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동상각몽 (5/14)

5. 동상각몽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지우가 이 집에 오게 된 지 3주가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이제 두 달 정도 흘렀으나 변화는 미미했다. 아랫배가 좀 나왔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이 몰려오고 더위에 뒤척이는 것 외에는 힘든 건 없었다. 가끔 주치의가 다녀갔는데 그는 알파의 페로몬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벌써 한 달 가까이 도한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그 마음을 대충은 알고 있는 주치의는 부드럽지만 강경하게 말했다.

‘산부께서는 남편 분을 안 보는 게 마음 편하시겠지만, 오메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본능입니다. 알파의 페로몬이 있어야 태아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산부께서도 무의식중에 보호를 받는다고 여겨 호르몬 변화로 인한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죠.’

‘예…….’

이림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고 나서도 멍하니 앉아 지우가 요리하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가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은 처음이었다. 전에는 그렇게 가라고, 꺼지라고 빌어도 꿈쩍도 안 하더니만.

그렇다고 도한이 반성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림은 제 발목을 내려다봤다. 벌써 족쇄를 착용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을 처음에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싫었다.

만약 그가 진심 어린 반성을 하고 있었다면 이딴 거지 같은 물건 따위, 발목에서 없애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치를 느껴 보라는 듯이 본인은 두문불출한 채 남들에게 이림의 발목이 보이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림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두 망상인 것은 아니었다. 도한은 이림의 앞을 막는 거대한 존재였지만 그만큼 이림에게 날아오는 날카로운 바람을 막아 줘 왔다.

그런 도한의 부재는 생각보다 이림의 속을 불안하게 만들어 왔다.

이림은 요리가 다 됐다며 웃는 지우를 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우는 저녁을 차려 주고 이림이 다 먹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집을 나섰다. 물론 대부분은 기존에 저택 식당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받아서 데워 주기만 했기에, 지우는 별 어려움 없이 본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럼 가 볼게.”

“응.”

이림은 공허함을 느끼며 지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가고 나자 집에는 적막이 흘렀다. 괜히 외로워져 두부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볐다.

그전까지는 장난감을 부스럭거리며 놀았지만 이림이 다가와 껴안자 발을 늘어뜨리며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는 않는지 뚱한 표정에 꼬리는 좌우로 살랑거렸다.

“외롭다…….”

꺼지라고 한 건 자신이었는데, 왜…….

자존심도 없이 다시 도한을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애를 가져서인지 해방감보다는 마냥 불안했다. 어두운 집 안에 희미한 조명 하나만을 켜 두고 소파에 앉아서 고독을 곱씹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이림은 무심코 일어나 말했다.

“왜, 지우야. 뭐 두고 갔어?”

“…….”

그러나 눈앞에는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했던 존재가 서 있었다. 한 달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림은 점점 얼굴을 굳혔지만 눈동자는 도한을 끊임없이 훑었다.

“왜…… 왔어?”

“가지고 갈 게 있어서.”

도한은 짧게 일갈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림은 자신도 모르게 사라진 도한의 뒤를 쫓으며 무엇을 하나 기웃거렸다.

드레스 룸에서 임원 배지를 찾아 달고 입사 기념으로 부모님에게 받았다는 넥타이를 집은 도한은 문 앞에 선 이림을 보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왜?”

“아니…….”

이림은 화들짝 놀라 뒤돌았다. 그리고 얌전히 소파에 앉아서 도한이 하는 양을 바라봤다. 그는 이림이 있는 거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서재와 안방을 왔다 갔다 하며 물건을 챙겼다.

그것이 마치 이혼을 하면서 개인 짐을 챙기는 부부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주제에, 참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서류 가방에 필요한 짐을 챙긴 도한은 마지막으로 이림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갈게.”

“…….”

“밥 잘 먹고. 잘 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내선 전화로. 알지?”

“…….”

“강이림.”

이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했다. 구두를 신던 도한은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참는 이림의 앞에 다리를 접고 몸을 낮춰 뺨을 감싸 쥐었다.

“왜 이러는 건데.”

“…….”

“꺼지라며.”

“흐흑…….”

지난밤의 따뜻했던 손이 다시 뺨을 어루만지자 참았던 설움이 폭발했다. 동시에 오랜만에 느껴 보는 페로몬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울지 마.”

눈물이 터진 뺨을 쓰다듬기만 하는 도한이 야속해 이림은 먼저 커다란 품을 껴안았다. 그제야 기껍게 마주 안아 오는 도한이었다.

왜 이렇게 나약해 빠진 걸까. 그의 품에서 안정을 느끼면서도 한심함에 몸부림쳤다. 평생 알파라고는 도한 한 명밖에 몰라서, 그가 자신을 무심히 지나치자 불안했던 것이겠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오히려 이림은 더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임신을 하고 대학교 동기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도 도한이 이긴 것이다.

그러나 왠지 마음은 그렇게 괴롭고 슬프지 않았다. 차갑지 않은 절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꿈을 꿨다. 이림은 가벼운 카디건을 걸친 채 설원 위에 서 있었다. 그다지 춥지 않은 것을 느끼며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양 빛을 반사하는 눈덩이에 눈부심을 느끼며 하염없이 앞으로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며 자유를 만끽했다.

고드름이 맺힌 소나무를 구경하기도 하고, 얼어 버린 꽃을 관찰하기도 했다. 누가 볼 사람도 없었지만 눈을 뭉쳐 정성스레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무리 눈을 만져도 시리지 않았기에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들어 메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눈사람의 목에 메어 뒀다. 그리고 나뭇가지와 솔방울을 얻기 위해 뒤를 돌았다.

‘앗!’

저 멀리서 커다란 설표가 입김을 내뿜으며 앉아 있었다. 잿빛 털에 아름답게 검은 점이 새겨진 표범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미동도 없이 이림을 보고 있었다. 순간 이림은 꿈이라는 것도 잊고 허둥댔다.

슬슬 뒷걸음질을 쳤지만 천천히 일어나는 저 표범이 자신을 덮치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포기하고 가만히 서 있는 채로 꿈에서 깨기를 바라는데, 커다란 짐승은 이림을 관찰하듯 콧김을 내뿜으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리고 움찔하는 이림의 얼굴을 커다란 혀로 핥았다.

이리저리 도리질 쳤지만 결국 온 얼굴이 축축이 젖었다. 그제야 만족한 짐승은 이림의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타……?’

이림은 자기도 모르게 그 등 뒤에 앉았다. 엎드려 털을 꼭 잡자 설표가 빠르게 도약했다.

깜짝 놀란 이림이 비명을 지르든 말든 엄청난 속도로 뛰는 짐승의 위에서, 이림은 떨어지지 않게 안간힘을 쓰며 움츠렸다. 하지만 왠지 웃음이 나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설원, 눈을 박차는 힘찬 발돋움, 차갑다 못해 폐부를 깊숙이 얼어붙게 만드는 공기를 마신 이림은 그 비현실 속에서 자유를 느꼈다.

그것이 첫째의 태몽이었다는 것은 한참 뒤에나 깨달았다.

***

도한은 그다음 날부터 바로 별채에서 출근을 시작했다. 워낙 일찍 도착하고 늦게 퇴근하니 지우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가끔 운 없게 마주치면 지우는 쭈뼛쭈뼛 인사를 했다. 도한이 출근을 할 때까지 가시방석인 지우와 다르게 도한은 지우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가끔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었다.

둘이 불편한 기류가 흐르거나 말거나 이림의 안색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딱히 입덧이랄 것도 없어 하루가 다르게 몸이 불어갔다.

오늘도 괜히 진득하게 앉아 이림과 대화를 나누던 도한이 목에 짧게 키스한 뒤 밖으로 나섰다. 곁에서 앉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있던 지우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

“와, 씨. 왜 이렇게 무섭냐? 그냥 서 있어도 압박감 들어. 다리 아프다.”

“내가 앉으랬잖아…….”

“너 같으면 그 사람 옆에 앉겠냐? 에이, 됐어……. 네가 뭔 잘못이냐.”

지우는 털썩 앉으며 투덜댔다. 이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밑을 바라보자 점점 둥글어지는 배가 보였다. 벌써 4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옷 위로 배가 나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를 가질 때만 해도 11월이었는데. 지우는 무심코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 비행기 타고 여행 가고 싶다.”

“비행기?”

“엉……. 안 타 봤어?”

이림은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지우는 당황해서 눈을 굴리다 옛날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림은 영화관을 간 적도 없었고 놀이동산을 가 본 적도 없었지. 하물며 비행기 타고 여행을 가 봤을까.

그리고 이림이 입은 옷을 바라봤다. 한 벌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니트와 카디건을 입으면서 남들 다 하는 여가 생활은 못 즐기고 있었다.

지우를 도와준답시고 얌전히 빨래를 개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상체와 달리 구부린 발에 걸려 있는 족쇄는 이질적이고 음산해 보였다.

자신이 있을 때는 무표정, 혹은 찌푸린 얼굴만 하는 그 남자와 같이 사는 이림이 불쌍했다. 게다가 알파의 집착과 소유욕의 부산물인 저 족쇄는 굉장히 흉물스러워 보였다.

도망치게 할 수 있을까.

지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기구하게 사는 이림이 안타까웠고, 잠시나마 친구로 지내며 쌓은 우정이 안온한 삶을 원했던 지우의 지반을 흔들어 댔다.

그러나 채 5분이 지나기도 전, 지우는 포기했다. 일단 저 족쇄를 푸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으며 어찌 저찌 풀었다 해도 임신한 이림을 데리고 빠르고 안전하게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간신히 살이 찌고 안정을 되찾은 이림을 다시 긴장하게 하기는 싫었다.

이림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지우는 고개를 돌렸다. 잠시나마 주제넘은 생각을 한 자신을 탓하면서.

그것을 전혀 모르는 이림은 빨래를 개며 비행기를 상상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보다 무서우려나? 이림은 심각히 고민했다.

지우는 불편한 기분을 환기하려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태명은 정했어?”

“태명?”

“에이.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니야? 벌써 네 달째인데.”

“으음…… 몰라. 두부 이름 짓는 것도 오래 걸렸는데 아기 태명은 또 언제 지어.”

이림은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끙끙 고민했다. 지우는 그 옆에서 한 가지 조언을 던졌다.

“뭐 꿈같은 거 꾼 적 없어?”

“꿈? 태몽 말하는 거야?”

“응. 좀 느낌이 남달랐거나 기억에 남는 거 있잖아.”

“어…….”

그렇게 물어보니 기억이 나는 꿈이 있었다. 커다란 짐승과 함께 설산을 달리던 꿈. 평생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림은 홀린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응……. 있었어.”

“오! 뭔데 궁금해! 나도 알려 줘.”

“커다란 설표랑 눈 위를 막 뛰어다녔어. 그렇게 많은 눈은 생전 본 적도 없는데.”

이림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우는 그거네!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음……. 간단하게 범이 어때?”

“범이?”

“응. 너무 평범해?”

“아니……. 좋아.”

이림이 부스스 웃었다. 사실 계획을 한 임신이 아니라 아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사랑하는 데는 남들보다 오래 걸렸다.

지금도 임신을 했다고 해서 기쁜 것도 아니었고 딱히 슬픈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배 속의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범이, 범이. 누가 들을까, 입으로 작게 속삭이던 이림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은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도한은 그런 이림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한 그는 한발 물러서기로는 했지만 그가 뭘 하고 무엇을 먹는지, 저 베타 새끼와 뭘 하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도한의 형은 그런 도한을 보고 의처증이라고 비웃었지만 도한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는 형이 더욱 불쌍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24시간 붙어 있고 싶었지만 이림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면 업무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됐다.

김지우라는 베타는 옆에서 조곤거리며 이림의 기분을 살폈고 이림은 작게 키득댔다.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아 도한은 신경질적으로 컴퓨터를 껐다.

김지우를 데려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원래부터 우울증 증세가 심각했지만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욕심에 주치의의 말을 무시했다가 끝내는 이림이 유산을 할 뻔했다.

김지우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느끼는 이림은 다시 눈에 총기가 스몄고, 피부는 뽀얀 빛을 냈다.

마치 스무 살 때와 같이 밝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선택이 옮았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저 새끼를 평생 옆에 둘 수는 없지.”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이었다. 자신이 이 상황을 두고 보는 것은.

그런데 뭔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데, 제 앞으로 점점 거대한 악재가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초에 워낙 많은 이들에게 원한을 샀던 도한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이림조차 도한을 미워했다.

도한은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새로 고용한 비서를 불러 회의에 참석할 채비를 했다.

***

5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점점 이림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괜히 더 조심하게 됐다.

집 안에서는 혹시나 이림이 다치거나 넘어질까 봐 문턱을 없애고, 가구 모서리에 쿠션을 씌웠다. 이림은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매사 조심하며 다니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도한은 답답해하는 이림을 위해 바다를 가기로 했다. 지우는 간만의 휴가라며 은근 좋아하는 눈치였고 이림은 조금 두려웠다.

항상 나가려 노력해 봤지만 결국 한 번도 제대로 나가질 못했던 기억이 머리에 각인됐다. 이제는 나간다는 행동 자체가 두려워졌다.

잘됐다는 지우의 말에도 예상외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얼굴이 의아했지만 끝내 물어보지는 않았다.

벌써 3개월이 넘게 이 집에 출근과 퇴근을 하면서, 지우는 건드려도 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예전 친구들 근황이나 아기에 관한 이야기처럼 가벼운 대화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림을 자극할 수 있는 탈출에 관한 이야기나 족쇄에 관한 질문은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친구로서 이런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지만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흔들어 놓는 것보다는 모른 척하는 것이 더 나았다. 이림은 지우가 문을 닫고 나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슬쩍 밖을 보니 작게 난 창으로 색이 죽어 버린 하늘이 보였다. 해는 구름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고 먹구름만이 잔뜩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씨에 또 비가 내리려나 보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 위에 빗물이 떨어져 고동색으로 변했다.

“아…….”

무감하게 창 너머를 보는데,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두드림을 느낀 이림이 눈을 크게 떴다. 티셔츠를 걷어 내자 부른 배가 보였다. 숨죽이고 기다리자 배의 한쪽이 작게 솟았다 꺼졌다.

“신기해…….”

이림은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얼마 전 봤던 임산부 교육 영상들이 재생됐다. 태동을 느끼고 행복해하는 산부와 남편, 가족들.

아기 초음파 사진을 들고 있는 오메가를 끌어안은 알파의 모습. 축하해 주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미소 짓는 영상 속 오메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아이는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이림은 그것이 내심 신경 쓰여 괜히 배를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

“아기용품을 주문했다고.”

도한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보고를 받았다. 이림이 아기 옷과 장난감, 태교 동화 등을 주문했다. 그는 내심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역시 이번에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 마음이 약한 그는 아기를 외면하지 못하고 안고 가기를 결정한 것이었다.

비록 상태가 아슬아슬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전화를 끊은 도한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상하게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음에도 도한은 담배를 끊지 못했다. 집에는 임산부가 있으니 담배를 피울 수 없어 사무실에서나마 피고 있었다.

이림이 끊으라 하면 끊을 수 있겠지만 그다지 제재하는 사람도 없어 계속 피우고 있었다.

스스로 금연해야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병에 걸린 것처럼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미 오전에도 한 갑을 피워 재떨이를 간 상태였다.

이림의 불안병이 자신에게 옮은 건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그가 주는 것이 기껍긴 했으나 건강을 위해서라도 끊어야 할 것이다.

도한은 아기가 생긴 것 자체는 기뻐하고 있었지만 그 배 속의 존재에 대한 감상은 전혀 달랐다.

그의 배 속에 자리 잡은 소중한 생명이었으니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속으로는 참 끈질긴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림은 임신한 와중에 공진과 몸싸움을 하고 제 신경을 거스르기 위해 쓰러질 때까지 굶기도 했다. 보통 이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그다음은 보나 마나였다.

그러나 아이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몇 번이나 위기가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크고 있으니 이건 기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태어날 아이도 만만치 않은 성정을 가진 것 같아 착잡했다. 될 수 있으면 이림의 성격을 닮았으면 했다.

토요일이 되고, 둘은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양말과 속옷 외에도 혹시 모를 한파를 위해 털장갑과 귀마개, 손난로를 챙겼다.

또 이림은 보온을 위해 내복을 입고 또 넉넉한 바지를 입었다. 상의는 목티를 입고 그 위에 넉넉한 카디건을 입었다.

“그만해……. 갑갑해.”

“이렇게 안 하면 안 나갈 거야.”

그 위에 다시 잠바를 입고 목도리까지 씌우자 이림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도한은 완강했다. 입을 삐죽 내민 이림의 볼에 쪽 입을 맞춘 도한이 목도리를 둘렀다.

이림은 짐을 들고 별채를 나서는 도한의 뒤에 바짝 붙어 사방을 경계하며 따라나섰다. 대리석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져 따뜻한 온돌이 깔린 복도를 지나치면서도,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복도를 나가자 수많은 고용인들이 잠시 멈추고 하나둘씩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것이 두려워서 거부했던 목도리에 고개를 묻고 아무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모두들 땅을 바라보고 있지만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느낀 이림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따뜻한 손이 소매 속에 감춰진 이림의 손을 꺼내 깍지를 껴 왔다. 그러자 오한이 들었던 몸에 확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알고 있다. 도한과 자신을 보는 눈빛이 곱지 않다는 것을. 고용인들 대부분이 겉으로는 둘의 관계에 관심 없다는 듯 행동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갑자기 사라졌지만 이전에 차 비서도 비슷한 종류의 불쾌한 눈빛을 하고 자신을 바라봤다. 이림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자신이 일일이 해명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진실을 알아 봤자 이림을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은 여전할 것이다.

자신이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에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믿을 사람은 도한 한 명밖에 없었다. 결국 그 커다란 손을 맞잡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을 보며 계속 걷자 샛길이 나왔다. 문을 열자 붉은 꽃들이 자신을 반겼다.

살짝 눈을 맞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색을 잃지 않은 동백꽃은 눈이 아프도록 붉었다. 꽃의 폭포를 지나쳐 조수석에 오른 이림은 무의식중에 배를 다시 한 번 만졌다.

차에 올라 커다란 잔디밭을 지나자 드디어 대문이 열렸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여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대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두 사람은 동해 바다로 출발했다.

서울에서 출발하다 보니 꽤 거리가 멀었다. 중간에 들린 휴게소에서 이림은 괜히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했다.

엠티 갔을 때 딱 한 번 가 본 휴게소보다 더 넓고 다양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돈이 없어 수학여행이나 현장학습을 가지 못해서 더욱 신기했다.

고속도로 한가운데 이곳만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게 왠지 이질적이었다. 그렇게 한참 사람 구경을 한 이림을 다시 태운 도한은 몇 시간을 더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오랜 시간을 달려 강원도에 도착했다. 일부러 바다 앞 호텔에 자리를 잡아, 나가지 않고서도 호텔에서 바다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퀸사이즈 침대와 방만큼 넓은 화장실이 부담스러웠지만 은은한 조명과 적당히 따스한 온도로 맞춰져 있어서 내부가 아늑해 보였다.

이림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꽤 마음에 드는 듯 사방을 바라봤다.

도한은 이림이 나가지 않고 호텔 안에서 휴식을 취하길 바랐지만 계속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바람에 결국 해가 지기 전까지만 바다 구경을 하기로 했다.

바다 가까이 가자 더욱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뭘 감상할 것도 없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파도는 바람을 만나 거칠었다. 푸르다 못해 새까맣게 보이는 바닷물을 못마땅하게 바라본 도한은 저 멀리 걸어가는 이림을 불렀다.

“너무 멀리 가지 마.”

“…….”

이림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비린내가 훅 끼쳐 오는 것을 느끼며 사방을 바라봤다. 겨울이다 보니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저 멀리 횟집과 어선이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 낀 것 같아 가슴이 뛰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오래 느낄 새도 없이 금세 도한이 뛰어와 주의를 줬다.

“홑몸도 아닌데 자꾸 나 버리고 갈래?”

“뭘 버려…….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이림은 어이가 없어 반박했다.

아기가 생기고 감시가 덜할 것이라 생각한 이림과 달리, 도한의 간섭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한은 매사 예민한 눈빛을 띠며 눈에 불을 켜고 이림의 행적을 좇았다.

옆에 바짝 붙어선 것도 모자라 제 손을 쥐었다. 이림은 울컥 짜증이 나 팔을 빼고 달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럴수록 더 옥죄는 것을 알지만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도 아니고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뒤에서 도한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 느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보폭을 넓게 해서 뛰었다.

그러나 30초도 되지 않아 잡혔다. 뚱한 표정의 이림을 세워 둔 도한은 깜짝 놀라 타박했다.

“너, 뭐 하는 짓이야. 넘어지면 어쩌려 했어.”

“그러니까 그만해!”

이림은 똑같이 응수하며 도한을 노려봤다. 도한은 기가 차 잠시 바다를 보며 불안감을 삭였다.

참 어려웠다. 분명 자신의 옆에 있는데, 아이까지 뱄는데 자꾸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았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이림이 아니라 자신 같았다.

게다가 자꾸 돌발 행동을 하는 이림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지만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매서운 검은 눈을 마주친 이림은 금세 우물쭈물했다.

하긴, 자신도 너무 생각이 없었다. 배에 아기가 있는데 함부로 뛰다니.

이림이 얌전해지자 도한도 이내 감정을 삼켰다. 둘 사이에는 커다란 파도 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도한은 옷깃을 여며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난 널 걱정하는 거야. 또 아프면 안 되니까…….”

“응……. 알겠어.”

그의 품에 안긴 이림은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집착을 버려주면 좋으련만. 도한은 사랑이라고 했지만, 자신을 소유물로 아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오랫동안 몸을 껴안고 체온을 나눴다.

호텔로 돌아온 이림은 룸서비스로 온 음식들을 배부르게 먹었다. 불행 중 다행은 입덧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꾸벅거리며 조는 이림을 눕힌 도한은 그의 머리칼을 쓸며 재웠다. 등을 토닥이는 것보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하는 이림은 금세 꿈나라로 떠났다.

꿈속에서 다시 그 범을 만났다. 몇 개월 전 봤을 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집채만 한 범이 신기해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두부가 애교를 부리는 것과 비슷해서 웃음이 났다.

오늘도 그때와 똑같은 설산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멀리 가지 않고 함께 술래잡기를 하며 장난을 쳤다. 말이 술래잡기였지, 이림이 숨으면 짐승은 졸졸 따라왔을 뿐이었다.

기분 좋은 꿈을 꾼 이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옆을 보자 웬일로 도한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림이 뒤척이면 금세 눈을 떠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림이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도 일어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여유를 잃은 도한이 오랜만에 스트레스 없이 잠든 것 같았다. 게다가 강원도까지 운전을 하다 보니 피곤이 더해진 것 같다. 잠든 도한을 보던 이림은 멍하니 바깥을 바라봤다.

“와…….”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주먹만 한 눈이 쉼 없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흰 눈은 늦은 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아까 봤던 횟집의 낡은 간판 위에, 어선 선박 위에, 호텔 베란다에 한가득 쌓인 채였다. 새벽 내내 내렸는지 한 뼘 이상 쌓여 있는 채였다.

현실감이 없는 눈발을 보니 이상하게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없는 고요한 새벽 여섯 시. 아직은 흐린 하늘 아래, 끊임없이 내리는 눈. 숨 막히는 고요가 이림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래. 아직 꿈을 꾸고 있는지 몰라.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곧잘 깨는 도한이 미동도 없이 잠든 것도 이상하고, 눈 온다는 소식도 없었는데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는 것도 이상해.

‘아직 꿈을 꾸고 있나 보다.’

이림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구경했다.

온 세상을 얼릴 듯 눈이 내렸지만 창문 밖의 바다는 조금도 얼지 않았다. 모두가 새하얀 가운데 검푸른색을 유지하며 파도를 밀고 당기는 바다는 고고해 보였다.

그 바다를 관찰하다, 해안가로 이어진 숲을 발견했다.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인 숲.

작은 섬처럼 둥그런 숲은 왠지 모르게 이림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제는 못 봤는데.’

아. 꿈을 꾸고 있으니까 생겼나 보다. 이림은 혼자 납득하고는 일어섰다. 그 표범이 아직 자신을 기다릴지도 몰랐다.

인사도 하지 못하고 깨 버렸으니까. 제 눈앞에 없던 숲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제는 자신이 먼저 다가갈 차례였다.

이림은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해 있었지만 꼼꼼히 양말을 신고 잠바를 입었다. 그 와중에도 도한의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도 많이 겹쳐 입어서 눈사람 같아진 이림이 뒤뚱거리며 밖을 나섰다. 이림이 문을 닫을 때까지 도한은 고요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2권에서 계속-

[그 별채의 정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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