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6. 흔들림 (6/14)

목차

6. 흔들림

7. 홀로서기

8. 그러쥐다

9. 족쇄

10. 시스투스

6. 흔들림

도한은 눈부심을 느끼면서 서서히 눈을 떴다. 해가 중천인 것을 보며 눈을 깜빡이고 시계를 켰다.

오전 아홉 시. 매일 여섯 시 전에 일어나는 그치고는 아주 늦잠을 잔 것이었다. 개운함을 느끼며 옆을 본 도한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확장됐다.

이림이 없었다.

몇 초 동안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멍하니 있던 도한은 벌떡 일어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욕조, 옷장, 비즈니스 룸, 침대 밑까지 살펴보던 도한은 식은땀까지 흘렸다. 분노하거나 짜증을 낼 겨를도 없었다. 오직 이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결국 방 안에서 이림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잠바와 신발 등이 없어진 것을 보았다.

바로 프런트에 연락해 닦달하자 보안 사무실로 연결됐다. 반팔에 검은색 코트만 겨우 걸치고 보안실로 내려가 CCTV를 요청해 본 도한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꽁꽁 싸맨 인영이 자신이 머문 1311호의 문을 열고 나갔기 때문이다. 익숙한 잠바는 분명 자신이 고른 옷이었다.

도한의 눈치를 보던 직원은 화면을 돌려 프런트를 비춘 카메라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뒤뚱거리며 느리게 걸은 이림은 이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멈춰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씨발…….”

그 시각, 이림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말이 산이지 그냥 작은 언덕이었다. 헉헉거리며 오르는 이림의 뺨으로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사실 호텔 밖으로 나서자마자 이것이 현실인 것을 깨달았다. 꿈과는 달리 칼바람이 얼굴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정신이 번쩍 들어 사방을 둘러봤지만 도한은 없었다.

어이없게 탈출에 성공한 이림은 입을 달싹이다가 일단 걸음을 옮겼다. 발을 움직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금 잔뜩 껴입어서 춥지는 않았지만 주머니에는 백 원도 없었다.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눈 내리는 새벽 여섯 시에 밖에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뒤를 돌아 프런트에 대기 중인 직원을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에게 연락했다간 도망은커녕 1분 안에 잡힐 것이다. 그래서 이림은 그냥 원래 가던 곳으로 가기로 했다.

인적 드문 숲에 발을 들였을 때, 이유 모를 쾌감이 치솟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즐거워져 걸음을 재촉했다. 평지를 걷는 것처럼 경사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걸었다.

발목까지 쌓인 눈은 아직 아무도 걷지 않아 뽀얀 상태였다. 뽀득뽀득 발자국을 내며 앞으로 걸었다. 관광객을 위해 조성해 놓은 곳인지 길이 잘 닦여 있었다.

그래서 이림은 마음을 놓고 주변을 구경했다. 침엽수들이 날카로운 잎 위에 눈을 쌓아 놓고 있었고 눈밭을 종종 걷는 새도 구경할 수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작은 들짐승을 구경하던 이림은 구경을 멈추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쯤이면 도한이 일어났겠지.

이제 더는 시간이 없었다. 시한부 자유였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곳을 가고 싶었다.

흰 입김을 뿜은 이림은 서서히 정상에 도달했다.

쉬엄쉬엄 걷고 여기저기 구경을 하며 오르다 보니 거의 세 시간이 걸렸다. 이제 눈발은 점점 멎어 보이지 않았다. 왠지 눈이 온 다음에는 유독 해가 빛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찡그리며 해를 보던 이림은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 너머 부표 여러 개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막을 강타하던 파도 소리도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들렸다. 멀리서 보다 보니 모든 것이 작고 느리게 보였다. 그러나 넓은 바다만은 이림의 시야를 꽉 채우고도 남았다. 오랜만에 속이 뻥 뚫렸다.

관광객들 대부분은 바다를 보느라 오르지도 않는 곳이었지만, 정상에 오른 이림은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이림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점점 추위가 닥치고 있었다,

저택 안에 있는 고용인들은 그가 편하게 산다고 손가락질했다. 도한의 등 뒤에 숨어 산다고 해도 그런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음식을 해 주던 아주머니나 경호원들이 교대하며 하는 대화를 들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림은 그다지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닥치는 대로 했고,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택배 알바를 하거나 낮에는 카페에서, 새벽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메가다 보니 힘쓰는 일을 많이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 사정 사정을 해서라도 꿋꿋이 다녔다.

그의 가족들도 집념과 의욕이 강한 이림을 보면서 분명 성공할 것이라고 응원했다. 탄탄대로의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여러 난관을 헤쳐 가면서 살아왔으니 이림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야망은 없었지만 욕심은 있었다. 좋은 기업에 취직해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동생들을 어렵지 않게 제 손으로 대학 보내고, 회사에서 핵심 인재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는 희생뿐인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림은 그것이 자신에게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림은 적어도 이렇게 모두와 소식이 끊기고 좁은 곳에 갇힌 채로 인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값비싼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따뜻한 집에 살았지만 이림은 그것보다 더 가치 있게 살고 싶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혼자 있으니 자꾸 옛 생각이 났다.

“헉……. 이림아!”

“…….”

바로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어깨를 잡아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돌리니 작은 몸이 힘없이 돌아갔다. 이림은 햇빛을 등지고 숨을 헐떡이는 도한을 바라봤다.

급하게 나왔는지 신발은 호텔 슬리퍼였고 위에는 코트만 겨우 걸친 상태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발갛게 얼어 버린 도한의 발을 보던 이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한은 숨이 꽉 막히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랬어? 왜…… 말도 없이 나가 버린 거야. 혼자 어딜 가려고.”

슬슬 추위를 느낀 이림은 저 품이 무척이나 따뜻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듯한 도한의 초조한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이림은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도한은 입에 침이 말라 가는 것을 느끼면서 주변을 살펴봤다.

이림이 서 있는 곳은 펜스가 쳐져 있어 위험하진 않았지만 임산부가 있기에는 다소 위험해 보였다.

이제 갈 곳도 없는데, 도망칠 곳도 없는데 다가오지 않는 이림을 보니 미칠 것 같았다.

제발, 도한이 자신도 모르게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생각 외로 도망친 게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호텔에서 나와 어떻게 이곳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CCTV를 확인한 뒤 그쪽 방향으로 뛰어가 무작정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림의 행방을 물었다. 그를 잃고 길 한복판을 헤매면서 한겨울에 등이 땀으로 젖을 만큼 뛰어다녔지만 도한의 가슴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침내 저 멀리 언덕에서 이림을 본 도한은 계단을 세 칸씩 뛰어오르며 이림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 작은 몸을 품고 나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그를 잡고 다그쳐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산길을 올랐다는 것은 너무나 잘못한 일이었으나, 도한은 그저 이림이 자신에게 돌아와 줬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할 뿐이었다.

***

“다시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

“자꾸 대답 안 해?”

“어린애 대하듯 하지 마. 나이 차이도 그렇게 안 나면서.”

이림은 중얼중얼 말했다. 소심하지만 할 말 다 하는 모습에 도한은 기가 찼다. 그러나 불만스런 표정을 본 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해서 다짐을 받으려 한 건데, 그가 느끼기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알았어, 미안해. 다시 안 그럴게.”

“……나도 미안.”

이림이 사과하는 모습을 본 도한은 그를 허벅지 위에 앉혔다. 여전히 뚱한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머리칼을 넘겨 줬다.

“배고프지? 밥 시켜 줄게.”

“으응…….”

이림은 배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걸었더니 배가 고팠다. 의외로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가는 도한을 본 이림은 얌전히 배달된 음식을 먹었다.

다 먹지 못할 정도로 차려졌지만 수저를 든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밥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도한을 보던 이림은 스프를 떠먹었다.

밥을 달라면서 요란하게 울려 대는 위장을 느끼며 고기와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딱히 고기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기를 생각하면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벌써 5개월 차인데, 너무 임신에 대한 상식이 부족했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며 얌전히 밥을 먹던 이림은 머리에 떠도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고개를 들고 도한에게 물었다.

“근데 저 숲 있잖아. 어제는 못 보지 않았어?”

“있긴 있었어. 근데 어제 물안개가 끼어 있어서 잘 못 봤던 거지. 우리가 아예 반대편에 있기도 했고.”

아아, 그렇구나. 이림은 이제야 납득이 갔다.

‘나도 참.’

없던 숲이 생겼다고 착각하면서 꿈이라고 여겼던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하지만 왠지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시간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다시 잠들었다면 자신은 그 잠깐의 자유조차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나왔던 범이 생각났다.

태몽을 맹신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자꾸 생각이 났다. 이림은 식사를 멈춘 채 오늘따라 잠잠한 배를 문질렀다.

***

기묘했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이림은 다시 저택 안에 숨겨졌다. 여전히 답답하고 싫었지만, 예전처럼 못 견딜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별채에 들어섰다.

영원히 내릴 것 같던 눈이 멈추고 세상은 다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바싹 말랐던 가지에는 봉우리가 맺혔고 짐승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땅에는 푸릇한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이림은 태교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산부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 해야 하는 운동, 태교에 좋은 책과 음악 등을 찾아보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신경 썼다.

강원도 바다에서 있던 이상한 경험은 왠지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몰라도 이 아이가 행운을 안겨다 주는 아기라고 생각하게 됐다.

한동안 다시 도망갈까 봐 촉을 곤두세웠던 도한도 열심히 준비하는 이림을 보고 이것저것 도와줬다.

7개월 차에 접어든 이림은 이제 슬슬 거동이 불편해졌다. 예전에도 힘들긴 했지만 요즘은 간단한 집안일도 힘들었다.

평소에는 찌뿌둥한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지우가 빨래를 개는 것을 돕거나 클리닝할 옷을 밖에 옮겼지만, 그마저도 버거웠다.

이러다 공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배가 커졌고 손과 발이 부어올랐다. 그것이 신기하면서도 불편했다.

“토끼는 밤톨을 만났습니다……. 밤톨아, 밤톨아. 너 어디 가니?”

이림은 느릿느릿 동화를 읽었다. 동화책 안에서는 솜뭉치 같은 흰 토끼와 동그란 밤톨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입을 멈추고 배를 쳐다봤다. 그러나 배가 늘어나면서 같이 커진 배꼽만 보일 뿐, 움직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까는 움직였는데…….”

이게 진짜 도움이 될까 싶다가도 이림은 고개를 젓고 다시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렇게 연달아 두 권을 읽은 이림이 밖으로 나와 물을 마시며 바깥을 바라봤다.

완연한 봄이었다.

시간은 물처럼 흘렀고 손보다 작았던 두부도 완전한 성체가 되었다. 지우는 고양이 발톱을 깎느라 두부에게 사정 중이었다.

별채에는 따로 정원사를 두지도 않았는데 꽃과 나무는 알아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쪽빛 이파리와 알록달록한 꽃들이 끝 간 데 없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키가 작은 자그마한 들꽃들이 벤치 밑과 볕이 잘 드는 곳에 소담스레 피어 있는 것을 본 이림은 이곳에 키 작은 나무 하나를 심고 싶어졌다.

작은 묘목을 심으면, 범이가 태어날 때 즈음에 내 허벅지까지는 오려나?

청소기를 돌리던 지우는 문득 인기척이 없어 청소기를 멈추고 잠시 주변을 헤맸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길어지며 귀와 목을 살짝 덮은 이림은 멍하니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우는 햇빛을 쐬는 이림에게 말했다.

“이런 날씨에는 피크닉이 딱인데. 에이, 백수가 여자 친구는 무슨.”

“피크닉…… 재밌겠다.”

이림은 조용히 그 단어를 읊조렸다. 배를 만지작대며 고개를 수그린 이림을 본 지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손가락을 부딪쳤다.

“여기서 하면 되잖아!”

“에엥……?”

이림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음 날 아침, 지우는 여러 가지 피크닉 용품을 사 왔다.

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 커다란 보, 다양한 과일. 마당 한쪽에 보를 핀 지우가 방석을 가져와 얹고 그 위를 두드렸다.

“앉아!”

이림은 강아지처럼 해맑은 표정을 지은 지우를 보니 괜히 겸연쩍어져서 중얼거렸다.

“뭐야……. 유치하게.”

“어어? 근데 왜 웃고 있어.”

그의 말과 다르지 않게 이림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조금 창피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레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린 날 아이들과 모래를 가지고 장난을 쳤던 것처럼, 커다란 이불로 아지트를 만들어 숨었던 것처럼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둘은 본격적으로 피크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있는 계란을 삶아 마요네즈와 섞어 계란 샌드위치를 만들고, 소시지도 몇 개 구웠다.

냉장고에 상시 준비된 디저트 몇 개를 꺼내 보 위에 올려 두자, 화보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화려하고 먹음직했다. 찬장의 고급 식기를 가져다 샌드위치를 올려두자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두부 너는 안 돼.”

샌드위치에 다가와 킁킁대는 두부에게 고양이 간식을 내민 지우는 보 위에 벌렁 누웠다.

아- 외롭다, 외롭다. 지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행복하고 여유로운 얼굴을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림은 고개를 돌려 발목을 바라봤다. 도한이 몇 달째 얌전히 태교를 하는 이림을 보고 족쇄를 풀어 줬기 때문에 마당에 나올 수 있었다. 이림은 눈을 감고 함께 드러누웠다.

쏴아아-.

커다란 바람이 꽃나무를 뚫고 지나갔다. 커다란 고목이 몸을 부르르 떨자 수백 장의 벚꽃이 마당으로 내려앉았다.

뜨끈한 날씨였지만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으니 너무 시원했다. 잔뜩 먹고 나자 슬슬 잠이 몰려왔다. 눈을 끔뻑거리며 간신히 옆을 보자 지우는 이미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본 이림의 눈도 서서히 감겼다. 둘은 미소를 지은 채 저녁까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슬쩍 눈을 뜨자 제 옆에 서 있는 도한이 보였다.

‘또 왜 저렇게 화가 났대.’

이림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배가 불러 끙끙대며 일어나지 못하자 도한이 굳은 얼굴로 등을 받쳐 줬다.

간신히 앉은 이림은 옆에 벌서는 것처럼 쭈그러든 채 서 있는 지우를 보고 다시 옆을 바라봤다.

“뭐…….”

뭐 때문에. 그렇게 물어보려는 이림의 말을 끊은 도한은 정말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다른 남자랑 잠을 잘 수가 있어.”

“뭐?! 뭐가!”

도한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우는 도한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질린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지우와 도한의 반응을 번갈아 보던 이림은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마당에서 같이 누워 있던 거……?”

“그게 아니면 뭐야.”

“…….”

이림은 한숨을 쉬었다.

이림은 대답도 없이 배를 문질렀다. 이 마당에서 심각한 건 한 명뿐이었다. 지우는 타이밍을 보다 재빨리 말했다.

“아…… 전 퇴근할 때라…….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지우는 도한이 부르기 전에 가방을 챙겨 발 빠르게 도망쳤다.

‘이림아, 미안하다!’

코까지 골며 자다가 갑자기 멱살을 잡혔을 때의 감각이란. 지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복도를 뛰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셋이서 있어 봤자 자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변할 것이다.

지우는 숙소에 가기 전에 술 한 병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갑자기 너무나 술이 당겼다.

“…….”

“…….”

둘 사이에는 작게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바깥은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어 조금 어둑어둑한 상태였다.

잘 지내나 싶다가도, 자꾸 이상한 부분에서 화를 내는 도한을 보면 이제는 울컥하지도 않았다.

그때 어둑해진 시야를 가르며 마당 곳곳에 조명이 켜졌다. 도한은 이림을 들여보내지 않고 거실로 들어가 담요를 들고 나왔다.

침묵하는 이림을 본 도한은 두꺼운 담요를 덮어 주며 춥지 않게 만들어 준 뒤에 손을 잡았다.

이림이 황당함을 느낄 새도 없이 도한은 살짝 찌그러진 천 위에 냅다 누웠다.

누운 것도 똑바로 누운 게 아니라 이림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린 채였다. 입을 벌리고 할 말을 찾는 이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작은 손을 자신의 이마에 턱 올렸다.

“…….”

“…….”

이림은 계속 말이 없었지만 도한도 눈을 감은 채 얌전히 깍지를 끼고 누워서 말이 없었다.

뻔뻔하게 쓰다듬어 달라고 요구하는 몸짓에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이마만 맴돌다, 이마 위에 쏟아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밑으로 내려왔다.

잘 정리된 짙은 눈썹, 오뚝한 코, 움푹 들어가 항상 그늘져 있는 눈썹뼈. 오랜만에 제대로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다. 감상하듯 도톰한 입술의 주름을 만지는데, 도한이 번쩍 눈을 뜨고 손을 잡아챘다.

“앗…….”

“지금 애무해?”

도한은 장난와 당황스러움을 섞은 눈빛으로 이림을 올려다봤다.

아……. 그제야 이림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짜증 나고 수치스러워서 손을 빼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놔…….”

“싫은데.”

이림은 손을 빼려고 발버둥 쳤고 도한은 놓으려는 척 힘을 빼다가 이내 놓지 않았다. 그렇게 유치한 싸움이 계속되면서, 이림의 등이 점점 보 위에 닿았다.

“……?”

눈 깜짝할 새 눕혀진 이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배가 눌리지 않게 옆구리 쪽으로 몸을 틀어 엎드린 도한은 제 팔 안에 작은 얼굴을 가뒀다.

살짝 그림자가 지자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사라져, 안 그래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이림이 뭐라 말하려 입을 열자 갑자기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춰 왔다. 건조하지만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와 코, 턱 아래와 뺨에 퍼부어졌다.

“하지 마……!”

“사랑해.”

얼굴을 비틀며 피하는 이림의 눈을 마주친 도한이 입을 떼고 고백했다. 당황스러워 그의 눈을 한참 바라봤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 눈을 보던 이림은 엉뚱하게 다른 생각을 했다.

이 끝은 어디일까.

보통의 연인처럼 사랑하다 싸우고 다시 사랑을 나누길 반복했다. 하지만 갈등에 부딪히거나 사랑이 식어 헤어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도한에게는 애초에 그런 명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림은 도한을 만났을 때 타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느꼈다.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가슴만 아파 왔다. 결국 그 뜨거움을 받아들인 이림은 가능하면, 도한이 이별을 고하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도 평범한 연인들처럼 쉽게 만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도한만 자신을 사랑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한은 그런 가능성 자체를 배제해 버렸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해 미쳐 버릴 뻔했다.

5년 동안 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싸우고 화해하길 반복해 왔다. 싸운 대부분의 이유는 그의 숨 막히는 집착 때문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부부처럼 함께 붙어 있었으면서도 그 정도가 심하면 심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이림이 포기하고 얌전히 있으면 제 마음대로 애정을 표현해 괴롭게 만들었고, 싫다고 하면 숨도 못 쉬게 옥죄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눈치를 보며 여우처럼 살랑이는 도한을 볼 때마다 참 마음이 복잡했다.

도대체 어디가 끝인 걸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도한을 보면 우습게도 쳇바퀴 위에서 내내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죽어야 끝나는 걸까. 하지만 결국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한이라면 죽기 전에 귀신이 되어서라도 함께 있으려 할 것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한 것 같았다. 신경질적이고 잠을 이루지 못해 예민했던 분위기는 점점 사라지고, 요즘은 웃음이 늘어났다.

오늘도 예전 같았으면 윽박지르며 지우가 있는 앞에서 모욕을 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저 투정을 부리는 정도로 넘어갔다.

뜻 모를 얼굴의 이림을 보던 도한은 침착하게 말을 꺼내 왔다. 거리가 가깝다 보니 속삭이는 것처럼 저음이 귀를 파고들어 왔다.

“나도 내가 부족한 거 알고 있어.”

“…….”

“그렇지만, 한 번 더 기회 주면 안 될까? 태어날 아이도 있고. 내가 아빠 노릇 잘할게.”

괜찮지 않을까.

이림은 멍하니 생각했다. 도한도 나름 노력하고 있고 이제는 여기서 어떻게 더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눈앞이 새하얬다. 자신은 이렇게 지치는데, 애원하는 도한의 눈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그의 계획 안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는데, 이림은 이것이 딱히 새 출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쳇바퀴 안에서 술래잡기를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옛날처럼 반발심이 들거나 복수심으로 불타지 않았다. 활활 타던 불이 재가 되어 스러진 느낌이었다.

이림은 문득 그때의 도한이 떠올랐다. 공진과 몸싸움을 하며 발버둥 쳤을 때, 도한이 나타났던 그 순간을.

지루한 희극을 보는 듯 무심한 얼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둘을 내려다보는 도한의 얼굴은 인형처럼 아무런 표정이 떠 있지 않았다. 제 필사의 탈출을 우습게 본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누가 답을 알려 줬으면 좋겠다. 모든 길은 막혀 있고 제 앞에 보이는 사람은 이도한뿐이었다.

잠시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림은 눈을 감았다.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도한은 조심스레 입술을 겹쳤다.

‘어쩔 수 없는 거야…….’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한심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지만, 이림은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뒤, 마당에 놓인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날은 묘목이 배달된 날이었다. 도한은 화장실이나 간신히 가는 이림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본인 입으로 노력해 보겠다 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림도 그 걱정을 알기 때문에 너무 힘들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묘목은 언뜻 보면 커다란 나뭇가지처럼 보일 정도로 작고 가냘팠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머리칼이 온통 새하얘질 정도로 시간이 흐르게 된다면 이 묘목은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될 것이다.

딱히 그때까지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이 나무와 함께 컸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이림은 목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묘목을 옮겼다. 땅을 파는 건 옆에서 지우가 도와준 상태였다.

이것마저도 상당히 미안해하면서 거절하던 이림이었지만, 그때 지우는 상냥하게 말했다.

‘이거 다 추가 수당 받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으응…….’

그렇게 파진 구덩이 안에 뿌리를 살살 집어넣었다. 사실 묘목 심기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자신이 직접 나무를 구해 온 것도 아니고 땅을 판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흙을 덮는 건 자신이 하고 싶다고 말하자 납득한 지우가 저녁을 준비하러 들어갔다.

이림이 모종삽으로 조금씩 흙을 퍼 두드렸다. 차곡차곡 흙이 쌓이며 점점 묘목이 고정되기 시작했다.

“음……. 아직 흔들려.”

아무래도 비나 바람에 뽑히지 않으려면 더 흙이 필요할 것 같았다. 파낸 흙 말고도 주변에 있는 모래와 흙을 끌어 모으기 위해 꽃을 피해 그 주변을 파헤쳤다.

그때,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종이도 아니었고 흙도 아니었다. 이상함에 그곳을 파헤치자 웬 비닐이 나왔다.

“……!”

비닐 안에는 작은 쪽지와 이어 센서가 들어가 있었다.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정신 차려. 별거 아닐 수도 있어.’

누가 놀다 버린 고물일지도.

이림은 호흡을 고르며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어디에 얼마만큼 카메라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느껴졌으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삽에 묻은 흙을 터는 척하며 겨드랑이 사이에 그 물건을 끼웠다.

그리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지우에게 살짝 웃어 준 이림은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다는 듯이 팔을 문지르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헉…… 허억.”

정신을 차려 보니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만약 주방에 있는 사람이 지우가 아니라 도한이었다면, 이미 들키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물로 세수를 했다. 그러기를 몇 분. 드디어 떨리는 손으로 비닐을 열었다.

그 비닐에는 접힌 종이와 이어 센서가 들어 있었는데, 검은 이어 센서는 어떻게 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종이를 펼쳤다.

<강이림 씨. 아직도 탈출할 생각이 있다면, 21일 오전 7시 20분에 이어 센서로 전화가 왔을 때 오른쪽에서 세 번째 버튼을 눌러 받으세요. -정희민>

현실감이 없는 문구에,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다. 이미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믿기지가 않아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일었다.

“이림아!”

똑똑-!

“헉!”

이림은 순간 놀라 등 뒤로 쪽지를 숨겼다. 심장에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치 놀라 석상이 되어 버렸지만 이 사정을 모르는 지우는 계속 재촉했다.

“빨리 나와! 뭐 해! 국 식어.”

“……어, 어! 미안!”

이림은 이어 센서와 쪽지를 구기듯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 번 더 지퍼가 잘 잠겼는지 확인 후 화장실을 나섰다.

지우는 이미 식탁에 앉아 이쪽을 째려보고 있었다.

“변비냐?”

“응……. 그런가 봐.”

괜히 의심받고 싶지 않아서 긍정하자 지우는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둥, 운동을 더 열심히 하라는 둥 잔소리와 밥 먹기를 동시에 했다.

이림은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지우를 슬쩍 바라봤다.

‘얘한테는 얘기해도 될까?’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내내 고민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지우의 말로는 이 집에 들어올 때 무슨 계약서도 썼다는데, 자신이 도망치는데 지우가 일조했다는 것을 알면 큰 사단이었다.

자신은 어떻게든 죽지는 않겠지만 지우는 달랐다. 벌써 몇 명이나 이 집에서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자신을 함부로 말한 가정부, 차 비서, 최공진까지. 예전에 최공진에게 이 별채에서 일했던 가정부의 이름을 대며 근황을 물어봤지만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니 제 과도한 망상일지라도 이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우는 요즘 즐거워 보였다. 이 집에서 일할 때만 해도 흰 티셔츠 한 장만 입었는데, 이후로 점점 종류를 다양하게 입더니 어제는 질 좋은 신발을 샀다면서 자랑했다.

살도 보기 좋을 만큼 쪄서 생기가 돌았다. 그런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분명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많아질 게 뻔했다.

어쩌면…… 지우도 내가 도망가지 않는 걸 바랄지도 몰라.

이림은 조금 씁쓸해졌지만 납득했다. 가족도 아니고, 이 일은 혼자 결정할 일이었다.

팍팍 먹으라며 숙주가 담긴 접시를 밀어 주는 그를 보는 이림의 입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날 밤, 이림은 생각에 잠긴 채로 밤을 지새웠다. 일부러 자지 않으려 한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두 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산달이 가까워지면서 가능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도저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탈출시켜 준다는 거야.’

자신은 아이도 있고 옆에 지우도 있는데. 분명 모두에게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이제야 마음을 접었는데, 이제야 나타나선 자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이 나를 시험하려는 것일지도.’

이림은 옆에 누워 있는 도한을 빤히 바라봤다.

무시해야지. 무시해야지. 이림은 이내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고 누웠다. 적막한 밤. 결국 이림은 번쩍 눈을 떴다.

‘한번 들어 보기만 할까?’

***

3일 뒤, 이림은 화장실에서 조심스럽게 그 이어폰을 착용했다. 도한은 7시 10분에 이 집을 나섰고, 지우는 7시 30분이나 40분쯤 올 것이다.

통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단 10분. 이림은 침을 꿀꺽 삼키고 이어 센서를 착용했다.

잠시 지직거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이림은 초조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같은 자리를 뱅뱅 돌았다. 그렇게 30초쯤 지났을까, 희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여보세요.

“네…….”

-강이림 씨 맞죠? 길게 통화 못 하니 일단 짧게 말할게요. 지금 제 연락을 받았다는 건, 나가겠다는 말이겠죠.

“그,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하…… 여튼 의사는 있다는 거네요. 그럼 일단 제 계획부터 들어요. 지금부터 4개월 뒤에,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지금 비밀리에 그쪽이 머물 수 있는 집을 마련하고 있고, 웬만해서는 들키지 않을 거예요.

“왜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죠? 절 싫어하시잖아요.”

-……맞아요, 싫지만. 참 불쌍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같은 오메가로서 도와주는 거예요.

그 말에 이림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거짓말. 날 무시하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요.”

-……그래요. 사실대로 말해 줄게요. 지금 나랑 도한 씨가 이혼 진행 중이라는 건 알고 있나요?

“……!”

몰랐다. 이혼이라니. 굳어 버린 이림의 귓속으로, 계속 충격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런…….”

-됐어요. 저도 이제 그런 새끼는 싫거든요. 아버지가 노발대발하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방 먹이지 않으면 울화가 터질 것 같으니 제안하는 거예요.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정말 도망가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 이어 센서로 연락하세요.

“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런 기회는 이제 다시 없을 거예요.

그렇게 정신없는 통화가 끝났다. 그는 멍하니 화장실 옆에 몸을 기댔다. 이혼이라니. 자신에게는 말을 한 적도, 티를 낸 적도 없었다.

점점 머리가 아파 와서 변기에 앉아 이마를 주물렀다.

“강이림! 어디 있어? 내가 과일 좀 사 왔는데. 우리 집이 과일 농사를 짓잖아. 그래서…….”

7시 34분. 통화가 끝나자마자 들어온 지우는 종알거리면서 연신 떠들었다. 이림은 애써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몇 번 연기를 해 봤다고 그새 는 건지, 아직은 이림의 행동에 도한과 지우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방긋 웃는 지우를 보고 같이 웃은 이림은 속으로 울렁거림을 참았다.

하도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옮겨 갔다. 귀여운 고양이도 있고, 친구도 한 명 있고, 귀여운 아기도 태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내가 찾으려던 자유는 도대체 뭘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겠지.

두부도 보지 못할 것이고, 아이는 내가 친부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지우도 못 볼 수 있다.

평생 그들을 그리워하며 힘든 일을 전전하다가 사는 게 아닐까? 희민은 도망치는 것을 도와준다고 했지, 그 이후는 말하지 않았다.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눈을 내리깔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던 이림은 고개를 들고 잠시 문을 바라봤다. 그다지 무겁지도, 어려운 장치가 연결되지도 않은 평범한 문.

그 평범함은 오히려 몇 번이나 도망치고도 실패한 이림을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림은 배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이튿날, 이림은 결심했다. 도한을 떠나지 않기로.

이미 수백 번 갈등하고 고민한 일이었다. 만약 6개월 전에 희민이 자신에게 연락했었다면 주저 없이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몇 번이고 잡히면서 모든 힘이 소진된 것 같았다. 자유를 기대하고, 상상하고, 몇 개월을 준비하고. 이 모든 것이 힘들고 짜증스러워졌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아이도 있지 않은가. 아이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 써야 할 존재는 맞았다.

만약 도망가게 된다면 평생 이 아이를 못 보고 살 마음을 먹어야 하니까…….

그래서 전화를 걸어 거절했다. 그 말을 들은 희민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지금 그만두겠다는 건가요? 마지막 기회라니까요?!

“당신이 제 입장이 되지 못해서 하는 소리예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전 떠날 수가 없네요.”

-바보 같은……. 하.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놈이 당신의 가족들 밥줄 뺏은 건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당신이 그냥 내 말을 따랐으면 말하지 않으려 했어요. 하지만 아직도 실체를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하는 겁니다.

“…….”

-6년 전, 별채 들어오기 전에. 갑자기 집안 사정이 안 좋아지지 않았나요?

“그걸 어떻게…….”

-그게 누구 짓일 거라고 생각해요?

설마, 설마…… 그게 이도한 짓이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이림은 턱을 덜덜 떨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지만 참 이상하게 그렇게 충격적이진 않았다. 마치 올 게 온 느낌이다. 도한을 믿는다고, 믿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사실은 계속 불안했음을 알고 있다.

6년 전 그날, 사람이 너무 큰일이 한꺼번에 닥쳐 오면 오히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동생의 수능, 가게의 폐업, 이도한의 배신까지. 머리에 구멍이 난 듯 제대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구명줄에 매달리듯 그에게 매달렸지만 사실 그것이 썩은 동아줄인 줄 모르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대답 없는 이림에게 희민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세 달, 그 이상은 안 돼요. 그전까지 잘 생각해 봐요. 그때도 거절하면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을게요. 제 마음이 먼저 바뀔 수도 있지만. 뭐…… 그럼.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아윽…….”

순간 배에 통증이 몰려왔다. 이림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침착하려 애썼다.

괜찮아…… 괜찮아…….

식은땀을 흘리며 수십 번 복식호흡을 하자 간신히 통증이 가라앉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다.

“아아…….”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외로움에 담금질된 육체는 이제 버티질 못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감정이 몰려왔다. 그렇게 살가웠던 자식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저 가족들의 품에서 울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울고 싶었다.

이유 없는, 내 편.

다시금 그 강력한 연대를 느끼고 싶었다.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냥 그것이 너무나 그리웠다.

하지만 이림은 꽤 빨리 털어 냈다. 어차피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은 상실한 지 오래였고 그걸 추궁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았을 텐데, 지금 그랬다간 발뺌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감시가 심해질 것이다. 훗날 기회를 노리기로 하고 억지로라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림은 배를 쓰다듬었다. 아이를 지우지 않았던 건 무의식중에 가족을 그리워한 마음이 작용한 걸까?

마음을 놓고 안정을 취해야만 할 시기였다. 지우는 요즘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도한이 별채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를 줬기 때문이다.

이림은 그것을 한참 뒤에나 알고 미안해했다.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미안…….”

“에이. 네가 뭐가 미안하냐.”

“…….”

“근데 좀 힘들긴 하다. 에휴, 먹고사는 데 쉬운 건 없지. 여기서 나가면 또 먹고살 걱정 해야겠네.”

“으응…….”

“아니, 근데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이도한 선배랑 네가…… 그런 사이였을까.”

“나도 너무 갑작스럽긴 했어. 근데 너도 봤겠지만 그렇게 좋은 건 아니야…….”

이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지우는 조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왜? 너한테는 잘해 주잖아. 물론 좀 제정신이 아니긴 한데. 하아……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

“아, 미안. 방금은…….”

지우는 씁쓸한 웃음을 짓는 이림을 보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사실 지우는 요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다지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슬슬 밥벌이 걱정을 할 때라, 조금 쉴 틈만 있다면 고민에 빠졌다.

가능하면 여기서 쭉 살고 싶었지만 애초에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한다고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자유를 상실한 이림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생각보다 이 집에서 자신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아침마다 집 앞으로 배달되는 음식을 그릇에 옮겨 데우고, 이림과 같이 식사를 했다.

설거지나 청소기를 돌리는 것 등은 가정부가 도맡았다. 가끔 클리닝이 끝난 빨래를 개거나 이림의 말동무가 되는 것이 지우의 역할이었다.

흉악한 족쇄를 보고 기겁했던 지우도 이 생활에 점차 적응하면서 도저히 일을 하는 건지 놀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편안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언제까지 알바만 할 거냐는 부모님의 닦달과 잔뜩 예민해진 별채의 분위기가 지우를 괴롭게 만들었다.

예전에 이림을 탈출시키려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편안히 케어 받는 그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도한의 집착이 숨 막혀 보였지만 매일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실에 숨 막히는 것보다는 나아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요즘은 족쇄도 사라졌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티 내지 않았던 건데, 결국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림은 눈동자를 불안하게 돌리는 지우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지우야, 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지만. 여기서 제정신으로 사는 거 생각보다 쉬운 거 아니야.”

“…….”

“휴대폰, 노트북. 그런 건 이미 뺏긴 지 오래야.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모욕적인 말도 많이 들어 봤고…… 부모님과 연락 끊긴 지도 5년이 넘었어.”

“미안해…….”

“……괜찮아.”

이림은 이해했다. 가족이나 친척끼리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당에, 친구라고 다를 건 없다. 하지만 이림은 현재 지우에게 많이 의지 중이었으므로 조금 충격받기는 했다.

지우는 애써 괜찮은 척하는 이림에게 몇 번이나 사과했다. 그럴 때마다 이림은 작게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렇게 둘 사이는 조금 멀어졌다. 이림이 맺고 끊는 게 칼 같지 못해 다가오는 지우를 밀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마음을 터놓는 게 힘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다시 흘러, 도한도 이틀에 한 번꼴로 달려들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출산 준비를 돕고 있었다.

밤늦게 들어오고 나서도 이림을 끌어안은 채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했고 그가 잠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예 스킨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뽀뽀로 시작했다 농도가 짙어지기도 했고, 한 번 눈이 마주치면 부지런히 입을 맞추기 일쑤였다. 본인도 이런 자신이 곤란한 듯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었다.

산달이 가까워지며 지우와 기존에 있던 가정부 말고도 유모가 입주했다. 이름은 미진이었다.

아주머니는 젖병, 착유기 등 여러 가지를 별채에 구비해 두었다. 아이가 있는 곳은 더욱 청결해야 한다며 천을 삶는 방법이나 응급 상황 시 대처법을 알려 주기도 했고 진지하게 고민을 들어 주기도 했다.

낯을 가리던 이림도 푸근하고 선량한 모습으로 이것저것 조언해 주는 모습에 결국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던 저택 안 고용인들과 달리, 자신을 보는 눈빛은 다정하기만 했다. 그게 왠지 쑥스러워서 이림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가끔 유모와 도한의 험담을 하기도 했고 두려움에 울기도 했다. 그러나 유모는 당황하지 않고 이림이 원하는 답을 주기도 하고 말없이 위로해 주기도 했다.

어느 날, 극도의 불안감과 긴장 속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안정을 찾으려 노력하던 이림은 문득 미진의 살아온 이야기가 궁금했다.

이곳에서 지우와 공진의 이야기만 듣고 살았기에, 그는 평범한 일상 이야기라도 열심히 들었다.

무슨 노래가 유행하는지, 어떤 스타일의 옷이 유행하고 무슨 음식이 새로 나왔는지. 오히려 이런 사소한 게 궁금했다.

하지만 오십 줄에 들어선 미진은 그런 이야기에 둔감했다. 하지만 이림은 실망하지 않았다. 미진의 사는 이야기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았어요. 이 집에서 어머니부터 지금 저까지 수십 년을 일했죠.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는데 어디서 안 건지 사기 치려는 사람도 있었고, 이성그룹에 흠집 내고 싶어서 접근한 사람도 있었죠. 근데 재벌이랑 일한다고, 제가 뭐 아나요. 애 돌보는 일 하는 건데.”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는 미진 씨가 들어와서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뭐랄까……. 그냥 마음이 편해요. 같이 있다 보면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시는 것 같아요.”

미진은 빙그레 웃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은 얼굴. 그와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이림은 이 집에 일하면서 스쳐 갔던 사람 중 가장 순한 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두 분 다 고민이 많겠어.’

미진은 이림을 바라봤다.

순한 만큼 상처도 잘 받는 성격이라는 것은 그와 몇 번 얘기를 나눈 후에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임신하고 살이 오른 것 같았지만 비쩍 마른 몸에서 마른 몸이 된 것뿐이었다. 가냘픈 몸은 안 그래도 위태로운 이림을 더욱 위태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한참 고민하던 미진은 조심스레 물었다.

“이 집에서 나가실 생각인 것 같은데, 잘못 짚었나요?”

“……! 그걸 어떻게!”

이림은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지 풀어졌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너무 놀라 순식간에 창백해진 모습을 보고 미진은 이림을 진정시켰다.

“진정해요. 말할 생각 전혀 없어요. 내가 괜한 얘기를 했나 보네요.”

“……어떻게 아시는 거죠?”

이림은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미진을 바라봤다. 그러나 미진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조금 씁쓸해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곳에서 아기 때부터 지냈어요. 저택 한편에는 숙식이 해결되는 직원 숙소가 있는데, 저는 그곳에서 어머니랑 둘이 자랐거든요. 그래서 가끔 이 집 아드님, 따님이랑 같이 놀기도 했죠. 물론 아기 때만이었지만.”

“아…….”

“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어느 집안이든, 어느 사람들이든 갈등이 없는 집은 없잖아요. 그냥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익혀진 눈치 같은 거죠.”

“…….”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림 씨의 말을 들어 주고, 공감해 주는 것뿐이에요. 불쾌했다면 그냥 잊어 주세요.”

“아니요……. 아니에요.”

이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행스럽기도 했고 이상하게 반가움이 몰려오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던 문제를 공유한 느낌.

미진은 알고 있었다. 이림이 안고 있는 이 문제를 누군가가 공감해 주기만 한다면 이림이 훨씬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이란 것을.

미진은 바깥세상의 변화에 둔감했지만 대신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 센스가 좋고 눈치가 빨랐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말은 함부로 하지 않고 있지만 이림은 지금 당장 대화를 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됐다.

개인적으로 안타깝기도 했다.

예상대로 이림은 무언가를 더 부탁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알아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감사해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쉬…… 그만 울어요. 들키겠어요.”

“네……. 끕…… 그런데, 이런 얘기 막 하셔도 돼요?”

눈가에 습기가 가득 찬 채로 묻는 이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슬픔이 씻겨 나가고 호기심이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진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림 씨. 이 별채 거쳐 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렇게 말해도 고자질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

이 별채를 거쳐 간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줬구나.

누군가가 쓴 흔적이 남은 마당의 창고와 담벼락에 돌로 새긴 희미한 낙서를 보면서 언뜻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분명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가슴 한구석이 휑해지는 궁금증이었다.

***

다음 날. 도한은 아기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이림에게 물어봤다.

“으음…… 모르겠어. 갑자기 물어보니까…….”

“이림이 네가 정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힘들면 내가 작명소에서 받아 올게.”

“생각해 둔 거 없어?”

왜 내가 정하는 거랑 작명소, 두 가지 방법만 말하는 거지.

이림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러자 도한은 잠깐 미간을 좁히며 이림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가 지어도 되나?”

“……당연하지.”

어쩌면 그가 짓는 게 맞을 것 같다. 자신은 다 버리고 떠나려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고민하는 도한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

이림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굽혔다. 가슴이 바늘로 콕콕 찔린 것 같았다.

그런 이림의 옆에서 조금 들뜬 도한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고민하던 도한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우리 하나씩 생각해 올까?”

“그러든가…….”

이림은 표정을 감추고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지을 때 즈음에는 자신이 없을 것이다.

고민과 아기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은 시간을 보낸 이림은 산달이 되어서야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민할 새도 없이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졌다.

집안의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두부는 하루 종일 캣 타워 깊숙이 들어가 눈치를 살폈고, 지우는 숨 쉬는 것조차 긴장했다.

하루를 앞두고 점점 빈번해지는 진통에 도한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다. 계속되는 닦달로 초췌해진 주치의는 식은땀을 흘리는 이림의 이마를 보고 이야기했다.

“이제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네요.”

***

아기는 출산 예정일 하루 전에 나왔다. 동시에 도망쳐야 할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날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차에 옮겨지고, 병실에 누웠다가 다시 검사를 받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통증이 이림을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본 기억만 드문드문 났다.

무통 주사를 맞는다는 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도한의 얼굴은 이림보다 더 긴장한 상태였다.

간신히 눈을 뜨고 있는 이림의 손을 꼭 붙잡은 도한은 간절히 말했다.

“많이 힘들지……. 미안해.”

“……이제 와서?”

눈앞에 별이 보이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도한도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가 보호자를 찾는 목소리에 잠깐만, 하고 밖을 나섰다.

폭풍 속의 고요처럼, 모두가 바쁜 가운데 꼼짝없이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입원실 내로 들어왔다.

“……?”

마스크와 수술 모자를 쓰고 있는 의료진이었는데, 아래를 체크한다거나 산부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이림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간신히 눈썹과 눈만 보이는 사람이 성큼 다가오자 이림은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 낯선 이는 그저 이림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일 뿐이었다.

“열흘 뒤, 밤 11시. 병원 옆 산후조리원 109호실 앞에서.”

그 말을 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해 눈을 뜨고 휙휙 고개를 돌리는 이림의 앞에 급히 다가온 도한이 보였다.

“왜. 많이 아파?”

“응? 아, 아니야.”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이림은 이내 베개에 얼굴을 기댔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잠시 뒤, 모든 생각이 지워졌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힘주세요!”

“윽……!”

온몸이 너덜거리는 듯했지만, 이림은 힘을 억지로 쥐어 짜내며 이를 악물었다.

1분이 한 시간 같이 흐르고, 마침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아기가 보였다. 저 작은 생명이 내 안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렴풋이 따뜻한 손이 제 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 뒤는 암전이었다.

뽀송뽀송해진 아기는 이림과 도한이 찾아올 때마다 큰 눈을 깜빡였다. 마늘종 같은 코와 희미한 속 쌍꺼풀. 눈은 자신을, 코는 도한을 닮은 것 같았다. 사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것 같았다.

신생아실 안의 아기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림을 본 도한도 가슴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눈앞의 작은 속싸개를 바라봤다. 이제까지는 이림을 묶어 둘 존재로만 인식했지만, 자신과 이림의 특징이 어우러진 작은 얼굴을 보자 미묘하게 벅찬 감정이 올라왔다.

다들 이렇게 부모가 되는 건가.

하지만 맥을 못 추리는 이림이 걱정됐다. 아이를 낳으면 몸이 많이 약해진다던데. 도한은 더 보고 싶다는 이림을 설득한 뒤 다시 병실로 데려갔다.

침대에 앉자마자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누운 이림의 이마를 쓰다듬어 줬다. 이림은 그런 도한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아기 태어났으니까 성질 좀 죽이고 살아. 항상 사랑해 주고.”

“응.”

“유모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 얼굴 보여 주고…….”

“알았다니까…… 근데…….”

왜 떠날 사람처럼 말해?

도한은 그 말이 입 안에서 튀어나올 것 같아 아예 입을 다물었다. 이림의 의아한 얼굴을 본 도한은 고개를 젓고 쉬라는 말을 전한 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복도를 걸으며 도한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또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걸까.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아까 봤던 무구한 이림의 눈빛은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이제껏 난동을 부린 만큼 이림도 만만치 않게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도한은 함부로 무슨 뜻이냐 협박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아버지 노릇 하겠다고 한 게 몇 달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또 못된 버릇이 도졌다고 질책할지도 모른다.

“다 되돌아오는 건가…….”

하지만 그래도 좋을 것 같다. 자신의 옆에 그가 있고, 이림이 아기를 들고 있는 채로 자신을 맞이하는 상상은 그 어떤 상상보다 가장 행복했다.

이렇듯 불안한 기분이 들었을 때 대부분의 예감은 빗겨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대비를 하더라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도 있었다.

그와 많이 다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도한도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조금씩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이림도 믿고 따를 것이다.

도한은 불안감을 잠재우고 복도 끝으로 걸었다.

***

탈출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 이림은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작년에 탈출을 시도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혼자 쪽배에 탄 채로 커다란 파도를 정면으로 맞이하며 노를 젓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커다란 배를 타고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다거나 즐거워 미칠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막막하지만 않을 뿐, 심란함은 그때보다 더욱 심해졌다.

별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 정리가 힘든 걸까.

깜깜한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불빛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위에 귀여운 아기가 어른거렸다.

계획하고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속 보니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전에 한번 데리고 갈 수는 없냐 말했지만 희민은 단호히 안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게 맞는 걸까.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모도 있고, 지우도 있고, 그새 정이 들어 버린 두부도 있고…… 도한도 바뀌고 있는데.

하지만 얼마 전, 지우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힘든 티를 내지 않아서 그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고 있었다. 별채는 내내 예민하고, 취업 압박도 다가오고. 지우도 무의식중에 그런 말이 튀어나온 거겠지.

그러나 친구인 지우도 이 정도라면 과연 다른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뻔뻔하게 애까지 낳아서 아예 자리를 잡고 눌러앉은 건방진 오메가라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그 이상의 험담이 오갈 수도 있겠다. 5년 동안 들어온 것도 숨 막히고 답답했는데 평생 그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사실이라면 이렇게 복장이 터지진 않겠네.”

자신은 그 말을 듣고 평생 살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영영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감시카메라와 감시원들을 뚫고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분명 아기를 키울수록 애착이 갈 것이다.

아기의 까만 눈. 아까 전, 그 눈이 자신을 빤히 응시해왔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눈을 마주 보면서 물었다.

‘내가 가도 될까?’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하는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널 버리고 가야 하는 걸까. 그래야 할까.

아기는 울지도 않고 순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날 용서하지 마.’

이림의 사정을 듣다 보면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그 알파가 자초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괴로운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염치없이 바라는 게 있다면, 새로 태어난 아이는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신처럼 끌려다니지 말고, 누구에게든 굽히지 말고 자유롭게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고민하던 이림은 탁상 위에 놓인 메모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마침내 당일 아침이 되었다. 아직도 후유증으로 어지럽고 메스껍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새파란 아침 하늘을 보다 보면 정말 오늘이 그날인지 헷갈려 자꾸 달력을 확인하게 됐다.

오늘도 조리원의 일상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맛있는 음식이 삼시 세끼 나왔고 시간에 맞춰 아기와 둘이서 만나기도 했다.

차라리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긴 했지만 평생 못 볼 것이라 생각하니 눈앞의 옹알대는 아기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고 자신의 닮은 점을 찾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도한이 한 차례 다녀가고, 휴식을 핑계로 모두 내보냈다. 나가기 두 시간 전. 간단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속옷 몇 개와 사흘 치 옷. 그리고 급히 얼굴을 숨기기 위해 쓸 마스크와 모자. 사실 짐이랄 것도 없이 간소했지만 그래도 몸에 남은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몸을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10시 40분이 되었다. 애써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문고리를 잡았다. 이림은 의미 없이 넓은 방을 한번 쭉 둘러보고 문을 열었다.

복도는 한산했다. VIP 룸 중에서도 특실이다 보니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수월히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튼을 누르고 자신도 모르게 주번을 휙휙 둘러보며 경계했다.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올라왔다. 1층, 2층, 3층…….

이상하게 한 층씩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때마다 숨이 막히는 듯해서 참지 못하고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5층에 막 도달한 엘리베이터가 이림의 앞에 열렸다. 엘리베이터는 텅 비어 있지 않았다. 과일 바구니를 든 지우가 반가운 낯을 하다가 그의 행색을 보고 단숨에 얼굴을 굳혀 버렸다.

“……지우야.”

“너…… 뭐 해? 그 배낭은 뭐고?”

얼굴을 찌푸린 지우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지…… 지우야.”

“어디 가? 뭐 필요한 거 있어? 나한테 말해.”

“어…… 그게…….”

“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지우의 눈이 크게 커졌다. 그 와중에 엘리베이터는 둘을 기다리지 않고 닫혔다. 결국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우는 이림을 데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푹 숙인 이림의 앞에서 지우가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데?”

따지듯 들어오는 말에 이림은 울컥했다.

“지우야, 왜인지 모르는 거 아니잖아.”

이림은 고개를 들고 지우와 눈을 마주쳤다. 곧은 눈동자에 당황한 지우는 급히 말했다.

“너 미쳤어?”

당황함과 두려움으로 물든 지우의 얼굴을 본 이림은 고개를 숙였다. 지우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

자신이 사라지면서 생길 후폭풍이겠지. 싸늘한 이림의 눈빛을 본 지우는 더욱 당황해서 두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야, 난 너 걱정되니까! 이도한 그 사람을 누가 어떻게 말려……. 진짜, 진짜로 미안한데.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응?”

“지우야…… 나에겐 이게 마지막 기회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너한테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하지만 지금 가야 해.”

“…….”

“지우야…… 모른 척해 주면 안 될까? 응……? 나 정말 이대로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아.”

지우에게 조곤조곤 말하려 했지만 이림은 감정이 북받쳐 끝내 눈물을 흘렸다. 제 처지가 한심해서. 차마 지우에게조차 꺼내지 못했던 진심을 반강제로 보이게 되면서 이유 모를 눈물이 흘렀다.

왜 이렇게 자꾸 고비가 생기는 걸까.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평생 그가 밉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솔직히 그저 방해꾼으로만 보였다.

그 정도로 이림은 지금 한계에 다다랐다.

무릎까지 꿇고 무너지자 꿰맨 회음부가 아파 왔다. 하지만 그 아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고 슬펐다. 차마 지우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때, 이림의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올라왔다.

“…….”

“그래, 알았어. 내가 미안. 그때 실언해 놓고 또 내 생각만 했네…….”

“지우야…….”

고개를 들자 보인 건 지우의 우는 모습이었다. 항상 밝고 쾌활했던 지우였기에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어느새 울음도 뚝 그치고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아이씨, 하며 눈물을 쓱쓱 닦았다. 그러고는 부끄럽다는 듯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가 요즘 힘들다 보니……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던 거 미안해. 나 친구 할 자격도 없다.”

“아니야……. 나도 지금 이기적으로 굴고 있는데, 뭘.”

이림은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벨을 울렸다.

깜짝 놀란 지우를 진정시킨 이림은 침착하게 말했다.

“……!”

“괜찮아. 내가 나갈게. 너는 저쪽에 가 있어.”

이림은 침착하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우가 보이지 않게 뒤쪽에 서 있었다. 문을 열자 직원 한 명이 아기를 데리고 왔다. 직원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수유 콜을 드렸는데 아무 응답이 없으셔서요.”

“아, 죄송해요. 이리 주세요.”

하얀 포대기에 싸인 아기는 한 팔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아기는 배가 고팠는지 칭얼거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구석에 있던 지우가 어색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곤 작게 도리질 치는 아기가 신기하다는 듯 포대기 안을 들여다봤다.

사실 지우는 오늘 처음 조리원에 온 것이었다. 이림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서 신중히 과일 바구니를 고르고 그에게 사과할 말까지 준비했다.

그렇다 보니 아기에 대한 생각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지금 보는 아기는 오히려 지금 상황을 다 잊어버릴 정도로 귀여웠다. 자신이 봐도 이림과 도한을 반반씩 똑 닮은 귀여운 얼굴이었다.

“처음 보네…….”

“응. 귀엽지? 미안한데 잠깐 돌아서 있을래?”

“어? 응.”

지우가 어색하게 끄덕이더니 뒤로 물러섰다. 이림은 급하게 티셔츠를 걷어 올려 젖을 물렸다. 정신없이 짐을 싸다 보니 이맘때쯤 수유하는 것을 잊었다.

어차피 자신은 부모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 수유를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한번 시도해 보라고 권하는 직원들의 권유에 얼결에 시도하고 있었다.

이것도 마지막이구나. 이림은 마지막으로 아기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기는 두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숱을 가지고 있었다. 눈썹과 속눈썹도 숱이 많았다. 조금 특이했던 점은 도한을 닮아 옅은 갈색 모발을 가진 것이었다.

미간까지 작게 찌푸리고 젖을 빠는 아기를 자세히 들여다본 이림은 셔츠를 내리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다 됐지만 차마 떠나지 못했다.

지우는 애써 괜찮은 척하는 이림을 보다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가방에서 펜을 꺼내 이림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었다.

“이게 뭐야?”

“일재 전화번호. 나는 너랑 같이 못 가고 수민이는 외국에 있으니, 혹시라도 널 도와줄 사람은 일재밖에 없잖아. 넌 몰랐겠지만 그래도 걔네 집 꽤 살거든. 어쩌면 널 도와줄 수도 있어.”

일재.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이림은 고마움과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성그룹에서 오래 일한 유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우는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이림은 비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나랑 같이 갈래?”

놀란 얼굴을 한 지우는 오래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계약 위반 조항도 있고 부모님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채 쫓길 수는 없었다.

“아니, 난 못가. 계약서에 사인한 게 있거든.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런 조항을 넣은 건지……. 아무튼 죽이기야 하겠냐.”

“그,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인마. 이제 시간 다 됐다. 빨리 가 그리고…….”

“…….”

“내가 그렇게 말했던 거 용서해 주는 거지?”

“…….”

조심스럽게 나온 지우의 말에 이림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자 우는 이림을 지우가 안아 주며 다독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둘을 올려다봤다.

눈시울이 빨개진 지우가 이림에게서 아기를 건네받았다. 그 순간부터 아기의 얼굴이 삐죽거리더니 슬슬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것을 본 지우는 이림에게 다급히 말했다.

“빨리 가…….”

“…….”

“빨리!”

이림은 그 다그침에 뒷걸음질을 치다 이내 빠져나왔다. 으아아앙-! 거의 운 적 없던 아기가 복도가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계속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며, 간신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귓가에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1층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거울에 기대며 위를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런 허탈감이 들기도 잠시,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1층에 도착했다. 이림은 쭈뼛쭈뼛 나와서 109호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주변을 보니 통로 끝에 난 뒷문 쪽에 외진 방이 하나 있었다.

뒷문은 쓰지 않는 곳인 듯 잡초와 수풀로 가득했지만, 문은 열린 상태였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투명한 문 너머로 낯선 사람들이 보였다. 정장을 입고 얼굴까지 가린 채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본 이림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움찔거리는 이림을 본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문을 열고 이림의 팔을 콱 잡았다.

이림은 당황해서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곧 모자가 쓰인 채 검은색 차량으로 질질 끌려갔다. 어두컴컴한 밤에 검은 모자까지 쓰니 10미터 밖에서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요!”

“늦었습니다. 가시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엄청난 힘으로 이림을 차 안에 밀어 넣었다. 넓은 차 안에는 운전기사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운전기사는 모든 차 문에 잠금장치를 건 후에 차를 움직였다.

“지금부터 포천에 준비된 아파트로 가실 겁니다. 옆에 일 년 치 생활비가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한 곳에 쓰시면 됩니다. 그리고 휴대폰도 개통했으니 다른 곳에서 개통하지 마시고 쓰세요. 기왕이면 일 년 정도는 계좌 거래를 하거나, 가족들과 통화하는 일은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잠깐. 일 년이나요? 그런 말은 없었는데.”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5년 정도 조용히 지내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

“아…….”

이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소리다. 그가 이렇게 쉽게 물러났을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이림은 창문으로 뒤를 바라봤다.

벌써 조리원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림은 괜히 저 멀리 조리원 5층을 바라봤다.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저 멀리서 아기가 자신을 원망스럽게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림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차창에 얼굴을 기댔다.

오랜만에 보는 바깥은 자신의 상상과 달리 어두컴컴하고 적막했다. 화려한 새장에서 탈출하고 자유를 맞았지만 의외로 후련한 기분은 아니었다.

***

도한은 오늘도 점심을 굶은 채 일을 처리했다. 큰 프로젝트를 검수하고 책임지고 있지만 다행히 일이 빨리 끝나서 9시 즈음에 퇴근할 수 있었다.

비록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거르며 일했지만 그래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이림은 무사히 출산에 성공했고, 아기도 건강했다. 이제 남은 건 이림의 약해진 몸을 보살펴 주는 것뿐이었다.

비록 조리원에 들어갔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을 잘 케어해 주고 보살펴야 한다는 교육을 받은 도한은 오히려 자신이 뭐든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가 귀찮다고 자신을 밀어내도 옆에 달라붙어 있을 명분이 생긴 것이다.

도한은 습관적으로 이림이 좋아할 만한 음료수와 음식을 한가득 사 들고 차에 타는데, 눈에 스치는 가게가 있었다.

“잠깐 멈추세요.”

“예.”

도한은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가게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느낌의 가게에 짙은 색의 정장을 차려입은 도한이 들어서자 굉장히 이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저번 달 카드값을 생각하던 직원은 한껏 긴장한 얼굴을 숨긴 채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저거 주세요.”

도한이 가리킨 것은 편안해 보이는 산부용 잠옷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세트로 아기 잠옷이 사이즈만 작게 줄인 채 곱게 개어져 있었다.

모자와 손 싸개까지 들어 있어 보기만 해도 깜찍한 옷을 가리킨 도한은 이후로 수박이 그려진 옷 세트, 별이 그려진 옷 세트 등 열 벌 정도 더 산 뒤에 카드를 내밀었다.

양손에 한가득 쇼핑백을 든 도한은 이 옷을 입고 침대에서 곤히 자는 이림을 상상했다.

쏟아지는 업무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리는 느낌에, 어깨를 몇 번 움직인 도한이 차에 탔다.

그리고 속주머니에 있던 종이를 펼쳐 다시 한 번 훑었다.

작명소에도 가 보고 가족들에게도 물었지만 딱히 마음에 들었던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 고민하다 이림과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들기로 했다.

“한림…….”

아기에게 자신이 지어 주고 싶은 이름은 이도한의 ‘한’과 강이림의 ‘림’을 합친 ‘이한림’이었다.

이림과 도한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아이니만큼 이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림이 자신이 생각해 둔 이름으로 아이의 이름을 정하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선 조리원은 도한의 상상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침대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옆에는 지우가 불안한 얼굴로 아기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도한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침대를 바라보다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너무 평온해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잠시 이림은 외출하고 지우가 애를 돌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재킷을 벗어 걸어 둔 도한은 화장실로 들어가 여유롭게 손까지 씻었다.

쏴아아아-.

하지만 지우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길어질수록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벌벌 떨며 나가지도, 그렇다고 맞서지도 못하고 아기만을 들고 있었다.

손을 수건에 닦으며 나온 도한은 아직 아무 말이 없는 지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디 갔냐고 묻잖아. 내 말이 그렇게 어렵나.”

“이림이는 떠났습니다.”

“아…… 그러니까 어디로 갔냐고……. 몇 번이나 처 말하게 해.”

“저, 저도 모르……! 큭.”

지우는 벽에 밀어 붙여졌다. 아기가 있어서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멱살이 잡혀 숨이 막혔다.

아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잠잠하던 얼굴이 울상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한에게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숨…… 숨 좀!”

“말동무 좀 해 주고. 음식 차려 주고. 겸사겸사 감시도 좀 하고. 오메가 하나 감시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으응…….

아기가 울먹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몸을 뗀 도한은 무너지는 지우의 품 안에서 아기를 안아 들었다.

빽빽 울어 대는 아기는 도한과 이림 누구도 닮지 않은 것 같았다. 눈살을 찌푸린 도한이 콜을 했다.

“무슨 일이시죠? 어머!”

“아기 데려가세요. 그리고 강이림 산부 언제 나갔습니까.”

“한 시간 전에 수유 콜을 안 받으셔서 직원이 올라갔었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직원은 눈치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싸늘한 표정의 도한에게 자신이 아는 내용을 바로 전달했다.

그리곤 빠르게 지우의 품에서 아기를 빼내어 데려갔다. 직원의 발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들은 도한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닫힌 문을 응시했다.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가슴은 끓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은데, 머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도한은 가슴께를 붙잡은 채로 이림이 왜 도망을 갔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도망친 게 아닐 수도 있어. 애도 낳았는데 설마 버리고 갔다고?

그렇다고 아이를 극도로 혐오한 것도 아니었다. 지우자고 했으면 의심이라도 했을 텐데, 오히려 태교도 하고 먹는 것도 골고루 먹는 등 나름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버리고 갔다고? 나랑…… 아기까지?

“아니야.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이도한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곤 구석에 서 있는 지우를 발견하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이도한의 눈은 맛이 가 있는 상태였다.

“네가 꼬셨지?”

“……전 오히려 처음에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완강히 거절했어요. 그쪽이 어지간히 괴롭혔나 보죠.”

도한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 앞에 섰다. 지우의 눈에 비친 도한의 이목구비는 남자다웠지만 모발과 홍채가 밝은 갈색이다 보니 얼굴만 보면 전체적으로 꽤 곱상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이런 간극 때문에, 대학교에서 그를 동경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자신도 이도한을 마주칠 때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솔직히 너무 빈틈이 없어서 이상했다. 세상에는 아무리 얼굴이 괜찮은 사람이라도 어딘가 하나씩은 부족한 점이 있기 마련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었고, 여태 자신의 상식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오며 자랐다.

원래 인간은 빈틈투성이며 그들은 운 좋게 한 가지의 장점을 타고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입생 환영회에서 환영 축사를 하는 도한은 그런 자신의 믿음을 박살 냈다. 옆을 바라보니 다들 눈도 떼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들과 교수들은 뭐가 그렇게 뿌듯한지, 한껏 미소를 끌어모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성별과 형질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일까. 그를 시기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선배, 후배 가릴 것 없이 그의 앞에서 공손해졌고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우도 이 집에 들어왔을 때까지 이 모든 일을 그가 벌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 시절 환상에 빠져 있던 걸까. 모든 화살이 도한을 가리키는데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의 발에 있던 끔찍한 족쇄를 보고서도,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죽이는 이림이를 봤는데도, 의외로 저 생활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일지도.

이도한은 완벽하니까. 이림이를 때리지도 않고. 쌍스럽게 욕하지도 않고…… 이 정도면 다정한 편이잖아.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이림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원하지 않던 생활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괜찮지가 않았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이 코앞에 왔지만 지우는 그 얼굴이 야차처럼 무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섭다고 피했을 것이라면 이미 이림과 함께 도망치고 남았을 것이다.

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당신이 안 변하면 이림이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내가 너한테 조언 구하고 싶대? 건방진 새끼가.”

도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지우는 지지 않고 말했다.

“찾고 싶어 하니까 말씀드리는…… 윽!”

“제발 좀 닥쳐.”

“계속 이렇게 멋대로 하면 이림이는-.”

도한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커다란 주먹이 전등을 가리고 높게 치솟았지만 지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자신의 오지랖도 오지랖이지만, 둘을 보다 보면 너무 답답했다. 자신도 연애를 할 때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서 헤어지거나,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안고 가면서 사랑해 본 적이 있었다.

돈이 많든 적든, 얼굴이 잘생겼든 평범하든 그냥 연애는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모두들 서로 그러려니 단점을 이해하고 사랑할 뿐인데 도한과 이림의 관계는 그것보다 더욱 어둡고 촘촘했다.

도한은 애초에 헤어진다는 관념 자체가 없었고, 이림도 그에게 휘둘리면서도 완전히 정을 떼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봐 왔지만 그렇게 괴로웠는데도 이림은 끝내 도한이 밉다거나 싫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림은 관계를 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혼자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니 도한이 정신 차려야 할 것이다.

둘 사이에 별로 끼고 싶지는 않았다. 목숨 걸면서 오지랖 부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그 애가 다시 붙잡혀 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끝날 일도 아니었다. 둘의 관계는 언제나 폭력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리고 상처 입힌다. 그 폭력은 너무나 거대해서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은 힘도 쓰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갈 것이다.

도한이 이림과 하하 호호 지내는 자신을 못마땅히 여기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자신이 베타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어딘가로 끌려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만약 이림이 지금 돌아오게 된다면 그의 집착은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와 자주 대화하는 자신은 둘 사이에서 빠른 시일 내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지금도 아슬아슬한데 만약 그때가 된다면 자신은 이 일에서 잘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한이 자신을 매장시키는 것은 거의 예정된 미래였다.

지금 죽으나 그때 죽으나.

지우는 그런 생각으로 그 주먹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물론 언제 그 주먹이 내려올지 몰라 가슴이 아플 정도로 뛰었고 그로 인해 숨을 쉬기도 가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한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끝내 손을 내렸다.

“헉…… 허억…… 후우.”

지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잠시. 도한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와장창-.

비싼 가구들이 그의 손에 부서지고 찢겼다. 엄청난 굉음에 지우는 벌벌 떨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도망가고 싶은데 방금까지 충격적인 일을 겪어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사이 방은 형체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부서졌다.

넓은 방 안의 모든 가전과 가구들을 박살 냈지만 그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멍하니 털이 날리고 있는 베개를 바라보는데, 그가 말했다.

“꺼져.”

지우는 그 말에 기다시피 해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나마 사람이 많은 로비 앞 의자에 앉은 그는 헉헉거리며 땀을 닦았다.

산부의 배우자들과 가족들은 다급한 상태의 지우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러나 방금 맞아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우는 한숨을 돌리며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런 성질머리와 5년을 산 게 대단하네.”

방에 있는 도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으며 형체만 남은 침대에 앉았다. 시트를 쓰다듬자 이림의 향이 콧속을 자극했다.

달달하고 은은한 복숭아 향기. 벌써 그가 그리웠다. 하지만 그만큼 배신감까지 들었다. 어째서 갑자기 자신을 떠난 걸까. 도대체 왜!

도한은 자연스럽게 이림이 떠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도망치려 한 이후로는 억지로 관계를 맺으려 한 것도 아니었고, 험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떠날 수가 있어……. 이렇게 쉽게……?”

그는 자신을 흔해 빠진 연애 상대로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어? 그에게 미친 듯이 따지고 싶었다.

이상하게 분노보다는 슬픈 감정이 들었다. 함께 끈을 당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만 놓으면 끝나는 인연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허탈한 적은 처음이었다. 멍하니 빛나는 야경을 바라보는데, 쓰러진 탁자 옆에 떨어진 메모장이 보였다.

“…….”

그것을 주워 천천히 펼쳤다. 그 안에는 익숙한 필체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산들. 자유로운 바람처럼 살았으면 해서.>

“허…….”

도한은 어이가 없어서 종이를 단번에 구겼다. 그리고 갈가리 찢으려 했지만 차마 찢을 수는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이림의 흔적이었기에 손만 움찔거리기만 하다 결국 그 종이를 내려놨다.

자유로운 바람?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이 지어 온 이름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은 어떻게든 이림과 자신을 엮어 적으려 했건만. 그는 머리에 도망갈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안 순간 도한은 참을 수 없이 비참해졌다. 자신이 단꿈에 취해 있을 때, 그는 연기를 해 가면서 도망칠 궁리를 한 것이다.

잠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도한은 하늘을 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이 이름은 이한림이야.”

누구 마음대로. 도망친 주제에 누구 마음대로 이름을 갖다 정해. 이림이 돌아오더라도 그 애가 이산들로 불릴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도한은 이내 일어서 옷에 내려앉은 깃털을 쓸어내렸다. 밖으로 나간 도한은 본격적으로 이림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이번에 찾으면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이림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자신의 인간성과 도덕성을 말살하는 일일지라도 반드시. 그의 눈이 검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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