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떠날 준비
그 시각, 도한은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답지 않게 주춤거렸다.
실제로 히트 사이클에 배우자를 방치하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다. 만약 실제로 혼인신고를 한 부부였다면 이혼당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도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이림이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요함만이 도한을 반겼다. 주방으로 갔지만 식은 음식만이 식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아. 한숨을 쉰 도한이 거실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달칵-.
“왔어?”
“…….”
이림이 안방의 문을 열고 도한을 맞이했다. 하루 만에 마주하는 이림의 얼굴은 꽤나 수척해진 상태였지만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샤워를 했는지 머릿결은 찰랑였고 볼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그대로 굳은 도한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다가가 작은 몸을 껴안았다.
“몸은. 괜찮아?”
“응.”
“내가 뭐라 할 말이 없다. 때리고 싶으면 때려. 참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넓은 품에 안겨 거의 전신이 파묻힌 이림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그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에 급히 아무 말이나 내뱉은 도한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도한이 뭐라 하기도 전에 이림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됐어. 선배도 피곤할 텐데. 억제제 맞았으니까 됐어.”
“이림아…….”
“나도 아직 약기운이 돌아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이림은 안방으로 들어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 무심한 태도는 도한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이건 무심하다 못해 도한을 불쾌하게 만드는 태도였다.
만약 평소와 같았더라면 그를 추궁하고 집요하리만치 반추했을 것이다.
도한은 답답함에 꽉 쥐인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하아…….”
긴장이 확 풀어지고 묘한 짜증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밤을 샌 것도 모자라 하루 종일 긴장 상태였으니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져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지금부터 잘하면 돼……. 지금부터.”
어차피 자신의 곁이 아니면 어디서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다. 잘 품고 보듬어 주면 또다시 스스로 안길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제야 눈가에 힘이 약해진 도한은 타이를 푸르며 서재의 욕실로 들어갔다.
탁-.
서재의 문이 닫히자마자 이림은 재빨리 안방에서 뛰쳐나왔다. 양말을 신어 발소리를 죽이고 그가 벗어 놓은 재킷을 뒤졌다. 그리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 봤다.
“제발…….”
이림의 기대와는 다르게 암호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너무 쉬운 방향으로 가려 한 게 문제였다.
잠깐 실망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슬며시 재킷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킷이 놓인 그대로 옷의 모양과 주름을 잡아 두고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자 곧이어 도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눈을 감아 버린 이림과 도한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림은 알게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도망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이렇게 티를 내면 안 되는데.
바보같이 아직도 미련이 있는 건지, 그의 향기가 느껴지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침대가 워낙 넓으니 도한이 누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의 단단한 배에 머리를 비비고 허리를 끌어안고 싶어졌다.
‘아냐,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오랫동안 도한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홀로 자립하기 위해선 제일 먼저 도한의 향수를 지워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모르는 도한이 먼저 뒷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말초신경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자 높은 콧대를 뗀 도한이 속삭였다.
“정희민하고는 이혼할 거야.”
“……!”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동요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그의 한마디에 가슴이 술렁였다.
결국 이림이 뒤를 돌아 그를 마주하자 도한은 만족했다는 듯 밝게 웃었다. 마음이 떠나면 얼굴 생김새조차도 미워 보인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얼굴 옆의 각진 빗장뼈를 응시하며 물었다.
“왜.”
“주제도 모르고 자꾸 널 괴롭히니까.”
지금 당장 눈을 붙여야 할 사람이 하루 종일 잠만 잔 자신을 재우듯 토닥이고 있었다. 자장가를 부르는 듯한 저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점점 나른하게 만들었다.
사실은 그가 자신의 상처를 알아 줘서 마음이 편해진 게 아닐까. 그래서 잠이 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림이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비참했는지 그가 알아 주는 것 같았다.
만약 옛날이었다면, 이쯤에서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선배도 노력하잖아.’라는 자기 위로와 함께, 또 다시 쳇바퀴 같은 삶을 반복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밀어 뒀던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나면서 예전 선배의 말과 행동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그리고 자신은 얼마나 한심한지.
어차피 자신이 도망가 봤자 그를 둘러싼 성벽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이다. 정부 한 명이 도망갔다고 치고 새로운 오메가와 결혼해서 다시 호화로운 삶을 누리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 버린 이림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이를 용서의 의미로 받아들인 도한은 그의 귓가에 미안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 사과는 이림이 완전히 잠에 들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며칠 뒤, 침대에 누운 이림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알아낸 몇 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1. 도한은 적어도 출근할 때 카메라를 보지 않는다.
2. 카메라의 사각지대는 화장실과 욕실, 뒷마당이다.
3. 나가는 문은 중문 하나밖에 없다.
4. 저택 밖으로 나가는 문은 샛길 하나밖에 모른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1번이다. 아무리 자신을 감시한다고 해도 24시간 감시는 불가능이었고 결벽적일 정도로 이림의 존재를 감추고 싶어 하는 그가 감시를 대리로 맡기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그의 감시가 극도로 심해진 이때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밖으로 한 발짝도 딛지 못할 것이다.
흥미를 잃어버린 공부도 다시 열심히 하는 척 문제를 풀고, 다 죽어 버린 새싹을 걷어 내고 새 씨앗을 심기도 했다.
모든 것이 시늉일 뿐이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 때문인지 이림은 매사에 적극적으로 변하게 됐다. 더 자연스럽게 연기해서 도한을 완벽히 속이고 싶었고 그 높은 코를 납작 눌러 주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이림이 마냥 잔잔히 흐르는 강이라면, 그는 거친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 같았다. 강은 결국 그 흐름에 섞여 함께 거칠게 변해 버렸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싱그러운 한낮에 이림의 가슴에는 악한 감정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런 이림의 마음을 꿰뚫었는지, 도한은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이림은 황당함에 중얼거렸다.
“뭐야……?”
야옹…….
그의 커다란 손에 반밖에 차지 않는 삼색 털 뭉치가 숨을 쉬고 있었다. 따뜻한 손이 좋은지 도통 일어나지 않던 고양이는 뚫어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꼬물꼬물 머리를 들었다.
도한이 충격받아 굳어 버린 이림의 손에 고양이를 내려놓자 삼색 고양이는 넉살 좋게 다시 자리를 잡고 손가락에 고개를 푹 파묻어 버렸다.
“내 동생 이도선 알지? 유기 동물 보호센터에서 몇 년째 봉사하다가, 새끼 밴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어. 안락사 위기라길래.”
“…….”
“근데 수가 많으니까 한 마리 분양받았어.”
농담하듯이 코를 찡긋거린 도한은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듯 말을 더 붙이지 않고 이림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이림은 새근거리며 잠든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을 뿐이었다.
반응하지 않고 외면하고 싶었지만 품 안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생명이 마음을 자꾸만 간지럽혔다.
그 이후로 고양이는 거실 한편에 자리 잡게 되었다. 건조한 분위기만 흐르던 집에 돌봐야 할 생명이 생기자 조금씩 활력을 찾는 것 같았다.
“조심, 조심!”
이림이 고양이에 관심을 가지자 도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 고양이가 이 집에 입주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지만 스크래처, 장난감, 긁개 등 고양이 전용 용품이 한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이림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제 키보다 큰 캣 타워가 세워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이보리 색으로 이루어진 캣 타워는 조금 과장을 보태 사람이 올라가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슬슬 걸어가는데 캣 타워를 옮기던 경호원과 딱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는지, 이림과 비슷한 또래의 경호원은 눈이 마주쳤음에도 고개를 돌리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빤히 바라봤다.
벌써 몇 년째 도한을 제외하고 알파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기에, 이런 시선은 당황스러웠다.
결국 먼저 고개를 돌린 이림은 안방으로 쏙 숨었다.
고양이의 푹신한 털을 쓰다듬으며 수런거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집에 올 때는 눈만 간신히 뜬 상태였는데 어느새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귀여워.”
도한의 수작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던 이림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난 나갈 거야.
이림은 꼬물거리는 고양이의 정수리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밖에 나가기 전까지만, 잠깐만 널 돌보는 거야.
“이봐요. 이봐요!”
“으음…… 네?!”
품을 파고드는 여린 체온이 몸이 노곤해져 잠에 들었나 보다. 낯선 목소리에 혼몽한 정신을 다잡고 눈을 떴는데, 코앞에 아까 그 경호원이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식은땀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에 벌떡 일어나 멀어지니 그가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조립 다 됐다고요.”
“네……. 네.”
“근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최공진이라고 합니다.”
잔뜩 경계하는 이림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넉살좋게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당연히 손을 뻗지 않자 그는 서운하다는 듯 뻗은 팔을 흔들었다.
“악수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
이림은 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공진도 악수를 해 주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기세라 결국 해 주고 말았다. 커다란 손이 감싸듯 악수를 끝내자 공진이 한 걸음 멀어졌다.
“그럼 쉬세요.”
악수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이림에게 공손히 인사한 공진은 기분 좋게 밖으로 나섰다. 중문을 나서자 함께 짐을 옮겼던 동료들이 황급히 다가왔다.
“결국 했구만, 했어.”
“뭘요? 인사만 했는데.”
“잘했다. 잘했어! 망할 새끼. 잘 봐 둬. 이 새끼 내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얼굴 잘- 봐 둬라.”
“아니 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공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한 번 아까 봤던 미인을 떠올렸다. 공진은 이곳에 반년 가까이 있으면서도 별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산더미 같은 짐을 옮기는 도중 맡았던 복숭아 향기와 잘 어울리는 남자가, 귀여운 고양이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별채 안의 남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지만 햇빛에 둘러싸여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서 있는 오메가에게 말을 걸지 않을 알파는 없었다.
고작 해야 스물둘이 된 공진은 여전히 철부지 같은 면이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알파들을 잘 훈련시켜 오래도록 충성하게 만드는 이성그룹의 관례상, 그가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여유롭고 긍정적인 데다 아주 드물게 우성 알파로 발현했으니 공진은 이성그룹에서도 꽤 아끼는 인재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풀어 주긴 했는데, 이런 사고를 칠 줄은. 아무 생각 없는 공진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공진은 다음 날도 사지 멀쩡히 출근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별채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이다.
모두가 의심스럽다는 듯 수군거렸지만 공진만은 그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시각, 이림은 마당을 가꾸는 척하면서 카메라를 찾아 헤맸다. 지금까지 발견한 카메라는 다섯 개 남짓.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함부로 뗐다간 더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계획은,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이틀간 짐을 싸고 도한의 출근 시간을 노려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게 말처럼 쉬워야지.”
중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하지만 중문을 나서고 복도를 지나게 되면 수많은 고용인들과 경호원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문 앞으로 다가간 이림은 어제처럼 자지러질 뻔했다.
“깜짝이야!”
“괜찮으세요?”
평소처럼 여러 가지 채소와 과일이 들어 있는 음식 박스를 찾기 위해 문을 열었는데 그 앞에 공진이 서 있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서 있자 공진이 머쓱하다는 듯이 목덜미를 쓸었다. 이림은 괜찮다는 듯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박스를 들었다. 그런데 공진이 호들갑을 떨면서 자신이 박스를 빼앗아 들었다.
“아!”
“제가 주방에 둘게요.”
“별로 안 무거워요……. 저 주세요.”
이림이 옆에 졸졸 붙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성큼성큼 주방으로 들어간 공진이 이미 박스를 내려놓았다. 이림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그 옆에 서 있었다. 호의를 받으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저택에서 자신에게 이만큼 다가오는 사람은 공진이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그리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 보고 있을 텐데. 그 생각이 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림은 공진의 등을 밀어내면서 다급히 말했다.
“그게…… 감사한데……. 나가 주세요……. 빨리요!”
“네? 자, 잠깐!”
힘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이림이 워낙 다급해 보이니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쫓겨난 공진은 습관적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결국 이림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도망 계획이 무산될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그 알파가 별것 아닌 일로 피해를 입을까 봐 겁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바보 같은 망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퇴근한 도한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어떠한 언급도 없이 여느 때처럼 이림이 차려 준 밥을 먹었다. 그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차려 준 건 고마운데, 이런 거 하지 마.”
“왜? ……원래 하던 거잖아…….”
이림이 괜히 주눅이 들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잘못한 게 얼만데 이런 걸 시키겠어. 앞으로 하지 마.”
“응…….”
이림이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닦고 침실로 나오자 도한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이다.
“……!”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머리에는 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은 생각이 흐르다 끊기기를 반복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이림의 시선을 느꼈는지 도한이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네가 집에 안부를 잘 못 물어봤잖아.”
“…….”
“지금부터라도 해야지. 싫어?”
“아니, 아니!”
재빨리 부정한 이림은 휴대폰을 빼앗듯 낚아챘다. 그리고 진짜 개통된 휴대폰이 맞는지 이리저리 돌려보고 화면도 켜 봤다.
길쭉하게 잘 빠진 화면에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이림은 화들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느릿느릿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떨려서 오히려 번호를 천천히 누른 이림은 통화를 하기 전 도한을 빤히 올려다봤다. 팔짱을 끼고 있던 도한은 무표정으로 있다가 습관적으로 입만 미소 지었다.
“내 앞에서 해.”
그럼 그렇지.
하지만 마음을 바꿀 것 같아 얼른 전화를 걸었다. 기본적인 전화벨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울렸다.
뚜르르-.
침을 꼴깍 삼키며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데, 상대방이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강이문……. 이문아.”
-누구…… 형? 지금 어디야!?
당연하게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5년만의 통화는 그간의 간극을 다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안부를 물을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림은 꾹꾹 눈물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미안.”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내던 동생도 차츰 목소리가 잦아들고, 걱정과 안도가 섞인 안부를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야? 아, 잠깐. 엄마랑 아빠 부를게.
“아, 아니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너만 알고 있으면 안 될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집에 와야지. 형 지금 엄청 이상한 거 알아? 몇 년째 집도 안 들어오고. 우리 실종신고까지 했어!
동생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먼저 부모님께 연락하지 않고 동생에게 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부모님께 전화하면 지금 당장은 안심하시겠지만, 그다음은? 뭐라고 해야 할까?
재벌 집 정부로 들어앉았다고? 아니면 납치당했다고?
어떤 말을 해도 부모님은 충격만 받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이런 말을 하느니 콱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슬쩍 앞을 보니 도한은 지루하다는 듯 거실을 빤히 보고 있었다. 도한의 시선이 닿은 거실을 보자 한쪽 벽면에 달린 커다란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이림은 다급히 말했다.
“진짜 미안한데. 그냥 부모님께 나 잘 지낸다고 해 줘. 걱정 마시라고.”
-그게 말이 돼? 어디인지만 말해.
“미안해. 그리고 대학 합격 축하해…….”
-형! 아니-.
이림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도한의 커다란 손이 눈 밑을 훑자 투명한 눈물방울이 묻어났다.
“통화 잘 했어?”
“…….”
“왜 울고 그래. 통화하는 게 싫었어?”
싫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또 떠보는 도한을 보고 이림은 고개를 저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내 가볍게 몸이 떠올라 침대로 눕혀졌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세밀히 닦은 도한은 울음소리를 참느라 발개진 얼굴을 빤히 보다 충동적으로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결국 그의 팔 아래였다. 그는 더 괴롭히지 않고 이림을 꽉 끌어안은 채 말을 걸었다.
“이번 휴가는 강원도에 있는 별장으로 갈까?”
“응…….”
답답할 정도로 꽉 낀 이림은 별장을 떠올렸다. 도한과 연애를 한다고 착각했을 때 딱 한 번 갔던 곳이다.
넓은 숲속에 지어진 산장은 멀리서 봐도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예전에 엠티를 갈 때 묵는다고 인터넷에서 봤던 펜션보다 훨씬 좋았다.
호화로운 펜션을 보고 도대체 이런 곳은 누가 가는 걸까 상상하다 그만둔 적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그가 보여 준 세계는 전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계였다. 처음 먹어 보는 값비싼 음식, 보기만 해도 돈을 내야 할 것 같은 명품 옷과 시계. 도한은 물 쓰듯 아낌없이 이림에게 돈을 썼다.
하지만 그 새로운 세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도한은 이림이 아무와도 연락하지 못하게 했으면서 선심 쓰듯 통화 한 번 시켜 주곤 기분을 맞춰 줬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평범하게 살아온 이림으로서는 이해 가지 않는 도덕관념과 기준을 가진 도한은 이렇듯 때때로 아주 잔인해지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대수롭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같이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야.’
그의 비정상적인 생활에 맞춰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림은 다시 한 번 탈출을 마음속에 새기며 눈을 감았다.
***
다음날 이림은 고양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골몰했다.
“삼색이? 삼이? 으음…….”
뭘 해도 마음에 차지 않아 클리닝을 맡길 옷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데, 문을 열자마자 다시 공진과 마주쳤다.
문을 빤히 보고 있었는지 그가 살짝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터라 한숨을 쉬면서 옷을 내려놨다.
“이렇게 가까이 안 있으셔도 돼요. 저 도망 안 가요.”
“걱정 안 하는데요? 그보다, 고양이 이름 정하세요?”
또 언제 그걸 들었는지. 이림은 대답하지 않고 옷을 착착 정리해 바구니에 넣었다. 그러나 공진은 신나서 말을 이었다.
“제 친구 강아지는 30킬로 넘는 셰퍼드인데, 이름이 참깨예요. 귀엽죠?”
“…….”
정색하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어서 작게 웃었다. 곧바로 웃음을 멈췄지만 공진은 이미 바짝 다가와 넉살을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참 밉지 않았다.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하고 시원한 향의 도한의 페로몬과는 다르게 공진은 고목을 떠올리게 하는 깊고 은은한 향을 가졌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 그러나 그 순수함이 정순한 것은 아니었다. 공진과 눈을 마주치면 내면의 순수한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페로몬 샤워까지 된 이림이 다른 알파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을 조절하지도 감추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림은 공진과 같은 마음도 아니었기에 눈짓으로 인사한 후, 재빨리 문을 닫았다.
도한을 제외하고 대화할 사람이 생긴 것은 좋았지만 도한이 알아챌까 봐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목이 타 물을 마시기 위해 정수기에서 갈증을 채우다가 과일을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커다란 냉장고는 매일 아침 배달되는 과일과 야채가 한가득이었다. 알록달록한 과일들을 보다 사과를 꺼내는데, 그 위 칸에서 뽀얀 무언가가 보였다.
***
“오늘 마중 나와 줬네?”
퇴근한 도한이 거실에 서 있는 이림을 보고 빙긋 웃었다. 냉전과 은근한 기 싸움이 묘한 기류를 형성해 둘을 감싸길 며칠째. 이림이 먼저 한 발짝 다가온 것이다.
예민했던 신경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도한이 팔을 벌렸다. 그러나 이림은 넓은 품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무언가를 쑥 내밀었다.
“……?”
너무 작아 들고 있는 줄도 몰랐던 고양이가 벌벌 떨고 있었다. 딱히 애정을 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괴롭힌 적도 없는데, 이 작은 짐승은 도한을 보고 발버둥 쳤다.
도한은 빤히 바라만 보고 있고 고양이는 발버둥을 치니, 결국 이림이 포기하고 손을 거뒀다.
“이름 지어 줬어.”
“음……? 뭔데?”
“두부.”
“……귀엽네.”
도한은 별일 아니라는 듯 눈썹을 올리고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반응에 이림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래도 나름 오랫동안 고민한 건데 반응이 영 시원찮으니 기운이 빠졌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아무에게도 관심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다.
고양이 때문에 축 처진 이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도한은 안방으로 들어가며 커프스단추와 넥타이핀을 빼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림은 적막한 거실에 한참을 서 있었다.
다음날, 이림은 또 옷을 내놓을 때 공진에게 붙잡혀 그의 말동무가 되어야 했다. 거절할 핑계를 찾지 못해 대충 고개만 끄덕이기를 십 분, 잠에서 깬 두부가 문으로 비척비척 걸어왔다.
“아!”
걷는 속도가 한없이 느리다 보니 쉽게 막을 수 있었지만 다음에는 밖으로 뛰쳐나갈지도 모른다. 고양이 안전 문을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양이를 들어 올리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은 공진이 잽싸게 말을 걸었다.
“귀엽다. 이름이 뭐예요?”
“두부…… 요.”
도한에게서 싸늘한 반응만 얻었다 보니 이림은 괜히 움츠러들어 어물어물 작게 말했다. 그러나 공진은 진지하게 말했다.
“너무 귀엽다.”
“……진짜요?”
“그럼요. 몇 개월이에요?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네.”
공진은 호들갑을 떨며 두부를 두 손에 꼭 잡고 둥둥 얼렀다. 눈가가 살짝 접힐 정도로 웃는 공진은 정말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왠지 안심한 이림은 싫어하지 않고 얌전히 손길을 받는 두부와 공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이후로 둘은 빠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주로 오후 두 시부터 네 시.
이림은 가끔 과일을 깎아서 건네주기도 하고, 군것질을 좋아하는 이림을 위해 가정부가 상시 준비해 두는 디저트를 내어 주기도 했다.
아직도 성장기를 겪고 있다는 공진은 언제나 거절하지 않고 넙죽 받아먹었다.
오늘도 맛있게 먹는 공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림은 상념에 젖었다. 그러고 보면 도한도 스물네 살까지 계속 컸다고 했다.
공진도 이미 180cm가 넘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장신이 되려나 보다. 그들의 음식 섭취량을 보면 더부룩하다 못해 질릴 지경이었다. 어쩔 때는 그렇게 한바탕 먹어 놓고선 대화 도중 공진의 배가 꼬르륵 울린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도한 때문이라도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오기가 생겼다.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기 싸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공진과 자신의 대화를 막지 않는 건지 궁금했다. 어쩌면 공진도 도한이 보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으니 그냥 이림이 먼저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이림이 빤히 바라보자 얼굴을 붉힌 공진이 물었다.
“왜…… 쳐다봐요?”
“제가 그랬어요? 워낙 잘 먹어서 봤나 봐요.”
“…….”
“공진 씨는 여기 오기 전에 어디서 일했어요?”
이림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공진은 말을 이었다.
“음…… 운전기사도 해 보고 회장님 계시는 곳에서도 일해 봤죠.”
“그래요? 역시 많이 넓은가 봐요. 전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어서……. 가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궁금하기도 하고. 항상 저 나무 뒤에 뭐가 있을까 상상하다가 말고 그렇죠, 뭐.”
이림은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말을 흘렸다. 제발 공진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동공을 응시하자 잠깐 입매를 모았던 공진은 또 이림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 생각나는 것을 줄줄 읊어 버렸다.
“어…… 제가 보니까 나무 옆으로 산책로가 있더라고요. 아마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곳 같던데…… 저도 잘은 몰라요.”
“아, 그래요……?”
이림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그를 보지 못한 공진이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저기…… 혹시 갑갑하지는 않으세요?”
“이 별채 말이에요? 답답하죠. 답답해 죽겠어.”
“혹시…… 못 나가게 하시는 거예요?”
공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눈치를 살피는 공진을 보고 픽 웃은 이림은 허공을 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면 제가 왜 여기 혼자 있겠어요. 이제는 포기했어요. 내 팔자다, 하고 사는 거죠.”
이림은 침울하게 말하다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공진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이림은 울렁이는 기분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하다. 그냥 슬픈 척만 하려 한 건데,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겪은 단꿈에 취해 몇 년을 끌려왔다. 지금 도한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이 와중에도 그와 대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패배감에 젖은 이림의 눈에서 조금씩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이림이 울자 더욱 강해지는 페로몬에 공진은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했다.
우는 오메가를 달래 줘야 한다는 생각과 이대로 옷을 벗기고 덮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충돌했다. 위험한 감정이 감돌던 공진은 충동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이림이 토끼 눈을 뜨고 물어봤다. 너무 생각대로 되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오히려 당황해 주춤거리는 이림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댄 공진이 낮게 계획을 속삭였다.
“다음 주 금요일에 상무님이 늦게 들어오신다고 하는데, 그때 나가시죠. 제가 경호복 한 벌 준비해 드릴 테니까 제가 신호 주면 나오세요.”
“잠깐…… 그럼 당신은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뭐, 죽이겠습니까. 사람을 가둬 놓는 파렴치한이지만.”
공진이 굳혔던 낯을 풀며 다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이림은 생각보다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왠지 공진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공진을 보면 자꾸 스무 살의 자신이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별것 아닌 감정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구렁텅이 안으로 넣어 버린, 과거의 한심하고 멍청했던 5년 전의 자신과 겹쳐 보였다.
공진과 말문을 튼 지 이 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야 그에게 들키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공진은 너무 위험했다.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사회생활에 커다란 지장이 생길 거라는 것을 이림은 모르지 않았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이림은 스스로 자조했지만 도한의 천성이 이기적이듯 이림 또한 천성이 바보같이 착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공진은 도한이 이림을 떠보려 보낸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도한이 시킨 질문일 수도 있지. 그렇게 된다면 자신만 손해인 것이다.
결국 이림은 고개를 저었고 공진은 입만 뻐끔거렸다. 일어서려는 이림을 붙잡고 더 입을 열려던 공진을 막은 것은 시끄러운 벨소리였다.
순간, 이림과 공진은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도한이 서류 가방을 든 채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리고 굳어 버린 둘을 보던 도한은 서류 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서류 가방에서 서류들이 쏟아져 나와 현관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누구도 그쪽에 시선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와 똑같은 낯의 도한은 이림을 보다 옆의 공진을 바라봤다. 표정의 변화 없이 느긋한 도한과 정반대로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공진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도한은 반항적인 공진의 눈빛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발을 들었다.
뻑!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서류 가방이 도한의 발에 채여 주방까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현관에서부터 주방까지, 하얀 종이가 길을 만들었다.
“주워.”
“…….”
“두 번 안 말해.”
숨 막히는 정적에 이림은 숨을 들이켰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공진이었다. 그가 허리를 접고 서류를 쓸어 모을 동안 이림은 차마 둘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그 사이 도한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서류 가방을 정리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공진을 무시한 도한은 그대로 베란다로 나가 버렸다.
안절부절못하던 이림이 현관을 바라보자, 공진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나가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상처받은 동물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은 도한의 기분을 살펴야 할 때였다.
졸지에 두 사람 사이에 낀 이림은 입술을 물어뜯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베란다로 걸어갔다. 도한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기억에 새겨진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평소에는 도한이 이림의 기분을 맞춰 줬으나 드물게 그의 기분이 나쁘면 오히려 이림이 안절부절못했다. 게다가 자신에게 이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이림은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조금씩 가을이 다가오면서 해가 질 즈음이면 대나무가 휘청일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이림이 온 것을 알면서도 그를 등진 채 담배를 피우는 그의 뒷 머리칼과 재킷이 바람에 휘날렸다.
스산한 소음만이 팽팽히 당겨진 끈을 아슬아슬 빗겨 나가고 있었다.
결국 공진에 이어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것은 이림이었다. 이림은 도한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도대체 왜 자신이 굴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굴복시키는 거대한 힘이 있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힘을 갈고 닦아 날카로운 창으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이었다.
도한은 형질적인 특성 말고도 좀 더 강력한 에너지가 있었다. 공진과 이림은 도한의 가까이서 그것들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등을 껴안았지만 도한에게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살짝 겁이 나기도 했지만 도한은 받아 줄 것이라 믿었다.
이림은 스스로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벌써 그의 정부로 살면서 어떻게 하면 도한이 화를 풀지, 기분이 좋아질지 빠듯하게 알게 되었다.
스스로 교태를 떠는 것을 끔찍하게 혐오했지만, 정작 제 행동과 신념의 괴리를 알지 못한 상태였다.
단단한 등에 얼굴을 부비고 어리광을 떠는 이림을 떨어트린 도한은 드디어 이림을 마주 보고 섰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지긋한 시선에 왠지 모르게 급격히 자신감이 떨어진 이림이 시선을 돌리자 도한이 이림의 뒤통수를 강하게 잡아 왔다.
“……!”
“왜 자꾸 짜증이 나지?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토끼 눈을 뜬 이림은 그의 손을 떼어 내려 발버둥 쳤다. 부드럽게 잡았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악력 때문에 그의 손을 손톱으로 긁다가 결국 포기했다.
이림이 얌전해지고 나서야 손을 푼 도한은 정수리부터 목까지 길게 쓰다듬었다.
“혼나야겠다.”
“잠깐…… 잠깐! 악!”
그대로 이림을 어깨에 들쳐 멘 도한이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침대에 눕혀진 이림은 안절부절못하며 그가 옷을 벗는 모습만 바라봤다.
겁먹은 이림을 보는 도한의 눈은 가학심으로 불타올랐다. 도한이 눈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겁을 먹는 이림에게는 그가 악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이림을 보며 도한은 벗은 재킷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더니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오랜만에 그거나 할까?”
“……싫어.”
이림은 질색하며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방문을 열기도 전에 잡혀 일찌감치 넥타이로 손이 묶였다.
도한이 검은 재킷을 벗자 넓은 어깨와 흉통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재킷 없이 흰 와이셔츠와 베스트만 입은 도한의 모습은 왠지 무성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들고 온 물건들은 영화에서는 절대 쓸 수 없는 용품들이었다.
손이 묶인 이림을 두고 도한은 한 개비를 더 꺼내 들었다. 침대에 누운 채 그를 노려봤지만 도한은 한 손은 바지에 꽂은 채 장난치듯 느긋한 모습으로 이림을 바라봤다.
일부러 수치심을 주는 그의 행동에 이림이 드물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자식아!”
머리끝까지 화가 나,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다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타다닥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이림의 뒤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로 잡히지 않자 이상하게 더 불안하고 무서웠다.
머리가 쭈삣 설 정도로 오싹해져 거실 한가운데서 급하게 갈 곳을 찾았다. 그러나 둘이 살기에 넓다 해도 40평 정도였다. 웬만한 방은 다 개방되어 있으니 숨으나 마나였다.
안절부절못하던 이림은 도한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드레스 룸으로 숨었다.
드레스 룸 중에서도 옷감이 묵직한 정장 사이에 들어가 몸을 욱여넣었다. 스물다섯 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처량 맞다가도, 그에게 들킬까 무서웠다.
몸을 쭈그려 숨은 이림은 잠깐 울컥했지만 금세 다시 긴장했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두렵고 서러웠다.
“…….”
드레스 룸은 너무 고요해 폭풍전야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도한이 찾아올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은 도한이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모른 척 없던 일로 해 줬으면 하는 것이다.
“근데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지. 다시 우울해져 고개를 처박으려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쾅-!
“헉!”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 우지끈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대로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림은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와 반대로 이림의 얼굴은 미동 없이 새하얘져 있었다.
제발…… 제발…….
그러나 이림의 기도와는 달리 너무나 쉽게 드레스 룸이 열렸다. 멍하니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는 그를 내려다본 도한이 아까의 표정과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나와.”
아니, 오히려 더 즐거워하는 것 같다. 굳어 버린 이림의 겨드랑이에 직접 손을 건 도한이 묶인 손안으로 제 얼굴을 집어넣었다.
넥타이만 빼면, 이림이 직접 도한의 목을 껴안는 것처럼 보였다.
저벅저벅-.
5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안방으로 들어온 이림은 아까와는 달리 거칠게 던져졌다.
채찍, 애널 플러그, 젖꼭지와 성기가 다 드러나는 입으나 마나 한 속옷 등이 침대에 펼쳐졌다. 경악하는 이림의 다리를 끌고 와 제 다리 사이에 놓은 도한은 직접 옷들을 벗겨 냈다.
바지는 별 힘들이지 않고 벗겼지만 상체는 손이 묶여 있으니 그냥 찢어 버렸다. 이쯤 되자 반항하던 이림도 몸에 힘을 축 빼고 죽어 가는 물고기처럼 숨만 깔딱거렸다.
이림이 울든, 화를 내든 모든 행동에 발정하는 도한은 그 모습조차 성욕이 일었다.
얌전해진 이림의 몸을 손으로 훑으며 체온을 느끼던 도한은 제일 먼저 속옷을 집어 들었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까만 속옷은 팬티와 짧은 나시가 이어진 형태였는데, 늘씬한 이림이 입으면 더욱 야해 보였다.
분홍색 성기와 젖꼭지는 제대로 숨겨지지도 않아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림은 결국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도한의 성기는 프리컴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쉬…… 왜 울어.”
“싫어…….”
“그거 말고.”
“……싫어요.”
만족한 도한이 그를 돌려 엎드리도록 만들었다. 뒷목부터 슬슬 쓰다듬으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뭐가 싫어. 혼나야겠다고 했잖아.”
“이거 싫어요…….”
“이게 뭔데.”
“그게…… 이렇게 묶고, 때리고…… 그런…….”
“때리는 거 아닌데.”
그의 손이 부드럽게 등을 쓸다가 척추 뼈를 누르듯 골을 타고 치골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복숭아처럼 분홍빛이 감도는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
“아흑…….”
손에 힘을 주자마자 엉덩이는 물론 허벅지까지 빨개졌다. 떡을 주무르듯 세게 잡았다 놓기를 반복한 도한은 불시에 손으로 엉덩이를 내리쳤다.
짝-!
“아……!”
다시 한 번 내리치자 이림이 견디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손은 묶여 있었고, 두 배 가까이 덩치가 큰 도한이 손으로 짓누르니 결국 몇 번 바르작대다 포기했다.
아팠다. 분명 아픈 게 맞았는데 이상하게 찌르르한 쾌감이 올라왔다.
언제부턴가 도한은 이림에게 알 수 없는 성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번은 도대체 왜 이러냐고 질색하니 도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너만 보면 괴롭히고 싶어져.’
도한은 그렇게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해 대며 멈추지 않았다. 평소에는 이림의 몸만 봐도 달려들었지만 가끔 이림이 말을 듣지 않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괜히 이상한 플레이를 하며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괴롭혔다.
지금이 딱 그 상황이었다. 대부분 러트 때만큼 길게 사정 시간을 늦추거나 횟수를 두 배 가까이 늘려서 이림을 녹초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이상한 속옷을 입혀 놔서 수치심까지 배가 되었다.
그러나 이림의 생각과는 달리 구멍에서 끈적한 액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쁘게 오므라진 구멍에 투명한 액이 고이는 것을 보며 도한이 피식 웃었다.
그대로 손가락 두 개를 쑤셔 넣어 내벽을 건드리자 이림이 팔딱였다. 피스톤질을 하며 음란한 소리를 만들어 내자 듣기 싫은지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너무 예뻐…….”
어느새 손가락을 세 개로 늘려 쑤시던 도한은 구멍이 흐물흐물해지고 나서야 손을 뺐다. 그리고 제 커다란 성기를 엉덩이 골 사이에 비볐다.
바짝 긴장하는 이림의 목덜미를 쓸며 그의 위에 엎드리듯 성기를 삽입했다. 팔의 힘으로 지탱한 상태라 엄청난 무게에 깔리진 않았지만, 도한의 단단한 복근과 가슴이 선명하게 느껴지며 답답함과 쾌감이 전신에 퍼졌다.
이림은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도한은 허리를 움직이면서 신음을 내기에 바빠졌다.
“그만…… 그만! 답답해. 숨 막……! 아! ……흐으읏.”
“큭……!”
그렇게 풀어 뒀는데도 빡빡해서 성기가 저려 왔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내 길을 내듯 피스톤질을 시작하자 애액과 프리컴이 섞여 금세 질척거렸다.
제 몸으로 이림을 가두듯 하고 엎드린 자세로 짐승 같은 교미가 계속되자 이림은 혀를 내밀고 숨만 헐떡거렸다.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도리질 한 번 치는 것도 어려웠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등 뒤에는 그보다 더 뜨거운 체온을 가진 도한이 달라붙어 왔다.
쾌감과 정신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이림이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그만둘 생각이 없는 도한은 그의 울음이 거세질수록 허릿 짓에 박차를 가했다.
손이 묶여 버린 이림을 대신해서 이림의 골반 아래로 손을 넣은 도한이 그의 성기를 애무했다.
“아아!”
앞뒤로 퍼지는 쾌감에 얼마 되지 않아 사정을 한 이림은 이제 정신을 반쯤 놓았다.
이림이 손에 싸지른 말간 정액을 시트에 대충 닦은 도한이 사정감을 억누르며 퍽퍽 소리가 날 만큼 허리를 움직였다.
신체적인 쾌감을 넘어서 뇌까지 뚫리는 느낌에 이림의 눈이 뒤집혔다.
“하…… 하아.”
오줌처럼 엄청난 양의 정액이 쏟아지고 나서야 도한은 몸에 힘을 풀었다. 곧장 시체처럼 늘어진 이림을 다시 뒤집자 엉망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시트에 눌렸는지 얼굴 한쪽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눈가와 입은 풀려 있었다. 도한의 눈을 보자 이미 줄줄 흘렀던 눈물이 이제는 폭포수처럼 흘렀다. 이림은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도한의 팔을 때리며 발버둥 쳤다.
“너무해……. 흐윽…… 흡.”
“울보.”
열이 올라 후끈거리는 작은 얼굴을 보니 미묘한 감정이 가슴을 울렁였다. 안쓰럽기도 하고 만족스럽기도 했다. 괴롭히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을 올려다볼 때 드러나는 흰 뺨과 유려한 눈썹, 흑 구슬 같은 눈을 보다 보면 파괴욕과 애욕이 한데 끓어 흘러넘쳤다.
이렇게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몰아붙이다가, 이림이 제 의도대로 지쳐 떨어지면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이림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여 그를 만나기 전까지 누군가와 진지한 관계가 되거나 애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림은 음험한 도한을 욕했지만, 사실 이림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이런 플레이를 시도한 적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으니 관계를 이어 가기 위한 의무적인 섹스 이외에는 딱히 무언가를 시도한 적이 없었다. 이림을 만나기 전까지는 도한은 제가 성욕이 이렇게 왕성한 줄도 모르고 살았다. 만약 이림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수절하고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림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의 조부에게 물었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같은 대답이었다. 비이상적인 대답에 도한도 이상함을 느꼈으나 그때마다 그는 어린 도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차분히 말했다.
‘우린 남들과 다르지 않니.’
그 말이 옳았던 걸까. 아직도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이림에게 잔혹한 일이 될지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애정을 지속적으로 퍼부어야 하는 모든 것이 지루했던 도한은 손쉽게 많은 관계를 끊어 냈다. 뺨도 여러 번 맞아 보고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적도 있었으나 애정이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략결혼을 해야만 회사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니, 도한은 평생 혼자 살 계획이었다.
이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처음에 신입생 입학식에서 이림을 봤을 때를 잊을 수 없었다. 오메가임에도 남들보다 한 뼘은 더 길쭉한 팔다리와 모자를 쓰고 있었음에도 언뜻 보이는 붉은 입술과 콧날은 주변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입학 환영사를 위해 학교를 방문한 도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에게 홀리는 수많은 벌 중에 한 마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더러우면서도, 가슴이 묵직해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의 것이라고 느꼈다. 첫 만남에서 이미 그를 보는 더러운 눈깔들을 쳐내고 자신만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일을 내려놓고 오로지 이림을 얻기 위해 학교를 다녔다. 애정에 면역이 없는 이림은 처음에는 도망 다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때의 충만함은 절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그를 노리는 벌레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이림에게 말 한마디 붙이고 싶어 안달난 놈들.
‘정일재였나. 그 새끼도 눈깔이 노랬지.’
이림의 친구 행세를 하면서, 제가 다가오면 경계하던 눈빛. 도한은 날파리를 쫓는 것처럼 그것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지만 불쾌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이어진 이 파괴적인 감정을 이림에게 설멍할 수는 없었다. 가끔은 자신조차 왜 이렇게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인지 짜증이 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한은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손에 묶인 넥타이를 풀자 붉게 쓸린 살갗이 드러났다.
그곳을 살살 쓸며 페로몬을 열자 이림이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조금씩 펴더니 이내 잠에 들었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빛에 반짝였다.
거의 기절하듯 꿈속으로 빠진 이림을 보는 도한의 눈은 온통 끌탕이었다.
***
그렇게 화해 아닌 화해를 하면서, 이림과 도한의 관계는 원 상태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매일 반갑게 아는 척을 했던 공진은 얼굴에 커다란 멍 하나를 달고 와서는, 이림에게 한마디도 붙이지 않았다.
이림도 왜 그런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기에 갑자기 풀죽은 그가 안타까웠지만, 자신이 관여할수록 그가 더욱 괴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모른척했다.
결국 저 멀리서 펜스 설치를 돕는 공진을 보다 등을 돌려 서재로 들어갔다. 금세 잊고 살 궁리를 하는 이림과 다르게 닫힌 서재 문을 바라보는 공진의 눈은 오래도록 푸르게 타올랐다.
공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림은 그의 말대로 도한이 출장을 가게 되는 금요일에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나흘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동안 답답해서 몇 번 충동적으로 뛰쳐나간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마음을 먹고 나가려 하는 건 처음이었다.
도한은 금요일 아침이 되면 비행기 시간에 맞춰 7시에는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럼 자신은 싸 놓은 가벼운 짐을 들고 뒷문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일부러 출근 시간에 도한이 밖을 나서자마자 공진과 몇 번 얘기해 봤지만 도한으로부터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으니, 그 시간이 적기였다.
만약 중문으로 나가게 된다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별채에 출입하는 사람들마다 명찰을 메고 있는 것을 보니 저게 없으면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뒷마당의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이 저택이 지어질 때부터 함께 존재한 대나무는 그 크기가 20m는 족히 넘었다.
비와 눈을 맞아 가며 수십 년간 제 자리를 지킨 침엽수는 푸르죽죽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음산해 보였다.
가끔 바람을 타고 느릿하게 거대한 몸을 흔드는 모양새가, 마치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라고 경고를 주는 듯했다.
‘어떻게든 나갈 거야.’
이림은 대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림은 나무와 씨름 아닌 씨름을 하느라 옆으로 다가온 공진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이림은 깜짝 놀라 물러났다.
“깜짝이야……! 왜 여기 있어요?”
“그게…… 그…… 그날 괜찮으신가 하고.”
공진은 이림보다 더 크게 놀라더니 우물쭈물 말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한 이림은 애써 냉정히 말하며 돌아섰다.
“일 하시는 곳으로 가세요. 이렇게 둘이 있으면 안 돼요.”
“왜요? 왜 안 돼요……? 진심으로 그 사람 좋아하는 겁니까?”
“최공진 씨.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그쪽이 무슨 상관이죠?”
“전 도와드리려고 그런 겁니다!”
공진이 울컥한 듯 소리쳤다. 이림은 흰 눈으로 공진을 바라봤다. 지금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는 걸까. 한숨을 쉰 이림이 그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자신의 탈출 계획을 세우는 것도 머리가 깨질 지경인데,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문을 닫고 한숨 돌리며 무심코 밖을 바라보니 공진은 아까 그 자리에 서서 이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당한 듯 슬픔과 분노가 얼룩진 그의 표정은 보는 이림의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난…… 걱정해 준 건데.”
뚫어질 듯 빤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커튼을 쳤다. 그제야 숨을 크게 몰아쉰 이림은 자신이 여지를 줬는지 고민했다.
“내가 그랬나……?”
몇 번 과일을 깎아서 주거나 손대지 않은 디저트들을 준 적은 있어도, 그의 몸에 손을 댄 적도, 오해할 만한 말을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뭐에 씐 듯 당당하게 제게 화를 내는 모습은 제가 알던 공진이 아닌 듯해 오싹한 느낌까지 들었다.
앞으로는 공진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이림은 애써 불쾌함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
계획을 사흘 앞두고, 도한과 이림은 강원도로 휴가를 떠났다. 먼 길을 떠나며 이림은 뒷좌석에서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도한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태블릿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림은 그런 도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소 같은 슈트가 아니라 캐주얼 차림이었다. 왁스를 바르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는 조금 부스스했다.
머리를 빤히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도한이 태블릿을 끄고, 이림에게 머리를 기대고 아래에서 위로 빤히 올려다봤다.
커다란 몸을 구기며 이림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간 도한은 그대로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둘이 가니까 너무 좋다.”
“…….”
“응?”
도한은 웃는 표정 그대로 이림을 바라봤다. 계속 웃는 얼굴로 대답을 종용하는 모습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낸 도한은 그대로 이림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일이 꽤 지쳤는지 금세 잠든 도한의 얼굴은 꽤 까칠해져 있었다. 다크서클이 살짝 내려와 안 그래도 움푹 들어간 눈매가 더욱 퀭해 보였고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자는 와중에도 시종일관 인상을 찌푸린 상태였다.
그래도 여전히 잘 생겼다. 그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림의 인생에서 다시는 겪지 못할 부류의 사람일 것이다.
……잘 있어.
이림은 색색거리는 도한의 숨소리를 들으며 미리 이별을 고했다.
두 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산장은 여전히 고즈넉했다. 멀리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작게 들렸고, 주변은 온통 숲이었다.
맞은편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지만 저기까지 가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어야 할 것이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는 이곳에서 맨몸으로 탈출해 봤자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림은 그저 이 마지막 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도한의 사무용 가방을 빼고는 거의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둘이었지만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지문과 카드 인식으로 문이 열리자 후끈한 열기가 몸을 데웠다.
이미 누가 다녀간 듯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원목 테이블에는 버킷에 담긴 와인과 스테이크용 고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니 괜히 군침이 돌아 침을 한 번 삼켰다.
“씻고 와. 준비하고 있을게.”
“응.”
달그락거리는 주방의 소음을 들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목조 자재로 대부분을 마감처리 한 건물과는 다르게 욕실은 커다란 유리와 대리석으로 설치되어 쾌적했다.
이림이 평소처럼 무심코 안으로 들어서는데, 이상한 느낌에 안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게 난 창 바깥으로, 고라니 한 마리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라니는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후다닥 사라졌다.
“…….”
그리고 곧이어 관리인 한 명이 고라니를 보며 소리치다가 자신을 보고 고개를 꾸벅였다. 마흔은 되어 보이는 모습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
산 중에서 이렇게 산장이 쾌적하게 관리된다는 것은 분명 누군가가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것일 텐데. 이 생활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당연한 것도 까먹게 된다.
마당에 산더미같이 쌓인 장작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소나무와 들풀들은 산장과 적당한 조화를 이루도록 관리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이림은 구조적인 아름다움이나 조명의 조화를 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수고로움을 봤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이 호화로운 생활에 길들여져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를 피해 다니려면 일은 물론 대학도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수밖에 없겠지. 남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남이 입을 옷을 추천해 주며 평범한 사람과 다를 것 없이 살아갈 것이다.
과거의 자신이 지금 제 모습을 봤다면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림은 멍하니 주변을 훑으며, 이상하게 침잠된 기분을 끌어올리려 애썼다.
머리를 털며 나오자 벌써 거실은 배고픔을 자극하는 냄새로 가득했다. 은은한 조명에 와인과 스테이크가 정갈히 놓여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자리에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도한에게서 은은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그새 언제 피우고 왔던 걸까. 요즘 들어 담배 피우는 횟수가 늘어난 것 같다.
생각을 이어 가며 맛있게 먹는 이림을 보던 도한은 빙긋 웃으며 대학생 시절 이야기를 꺼내 왔다.
“그때 네가 가장 비싼 음식 말해 보라니까 한우라고 했잖아. 내가 얼마나 웃겼는데.”
“…….”
도한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때 이림이 입었던 옷, 메고 있었던 가방, 신발까지 기억해 냈다. 그게 신기하기도 해서 이림은 잠자코 와인을 마시며 계속 들었다.
그런데 자꾸 과거 얘기를 말해서 그런지, 욕실에서부터 이어진 이상한 울렁임이 계속됐다. 과거의 향수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결국 말을 꺼냈다.
“대학생 때 얘기 나와서 그런데…….”
“뭘?”
“그때…… 그때 그러니까. 왜 그랬어?”
그다음. 자신이 잘못 말했나 싶을 정도의 서늘한 정적이 이어졌다. 도한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데.”
“나 몰래 다른 사람 만나고…… 결혼하고…… 그랬던 것들. 언제 한 번이라도 속 시원히 말해 준 적 있어? 없잖아.”
“…….”
이림은 자신이 따져 놓고선 말을 끝내자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도한은 그런 이림을 바라보며 그린 듯 미려한 얼굴을 훑어봤다.
그리고 곧이어 옛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입학식에서 이림을 본 도한은 그때부터 주변의 가지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면 애매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돌려 버리는 이림 때문에 애가 타기도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그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알파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정일재.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의 곁을 차지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음습한지, 도한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흑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회사 인턴십 이외의 시간을 쪼개 학교를 들려 어떻게 해서든 이림과 마주치려 노력하는데, 정일재는 손쉽게 그의 웃음과 애정을 받아 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거슬리고 불쾌했다. 도한이 이림에게 다가가면 옆에서 주제도 모르고 눈깔을 치켜뜨는데, 정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었다.
그러기를 몇 주째. 이림이 그 알파 새끼와 저녁을 먹고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한 도한은 처음으로 돈을 써 사람을 다루려 했다.
그러나 스물넷의 도한은 아직 치기 어린 도련님일 뿐이었다. 이 사살을 안 아버지로부터 얼굴을 제외한 모든 곳을 골프채로 처맞았다.
옷 밖으로 나온 손목까지 푸르게 멍이 올라오는데, 신음 하나 내지 않는 아들을 본 그는 말했다.
‘넌 순서가 잘못됐다. 우리가 붙여 준 오메가들을 네가 쳐낸다고 화를 낸 적이 있었을까. 어련히 네가 잘할까 싶어서 내버려 둔 거다. 그리고 네 능력으로는 충분히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니,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 할 생각 없었다. 그런데 민간인을 건드리는 것은 얘기가 다르지.’
‘정일재를 얘기하는 겁니까?’
‘뒤가 구린 놈들을 처리하는 것과 민간인을 건드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런 것을 하기엔 넌 아직 어려. 대상이 누구든, 네 마음대로 굴리려면 지금 당장 그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
‘나는 네가 모든 성과를 네 힘으로 일궈 내면 하는 바람이지만, 넌 지금 당장 그 아이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
다 알고 있으면서 말하는 그를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본 도한은 곧이어 수긍했다.
그 이후로 일사천리로 선을 보고 약혼을 했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별 상관이 없었고 이 과정을 견디면 이림을 지금 당장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분명 정일재를 죽이고 이림을 가둬 놓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도중에 이림이 헤어지자는 개소리를 하는 바람에 손을 쓰느라 잠시 정일재를 잊고 살아왔다.
이러한 속사정을 그는 절대 모를 것이다.
“난 널 도와줬고 대가를 받은 것뿐이야.”
“…….”
“강이림.”
이림은 역시나 이번에도 고개를 떨구고 제 처지를 자조했다. 모든 것을 제가 자초했지만, 그렇다고 슬픈 표정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이리 와.”
도한이 팔을 벌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이림을 가볍게 들어 올려 그대로 베란다로 나가자 풀장이 보였다. 온수와 거품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서늘한 기온에 김이 하얗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흰 티셔츠를 한 번에 벗은 도한은 그대로 이림의 옷을 벗겼다. 바지, 상의, 양말까지 벗겨지는데도 이림은 바르작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있었다.
언뜻 보면 도한이 그의 시중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티셔츠에 가려져 있던 커다란 몸이 위협적으로 느껴져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최대한 손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탈의를 시켰지만, 그건 도한의 기준이었다. 은근 거칠게 쓸려 나가는 옷감에 목을 움칠거린 이림은 커다란 손에 잡혀 발목을 물속에 담갔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후끈한 감각에 온 신경이 나른해졌다. 이대로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 전에, 물속에 들어간 도한이 이림을 끌어당겼다.
“앗……!”
잡을 것이라곤 도한의 어깨밖에 없어 결국에는 그의 몸에 손을 둘렀다. 도한은 버둥거리는 이림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뽀얀 이마를 드러냈다.
둘은 잠시간 시선을 교환했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은 어이없는 착각에 빠지면서도, 이 분위기에 잠겨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입을 겹쳤다. 오랜 연인이었지만 언제나 처음처럼 서로에게 진심을 다했다. 이러한 정열에 시달리다 보면 가끔은 영혼이 공유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생각했던 도한의 감정이 보인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깊고 뜨거웠다.
“하아…….”
“…….”
입이 부드럽게 떨어지며,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시야가 훤해지자마자 보인 그의 눈은 언제나와 같이 새카맣고 둥글었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빛나고 있었다.
이림은 그 눈을 보고 어떤 누구도 이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들리는 이림의 눈빛을 눈치챈 도한이 입을 열었다.
“너도 나 없으면 안 되잖아.”
“…….”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아무도 믿지 마. 내가 하는 말만 믿어.”
이림은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하는 싸움이 턱도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림이 숲에 뿌리내린 나무 중의 하나라면, 그는 거대한 산이었다. 지금도 그의 힘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인형처럼 평생 그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별채 마당으로 보이는 네모난 하늘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천공을 보고 싶었다. 사시사철 피는 꽃 속에 파묻혀 세월을 잊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간의 유속을 맞이하고 싶었다.
이림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표정을 본 도한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짧지 않은 물놀이가 끝나고, 밤은 더욱 깊어 갔다. 이림이 도망치기까지 사흘을 앞둔 날이었다.
그리고 그 당일. 둘은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나 다녀올게. 화요일에 올 테니까 얌전히 지내고.”
“응.”
이림은 현관 앞에서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를 입고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도한은 빈틈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도한이 이림의 볼에 키스를 하면서 짧은 배웅이 끝났다.
탁-.
마침내 그가 별채를 벗어났다. 그토록 기다리고 염원하던 순간이었음에도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
하지만 이림은 곧이어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침대 밑에서 캐리어 하나를 꺼냈다. 그가 출근할 때마다 틈틈이 채워 뒀던 가방이다. 안에는 안정제, 값비싼 장신구들, 여분의 돈이 들어 있었다.
오만 원짜리 한 장과 만 원짜리 세 장을 만지작거린 이림은 손에 그것들을 꼭 쥔 채 일어났다.
사실 이림은 돈을 만져 보지 않은 지 꽤 오래됐었다. 당연하게도 집 내부에서는 쓸 일이 없었고, 그에게 돈을 보여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가져가는 팔만 원도 이 집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지갑 안의 현금이었다.
가슴이 너무 뛰어 잠시 호흡을 고른 이림은 침을 삼켰다. 진정하고 캐리어를 열어 굵은 줄 하나를 꺼냈다.
끝이 올가미 형태로 된 커다란 줄은 학창 시절 줄다리기를 했을 때 썼던 줄처럼 두껍고 길었다. 집을 허물어 새로 지은 별채였지만 마당 한편에는 예전에 썼던 것인 듯 낡은 창고가 있었다.
그마저도 커다란 꽃과 풀에 뒤덮여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정원을 가꾸다 발견했다. 삽, 비료, 물뿌리개, 포장된 두꺼운 로프가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별 쓸모없는 물건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뒀지만 지금만큼 쓸 만할 때가 없었다. 그것을 허리에 감고 약과 금품, 돈을 모두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잠갔다.
마당으로 탈출하는 만큼 짐을 줄여야 했다. 자신의 몸 하나 빠져나가기 벅찬 와중에 이것저것 챙길 여력이 없었다.
모자까지 쓴 이림은 집을 한 번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거실의 시계를 바라봤다. 커다란 메탈 시계의 한 가운데 박힌 감시카메라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발견한 감시카메라였다.
가장자리에 까맣고 투명한 렌즈가 박힌 카메라는 이 와중에도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 집에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도한이 이 집을 떠나는 자신을 보고 본인이 한 행동을 되돌아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곳곳에는 도한과 이림의 추억이 묻어 있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우울해하는 이림을 위해 처음으로 배달 음식을 함께 시켜 먹었던 것. 가족 식사로 늦게 들어오는 도한을 밤새 기다린 것. 결혼식을 올린 날 혼자 베개를 흠뻑 적시며 울자 도한이 졸졸 따라다니며 한 달 가까이 달래 줬던 것.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자랑거리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악연의 추억쯤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사실 이림은 집 안에서 강한 음기를 느꼈다. 피부로 느낄 수는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이 별채에 갇힌 오메가가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이기적인 알파들이 사람을 못살게 군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이림은 도한과 함께, 이 집에도 이별을 고했다.
“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