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시스투스
도한은 그 길로 바로 집에 들르지 않고 정신과를 찾았다.
하지만 동영상과 함께 몇 가지 질문을 한 의사에게서는 도한의 기대를 깬 답변이 돌아왔다.
“제대로 봐야 알겠지만…… 안타깝지만 눈에 띌 만큼 호전된 양상은 보이질 않는 것 같습니다.”
“…….”
도한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는 정신과 의사를 멍하니 바라봤다. 순식간에 기대가 사라지고 실망감이 몰아쳤다.
‘그럼 그렇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이내 표정을 바꾸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도한을 보던 의사는 아까 봤던 영상을 떠올렸다.
눈앞의 이 남자는 그 영상의 오메가가 달라지길 바란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도한은 가타부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급한 마음에 반차를 쓰고 나오니 아직도 하늘은 쨍한 햇살이 건물 외벽에 내리쬐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불은 붙이지 않고 지긋이 담배 필터를 물고 있었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공원. 훈훈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한껏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천천히 걷는 사람, 벤치에서 눈을 감고 노래를 듣는 사람, 서로 마주 보며 웃는 사람들을 보며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만 만지작거렸다.
모두 자신만 빼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던 커플이 사나운 눈초리의 도한을 보고 움찔거리다가 뒤돌아 멀어졌다. 햇볕에 흩날리는 이파리를 보고 있자니, 감성과는 거리가 먼 그도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병원을 나올 때까지는 생각보다 강한 정신적 충격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공간에 외딴 섬처럼 서 있는 지금은 폭발하듯 수많은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는 답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거짓말……?”
거짓말을 했다고.
결국 답답함에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빨아들였다. 훅 필터에 불이 붙으며 매캐한 연기가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숨을 내뱉는 그의 굵은 울대가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요즘 밥도 잘 먹고, 자신을 피하지도 않아서 괜찮으려니 했다. 그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CCTV 내에서 얌전한 그를 보고 안심해 추궁하지 않았었다.
자신이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거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으려 하는 게 짜증 났지만, 강제로 끌고 온 잘못도 있으니 참을성 있게 넘어가길 몇 달째.
결국 또다시 속아 넘어간 것이다.
‘속아 넘어갈 뻔했지.’
하루 종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정신이 없다 보니 아직도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딱히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또, 또 시작이구나.
그런 생각이 사고의 흐름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손으로 꾹 눌러도 계속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도저히 도망갈 생각을 멈추지 않는 그의 고집을 꺾기란 쉽지 않았다.
꽤 쉬울 거란 생각을 깨고 벌써 수년째 이 지질한 싸움을 이어오고 있었다.
20대 초반이었던 도한은 삼십 대가 되었으며 스무 살이었던 이림은 이제 이십 대 후반이었다.
서로의 청춘을 바쳐 가며 불태웠던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지만 이런 싸움은 원치 않았다.
단단했던 마음의 벽이 비 맞은 토벽처럼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집에 가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모른 척 같이 장단을 맞춰 줘야 할까, 아니면 화를 내야 할까.
도한은 결국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복잡한 마음을 끌어안고 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림은 예상과 달리 뜬금없는 부탁을 해 왔다.
“누구. 아기?”
“응……. 그냥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봐서.”
“…….”
도한은 고개를 푹 숙인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것도 연기인가?
오랜만에 마주 보는 얼굴은 복숭아처럼 뽀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잠들었지만 피곤하다고 말을 돌리는 이림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손에 꼽았다.
그래서 그런지 똑바로 도한을 올려다보는 이림의 모습이 낯설었다.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서로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게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림은 잊은 게 아니었다. 매일같이 그의 목에 걸린 목줄의 존재가 이림을 옥죄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딘가 초탈한 모습은 그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만을 만들었다.
실상을 아니 더 의심만 세졌다.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보는 도한 때문에 이림은 식은땀을 흘렸다.
냉큼 보여 줄 줄 알았는데 대답이 없다.
더욱 소심해진 이림은 괜히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불안해했다. 그런 이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한은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그 말을 끝으로 중문을 열고 사라졌다.
벌써 같이 산 게 몇 년째인데 아직도 긴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림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어 간신히 소파에 드러누웠다. 금세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애써 눈을 떴다. 요즘 무기력증과 우울이 더해져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처음 아이를 만나는 순간이니, 아직 누가 부모인지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아기 앞일지라도 조금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약 15분 뒤. 도한이 한쪽 손에 아기를 들고 들어왔다.
달칵-.
이림은 홀린 듯이 일어나 그의 팔에 낀 아기를 바라봤다. 똘망한 눈과 마주치자마자 가슴 가운데부터 시작하는 작은 울림을 느꼈다.
산들은 몇 초간 이림을 보더니 다시 손장난을 했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아기의 모습에 충격을 먹은 이림의 앞에서 도한이 아기를 어색하게 달랬다.
“한림아. 저기 아빠 있다. 저기 봐야지.”
“…….”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투에 화들짝 놀란 아기가 땡그란 눈으로 도한을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내리고 다시 손장난을 쳤다. 그런 행동에 도한과 이림, 둘 다 당황했다. 이림은 당황해서 가까이 다가간 뒤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한림아…… 아빠 기억나?”
“…….”
아직 옹알이만 할 수 있으니 구체적인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이림을 쳐다보지도 않는 모습에 이림은 착잡함을 느꼈다. 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 아기를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상황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때, 안 좋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아기가 복잡해 보이는 이림의 얼굴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울망한 눈과 꾹 다문 입술은 조화롭게 도한과 이림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볼에 작게 난 홍조를 보고 그제야 눈치챘다.
‘어색해하고 있구나.’
그제야 안심이 됐다. 굳은 표정을 풀고 금세 빙그레 웃는 이림을 보고 아기는 다시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도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작은 머리에 촘촘히 난 머리카락이 느리게 흔들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은 이림은 오랜만에 가슴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미안함을 느껴 괜히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도한에게 농담을 던졌다.
“많이 안 안아 줬나 봐? 되게 어색해하네.”
“뭐…….”
도한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라는 얼굴로 바라봤다.
아차. 둘 사이에 다시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림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도한과 아기를 버리고 도망친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다. 참 둘 다 부모 자격이 없었다.
어쩔 줄 모르는 이림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도한은 말했다.
“팔 내밀어 봐.”
“응?”
“아기 안아 봐야지.”
“어어…….”
이림은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꽤 묵직한 무게에 덜컥 걱정이 됐지만, 작은 손가락이 이림의 팔을 조심스레 잡고 있는 모습을 보자 팔에 힘을 주고 소파에 앉았다.
아기는 어색해하면서도 몸부림치지 않고 순하게 안겨 있었다. 점점 더 볼이 빨개지긴 했지만.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는 이림을 보며 도한이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유모가 돌봐 줬어. 고용인들이랑.”
“아, 그렇구나…….”
“……근데 왜 갑자기 보여 달라고 한 거야?”
그 말에 이림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도한의 얼굴을 읽을 수가 없다. 일단 의심을 하는 건 분명한데…….
‘들켰나?’
이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 사이 아기는 점점 눈을 느리게 꿈뻑이고 있었다.
의심이 가득한 도한의 질문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왜 갑자기 이러냐니. 그냥…… 여태까지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같아서…… 그래도 우리 아이잖아.”
“…….”
이림은 품 안의 온기를 느끼다가 말 없는 도한을 바라봤다.
분명 원하는 대답이었을 텐데도 그는 별말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도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도망이라…….”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내렸다.
언제 낯을 가렸냐는 듯 이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을 정리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얼굴을 본 건 어쩌면 순전히 자신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 만남이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된다면…….
그 생각이 들면서, 이림은 품 안의 아이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제가 보여 달라 해서 만나게 됐으나 자신도, 아이도 이제 서로에게 정을 붙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림은 뚫어져라 아이를 보다, 고개를 돌리고 팔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데려가 줘. 잔다.”
“왜. 애도 편한 것 같은데.”
도한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둘을 감상했다. 어쩔 줄 모르는 이림의 품 안에서 색색- 잘도 자는 아이의 모습은 도한이 오래 간 꿈꿔 왔던 행복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이림이나, 무거운 심정을 안고서도 모르는 체 평화를 유지하려 하는 도한의 모습은 온통 거짓투성이였다.
그래서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로 했다.
“이제 아기도 여기로 데려와야지.”
“왜?”
이림은 진심으로 당황해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 아기가 잠깐 깬 듯 칭얼거렸다.
그때서야 아차, 하고 스르르 앉아 등을 토닥였다.
도한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왜긴 왜야. 부모가 멀쩡히 모두 여기 있는데.”
“……나는.”
더는 여기 없을 텐데…….
이림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도한을 미처 보지 못했다.
일련의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도한은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에 가슴이 느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닥은 도한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림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또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를 시작할 셈인 걸까, 아니면 다시 잘해 보려고 노력하는 걸까. 분명 호전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면. 설마…….’
결국 불안감에 여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허튼 생각 말고 있어.”
“…….”
“진짜 다음엔 나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까.”
위협적인 협박을 들은 이림은 천천히 눈을 들어 도한을 들여다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고, 왠지 대답만을 기다리며 사나운 눈빛을 하는 도한이 안쓰럽기도 했다.
들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제 들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무리 도한이라도 제 목숨까지 관여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림은 오랜만에 뿌옇던 시야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안개 속에서 헤매다 등대를 찾은 느낌이었다.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쯤 도한에게 속마음을 얘기해 주고 싶기도 했다. 항상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니면 흘려듣는 도한이었기에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우리.”
“…….”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마주 앉은 둘이지만 그 거리가 가까워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마치 싫어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 매서운 눈빛의 도한을 바라보는 이림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하지만 마른 낙엽이 부서지듯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선배.”
“…….”
“우리 이제 그만할까?”
오랜만에 내뱉어진 진심이었다.
그러나 작고 여린 진심을 바라보는 도한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옷과 소파의 가죽이 부딪히며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음만이 가득한 곳에서, 그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문을 텄다.
“뭘 그만한다는 건데.”
“…….”
“여기까지 와 버렸는데 어떻게 그만두냐고. 넌 그게 쉽나 봐.”
“…….”
“난 네 속을 정말 알 수가 없어. 괜찮은 척하더니. 아기까지 보여 달라면서 갑자기 그만두자고? 도대체 뭘?”
그는 점점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웬만해선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기에 이림을 제외한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새근거리며 자던 아기는 호통 소리에 번쩍 눈을 뜨더니 조금씩 눈물을 보였다. 고개를 파묻고 옷깃이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으아앙…….”
“애 깼잖아. 일단 자게 내보내.”
“젠장할…….”
도한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콜을 불러 아이를 내보냈다.
웬만해선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일이 없었기에 도한은 스스로도 당황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인터폰을 누른 채 거칠어진 숨을 정리했다.
유모는 오랜만에 보는 이림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틈조차 없이 고개도 못 든 채로 조심스레 아이만 빼 왔다.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나갈 때까지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탁-.
커다란 집에 둘만 남게 되자 이림은 천천히 말했다.
“옛날에 학교에서 처음 선배를 봤을 때 있잖아. 사실 그때 선배랑 얽히고 싶지 않았어.”
“…….”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대학교 내에서도 빛나는 사람이었으나, 그 빛을 쬐다 죽는 한 마리의 벌레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수십 가지의 장점이 있었지만 수백 가지의 단점이 있었다.
도한을 둘러싼 것들은 항상 어두웠다. 비싼 옷과 잘생긴 얼굴로 본질을 가린 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냈으나, 이림에게는 그의 본성이 보였다.
아니,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은 게 바보 같았다.
“그런 거 있잖아, 느낌 안 좋을 때 느껴지는 감. 그런 게 느껴졌거든. 무시하기는 찝찝하고 받아들이기도 찜찜한. 그런 느낌이 선배에게 느껴졌어.”
담담한 말에 도한은 새삼 충격을 받았다.
사실 처음 이림을 만났을 때 그렇게 간질거리거나 부드러운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놀랄 만큼 거센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이림에게도 비쳤나보다.
그러나 그런 같잖은 이유 따위로 관계를 끝낸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한심한 이유라고 생각하며 비웃을 때, 이림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래도 무시했어. 나도 좋아하니까……. 근데…… 이제 욕심 때문에 벌을 받나 봐.”
‘욕심껏 사니까 이 지경이 된 거야.’
순간 그의 목소리에 서시연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병색으로 그늘진 얼굴과 멍한 눈빛. 아버지에게 시달리다 마음의 병을 얻은 여자. 놀랄 만큼 비슷한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내면의 냉소적인 감정들은 말소되고, 눈앞의 이림의 목소리와 흰 얼굴만이 시야에 담겼다.
서시연과 강이림.
그리고 나와 아버지.
도한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신과 아버지는 달랐다. 내가 얼마나 그를 아껴 주고 사랑해 줬는데.
‘그럴 리가 없어.’
도한은 머리에 떠오르는 사실들을 애써 부정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귓가에 서시연과 강이림의 목소리가 번갈아 울리기 시작했다. 환청임을 알지만 이것을 제어할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단단한 마음의 둑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도한은 정신을 다잡으려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
이림은 여명을 느끼며 서서히 눈을 떴다. 숱 많은 눈썹이 느리게 올라가며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부스럭-.
몸을 일으켜 도한이 누워 있었을 옆자리를 바라봤지만 그곳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
괜히 차게 식은 시트를 문지르며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리고 며칠 전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날, 속마음을 내보인 그날부터 도한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늦게 퇴근했던 도한은 이제 새벽이 가까워질 때에서야 모습을 비쳤고, 그마저도 이림이 잠에 들어 보지 못할 때가 대다수였다.
멀쩡히 들어온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 옷을 집어 들면 독한 양주 냄새가 배여 있었고, 이림이 옆에 있으면 아닌 척 말을 걸고 싶어 안달 내던 그는 이제 이림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미 검게 죽어 버렸다 생각한 마음이었지만 거실 가운데 떡하니 서 있는 이림을 봤으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는 그의 옆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쿡쿡 쑤셨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방도도 없고, 자신이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그가 자신의 감정을 알아챘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 정도면 됐어…….”
어차피 끝내려고 했던 관계였다.
비록 가슴에 남은 진득한 얼룩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림은 반쯤 일어났지만 다시 누웠다.
이만하면 괜찮은 끝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억지로, 억지로 삶을 이어 갔지만 죽음만큼은 선택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면 아래로 침몰하듯 의식이 점점 가라앉았다.
***
도한은 뻐근한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끼이익-.
어두운 집안의 고요한 공기가 익숙하다 못해 편안할 지경이었다.
집에 오니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하면서도 집 안에 있는 이림의 거대한 존재감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아…….”
목을 꽉 조이는 넥타이를 풀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스스로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밤에는 술을 진탕 먹고, 습관적으로 새벽에 일어나서 바로 출근을 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지 못해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 넥타이, 구두. 이 모든 게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림이 잠든 방문을 바라봤다. 요즘 계속 잠만 자는 모습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한 번 외면하고 나니 다시 다가가는 게 힘들었다. 언제나 이림의 의견은 뒷전으로 여겼던 도한답지 않은 소심함이었다.
지금 시간은 밤 11시. 아무리 도한의 평균 퇴근 시간이 늦은 편이라지만 요즘 들어서 한밤중에 집에 오기 일쑤였다.
이림의 말이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집 안에 큰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소처럼 단순히 귀찮은 일이 아니라 도한에게도 심각한 문제였다.
서시연이 죽었다.
아버지가 평생 숨긴 연인이자, 그에게 시달리다 끝내는 암으로 죽은 불쌍한 사람.
병색이 완연했기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삼십 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충격이었다.
서시연이 숨을 거둘 때, 도한은 사무실에서 어머니와 대화 중이었다. 다급하게 도한의 귓가에 속삭였던 경호원. 그리고 그 순간, 함께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의 통쾌한 눈빛이 아직도 기억났다.
어머니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한은 도저히 그때 병원에서 본 그 여자의 슬픈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이림과 전혀 다르면서도 비슷했던 분위기와 눈빛. 져버리는 생명 특유의 아스라했던 표정까지.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운 상태로 집에 오니 더욱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
지금이라도 이림의 옆에 누워 작은 몸을 끌어안고 숙면을 취하고 싶다. 잠결에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바람이 섞인 새근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그리웠다.
하지만 도한은 거실에 멈춰서 방문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옆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그대로 문이 닫히며, 거실은 작게 코를 고는 두부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
다음 날, 도한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VIP 병실을 찾았다가 부모님을 맞닥뜨렸다.
고요한 복도에서부터 두 분의 언성이 높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나가!”
“내가 왜? 이제 그 지긋지긋한 인간도 뒤졌는데!”
쿠당탕!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은 도한은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쉬다 문을 열었다.
부모님은 난장판 속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그 병실의 주인은 사라지고 서시연과 깊은 악연이 남은 두 사람만이 병실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뼈대만 남기고 온통 뒤집어진 침대와 책상, 그리고 꽃병까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분들이 너무나 유치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누구의 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겠지. 알고 있지만, 병원 관계자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이쯤에서 말려야 했다.
도한은 방문을 닫고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만. 진정들 하세요.”
“도한아. 이 인간 적반하장인 꼴을 보렴. 너는 절대 저렇게 되면 안 된다.”
그의 어머니는 도한을 바라보지도 않고 이를 갈며 말했다. 이림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도한도 어머니의 눈 밖에 났으니, 저런 말은 도한에게는 일종의 경고일 것이다.
도한은 애써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하세요. 고혈압도 있으신 분이.”
“아이고, 아이고. 내가 죽어야지.”
외면하는 아버지와,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어머니.
평생을 풍족하게 산 사람들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비루한 모습이었다.
도한은 무표정하게 이 촌극을 바라봤다. 뒷짐을 진 손은 담배가 당기는 듯, 조금씩 움찔거리고 있었다.
죄인인 아버지가 자리를 피하고, 어머니는 침대에 걸터앉아 도한을 올려다봤다. 울음기가 남았지만 다시 냉철한 얼굴로 돌아온 임정숙은 도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담배 있니?”
“몸 생각하셔야죠.”
“그냥 줘.”
도한은 지친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결국 담배를 내어 줬다. 정적 속에 라이터의 부싯돌 소리가 작게 울렸다.
담배를 피우는 어머니의 얼굴은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서인지 지금 그의 얼굴은 미움이나 고통이 아닌 다른 감정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몇 번 뱉은 어머니의 한껏 끌어 올려진 입꼬리로 담배 연기가 빠져나왔다.
“네 아빠도 참 바보 같은 사람이야. 악담 몇 번 뱉어 줬다고 발끈하기는. 멍청하기 짝이 없어.”
“…….”
한껏 비웃는 말투였지만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미워할 대상이 사라져서일까. 어머니의 주름진 눈가가 지친 듯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통쾌한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계속하실 거면 가 보겠습니다.”
이런 데 감정을 소비할 시간은 없다. 그리고 지금 자신도 제정신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부모님이라지만 이 짓을 수십 년 동안 봐 온 사람으로서, 도한의 눈에는 이제는 진부한 치정극으로 보이기만 했다. 애초에 그렇게 살가운 모자 사이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면 자식의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하지만 임정숙은 그런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제 할 말만 중얼거렸다.
“그것도 정이라면 정이라고 해야 하나……. 결국 우리 모두 당한 거지. 어떻게 보면 알면서도 결혼한 내 잘못이야…….”
“…….”
도한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냉정히 등을 돌려 문을 열었다. 순간 멍했던 눈에 초점이 들어오며 임정숙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도한.”
“…….”
멈칫. 도한은 나가지 않고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후회할 짓 그만해. 돌이킬 수 있을 때 바로잡아 둬.”
도한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말에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임정숙은 입을 열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삭막한 모자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바로잡으라고…….”
피식. 도한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테라스의 바람을 느꼈다. 모두가 입을 맞춘 듯 자신을 가르치려 든다.
천하의 바보가 된 느낌이다. 여기서 어떻게, 무엇을 바로잡으라는 걸까.
그가 받아 온 상처는, 이미 어떤 짓을 해도 완전히 치유할 수 없다.
이림이 받은 상처만큼 도한의 가슴에도 커다란 상흔이 남겨졌다. 그 상처는 끝을 모르고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만둘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쯤 되니 스스로도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의 마음이 멋대로 고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이렇게 멀리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때 호기심이 생겼다면 한 번 잔 뒤 돈을 주며 버렸을 것이다. 쓰레기라고 욕을 먹어도 그게 편한 길이고 자신 같은 사람들에겐 옳은 길이었다.
뒤탈이 없으려면 그게 편했겠지.
하지만 어딘가 망가진 기계처럼, 아무리 다시 고치려 노력해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포기하려 해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것인지 몰랐다.
포기할 수 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만약 없다면. 그 집에 이림이 없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가 어디 있는 줄도 모르고 누구랑 붙어먹는지도 모른 채, 외로움에 잠식되어 죽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한 삶일 것이다.
도한은 자신을 타이르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지는 석양을 바라봤다. 마음을 다잡고 사무실로 내려가는 도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내려가며 받은 전화는 충격적이었다.
순간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도한은 반사 신경으로 간신히 손잡이를 잡았다.
“뭐……? 무슨 짓을 했다고?”
도한이 전화를 받기 네 시간 전, 이림은 창 앞에 서 있었다.
빛이 가득한 마당을 보는 이림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지저귀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담 너머 나무에 둥지를 틀었던 새가 날갯짓을 하며 둥지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모습들이었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보니 참 신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항상 집에만 있으니 딱히 무언가를 정리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모든 일을 매듭짓기 시작했다. 나가지 않았던 마당도 한참을 들여다보고, 두부에게 사료를 쏟아 주며 아무도 모르는 이별을 준비했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소파에서 뛰어내린 뒤 사료에 정신 팔린 두부를 쓰다듬으며 이림은 중얼거렸다.
“많이 신경 못 써 줘서 미안……. 근데 앞으로는 더 미안해질 것 같네.”
벌써 성체가 된 두부는 집안의 분위기를 닮아 버린 건지 성격조차 고요하고 조용했다.
원체 사고를 많이 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험악한 집안 분위기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챙겨 주는 사람도 따로 있다 보니 정신을 차려보자 어느새 다 자란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이럴 거면 많이 신경 써 줬을 텐데. 그런 후회가 남았다.
생각해 보면, 이 집에 온 뒤로 후회만 하는 것 같다. 따스하고 좋았던 시절은 봄철같이 한순간이고, 그다음부터는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며 종래에는 후회만 가득했다.
이제는 후회했었던 순간을 후회하고 있다.
이림은 도리질 치며 일어섰다. 이제는 이 지겨운 생각을 끝내고 싶다.
이림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틀었다.
그리고 주변을 샅샅이 정리했다. 흐트러진 이불을 개고, 클리닝을 맡길 옷들을 내다 놓았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힘들어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종이 한 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행동이라, 도한이 CCTV를 보고 있었더라도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오히려 오랜만에 일어나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역시 이림이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15분이 지나자 욕조에 물이 가득 채워졌다.
이림은 천천히 일어서서 욕조로 향했다. 마치 그저 목욕을 하러 들어가는 사람처럼 느긋해 보였지만, 문이 닫히고 그 욕실은 다섯 시간이 넘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도한. 그리고 아침에 잠깐 청소하러 들어오는 고용인을 빼고는 고양이 한 마리만이 집을 지키는 것이 다인 썰렁한 이 집에서 이림의 자살 시도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
“…….”
방심했던 도한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충격에 CCTV를 중지하고 컴퓨터 앞에서 굳어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고용인이 아니었더라면 이림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몇 시간 전. 도한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끝내고 나온 후, 그가 병원에 있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눈을 찌푸렸다. 낯선 단어들이 휴대폰으로부터 다급하게 흘러나와 귀에 꽂혔으나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자살, 피, 수술…….
강이림.
그 말을 들으며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푸른 녹음과 따스한 춘풍에 사람들의 얼굴에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그런 풍경을 보던 도한은 갑자기 공허함을 느꼈다.
모두가 행복한 곳에서 자신에게만 모든 재앙이 닥쳐오는 듯했다.
그답지 않게 자꾸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다고 정말 환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꿈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보고를 듣던 도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어디 병원이야.”
***
“헉…….”
정신없이 뛰어온 도한은 숨을 몰아쉬며 수술실 밖에 서 있었다. ‘수술 중’이라는 문구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도한에게 경호원이 재빨리 보고했다.
“오늘 오후 세 시에 세탁물을 찾아가려 들른 고용인이 평소보다 적은 세탁물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림이 몇 번이나 도망을 가 버린 뒤로 도한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별채 곳곳에 눈치 빠르고 감이 좋은 고용인들을 배치해 뒀다.
요즘 들어 더욱 걱정이 많아진 도한의 보험과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던 도한은 갑자기 주먹을 들어 올려 경호원의 얼굴을 내려쳤다.
갑자기 일어난 일로 방어를 하지 못한 경호원은 그 충격에 나자빠졌다.
우당탕-!
하지만 누가 그랬냐는 듯 금세 일어나 도한의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깜짝 놀랐을 행동이었지만 이곳에서 이런 갑작스런 폭력을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경호원은 면목이 없다는 듯 부어오르는 뺨을 움직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아…….”
답답함에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른 곳을 바라봤다.
도한은 눈치를 보다 빠지는 경호원을 붙잡지 않은 채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이마를 계속 매만졌다.
사실 이 모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비록 쓸모를 다하지 못한 경호원의 잘못도 있었기 때문에 주먹을 내질렀으나, 제대로 힘을 주지 않았으니 알파들에게는 그다지 심한 고통도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도한이었으므로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할 수도 없었다.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을 느끼며 도한은 홀로 끔찍한 시간을 견뎌 냈다.
“마취는 두 시간 정도 지나면 풀리실 겁니다. 손목의 신경은 피해 갔지만 피가 너무 많이 흘러서 자칫하면 위험할 뻔했어요.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앞으로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만 합니다.”
최대한 예의 있게 말했지만 그만큼 사무적인 말투를 내뱉는 의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미동도 하지 않는 도한을 보던 의사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VIP 병실을 빠져나갔다.
기계음과 산소호흡기 소리만이 전부인 이 공간에서, 도한은 깨질듯한 머리를 쥐고 이림을 내려다봤다.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가진 이림은 잠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닦지 못한 팔뚝의 핏덩이라든지 응급처치가 되어 붕대로 감긴 손목은 그런 망상조차 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거센 분노가 일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벗어나려고만 하는 이림을 이해할 수 없었고, 왜 그렇게까지 자신이 싫은 건지 궁금증이 들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 뻔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한 적은 없었던 이림이다.
그래서 바보같이 안심했다. 그나마 목숨을 건져서 다행이지만,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또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순간, 다급함에 벌떡 일어나자 피가 빠져나간 듯 손끝이 차게 식고 어지러워졌다.
어지럼증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은 도한은 갑갑함에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럼에도 흐트러진 머리, 식은땀이 맺힌 목,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넓은 어깨와 안정을 찾기 위해 느리게 깜빡이는 눈동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다.
“젠장……!”
콰앙-!
“보호자분, 진정하세요!”
가까스로 병실 밖으로 나온 그는 복도의 모든 것을 부수기 시작했다. 벤치, 벽에 걸린 액자 등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건드리고 부쉈다.
굉음에 놀란 사람들이 문을 열고 힐끔힐끔 바라봤다. 재빨리 다가온 의료인들 또한 도한의 주변을 맴돌며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커다란 소음에 밖으로 뛰쳐나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다급히 말렸지만 젊은 우성 알파가 날뛰자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화를 참지 못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혐오했으면서도, 이림이 얽히기만 하면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에 일어난 불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 하는 고집불통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보안관 몇 명이 달려들어 제압당했을 때조차 몸부림을 멈추지 않은 도한은 한참을 발악하다 수십 분이 지나서야 힘을 빼고 고개를 떨군 채 입술만 짓이겼다.
소식을 듣고 늦게 도착한 그의 비서는 난장판이 된 복도를 보며 숨을 꾹 참았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의료진들과 환자들, 제압당한 도한과 엉망진창이 된 복도.
비서는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보안관들에게 말을 걸었다.
“진정하셨으니 그만두시죠.”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힘을 풀었다. 하지만 도한은 여전히 차가운 복도에 엎드려 있었다. 커다란 몸을 부들부들 떠는 도한의 손끝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를 갈며 분노를 삼키는 도한의 눈빛은 악귀같이 형형했다.
이곳이 지옥이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 이림은 천천히 눈을 떴다.
“…….”
통 정신이 없고 몽롱했지만, 옆에 놓인 가습기와 시야로 보이는 널찍한 병실을 보니 자신이 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알아챌 수 있었다.
커다란 절망감이 새카만 눈동자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실패했구나. 또 이렇게 죽지 못했다.
이림은 멍하니 몇 시간 전 일을 떠올렸다.
죽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맨 살갗에 날카로운 물건을 대고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흐르는 것을 보며 욕조에 몸을 눕힌 채 시간을 죽이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나 무섭고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욕조에 들어와서도 제 손목을 긋는 행위를 두 시간이 넘게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마침내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의식을 잃었는데, 또다시 원점이다.
“보호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진정하세요!”
저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눈만 돌려 소음이 흘러나오는 문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무슨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뭐가 됐든 무슨 상관이지. 이림은 무심하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져들고 몇 시간 만에 눈을 뜨자, 익숙하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보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느긋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무언가에 시달리는 듯 급한 모습이 낯설었다.
넥타이와 재킷은 사라지고 하얀 와이셔츠만 입은 채 강도 높은 운동을 한 사람처럼 헝클어진 모습을 한 그는 마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꼭 그래야만 했어? 내가 그렇게 싫어?”
그는 마치 지친 것 같았다.
그동안 이림이 화를 내든, 애원을 하든 이림의 생각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시종일관 강압적인 행동만을 취했던 이도한답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마취가 풀리고 이제는 입을 달싹일 수 있었지만 이림은 눈을 감고 무시했다. 어차피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도한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는지 벌떡 일어나 이림의 앞에 다가왔다. 그러자 어느 틈에 서 있었는지 그의 비서가 도한을 말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비서의 존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비서가 막은 탓에 침대에서 한 발 떨어진 채로 이림을 내려다보는 도한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이림, 대답해!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그냥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될까.”
이림은 간신히 입을 벌려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도한은 할 말을 잃었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내뱉어진 대답에 굳어 있자, 이림은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비서는 눈치를 보다 꽉 잡은 도한의 옷깃을 놓으며 한발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 소음이 가득했던 방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졌다.
도한은 자신에게 무신경한 이림의 태도가 믿기질 않았다. 도한의 이기적인 행동에 언제나 화를 냈었지만, 이토록 무심한 적은 처음이었다.
마치 재미없는 영화를 보다 잠에 드는 사람처럼 차가운 모습이었다.
지금 자신과 이림 사이에 일어난 일은 그런 행동으로 치부할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림은 극단적인 시도를 했고, 도한은 심한 울증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모든 게 엉망인 가운데 서로 연결된 가느다란 줄 하나만을 잡고 있는 듯 버거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조차 이림은 느끼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위기감과 불안감조차 없이, 이 상황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저 태도를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무시에 도한은 이림을 노려보기만 했다.
“……할 말이 그따위 것밖에 없어?”
원수를 보듯 이를 갈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런다고 내가 너를 놓아줄 것 같아? 설령 내가 널 보내 준다고 해도 네가 다른 새끼랑 붙어 다니는 걸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인생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도한은 협박에 가까웠지만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그러나 잠에 빠져든 이림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도한은 옷을 챙겨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파서 제정신도 못 차리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었으니, 도한이 할 수 있는 것은 의미 없는 협박 밖에는 없었다.
***
그 뒤로 도한이 이 병실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실 첫날을 제외하면 아예 전무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림에게는 누구보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2주가 지나자 웬만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림은 허무함을 느끼며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결국 또 살아남았다. 이제는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삶의 목적이 없는데 굳이 계속 살아야 할까.
‘다 귀찮다.’
이림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벌써 도한은 이곳을 잊은 사람처럼 2주째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항상 도한의 곁에 빌붙어 살았기에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막연한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남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제껏 의사가 약을 먹으라면 먹었고 물리 치료를 받으라면 받았다. 굳이 하라는 일을 거부하며 몸을 축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회복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곳에 누워서 할 일이라는 것은 회복하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할 뿐이었다.
이림은 조심스레 손목을 움직였다. 아직 뻐근한 통증이 있었지만, 웬만큼 움직일 수는 있었다. 흰 살갗에 꽤 큰 자상이 남았다. 그것이 신경 쓰여 괜히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가끔 보이는 경호원과 비서가 아니면 이곳을 찾는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나 친구들 대부분 이림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림은 몸을 웅크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을 생각했다.
이대로 끝이라면 그나마 다행인 걸까. 도한이 그 유서를 보긴 한 걸까.
아팠던 몸이 안정되자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림은 그런 자신을 자책하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었다.
목숨을 끊는 것은 실패했으니, 적어도 이 관계가 끊어진다면 성공한 셈이다.
공허함 속에 이상한 안정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든 것은 이른 오후였지만, 다시 의식이 든 것은 새벽이었다.
몽롱한 눈을 꿈뻑꿈뻑 움직이는데 자꾸만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커다란 손이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는 듯한 촉감을 느끼며 서서히 잠들었다.
그렇게 목숨을 끊으려 집에서 난동을 피운 뒤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이 병원에서 퇴원할 시기가 다가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눈을 뜨면 주변에 그의 페로몬 향이 옅게 남아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향만 남지 않았다면 자신이 완전히 버려진 것이라 착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또 이렇게 이도한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걸까.
이림의 텅 빈 눈가에 잠시 씁쓸함이 채워졌다. 더럽게 질긴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데, 왜 우리는 그게 이렇게 힘든 건지 모르겠다.
“두 번 했다가는 사람 잡겠다…….”
이림은 피식 웃으며 중얼댔다.
넓고 따뜻한 병실, 계속해서 자신을 정성스레 돌봐 주는 간병인,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고요한 야경은 이림의 삐죽삐죽 못나게 돋아난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이림의 시선을 오래 잡아 두진 못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정말 마지막을 준비했는데, 다시금 살아나자 이제 어떤 것을 삶의 목표로 두고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이제는 자신을 살려 놓고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그가 미울 지경이었다. 이림은 나무가 거세게 흔들리는 창 너머를 바라봤다. 창밖은 어둠이 가득했지만 그만큼 인적이 드물었기에 평화롭고 자유로워 보였다.
“…….”
안 되지, 안 돼.
이림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 용기를 낼 자신은 없었다. 불을 끄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캄캄해졌지만 그 어두운 시야 속에서 자꾸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버릴 거면 제대로 버리지. 자꾸 놓을 듯 손을 놓지 않으니 자신만 미칠 지경이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우리가 어떻게 됐으면 좋았을까. 그냥 내가 맞춰 줬어야 했을까? 보이지 않는 척, 들리지 않는 척 뻔뻔하게 사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그 답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천성이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몇 년간 지속된 이 지겨운 싸움을 끝내고, 그냥 편해지고 싶었다.
매분 매초가 행복했지만 괴로웠다. 사실, 그와 같이 있던 모든 시간이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배덕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이었지만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너무나 싫다가도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고요한 눈동자를 보다 보면 다시금 가슴이 뛰어올랐다. 죽일 것처럼 싸우다가도,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그의 얼굴이 미소 지으며 제 배에 머리를 파묻으면 마치 도한과 자신의 사이에 있는 문제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옛 추억을 더듬던 이림은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조용히 흘렸다.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눈물이 흘렀다.
-3권에서 계속-
[그 별채의 정부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