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의 손바닥 안에서
야옹-.
집을 나서려니 현관 아래 놓인 고양이용 쿠션에서 골골대던 두부가 재빨리 걸어왔다. 아직도 주먹만 한 크기였지만 눈빛은 초롱초롱하고 맑았다.
이림이 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처럼 제 손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입으로 깨물어 댔다.
오히려 기분이 좋은 듯 배를 까뒤집으며 웬일로 애교를 부려 댔다. 마치 가지 말라는 듯 붙잡는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망설이던 이림은 잠깐 쭈그려 앉은 상태로 작별을 고했다.
“미안해……. 하지만 그 사람이 잘 챙겨 줄 거야…….”
이림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었지만 반대로 고양이는 그의 간지러운 손길에 배를 보이며 좋아할 뿐이었다. 짧은 인사를 끝내고, 이림은 비장한 표정과 함께 일어섰다.
드디어 이 지옥을 벗어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먹는 것, 입는 것, 취미, 생활 반경까지 통제당하는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림은 현관에서 일어서 거실로 돌아가 베란다로 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열리면 안 될 중문이 열렸다.
“…….”
“이림 씨……? 지금 어딜…… 뭐 하시는 겁니까.”
조금 뛰어온 듯 헐떡이며 문을 열어젖힌 공진은 코앞에 선 이림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해 굳은 이림을 찬찬히 살핀 공진의 표정이 어두웠다.
허리에 묶은 줄, 묵직한 점퍼 주머니, 모자와 운동화. 그리고 도한의 부재까지. 그것들이 뜻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공진은 어이없다는 듯, 불쾌하다는 듯 물어봤다.
“도망가려고요?”
“…….”
“제가 말했을 땐 들은 척도 않더니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이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팔짱을 낀 공진은 눈앞에 서 있는 이림을 언짢게 바라봤다. 이림은 어처구니가 없어져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전 도와줄 필요 없다고 한 거지, 안 나가겠다고 한 게 아니에요.”
“아하…… 끝까지.”
빈정거리며 더 험악해지는 말투에 이림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이렇게 말싸움 할 시간이 없었다. 자신은 지금 당장 탈출해야만 했다. 도한이 별채를 나와 차를 타고 태블릿을 꺼내기까지 약 20분. 그 태블릿을 켜면 감시카메라를 볼 수 있었다.
몇 주 동안 얌전히 지냈으니 그가 수시로 카메라를 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이미 침대에는 베개로 자신이 누워 있는 척 꾸며 놓은 상태였기에 지금 당장 마당으로 나가 탈출해야만 도한이 최대한 늦게 알아챌 것이다.
흘끗 시계를 보니 이미 5분이 넘게 흘렀다. 이림은 더 이상 말씨름을 하기 싫어 대답하지 않고 그냥 마당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마당을 밟기도 전에 팔이 잡혔다. 엄청난 힘이 자신을 깔아뭉갰다.
“어딜 가!”
“이거 놔! 네가 뭔데 날 방해해!”
이림은 다급함에 마구 날뛰며 잡힌 팔을 흔들었다. 어떻게 기다린 기회인데. 이림의 눈에 분노가 서리자 주춤했던 공진은 거칠게 나왔다.
“날 먼저 꼬셨으면서. 이번 주 금요일에 그 사람이 출장 간다는 건 내가 알려 줬잖아요! 알 것 다 아니까 이제 모른 척하기입니까?!”
“이도한은 매년 이날에 공장 시설 점검한다고 지방으로 내려갔어. 원래 알고 있었다고!”
“그걸 지금 믿으라는 겁니까?”
“믿든 말든 상관없어. 당장 놔. 그냥 못 본 척 네 할 일이나 하라고.”
급한 마음에 쏘아붙인 이림이 뒤를 돌았지만 덮쳐 오는 무게에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대로 무릎과 팔이 까졌다.
“윽…….”
“정말로 날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냥 저 혼자 착각한 겁니까? 예? 대답해 봐!”
진짜 미친놈인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한 팔의 악력에 허리가 잔뜩 졸린 이림이 마당의 잔디를 손으로 뜯으며 버둥거렸다.
동시에 최공진이라는 사람의 인간성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자신은 동생처럼 귀여워했는데. 실망과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자 화단 근처에 놓아 둔 모종삽이 있었다. 이림은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으려 쩔쩔맸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종삽을 향해 발끝에 힘을 주고 몸을 앞으로 밀었다.
온 힘을 다해 상체를 위로 밀자 삽을 쥘 수 있었다. 모종삽을 잡고 어깨에 매달린 공진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 씨발…….”
순간적인 충격으로 공진의 손에 힘이 풀리자, 이림은 그 틈을 이용해 품 안에서 벗어났다. 재빨리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둘은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이림이 중얼거렸다.
“절대 너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 너한테 물어봤던 것들…… 그래, 인정할게.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서 물어본 거야. 그런데 난 그냥 너와 친분을 쌓고 물어보려 한 거지, 다른 의미는-.”
“하! 이것 봐. 역시 꼬리친 거잖아. 그러면서 사람을 무슨 등신 취급해.”
공진은 다른 말은 듣지 않고 인정한다는 말에 꽂혀 길길이 날뛰었다. 화난 황소처럼 들이받는 공진을 이길 힘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분통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도한도 그렇게 깃털 다루듯 자신을 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력을 쓴 적은 없었다. 처음 겪는 엄청난 무게와 고통에 이림은 잠깐 기절할 뻔했다. 반 정도 의식을 잃고 본능적으로 도리질 쳤다.
그러나 이림을 손쉽게 제압한 공진은 이림의 뺨으로 손을 올렸다.
그때 이림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나한테 손대면 죽어.”
“…….”
공진은 순간 멈칫했다. 도대체 어떻게 죽이겠다는 건지. 오메가의 헛소리 따위는 무시해도 될 텐데, 이상하게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 도한은 출장을 떠났고 이 휑한 별채에는 자신과 이림뿐이었다. 도망치는 마당에 도한에게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중에 도한이 카메라를 보고 자신을 체벌할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도망친 마당에 자존심도 없이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살면서 겪은 알파들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오메가를 부속품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더럽고 추잡한 세계. 공진도 그런 세계에서 길러진 알파였다.
하지만 이림의 표정은 겁먹은 와중에도 또렷했다. 어떤 꾸밈이나 허세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맑았다. 결국 손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갈 생각은 없었다.
내린 손을 올려 위부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도망가기 위해서 캐주얼한 옷을 입은 이림의 옷은 쉽게 벗겨졌다. 이림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제발 좀 그만해!”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날 거부하는 당신을 보면 화가 나고 돌아 버릴 것 같아.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요.”
막무가내로 입을 맞추려 하는 공진을 보던 이림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이젠 모르겠다. 아무것도 못 했는데, 더 이상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하도 꽃뱀 취급하니 이제는 정말 그런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 너희 같은 알파에게 휘둘리며 줏대 없이 살다가 뒤져야 만족하려나? 아니, 이들은 정말 그것을 원할지도 몰랐다.
이림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공진이 더욱 다급해졌다. 이림은 멍하니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공진이 제 할 일을 마치면 죽어 버리자.
그런 이림의 마음도 모르고 공진은 제 욕구를 채우기 바빴다. 흰 살결이 드러난 몸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 입술을 부비기도 하면서 헐떡거렸다.
사실 공진도 지금 자신이 하는 짓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지옥에 빠진 벌레처럼 쓰레기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이 더러운 기분이 몰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을 탐한다는 쾌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공진이 본격적으로 이림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을 때였다.
“헉…… 하아.”
“재미 좋나 봐.”
도한이 마당 한가운데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에 그의 손목에 달린 메탈 시계가 번쩍이며 빛났다.
별채를 나갔을 때와 똑같은 모습에 이림은 잠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했다.
흠칫 놀란 공진이 눈을 부릅뜨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 제정신이 들기 시작한 공진은 낭패감에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우성 알파로서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이 산 공진도, 처음으로 등 뒤의 도한이 사신처럼 느껴졌다.
도한이 수발들어 주는 아랫사람들에게는 까다롭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풀어졌었나 보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등 뒤로 다가온 도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진은 이 저택에 일한 이후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거 놔!”
도한의 뒤로 정장을 입은 알파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개중엔 공진과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공진을 흘끔 본 사람들은 발광하는 그의 목덜미를 눌러 왔다.
겨우 무거운 몸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이림은 헐떡이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들을 피해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림은 두려운 눈으로 도한을 올려다봤다.
이림이 무력하게 떠는 사이, 공진은 팔과 다리가 순식간에 묶여 굴욕적인 자세가 되었다.
펄떡이는 공진을 보며 도한은 담배를 빼 물었다.
약 20분 전, 도한은 별채를 나서자마자 휴대폰을 켰다. CCTV로 그의 행적을 쫓으며 대기한 차로 다가갔다. 이림은 분주하게 소지품과 밧줄을 챙겼다.
하…….
제 딴에는 큰 결심을 하고 고민하며 움직이고 있었지만 도한이 보기에는 한없이 허술했다. 귀엽기도 하고 내심 씁쓸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기회를 줬는데, 결국 배신하는 연인을 본 도한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대로 휴대폰을 바닥에 던지자 액정이 날아갔다. 도저히 손으로 던진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휴대폰을 뒤로하고, 대기한 자동차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여는 비서와 대기하는 수행원들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멍을 단 공진이 숨죽인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시 멈춰선 도한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차 비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 도한을 보며 당황한 듯 한 번 물었다.
“상무님……?”
“최공진 씨.”
도한은 비서에게 대꾸하지 않고 저 멀리 서 있는 공진을 불렀다. 도한이 자신을 부르자 공진은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멍하니 도한을 바라보다 멀뚱대는 공진을 보고 인상을 찌푸린 차 비서와 눈이 마주친 후에야 공진은 황급히 달려왔다. 요즘 그는 제정신이 아닌 채 살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1%도 되지 않는 우성 알파로 발현하면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형질은 곧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앞으로 큰 사고가 없다면 집안이 일으켜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보다 빠른 성공을 위해 이성그룹의 밑에서 일을 배웠다. 이제 20대 초반이 되었지만 십 년 넘게 일해 온 연륜 있는 경호원들과 같은 직급을 달 정도로 능력 하나로 고속 승진한 공진이었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성장한 만큼 자신의 일상을 없애고 희생해 왔기에, 공진은 상식이나 감정이 뒤떨어졌다. 그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배움과 경험의 문제였다.
그래서 캣 타워를 설치하러 간 날, 이림을 보고 곧바로 거대한 감정에 집어삼켜졌다. 이림이 별 의미 없이 내민 손길에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임자 있는 오메가였다.
조심스레 감정을 드러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이었다.
그날 밤, 공진은 끙끙 앓았다. 그리고 솔직히 자존심에 상처도 입었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났지만 한미한 집안을 제외하면 한평생 누군가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을 해 오면서 스폰을 해 주겠다는 사람들도 몇 있을 정도로, 능력이나 외모에서 누구에게 뒤처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림은 그런 공진의 잘생긴 외모나 형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끔 공진이 귀엽다는 듯 웃긴 했지만 그것이 다였다. 오히려 도한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며 밀어내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던 도중, 도한이 이렇게 부르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한은 별말 없이 공진을 바라보다 여상한 말투로 심부름을 시켰다.
“별채 서재에 있는 서류 봉투 좀 가져와요.”
별 의미 없는 단순한 심부름에 공진은 안도하며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았다. 커다란 저택을 빠르게 달려 안쪽에 도달해 별채 문을 연 순간, 이림과 마주쳤다.
평소와 다른 행색에 그가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것도 자신이 알려 준 정보를 통해서 말이다.
이림은 이미 도한이 어느 시기에 자리를 비우는지 알고 있었다 말했지만 그 해명은 공진에게 들리지 않았다. 순간 정신이 나가 뿌리치는 이림을 덮쳤다.
그 향긋한 복숭아 향과 부드러운 살결에, 순간 이곳이 어디고 그가 누구의 오메가인지 잊어버렸다.
도한의 앞에서 묶이고 나서야 그것이 시험이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도망치려는 이림을 보고 도한에게 보고했다면 자신은 성공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비참한 꼴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기회를 발로 찬 것은 자신이었다.
이를 악무는 공진을 본 도한은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이림에게 다가갔다.
“적어도 저 새끼랑 배 맞추진 않았으니까, 그건 넘어갈게.”
“…….”
“됐지?”
그럼 일어나.
이림에게는 스스로 일어나라 말했지만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악!”
마당을 지나 거실로 끌고 간 도한은 소파에 그를 밀어트렸다. 곧이어 구타당해 곳곳에 피를 흘리는 공진이 경호원들에게 질질 끌려왔다.
가차 없이 맞았지만 공진의 눈은 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도한은 왠지 짜증 난다고 생각하며 이림의 옷을 벗겼다.
숨죽이던 이림은 당황하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댔다.
“왜 이러는 거야!”
당장 어떻게 빌어야 할지 생각하던 이림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발버둥 치는 이림을 가둔 도한은 그대로 입을 겹쳤다.
“읍…….”
애정 없는 거친 키스에 이림은 경기를 일으켰다. 이에 끝나지 않고 도한은 이림의 마른 입가가 터질 정도로 깊숙이 혀를 집어넣어 쓸어 댔다.
이림이 그를 떼어 내기 위해 손을 휘둘렀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이곳저곳을 보다가 이쪽을 빤히 보는 공진과 눈이 마주쳤다.
“……!”
너무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었다. 동시에 눈물이 터져 나오며 볼을 적셨다. 뜨거운 눈물을 도한도 느꼈지만 입술을 떼진 않았다.
십 분이 지났을까, 이십 분이 지났을까. 제 욕심을 다 채운 도한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거칠게 뜯겨 상체가 드러난 이림은 입술이 잔뜩 부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슬픔에 잠겨 꿈쩍도 못 하고 있었지만 도한 같은 알파가 보기에는 그저 유혹적이었을 뿐이다.
이림이 반항하면 더한 짓도 하려 했으나, 반항을 멈췄으니 이쯤 해도 될 것 같다.
뒤를 보자 공진은 도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방금까지 이림과 자신을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본 것을 안 도한은 일부러 그의 앞에서 이림의 몸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그것으로 공진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의도를 깨닫게 된 공진은 체념했다. 이림과 공진이 고개를 떨군 순간에 도한만이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끌고 가.”
큰 소리로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마당에서 나온 경호원들은 신속하게 공진을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라에서도 엄격하게 보호하는 우성 알파였지만 앞으로의 출셋길은 모두 막힐 것이다.
그러나 도한은 이쯤에서 멈추지 않았다.
충격받아 늘어진 이림을 안은 도한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인형처럼 늘어진 이림을 조심스레 눕히고 서재로 가 금고를 열었다. 금고에는 기다란 사슬이 있었다.
그것을 들고 이림에게 다가가자 이림의 눈이 점점 커졌다. 사슬을 손에 쥔 도한은 악마처럼 보였다. 그가 사슬을 풀어 족쇄를 열자 이림은 순식간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잘못했어……. 제발! 다시는 안 갈게……. 도망갈 생각도 안 할게.”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이것만 달게.”
“싫어……. 싫어! 한 번만 기회 주면 안 될까? 나, 나 정말 정신 차렸어!”
이림은 비참하다는 생각도 없이 매달려 왔다. 그것을 빤히 본 도한은 우는 얼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고부터 딱히 극렬한 감정표현을 하지 않던 이림이 자신에게 울고불고 매달리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한 번만 더 도망가면 발목이 아니라 목에다 할 거야.”
“흐읍……. 싫어……. 제발…….”
이림은 도리질 치며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도한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것을.
도한은 우는 이림을 달래지도 않고 발목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발목에 사슬을 채우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이림은 마당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좁은 생활 반경은 갑갑할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다.
이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아니, 마주치는 것도 피하겠지. 이런 족쇄를 달고 다니면 편견 없는 그 누구라도 이상하게 볼 것이다.
오히려 도한은 이렇게 된 상황이 기꺼웠다. 족쇄가 달린 발목에 입을 맞추며 슬그머니 위로 올라왔다. 이림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도한은 만족스럽게 가냘픈 몸을 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거대한 저택 안에 꽁꽁 숨겨진 별채는 오늘도 누군가의 슬픔을 먹어 가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요즘 들어 도한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까칠했던 얼굴은 생기 있게 돌아왔고, 하루에 한 갑은 피우던 담배도 일시에 끊었다.
이림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제대로 도망치기도 전에 실패한 충격이 가시지 않는 것 같다. 도한이 뭘 해도 반응이 없었지만, 도망을 시도한답시고 쓸데없는데 열을 올리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의 소란을 눈치챈 여동생 이도선은 도한을 지겹다는 듯 바라봤다.
도한과 비슷한 눈매를 가져 누가 봐도 혈연이었지만 도선은 자신의 둘째 오빠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차라리 약간의 나르시시즘이 있는 첫째 오빠가 인간적으로는 나은 사람이었다.
셋 중에 가장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도선은 한마디 했다.
“그날 쥐 잡듯 잡았다며.”
“…….”
“다- 되돌아온다.”
“쬐끄만 게.”
도한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그녀를 무시했다. 알파인 자신에게 쬐끄맣다는 말을 하는 것은 도한밖에 없을 것이다. 도선은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큰코다치지, 뭐.
도한은 모두의 우려 속에서도 꿋꿋했다. 아무리 별채에서 일어난 은밀한 사건이라 해도 보는 눈이 수백인 이곳에서 모두의 눈을 피하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를 보는 시선에도 희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도한이 직접 부리는 사람들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살림을 도맡는 고용인들은 그 소란의 전말을 들은 후 도한이 두렵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원래도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던 도한은 자신에게 친한 척 다가오는 고용인들이 없어져 오히려 편하게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도한의 마음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얌전한 듯했던 이림이 또다시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한은 밥그릇을 노려보기만 하는 이림을 보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먹어.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
“강이림.”
이림은 조용히 앞을 보다가, 도한이 어린애 혼내듯 성을 붙이는 것을 보고 확 짜증이 나 그를 노려봤다.
“내가 먹기 싫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
끝난 게 아니었군. 도한은 피곤하다는 듯 눈썹을 짚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리고 상식적인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지금 더 안 먹으면 영양실조로 쓰러져.”
“…….”
“그래. 먹지 마. 처먹지 마.”
쨍그랑-!
도한은 짜증 난다는 듯 식탁의 밥그릇을 쓸어 버렸다. 식탁에 정갈하게 놓여 있던 쌀밥과 계란말이, 김치 등이 저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이림은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숨기며 도한을 노려봤다. 그러나 도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당으로 나갔다.
겉으로는 아무 타격 없어 보였지만 도한도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면서 일주일 만에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 아닌 전쟁이 시작됐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은 평소보다 훨씬 호화롭게 차려졌다.
호텔에서만 맛본 코스 요리가 나오기도 하고, 정갈한 한식이 차려지기도 했다. 어느 때는 이림이 죽고 못 사는 치킨이나 떡볶이가 올라오기도 했다.
원래도 정성스런 음식들이 차려졌지만 이제는 아예 작정을 한 것 같다. 방문을 닫았지만 가끔 물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가면 음식 냄새를 맡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러웠다.
꼬르륵…….
“아윽…… 으…….”
이림은 안방에서 배를 잡고 누워 있었다. 이제 이틀째였다.
누구는 5일 넘게 단식한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인내심이 없는 걸까.
머리가 빙빙 돌고 판단력이 흐려졌다. 평생 단식과는 담을 쌓은 이림이었기에 한 끼를 거르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림은 그런 이성적인 사고를 할 힘도 없었다.
학창 시절 가난했을 때도 굶은 적은 없었다. 삼각김밥이나 라면으로 배를 채울지언정 아예 식사를 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것이 몇 되지 않는 집안의 규칙이었던 것이다.
“아니네……. 한 번 있구나.”
도한과 사귀기 전에, 자꾸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그의 감정을 헤아리며 눈물 짓던 시기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시험을 망쳤고, 음식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신경 쓰였고, 누군가 도한의 이름을 부르면 신경이 곤두섰다. 도한에게는 티 내지 않았으나 참 마음고생을 오래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온통 이도한 생각이네.
이림은 왠지 계속 도한의 간계에 걸리는 것 같아 허탈한 감정에 자조했다. 그러나 이림의 눈은 의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매번 당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도한의 마음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림도 더 이상 정면으로 탈출하는 것은 무리라는 걸 깨달았다. 도한은 여태껏 몇 달 동안 이림의 머리 꼭대기에서, 이림의 움직임을 다 알면서 지켜봤던 것이다.
그것이 못내 분하면서도 이림은 이번 기회에 자신이 힘이 없다는 것을 이번에 절실히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이 반격하지 못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지는 않는다.
만약 도한이 자신을 버릴 것이었다면, 싫어졌다면 매일같이 진수성찬을 대령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무일푼으로 내쫓겼거나 도한의 화가 풀릴 때까지 굶겼을 것이다. 결국 제 몸을 해하면서라도 그에게 반항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포기할까 생각했다. 이렇게 시위해 봤자 그에게는 자그마한 짜증만 안겨줄 뿐이었고, 자신은 하루의 대부분을 굶주림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는 그에게 휘둘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의 배경, 성격, 형질 등등 모든 면에서 우위를 선점했으니까, 그에 비해 평범한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상황을 납득했다.
그러나 져 주는 듯 항상 이기는 도한을 5년 넘게 겪다 보니 제 안에서 무언가 변화하는 듯했다. 어쩌면 도한의 아집을 닮아 가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얼굴이 자신을 향할 때는 미소 짓는 게 마냥 좋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욕심 많은 그가 자신의 것은 내놓지 않고 제 마음만을 훔쳐 가도 그러려니 해 왔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바보처럼 살기 싫었다. 영양실조로 쓰러져도 그의 후회하는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열흘을 굶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림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퇴근을 한 도한은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기도 전에 제일 먼저 식탁을 확인했다. 역시나 차린 음식은 식어 있을 뿐이고 손댄 흔적은 없었다.
벌써 이틀째였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이림을 보는 도한도 점점 신경이 예민해졌다. 하루에 피우는 담배는 두 갑이 넘었고, 누가 자신의 몸에 닿거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신경질이 확 뻗쳤다.
오늘 아침에는 엘리베이터에서 수행원 한 명이 어깨를 건드리자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른 적도 있었다. 이림이 말라 가는 만큼 도한의 안색도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도한의 행색은 젊은 사업가였지만 마음은 여유롭지 못하고 점점 야차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값비싼 정장을 입고 멀끔히 머리를 넘겼지만 마치 옷 안에 야수를 가둬 놓은 듯 시종일관 거친 눈빛을 가지게 되었다.
별다른 접점 없는 평사원까지 회사에서 자신을 슬슬 피하는 것을 느낀 도한은 이림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도 모르고 그저 말을 듣지 않는 그에게 화가 났다.
도한은 분노가 끓는 것을 느끼면서 거칠게 안방을 열었다.
쾅!
집 안이 울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세게 열었지만 이림은 어떤 반응도 없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도한은 뒷골이 당기는 것을 느끼며 음산하게 윽박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 속을 그렇게 긁고 싶어?”
이림은 뒤를 돌아 도한을 슬쩍 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며칠간의 시위를 보다 못한 도한이 폭발했다.
빠르게 식탁으로 다가간 도한은 한편에 놓인 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이림의 앞에서 최후의 경고를 보냈다.
“네 손으로 먹어. 강제로 먹이기 전에.”
“……싫어.”
오랜 시간 뜸을 들이고 한다는 소리가, 힘없는 거절이었다.
도한은 이림을 끌어올려 앉힌 후 입을 벌렸다. 이림은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는지 당황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어 댔다.
하지만 도한이 워낙 세게 잡아 입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한은 죽그릇을 들어 올렸다.
“읍!”
“제발 말 좀 들어.”
도한은 반은 애원하고 반은 협박하며 벌린 입에 죽을 쏟아 넣었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이림을 보던 도한도 미칠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정말 이림이 굶어 죽으려 작정한 것 같아 심장이 덜컥거렸다.
밤마다 기침을 하는 것처럼 헐떡거리는 모습을 보며 걱정을 하느라 이틀째 함께 잠을 거르고 있었다. 차라리 눈을 빛내며 탈출하려 할 때가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제 몸을 축내며 반항하니 제아무리 도한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림은 목구멍을 움직여 삼키는 것 같더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 토해 내 버렸다.
값비싼 이불은 위액과 희멀건 죽으로 금세 더러워졌다. 도한은 갑갑함에 주먹으로 문을 때렸다.
쾅! 퍼억!
주먹의 살이 패이고 피가 줄줄 흘러도 도한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문짝이 너덜너덜해지고 나서야 멈춘 도한의 얼굴은 광기가 흘렀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 보자.”
***
도한은 그날부터 출근도 않고 식탁을 검사했다. 이림이 먹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쑤셔 넣었다.
가끔 미음처럼 씹을 게 거의 없는 음식은 통했지만 대부분은 이림이 뱉어 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이 장면이 매 끼니마다 펼쳐졌다. 그 사이 이림은 더욱 말랐고 도한도 같이 식사를 걸러 더욱 날카로워졌다.
벌써 4일째, 이림은 스스로 무언가를 먹길 거부하고 있었다. 이제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들어했고 도한이 힘을 들이지 않고 입을 벌릴 정도로 반항도 못 했다.
도한은 숨을 색색거리며 잠든 이림을 보고 한숨을 쉬며 한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주치의를 부르기 위해 휴대폰을 드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뭡니까.”
-상무님. 전략기획부 정우석 부장입니다. 지금 의신물산 수주 건 때문에 빨리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도한은 머리를 짚으며 차 비서를 불렀다.
“이림이 뭐라도 먹어야 하니까 적당한 시간에 깨워요.”
차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도한은 급히 재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텅 빈 집에 차일원과 강이림, 두 명만이 남았다. 도한은 즉시 주치의를 불러 이림이 진찰을 받고 링거를 맞도록 지시했지만, 차일원은 못마땅했다.
일원이 스카웃을 통해 이성건설의 비서로 이직했을 때 도한은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상태였다. 처음에는 곱게 자란 도련님인 줄 알고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도한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승진에 뒷배경의 입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능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업무에 대한 이해 능력이나 처리 속도는 수준급이었다.
도한은 앞으로 앞날이 창창하고 국내에서는 이미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가진 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더욱더 끌어올릴 수 있는 자질이 충분한데, 이런 좁아터진 별채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짜증 났다.
툭하면 징징거리는 저 오메가가 이 모든 것의 원흉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열을 올리고 혼자 눈물을 쏟는다.
처음에는 도한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로 이림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이렇게 업무에 차질을 주게 되니 참 아니꼬웠다.
차일원은 스스로의 생각이 합리적이라고 느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도한이 이 시답잖은 오메가에게 휘둘려 자꾸 업무를 늦추는 것 이외에도 이림을 싫어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 온 자신이 오메가를 수발 들어 주는 일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 비참했다.
사실 이 일을 시킨 것은 도한이었지만 일원은 무의식중에 이림에 대한 분노를 키워 가고 있었다. 베타인 일원은 사회에 만연한 오메가에 대한 고정관념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커 왔다.
그러면서 무의식중에 오메가를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봤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가능한 일이었다. 차마 도한의 앞에서 티 내진 못했지만 저번 히트 사이클 때도 이림을 대놓고 무시했었다.
이림이 따로 도한에게 말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딱히 고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힘들게 노력해 간신히 이성그룹에 들어와 밤낮없이 철야로 일하는 자신과 다르게 천하태평 잠이나 처자면서도 삼시 세끼 진수성찬을 거부하는 이림이 얄미웠다.
아니, 히트 사이클 때만 해도 얄미운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업무를 방해하는 이림에게 화가 났다.
지금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는데. 도한은 자꾸 휴대폰으로 이림을 감시하며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고, 그의 식욕을 되살리기 위해 전국 호텔을 뒤져가며 셰프를 데려오고 있었다.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고는 있었지만 나흘 동안 거의 자지 못한 도한도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도한과 이림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차일원은 주치의에게 전화를 하는 대신 안방을 열었다. 이림이 침대에 누워 눈썹을 찌푸린 채 색색거리고 있었다.
일원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당신만 아니었어도…….”
일원은 진심으로 이림이 없어져야 도한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에야 슬플 수도 있지만 결국 사랑이란 것은 헛것이었고, 그 감정에 목을 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이림은 자신이 보기에도 여려 보였다. 이림을 싫어하는 자신조차 이렇게 느끼니 주변 사람들이 껌뻑 죽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도한에게 이림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왠지 가냘픈 얼굴이 싫어 손이 움찔댔다. 직접적인 해를 가할 자신은 없었지만 도한의 곁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이불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호텔 이불처럼 두껍고 푹신한 이불은 무거웠으므로 이림의 흉부가 빠르게 올라갔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반인에게는 별 타격 없는 수준이었지만 제 발로 화장실도 못 가는 수준인 이림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읍!”
발버둥 치기 시작하는 것을 봤지만 어째 이불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 이불을 덮어 준 것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잖아. 조금 기다렸다가 숨이 멎을 때쯤 구급차를 부르면…….
“지금 뭐 하는 거지?”
“……!”
퍽!
일원이 빠르게 뒤를 돌았지만 채 뒤를 다 돌기도 전에 주먹을 맞아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도한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불을 거둬 재빨리 이림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림은 잠시간 헐떡이며 괴롭게 신음했으나 다시 평온하게 색색거리며 잠들었다. 일원은 어리벙벙했다. 혀로 아픈 곳을 짚어 보니 입 안쪽이 비어 있었다. 치아가 부러진 것이다.
뺨을 한 대 맞았는데 코피가 흐르고 입술이 찢어졌다. 솔직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도한의 곁에서 볼 것 못 볼 것 죄다 겪었지만,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줄은…….
일원은 다가오는 도한을 두렵게 바라보며 빌었다.
“으으…… 사…… 상무니……임.”
“뭐 한 거냐고 물었잖아.”
“그…… 그냐앙 이불을 더퍼 드리려고.”
치아가 빠지고 혀를 깨물어 제대로 된 발음이 어려웠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해명하는 일원을 차갑게 바라본 도한은 분노를 넘어서 황당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일원이 희민 쪽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미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자신이 이림의 발을 닦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연락 좀 하고 상태 좀 보라고 부탁한 건데 도대체 왜 다들 선을 넘는 걸까.
답답함에 담배를 빼어 물었다. 요즘 골초가 된 지 오래라 자중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났을 수도 있었다. 이림의 간호로 바쁠 차 비서를 대신해 두고 온 서류를 직접 가지러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도한은 울며 비는 일원의 턱을 구둣발로 후려쳤다. 일부러 급소를 피해 때리자 기절도 하지 못한 일원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곤 손가락을 하나씩 밟았다. 그 와중에 담배는 계속 타들어 갔다.
“으아악!”
한번 싹 물갈이를 해야겠다. 도한은 그렇게 다짐하면서 일원의 목을 밟은 채로 이림의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15분 안에 도착한다는 의사의 확답을 듣고 도한은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차 비서 데려가.”
도한은 일원의 얼굴에 담뱃재를 털면서 명령했다. 이제 일원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
이림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무사히 깨어났지만, 반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치의는 이제 정말 위험하다고 심각한 얼굴로 전했다.
이대로 며칠 정도만 더 지나면 몸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도한은 처음으로 이림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차마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채 일주일이 되기도 전, 이림은 쓰러져 버렸다.
주방에 있던 도한은 이림이 쓰러진 것을 보고 바로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1분이 한 시간 같았던 기다림이 지나고, 저택에서 대기 중이던 주치의가 도착했다.
여기저기를 진찰하던 의사는 도한을 보고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
“……뭐라고?”
“3주 조금 넘었네요. 일단 지금 응급조치가 필요할 정도로 영양분 공급이 안 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도련님이 설득해, 산부가 살 의지를 가지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주치의는 답지 않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도한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도대체 언제 임신이 되었는지 가늠했다. 히트 사이클이었던 것도 아니고 노팅을 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사이클이나 노팅 없이 임신을 하는 것은 아주 희귀했다. 도한은 착잡함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이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색색거리며 잠에 들어 있었다. 핼쑥한 뺨에 손을 댄 도한은 이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간단히 한 손에 다 잡히는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조화를 이룬 채였다.
이림을 닮았다면 아이도 예쁠 것 같았다. 도한은 깨어난 이림이 아이를 거부하지 않기를 바라며 뺨을 쓸었다.
눈을 뜨자 도한이 보였다. 가물가물한 시야 속에서 심기 불편한 페로몬이 감지됐다. 힘없이 눈을 돌려 옆을 보자 바늘이 꽂힌 팔이 축 늘어진 것을 보게 됐다.
“이림아, 이제 식사 거르는 건 그만하자.”
“…….”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림은 입을 열 힘도 없었다. 눈꺼풀만 껌뻑이자 도한이 머리를 숙였다.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은 채 머리를 넘기는 그는 드물게 보는 피곤한 모습이었다.
“이런다고 놔줄 줄 알아?”
“…….”
“너 임신했어.”
그게 무슨 말이지. 이림은 계속 눈만 깜빡였다.
누가? 잠이 덜 깬 그가 무구한 눈으로 묻자 도한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유산했을 거야.”
“…….”
“아기를 위해서라도 이제 무모한 짓은 그만두자.”
“무슨 소리야? 누가. 내가?”
이림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오랜만에 입을 열자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도한은 진지했다. 시트를 움켜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싸해지며 정신이 몽롱해진다. 또 기절하려는 이림의 손을 재빨리 잡은 도한이 속삭였다.
“제발 그만하자. 응? 나도 노력해 볼게.”
“……노력?”
이림은 기가 차다는 듯 비웃었다. 솔직히 현실감도 없거니와, 아기가 있다고 바로 모성애가 생기진 않았다. 오히려 임신했다는 사실이 버겁게 느껴졌다. 이림은 손을 뿌리치고 싸늘하게 말했다.
“나 죽는 거 보기 싫으면 내 앞에서 사라져. 좋겠네? 인질을 잡았으니.”
“…….”
도한은 멍하니 이림을 바라봤다. 항상 매사에 무심하지만 소심하고 부끄럼이 많던 이림은 어디 갔을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던 사람 같지 않았다. 이 집에 들어서면서 도한을 보는 눈에 원망을 담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애정이 함께했다.
하지만 지금 도한을 보는 이림의 눈빛은 타인을 보는 것처럼 싸늘했다. 도한은 말을 잃고 오래도록 고개를 돌린 이림을 바라보았다.
늦은 밤. 업무를 끝낸 도한은 방 한편에서 술을 마셨다. 와인, 보드카 등 가리지 않고 들이부었다.
커다란 저택 안에는 조부, 부모님, 형제 등 이성 집안 사람들을 위해 각각 개인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말이 방이지 웬만한 집 크기의 방이었는데, 이림이 별채에 있으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곳이다.
학생 때나 몇 번 사용했던 곳이었지만 매일같이 고용인들이 쓸고 닦으니 새것처럼 깨끗했다. 그러나 도한은 넓은 방을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이림과 다툰 적은 많았으나 이렇게 따로 밤을 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설득해 억지로 옆에 누웠겠지만 지금은 애를 가졌으니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최근 밀려오는 사건들과 과중한 업무로 인해 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쫓기듯 나온 도한은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마셨다.
방에 구르는 병이 쌓이면서 취기가 오르자 어지럽고 역한 느낌에 머리를 잡았다. 그러다 인기척이 느껴져 앞을 바라봤다.
“…….”
“도한 씨…….”
방 한가운데, 희민이 있었다. 이혼을 통보하며 나간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언제 또 집에 기어들어 온 건지. 도한이 눈을 찌푸리며 가만히 있자 희민이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가운 차림이라 허리띠를 풀자 흰 알몸이 드러났다. 매끄럽고 탄탄한 그의 몸은 뭇 알파들의 마음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도한은 지금 무슨 상황인 건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알면서도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저 들었어요. 그 건방진 오메가가 도망가려 했다면서요.”
“…….”
“솔직히 저는…… 저는 모르겠어요. 당신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그딴 오메가보다는 제가 뭐든 더 잘할 수 있어요. 나에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도한은 절박한 빛을 띠는 희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민은 겉으로는 독한 인상이었지만 재벌가 자제치고는 고집 있는 순정파였다. 돈깨나 있는 사람이라면 배우자가 말리든 말든 밥 먹듯이 바람을 피우는 마당에, 희민이 몇 번 호스트바를 간 것은 도한이 들추지만 않았다면 별문제 되지도 않을 일이었다.
널린 게 아름다운 오메가인데, 도한은 제 삶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이림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왠지 희민을 보면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자신과 동류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자신이 가진 것이었고, 그에게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림은 다를 것이다. 도한은 시선을 내려 희민을 무시했다.
차라리 내 눈앞에 있는 게 희민이 아니라 이림이었다면.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나 했다. 도한은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낸 희민을 보지도 않은 채 술을 기울이며 말했다.
“나도 솔직히 대충 넘기며 살고 싶은데 말이지. 성격이 더러워서 안 되네.”
“……그래서 계속 그렇게 휘둘리며 살겠다는 건가요? 도대체 나는 왜 안 되는 건데요!”
희민의 얼굴이 변했다. 가련한 표정을 짓던 얼굴을 바꾼 이림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 질렀다. 금세 표독스럽게 변한 얼굴을 본 도한은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으로 다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잔뜩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넌 안 돼. 보내 준 서류에 도장이나 찍고 와.”
“지긋지긋한 참사랑 납셨네요. 네! 그렇게 하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희민이 부들부들 떨다가 고함을 내질렀다. 뚝. 술병을 기울인 채로 멈췄던 도한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넌 왜 자꾸 기어오르는 걸까?”
도한이 재밌다는 듯 말했지만 눈은 웃음기가 없었다.
더 이상 건드리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본능적인 예감에 흠칫 놀란 희민은 가운을 들고 재빨리 옷을 여몄다. 그리고 어떤 말도 없이 뒤를 돌아 방을 나섰다. 하지만 비참함에 잠시 멈춰 눈물을 참으며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짜증나……. 짜증나!”
그에게 이혼 통보를 받았지만 여태껏 미루고 있었다. 호스트바 때문에 이혼하는 것이라면 이제 안 가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도한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그와 비슷한 사람을 데리고 논 것이었고, 도한이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그깟 호스트바는 평생 안 갈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으며 이혼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다, 이림이 도망치려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크게 싸웠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의 동태를 살피니 전에 없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지금이라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벌인 일이었다. 큰마음을 먹고 마지막 기회라고 다짐하면서 제 알몸까지 보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눈빛이었다.
바위 보듯 무감한 얼굴에 수치심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굴욕이었다.
그래서 더욱 쏘아붙인 것도 있었다. 결국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방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결국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빠르게 발을 놀렸지만 결국 복도 한편에 기대 몸을 무너뜨린 희민의 얼굴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만을 믿고 있을 부모님께 뭐라고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맞고 끝나면 다행이지, 호적에서 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꼬여 버린 걸까. 솔직히 모든 것은 스스로가 자초했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희민은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오메가로 태어난 이상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도한과 비슷한 면이 많은 희민은 이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도한의 마음을 얻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을 하더라도 그 잘난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고야 말 테다.
“……내가 이렇게 물러날 줄 알고. 날 비참하게 만든 값을 치르게 해 주겠어.”
희민은 슬쩍 웃으며 밤하늘을 바라봤다.
모두가 편하지 않은 밤이 무심히 깊어 가고 있었다.
***
이림은 한동안 도한을 볼 수 없었다. 꺼지라고 해서 진짜 사라질 줄은 몰랐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주변의 사물이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한쪽에 숨은 두부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목소리 내는 것도 힘들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두부가 눈치를 보며 작게 울었다.
밥…… 챙겨 줬나…….
이림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두 발로 일어나고 팔에 꽂힌 바늘을 뽑아내는 데만 한 세월이 걸렸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거실로 가자 두부가 캣 타워 안에 숨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옆에 놓인 사료를 부어 밥그릇을 내밀자 주춤주춤 모습을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두부는 잘 관리되어 있었다. 꼬질꼬질하고 연약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건강하고 보송보송했다. 누군가 계속 돌봐 준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굶으면서 생사를 오갔던 이림은 두부에게 신경 써 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두부는 조금씩 사료를 먹었다.
사료를 먹는 두부를 보니 왠지 자신도 밥을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사실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배 속의 그 존재가 신경 쓰였다. 낳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위험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없앨 때 없애더라도, 왠지 지금은 허무하게 유산하고 싶지 않았다.
식탁으로 가자 오늘도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거의 먹지 못한 이림을 배려해서 죽과 미음이 놓여 있었다. 물을 느리게 마시고는 죽에 입을 댔다.
“욱!”
그러나 입은 희멀건 죽도 거부했다. 워낙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으니, 그 경험을 기억한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곤란한데.
당황한 이림이 몇 차례나 시도해 봤지만 도저히 넘겨지지 않았다. 그제야 조급한 마음이 든 이림은 내선 번호로 가정부에게 연락했다.
-미음 드셔 보시고요. 그다음에 죽 드셔 보셔요.
“예…….”
이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식탁 앞에 섰다. 평범한 아침 식탁이었다. 그렇게 거부하고 질색하던 게 무색하게, 입은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몇 술 뜰 수 있었지만 여전히 몸은 음식을 거부했다.
이건 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인 것 같았다. 임신했다고 갑자기 힘이 나고 의욕이 생기는 건 아닌가 보다. 이림은 자신의 삶과 아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여전히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계획한 임신도 아니었고, 이 아이를 낳으면 자신은 더욱 옭매일 것이다.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열심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 이상 먹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지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아무 걱정 없이 영원히 잠들고만 싶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삶에 미련이 많아 가난한 집안에서 죽자 사자 공부해 대학을 왔고 도한을 사랑해서 정부 취급을 당하면서도 낯짝 두껍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옳은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부표 없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유령처럼 모든 것의 방향을 찾지 못했고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날, 중문에서 익숙한 얼굴을 본 이림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오래도록 보지 못한 김지우가 뻘쭘한 얼굴로 서 있었다. 5년 만에 만난 동기였다.
“네가 왜 여기…….”
“잘…… 지냈어?”
지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물다섯의 김지우는 옷 스타일과 머리 모양이 조금 바뀌었을 뿐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이상했다.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매일 친구들이 그리웠고 함께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다. 가끔은 꿈도 꾸며 추억을 되새김질했는데, 막상 지우를 보자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킨 듯한 느낌. 그제야 자신의 행색이 신경 쓰였다. 이림은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힘으로 문을 닫았다.
“어? 야!”
“잠깐…… 잠깐만!”
이림은 다급히 말한 후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역시나 제 행색은 엉망이었다. 까치집을 하고 있는 머리, 창백한 안색, 볼품없이 마른 몸. 눈동자만 형형히 빛나고 있으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급한 대로 머리에 물을 묻혀 빗고 옷도 몸을 가릴 수 있는 카디건과 긴바지를 입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문을 열자 지우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문전박대야? 그건 그렇고, 너 왜 이렇게 말랐어?”
“……그러게. 일단 들어와.”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지우를 본 이림은 안절부절못하며 찬장을 뒤졌다. 그러나 먹을 것은 나오지 않았다. 또 현기증이 몰려와 비틀거리자 짐을 풀던 지우는 기겁하며 말렸다.
“됐어! 지금 심각한 건 너 같아.”
“응…….”
“그런데 너…… 발목에 이건 뭐야?”
지우는 애써 모른 척했지만 결국 물어보고 말았다. 사실 이림의 표정이나 이 상황을 봐서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자신의 상식을 배신하는 일이 제 눈앞에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니 계약이고 나발이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둘은 꽤 친한 친구였지만, 그렇다고 한 학년 같이 보낸 친구를 위해서 제 삶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이림도 그런 지우를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이다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
“미안해…….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얘기했네.”
처량하고 슬픈 이림의 얼굴은 본 지우는 자신도 모르게 사과했다. 이림은 고개를 들고 작게 미소를 띠었다.
“아니야.”
이윽고 간신히 차 하나를 내와서 함께 먹었다. 어지럼증과 졸음이 겹쳐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바깥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다.
문득문득 종알대는 지우의 모습이 제가 만든 환각인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한 가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지우야, 나도 너 만나서 너무 좋은데…….”
“응?”
“너 어떻게 온 거야?”
이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지우는 입을 다물고 이림을 바라봤다. 생기 넘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희멀건 얼굴에 불안함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지우는 불과 3주 전까지 이림의 행방을 모른 채 살고 있었다. 사실 학교 내에서 유명 인사였던 이림이 자취를 감추자 학교는 몇 달간 떠들썩했다.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를 가면 꼭 누군가가 이림의 안부를 자신에게 물었다. 이림과 친구였지만 그 기간이 1년도 되지 않았기에 이림이 어디서 사는지, 왜 사라졌는지 그들도 알지 못했다.
몇 번 학과 사무실에 가 보고 기숙사도 몰래 들어가 보고 수십 통이 넘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휴학했다는 정보만 간신히 얻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 대학교에 찾아오는 이림의 부모님을 볼 수 있었다. 달려가서 몇 번 얘기를 나눴지만 가족들도 생사조차 모른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친구들은 하나같이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감쪽같이 사라지니 의혹은 점점 커졌다. ‘혼전 임신으로 결혼을 했다더라’, ‘교통사고가 났다더라’, ‘자퇴했다더라’ 등 그 소문이 점점 부풀려졌다. 그러나 몇 달 뒤 거짓말처럼 소문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분명 누군가가 손을 썼겠지만, 간신히 이림의 휴학 소식만 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어딘가에서 ‘잘 살아 있었으면’ 하고 가끔 이림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학기를 남겨 두고 취업 생각에 머리가 아파지는 지우의 앞에, 비서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차 비서라고 소개하며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했다.
‘강이림 씨 친구분 되시죠?’
‘네? 네……. 이림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예?’
‘일단 얘기부터 들어 보시고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우는 뜬금없는 상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차 비서가 설명한 것은 간단했다. 이림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말동무를 해 줄 것. 너무나 간단해서 사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24시간 아르바이트를 해도 절대 벌지 못할 월급을 제시했다. 심지어 사라진 이림을 볼 수 있다니. 엄청난 행운이 닥친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반신반의했다.
비밀 유지서를 작성하고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믿지 못했던 지우는 이림을 보고 나서야 왜 자신이 필요한 건지 알게 되었다.
지금 당장 쓰러질 듯 위태위태한 모습은 도저히 임신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좋은 생각하며 태교를 해도 모자를 시간에, 이림은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하긴, 이렇게 숨어서 사니까 몰랐겠지.”
지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도한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는 것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겠지만 도한과 이림이 여지껏 엮여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우는 자신이 도한을 동경했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도 여느 재벌 집 자식처럼 재수 없는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했지만 이렇게 바싹 마른 이림을 보니 없던 욕도 나오는 실정이었다. 이림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렇게라도 보니…… 윽!”
“왜 이래! 괜찮아? 구급차 부를까?”
“요즘 잘 못 먹었더니 가끔 배가 아프네.”
“뭐? 그럼 위험한 거잖아! 안 되겠다. 지금 당장 누워.”
이림은 안기다시피 일으켜져 안방에 눕혀졌다. 아무리 지우가 베타 남자라도 자신을 번쩍번쩍 드니 민망해져 이림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죽겠다. 이림은 배를 쓰다듬으며 시야를 선명히 만들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말라 갈비뼈가 드러나는 몸인데 배는 부푼 티도 나지 않았다.
‘정말 있는 게 맞는 걸까?’
또 도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말만 아니었다면 평소와 똑같이 생활했을 것이다.
이림이 널브러져 배만 쓰다듬고 있자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던 지우는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유동식을 만들어 내밀었다.
“나, 너 돌보러 온 거야.”
“…….”
“이거 먹으면 네가 궁금한 거 다 얘기해 줄게.”
잠시 고민하던 이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벌렸다. 느릿느릿 받아먹으며 한 시간을 넘게 먹었지만 결국 한 그릇을 비워 냈다. 순하게 받아먹는 이림은 얌전한 집토끼 같았다.
피식 웃은 지우는 물컵을 건네 입을 헹구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돌봐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이림은 지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림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면 도한이 지극정성으로 돌봐 줬지만 이림이 아픈 이유의 대부분은 도한이였으므로 딱히 고맙지는 않았다.
이림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
그날부터 지우는 별채에 매일 들러 대부분의 시간을 이림과 보냈다. 지우는 끊기지 않는 보물창고 같았다.
둘이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을 가져오는가 하면, 이림에게 어울리는 옷을 사 오기도 했다. 그중에 가장 즐거운 것은 친구들의 소식이었다.
그토록 혼자 그리워하고 상상만 해 온 친구들의 소식을 간접적으로나마 듣게 되자 즐거웠다.
“진짜? 외국으로 나갔다고?”
“그래. 원래 당찬 애였잖어. 내가 펑펑 놀 동안 영어 공부 열심히 했나 봐. 허, 참.”
“넌 부모님 농사일 돕느라 그랬다며.”
뭐, 그건 그래. 맞장구를 치던 지우는 맞다! 하며 손바닥을 치더니 이림의 옆에 붙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지우가 말을 꺼내기 전이었지만 벌써 달큰하고 매운 냄새가 올라왔다.
이림은 잔뜩 기대한 상태로 지우를 올려다봤다.
“전에 네가 먹고 싶다고 한 음식.”
“아……!”
그의 가방에서 나온 것은 매운 족발이었다. 애초에 간을 세지 않게 먹는 집안사람들이라 이림의 식단도 염분이나 고춧가루가 빠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우가 자꾸 동네 맛집 중에 유명한 매운 족발집이 있다며 칭찬을 하니 궁금했다.
이림이 홀린 듯 손을 가져가자 지우는 뒤로 물러났다.
“너 지금 속 쓰려서 안 돼. 이제 죽도 간신히 먹잖아.”
“아냐. 먹을 수 있어.”
“안 돼! 그럼 일단 밥부터 먼저 먹어 보자.”
입을 삐죽이는 이림을 뒤로 하고, 지우는 재빠르게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부지런히 양파를 썰고 계란을 풀어 내는 지우는 신이 나 보였다. 이림은 가족도 아닌데 이렇게 신경 써 주는 지우가 고마웠다. 물론 도한과 모종의 계약이 있었겠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다 포기한 채로 삶을 흘려보낸 이림의 가슴속에도 불씨가 자그맣게 지펴지는 듯했다. 얌전히 앉은 이림은 곧이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씹기 수월하게 만든 질은 밥과 포슬포슬한 계란찜, 고소한 두부조림이 뚝딱 완성됐다. 모든 것이 한 시간 만에 완성되자 이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요리사야?”
“그만 추켜세워라, 좀. 자취생이 할 만한 게 거기서 거기니까 고수됐지.”
음식 솜씨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지만 속이 좋지 않은 이림을 배려해 센스 있게 순한 음식으로만 준비한 것을 보여 보살핌받는 기분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날 밤, 오랜만에 포식한 이림이 잠을 잘 때였다. 누군가 색색 자는 이림의 이마를 자꾸 쓸어 올리고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쳤다.
“으응…….”
눈을 뜨려 하자 이내 따뜻한 온기가 사라져 버렸다. 이림은 잠시 뺨 근처에 익숙한 향을 통해 누군가 머물다 갔음을 어렴풋이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