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족쇄
그 시각, 별채에서 둘은 말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무표정한 도한의 앞에서 그는 질색하며 소리쳤다.
“싫어. 내가 왜!”
그의 손에는 족쇄가 달려 있었다. 아니, 족쇄라고 하기엔 너무나 발목을 조이는 통이 컸다.
이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발목에 들어가기는 무리지만 분명 족쇄와 비슷한 물건이다.
“목줄……?”
질색하는 이림에게 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말 안 했나? 다시 한 번 더 도망가면-”
도한이 팔짱을 낀 손을 풀고 다가오자 더욱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도망가지 않고 말없이 노려보는 이림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저 갖다 댄 수준이었지만 심리적 압박은 꽤 컸다.
도한은 반사적으로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쥐고 떼어 내려는 이림에게 나직이 말했다.
“여기다 해 주겠다고.”
그리고 그의 반대편 손에는 족쇄가 쥐어져 있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서 오히려 스스로 저 족쇄를 목에 차야 될 것 같았다.
“발에 찬 걸 다시 목에 차는 게 좀 그래?”
“…….”
“걱정 마. 새로 맞춰 온 거야.”
자꾸 주제에서 엇나가는 대화가 이어지자 이림은 지쳐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시계를 보자 이미 새벽이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오밤중에 거실 한 가운데서 족쇄니 뭐니 하는 도한은 정말 악귀처럼 보였다. 자신은 악몽을 꾸고 있는 중이고, 악몽을 만든 몽마는 도한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말이 되는 상황인 듯했다.
“제발 이러지 좀 마. 내가…… 내가 애완동물이야?”
“네가 너무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데.”
도한은 뻔뻔하게 말했다.
도저히 논리가 통하질 않는다. 얼추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핀트가 엇나간 대화뿐이다. 이번에 정말 단단히 돌아 버렸는지 도한은 자꾸 어린애처럼 말했다. 이림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벌써 두 번이나 끌려오면서, 이제 도망을 치는 것에 대해 의욕을 잃게 됐다.
더 이상 반항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끈질긴 추적에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역시나 이림이었다.
아예 해외로 나가 버리는 게 아닌 이상 이곳은 그의 손아귀였다. 도망을 친다 해도 숨어 살아야 했고 그마저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별채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너무 지쳐서 이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하루가 너무나 길었다. 이제는 생각을 정리하고 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도한이 다시 폭탄을 던졌다.
‘맞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눈물이 나왔지만 왠지 실없는 웃음도 함께였다.
하지만 곧이어 얼굴 전부가 슬픔으로 번져, 웃음은 흔적조차 남지 못하고 사라졌다.
주춤주춤 발을 옮기다 도망쳤지만 묘하게 기운이 빠진 이림의 표정을 기민하게 눈치챈 도한은 다가와 그의 다리와 옆구리에 팔을 넣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미친 듯이 도한의 온몸에 주먹질을 했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둘 중 아무도 없었다.
학습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섭게도, 이럴 때 도한이 한 걸음도 물러난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이림의 반항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저번에는 무릎까지 꿇고 빌었는데 통하지 않았다. 이림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말했다.
“빼 줄 거지……? 그때처럼 빨리 뺄 거지?”
하지만 도한은 묵묵부답이었다.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까 문 앞에서 봤던 고용인들의 싸늘한 눈빛을 맞은 이림은 가슴이 베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에게 잘잘못의 여부를 따질 일은 아니었다. 왜냐면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알면서도 힘든 상황을 탓할 사람이 필요하니 이림을 제물로 바쳐 헐뜯는 것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무엇을 설명하겠는가. 하지만 어렴풋이 이해가 되긴 했다. 직장에서 남의 치정사로 자신들이 고통받는다면, 그것만큼 싫은 일이 없겠지.
하지만 이림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흔한 연인들의 싸움이 아니라,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고개를 숙인 이림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은 도한은 침대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줬다. 그리고 서로의 온기가 느껴질 만큼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강렬한 시선을 느낀 이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는 도한과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도한의 페로몬에서 오는 끌림만이 온몸을 파고들고 있을 뿐이었다. 코를 타고 몸 깊숙이 스며드는 도한의 향기는 진정 자신이 그의 옆에 돌아왔음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이림이 그의 향기에 취해 있을 때, 도한은 가냘픈 목에 족쇄를 채웠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눈을 뜬 이림은 손을 들어 제 목을 더듬었다. 그리 무거운 소재는 아니었지만 이림에게는 이 족쇄가 천근처럼 느껴졌다. 몸에 소름이 확 돋으면서, 본능적으로 목에서 빼기 위해 잡아당겼다. 하지만 빠질 리 만무했기에 참담함에 다시 눈을 감았다.
결국 돌고 돌아 더한 지옥으로 떨어졌다.
짐승에게도 하지 않을 취급을 당하자 이림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한은 그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자신에 비해서는 한없이 작은 이림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옅은 페로몬과 살냄새가 섞인 향기가 활시위처럼 팽팽히 당겨져 있던 그의 신경 줄을 누그러뜨렸다.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밀려드는 행복함과 안도감에 도한은 어리광을 피우듯 이림의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반응 없는 이림의 몸을 느낀 도한은 고개를 들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이림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가끔 이렇게 아무 반응이 없는 그를 보면 화가 솟구쳤다. 사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구태여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끌림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딱히 느껴 본 적 없던 도한은 생소한 기분에 흥미를 가졌다. 어딜 가나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이림을 보며 도한도 그 수많은 구애자 중 한 명이 되어 그를 쟁취했다.
이런 자신을 보고 한심하다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제 손에 쥔 이가 애정을 담은 채 자신을 올려다볼 때면 자신도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겪는 감정에 도한도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부모에게도 애정보다는 의무감을 느끼던 도한은 가끔 이상할 정도로 오락가락하는 기분 때문에 병에 걸린 것처럼 앓았다. 발을 빼야 할 때를 놓쳐 늪에 빠진 듯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껴 왔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지독한 일 중독자인 도한은 대부분의 일들을 의무적으로 처리해 왔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부모님에게 예를 다하는 것도 모두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해 오는 것일 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일반적인 감상과 묘하게 동떨어졌지만 그것도 이제야 알았을 뿐, 그 당시에는 모든 이들이 전부 자신과 같은 줄 알았다.
오직 위로 치고 나가고 싶다는 야망만이 삶의 원동력이었다. 하여 취하지도 않는 술을 배우고 체력에 무리가 갈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큰형을 제치고 아버지의 신임을 받게 됐으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바쁘지만 왜인지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들이 계속되던 중, 이림을 만났다. 한두 달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끌림은 그와 만날 때마다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사랑에 취해 모든 것을 망치는 한심한 인간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이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그와 만나게 되면 자꾸만 자신이 평범한 대학생처럼 느껴졌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이상과 사랑 사이에 갈등하던 도한은 결국 둘 다 쥐려 했다.
그래도 노력하면,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적응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림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어디부터 어긋난 걸까.
‘아마도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부터겠지.’
도한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몇 년 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과 동시에, 제 삶 전체가 흔들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애초에 두 가지를 전부 쥐는 것은 불가능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한 곳을 바라보며 달려왔는데 이제 와서 놓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이림이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존재였다면, 그가 가진 이상은 버릴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제 감정을 인정하고 그와 평생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여전히 사랑에 대해 불신이 있었다.
이 짓도 나이를 먹고 진정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된다면 옅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마음은 끝없이 불어나, 도한의 존재 자체를 삼킨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도한의 세상은 이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냥 새카만 눈을 보고 있다 보면 이미 가졌음에도 더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닫힌 마음을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림을 보며 초조함까지 느꼈다. 결국 느껴선 안 되는 마음까지 느끼고 말았다. 그가 명령하면 무엇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이렇게 혼란과 격통을 겪고 있는데 그는 너무나 조용했다. 혼자서 생지랄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된 걸까. 모든 것이 자신의 손에서 망쳐졌음에도, 덜컥 겁이 났다.
“…….”
그러나 이내 도한의 눈빛은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며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지금 끝낼 것이라면 다시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결국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있을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 저주 같은 사랑에 자신 혼자 허우적대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간 그의 지독한 권태에서 애정과 웃음을 돌려받으리라.
“절대 못 끝내.”
그의 저주 같은 한 마디가 이림을 옥죄었다.
한 몸으로 뒤섞인 것처럼 제 위에서 꼼짝 않는 도한의 체온을 느끼며 위를 바라봤다.
질긴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이면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왜 자신의 마음대로 이 삶을 끝낼 수 없는 걸까. 원래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가혹했다. 삶을 이어 나가기엔 너무나 지쳤고, 그렇다고 끊어 버리기엔 너무나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결국 자유를 찾지 못한 이림은 현실에서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조금씩, 그 자신조차 어렴풋하게 느낄 만큼 느리게 무너져 가고 있는 정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도련님! 아이고, 귀여우셔라. 여기요. 여기!”
고용인들은 유아 식탁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앉아 이유식을 먹는 아기를 구경했다.
아기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수많은 눈길에 정신이 없는 듯 고개는 숟가락을 향해 돌리고 있었지만, 눈은 쉴 새 없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입에 든 이유식을 삼킬 생각도 없이 멍하니 입술만 짭짭대는 모양새가 심하게 귀여웠다.
유모는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의 반응에 괜히 으쓱했다.
구경하던 사람들 중 한 명이 푸념했다.
“어휴. 아기는 이렇게 귀여운데 두 분은…….”
“그러게 말이에요. 이번에 한 명이 또 그만뒀다죠? 누가 곁에 보이기만 해도 아주 그냥-.”
“그만하세요.”
유모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다들 합죽이가 되어 땅만 바라봤다.
엄한 표정을 짓는 그의 앞에서 성희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한 유모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가십을 찾아 입방아를 찧기 일쑤였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 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점심시간이 끝나고, 성희는 자신의 선임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별채로 가라고요?”
“그래. 너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아끼시는 분이 병 때문에 오락가락하시거든. 그래서 회장님이 옛날에 시중들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환경을 최대한 편안하게 만들라 하셨어. 그중 나도 포함되고.”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이곳에 일한 지도 꽤 됐으니 일도 익숙할 테고…… 하던 대로만 하면 돼. 단, 그 사람은 피해 다니고.”
성희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투는 어쩔 수 없이 간다는 뉘앙스였지만 왠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분명 별채 일이 까다로웠던 것이 분명했다. 성희는 위로 그를 슬쩍 흘겨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벌써 이림이 돌아온 지 3개월이 지났다.
이림이 돌아온 것은 큰 사건이었으나, 그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있어도 성희의 일이 바뀐 적은 없었다. 애초에 모든 일들은 별채에서 일어났으니, 음식 투정을 하거나 괜히 고용인들을 괴롭히려 수를 쓰는 게 아닌 이상 신경 쓸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대충 그럭저럭 지나갔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자꾸만 별채를 담당하는 고용인들이 교체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벌써 세 달 동안 다섯 명의 고용인들이 교체되었다.
그 이유를 물어도 다들 고개를 내저을 뿐,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말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같이 그 사람을 마주치고 다음 날 바로 내쫓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이 저택 밖으로 내쫓긴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그 별채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성희는 일은 다른 곳보다 쉽다고 떠들어 대는 선임 앞에서 가능한 웃음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었다.
***
그렇게 들어온 별채는 의외로 할 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직 십 년도 되지 않은 신축 건물이고, 거의 사용감이 없어 몇 가지 물건만 치우면 새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요즘은 최소한의 사람만 들인다고 하여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신이 전부였다. 혼자 빠른 시간 내에 청소하기에는 꽤 넓었지만 그렇다고 못 할 건 없었다.
청소 시간은 도한이 출근하는 시간부터 이림이 잠에서 깨기 전까지였다. 대략 세 시간 정도였으나 오히려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게 더 편했다. 괜히 비위 맞추랴, 청소하랴 머리 아픈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이 집에 들어오면 먼저 안방을 제외하고 온 집을 닦았다. 그 후에 욕실을 청소하고 마지막으로 바닥을 닦으면 얼추 세 시간이 지났다. 물론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을 넘길 때가 있었지만 안방이 열린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고양이를 피해 도망가는 쥐처럼 바짝 긴장했었지만, 이제 긴장감도 사라지고 일도 손에 익자 저 건너편 안방에 숨어 있을 사람이 궁금했다.
얼마나 예쁘면 그 작은 도련님이 절절매는지.
하지만 문을 연다거나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둘은 여러 의미로 고용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그들의 입김 하나에 일자리의 존속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젊은 알파와 오메가의 지독한 관계성은 사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뒷배경을 보지 않고도 도한과 이림은 겉모습만큼은 누구보다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 보면 누구보다 검고 악취가 났다.
요즘 도한과 이림은 대체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 고용인들은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싸움이 일어나면 풀릴 때까지 온 집 안이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싸우다 화해하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이런 긴장감을 여러 번 겪다 보면 누구나 짜증이 일게 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은 매일 둘이 제발 싸우지 말라고 아침마다 기도를 하며 출근한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엔 부러울 수도 있는 관계였지만 가까이 가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지독함만 풍기고 있었다.
도한에게 걸려 인생 망친 이림이 불쌍하기도 했지만, 성희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이 상황이 때론 굉장히 피곤하게 느껴졌다.
좋은 의미로든 싫은 의미로든 둘만의 세계에 빠져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이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관계는 그들의 일상에 밀접하게 들어와 있는 고용인들에는, 아주 치명적인 사실이었다.
‘한 마디로 그놈의 사랑놀음 때문에 우리만 힘들다는 거지.’
성희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허리를 폈다. 개인적으로 이림이 불쌍하긴 했지만 그냥 그것은 일상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감정 소비였다.
왠지 그런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머리가 복잡했다. 작작 좀 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며 바닥을 문지르다 보니 계속 같은 모서리만 닦고 있었다. 잡생각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킨 성희는 안방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달칵-.
분명히 들었다. 이것은 이림이 있는 안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이곳에는 이림과 자신밖에 없으니, 자신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면 분명히-.
“자, 잠깐만요! 저 아직 안 나갔어요!”
성희는 너무 놀라서 되는 대로 내뱉었다.
그러자 반만 열린 문이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얌전해졌다.
그 순간을 틈타 재빨리 청소 도구와 제 개인 물품을 챙기고 허겁지겁 현관으로 향했다.
혹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안방 문 옆에 기댄 인영이 보였다.
“……!”
‘저 사람이다.’
조용히 내리깔린 속눈썹은 밑에 깔린 타일을 훑어보고 있었다.
한동안 아예 집 밖을 나서지 않았는지 창백한 피부는 불 꺼진 방 안에서도 환했다. 귀신같기도 하고 청초해 보이기도 한 그 얼굴에는 조금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몇 달 전 현관에서 봤던 사람이자, 입이 닳도록 남들에게 오르내린 그 소문의 남자였다.
아무리 누군가에게 관심이 없는 이라도 지금 눈앞의 이 사람만큼은 무심히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성희는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고 그를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아른거리는 옆모습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찌푸렸을 때 이상하게 반짝이는 은색 물질을 보았다.
“……?”
‘저게 무슨……?’
목에 걸린 은색 고리는 그의 목 전체를 다 덮을 정도로 컸다. 장신구라 하기엔 너무나 투박하고 컸다.
그때, 눈을 내리깔던 이림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빛이 들지 않은 눈동자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깜짝 놀랐다.
결국 성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못 봤어요!”
다급한 사과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는 이림을 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희는 허둥지둥 별채를 나왔다. 텅 빈 복도를 뛰듯이 가로지른 성희는 한참이 되어서야 크게 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혔다.
맙소사……. 신입 때도 하지 않았던 실례를 저질렀다. 특히나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규칙을 어기다 못해 박살 내 버렸다. 이 집 주인의 성정으로 볼 때, 이것은 별채가 아닌 다른 곳으로 업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짐을 싸고 나가야 할 수준이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무릎 꿇고 빌어 볼까. 성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화만 부추길 것이다. 그냥 오늘 밤, 다시 별채에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야 할 뿐이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성희에게는 아무런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이림을 피해 별채에서 일했지만 성희는 도대체 왜 이림이 도한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했는지 의문이 풀렸다.
아무리 정부라지만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사람에게 목줄이라니…….
‘여하튼 제정신이 아닌 곳이야.’
성희는 바닥을 문지르며 잡생각을 했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혼자서 묵묵히 반복되는 단순노동을 하다 보면 자꾸 다른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낄 생각은 없었다. 제가 뭐라고 끼겠는가. 이림을 처음 봤을 때도 별채에서 도망쳤다 잡혀 온 상황이었는데.
역시 쥐 죽은 듯 조용히 제 할 일만 하는 게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성희는 앞으로는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느끼는 척해야겠다 다짐하며 짐을 쌌다.
가방을 멘 성희는 현관 앞에서 잠시 뒤를 바라봤다. 은은한 거실 조명이 집을 밝히고 있었으며 채광도 좋아 집 안이 훤했지만, 어딘가 허전한 집이었다. 벽 너머의 이림의 존재는 희미하다 못해 정말 지금 같은 공간에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매일 식탁으로 배달되는 음식조차 거의 입을 대지 않는다던데. 성희는 자신을 도와준 이림에 대한 고마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방금 다짐했는데…… 상관하지 않겠다고. 내 일만 하겠다고…….’
고민하던 성희는 결국 별채를 나왔다.
하지만 그가 식사를 하지 않아 도한이 예민해졌다는 소문이 돌고, 다시 둘이 다투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자 더 이상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오늘도 여기저기 깨진 장식품을 보며 한숨을 내쉰 성희는 묵묵히 집을 청소했다. 힐끔 안방을 봤지만 여전히 문이 닫혀 있었다.
깨진 조각품을 치우느라 시간이 지체된 성희는 급히 짐을 챙겼다. 그리고 고민하다 가방 안에서 어떤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성희가 직접 만든 달콤한 쿠키가 가득 들어 있었다.
솜씨가 뛰어나 개인 가게까지 차리려 했었기에 성희가 만든 디저트는 같은 동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동료들에게 입소문이 나니 이 저택의 사모님이나 도련님들에게 가끔 전달되기도 했다.
수백 번은 만들어 봐서 이제 눈 감고도 만들었기에 혹시나 해서 이번에 가져왔다.
물론 밥이 더 좋겠지만 저번에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한 자그마한 성의 표시이자, 그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을 담아 가져온 것이다.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확률이 높지만 상관없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져온 거니까.
성희는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식탁에 올려두었다.
그 뒤부터였을까. 이림과 성희가 친해지기 시작한 건.
음식 담당은 아니었으니 쿠키를 버렸는지 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식탁에 갖다 놓으면 다음 날에 빈 접시만이 놓여 있었다. 성희는 그것을 보고 접시를 회수했다. 접시마저 사라진 주방은 텅 비어 생활의 흔적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지만 그렇다고 금방 마음을 터놓은 사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성희는 청소 도구를 내려놓고 주위를 바라봤다. 딱히 매일 청소할 필요도 없는 깨끗한 집이었지만 역시 묵묵히 장갑을 끼고 청소를 시작했다. 어제도 똑같은 곳에 놓여 있던 도자기를 치우고, 소파 밑을 닦고, 물걸레질을 했다.
왜인지 스크래치가 나거나 부서진 가구들이 존재했는데, 그것들은 성희가 다시 주문을 넣었다.
‘그래 봤자 한 달도 못 가서 부서질 것 같지만.’
그리 추운 계절은 아니었지만 집중해서 일하다 보니 땀이 났다. 한숨 돌리면서 주변을 바라봤으나 여전히 고요한 집 안이었다. 성희가 있을 때는 쥐 죽은 듯 고요히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가끔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등을 돌리고 빨래를 개고 있으면 더욱 강하게 알 수 있었다. 오롯이 느낄 수는 없었지만 등으로 다가오는 조심스런 인기척이 느껴졌다. 모른 척할 때도 있었고, 시선이 간지러워 등을 돌리면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성희는 그가 사람을 관찰하는 야생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곳에 머무르는 이림이었지만 성희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딱 이 정도 관계가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벽 너머에 숨어 있는 사람도 그것을 원하는 것 같으니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숨죽이던 이림은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미약하던 인기척이 사라지고 또다시 텅 빈 거실의 백색소음만이 귀를 울렸다.
이제 숨을 필요는 없어졌지만 어쩐지 거실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푹신한 침대를 두고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누웠다.
이림은 벌써 몇 달째 집에 처박혀 지냈으나 예전처럼 답답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몸 안에 타오르던 어떤 열정이나 의욕이 사그라든 것 같았다.
마음속에서 키우던 불씨가 사그라들어 숨이 죽기 직전이었지만 의외로 편안한 기분이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니 제 어깨를 무겁게 하던 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외롭긴 하네…….”
점점 자신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슬프다든지 절망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타인의 온기를 좇아 공허함을 달래고 싶은 마음은 가슴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했다.
저 사람의 아주 작은 호의조차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을 볼 때마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베이킹을 시도하다가 며칠 되지 않아 도한에게 납치당했었지. 그래서인지 쿠키를 보니 더욱 옛날 생각이 나고 마음이 가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더욱 다가갈 수 없었다.
지우가 생각났다. 그가 이 집에 있어서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비록 지우도 이해관계에 따라 이 집에 들어왔지만 상관없었다. 말도 걸어 주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이림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 주기도 하며 삭막한 집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던, 저의 친구.
이림을 도왔다는 이유로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게 되어 버렸다.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싶지 않다.
이림은 창 너머로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쨍한 하늘에는 비둘기와 까마귀가 빙빙 돌고 있었다.
***
도한은 문 앞에서 다시 머리를 만졌다. 그리고 손에 들린 이동장을 흘끔 바라봤다.
고양이가 뚱한 표정으로 앞발을 그루밍하고 있었다. 그동안 별채에서 날뛰던 도한을 피해 밖으로 옮겨져 저택에서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았더니,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살도 토실토실해졌다.
또 집이 바뀌는 거냐고 뚱한 얼굴로 묻던 두부의 눈은 별채를 보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어째 말이 통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피식 웃던 도한은 별채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며 말했다.
“이번에도 네 도움 좀 받자.”
도한은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이림의 앞에 섰다.
쓰리피스로 맞춘 정장을 입은 도한은 무성영화에서 튀어나온 배우 같았지만 그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은 도한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엄청 집중한 듯 보였지만 사실 이 드라마는 어제 보던 드라마의 재방송이었다.
어제도 이 드라마를 보고 있더니.
“이림아.”
“…….”
“두부한테 인사해 줘야지.”
그 말에 그제야 시선을 돌린 이림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쭈그린 이림의 앞에 내려 둔 이동장의 문을 열자 고양이가 나왔다. 꼬리를 양옆으로 휘두르며 조금 어색해하던 두부는 자신이 좋아하는 구석 자리에 몸을 뭉갰다. 그곳은 캣 타워가 있던 자리였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이림을 본 도한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요즘 생기가 없어지는 그가 몹시 걱정됐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영혼 자체가 말라 버린 사람처럼 텅 빈 눈동자를 볼 때마다 덜컥 겁이 났다.
원래 매사 활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우울해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이 그의 외모를 보고 접근했지만 이림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은 이림이 가지고 있던 생기와 총명함이었다. 열심히 수업을 듣고 내내 수석을 놓친 적이 없던 강이림. 그러나 지금 모습은 같은 사람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단순한 생리현상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릿느릿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정말 그가 제정신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게 자신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 옆에 있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도한은 생각했다. 이런 자신의 생각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정녕 그렇게 해 줄 수 없는 걸까.
더는 이림과 거래를 하고 싶진 않다. 게다가 그가 삶의 의지를 잃어 가고 있는 마당에 도한이 내밀 카드는 없었다.
“하아…….”
도한은 갑자기 피로해져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왜 이렇게 꼬여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 이림이 희민의 도움을 받아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는 모든 게 평화로웠다.
그때, 나무 밑 보자기에 누워 잠을 자던 이림은 모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꽃나무 아래서 그의 무릎을 베고 보던 풍경. 달큼한 페로몬. 지는 해가 내뿜는 붉은 빛이 가득 담겨 있던 하얀 얼굴.
티를 내진 못했지만 그가 도망간 후에 이림이 그리울 때마다 자꾸 그 순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예전처럼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성희라는 사람과 이상한 신호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도한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림은 두부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애정 표현은 없었다. 오히려 자리를 잡고 눕던 두부가 먼저 이림에게 다가와 비비적거릴 정도로, 인형처럼 얌전히 두부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다 예전처럼 돌아왔음에도 거실의 기묘한 정적과 희미한 이림의 웃음이 자꾸 도한의 기분을 뒤틀리게 했다.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도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매서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이림이 자신을 속이려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여전히 두부에게 손을 뻗지 않는 그는 짐짓 평화로워 보였지만 어딘가 실이 끊어져 버린 인형 같아 보였다.
요즘 그의 반응은 모두 이렇게 뜨뜻미지근했다.
좋아하던 치킨을 시켜 줘도, 새 옷을 사 줘도, 같이 재밌게 봤던 영화를 틀어 봐도.
한 번 눈썹을 으쓱이곤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고양이를 데려왔는데도 마찬가지라니.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제 예상이 빗나갔다.
도한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괜히 이림의 뒤로 다가가 목덜미를 만졌다. 온기에 따뜻해진 목줄이 느껴졌다.
도한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이림이 도망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느껴지게끔 그것을 힘주어 잡았다.
도한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조금 있으면 우리 애 한 살이야.”
그 말에 작게 반응한 이림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아무리 네가 무심한 척해도 그건 아니지. 도한이 안심하자마자 그를 비웃듯 이림은 금방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앞에 섰다.
그 감정 없는 얼굴 앞에 바짝 서서 도한은 천천히 말했다.
“강이림. 우리 애라고.”
“알아.”
도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말했으나 여전히 허공을 보는 모습은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잠에 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간 도한은 그의 얼굴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대봤다. 술에 취한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는 멍하니 두부를 바라보는 이림에게 넌지시 물었다.
“오늘 며칠이지?”
“……17일인가?”
졸린지 눈을 깜빡거리는 이림을 보던 도한은 그를 안아 올렸다. 두부의 털을 만지던 손이 배꼽 위에 얌전히 올려졌다. 말간 눈으로 도한을 올려다보는 시선은 비어 있지만 왠지 편안해 보였다.
이 정도 관계가 맞는 거겠지.
동등하지 못한 관계였으니 더 이상의 반응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서로의 감정을 속여야만 자신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널 이렇게 잡아 두는 게 맞는 걸까.’
자신의 판단력이 이렇게 의심되는 적은 처음이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아무 생각도 못 하고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도한은 처음으로, 이제껏 저지른 일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애를 쓴 걸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했다면 이런 기분이 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허무함과 지독한 고독감을 억누르며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저항 없이 일으켜진 이림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하지만 바로 침대에 눕히지 않고 그대로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봄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벚꽃과 개나리가 소담스럽게 피어 따뜻한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이림은 오늘 단 한 번도 마당에 나가지 않았다.
옛날에는 마당에서 살다시피 하며 이것저것 심기도 하고 가꾸기도 했는데, 이제는 화려하게 핀 꽃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는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그를 내려다보는데 도한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죽은 듯 조용했던 이림이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
“……근데 언제부터 반말이야.”
도한은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온 투정 같은 신경질이었다.
그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이림은 몸을 뒤틀어 마당에 발을 디뎠다. 맨발이라 신발을 건넸지만 이림은 끝내 하얀 발바닥으로 까슬한 잔디를 밟았다. 이림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리는 광경은 그동안 수백 번을 봤음에도 질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끔 기묘한 불안감이 몸을 감싸기도 했다.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칼과 옷이 휘날려 작은 몸이 더욱 부각될 때면, 몸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참아야 했다.
햇볓을 쬐는 식물처럼 느긋하게 서 있던 그는 금세 눈을 뜨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여전히 마당 한가운데 석상처럼 굳은 도한에게 무심히 말했다.
“다 괜찮아질 거야.”
“…….”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묻고 싶었다. 차라리 괜찮지 않다고 하면 믿을 텐데.
하지만 그는 이내 집 안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마치 원래 존재하지 않던 사람처럼, 유령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도한의 주위는 온통 고요하기만 했다. 마당 저 너머로 저택의 불빛이 한 아름 보였지만 정작 별채는 어둡고 고요하기만 했다.
그 죽음 같은 고요함에 괜히 덜컥 겁이 났다.
“……!”
도한은 굳어 있던 커다란 몸을 빠르게 움직여 거실로 들어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자꾸만 눈을 찔렀다. 안방의 문을 열면서 비이상적으로 뛰는 심장을 느꼈다. 그와 반대로 발끝과 등허리가 차게 식는 감각 또한 왠지 소름 끼쳤다.
이림과 같은 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동화된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흡수된 것처럼 이림이 미쳐 갈수록 자신도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이림을 방에 가둬 두려 했는데, 같이 갇히게 된 기분이었다.
문을 열자, 다행히 도한의 환상처럼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희미한 빛 사이로 이림이 누워 있는 실루엣이 비쳤다.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앉았다. 미동도 안 하는 그를 보며 도한은 옆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
그 말은 이림에게 하는 비아냥이었지만 왠지 제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그는 제 손바닥 안이다. 이제 누구의 도움을 받더라도,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푸른 한밤에 그의 눈만이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
시간이 흘렀지만 별채는 의외로 아슬아슬한 평화를 지속하고 있었다.
도한이 갈수록 예민해진다는 것과 이림이 종종 멍한 것을 빼면, 언뜻 서로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성희는 불똥이 튀지 않는다는 것 하나에 감사해하며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걱정이 하나 있다면, 밥상에 둔 과자가 다음 날까지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딱히 돈 많으신 분들 드리려고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손도 대지 않은 모양새를 보니 왠지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동시에 걱정도 됐다.
도대체 뭘 먹기는 하는 건지.
간혹 물컵의 위치가 달라지거나 쓰레기통에 영양제 봉지가 있긴 했지만, 그건 식사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방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물었더니 예상한 답이 날아왔다.
“거의 손대지 않지. 예전에는 성의를 봐서 좀 먹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통…… 그러다 쓰러지면 또 우리만 스트레스야.”
“……그래.”
“성희야, 그런 사람들 신경 쓰지 마. 먹으라고 빌어도 안 먹는 사람들을 신경 쓸 필요가 있어?”
성희는 한숨을 삼키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험담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건지, 그의 이름만 나오면 달려드는 모양새가 좋진 않다.
하지만 궁금했던 점을 알려 줬으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더 말을 붙이진 않았다.
모든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신경 쓰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성희에게는 가끔 이상한 충동이 있었다. 호기심인 것 같기도 하고 오지랖 같기도 한 충동 때문에, 결국 문 뒤에 숨은 이림에게 넌지시 말했다.
“배 안 고파요?”
“…….”
탁-.
순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성희는 아뿔싸, 하는 얼굴로 뒤를 돌았지만 꽉 닫힌 문이 보일 뿐.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볼 수 없었다.
예상했지만 역시 마음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 다가가지 않고 청소 도구를 정리하며 일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씻은 뒤 간단하게 음식을 데웠다.
매일 삼시 세끼가 별채로 배달됐지만, 아침밥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성희가 있어서 나오지 못해 못 먹었을 수도 있겠지만 안방의 크기가 작지 않으니 안방에서 충분히 식사를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성희보고 나가 있으라 명령해도 됐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밥에 손을 대지 않았고 보자기에 곱게 싸인 밥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성희는 밥이 가득 차려진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가서 반찬과 밥을 데웠다.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에라 모르겠다.’
식어 빠진 밥은 어느새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국에선 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식탁을 한 번 닦은 후 정갈하게 차린 뒤 외쳤다.
“식사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후다닥 중문 밖으로 나왔다. 괜한 오지랖인가 싶다가도 자꾸 눈에 밟혔다.
성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
“아침을 먹었다고?”
도한은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전화를 건 고용인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거의 몇 달 만에 드시네요.
“……그래.”
도한은 미간을 좁히다 전화를 끊었다. 컴퓨터를 켜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성희라는 고용인이 밥을 데우고 나가자, 5분 뒤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여기저기 눈치를 보던 이림은 쭈뼛거리며 앉더니 밥을 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마치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는 들고양이 같은 모습에 왠지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요즘 들어 또 식사를 하지 않는 이림 때문에 환멸이 날 지경에 이른 도한으로서는 매우 기쁜 소식이었지만, 며칠 전 이림이 했던 말이 떠올라 쉽게 넘길 수 없었다.
‘괜찮아질 거야.’
정말 괜찮아지고 있는 걸까?
“또 날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도한은 전화기를 든 채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예고 없는 보고에 당황한 그는 화면을 끄고 중얼거렸다. 의자에 깊숙이 기댄 몸은 의자가 꽉 찰 정도로 크고 늘씬했다.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고 길쭉한 발목을 드러낸 도한은 그를 매일 봐 온 비서조차 가끔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회사 홍보차 진행한 인터뷰를 보고 회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입사까지 이어졌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인터뷰나 기사 몇 개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서 가끔 그가 지나갈 때마다 카페테리아나 흡연 구역에서 잡담을 나누던 직원들은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특히 그의 성격에 관한 잡담도 끊이질 않았다.
놀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직장인들의 입장에서는 매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단장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기에, 그의 완벽한 모습은 언제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비록 몇 달 전 무단결근을 하긴 했지만 그것까지는 대부분의 평사원들이 알 겨를은 없었다.
그러나 도한 본인은 이런 생활이 일상이었으므로 생각보다 피곤함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완벽주의 같은 성격 자체는 스스로에게도 독이었다.
완벽한 성과를 내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단하고 옥죄어 가며 일을 처리했다. 그런 지독한 습관은 도한의 주변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이림은 몇 번 도망간 전적이 있으니 더욱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과연 무슨 꿍꿍이인 걸까.
‘놓친 게 뭐가 있는 거지.’
정말 그가 마음을 바꾸고 잘 살아 보려 하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이림의 상황으로서는 그럴만한 동기도, 힘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이림이 갑자기 상태가 좋아진다니. 목줄도 풀어 주지 않아 대인기피증까지 보이는 마당에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그가 괜찮아지고 있는 것이라면…….
도한은 우습게도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졌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괴롭게 하지 않으리라. 이번만 견뎌 준다면, 얌전히 갇혀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서로의 영역에서 서로에게 충실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걸 이제야 이해한 이림이 미우면서 사랑스러웠다. 순간적으로 작고 여린 이림의 몸을 끌어안고 싶은 욕망이 차올랐다. 그만큼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어느새 도한의 입꼬리가 가지런한 치아가 보일 정도로 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기에 한번 의사를 만나 봐야 할 것 같다.
시계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가방을 들었다.
***
“식사하세요~”
왠지 밝고 청량한 목소리가 텅 빈 집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성희는 지체하지 않고 가볍게 별채를 떠나 버렸다.
안방에 숨어서 얌전히 쭈그려 있던 이림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오늘도 성희 씨가 데워 둔 음식 앞에 섰다. 그리고 앉아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넓은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누군가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을 먹고 있으려니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다.
짭짜름한 미역국을 떠먹으며 눈을 내리까는 이림의 눈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이림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런 척하고 있었다. 닥쳐 온 현실이 너무 지옥 같은 나머지, 도피를 하고 있었다.
이도한을 속이고, 고용인들을 속이고, 스스로도 속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현실이 뒤바뀌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이림이 바뀌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가끔 스스로도 이런 연기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밥을 먹다가도 그릇을 내놓는 것을 까먹는다거나 하루 종일 잠을 자는 일도 빈번했다.
지금까지는 상태가 심각하지 않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 등, 스스로도 제 상태가 점점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잘 해내고 있는지,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방 밖으로 나오지 않던 그가 조금씩 움직이고 밥도 먹으니 조금씩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히 표정까지 연기할 수는 없었지만 어두운 방에서 피곤하다고 누워 있으면 웬만해선 건들지 않았기에, 얼마 전까지 그렇게 제대로 된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았다.
도한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CCTV를 통해 집구석에 얌전히 처박힌 이림을 보며 안심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이림을 괴롭게 했던 그 감시카메라는 이제 오히려 도한에게 칼이 되어 날아왔다.
시한폭탄을 떠안고 지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편안한 만큼 자꾸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든 것을 도한의 탓으로 돌렸지만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해 자신의 잘못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끝내 그를 좋아하게 된 것, 간신히 도망쳤을 때 재빨리 해외로 도망가지 않은 것, 그리고 아기도…….
“이산들…….”
이림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한은 아기의 이름이 한림이라고 했지만 이림은 사실 속으로 계속 아기의 이름을 산들로 부르고 있었다.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지만, 그 아기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떼려면 뗄 수 있었지만 그 선택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이림이었다. 가지고 싶어서 가진 아이는 아니었기에 커다란 기쁨이나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남 보듯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친부가 갖는 감정이라고 하기엔 뜨뜻미지근하고 고요한 감정이었다.
왜 지금 와서야 생각나는 걸까.
사실 알고 있다. 이제는 점점 삶을 이어 갈 의지가 사라지고 있었다. 계속되는 악몽에 갇힌 것처럼 쉼 없이 마구잡이로 몸부림쳐 봐도, 결말은 별채에 갇힌 채 끝났다.
이 짓도 벌써 6년째였다. 이제는 도한에게 감정을 표출하거나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것이 힘들었다.
이림은 새로운 삶을 위해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마무리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차륵-.
식사를 마치고 멍하니 마당 앞에 앉았다. 바닥에 끌리는 사슬 소리가 시끄럽고 소름 끼쳤지만 이내 무시하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밝은 마당은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한 것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가끔 지나가는 호랑나비와 벌들은 수많은 꽃들 사이에 파묻혀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 평화롭고 풍요로운 공기 속에서 이림은 눈을 끔뻑거렸다. 잠에 들기 직전처럼 사고가 느리게 흘렀다.
희미한 기억 너머로, 아른거리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도한과 산들이.
전자는 계속되는 후회와 미련 때문이었다.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었다면, 아니면 아예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련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기대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버린 애증의 상대를 향한 작게 남은 관심이었다.
아기는 사실 이림도 몇 번 보지 못했다. 낳자마자 서로의 얼굴을 익히기도 전에 도망쳤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참으로 미안하고 괴로워서 보지 못한 것도 있다.
그래도 여태 생각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이제는 한 번쯤 그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나중에 크면 누구를 더 닮았으려나? 내가 친부인 건 알아보려나? 알파일까, 오메가일까, 베타일까?
갑자기 속사포처럼 궁금증이 쏟아져 나왔다.
지저귀는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밝던 낮의 빛은 사라지고 노을이 창밖을 어둡게 적시고 있었다.
오랜만의 이림의 눈에 빛이 스며들었다.
이제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없다. 모든 미련은 여기서 정리하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한의 도움이 필요했다. 보면 볼수록 더 함께하고 싶겠지만, 그냥 한 번이라도 봤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한 살이라니, 자신이 그렇게 오래 떠나 있었구나.
새삼스레 다시 미안해졌으나 그만큼 궁금하기도 했다. 분명 눈은 똘망똘망하고 코도 오똑하겠지. 머리 색은 누구를 닮았을까?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아기를 보여 달라고 해야겠다.
‘마지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