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러쥐다
“왜 갑자기 그만둔다는 거야?”
일재의 물음에 이림은 그냥 웃음을 흘렸다.
지우를 데려오겠다는 결심을 한 뒤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게 사장님께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그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젊은 사람들과 좀처럼 얘기할 기회가 없었던 사장님들은 친하게 지냈던 이림을 붙잡다가 결국 마지막에 먹을 것을 한 보따리 건네며 작별했다.
이림은 찹쌀떡을 하나씩 입에 물고 신호등 앞에 서서,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냥. 할 게 생겨서.”
“뭐…… 천천히 찾아봐. 어디 나가진 말고.”
일재는 무심히 대답했지만 은근슬쩍 사심을 끼워 넣었다. 이림은 어떻게 지우를 찾을지만 집중하다 상념에서 깬 채 위를 올려다봤다.
사실 이제는 그가 친구 이상의 소중한 존재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그저 같은 과 학우들 중에서 조금 더 친한 친구 정도의 관계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유일하게 과거의 추억을 반추할 수 있는 존재였으며, 주저앉아 있을 땐 끊임없이 힘을 북돋아 주는 사람이었다.
만약 자신이 도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림은 할 일이 있었고, 이미 한 번 에둘러 거절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나 보다. 가끔 제게 비추는 그의 감정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이림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괜히 먼 산을 바라봤다.
멀리서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은 조급히 발을 움직였다. 그에 맞춰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깨지며 둘은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커다랗고 검은 인영이 이림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는 이림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뜨였다.
“헉……!”
시야를 가로막은 검은 인영은 화들짝 놀라서 자지러지는 이림을 보고 당황한 듯 뒷걸음질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바뀐 신호를 보고 급히 뛰어오다 간신히 이림의 앞에 멈춰 선 듯했다. 고개를 숙인 남자는 급히 도로를 건넜다.
이림은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일재는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으로 끼어들긴 했지만 어떤 접촉도 없었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얼굴은 칼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저기서 좀 쉬다 가자.”
둘은 바로 옆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비틀거리는 이림을 부축해 앉힌 일재는 눈앞의 그를 기민하게 살폈다.
해가 져 어두컴컴한 공원은 서늘한 날씨까지 겹쳐,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림은 금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등을 토닥이는 따뜻한 손에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일재를 바라봤다.
“미안……. 나 때문에 놀랐지.”
“엄청. 근데 왜 그랬는진 안 물어볼게.”
“……고마워.”
“그나저나 경비실은 가 봤어? CCTV 보니까 뭐가 찍힌 거야?”
“…….”
이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흐린 CCTV에 찍힌 남자는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장한 상태였다.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까지 낀 모습은 도저히 누구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단침입을 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마주친 것도 아니었다. 누군지 신원도 불명확한 인물의 사진 한 장 받은 것을 제외하고,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심각한 사람은 이림 한 명뿐이었다. 물론 이 일을 알면 일재가 난리를 치겠지만 숨어 사는 마당에 뭘 어쩌겠는가.
누가 이 짓을 했는지 너무나 명확해서 이림은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이림에게 보내는 경고장이었다. 여기에 반응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강한 스트레스로 머리가 마비된 이림은 상황을 자꾸 피하기만 했다.
이림은 허공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는데 불안하던 심장 소리는 잦아들고 흐릿한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 달빛이 드러나기 전 마지막 빛무리가 구름 저편에서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림과 일재가 있는 곳은 새벽 밤처럼 깜깜하기만 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마저 사라진 이곳은 왠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낯설고 음산한 분위기가 흘렀다.
옆에 일재가 있으니 그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표정하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보살펴 준 그는 어느새 이림의 마음을 많이 열었다. 방금도 그가 없었다면 그대로 쓰러져 벌벌 떨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의 그림자는 떨쳐 내지 못했나 보다.
미세하게 턱을 떠는 이림을 본 일재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눈을 크게 뜬 이림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순간 텅 빈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일재를 좋아하는 걸까.’
그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고 정의하기에는 현재의 상황이 너무나 불안하고 정신없었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심장이 격하게 반응하는 것은 확실했지만 단순히 접촉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새카만 눈은 연한 가로등 빛에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이 천천히 감기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걸까.
아니, 갑자기가 아니다. 어렴풋이 일재가 당기고 있다는 것을 이림도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조심스럽고 미약해서 긴가민가했을 뿐이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얼굴을 맞댄 그들은 곧이어 다가올 온기에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엄청난 진동과 함께 굉음이 울렸다.
이림이 눈을 번쩍 뜨자, 바닥에 쓰러진 일재와 그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두르는 이도한이 보였다.
상황이 납득가지 않아 일재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 도한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세 번째 주먹질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재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눈을 길게 찌푸리고 몸을 비틀던 일재가 도한이 방심한 틈을 타 반격을 시도했다. 순간적으로 상체에 힘을 주고 이도한의 멱살을 잡고 끌어 내리려 했지만 멱살을 잡아 잠깐 목이 졸린 도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굵은 일재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잡자 도한은 악력에 손을 편 일재의 손을 내치고 다시 주먹을 들었다. 일재의 코뼈가 내려앉고 입에서 핏덩이를 뱉을 즈음 이림이 무작정 둘 사이에 몸을 집어넣었다.
“이도한! 그만해, 그만! 제발!”
“뭘 그만해?”
그와 눈을 맞춘 도한의 안광은 형형하다 못해 짐짓 광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네가 하라고 했잖아.”
내가 하라고 했다니.
이림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하지도 않은 말도 지어내고 있었다. 화가 난 이림은 크게 소리쳤다.
“내가 언제? 내가 언제!”
그는 그 말에 잡고 있던 일재의 어깨를 놓았다. 동시에 일재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곳에 시선도 주지 않은 도한은 점점 그에게 다가갔다. 겉으로 봤을 땐 짐짓 부드러운 인상이었던 얼굴은 어디로 사라지고, 스트레스로 푹 들어간 눈두덩이가 더욱 날 선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몸을 굽혔던 도한이 일어서자 이림의 얼굴에 그림자가 질 정도로 키 차이가 났다. 게다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다가오자 겁을 먹은 이림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언제 그랬냐고.”
“오…… 오지 마.”
“몇 번이나 기회 줬는데. 다른 알파 품에 기어들어 가?”
“…….”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네가 이 모든 일을 시킨 거나 다름없다고.”
도한은 우뚝 멈추고 사시나무처럼 떠는 이림을 보고 작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저도 모르게 작게 도리질 치는 이림의 가까이 다가간 도한은 손을 올렸다.
“……!!!”
손을 올리는 도한을 보고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은 이림은 제 품을 뒤지는 손을 느끼곤 눈을 떴다.
그의 품에는 지갑이 있었다. 작은 지갑은 예전에 구제 가게에서 산 이름 없는 지갑이었다. 마치 자신의 지갑처럼 꺼내 연 도한은 그 안에 있던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그건……!
접힌 사진을 펼치자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얹혀 사는 입장에 일재의 방 안에 저런 사진을 두는 것도 꺼림칙했고, 요즘은 떠날 생각에 침대 밑에 뒀던 사진을 지갑에 옮겨 넣었었다. 그걸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딱하게 골목에 기대 그 사진을 보는 도한은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덜덜 떠는 그를 무심히 보던 도한은 다시 시선을 내려 사진을 들여다봤다. 사실 이 사진은 충동적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화풀이로 남자를 패다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이림이 다시금 생각나 술에 취해 찍은 것이었다.
분명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이것을 보고 겁을 먹든 걱정을 하든 해서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도한이 몇 달 만에 찾은 이림은 화사한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비록 이름도 없는 옷을 입고 소박하게 장을 보며 돈에 전전긍긍했지만, 도한과 있을 때보다는 훨씬 표정도 다양했다. 게다가 불행히도 정일재와 만나면서 예쁘게 살도 올라 스무 살 때보다 더욱 빛나 보였다.
솔직히 배알이 꼴렸다.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 몇 년간 노력한 자신의 앞에서는 무표정, 혹은 눈물 바람이더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열성 알파 앞에서는 그가 무슨 말만 꺼내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패배감은 둘째 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힘들었다는 것을 몰랐던 게 아니다. 친구와 가족은 물론 학업까지 중단됐으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잘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모두 잊고 살 수 있도록, 자신만 생각하도록 만들 자신이 있었다. 친구든 가족이든 끊어지면 남인 것이다. 당연히 초반에는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만든 별채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며 행복을 느끼리라 장담했었다.
그런 믿음과 자신감이 모두 부서졌다. 제가 믿고 있던 것이 착각과 오만이었음을 인정하는 건, 도한에게 더없는 고통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 사진을 보고 제게 온다면, 눈 감아 주겠다고 이를 갈며 이 사진을 보냈다.
하지만 도한에게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배신이었다.
이전까진 그나마 간신히 일상을 붙잡고 있던 그는 이림이 일재의 집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뒤 미쳐 갔다. 회사는 나가지 않았고 그나마 신경 쓰던 아기의 존재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왜 그가 나갔으며, 왜 돌아오지 않는지 재고 따지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상처받은 가슴에는 오직 격정만이 몰아쳤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림이 제 손아귀에서 도망치고 다른 남자의 집에 들어갔다. 제 잘못과 이림의 잘못의 경중을 따지던 그는 불문율을 깨려 하는 이림의 행동에 심한 배신감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 억지에 화를 내는 것도, 때리는 것도 상관없었다. 아무리 무모한 부탁을 해도,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일을 저질러도 기꺼이 받아 줄 수 있었다. 게다가 만약 그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이뤄 준다면. 저지른 곤란한 일을 해결해 준다면 진정으로 선택받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약속만 지킨다면 이림은 도한을 통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그의 열망을 채워 주기 위해 가진 돈을 모두 잃고 거렁뱅이가 되어도, 모두에게 손가락질받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 약속을 깨 버리고 있었다. 그것이 도한을 미치게 만들었다.
사실 이 생각은 너무나 감정적이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남들과 다른 커다란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넘치도록 풍요롭게 살아온 만큼 제 할 일을 수행해 나가야 했다. 게다가 이 정도 부라면 평범한 재벌 집 자제처럼 살아도 되지만 도한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려면 지금 당장 정신을 차리고 이림을 버려야 하건만, 자꾸만 이런 한심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모든 것을 버리면, 네가 올까?
스토커처럼 뒤를 쫓으며, 자신 없이도 즐거워 보이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하루 종일 그를 감시하다 집에 들어가는 이림을 보고 차에 탈 때면 그 자리에서 담배 한 갑을 다 피웠다.
담배를 다 피우면 새벽에 돌아와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아무리 회사에 가지 않더라도 중요한 일은 처리해야 했다. 그것은 수십 년의 교육에서 비롯된 습관 같은 것이었으며,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를 쫓아다니면서 항상 분노가 치밀었지만 가끔 그 한심한 짓을 끝내고 텅 빈 집에 들어오면 밀려오는 무력감과 슬픔에 잠식되었다.
난폭해지는 도한을 보다 못한 유모는 아기를 데리고 나간 지 오래였다.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은 분노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를 여러 번. 이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술에 절어 쓰러지거나, 도망자들을 샌드백 삼아 폭력을 휘둘렀다. 비서는 그런 일에 직접 가담하면 위험하다고 걱정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주먹을 날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끝내 공원에서 입을 맞추는 그들을 본 순간, 도한은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도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통렬한 감정이 내리꽂혔을 뿐이다. 그 생각을 끝으로, 머리가 어떤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정일재에게 달려들었다.
두려움에 몸을 떠는 이림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공원 인근에 주차된 차에 태운 도한은 그대로 차 문 전체에 잠금장치를 걸었다. 방금 전까지 어느 타이밍에 문을 열고 도망갈지 고민하던 이림은 잠금장치가 닫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출발한 도한은 빨간불에 멈춰서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조용한 밤길에 세워진 차는 도한의 차가 유일했다. 외로이 깜빡이는 신호등 불빛을 바라보던 이림은 앞을 바라봤다.
적지 않은 피가 묻은 손으로 담뱃갑을 만지니 하얀 바탕에 피가 묻어났다. 마음이 급해진 이림은 문고리를 흔들다 앞좌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시 그곳으로 끌려가기 싫었다. 저 잠금장치를 풀든, 도한의 머리통을 깨든 해서 이곳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한 번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빨간불이 된 지금이 기회였다.
그러나 이림의 손이 앞으로 뻗어지기 전에, 담배를 피우던 그가 뒤를 돌았다.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아무리 한밤중이고 주변에 인기척이 없다지만 납치를 하고 있으면서도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어둠 속에서도 훤히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친 이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을 내민 채 굳었다.
그 행동을 빤히 본 도한은 씩 웃으며 말했다.
“운전자 함부로 치면 너도 죽는다?”
아까 일재의 주먹에 스쳐 피가 맺힌 뺨을 움직여 개구쟁이처럼 웃은 도한은 초록 불로 바뀌자 금세 전방을 주시하며 차를 움직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차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좌석으로 몸을 붙인 이림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괜히 그의 말에 불안해져 안전벨트를 멨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도한을 조심스레 관찰했다. 달리는 차 안으로 바람이 들어오며 도한의 머리칼을 간지럽히고 빠져나갔다.
무표정한 모양새였지만 핸들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건드리는 모습은 숨길 수 없는 본심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아까까지는 죽일 듯 사람을 몰아붙이더니, 갑자기 돌변한 모습은 이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감정조절이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자신이 아는 이도한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어느새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 도한의 눈치를 살피던 이림은 조심히 물었다.
“지우는 어떻게 됐어?”
“…….”
물음을 던짐과 동시에 그의 얼굴이 굳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지만, 그는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게 궁금하긴 했나 보네.”
이림은 서늘한 분위기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네가 도망가서 그런 것이라고, 너만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이라고 다그치는 듯했다.
할 말을 찾던 이림은 결국 체념한 채 물었다.
“살아는 있는 거지……? 그것만 대답해 줘.”
“흠…….”
도한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매달리는 이림이 얼마 만인지. 추잡하지만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뜸을 들이며 이림을 애태우자 백미러로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도한은 선심 쓰듯 말했다.
“너 하는 거 봐서.”
“뭐?”
“이제 내려.”
언제 도착한 건지. 한밤중에도 낮처럼 환한 저택이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있었다. 몇몇 방을 제외하고 온통 밝아 이림은 눈을 찡그렸다.
도한은 주차 후 가타부타 말없이 이림의 어깨를 잡고 끌어 냈다. 질질 끌려간 이림의 앞에 보인 것은 커다란 대문이었다.
커다란 눈에 노란 불빛이 반사되어 반질거렸다.
“여긴…….”
발을 떼지 않으며 멍하니 커다란 문을 올려다보는 이림을 흘끗 본 도한의 얼굴이 냉소로 물들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일 뿐이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이림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항상 여기로 다니고 싶어 했잖아. 소원 좀 풀어 줘야지.”
“뭐? 잠깐……!”
둘은 한동안 작게 몸싸움을 했다. 등을 미는 도한과 발끝에 단단히 힘을 주고 선 이림 사이에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 이림의 얼굴이 발개졌다.
이럴 상황이 아닌데도 계속 숨으려는 이림의 등과 어깨를 붙잡고 앞으로 떠미는 도한의 입가에 미소가 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 옆에는 양쪽으로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단단히 무장한 알파 둘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은 둘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석상처럼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건 누가 봐도 모른 척하는 모양새였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둘의 모양새는 마치 연인이 의미 없는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당황스럽고 이상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을 붉힌 이림이 아차 하는 사이, 두 사람은 문 앞까지 당도했다.
어느새 웃음기를 지우고 문을 연 도한은 쏟아지는 빛을 느끼며 이림을 그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었다.
“…….”
순간, 커다란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거대한 저택은 다섯 개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요리를 하거나 서류를 옮기고 소독된 청소 도구를 옮기던 고용인들은 정문이 열리는 것을 느끼며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의외의 얼굴이 보여 낯을 굳혔다.
벌써 이곳에서 4년째 일하는 성희는 뒤를 돌아 바닥을 닦다가 서늘한 분위기에 뒤늦게 일어섰다.
그리고 뒤를 바라보자 왜 이런 분위기가 흐르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망갔던 정부가 다시 돌아왔다.
뻘쭘하게 서 있던 이림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에 얼어붙었다.
“…….”
그동안 도한의 등쌀에 호되게 당한 고용인들은 대부분 아닌 척 그를 흘겨봤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아는지 모르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이를 감상하던 도한은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멈칫거리던 이림은 팔을 잡고 끄는 도한의 등 뒤에 딸려 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꽤 주눅 들어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림을 뒤돌아본 도한은 이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다 성희와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하고 서늘한 눈빛을 정통으로 맞은 성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성희를 제외하곤 그가 저 멀리 사라져 자취를 감출 때까지도 누구 하나 이림을 걱정하거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들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눈치를 보는 성희의 옆에서 벌써 무리를 지은 이들은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오. 드디어 왔네.”
“그러게요. 진짜 다음에는 큰일 날 것 같아요.”
“그런 소리 하지도 마. 끔찍하니까. 난 이해가 안 돼. 어차피 다시 붙잡혀 올 텐데 뭘 하러 그렇게 애를 쓰는지.”
“솔직히 민폐예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다 성희를 바라봤다. 성희는 우물쭈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별채 청소하시는 분이 무슨 물건을 치웠다고 그대로 내쫓은 거 봐요. 어휴 무서워서 일하겠나.”
성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그 일은 작은 도련님이 잘못한 건데 왜 이 타이밍에 얘기가 나온 건지 모르겠다.
고용인들은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이림 때문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림이 집을 나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은 맞다. 하지만 이림이 도망가도록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은 작은 도련님이었다.
다들 그것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성희는 알 수가 없었다.
성희는 한숨을 삼키며 복도를 바라봤다. 자신조차 이림을 동정하는 건지, 그가 벌이는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이림을 탓하는 건 아주 잘못된 일이었다.
성희는 주변을 둘러봤다. 작게 욕을 뱉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작게 웃는 사람들까지. 성희는 무방비한 그들의 모습에 눈을 좁혔다. 사실 도한의 등쌀에 밀린 건 이들이 아니었다.
아직 이곳에서 일한 지 5년이 되지 않은 고용인들은 주로 잡일이나 보조를 맡기 때문에 도한과 마주칠 일이 없다시피 했다. 실질적으로 도한을 만나는 이들은 그들의 상사였다. 이미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한 이들은 말을 아끼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그들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이 저택의 실질적인 주인은 이도한이었기에, 단지 자신들의 상급자로부터 그의 앞에서 조심을 하라는 주의를 여러 번 받았으니 긴장하고 일했을 뿐.
이곳에서 정말로 도한과 대화를 해 본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상급자들은 이림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이미 별채로 달려가 분주하게 준비하느라 이런 상황을 알지 못했다.
남들보다 유난히 현명하고 눈치가 빠른 성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어디서 일을 하든 입조심을 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이런 기본 중의 기본조차 무시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아까 정면으로 마주쳤던 도한의 눈빛은 때를 기다리며 숨죽이던 짐승처럼 느껴졌다.
참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방금 전까진 망신을 주기 위해 그들의 앞에 이림을 세워 뒀으면서, 뒷말을 하는 건 용서하지 않는 그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순간, 예전에 그의 선임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냥 생각하려 하지 마. 그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곳에서 일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성희는 말없이 허리를 굽혀 바닥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