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11. 신경전 (11/14)

목차

11. 신경전

12. 도한의 선택

13. 끝에서

외전

11. 신경전

도한은 별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머물던 곳이었지만, 도한은 마치 사건을 조사하러 온 사람처럼 구둣발로 거실을 헤치고 있었다. 몇 주 사이에 다시 퀭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해진 도한은 눈빛만 형형해진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도 커다란 충격을 받은 탓에 한동안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은 다시 새집처럼 모든 것이 치워져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이 저택에 몸을 담은 측근 몇몇이 은밀히 청소를 끝낸 상태라, 주방 테이블에는 곱게 접힌 종이 한 장만이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삐딱하게 서서 내려보던 도한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종이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바로 열지 못하고 한쪽이 구겨질 정도로 힘을 주며 보이지도 않는 종이의 겉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 종이에는 분명 유언이 적혀 있겠지.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평생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버릴 수도 없었다.

도한은 참지 못하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가까이 가져다 댄 순간, 이 집에 살고 있는 작은 동물이 생각났다.

“아…….”

도한은 급히 시선을 돌려 거실을 바라봤다. 하지만 커다란 캣 타워만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 뿐,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고용인들이 다른 곳으로 데려갔겠지.

도한은 담배를 문 채 라이터의 몸뚱이만 만지작거리다 피식 웃었다.

“달라진 게 좆도 없네.”

결국 몇 달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이림은 이 집에 없고, 자신은 이곳에 홀로 남아 텅 빈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던 고양이조차 그때처럼 다시 사라져 버렸다.

이곳이 마치 사람들을 튕겨 내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누구도 이곳에서 행복해진 사람은 없다.

나도, 강이림도,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오메가들도…….

하지만 이내 쓸데없는 감상을 집어치웠다.

모르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모든 것은 자신이 책임질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종이를 열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마구 휘갈겨 쓴 글이었지만, 그것은 글을 읽는 도한도 비슷한 마음이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한 선배에게.

선배는 끝낼 마음이 없는 것 같지만, 이제 못 참겠어. 모든 것이 갑갑하고 날 옥죄는 것 같아. 그냥 이제는 편안해지고 싶어. 나는 아예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나도 오랜 시간 동안 이기적으로 구는 선배를 많이 원망했지만 이제는 다 상관없어졌어. 그냥…… 잘 지내.>

도한은 길지 않은 글을 몇 번이나 읽어 봤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글인데 자꾸 제대로 읽히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이미 뇌리에는 눈앞의 편지의 글이 강렬히 남은 상태였다.

도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땀이 배어 나오는 주먹을 쥐었다.

옆에 놓인 컵을 재떨이 삼아 한 개비를 전부 피운 도한은 진정되지 않는 자신의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다시 한 개비를 꺼냈다.

“하아…… 헉.”

진정되지 않는 기분에 숨을 급히 들이쉬며 넥타이를 풀었다.

진짜 유언이 아니다. 이림은 살아 있고, 이 편지는 유언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잘못됐다면 진짜 유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이 목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손에만 배어나던 식은땀은 어느새 온몸에서 나오고 있었다. 커다란 몸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커다란 손안에는 흰 종이가 구겨져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윽!”

또다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이 가해지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지난 몇 주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림이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피가 맺힌 붕대,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창백한 몸.

그 모습은 마치 도한이 이 모든 일을 초래했다고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마저도 자신을 상처 주려는 이림의 처절한 분투 같았다. 도한은 결국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생각했다.

끝까지 이런 생각만 하는 것을 보니 자신도 점점 미쳐가는 것 같다.

지독한 사랑에 괴물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아무런 공감 능력도 없고 남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자신의 감정만 중요시 여기는 쓰레기.

그게 자신의 현재 모습이었다. 모두들 자신을 그렇게 바라봤다. 다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제 아버지, 할아버지, 그 윗세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멸 어린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때, 별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이곳에서 일하던 고용인들이었다. 몇 주째 아무도 기거하지 않는 별채다 보니 처음에는 다들 근처에 가는 것조차 경계했지만, 이제는 긴장이 풀려 다들 한 마디씩 던지고 갔다.

“……래서…… 자…… 했다고?”

뜨문뜨문 들리는 목소리에, 안 그래도 날카로운 칼처럼 잔뜩 벼려진 정신이 통증을 호소했다.

도한은 조용히 일어났다. 하지만 집 안에 도한이 있는 것을 모르는 고용인들은 그 앞에서 마구 수다를 떨었다. 사실 지루하고 살벌한 이 저택에서 이만한 화젯거리도 없었다. 사람들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분명 일어난 일에 대해 함구하라고 했건만, 그 일은 하루도 되지 않아 저택 곳곳에 퍼졌다.

물론 증거도 없고 비밀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들어왔으니 이 일을 밖에서 떠벌릴 수는 없지만, 고용인들끼리는 가능했다. 아니, 그들은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어휴. 끔찍하다.”

“도련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마음은 편해. 아주 묵은 체증이 다 싹 내려간 기분이야. 그 화상이 얼마나 우리 속을 썩였어?”

“그건 그렇지.”

“이 집에서 그 오메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솔직히 다들 속으로 욕하느라 바빴지.”

“아이고. 좀 조용히 얘기……!”

신나게 나불대는 동료의 입을 단속하려던 고용인은 바로 앞의 싸늘한 눈과 마주쳤다.

키가 워낙 크다 보니, 그가 서 있자 커다란 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찼다. 그 위압감에 다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단단한 쇄골이 보일 정도로 뜯어진 셔츠를 걸치고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조용히 서 있는 도한은 마치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탕진한 사람처럼 방탕해 보였다.

방금까지 했던 말을 듣지 못했을 리도 만무하건만, 그는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들의 덜미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눈이 마주친 고용인은 낭패감에 휩싸여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신은 그저…… 그저 장단에 맞춰 준 것뿐인데.

방금까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 듯이 험담을 하던 동료는 입을 딱 다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동조한 자신도 큰 벌을 받겠지만 이 사람은 그 이상일 것이다.

그래도 억울했다. 너무나 억울했지만, 분명 자신의 입으로 동조하는 말을 했다.

빠져나갈 구실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고개를 떨구자 머리 너머로 음산한 명령이 들렸다.

“다 룸으로 들어와.”

***

이림은 멍하니 한낮의 햇살을 쬐고 있었다.

속눈썹 위로 내려앉은 빛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이러고 있었으니, 세 시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던 것이다.

계속 식사가 들어오긴 했지만 이림은 식판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간병인이 사정사정하는 탓에 그의 눈앞에서만 몇 술 뜰 뿐이었다.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우울한 기분이었지만 안락한 병실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치료를 받으니 회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신이 지쳤다 해도 아직 20대였기에 이림의 바람과 달리 몸은 착실히 나아갔다.

하지만 공허한 마음은 무엇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생을 포기하려 했으니 그 마음을 다시 접고 다시 일어서기가 무척 어려웠다.

“…….”

멍하니 구름을 보다 보면 어느 샌가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많게는 세, 네 시간 동안 잠깐씩 정신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림을 달리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의사가 정신과 치료를 권했지만 스스로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모든 게 귀찮고 짜증이 날 뿐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멍하니 하늘을 보며 하루가 저버리는 날들이 계속될 때마다, 이대로 잠들어 영영 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새벽이 되면, 스스로도 알고 싶지 않은 진실된 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외로움이 공존했다. 자신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이중성이었다.

이런 복잡한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어둠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밝힐 수 없는 내면의 어둠이 부피를 키우고 있었다.

요즘 들어 점점 더 그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이도한마저 병실을 찾지 않는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손길에서 묻어나오는 애정이 고팠다.

이림은 절망감에 휩싸여 시트에 얼굴을 처박았다.

***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다 나았는데요, 뭘.”

“그치만…….”

“신경 쓰지 말고 가 보세요.”

간병인은 불안하다는 듯이 눈동자를 굴리며 이림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얼굴에서는 어떤 기색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던 간병인은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림은 벤치에서 멍하니 쏟아지는 볕을 쬐고 있었다. 조금은 차가운 바람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도 잠시. 다시 햇빛이 온몸을 비추니 붕 뜨는 느낌이었다.

병원 앞에 작게 마련된 공원은 꽤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이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몇몇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을 알았지만, 이림은 모르는 척 한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머리칼과 환자복이 그를 더욱 연약하게 보이게 만들었지만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한 얼굴은 얼음장 같아 누구도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던 이림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평소라면 불편함을 느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겠지만, 정신이 한계에 몰려 있는 지금은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나를 보호해 주던 방어막이 사라진 듯 공허하고 당황스러운 느낌이었다.

이도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그렇게 발버둥을 쳤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슬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지금.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분노, 허망함, 후회 등이 가슴 안에 휘몰아쳤으나 결국 이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응어리를 한 줌의 한숨으로 뱉어 내는 것뿐이었다.

더 이상 남에게 기대며 살고 싶지 않다. 아무리 오메가는 알파 없이 살 수 없다고 해도.

그 하나의 명제만이 이림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퍼억-.

죽은 듯 수그리고 있던 남자가 꿈틀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적요가 흐르는 이곳은 차가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로 달궈져 있었다.

문을 등진 이도한을 중심으로 고용인들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볼 한쪽이 파랗게 멍든 사람부터, 깨진 머리에서 피를 흘린 채 기절한 사람까지 다양했다.

한 대씩이라도 그의 주먹이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베타와 알파였다. 오메가들은 건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보내진 않았다.

이곳에 끌려온 대부분이 아무리 저택이 넓다지만 이런 장소가 있다고는 들어 본 적 없었기에 이 상황이 너무나 공포스럽고 무서웠다.

도한은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남자의 싸대기를 올려붙이다, 손을 털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의 구두 밑으로 수많은 꽁초들이 쓰레기가 되어 바스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가 튄 팔뚝을 대충 닦던 그가 털썩 바닥에 앉아 사람들을 올려다봤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황스럽고 억울할 것이다. 살면서 처음 당해 보는 모욕과 공포감에 질려 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한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처사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꽤 많이 눈감아 준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이 룸에 들어올 때 모조리 소지품 검사를 했고, 혹여라도 이 사실이 새어 나갔다간 가족들까지 무사하지 않을 것을 상기시켰으니 멍청하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피를 보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짐과 동시에 약간 흥분 상태가 된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언제까지 교육을 시켜야 하는 건지…….”

“상무님.”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몇 시간 만에 열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이들은 화색을 띠며 입구를 바라봤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도한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적막 속에서도 뭐라고 했는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가 전한 말이 충격적인 소식인 것은 틀림없었다.

날카롭게 앞을 주시하던 도한의 눈이 한껏 커졌기 때문이다.

***

또 자살 시도를 하셨습니다.

“…….”

도한은 거칠게 달리는 차 안에서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는 안절부절못하며 백미러로 뒤에 앉은 이의 동태를 살폈다. 말라붙은 피가 맺힌 주먹과 잔뜩 흐트러진 와이셔츠에 표정 없는 얼굴까지. 당장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오히려 조용한 모습만을 보이니 더더욱 공포스러웠다.

비서는 지금 당장 차에서 내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액셀을 밟았다.

불씨를 만나면 터지는 폭탄처럼, 이 상태로 그가 이림을 만났다가는 어떤 일이 생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제발 불똥이 튀지 않길 바라며 병원으로 향할 뿐이었다.

“간병하시는 분이 재빨리 막으셔서 가벼운 찰과상 정도로 끝났지만, 다음에도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루빨리 물리 치료와 정신과 치료를 병행해야-”

“…….”

한참 동안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도한은 의사가 사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강철같이 굳건했던 그의 마음도, 계속되는 스트레스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사지에 무거운 추를 달고 억지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보다 더한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지쳤다. 더 이상 해결책이 나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저벅저벅-.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었다. 도한은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처음 병원에서 그를 봤을 때와 달리,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 이림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공허함과 허무함은 소멸되고 분노만이 온몸을 지배했다.

도한은 성큼성큼 다가가 어깨를 잡아챘다.

“……!”

“너 미쳤어?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 지랄이야. 그렇게 뒤지고 싶어?!”

“이제껏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왜 이래?”

도한의 고함에 이림은 지지 않으며 쏘아붙였다.

이림의 말을 들은 도한이 잠시 굳었다가 헛웃음을 뱉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하…… 나한테 관심이라도 받으려고 그런 건가? 그래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야?"

“……그래. 그런 걸 수도 있겠지.”

“뭐……?”

비아냥거리던 도한은 눈을 크게 뜨고 나지막이 말하는 그를 내려다봤다.

또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림의 행동에 꼭지가 돌아간 도한도 눈이 벌게진 채 이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쏟아 내고 있던 찰나에,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이 매우 수상쩍었다.

고장 난 로봇처럼 말을 멈춘 도한을 보는 이림은 예상외로 훨씬 차분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제3자의 일인 것처럼 너무나도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손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며, 이림이 두 번째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이림은 창백한 입으로 가시 같은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도한, 네가 영원히 고통받았으면 좋겠어. 내가 죽음으로써 고통받으면 더욱 좋고.”

도한은 그 독설 어린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 그래? 내가 그렇게 고통스러우면 좋겠다고……. 그리고 다른 할 말은 없어?”

“…….”

“그딴 말은 수백 번을 해도 상관없으니까 몸에 상처 내는 짓은 그만두도록 해.”

이림은 별 타격도 받지 않은 채 이불을 고쳐 덮어 주는 그가 너무나 미웠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그에게 어떻게든 상처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크게 뛰었다.

이를 갈던 이림은 결국 도한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을 내뱉었다.

“아니. 죽을 때까지 계속할 거야.”

“강이림!”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소리치는 도한의 모습에 비로소 독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말을 내뱉고 나니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까.

필요할 때는 그렇게 가지고 놀더니,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도한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자신이 뒷방에 처박힌 오래된 정부가 된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이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그만!”

그는 끝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제야 이림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차갑게 식은 눈으로 싸움을 이어 갔다. 독기 가득한 눈을 보니 이림의 부드러운 이목구비조차 악마의 형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도한의 이기적인 행동이 만든 모습이었다. 그것을 진즉 깨달았던 도한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어떻게 하길 바라?”

“이제 와서? 네 멋대로 다 해 놓고. 이러면 뭐가 달라져?”

“…….”

“그냥 내버려 둬.”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버린 이림을 바라보던 도한은 간호사가 들어오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를 떴다.

복도엔 그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만이 나직하게 들려왔지만, 반대로 도한의 얼굴은 흉흉하게 일그러져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도한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이는 것을 참으며 억지로 병원을 벗어났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무슨 사고라도 낼 것 같아서였다. 힘을 주고 있어 마디뼈가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커다란 손에서는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상무님…… 지금 병원에-

“……알겠어. 지금 가지.”

도한은 비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려던 구둣발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

날카로운 옆모습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느슨하지만은 않던 공기가 그의 정적을 타고 팽팽하게 조여졌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귓가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윽……!”

문 대부분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몸이 아주 미세하게 비틀거렸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빈혈을 느낀 그는 잠시 머리를 짚으며 숨을 골라냈다.

일주일 동안 세 시간도 못 잔 그는 처음으로 빈혈이라는 것을 느껴 봤다. 처음에는 기절하듯이 한 시간이라도 잤지만, 이제는 아예 잠을 이루지 못해 사무실에서 두통으로 머리를 짚고 있다가 짚은 자세 그대로 정신을 잃듯 자기도 했다.

식사마저도 중요한 식사 자리가 아닌 한 커피로 목만 축였으니, 이런 패턴을 일주일만 더 유지했다간 그도 병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똑똑-.

“상무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없자 차를 대기시킨 비서는 다시 올라와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인기척이 나지 않아 덜컥 겁을 먹던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가지.”

다시 문을 두드리려던 모습 그대로 굳어 버린 비서는 도한이 멀어질 때까지도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혈색 없이 갈라진 입술이나 핏줄이 서 충혈된 눈동자는 도저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가장 걱정인 것은, 무언가를 누르고 있는 듯 꽉 다물린 입과 형형한 안광이 정말 미친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미치겠네…….”

재앙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다가오는 재앙을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에 비서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들 사이에 낀 사람들은 새우등이 터져서 죽고 말 것이다. 비서인 자신을 포함해서.

“하아…….”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사표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계속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그는 사라진 도한의 뒤를 쫓았다.

***

“또 왔어?”

“너…….”

이림의 평이한 목소리에 이제는 피곤함까지 느끼던 도한은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팔뚝을 보곤 성큼성큼 걸어 그의 손을 잡아챘다.

팔뚝을 잡자 이림은 경기를 일으키듯 힘을 주고 도한의 손을 떨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실제로 그의 손을 떨치기엔 턱도 없는 힘이었지만, 계속 이렇게 몸부림치다간 상처가 점점 벌어질 것 같아서 도한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만해! 상처가 벌어진다고!”

“손대지 마!”

“그만! 더 하면 묶어 두겠어.”

그 말에 더욱 미친 사람처럼 악을 쓰는 이림은 도저히 말로 대화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온몸을 비틀면서 반항하는 이림의 모습에 도한도 참고 참던 화가 폭발했다. 눈이 돌아간 채로 작은 몸에 올라탄 도한은 제힘을 이용해서 이림의 팔을 제압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마주친 물기 어린 눈을 보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풀었다. 이림은 손에서 힘이 풀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침대 헤드 너머로 잡히는 아무거나 휘둘렀다.

퍼억-.

“……!”

스테인리스로 된 꽤 커다란 텀블러가 그의 머리를 가격하고 굴러 떨어졌다. 그대로 숙인 채 굳은 도한의 갈색 앞머리가 흐트러져 앞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림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한의 한쪽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흘러내리는 피로 범벅이 된 눈썹 아래 박힌 눈은 탁하고 무감하게 빛나며 이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타인을 보는 것처럼 무감정한 눈빛은 도한이 화를 낼 때보다 더욱 무서웠다.

하지만 자신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가 억지로 제압하려 했으니 방어했을 뿐이다.

‘그래 그럴 뿐이야.’

스윽-.

도한은 이림이 움찔거리든 말든 천천히 일어섰다.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피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곧게 선 채 이림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기를 수 분. 이림이 세 번째로 손에 맺힌 땀을 훔쳐 내고 있을 때 마침내 돌아섰다.

달칵-.

어떤 말도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간 도한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참아온 숨을 내쉰 이림은 열리지 않는 방문을 보지 않기 위해 이불을 덮어썼다.

“잘됐어……. 드디어 뭐라도 한 거야…….”

이번에야말로 그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솔직히 후폭풍이 두려웠지만, 매사 여유롭고 나긋한 얼굴로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던 그 모습을 잠시나마라도 지워 버렸다는 사실에 너무나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죽기 위해, 그리고 남을 상처 주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라니.

그러나 이림은 고개를 저으며, 공허함이 자신을 잠식하기 전에 눈을 감았다.

이렇게 만든 모든 주범은 그였다.

어쩌면 이 지독한 악연의 시작이 그의 아버지였을 수도 있고 조부였을 수도, 증조부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더럽고 추잡한 짓을 당연하다는 듯 행해 오고 가르쳐 왔으니 도한이 그 꼴인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한의 장단에 맞춰 주고 싶지는 않다. 이 지독한 굴레를 누군가는 깨 버려야 할 것이다.

껍데기만 화려한 집에 처박혀 남은 세월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서의 삶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더 나쁜 건 아니었다. 아무리 이성그룹 소유의 병원이라지만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이곳 직원들을 저택의 사람들처럼 수족으로 부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감시하는 인원도 많지 않았고, 벤치에 앉아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조금이나마 자유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끝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끝일 수도 있지만, 지금껏 끊임없이 쫓기듯 살아온 이림에게는 조금 부족할지라도 아쉽지는 않은 끝이었다.

하지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내 아이…….”

하아. 결국 이림은 몸을 일으켰다. 그새 언제 와서 치웠는지, 이리저리 부딪혀 한쪽 면이 오그라든 텀블러와 쏟아진 물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도한에게 단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면, 아이를 잘 키워 줬으면 하는 것이다.

아이는 죄가 없으니까. 그 순하고 착한 아이만은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욕심이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도무지 잠이 오지가 않았다.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미련이 많은 것 같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이던 이림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림이 간과한 점은, 이제껏 도한이 그의 앞에서 보여 준 모습이 본모습의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용하고 묵묵한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 폭발하는 그의 성정은 가족들조차 꺼림칙해했다.

이림을 속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모습을 보여 준 것은 아니었다.

순종적인 편인 이림의 앞에서 그다지 보여 줄 일이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아무리 반항하고 도망쳤어도 그게 도한의 근본을 건드릴 만한 성질은 아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어도 다시 이림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다시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도한은 반은 자의로, 그리고 반은 무의식적으로 도한은 한밤중에 그의 병실 앞에 섰다.

이림의 병원에 몰래 숨어든 새벽이 되기 몇 시간 전, 도한은 지하실에서 사람을 패고 있었다. 하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찾은 곳이라 그의 화풀이 대상이 된 사람은 거의 곤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곳으로 끌려오는 사람들은 이성그룹에 빚이나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글로벌 기업이었지만, 시작이 그리 깨끗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이성그룹 말고도 수많은 기업의 뒤통수를 치며 평생을 사기꾼이나 도둑으로 살아왔으니, 설마 이성그룹의 후계자가 자신을 패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알파들은 손에 피를 묻히며 기업을 키워 왔다. 더러운 행위였으나 출세에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었기에, 오히려 그렇지 않은 기업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이런 무식하고 비열한 행위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다. 그들에게 큰 빚을 진 순간 눈이 가려지고 손이 묶인 채 납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지하실로 끌려가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물론 거절해도 되지만 한 대씩 맞을 때마다 일정 빚을 차감해 준다는 제안을 하게 되면 누구나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퍽-!

도한은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경호원이 건네는 물병을 집어 들더니 모조리 들이켰다.

조금 쏟아진 물은 굵은 목울대를 타고 그에게 튄 피를 씻으며 내려갔다. 플라스틱 물병이 모서리를 맞고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바닥에 피를 그리며 꿈틀거리던 인영은 온 기운을 쥐어짜서 말했다.

“제…… 발……. 살려 주세요…….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그 말을 들던 경호원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의 뒤처리를 수년간 해 왔지만, 오늘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짊어져 온 압박감과 억압된 혈기를 내보낸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샌드백 취급해 오며 스트레스를 푼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식 없이 돌아간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미친 짓을 하는 와중에도 나름 세워진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알파일 것, 그리고 죽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죽이는 게 더 편할 수도 있다. 어차피 평생을 숨어 다니는 사람들이었으니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해도 일반인처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그룹은 내수 시장을 책임지고 있는 대기업이었다. 선을 지키지 않으면 언젠가 그 끝이 다가올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이도한이건만, 지금 그는 시정잡배만도 못한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온통 땀으로 젖어 헝클어져 있었고 구둣발 또한 피로 흥건해 그가 걸어 다니는 곳마다 핏자국이 찍혔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경호원은 빠르게 다가가 여전히 골프채를 휘두르던 그를 잡았다.

도한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던 경호원을 빤히 바라봤다.

뚜렷하지만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땀과 피에 젖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아, 그와 수년을 함께 보냈던 경호원조차도 섬뜩해지던 순간이었다.

“그냥 말해.”

“네? 무슨…….”

“죽었으니까.”

그 말에 몇 초간 굳은 경호원은 황급히 몸을 숙여 맥을 짚었다.

피로 뒤덮여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던 사람은 그대로 시체가 되어 싸늘히 식어 가고 있었다.

경호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며, 입고 있던 재킷을 꺼내 얼굴을 덮어 줬다. 아무리 물불 안 가린다고 하지만 사람을 패는 것과 죽이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경호원이 저도 모르게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도한을 쏘아보자 그는 픽 웃으며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그대로 불을 붙였다.

“우리 둘 다 지옥에 가겠지.”

“죄송하지만 저는 도련님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경호원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말했다.

그러나 도한은 그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좁은 지하실이 연기로 꽉 찰 정도로 담배를 피우며 중얼거렸다.

“강이림은 나랑 반대인 곳으로 가겠지…….”

이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막막한 상황에서 자신과는 관련 없다는 듯 도한은 한심한 소리나 중얼대니, 경호원은 황당함을 넘어 이상함까지 느꼈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들다가도 스스로를 통제하며 살아오던 도한이 생전 하지 않던 짓을 했다.

사람을 죽인 것이다.

아무리 어두운 과거가 있고 그 빚을 청산하지 못한 기업이라도, 그들은 조폭이 아니었다. 도한도 정말로 누군가의 숨을 끊어 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죄책감과 그가 짊어진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담배를 잡은 손은 조금씩 떨렸다.

그 상황 속에서조차 생각나는 것은 이번에도 강이림이었다.

도한은 막막함을 느꼈다. 너무나 커다란 벽에 낀 느낌이었다. 그 벽은 협박과 회유가 모두 통하지 않은 채 점점 숨통을 조여 왔다.

그렇다고 파괴해 버릴 수도 없다. 무소불위의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가 가지고 태어난 것을 이용한다면 원하는 것은 손쉽게 얻고 제거할 수 있었다.

살면서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지루하고 고리타분하다 생각했던 감정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다.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모든 것에서 한 발짝 멀어져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으면서도, 찰나의 순간 잊고 싶은 작은 얼굴이 생각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도한은 비틀비틀 일어났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 정도로 휘청거리는 도한이었지만 눈빛은 흉흉했고 어떠한 결의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한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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