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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도한의 선택 (12/14)

12. 도한의 선택

돌이킬 수 없으리란 것을 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텅 빈 병원 복도를 걷는 도한의 걸음걸이는 어느새 그가 멀쩡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정갈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깊은 늪처럼 변해 스스로를 잠식시켰다.

자아를 갖게 되면서 이성적으로 살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게 편리했고 효율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커다란 스트레스가 축적되면 누구든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방식으로 해갈되려 하고 있다.

도한이 1인 병실의 문을 열자, 어두운 방 안에서도 곤히 자고 있는 이림이 보였다.

빠질 살도 없건만 등을 숙이면 척추뼈가 비칠 정도로 마른 이림은 얼굴에서마저 병색이 완연했다. 바짝 마른 입술은 자면서 찢어졌는지 한쪽에 피가 비쳤다.

이림은 평온한 겉모습과 달리 악몽을 헤매고 있었다. 빛 한줄기 없는 앞을 제정신이 아닌 채 달리고 있었다.

발밑은 푹푹 꺼졌고 눈을 감고 뛰는 것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결국 숨을 몰아쉬다 지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떤 짓을 해도 깨지 않는 악몽 속에서 이림은 몸을 말고 웅크렸다. 그때, 차가운 공기 속에서 따뜻한 열을 가진 어떤 형체가 그에게 닿았다.

온기를 가진 형체는 조심스럽게 이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익숙한 향기에 안정감이 들면서, 손이 닿은 이마에 머리를 더 가까이 들이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닿으면 이 악몽에서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또다시 커다란 품에 안겨 몸을 늘어뜨릴 때였다.

“……!”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이 순식간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청색 하늘이었다.

밤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하늘은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보다 더 어두운 방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이림이 엄청난 통증에 몸부림치자 목을 꽉 물고 있던 입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아악!”

모두들 입을 모아 거룩하고 아름다운 행위라던 각인은 오로지 고통밖에 없었다. 팔을 조금만 꿈틀거려도 단단한 팔이 온몸을 꽉 조였다. 여태 너무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둘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이림은 죽음을 자각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림은 여태껏 가장 바랐던 바로 그 안식에 가까워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이 축 늘어졌지만, 도한은 여전히 목을 물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추잡함을 느끼면서도 머릿속이 깔끔하게 비워지는 해방감을 만끽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이림을 만난 후로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삶 따위는 살고 싶지 않았으면서,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을 바라 온 것이다.

한 번 고삐를 놓으니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이기적으로 빼앗으면 된다.

그렇게 자라 왔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 왔다는 이기적인 변명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도한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물고 있기를 몇 분, 순식간에 이림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눈을 번쩍 뜬 도한은 물세례를 맞은 사람처럼 등골이 차가워짐을 느꼈다.

한순간에 모든 떨림과 흐릿한 앞이 날아가며,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더듬더듬 짚었다.

사실은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필름이 끊긴 것도 아니었고 충동적으로 행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핑계를 대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림아……?”

그 뒤로는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잘 모르겠다.

시야는 좁아졌고, 정신없이 나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던 것도 같은데 그 역시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뛰어오는 의료진과 경악에 찬 사람들의 눈빛 속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목을 문질렀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반쪽짜리 각인이었으나 한순간 이림이 느꼈을 고통이 그에게 닿았고, 도한의 고통 또한 이림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배우자분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맺어진 각인이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배우자분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상황입니다.”

의사는 최대한 냉정을 가장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으나 이성을 잃은 도한을 보자 막막함을 느꼈다.

사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반(反) 각인이라는 것은 알파가 오메가에게 강제로 각인했을 때 오메가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이었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오메가의 인권이 낮다 보니 강제로 각인을 당하기도 했다. 각인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는 대부분 오메가의 몫이었다.

원치 않는 각인을 한 것도 모자라 히트 사이클은 각인을 한 알파와만 보내야 했고, 주기적으로 페로몬을 맡아야만 했다.

버려지게 되면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에 비해 알파는 약간의 불편함만 가진 채 살아갔다. 결국 오메가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금씩 진화하였고, 강제 각인에 반하는 유전 형질이 만들어졌다.

지난 백 년간 오메가들은 빼앗겼던 것들을 빠르게 되찾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각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불편하고 번거로운 것은 싫어하는 현대 사회에서 각인이라는 것은 알파와 오메가 모두 거의 원하지 않는 행위였다. 드물게 호기심이나 술기운으로 인해 각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합의하에 일어난 일이었고 페로몬 문제도 현대의학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강제 각인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거나 크게 와 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각인의 문제점을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니, 그 길을 섣불리 결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현재도 강제로 각인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으니 도한이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겠지만, 설마 자신이 그런 한심한 짓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고 자세한 부작용까지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한 행동에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의사가 강제 각인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도한은 의사의 눈빛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머리 위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걱정과 긴장 속에 섞인 약간의 경멸 섞인 눈초리를 마주친 순간, 현실감이 몰아닥치며 모든 것이 무너졌다.

***

“하아…….”

그의 비서는 서류 가방에 숨겨 둔 사직서를 꼭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이도한이 결근한 지 3일이 지났다.

워낙 출장이 잦은 탓에 아직까지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지만, 이 일이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도한의 전 비서가 안 좋은 일을 당하고 관뒀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몇 년만 일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의 연봉을 준다는데, 이를 마다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그곳이 자신의 꿈의 직장이자, 퇴사 뒤에도 탄탄대로의 길이 펼쳐져 있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흉흉한 소문을 듣고 오래 고민한 뒤, 가족들에게 자신이 일주일 이상 연락이 안 되면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걱정과 다르게 비서를 심심풀이로 괴롭히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다니고 싶은 일터는 아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다. 재벌들의 사생활이라니. 지금까지 여러 회사에서 경력을 쌓으며 윗대가리들의 사생활을 모르진 않았지만, 이렇게 사랑으로 죽네 사네 하는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재산 문제로 피 터지게 싸우는 사람들만 보다가 도한과 이림을 보니 짠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제넘지만,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 달라고…….”

엄밀히 말하자면 둘이 죽네 마네 하는 것은 비서인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도한의 측근으로 고용이 되었다고 해도, 자신은 그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서포트를 해 주는 역할인 것이지 그들의 사랑놀음에 희생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정을 들어 보면 딱한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결국 그걸 더 걱정한다고 제 월급이나 경력이 오르는 건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면전에 이 사직서를 던지고 싶지만, 그간 그의 옆에서 도한의 성격을 파악한 비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것을 기억하며 마음을 억눌렀다.

만약 이 사태가 더 지속되면 회장님께 연락을 취해야 했다.

비서는 잠깐 그 차갑고 무심한 얼굴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산 넘어 산이네.”

한편, 도한은 커다란 병실에서 조용히 누워 있었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 그의 얼굴에 햇살이 비쳤다.

따가운 햇살을 맞으면서 천천히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빛에 반사되어 회갈색이었다.

도한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습관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옷감이 사부작거리며 작은 소음을 만들어 내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새도 울지 않고, 인기척도 없는 완벽한 오후였다.

그래서 우습지만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 사실 그랬으면 좋을 것 같다는 바람이었을 뿐이다.

“일어나셨어요? 크게 이상은 없으신데, 일단 선생님 불러올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조용히 의사를 기다리는 도한은 어제의 그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앞으로 내리고 병원복을 입은 도한은 어울리지 않게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그의 생김새 자체는 남성적으로 굵직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190에 가까운 키와 근육질의 몸을 보면 누가 봐도 우성 알파였지만, 높은 코와 각진 턱선을 제외하면 중성적인 편이었기에 갈색 모와 눈동자를 가진 도한은 더욱 오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른을 넘기고는 완연한 사업가의 모습이 되었지만 드물게 어릴 때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형, 도현은 문가에 기대어 혀를 찼다.

‘아주 대단한 사랑 납셨네.’

도현은 의사가 도한에게 주의사항을 알려 주고 방을 나서는 것을 보고 그를 불러 세웠다.

도한의 형이라는 말을 듣고 잠시 놀라는 눈치였던 의사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강제 각인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무리하게 각인을 시도하여 강이림 씨의 몸속에서 방어기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강이림 씨는 깨어나지 못하신 상태입니다.”

“잠깐. 깨어나지 못했다고요? 방어기제라면서요. 내가 잘못 이해한 겁니까?”

의사는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손쉽게 그 답을 구할 것이다.

차라리 지금 말하는 것을 택한 의사는 입을 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억지로 사는 게 더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

“아직 숨이 끊긴 것은 아닙니다. 움직일 수는 없지만, 청각은 살아 있는 상태죠. 스트레스를 차단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감각기관을 통해 이림 씨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위험한 상태인지 판단할 것입니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다시 눈을 뜨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골든타임을 놓치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습니다.”

기가 막힌 도현은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도현을 빤히 보던 의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 사라졌다.

도한을 닮았지만 그보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도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침대 위의 도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들었냐? 한심한 새끼.”

“…….”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지.”

“신경 긁을 거면 꺼져.”

도한은 평온한 얼굴로 자신의 형을 바라보며 말을 툭 던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껍데기였을 뿐이었다. 그와 오랜 시간 살아온 도현까지 완벽히 속일 순 없었다.

옛날부터 사람을 입맛대로 조종해온 도한이었지만, 그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치고받고 싸워 온 도현은 지금 그가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알아챘다.

평생 제 머리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본 도한이었기에 지금 꼴을 보고 실컷 비웃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도현은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긁을 거면 꺼지랬지.”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내 동생이 자꾸 한심한 짓을 하니까.”

“날 위해서? 형.”

계속해서 의미 없는 반격을 하던 그의 가면이 조금씩 부서졌다. 습관처럼 공격하던 말투는 패잔병처럼 작아지고 약해졌다. 결코 눈물을 보이진 않았지만 도현은 그가 무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제 눈을 마주친 도한의 눈빛은 아주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난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침대에 앉은 채 매우 불안해 보이는 제 동생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냉정히 말했다.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지. 이대로 죽는 꼴 보고 있으려면 그렇게 해.”

“방법이 있을 거야.”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불안해 보였던 눈을 싹 거두고 금세 눈을 돌린 채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도한을 보며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더 설득하는 대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차피 무엇이 맞는 길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이처럼 고집을 부리지만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형제로서의 역할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했는데 못 알아듣는다면 자신도 더 어쩔 도리가 없다.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냉소적이고 무심하길 타고난 핏줄이었기에, 도현은 한마디를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간다. 잘 생각해.”

“…….”

쨍그랑-.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옆 협탁의 물건들이 쓸려 내려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동안 이림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벌을 받는 건지, 지금 자신도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다들 별일 아니라는 듯 충고하고 떠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쾌락을 얻고 이별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 매달리고 사랑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이 부끄럽고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깊은 내면에는 자신을 떠나는 상대에 대한 미련과 증오가 뒤섞여 있을 것이다. 도한은 그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그 감정의 골이 더 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 위선적인 인간들뿐이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라앉지 않고 펄펄 끓는 분노에, 흰 시트가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도한의 손에서 구겨졌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씹…….”

회사에 나가지 못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나.

이렇게 무책임해서야, 사원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와도 할 말이 없다.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에 잠깐 이마를 문지른 도한은 여전히 꺼질 생각이 없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상무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정말 죄송하지만…… 회장님이.

“나와.”

-……예?

“병원 앞으로 오라고.”

탁-.

그는 휴대폰을 끄고 아무렇게나 던지며 그대로 일어나 옷을 뀄다.

어차피 잠깐의 충격으로 기절한 상태였으니 움직여도 괜찮을 것이다. 앞만 보고 죽자 사자 달렸지만 말동무라곤 비서 한 명뿐이라는 것에 잠깐 헛웃음을 짓던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상무님!”

벌컥-.

비서의 우렁찬 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은 도한은 그대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안 하던 짓을 하니 죽을 때가 다 됐나 싶었던 비서도 여전히 싹 바가지인 도한을 보자 기대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갈까요.”

“한국대 앞으로 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아 버린 도한은 불을 붙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어둠을 밝히고 있는 환한 조명 탓에 안 그래도 깊은 얼굴의 음영이 더욱 도드라져 눈썹뼈 아래 진한 그림자가 생겼다.

백미러로 그의 동태를 살피던 비서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상황에 한숨을 삼키며 시동을 걸었다.

차로 이십 분쯤 달리자 도한의 모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캠퍼스를 가진 탓에 아주 일부의 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비서는 자신이 상사의 모교에 오게 된 이 상황이 굉장히 기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학 앞에 위치한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비서는 군말 없이 따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곤한 대학생들이 주 고객인 대학가 주점들은 퀄리티가 높진 않았지만, 싼값에 그럭저럭 맛있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자신도 곤궁한 대학생 시절 기숙사 앞 식당을 애용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대학생들의 입장일 것이다. 고급 세단을 타고 달려 굳이 온 곳이 오래된 주점이라니. 몹시 궁금했지만 대충 짐작이 가기에 입을 다물고 젓가락과 숟가락, 물컵을 세팅했다.

주문한 지 10분이 지나기 전에 음식들이 차려졌다. 돼지고기가 가득한 김치찌개와 밥 위에 올려진 계란말이. 그리고 술 세 병.

도한은 따끈한 김을 내뿜으며 여전히 바글바글 끊는 김치찌개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잔에 소주를 붓고 연달아 세 잔을 마셨다.

초장부터 지지고 있는 도한을 보며 경악하던 비서는 다급히 말했다.

“빈속이실 텐데 속 다 버리십니다!”

“안 죽어.”

어린애 같은 고집에 비서는 자신의 머리가 핑핑 도는 것을 느꼈다. 오늘 밤은 아주 길 것 같다. 속으로 온갖 쌍욕을 하던 비서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한 병을 다 마신 그를 보고 나머지 두 병을 자신의 옆자리로 숨겼다.

“진짜 실려 가십니다. 왜 이러십니까? 저한테.”

“이게 미쳤나.”

“이 밤에 부른 것도 모자라, 술 동무까지 해 달라 하시는 게 더 너무한 거 아닙니까?”

몇 달간의 스트레스로 탈모까지 생긴 비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뒷감당이 무서우니 병나발을 불면서 눈에 살짝 맛이 간 도한의 상태를 봐 가며 개겼다.

사실 도한은 누구든 선만 넘지 않으면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본인이 기분이 좋지 않다고 비서를 상대로 폭력을 쓰거나 폭언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좆같지 않다는 건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부라렸으나, 그는 자신을 빤히 보는 도한의 눈동자를 보고 점점 주먹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도한은 금세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남은 소주를 잔에 털어 내며 말을 이었다.

“대학교 다녔을 때 강이림과 왔던 곳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곳이라면서 데려왔는데, 어찌나 짜던지. 건강이 걱정될 정도라서 내가 직접 끓여 준 적도 있었지. 그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

이후로 계속된 추억 얘기에 죽은 눈깔을 하며 고개만 정성스럽게 끄덕인 비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왜 그가 자신을 여기로 불렀는지 알아챘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렸어. 강이림은 날 거부하느라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나는 내가 그토록 역하게 생각했던 한심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어.”

“상무님…….”

“대답해 봐. 너도 그 사람들이랑 같은 생각이야? 내가 정말 그 애를 놔줘야 한다고 생각해?”

빨갛게 충혈된 눈은 그에게 지금 당장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순간 비서는 할 말을 잃고 잠시 굳어 있었다. 이 기묘한 밤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겠지만, 지금만큼은 도한이 제 또래처럼 느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답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비서는 고민하다 잔에 술을 채우고 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두 잔 정도 마시니 알딸딸해지며 용기가 생겼다. 잠시 입을 달싹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저도 상무님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면 평생을 함께해도 좋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줄 알았죠. 하지만 그 사람은 절 떠났고 그때 정말 많이 상처받았습니다.”

“네가?”

비웃듯이 묻는 도한을 보고 순간 울컥했지만, 사실 두 살이나 어린 도한이 오늘만큼은 동생으로 보였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잘 나가던 회사도 무단결근하고 술로 몇 달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아주 만신창이였죠. 그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근데 왜 보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았어야지.”

도한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내 무표정이었던 얼굴에 변화가 생기자 그의 조각상 같던 무기질의 얼굴에 생기가 살아났다. 비서는 사실은 그도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체감했다.

가끔 비상식적인 일을 벌이고, 소름 끼칠 정도로 남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런 인간일지라도 단 한 사람에게만은 아주 인간적이었다.

사랑이라는 본능에 충실할 때면, 그는 그때만큼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퍼붓는 모습과 그만큼 상대를 강제로 제압하고 가두는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도한은 스스로도 어느 쪽에 서야 할지 몰라 헷갈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잡을 수 없었으니까요.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잖아요. 그렇게 번거로운 일이 애초에 없었다면 좋지 않았을까요? 상무님도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한 건 아니실 거 아닙니까.”

맞다.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는 말에 도한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흥미였고, 두 번째는 혼란이었다.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게 자신이 진정 원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림이 그토록 괴로워할 때는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고,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의문과 혼란의 끝에서 또다시 이림을 가지려 온 힘을 쏟았을 것이다.

“내 마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다른 사람 마음을 어떻게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싫다고 해도 발목을 잡고 늘어질 수는 있겠죠. 하지만 끝끝내 싫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건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보내 주는 거죠.”

“…….”

“사실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억지로라도 내 옆에 두고 싶고 나만 바라보게 하고 싶죠. 하지만 다들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포기하는 게 아닐까요.”

비서는 막힘없이 쏟아 내뱉고 괜히 도한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심했나 생각했지만 그가 벌컥 화를 내거나 비아냥거릴 기미는 없었다.

얌전한 도한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비서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비록 이 말이 그가 듣기 싫었던 말이었더라도, 옳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해악일 것이다.

“이제는 그만 놓아주세요.”

잠자코 듣고 있던 도한은 그대로 잠든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벌써 두 병 반을 마신 도한이 취했다고 생각한 비서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집 앞에 대기하고 있을 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부축하려 일어난 순간, 도한은 그의 팔을 거칠게 내쳤다. 취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또렷해 보이는 눈동자 탓에 움찔한 순간 그는 괴롭다는 듯이 말했다.

“놓아줘야 한다고?”

“…….”

“그래. 나도 차라리 그만하고 싶어. 그런데 강이림이 다른 남자와 나와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한다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둘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아니, 그렇게 할 거야.”

비서는 입을 달싹이다 결국 꾹 닫았다. 번들거리는 도한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불안해서 취기가 싹 달아났다.

이대로 보냈다간 정말로 일을 치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정만으로도 이렇게 치를 떠니, 정말 말이 통하질 않았다. 비서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털썩 앉았다.

“회장님이 다음 주 내로 들르라고 하십니다.”

“…….”

“벌써 새벽 한 시입니다. 이제 들어가시죠.”

다시금 말이 없어진 도한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자 그는 또다시 강한 힘으로 뿌리치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 비서는 그 뒤를 따르며 고개를 저었다.

“세 병이나 처먹어 놓고 어떻게 똑바로 걷는 거야…….”

***

차에서 내려 저택에 도착한 그는 느리지만 반듯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한밤중이라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지만 은은히 켜져 있는 조명이 어두운 길을 밝혔다.

잘 정돈된 마당은 언제라도 새로운 손님을 모실 것처럼 갖춰져 있었다. 별채 마당에 우뚝 서서 멍하니 있던 그는 품위 없이 한구석에 털썩 앉았다.

몽롱한 머릿속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한 층 정리됐다.

미간을 누르던 그는 고개를 들어 익숙한 별채를 바라봤다. 별채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집주인의 성질을 아는지라 집 내부의 먼지와 마당의 잡초 관리만 할 뿐, 이림과 관련된 물건들은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곳에 외롭게 앉은 도한은 긴 다리 위에 이마를 묻으며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의 의지 없이 태어났지만, 기업을 물려받는다는 목적 하나를 위해 학대에 가까운 가르침을 받으며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버거웠던 적은 없었다.

운을 타고난 것처럼 하는 일마다 잘 풀렸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 일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은 없었다. 일 외의 사석에서는 자신의 온순해 보이는 겉모습을 십분 활용했고 대체적으로는 그 모습이 잘 통했다.

그의 가까이서 오래 일했거나 간혹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거짓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을 알아차렸으나, 그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사석이라고 해 봤자 결국 일과 이어졌으니 이 또한 일의 연장선이었을 뿐이다. 일과 관련되지 않은 인간관계는 가족을 제외하곤 모두 쳐냈고, 가족들도 일 년에 한 번 안부를 물을까 말까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회사의 인턴부터 시작하며 으레 피곤한 일도 왕왕 겪었으나 모든 것은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으니, 묵묵히 할 일을 해 오며 기계의 한 부품처럼 평생을 살아왔다.

보람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삶을 살던 그가 처음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 바로 강이림이었다.

물론 이조차도 신이 전혀 다른 두 명을 붙잡아 붉은 실을 묶어 장난을 친 것처럼, 처음엔 불쾌하고 당황스러웠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둘을 옭아매고 있는 것을 느끼며 몇 번이나 이 감정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에는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해진 그는 그냥 마당에 드러누웠다. 마네킹처럼 고요히 잠든 모습은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그토록 혐오하던 망나니 재벌들의 추태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

다음 날,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아버지가 은퇴 후 거주하는 별장으로 이동했다. 안주도 없이 세 병을 먹으니 속이 메슥거리는 숙취가 덮쳤다.

어느새 머리는 눈을 찌를 정도로 자라 시야를 방해했다. 지금도 오후에서야 간신히 일어나 이동하고 있던 참이었다.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는 그에게 오늘도 경고음이 울렸다. 망가진 생활 패턴과 지쳐 버린 심신은 그렇다 쳐도, 현재 경영자로서 아무런 책무도 수행하고 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곧 자신의 기반이 흔들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경영과 거리가 먼 첫째 형은 그렇다 쳐도 지금 대학에 입학한 여동생은 도한을 닮아 승부욕이 강했다. 형제들끼리 서로를 견제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대방의 입지가 부족해진다면 언제든 둘 중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다시 회사에 출근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눈만 느리게 깜빡일 뿐이었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에 위치한 한 별장 앞에 선 도한은 높게 솟은 건물을 한 번 올려다보고 그대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창문 한쪽에서 난을 만지는 그의 아버지가 보였다.

도한은 뚜벅뚜벅 걸어와 거실 한쪽에 놓인 다이닝 룸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는 도한이 방문할 것을 미리 알았는지, 따끈한 차가 우려져 곱게 놓여 있었다.

“아비한테 인사도 없는 거냐? 버릇없는 놈.”

“왜 부르셨습니까.”

손에 쥐고 있던 천을 놓고 식탁으로 다가온 아버지는 도한과 마주 보고 앉았다.

60줄에 들어섰지만 나이보다 훨씬 정정해 보이는 그는 왠지 모르게 독기가 빠진 것 같았다.

“그 애 때문에 불렀다.”

“가 보겠습니다.”

끼익-.

“앉아.”

“……아버지까지 왜 이럽니까.”

털썩 앉은 도한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한계에 몰린 아들이 보였지만 그럴수록 더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널 아끼니까 이러는 거다. 나와 똑같은 절차를 밟지 않게 하기 위해서야.”

“……결국 실패하셨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까?”

그는 피곤한 얼굴을 가리며 잔뜩 비꼬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나는 반항심과 적개심이 가득한 눈동자에 아버지는 도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서, 내가 겪었던 것처럼 그 애가 죽는 꼴을 꼭 봐야 한다는 거냐?”

“…….”

“이제 그만둬. 대신 억지로 결혼시키지 않겠다.”

자신이 은퇴하기 전에 도한이 회사 내에서 기반을 견고히 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이다.

자신의 연인은 죽기 직전까지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죽은 후에도 그럴 테지. 그녀도 오랫동안 슬픔에 가득 차 있었기에, 웃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때문에 제발 도한이 옳은 길을 선택하길 바랐다.

하지만 도한은 끈질겼다.

“그럼 강이림과 결혼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애가 허락한 일이냐?”

“…….”

“듣자 하니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로도 네 페로몬을 그렇게 거부한다는데. 아니, 애초에 의식이 있어야 의사를 물어볼 수 있는 게 아니냐?”

도한은 자신의 입장이 받아들여질 생각을 하지 않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차를 들이켰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그는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한의 일 앞에서는, 아버지이기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비록 이 말이 그의 귓가에 닿지 않을지라도.

***

이림이 누워 있는 방은 언제나 그렇듯 고요했다.

가습기가 흰 김을 내뿜고 흐린 달빛이 침대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은 사뭇 포근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림의 심장 소리는 느려져 가고 있었고, 안색 또한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옆에 사신의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그리고 도한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모습을 보고도 놓아줄 생각이 들지 않는 자신의 지독함에 스스로도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분명 아버지도 비슷한 감정이었겠지.’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이 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도한은 조급함에 침을 삼키며 이림의 앞에 다가갔다. 분노와 초조함으로 약하게 페로몬이 나오자, 이림은 역시나 의식 없는 몸을 꿈틀대며 도한의 페로몬을 거부했다.

하지만 도한은 애써 모른 척한 채 옆에 무릎을 꿇고 기댔다. 흰 얼굴의 까만 속눈썹을 문지르며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이림아. 일어나 봐……. 이제 가야지.”

“…….”

“그동안 내가 많이 잘못했지……. 이제 다 갚을게. 나랑 결혼하자……. 응?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나도 그런 역겨운 짓 정말 싫었어. 맹세할게. 응? 듣고 있어?”

그의 애절한 구애에도 이림의 미간은 점점 찌푸려질 뿐이었다. 마치 오물이 제 앞에 있는 것처럼 얼굴이 구겨지고 손가락을 미세하게 떨었다.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본 그는 정말로 이성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함께할 수 있게 됐는데.

그는 이림의 어깨를 잡았다. 애원이 통하지 않자 한계에 다다른 도한은 이성을 잃고 손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이게 네가 원하던 거잖아! 이제 그렇게 해 주겠다고! 제발 눈 좀 떠!”

“으으……!”

며칠째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이림이 어깨에서 느껴지는 강한 악력에 괴로운 신음을 미약하게 흘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얼굴에는 더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 단말마를 끝으로,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 버린 듯 몸이 축 늘어졌다.

“하…….”

결국 자신의 말을 거부하며 축 늘어진 이림을 보고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죽고 싶다. 이 자리에서.

고치려 할수록, 그런 도한을 비웃듯이 계속해서 상황은 더 나빠져 갔다. 이림의 숨소리가 꺼지고 있다.

“그래, 죽자. 우리 둘이 그냥 함께 죽어 버리자.”

더 이상 어떤 미련도 없다. 이림과 함께 상상했던 미래도, 남겨진 아이도, 제가 이끌어 온 것들에도 이젠 아무런 미련이 없다.

가질 수 없으니 죽여 버리면 된다. 하지만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이다. 제 옆에는 언제나 그가 있어야 한다.

눈에 핏줄이 터져 끔찍한 모습이 된 도한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졸랐다.

손을 조이면 조일수록 왠지 이림의 얼굴은 더욱 평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 모습이 대학생 시절, 쪽잠을 자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팔에 얼굴을 기대고 잔뜩 웅크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던 이림은 가끔 속눈썹을 움찔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 모습은 삼십 분을 봐도, 한 시간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수업이 취소되면서 고요한 강의실에 둘만 있게 된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봤었다.

그날은 아주 기묘한 날이었다. 둘밖에 없는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아무도 두 명을 찾지 않았기에, 턱을 괴고 볼에 난 솜털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봤다.

왜 지금 그때의 순간이 생각난 걸까.

도한은 뜨거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눈물방울이 떨어진 그 손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도한은 서서히 손을 내리며 눈물을 훔쳤다.

‘죽일 수 없다.’

그를 사랑하는 만큼 죽여서라도 품에 끌어안고 싶지만, 차마 제 손으로 죽일 순 없었다.

그렇다고 죽어 가는 이림을 볼 수도 없었다. 결국 도한은 운명 앞에 무릎을 꿇었다.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도한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이 정도는 용서해.”

아직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자신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실행해야 한다. 그는 천천히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달빛이 그가 있는 자리를 환하게 비췄다.

그리고 그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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