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홀로서기
그 사이, 이림은 돌고 돌아 포천으로 갔다. 중간중간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차를 갈아타기도 했다. 길어야 두 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꼬박 7시간이 걸렸다.
기진맥진한 이림과 다르게 운전사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운전을 했다.
이림이 도착한 곳은 시내에서 꽤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 13층 정도 되어 보이는 아파트가 단지를 이룬 곳은 가끔 자동차나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가 나는 것 외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림은 주춤주춤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도어락 번호, 주택 사용 기간, 주의사항 등을 읊어 주고 떠났다.
텅 빈 집 안에 남은 이림은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여름이라 그렇게 냉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추웠다. 외로움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그는 낡은 인조 가죽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뭐지……. 나…… 뭐 하는 걸까. 여기서.”
거기서 나오면 춤이라도 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다 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까?
혼자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잠깐 여행을 온 것처럼 홀가분하지만 휑한 느낌이었다.
저 밖에서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까지 선명했다. 이림은 왠지 듣기 싫어져서 몸을 모로 누이고 베개로 귀를 짓눌렀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이림은 배고픔에 눈을 떴다. 이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아도 삼시 세끼 맛있는 음식이 나왔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냉장고에는 1리터짜리 물병 몇 개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활비 봉투를 열어 보니 대략 오천만 원 정도 있었다. 월세나 관리비 등 집에 들어가는 돈을 낼 필요는 없었지만 식비에 대한 지출은 꽤 나갈 것 같았다.
일 년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림은 먼저 편의점과 마트가 있는 곳을 알아보기로 했다.
일단 벌써 절반은 지워진 손바닥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옮기고, 지도로 주변 마트를 검색하니 여러 곳이 나왔다. 편의점은 걸어서 5분. 대형 마트까지는 15분.
일단 배고파서 걸어가다 죽을 것 같아 편의점에 들렀다. 아직 날이 더워 얼음팩에 음료수를 넣고 쪽쪽 빨며 마트로 향했다. 늦잠을 잔 자신과 다르게 세상은 벌써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전 10시. 사람들은 가게 앞을 비질하기도 하고 물건을 배달하느라 카트에 짐을 한가득 싣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림은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마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단하게 라면과 즉석 밥, 냉동식품 몇 개를 샀다.
갈 때는 손이 가벼워서 몰랐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꽤 멀었다. 낑낑거리면서 두 손 가득 짐을 가져온 이림은 집에 오자마자 녹초가 되어 버렸다. 마트 배달 서비스가 있다는 것은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다.
아직 채 몸이 풀리지 않은 채라 머리가 핑핑 돌고, 가끔 조금만 힘든 일을 해도 휘청거렸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문득문득 서러워져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까. 이림은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집 안은 점점 쓰레기와 먼지가 쌓여 갔다.
머리는 이 더러운 집안을 치우자고 비명을 질렀지만 왠지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이 웃는 소리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무엇 하나 이림의 시선을 끄는 게 없었다. 그렇게 시체처럼 누워 있던 중, 티브이에서는 예능이 끝나고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다큐멘터리 안에는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서 멍하니 시간을 죽이는 자신과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내 동기였던 애들은 졸업했겠지……. 취업도 했을 거야. 수민이는 외국 나갔다고 했고…… 일재는…….’
“맞다. 일재 전화번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속에서 그의 전화번호가 생각났다. 급하게 끼니를 때우고 입을 옷을 사고 밖에 나갈 때마다 잔뜩 주변을 경계하면서 살다 보니, 그의 전화번호가 있는 것을 까먹었다.
휴대폰을 열고 그의 전화번호를 매만졌지만 차마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날 뭐라고 생각할까. 갑자기 왜 사라졌냐고 물을 텐데 뭐라고 해야 하지. 아니, 애초에 날 만나고 싶어 하긴 할까?
그런 걱정이 들자 전화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지만 일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림은 조금 안심이 됐다.
지우는 어떻게 됐을까. 누구보다도 가장 걱정이 되는 사람이었다. 저와 제일 마지막까지 있던 사람이고, 안 그래도 이도한이 못마땅하게 여기던 친구였는데.
다 알면서도 도망친 자신이 할 걱정은 아니었다. 그렇게 지우를 희생시키면서 얻은 자유인데 이렇게 멍하니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그제야 용기가 생긴 이림은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여기저기 일할 곳을 알아봤다. 은행 계좌를 만들어야 하거나 계약서를 써야 하는 곳이면 모두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나왔다. 매니저나 사장들은 그런 행동을 하는 이림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이림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사흘 내내 퇴짜를 맞은 이림은 터덜터덜 편의점을 나왔다. 은행 계좌가 없다는 이림을 수상하게 보던 점장은 손을 내저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계좌가 쓰이지 않는 거래는 거의 없었다. 월급뿐만 아니라 물건을 주문하거나 음식을 사 먹을 때도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본인 명의의 계좌였다.
이대로라면 5년은커녕 정말 1년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하아…… 어떡하지.”
그렇게 터덜터덜 걷다가 목이 말라서 주변의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요즘 개인 마트들도 편의점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였는데 여기는 옛날 문방구 느낌이 났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가게였기에 신기한 마음에 여기저기 둘러봤다. 불량식품을 팔기도 했고 노트북이나 연필을 팔기도 했다. 한편에 진열된 과자 몇 개를 집어 들었지만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길 잠시. 고민하던 이림은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
“저기요! 계세요?”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과자를 내려놓은 뒤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카운터 뒤에서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아이고, 학생. 미안해요.”
“아, 아뇨.”
“계산해 줄게. 아- 우리 할멈 다리 좀 주물러 주다가. 몸이 안 좋아서 말이야.”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서글서글한 얼굴로 과자를 계산하더니 가격을 말했다. 포스기로 찍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계산기와 암산에 의존한 계산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어. 그려, 그려. 나도 이제 몸이 예전 같지가 않고 그래서 매번 가게 문 여는 게 힘드네. 확 접어 버릴까 싶기도 하고.”
사장은 피곤하다는 듯이 어깨를 돌리며 카운터 의자에 앉았다. 나온 지 1분도 안 됐는데 벌써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눈빛이 역력한 얼굴을 보던 이림은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그럼 혹시 제가…… 해도 될까요?”
“뭐어?”
“아…… 저 일 년 이상은 할 수 있구요. 아르바이트 경력도 많아요. 그리고 또…….”
“미안하지만 학생. 우리는 시급 쳐줄 돈도 없어. 알바라는 걸 써 본 적이 없어서 그, 그 뭐냐. 근로 계약서……? 보험? 어유. 머리 아파. 머리 아파.”
이거다! 이림은 최대한 흥분한 티를 내지 않고 고민하는 척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결심했다는 듯 비장하게 말했다.
“전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그냥 주고 싶으신 대로 주시면 돼요. 돈도 그냥 현금으로 주세요.”
“뭐?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세상 돌아가는 귀가 어둡다고는 하지만, 그럼 큰일 나는 거 알어.”
그렇게 사장은 몇 번 더 거절했지만 완강한 이림의 태도에 결국 승낙했다. 대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카운터만 보는 것으로 합의를 보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사실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안정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매달 꾸준히 돈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이림의 마음에 안식이 찾아왔다.
***
이림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출근을 했다. 낡은 가게 앞을 쓸고 가끔 먼지가 쌓인 곳은 쓸어 냈다. 사장은 하지 말라고 꾸짖었지만 그냥 몸을 움직이는 게 더 좋아서 멈추지 않았다.
3주 만에 뵌 사모님은 사장님과 달리 느릿하고 조용했지만 푸근하고 따뜻한 인상이었다. 가끔가다 직접 담근 김치나 과일을 썰어서 주셨다. 이런 인정과 애정이 고팠던 이림은 거절하지 않고 매번 맛있게 먹었다.
매일 가슴을 쥐어짜 내는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는 정체된 삶을 살아갔다. 카운터에서 저 멀리 햇살이 비추고 새가 가는 다리를 움직이며 먹이를 주워 먹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이 다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어쩔 때는 꿈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가끔 쑥 꺼진 배를 바라보기도 했다.
벌써 이곳에 온 지 한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매번 불쑥 그가 나타나 자신을 끌고 갈 것 같은 악몽에 시달렸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잘 살고 있으려나…….”
아직도 많이 미운 사람이라 행복까지는 빌어 주지 못하겠지만 태어난 자식을 위해서라도 제정신 좀 차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도한을 생각하며 멍을 때리다가, 어두워지는 하늘 색을 보고 서둘러 마무리를 했다. 딱히 뭘 마무리할 것도 없었지만 10만 원 정도 되는 매출액을 다시 한 번 계산하고 문을 자물쇠로 잠근 채 밖에 나왔다.
오랜만에 치킨이 당겼다. 이림은 골목길 옆에 있는 치킨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개인 사장님이 하는 곳으로, 옛날 양념치킨과 후라이드를 파는 곳이었다. 프랜차이즈만큼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나름 인기가 많아 주민들이 자주 시켜 먹는 곳이었다.
이림은 가는 김에 하나 살 겸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거기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어?”
“…….”
“어……?”
“…….”
검은 티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일재는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반투명한 비닐봉지에는 맥주와 마른안주 등이 들어가 있었다.
스무 살의 일재와 스물여섯의 그는 확연히 달랐다. 이림은 마치 낯선 사람을 마주친 것처럼 그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러나 자신을 보자마자 눈을 커다랗게 뜨는 그의 얼굴에, 이림은 그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야! 강이림!”
“…….”
“너 맞지? 서 봐!”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림은 멈추지 않고 뛰었다.
왜, 왜 하필 지금. 여기서?
‘어떻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는 이림을 따라 본능적으로 뛰다가 이내 멈춰서 멀어지는 이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림은 정신없이 집까지 달렸다.
그날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현관문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이불 밑에 엎드려서 벌벌 떨었다.
이제 막 안정을 되찾으려 했건만, 또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가 나타났다.
이림은 이제 다 싫었다. 친구도, 아기도, 도한도. 그냥 이 모든 게 싫고 지겨웠다.
‘날 좀 내버려 둬.’
잔잔했던 일상이 흔들리는 게 싫다. 그것이 기쁨에서 오는 흥분이든 불안에서 오는 떨림이든 간에,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지겨워졌다.
끝내는 삶이 싫어진 이림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이내 꿈속으로 도망쳤다.
‘이림아. 넌 어떤 알파가 좋아?’
‘으음……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알파요.’
‘뭐? 이럴 땐 나라고 해야지.’
도한은 드물게 짜증 난다는 얼굴로 그의 팔에 머리를 박았다. 얼굴은 불만투성이였지만 웃으며 물었다.
‘장난이에요. 선배가 제일 좋죠. 선배는요? 어떤 오메가가 좋아요?’
‘난…… 나만 사랑해 주는 오메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내 곁을 안 떠나는 그런 사람이 좋아.’
‘……뭐예요.’
이럴 때는 나라고 해야죠.
그렇게 말해야 했는데, 왜인지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림은 왠지 그 빤한 눈빛에 압도되어 시선을 피해 버렸다.
마치 자신에게 저렇게 되기를 강요하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이림의 얼굴이 굳어지자 그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장난을 쳤다.
몇 번 투닥거리다가 도한은 손을 휘젓는 이림의 손을 잡고 넘어뜨려 그 위에 올라탔다. 아프진 않았지만 갑갑해서 몸을 뒤틀었는데, 그러자 그가 코앞까지 가슴을 붙이고 자신의 눈을 들여다봤다.
육식 동물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이림은 숨을 죽이고 그 밝은 눈을 바라봤다. 햇빛에 비치니 황금색으로 빛나는 그 눈은 이림의 기분을 가늠하고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난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어.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내가 다 해결해 줄 거니까.’
‘…….’
‘지금 약속해. 평생 내 옆에 있겠다고.’
도한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은 강압적이고 터무니없었다. 평생 그의 옆에 있는다니. 도한을 사랑하는 이림이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흔한 사랑 고백이 아니라, 정말로 이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림의 대답이 늦어지자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점점 손에 힘을 주더니 마침내 이림의 손이 빨개질 때까지 잡았다. 이림은 놀라서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 아파요.’
‘아…… 미안. 미안해. 많이 아팠어?’
그는 부어오른 이림의 손목을 여기저기 들여다보며 속상해했다.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가 계속 만져 주니 아픈 것도 다 가신 것 같았다.
이림은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빼고 도한의 흰 볼에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는 그에게 수줍게 속삭였다.
‘평생 옆에 있을게요. 대신, 선배도 그 마음 변하지 마세요.’
이림은 그 말을 끝으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자신을 옥죄듯 끌어안았다.
그도 이림도 그 순간만큼은 평범한 연인들처럼 껴안고 행복하게 웃었다. 그 어떤 것도 확신은 없었지만, 도한과 영원을 맹세하는 이 순간만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눈을 뜨자 모든 것이 깨어졌다. 창 너머로는 어느새 어둠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아침 햇살을 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간을 확인하자 얼마나 오래 잤는지 출근 시간이 가까웠다. 이제 막 밖에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허겁지겁 세수와 양치만 하고 밖을 나서자 강렬한 햇빛이 눈을 찔러 왔다.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팔에 열을 내면서 신호등 앞에 서 있던 이림은 익숙한 형체를 보고 설마, 했다. 저 멀리서 장을 본 듯 두 손 가득 봉투를 든 일재가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보고 있어 자신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대로는 알아보는 건 시간문제다.
안절부절못한 이림은 재빨리 후드 티의 모자를 썼다. 그리고 최대한 고개를 숙여 지나갔다.
“…….”
다행히도 제 옆을 스쳐 가는 일재를 본 이림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다 건넌 뒤에 뒤를 돌아봤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바로 맞은편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일재를 보며 절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냔 말이야……. 어떻게!”
이림은 가게에 온 뒤에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해했다. 사장님이 갖다 주신 과일도 먹지 않고, 작은 가게를 뱅뱅 돌았다.
하필 같은 포천인 것도 모자라 옆 아파트라고?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른다지만 이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한숨을 쉬었다. 설마…… 일재도……?
“아니야. 아니야.”
“뭐가여?”
아, 깜짝이야! 이림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자그마한 아이가 불량식품 하나를 손에 쥔 채 멀뚱히 이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 미안. 오백 원이야.”
“에에…… 아저씨 이거 먹을래요?”
“응?”
아이는 두 개였던 사탕 중 하나를 건넸다. 이림이 얼결에 받자 그 애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더니 휙 나가 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서 제 엄마에게 착 달라붙은 채로 걸어가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참 귀여운 모습이었다. 이림의 손에는 포도맛 사탕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섯 살, 일곱 살쯤 될까. 내가 낳은 그 애는 저 나이가 되면 어떤 모습이려나?
의식하지 않은 궁금증이 머리를 간질였다. 염치없이 그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씩 불쑥불쑥 생각났다.
그렇게 이림은 아기 생각으로 일재의 생각은 완전히 까먹은 채로 오후를 보냈다.
***
이후로 둘은 한 달에도 몇 번이나 마주쳤다. 일재와 이림 둘 다 매일 외출하다 보니 마주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림이 열심히 얼굴을 숨기고 다니니 눈이 마주치거나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림의 착각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간단한 청소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차에 누군가 가게를 찾아왔다.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든 이림은 눈앞에 선 일재를 보고 얼어붙었다.
“어서 오세…… 아…….”
“강이림.”
이름까지 부르니 이제는 사람 잘못 봤다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가까이 오기만 하면 도망치지 바빴기에,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를 의식하는 분위기는 너무나 불편하고 어색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이림과 다르게 일재는 차분한 얼굴로 손에 든 커피 중 하나를 건넸다.
“얘기 좀 하자.”
이림과 마주 앉은 일재는 여전히 눈을 못 마주치는 이림을 빤히 바라봤다. 주눅 든 눈빛과 조금 더 성숙해진 것을 빼면, 여전히 5년 전 강이림과 똑같았다.
자신이 빚쟁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도망쳐야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일재는 한숨을 쉬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원래 여기 살아?”
“나, 나는…… 그게…… 어쩌다 보니 아는 사람이 집을 구해 줘서.”
“뭐……? 그거 아니야? 부동산 사기? 계약서 좀 줘 봐.”
“아…… 아니야! 얹혀사는 거야…….”
이림은 손사래를 치다가 고개를 숙였다. 왠지 묻지 말라는 것 같아서 일재는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닫았다. 하지만 이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선 부탁했다.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뭔데?”
“나 봤다는 거 어디서도 얘기하지 말아 줘…….”
“……너 어디 쫓기냐?”
일재는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묵묵부답인 이림을 보고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됐다, 됐어.”
“…….”
“학교는 왜 안 나왔어? 이것도 말 못 해 줘?”
“그, 그게.”
“그럼 내 얘기 해 줄게. 난 작년에 졸업했고, 올해 조교로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야. 근데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잠깐 내려왔고. 여기서 지낸 지 이제 두 달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6년 동안 사라져 있던 널 여기서 만났는지는 의문이지만.”
“……너 은근 뒤끝 기네.”
이림은 소심히 중얼거렸다. 소심하지만 할 말 다 하는 모습에 일재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 편안해진 표정을 본 이림은 조용히 속삭였다.
“너한테 말해 줄 수 있는 건 얼마 없지만…… 의도해서 여길 온 건 아니야. 그리고 나 불편하면 내가 피해 다닐 테니까…….”
“누가 그러래?”
“……어?”
일재는 조금 후련한 얼굴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졌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봤지만 딱히 설명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일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지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번호.”
“응?”
“빨리.”
이림은 얼결에 제 번호를 찍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자리를 끝내기 위해 넘겨준 이림은 제 핸드폰의 진동에 아뿔싸 했다.
허겁지겁 일재가 보지 못하게 휴대폰을 열었지만 숨기는 듯한 행동을 보다 못한 일재가 머리를 들이밀어 휴대폰을 바라봤다.
이림의 핸드폰에는 자신의 전화번호와 함께 [일재]라고 적힌 이름이 나왔다.
“뭐야. 내 번호 있었네……?”
“…….”
죽고 싶다. 이림은 놀란 일재 옆에서 책상에 얼굴을 처박았다.
***
그 시각, 도한은 밀려오는 햇살을 느끼며 천천히 일어났다. 두통에 머리를 짚는 도한은 밤새 밤을 설쳐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옷은 잔뜩 흐트러진 상태였다.
새벽 내내 뒤척인 탓에 두통과 메스꺼움이 몸을 괴롭혔다.
처음 한 달간은 이림을 찾아야겠다는 집념에 잠을 자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두 달이 넘어가면서 기절을 해서라도 자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평생 기척에 예민하긴 했으나 여태 한 번도 잠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의사는 심리적 불안과 관련이 있다고 했지만 그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결국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지만 그마저도 과다복용하자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은데 세상은 그런 자신을 고문하듯 계속 현실로 이끌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샤워를 끝낸 채 거실로 나가자 술병과 깨진 유리잔으로 더럽던 거실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발작하듯 가끔 난동을 부리는 도한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유리로 만들어진 식기는 모두 박살 나 별채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림이 돌아왔을 때 최대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회사는 계속 나갔지만, 언제 이 분노가 터질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
“쉿, 쉿! 저기 상무님 나온다.”
“헉…….”
삼삼오오 모여 커피 타임을 즐기던 직원들은 숨을 참으며 그가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굳이 그렇게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저 성질머리랑 눈을 마주치기가 싫었기 때문에 다들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역시나 오늘도 도한은 눈길 하나 안 주고 직원들 곁을 지나갔다. 서늘한 가을바람보다 더욱 차가운 도한이 멀어지자 다들 휴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아유. 힘들다, 힘들어. 이러면서 회사 다녀야 하나.”
“작년에는 우리 소희 씨 들어왔을 때 이만한 회사 없다고 찬양을, 찬양을 하시더니.”
이 대리의 말에 박 부장은 머쓱하다는 듯이 턱을 긁적였다. 멋모르고 같이 숨죽이던 1년 차 사원 김소희는 이때다 싶어 물었다.
“왜요? 저 상무님 인터넷 기사 말고 실물로는 처음 봐요. 엄청 잘생기셨다-.”
“유부남이다. 그리고…… 에휴.”
“뭐가요! 네?”
박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을 싸게 놀려 봤자 제게 득 되는 것은 없다.
몇 년 전, 재벌 집 아드님이 낙하산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에 회사 분위기는 오래도록 술렁였다.
입사와 동시에 회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도한은 회사 복지와 연봉에도 신경을 썼다. 여전히 곱지 못한 시선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직원은 만족하면서 다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직급이 낮은 평사원들의 입장이었고, 그에게 보고서를 올리거나 함께 회의에 참여하는 간부들은 죽어 나갔다. 여지껏 대충 자리에서 시간이나 때우다 퇴근하기를 반복했던 사람들은 그가 들어오면서부터 신입사원만큼이나 기가 바짝 서 있었다.
일 욕심이 많은 박 부장은 이런 변화가 아주 반가웠다. 하지만 요즘 들어 도한의 그 날카로운 기세가 극에 달했다. 도한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다들 말 한마디 못 걸고 고개만 숙이기 급급했다.
‘나도 다르진 않지.’
도한이 새로 뽑은 비서도 몇 달 전에 비해 살이 쪽 빠졌다.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일하고 있었지만 체중이 쑥 내려갔다거나 눈 밑이 퀭한 것은 가면으로도 숨길 수 없는 부분이다.
분명 사적으로 뭐가 있는데 말이야…….
끊이지 않는 의문점들을 길게 이어 가던 그는 아침 업무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잊게 되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지나 오후 업무에 들어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기획재정과 직원들을 만났다.
“어, 두 분을 여기서 뵙네요. 근데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십니까?”
“아…… 별것 아닙니다.”
“아휴, 글쎄 황지석 팀장님이 보고 올리는 게 무섭다고 여기서 이러시고 계십니다.”
“예에?”
박 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황지석은 아니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송 부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 중에 안 그런 사람 있습니까. 그냥 후딱 다녀오세요. 전 기획서 검토를 해야 해서.”
그리고 유유히 떠나가는 송 부장을 보던 박 부장은 옆에 선 황지석을 한심한 눈으로 보다가 같이 올라가기로 했다.
어차피 도한에게 가려면 비서를 통해서 들어가야 하니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것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담소를 나눴다. 아니, 담소를 빙자한 황지석의 걱정 들어 주기가 시작됐다.
“안 그래도 이번 프로젝트 예산 잡는 것 때문에 자주 뵙는데, 요즘 들어 너무 힘듭니다.”
“그 정도로요?”
“사무실 들어가면 열에 여섯은 울면서 나옵니다. 다들 서로 떠밀기 바빠요.”
황지석은 반은 울먹이고 반은 체념한 채 멍하니 올라가는 층수만 바라봤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아는 이도한은 공과 사는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쾅-!
하지만 곧 두꺼운 벽을 뚫고 터져 나오는 굉음을 듣고 그 생각을 정정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한은 이를 갈며 일어섰다. 충혈된 눈과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보고를 들었다. 벌써 몇 달째, 이림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종적에 애가 타다 못해 인내심이 까맣게 졸아들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분명 서울 안에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더 찾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딴 개소리는 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 끝에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졌다.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지 넓은 사무실을 허리를 짚고 왔다 갔다 하던 도한은 결국 눈앞의 모든 것들을 모조리 쓸어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국내에 있다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3개월 안에는 잡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났어도 그림자 하나 찾지 못했다.
찾을 만하면 도중에 발자취가 끊기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간신히 CCTV를 돌려보면 그가 아니라 비슷한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처음에는 열이 받아 그 얼굴을 보며 욕설을 퍼붓는 등 온갖 지랄을 떨었지만, 이제는 CCTV에서 이림과 비슷한 사람을 보게 되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 흐린 화면을 빤히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이림이 아닌 사람을 한참 보다가 집에 오면 결국 예전에 녹화해 둔 별채 영상을 틀었다. 도한이 퇴근하고 술을 마시며 하는 일이라고는, 이림이 별채에서 일상을 보내는 영상을 자기 직전까지 틀어두는 것뿐이었다.
벌써 몇 달 동안 새벽까지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거의 다 찾았다는 말에 기대하고 보고를 받으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루에도 가슴이 희망과 실망으로 수십 번 널뛰기를 했다. 그것이 반복될수록 독하게 숨은 이림을 생각할수록 배신감과 분노가 쌓였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어디로 간 걸까. 누가 그를 도와준 거지? 도망을 대가로 몸을 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강이림이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도한이 그를 보호해 온 것이었는데, 이림은 멍청하게도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 불행한 세계로 도망쳤다.
자신이 만든 작은 세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순진한 이림에게는 그 너머의 세상은 이보다 더 지옥 같을 것이다.
대학교를 다닐 때 그에게 쏠리던 수많은 욕망어린 시선과 호기심. 그것은 칼 위를 지나가는 가는 실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험해 보였다.
동기들은 실제로도 그의 면전에서는 못 할 말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남발했다. 초성으로 이름을 언급하며 따먹고 싶다는 둥, 이림이 잘 때 만져 봤다는 둥 하는 개소리가 종종 올라왔다.
도한이 모두 잡아 족쳤지만 그렇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림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일단 한 번 루머가 퍼지면 얼마든지 돌아설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잘 벼린 칼날에 베여 밑으로 추락하는 순간 아가리를 벌린 이들이 그를 잡아먹었을 테니, 제가 먼저 입을 벌리고 그를 품은 것이다.
답답해도 좁은 곳에 몸을 웅크리는 만큼만 힘들 테니까.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만큼만,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만큼만 힘들 테니 자신이 곱게 대해 주면 언젠가는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것이니까. 잘해 주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몇 년 동안이나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살을 섞으며 산 자신을 버리고 갔다. 가장 큰 분노의 원인은 이런 이유였지만 순진한 이림이 무뢰한의 밑에서 고통받는 상상을 하자 참을 수 없이 괴롭기도 했다.
그 지우라는 놈이 꼬셨겠지. 아니면 누구…… 누가 있더라.
“다 족쳤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가슴에 불이 일어나니 억지로 하는 회사 일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머리는 자르지 않아 눈썹을 찔렀고 눈은 독기만 가득했을 뿐 퀭한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영화에서 불안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추해 보이진 않았지만, 광기가 흐르는 모습에 도한의 수족들은 매 순간 공포에 떨며 그가 다시 제정신을 찾기를 바라고 있었다.
벌써 외국으로 도망간 걸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깜짝 놀라 뛰어 들어와 비틀거리는 도한을 부축하는 비서를 뿌리친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누군가 있어……. 누군가 우리 둘을 방해하고 있다고.”
그는 미친 것처럼 중얼거렸다. 새로 고용된 비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미친놈은 힘도 장사라더니, 값비싼 도자기와 컴퓨터는 물론이고 성인 여러 명이 들어야 간신히 움직일 장식장도 허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간은 별채에서만 그러더니 드디어 그 지랄병이 회사까지 미쳤나 보다.
비서는 부들거리는 손과 다리를 모른 척하며 영혼 없이 대답했다. 월급이고 뭐고 그냥 이 방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분의 뒤에 계시는 분을 한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거야.”
엎드리듯 숙인 채로 굳어 있던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광인처럼 벌떡 일어나 커다란 보폭으로 다가오는 도한을 본 비서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미세하게 눈을 찌푸리는 비서를 아랑곳하지 않은 도한은 머릿속에 몇 명을 추렸다. 아버지, 조부, 그리고 정희민.
그래. 그중에 가장 유력한 사람은 정희민이었다.
“그놈한테 전화해. 지금 당장.”
뚜르르…….
희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한은 벌써 세 시간 째 신호만 가는 휴대폰을 팔 옆에 내려놓은 채 멍하니 하늘을 보다 담배를 꺼냈다.
손에 두껍게 감긴 붕대로 인해 담배를 꺼내는 손길은 투박하기 짝이 없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손등에 둘러진 붕대는 벌써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을 만하면 쉬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는 도한으로 인해 그의 손은 몇 달째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
그가 입고 있는 멀끔한 옷만 아니었다면 마당 한복판에 누워 있는 그 모습은 거리의 부랑자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노란 오후의 햇살이 도한의 얼굴에 느리게 내려앉았다. 조용히 타오르는 담배 연기를 관통해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에 가 닿은 빛의 끝에는 초점이 풀린 눈동자가 타오르고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했지만 그 홍채는 빛을 받아 황금으로 빛나고 있었다.
도한은 타들어 가는 담배를 물고 지독히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잠겨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흥미를 끄는 것도 없다. 이미 오래전 포화 상태가 된 머리는 이제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집착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이림이 곱상하긴 했지만 그다지 특출난 재능이나 미모를 가진 건 아니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오메가한테 이렇게 목메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머릿속에 보기 싫은 얼굴이 떠올랐다.
가까이 다가가면 보였던 미세한 솜털, 풍성한 속눈썹과 검은 눈망울. 좋은 냄새가 나던 목덜미. 짓궂은 장난을 치면 쉽게 열이 오르던 귓가와 볼.
세게 쥐면 허물어질 것처럼 순하고 멍청하던 강이림.
사람들에게 물어 뜯겨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제야 미안하다고 울면서 돌아와 제 무릎 아래 두 손을 모아 빌 것이다.
도한은 멋대로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훅 빨며 그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돌아오면 없었던 일로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언젠간 제 손에 의해 돌아올 텐데, 그냥 제 의지로 돌아왔으면 했다.
“도련님.”
유모는 마당 한편에서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웬만해선 성질이 사나운 이 집 남자들과는 말도 섞지 않았지만, 몇 달째 광인처럼 구는 도한을 그냥 지나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정말 얼마 안 가서 뻥, 하고 사고를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인데 이림이 도망친 이후로는 한 번도 아기 방에 들른 적이 없었다.
분명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 도한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 물려있는 담배 연기만이 정적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아드님 얼굴 한 번이라도 보셔야죠. 아기가 울지도 않고 순하답니다. 그런데 너무 순해서 걱정일 정도예요.”
“…….”
보고 싶지 않다. 도한은 꽉 막힌 회로 속에서 날것의 생각 하나를 꺼내 툭 던졌다. 자신을 닮은 것도 아니고 이림을 닮은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
또한 이림에게 버려진 또 다른 생명.
아기를 생각하면 그 여린 생명과 함께 자신 또한 버려졌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면 참을 수 없이 비참하고 분노가 끓어올라 아기까지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끝내 그의 눈이 느리게 반응하자 유모는 반색하며 아기를 데려왔다.
담배를 잔디에 짓이기고 잠든 아기를 들여다봤다. 한 올 한 올 그린 것처럼 세밀한 눈썹 아래 감긴 눈은 미동도 없었다. 가끔가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상할 정도로 얌전했다.
도한은 저도 모르게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커다란 손가락이 다가오자 불편한 듯 고개를 돌리는 아이를 보고 얼마 안 있어 손을 거뒀다.
그제야 비로소 생명의 무게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머리는 이림의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이 순간부터 그 한구석에 아기의 존재가 무섭게 뿌리내렸다.
“…….”
그 순간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기묘한 긴장감에서 벗어난 도한은 그대로 뒤돌아 전화를 받으며 망설임 없이 집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기를 본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도한이지만 유모는 실망하지 않았다.
짜증이 났는지 얼굴을 찡그리는 아기를 어르자 금세 다시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남의 자식일지언정 이리 예쁜데. 제 자식을 떼 놓고 간 이림의 심정은 상상할 수 없었다.
둘 사이의 어둡고 깊은 골은 도저히 풀릴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한쪽은 끌고 가고 다른 한쪽은 체념한 채 이끌려 갔다.
언젠가는 터졌을 문제였다. 유모는 그저 끝나지 않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이 자그마한 생명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편, 전화를 받은 도한은 방 한가운데 서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머리가 하얘지고 기대로 인해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찾았다고?”
***
이림은 신발장 앞에서 옷을 한 번 더 체크하고 밖으로 나섰다. 이곳에 온 지 벌써 4개월째였다. 처음 한 달간은 잔뜩 날을 세운 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고 할 일만 하고 다녔다.
‘무지 수상해 보였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경비원이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림이 밝게 인사 후 가방을 고쳐서 다시 메자 가방 안에 있던 비닐봉지가 작은 소음을 만들어 냈다.
사실 요즘 음식을 만드는 데 취미를 붙였다.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거나 반조리 음식만 해 먹었더니, 혼자가 되자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없어 라면만 끓여 먹었다.
그렇게 내내 인스턴트만 먹다가 배탈이 나면서 요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을 보고 직접 레시피를 찾는 게 귀찮았지만 아르바이트를 빼면 남는 게 시간이니 심심해서라도 계속하게 됐다.
처음에는 김치볶음밥, 계란찜처럼 간단한 음식만 만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 전골도 해 먹고 홈 베이킹에도 도전하고 있었다.
비닐봉지 안에는 초코 쿠키가 담겨 있었다. 가방 안에서 부서지지 않게 잘 매무새를 만지고 횡단보도 앞에 서는데, 옆에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무뚝뚝해 보였지만 웃을 때는 인상이 달라지는 일재가 모르는 척 옆에 선 채였다. 이림은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어? 일재야.”
“안녕.”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이림을 내려다봤다. 왠지 민망해진 이림은 목덜미를 만지다 가방에서 쿠키를 꺼내 건네줬다.
“이게 뭐야?”
“그냥. 쿠키…… 한번 만들어 봤어. 맛은 없을 거야.”
이림은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하며 횡설수설하다가 뒤늦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재는 망설이지 않고 비닐을 파헤쳐 쿠키를 한 입 물었다.
“……어때?”
“음…….”
일재의 눈이 시험관처럼 진중해졌다. 가늘게 좁혀지는 눈매를 보던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맛없을 줄은 알았지만 너무 적나라한 반응이다.
의기소침한 채 횡단보도를 바라보는 이림을 빤히 보던 일재는 피식 웃었다. 이림은 여전히 한순간도 표정을 숨기질 못한다.
“맛있다.”
“진짜?”
이림이 반색했다. 다행이다. 가게에 가면 나눠 드려야지. 매일 받아먹기만 하고 보답한 적은 없어서 적잖이 민망한 상황이었다.
몸도 거의 다 나았고, 몇 달 전만 해도 낯설던 이 동네에 나름 자리 잡게 됐다. 고작해야 한두 명이지만 주민들과 인사도 나누고 가끔 음식도 나눔 받았다.
이림은 슬쩍 곁눈질로 일재를 바라봤다. 이 동네에 정붙이고 살게 도와준 몇 안 되는 은인이었다. 그의 손은 지갑도 없이 비어 있었다. 일재는 요즘 들어 가끔 길에서 마주치면 자꾸만 자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줬다.
정신없이 웃고 떠들며 도착하다 보니 그가 자신을 데려다줬다는 것도 모를 때가 많았다.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뒀지만, 며칠 뒤에 다시 그와 얘기하다 보면 어느새 가게 앞까지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유 모를 우울감과 불안감이 치솟을 때 일재와 이야기하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신호 바뀌었다. 가자.”
“응.”
고개를 끄덕이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어느새 계절은 겨울로 옮겨 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옛날에 꿨던 꿈이 떠올랐다.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했더니 정말로 그렇게 됐다.
그러나 얻은 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가슴에 웅크린 검은 짐승은 몇 년째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억지로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한편을 물어뜯고 몸부림쳤다.
끝내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 거대한 몸뚱이를 데리고 다니려니 이림은 너무나 버겁고 지쳤다.
그래서 다가오는 알파들을 볼 때마다 도망쳤다. 지금은 누군가를 가슴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외롭기는 했지만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니 더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이림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일재가 뚝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이림도 하늘을 바라봤다. 음울한 구름 사이로 새하얀 덩어리가 추락하고 있었다.
“눈이다.”
이림은 코에 차가운 눈이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오늘은 가게에 조금 손님이 많았다.
많아 봤자 하루 종일 서른 명 정도 됐지만, 보통 하루에 열 명 정도 오는 것에 비해선 꽤 많이 온 편이었다. 아르바이트 일을 끝내고 일재가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승낙한 뒤, 가게 문을 잠그고 인근 고깃집에 들어갔다.
직장인들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부모들은 아이들 그릇에 작게 고기를 잘라 놓고 있었다.
시끌시끌한 고깃집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둘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보고 있으려니 그날이 생각났다.
서로의 이마가 닿을 것처럼 마주 앉아 고기를 구웠던 음식점. 술에 취한 이림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일재는 멍하니 고기를 바라보는 이림의 앞에 한 점을 내려놨다.
“먹어.”
“응……. 고마워.”
약간의 기름기와 육즙을 느끼며 고기를 씹어 삼켰다. 이림은 아무 생각 없이 먹다가 텅 빈 일재의 그릇을 보고 자신이 굽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가 구울게. 너 먹어.”
“아니야. 고생했으니까 먹어야지. 내가 할게.”
단호한 일재의 말에 이림은 어색하게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는데…….
어색함을 애써 모른 척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고기를 다 먹고 계산을 할 때도 일재가 전부 냈다. 친구 사이에 자꾸 이러니 부담스러웠다. 안절부절못하는 이림에게 ‘쿠키 줬잖아.’라고 웃으며 말했다.
서늘한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정돈하는 그의 옆모습은 또렷하고 부드러웠다. 그 순간 일재가 눈을 내리떴다.
“……!”
황급히 시선을 내린 이림을 본 일재가 작게 웃었다. 괜히 손톱 끝을 만지는 이림의 속눈썹이 길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일재가 입을 열었다.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침을 한 번 삼킨 이림은 재빨리 덧붙였다.
“근데 아직 누굴 만날 생각은 없어.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지쳤거든…….”
“……그렇구나.”
일재는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엄청 추웠던 것 같은데, 당황해서 그런 건지 오히려 열이 났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이림과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어가는 일재 사이에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이림은 이 불편함과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고 싶다.’
그의 마음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친구인 게 편했고 이미 알파에게 지독히 당한 이림은 당분간 연애를 할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이대로 평생 연애를 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임신과 출산을 겪었고, 그 아기는 지금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런 말을 어떻게 상대에게 전할까.
도한을 만나기 전에도 연애 한 번 하지 않았으니 독신으로 사는 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알아 가고 에너지를 쏟는 게 힘들었다. 더군다나 일재는 자신에게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기에.
일재는 친구로서 이림을 많이 도와주고 있었다. 덕분에 이림이 이 동네에서 겉돌지 않고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잠깐의 불같은 시간을 끝내고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았다.
현재 가족과 연락도 할 수 없고, 그나마 있던 인간관계도 지난 6년간 모두 박살 나 버려 현재 옆에 있는 건 일재 한 명뿐이었다.
이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림은 일재와 그런 불안정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딱 이 정도 거리. 일재도 눈치 없는 편은 아닐 테니 자신이 하는 말을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정적 속에 걷던 둘은 아파트 입구에서 헤어졌다.
“내일 봐.”
“응.”
이림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뒤를 돌았다. 민망함에 온몸에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애써 싱숭생숭한 기분을 떨쳤다. 일재의 마음을 안 이상, 언젠가는 마주쳤을 일이다.
이림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현관 앞에 도착했다. 키패드를 누르고 벌컥 문을 여는데, 무언가 팔랑이며 떨어졌다.
“……?”
흰 봉투가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왠지 불길함이 엄습해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
썰렁한 실외 공기가 한 차례 등을 엄습한 뒤에야 몸을 굽혀 봉투를 주웠다. 괜히 사방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들어와 봉투를 열었다.
“이게 뭐야…….”
검은 배경 한가운데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림 같기도 하고 사진 같기도 한 모습에 방에 불을 켜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
어두운 배경 속 플래시를 켜고 찍은 듯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과 입고 있는 옷이 훤히 비쳤다.
핏자국이 스며든 옷과,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뻘건 얼굴. 의자를 타고 질질 흐르는 피.
남자는 심한 폭력을 당한 듯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공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사진 때문에 패닉에 빠졌다. 누가 이런 질 낮은 장난을 치고 간 걸까.
하지만 왠지 쉽게 넘기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사실적이었다.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던 이림은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눈에 익숙한 것이 걸렸기 때문이다.
충격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다시 한 번 그 끔찍한 참상이 담긴 사진을 훑어 내렸다.
사진 속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입과 턱만 보였지만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지우가 즐겨 입던 옷이었다.
‘지우……?’
순간, 이림은 머리에 강력한 충격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
쾅쾅쾅-!
“강이림! 문 열어!”
일재는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이웃들이 몇 분째 문을 두드리는 그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그의 문을 두드렸다. 일재는 어젯밤에 이림과 헤어지고, 여느 때와 같이 다음 날 아침에 이림의 가게에 들렀다.
티 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몇 번이고 연습한 무표정은 이림이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철문을 우그러뜨릴 듯 두드린 지 10분이 넘어가자 드디어 문이 열렸다.
“이림아……?”
문을 잡고 있던 이림은 바람 빠진 인형처럼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현관에 이림의 머리가 닿기 전에 재빨리 받친 일재의 얼굴이 경직됐다.
잠시 뒤. 이림은 무거운 눈을 억지로 뜨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소리, 기계음 등의 소음이 귓가를 먹먹하게 자극했다.
멍하니 그 소리를 들으며 천장을 보다가 몸을 번쩍 일으켰다.
손목에 꽂힌 바늘, 하얀 커튼을 통해 이곳이 병원임을 인식했다.
내가 왜 병원이지. 누가 날 데려온 걸까?
“설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순간 어지러움은 가시고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만약 도한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라면 지금 당장 도망가야 했다.
허겁지겁 일어나자 손목에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겁도 없이 바늘을 뽑아 버리고 조심스레 커튼을 열었다. 몇 명의 환자와 의사를 제외하고는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환자복을 입은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나가던 이림을 본 간호사는 의아하다는 듯 소리쳤다.
“환자분. 잠시만요!”
‘보호자…… 보호자가 누구지?!’
생각나는 인물은 단 한 명. 순식간에 머리에 어제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흘러 들어왔다.
이상한 사진, 피를 흘리는 지우, 그대로 끊긴 기억과,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
머리털이 쭈뼛 섬과 동시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계속되는 악몽 속에 갇힌 것 같다.
그때, 멈칫한 이림의 뒤로 뚜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자꾸 본능은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이 이림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때, 걸음 소리가 점차 빨라지고 커졌다. 이내 그 걸음 소리의 주인공이 제 뒤에 멈춰서 팔을 붙잡아 몸을 돌렸다.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짐승의 아가리 앞에서 눈을 질끈 감는 것처럼 극한의 공포에 숨을 멈춘 이림은 익숙지 않은 페로몬을 느끼며 눈을 떴다.
가쁘게 숨을 내쉬는 일재는 황당함과 걱정을 섞은 눈빛으로 이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뭐 해?”
“아, 아…….”
일재는 그제야 안도한 이림을 데리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머리카락을 젖히고 이마를 닦아 줬다.
간호사는 그런 이림을 보다가 다시 링겔을 꽂았다.
“실신해 계셨으니까 아직 이렇게 일어서면 안 돼요.”
“네……. 죄송합니다.”
이림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적잖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
사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꽥 기절해서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공포스럽고 두려운 경험이었다.
자신을 돌려세운 일재의 얼굴을 보고 안도했으나, 지금도 가슴이 작게 두근거렸다. 도대체 그 사진은 누가 보낸 거지.
이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찾았어?”
일재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게 사장님이 너한테 전화해 봤는데 안 받는다고 하셔서 내가 와 본 거야. 네가 일하는 몇 달간 지각이나 무단결근 같은 건 안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더 걱정되셨나 봐.”
“아…… 그렇구나.”
이림은 그제야 어제 일재의 얼굴을 봤던 게 기억났다.
새벽 내내 바닥에 쓰러져 있다 엄청난 굉음과 진동을 느끼며 눈을 떴다.
참을 수 없이 메스껍고 손발에 힘이 안 들어갔지만 거의 기어가다시피 문 앞으로 다가간 뒤 현관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이어폰을 꽂은 것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게 들리던 와중, 어렴풋이 다급한 일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에 휩싸인 그의 목소리를 듣자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문을 열었고, 그 이후 기억이 끊겼다.
곰곰이 회상하던 이림의 옆에 있던 일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다행히 몸에 무슨 이상이 있는 건 아니래. 스트레스와 피로가 겹친 것도 있고…… 갑자기 무슨 충격받을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
“도대체 무슨 일인데?”
“…….”
이림의 입이 달싹거렸다. 누군들 말하고 싶지 않을까.
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벌써 몇 번이나 설명 없이 회피하려니 진땀이 났다.
이림 또한 도한과 있었던 일, 도망치게 된 정황 등을 전부 얘기하면서 이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얼마나 설명할 것이며, 과연 이걸 말해도 될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벌써 몇 명의 사람이 가담된 이 일을 한순간의 실수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진을 이도한이 보낸 것이라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괜히 관련되지도 않은 그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결국 입을 닫아 버린 이림이 답답하다는 듯 팔짱을 낀 일재는 미간을 좁혔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환자를 더 닦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어제보다 훨씬 더 초췌해 보이는 이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결국 일재는 고민 끝에 한 가지를 제안했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이림은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혼자 있어도 돼.”
“너 상태를 보고 말해. 갑자기 집에서 쓰러졌으면서 그런 얘기가 나와?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삐쩍 말라서 죽을 것 같더니, 지금 딱 그 상태야. 너도 비밀 얘기 안 해 주니까 한 번쯤은 내 부탁도 들어줘.”
“…….”
말도 안 되는 고집이었지만 이림은 괜히 미안해져서 안절부절못했다.
매섭게 바라보는 일재의 눈빛에 결국 그 제안을 승낙했다.
***
의사로부터 이상 없다는 확답을 받은 다음 날, 둘은 퇴원했다.
정문 앞에서 칼바람을 맞던 일재는 뒤를 돌아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주차한 차 가져올게.”
이림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는 일재를 보던 것도 잠시. 이림은 눈만 굴려 좌우를 살폈다.
잘 포장된 도로에는 수십 대의 차가 다니고 있었고, 몇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무심한 낯으로 병원에 들어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웬만한 회사 건물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청결하고 흰 병원이었지만 병원을 둘러싼 음울한 기운은 어떤 것으로도 숨겨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이림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
겨우 긴장을 푼 채 한숨 돌린 이림은 한구석에 박혀서 팔짱을 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불과 이틀 전 그런 일을 겪어서인지 도저히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차로 이동한 뒤 도착한 그의 집은 주인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모든 것이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텅 빈 듯한 도한의 집과는 달리, 여기저기 생활감이 있었다. 모던한 소파와 벽걸이형 텔레비전 외에도 카펫이나 침대 등 대부분이 베이지 톤으로 맞춰져 있어서 부드럽고 아늑해 보였다.
하지만 협소하거나 낡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살기에는 좀 넓은 감이 있었다.
“신발 벗어.”
바로 옆에서 따뜻하고 낯선 페로몬이 훅 끼쳐 오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이림은 낯선 알파의 집에 들어섰음을 인식했다.
알파고 뭐고 일단 사방을 경계하느라 언제 차에 탔고 얼마나 이동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차가 도로변에 정지했을 때도 금방이라도 누군가 창문을 부수고 자신을 밖으로 끌어 내릴 것 같았고, 일재의 얼굴이 도한의 얼굴로 바뀐 채 보이기도 했다.
현관이 닫히기 전까지 털을 바짝 세운 동물처럼 경계하던 이림은 방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이곳이 환상이 아닌 현실임을 인식했다.
일재는 잠깐 눈썹을 올리다가 내색하지 않으며 신발을 정리한 채 들어갔다.
“따뜻한 거 줄까?”
그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이림은 소파에 앉았다.
겨울 공기를 끌어온 이림의 몸은 그가 준 코코아를 마시고 나서야 훈기가 돌았다.
“있고 싶은 만큼 있어. 방은 저기 쓰고.”
일재는 통 크게 방 한 곳을 내줬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이림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냥 아무 바닥에서 자라고 이불 하나만 던져 줘도 감사하며 잤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 주니 월세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재의 안방 중 한 곳에 눌러앉게 되었다.
며칠 동안 가게에 출근을 하지 못한 것이 죄송해 가게에 찾아간 뒤 사장님께 죄송함을 전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으며 신경 쓰지 말라 다독였다.
오히려 초췌해진 이림의 얼굴을 여기저기 살펴보며 걱정했다.
그 친절과 다정에 마음이 녹는 것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편은 무거웠다. 일재와 같이 밥을 먹을 때도, 혼자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의무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일을 다녔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꿈에서는 지우가 피를 흘린 채 자신에게 애원했고 발이 무거워 밑을 보면 도한의 손이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이림이었지만 그가 일을 나갈 때를 제외하곤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일재는 이런 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음울하지만 나름 편안해 보였던 낯은 어디 가고, 시종일관 불안정한 눈빛으로 밖에만 나가면 사방을 둘러보는 이림은 상당히 이상했다.
결국 저녁을 먹던 일재는 젓가락을 놓고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누가 널 쫓아다녀? 사채업자한테 돈이라도 빌렸어?”
“미안…….”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라…… 말을 해.”
일재는 답답하다는 듯이 팔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동안 착한 척하느라 성질 죽이고 살았다 뿐이지 한 성격 하는 일재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폭발했다.
답답한 것도 있지만 날이 갈수록 살이 빠지는 이림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응급실에 실려 갈 것 같은 몰골이었다.
표정을 풀지 못하고 이림을 바라봤다. 밥상에 소담히 놓여 있던 음식들은 차갑게 식어 갔다. 그 모습에 다급함을 느낀 이림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한번 훑었다.
여기서 사실대로 얘기해야 할까.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내가 이도한에게 감금되어 있었다고? 애도 있다고? 지우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미친 사람 취급만 안 해도 양반이었다.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한 이림을 두고 일재는 한숨을 쉬며 밥그릇을 치웠다.
이림은 덩그러니 앉아 음식물을 버리는 그의 등을 바라봤다. 식기세척기에 밥그릇을 두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일재의 옷을 잡았다.
“…….”
“왜.”
무표정한 일재의 얼굴을 본 이림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말했다.
“못 믿어서 말 안 하는 거 아니야. 그냥 내 사정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 말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사실…….”
너무 괴로워.
결국 고개를 숙여 올라오는 쓴 액을 삼켜 냈다. 참지 못한 눈물이 점점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무력한 자신이 싫었고, 이런 상황을 만든 이도한이 원망스러웠다. 종래에는 낯설도록 차가운 일재도 미워졌다.
어째서 이다지도 감정적이고 나약한 걸까.
이림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도한은 여전히 남들의 위에 군림하며 그 흔한 잡음 하나 내지 않았고, 저와 같은 나이의 제 또래들은 직장에 들어가 신입 티를 벗는 중이었다.
일재만 해도 조교를 준비 중이라니.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자괴감에 괴로워하던 이림은 제 목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시야가 흐렸지만 일재가 작게 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알았어. 그만 울어. 나도 미안해.”
그는 이림의 눈가를 살살 어루만져 작은 눈물방울을 덜어 냈다. 괜히 민망해져 몸을 틀어 버리니 그 손이 이마를 문질렀다가, 이마 위부터 정수리까지 가르마를 탔다.
“울보.”
‘울보.’
일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도한의 낮은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재보다 낮은. 시종일관 여유롭고 나른한 목소리.
이림은 망령처럼 맴도는 목소리를 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뒤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일재에게 매사 불안해하는 자신의 치부를 들켜서일까.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 줘서일까.
아직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못했으나 그럭저럭 일상을 되찾았다. 물론 가게에 일하러 갈 때나 집에 갈 때는 항상 일재가 동행했다. 번거로울 것 같아서 거절했지만 그는 오히려 즐기는 듯 보였다.
오늘도 일재와 같이 집에 돌아가면서 이림은 풍경을 감상했다. 사실 사람들이나 자연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취미였던 이림은 보통 사람이라면 무심히 지나갔을 풍경을 감상하며 발을 옮겼다.
한겨울이 다가오면서 모든 것은 색을 잃었다. 대신 하얀 눈 위에 핀 꽃들은 봄에 피는 연약한 꽃들보다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꽃이 바람에 하느작거리는 것이나 돌풍에 흩날리는 구름같이, 평범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격정만이 몰아치던 이림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만큼 티 없이 마음으로 그것들을 감상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품에 감춰 둔 그 사진 한 장 때문이다.
이림은 옷에 떨어진 먼지를 털어 주는 일재를 보고 웃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런 일상을 즐겨도 되는 걸까? 친구의 희생으로 자유를 누리는 게 정당한 걸까?
제게 누구라도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해 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수년을 목마름에 시달려 오다 자유를 앞에 두고 정신이 회까닥 나가 버렸다. 그래서 아무 잘못도 없는 지우를 희생시켜 놓고 이제 와서 죄책감을 느꼈다.
이렇게 후회할 거면 그때 나오지 말걸. 너무나 모순적이었다.
지우를 잃고 나서야 얻은 깨달음에 괴로워하며, 편한 일상 속에서도 가끔씩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견디며 지냈다.
낮에는 가게로 출근하고 일재와 장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밤에는 잠을 설치거나 악몽을 꿨다. 가끔 비명을 지르거나 팔을 휘적이다 제풀에 놀라 벌떡 일어나면 이마를 어루만지며 걱정스레 바라보는 일재와 눈이 마주치길 반복해 왔다.
하지만 일재는 그 점에 대해 먼저 언급하지 않았다.
이림이 얘기하기 꺼려하는 눈치를 보이면 아무 말 없이 이마를 쓰다듬다 이림이 잠에 들 때까지 곁에 있어 줄 뿐이었다.
그런 속 깊은 배려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치유될 수는 없었다.
‘내가 도망치게 해 줬으면 너도 와 줘야지…….’
매일 밤 지우는 핏물과 핏덩이가 가득한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림이 달리고 달려도 지우에게 가까워지지 못했다.
결국 미안하다고 소리쳤지만 그마저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
이림은 울며 사과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사방을 바라봤으나 창 너머의 어렴풋한 빛과 풀벌레 우는 소리, 초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벌써 일주일째 잠을 설치다 결국 결심했다.
‘지우를 데리고 오자.’
새벽 3시. 야심한 시각 침대 밑에 숨겨 둔 사진을 꺼내 지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제발 무사했으면. 지금에야 구하러 가는 자신을 원망해도 좋으니,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다.
이만하면 오래 자유를 즐긴 것이다. 아직 제 욕심을 채우려면 멀었으나 현실과 타협해야 할 때였다.
그동안 안정을 찾은 것도 결국에는 이 선택을 하기 위해 초연해졌던 것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