굴떼굴 굴렸다.

방 안에 도착해서 다시 페로몬 치료에 들어갔지만 둘은 여전히 침묵했다.

똑똑…….

어디선가 들리는 일정한 소음이 이 방의 유일한 소리였다. 눈을 깜빡이며 옆에 누워 있을 그를 지독하게 의식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집중하면 그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의 향을 맡는 순간, 주인을 반기듯이 단박에 도한의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두근, 두근…….

이림은 심장 소리를 무시하려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숨을 쉬면 쉴수록 파고드는 향기가 머릿속을 잠식시켜 버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내일 또 뵐게요.”

“네…….”

해가 슬슬 넘어갈 때 즈음 치료가 끝났다. 땅거미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질 시점에서 병원 앞 가로등이 켜졌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복도를 걸었다. 둘은 병실에서 싸운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럼 저는 잠시 밖에 볼일 좀 보고 올게요. 말씀 나누세요.”

병실에 도착하자 간병인이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몇 초간 서 있던 이림은 개인 소지품을 챙기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아까 병실을 나가기 위해 온전치 않은 팔과 다리로 애써 휠체어에 옮겨 타려, 그가 힘을 썼던 게 기억났던 참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뒤를 돌아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잡아 줄게.”

“…….”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대로 잠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했고 미동도 없었다. 게다가 불을 켜지 않아서 노을이 져 갈수록 방은 더욱 어두워졌다.

밤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워진 하늘을 힐끗 본 이림은 고개를 숙여 도한을 바라봤다.

“……!”

그늘이 져 더욱 깊어 보이는 눈은 평소보다 더욱 어두워진 상태였다. 반질반질한 동공이 자신을 바라본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빨라졌고 얼굴에 피가 몰렸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똑같이 눈을 감았다.

“…….”

따뜻한 무언가가 닿고, 도한이 조심스레 각도를 비트는 것이 느껴졌다. 이림은 순간 절망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제껏 벗어나려 했던 모든 것은 발버둥이었을 뿐이었다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입술 한 부분만 가져다 댔을 뿐,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았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건 이림 스스로의 선택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유도했을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이렇게 만들기 위해 일찌감치 올가미를 쳐 놓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더는 모르겠다. 홀로 서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부서지면서 묘한 배덕감과 쾌감이 차올랐다.

동시에 슬픔과 절망감이 온몸을 덮치며, 무엇을 해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흑…….”

피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다. 제 발로 이 병원에 찾아와 치료를 도왔다. 하지만 어쩐지 눈물이 나왔다.

도한은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한 번 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정말로 날 떠나도 좋아. 아니, 내가 너의 인생에서 사라질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줘. 내가 망가뜨려 버린 것들을 조금이나 고치고 싶어. 이림아, 제발…….”

“이거 놔.”

이림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잡는 손을 밀어냈다. 그의 애원을 들으니 생각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그의 말에 혹하는 자신이 싫어 이림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켰다.

옷이고 휴대폰이고 다 버린 채 밖으로 달려 나가려 뛰었지만, 제대로 뜀박질을 하기도 전에 강한 힘에 끌어내려졌다. 도한은 온몸을 이용해 달려 나가는 이림을 붙잡아 끌어내렸다.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흘리는 이림을 보며, 도한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왜! 뭐가 문제야.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잖아. 얼마나 더 하면 좋겠어. 어떻게 해야 네 분이 풀릴까? 응?! 말해 봐!”

“너…….”

그는 진심이었다.

이렇게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른 감정은 병약해진 정신과 맞물려 활화산처럼 터져 버렸다.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닌 척 감정을 숨긴 채 그를 설득하려 해 보기도 했고, 모든 진심을 끌어 담아 애원도 해 봤다.

그러나 넘어갈 듯, 용서할 듯 위태롭게 휘청이다가도 끝내 자신을 밀어내는 이림을 볼 때마다 정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도 저주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감정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도한의 눈시울이 붉게 변했다.

“나도 미칠 것 같아. 돌아 버릴 것 같다고. 나 너무 힘들어. 이림아…… 나 너무 힘들어……. 제발 나 좀 버리지 마. 내가 부탁할게. 아니, 빌게. 하아…….”

“이러지 마. 나 좀 내버려 둬! 간신히 마음잡았는데……. 잠깐…… 이도한! 왜 이래. 숨 천천히 들이마셔! 왜 이렇게 떠는 거야……?”

도한은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이림의 위에 엎어졌다. 의식을 잃은 건 아니지만 심각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다행히 큰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호원을 통해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눈을 감는 도한을 본 이림은 발걸음을 옮겼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밖으로 나온 이림은 그제야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심장이 튀어 나갈 듯이 세게 뛰었다. 땀을 식히는 바람을 느끼며 점차 안정을 찾은 이림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복기했다.

동시에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이림은 길 한가운데 멈춰서 또다시 멍청한 선택을 한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내일 또 봐야 한다니. 이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얼굴을 봐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만약 그가 또 애원한다면 어떡해야 할까.

자신에게 해 왔던 짓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다가오면 순식간에 머리가 하얘지고, 본능만이 남았다. 자신의 알파에게 닿으려는 오메가의 본능이 튀어나올 때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었다.

“…….”

이림은 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 눕고 싶었지만 오늘 일과가 하나 더 남았다. 도한의 치료를 도우면서 아이를 보러 가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만약 오늘 가지 않으면 아이는 탈진하기 직전까지 울 것이다. 이림은 택시를 불러 차에 탔다.

주소를 부른 후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선잠이 들었던 이림은 번쩍 일어나 요금을 지불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이 피곤하긴 했지만 아이가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피로가 잊히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달각-.

“유모……?”

“으음……?! 씁…… 아이고! 이림 씨.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아이만 잠깐 보고 가려고요. 떼 많이 안 썼나요?”

“안 오시니까 어찌나 고집을 부리시던지. 아예 이곳 밖으로 나가려고 하셨다니까요. 그래도 제가 엄하게 타일렀어요. 너무 고집 받아 주시면 안 돼요. 아셨죠?”

“네…….”

유모는 자다 깨서 헝클어진 머리를 만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유모에게 매달려 달랑달랑 들려 왔다. 우느라 퉁퉁 부은 눈가나 구겨진 잠옷은 아이가 얼마나 떼를 썼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지쳐 잠든 아이를 빤히 보다 손을 뻗었다. 이림의 품에 안긴 아이는 꼬물꼬물 움직여 팔 한쪽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곤 편안히 숨을 내쉬었다.

작게 부풀었다 꺼지는 몸을 보면서 이림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던 불안감을 일시에 잠재우는 작은 존재를 보니, 다시 한 번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보고 나오자 시간은 오후 열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자고 가라는 유모의 말을 사양하면서 나온 이림은 별채 밖으로 나와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상태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용서해 달라 매달리는 도한을 볼 때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절박해 보이는 눈과 마주치면 그를 매몰차게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기가 찼다. 그러나 이젠 그를 거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써 무시했던 스스로의 감정에 직면해야 했다.

처음에는 정말로 도한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악몽에서 그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때는 두려움과 공포심이 앞섰다. 그러나 좋든 싫든 그를 마주하고 나서부턴 다른 감정이 차올랐다.

안쓰러움, 분노, 슬픔 등……. 그렇다고 다시 키스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

하지만 차마 모든 걸 잊고 그의 옆에 있을 수는 없었다. 기억이라도 사라지면 모를까. 이제껏 당해 온 것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의 말에 넘어가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너무나 좋을 것이다. 그와의 관계가 드디어 개선되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만약 갈등이 생기고 이림이 반항한다면 그가 다시 예전의 방법을 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다시 별채에 가두고 자신의 모든 관계를 차단시켜 버릴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상한 망상을 한다고 비웃을 수 있을 만한 미친 짓이었다. 설령 자신의 마음이 그를 원한다고 해도, 차마 그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이림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풀밭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작은 인영이 보였다. 그 희끄무레한 인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이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벅.

그림자 밖으로 나온 사람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밤이 늦었지만 차 한잔하고 가게.”

잠시 후, 이림과 마주 앉은 남자는 직접 차를 우렸다. 굵고 커다란 손으로 정갈하게 다도를 하는 모습을 멍하니 본 이림은 곧이어 콧속을 자극하는 쌉싸름한 차 향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앞으로 놓인 차를 빤히 보던 이림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그래. 만나 봤나?”

“……네. 다 계획하신 건가요?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만나고 싶은데 못 만나는 건가, 아니면 만나기도 싫은 건가?”

“…….”

남자는 다 안다는 듯이 차를 들이켰다. 뜨거운 차를 소리도 없이 마신 남자는 몇 번 삼킨 후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이림은 바짝 굳어 입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난 자네를 도와주려 하는 걸세. 전에도 말했다시피 내가 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야. 하지만 내가 아무리 도와주려 해도 자네가 싫다면 아무 소용없는 거지. 강요는 아닐세. 하지만 지금이 지나면 다시 부탁하긴 힘들 거야.”

“……뭘 도와준다는 말입니까.”

“이도한 그놈의 결혼을 주도한 건 나였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게 옳은 줄 알았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가진 게 있으니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가야만 하는 줄 알고 결혼을 강요했지.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 자네들의 결혼은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네.”

“……저는 결혼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이림은 쏟아지는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고 있네.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회사를 키우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성전자에서 십 년 전에 투자한 신기술이 해외에서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어. 우리는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거야.

그래서 나는 이젠 더 이상 원하지도 않는 결혼으로 묶여 서로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걸세.”

“……그, 그렇다면.”

“나도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뿐인 사람을 잃었지. 이런 행운이 조금만 더 앞당겨서 찾아왔다면 나는 놓치지 않았을 거야. 사실은 자네도 망설이고 있는 상황 아닌가?

결혼을 하게 되면 법적인 배우자로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더는 그놈이 하자는 대로 휘둘리지 않아도 돼.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감금하거나 납치하는 건 죽었다 깨나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설령 둘이 이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알겠나?”

“만약 결혼이 싫고 이도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네와 손주까지 내가 보호해 주겠네. 그 녀석 치료 때문에 자네에게 미끼를 던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둘째놈이 다시 옛날처럼 망나니로 살기를 원하지 않아. 난 정말로 이 악습을 없애고 싶거든. 그 녀석 손아귀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 불쾌해하진 말아 주게.”

“……언제까지요? 그리고 어떻게 보호를 해 준다는 겁니까?”

이림은 따지듯이 물었다.

“적어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가능하겠지. 지금 도한이 상태를 봐서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자네와의 치료를 중단했다간 잘해도 식물인간이야. 결국 이도한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건 자네란 소리지. 나는 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자네를 살리기 위해 보호하려는 거야. 물론 그래도 그놈은 차라리 같이 죽겠다고 칼 들고 덤빌 놈이라 내가 온전히 감당할 수는 없겠지만 나를 마지막 방어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덜 불안하지 않겠어?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난 그 애를 호적에서 파 버릴 생각이네. 그럼 더 이상 내 아들도 아니니 굳이 살릴 필요도 없고…… 자네를 손주 녀석과 해외로 이민 보내면 되겠군.”

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림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져 말했다.

“언제는 살리려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더니…… 뭐 하자는 겁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시연이 죽고 내가 어떻게 됐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 주변에서 그만두라고 수십 번을 말해도 듣지 않는다면 사람 새끼라고 할 수 없지. 내가 자네를 보호한다는 약속을 안 지킬까 봐 두려워할 필요 없네. 만약 쫓겨난다면 이도한에게 한 푼도 쥐어주지 않을 테니…… 그건 내 첫째놈과 둘째놈, 셋째 아이 모두가 명심하고 있는 말이니까. 나중에라면 몰라도 그 애가 단기간에 자네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게야.”

도한이 저를 시간 내 찾지 못하면 죽는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아들을 살리려 애쓴 것 치곤 냉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이림은 눈을 내리깔고 고민에 빠졌다.

그래. 어차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 사람은 정말 냉혈한 그 자체다. 그러나 왠지 남자는 감상에 젖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별채는 없애도록 하지. 모두를 괴롭혔던 그곳 말이야.”

저택을 나선 이림은 솔직히 아직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얼떨떨했다. 하지만 불쾌하다거나 싫은 건 아니었다. 가슴은 아직도 두근거렸고 정신은 어질어질했다.

밤늦은 시간. 그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모든 것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대로 집에 간 채 다음 날이 되면 자신은 무슨 선택을 할까.

정말로 결정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

도한은 밝은 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제 그 소동을 벌인 후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 간신히 눈을 뜬 것이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자연스럽게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흔들리는 이림의 눈을 보고 조금의 기대감이 부풀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을 밀어냈다.

물에 잠긴 채 일 분 일 초를 견디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힘들다고 호소해 봤자 남는 것은 손가락질이거나 비난이었다. 남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자신을 저버리는 이림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어째서 기회를 주지 않는지.

가망도 없는 일에 자꾸만 매달리며 구걸하듯 애정을 갈구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깨달을 때마다 비참해졌다. 하지만 자신은 고장 난 인형처럼 죽을 때까지 애걸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긴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렀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눈물을 훔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자신이 한심해서 비실비실 웃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힘없이 힐끗 문 쪽을 바라본 도한의 동공이 확장됐다.

“…….”

“이도한.”

이림은 평범한 차림이었다. 방금 학교에서 돌아온 건지 숨을 가쁘게 쉬는 이림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올 시간은 아닌데…….’

의아했지만 이상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이림이 짓고 있는 표정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림은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옆으로 가 눈물을 닦아 줬다. 그대로 굳어 버린 도한의 옆에 앉은 이림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바라봤다.

“…….”

애가 타서 식은땀까지 맺혔지만 도한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왜 여기 온 걸까? 내 얼굴은 왜 만진 거지? 날 용서해 주기로 한 건가? 어쩌면 마지막 작별 인사일 수도 있잖아.

숨까지 참아 가며 미동도 없는 도한을 그제야 본 이림이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넌 왜…… 왜 이러는데.”

그 답지 않게 더듬거리는 도한을 물끄러미 바라본 이림은 다시 입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도한의 눈도 질끈 감겼다. 심장이 뛰는 횟수가 미친 듯이 빨라졌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제발.’

하지만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림은 조용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 대학원 갈 거야.”

“……학교?”

“응. 내가 못했던 것들…… 하고 싶었던 것들 다 할 거야. 원래 전공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으니까 졸업하고 편입하려고. 그리고 대학원까지 가 볼 생각이야. 예전이었다면 꿈도 못 꿨을 일이지만 그쪽 아버지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한 번 해 보려고.”

뜬금없이 나오는 부친의 이야기에 도한은 이게 무슨 말인지 더더욱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는 그냥 죽고 싶었는데…… 죽을 수가 없어졌어. 죽을 수는 없는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많이 고민했거든.”

이림은 말을 하던 와중에 도한을 바라봤다. 떠난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듣던 도한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이렇게 다 망쳐 버리니까 어때?”

이림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고 횡설수설한 말이었지만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그렇게 죽고 싶어 하던 널 살린 게 아버지고, 이젠 살고자 결심했고…….

‘나에게 사과를 바라고 있구나.’

지금만큼은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이림의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갛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도한의 내면에 있던 지독한 응어리가 벗겨지고 정순한 마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도한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후회해. 내가 모든 걸 망치다 못해 부서뜨렸어. 너를 상처 입히고 아프게 했어. 멍청한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이 말조차…… 죄책감이 들어…… 나는…… 이림아.”

“지금까지 당신이 한 변명 중에 제일 그럴 듯했어.”

이림은 냉정히 말을 끊고 일어섰다. 도한이 다급히 고개를 들자 이림은 홀가분한 얼굴로 가방을 챙겼다.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금세 울 듯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이림은 선심 쓰듯 한마디 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날 감금한 순간부터, 정부 취급을 한 순간부터 우리의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어. 아무리 사과를 하고 보상을 안겨 줘도…… 내 삶에 새겨진 상처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돌이킬 수 없어.”

결국…… 그렇구나.

도한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입술에는 피가 맺혀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림이 저렇게 말해도 자신은 놓아줄 수가 없다. 그것 또한 도한의 진실된 마음이었다.

스스로도 지독하다 느껴지는 집착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날 아는 만큼 나도 당신을 잘 알아. 어떻게든 이대로 끝내지 않을 인간이라는 거.”

“……!”

도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입술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보는 사람도 아플 지경이었지만 이림은 굳이 다가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도한의 본심이 보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까지 숨이 차도록 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뒤를 돌면 항상 도한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를 떨쳐내려 안 해 본 짓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저의 간절함이 강한 것 그 이상으로 도한의 집념 또한 강했다. 둘 중에 한 명은 멈춰야 끝이 나는 레이스였던 것이다.

도한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어두컴컴한 터널을 뛰다 간신히 빛을 만난 것처럼 어떠한 깨달음을 주었다. 그와 더 이상 어두운 터널을 뛰어다니고 싶진 않았다. 이 끝없는 소모전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었기에. 적어도 도망칠 수 없다면 어둠이 아니라 빛이 내리쬐는 터널 밖에서 함께하고 싶었다.

이림은 그 속마음을 숨기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더 이상 놓아 달라고 구차하게 애원하지 않을게. 하지만 당신 마음대로 하는 순간 정말로 끝이야. 내 몸에 허락 없이 손댔다간 아이를 데리고 해외로 나가 버릴 거야. 당신 아버지가 도와주겠다고 한 일이니까.”

도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림을 껴안고 싶었지만 떨리는 손은 그에게 닿지 못하고 주먹만 움켜쥐었다.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잡은 사람처럼 안도감이 그의 전신을 에워쌌다. 그리고 그만큼 슬픔이 몰아쳤다.

자신이 흘려보낸 것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어떻게 해서도 보상해 줄 수 없기에,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도한은 이림을 바라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남은 평생을 그에게 바치겠다고.

그것만이 도한이 줄 수 있는 어리석지만 무엇보다 진실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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