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결심 (2/14)

2. 결심

대학 입학식 때, 이림은 아주 평범한 차림으로 학교에 갔다. 다른 신입생들이 새 옷을 입고 화장을 할 때 브랜드 없는 청바지에 흰 티, 모자만 쓴 채 학교에 갔다.

벌써부터 요란스레 떠들며 앉아 있던 입학생들 사이에 앉은 이림은 피곤함을 떨치려 눈만 끔뻑거렸다.

자리 안내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학과 선배들과 잔뜩 들뜬 동기들을 멍하게 바라보며 잠을 떨치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 봐도 어제 밤늦게 끝난 아르바이트의 여파로 인해 곤죽이 되어 무엇도 신경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신입생은 꼭 입학식에 가야 한다며 등을 떠민 부모님만 아니더라도 이불 밑에서 곤한 숙면을 취했을 것이다.

퀭한 눈가를 손으로 주무르는 이림의 몸은 피곤에 절어 있어 신입생이 아니라 야근에 시달린 직장인처럼 보였지만, 볼이 복숭아처럼 붉고 젖살이 남아 여전히 앳된 티가 났다.

결국 이림이 잠을 이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지면서 아무도 이림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렇게 졸았다 깨나는 것을 반복하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입학식을 억지로 버텨 낸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첫 수업 날, 계단을 오르는 이림의 앞에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경영학과시죠?”

“에? 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무 살인데요.”

“아! 동갑이시네요. 말 놓아도 되나요?”

속사포로 쏟아지는 호구조사에 떨떠름하게 답한 이림은 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을 놓은 남자는 학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쉴 새 없이 얘기했다.

강의실로 들어간 뒤 쏟아지는 시선에 움찔한 이림은 그냥 계단에서 만난 남자를 따라가기로 했다.

“난 김지우. 너는?”

“강이림…….”

“김지우 새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어?”

“안녕!”

앞자리에 엎드린 남자는 김지우의 일행이었는지 부스스 일어나 욕하더니 뜬금없이 뒷자리를 차지한 이림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어색한 상황이 이어지기 전에, 대각선에 있는 여자가 인사했다.

강이림, 김지우, 정일재, 이수민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평범한 날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없는 살림에 공부하기 위해 친구도 잘 사귀지 않았고 내성적인 성격까지 더해져 곧잘 외톨이가 되었다.

물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가왔지만, 이림은 천 원 한 장도 허투루 쓸 수 없었기에 외톨이를 자처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조금 여유로워져 그런 걸까. 신입생만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즐기면서 이림의 표정도 점점 밝아졌다.

영화관도 제대로 가 보지 못한 이림의 과거를 알게 된 친구들이 경악하면서, 이림은 그 셋에게 이끌려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술집에서 취할 때까지 마시다 강의를 늦기도 하고 놀이공원에서 열 시간이 넘게 놀기도 했었다.

튀는 외모 때문에 의도치 않게 벽이 느껴져 과거에는 사람들이 이림에게 잘 다가가지 못했었다.

그러나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변의 즐거운 분위기를 듬뿍 흡수하고 웃음이 많아지며, 이림과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이 많아졌다.

“안녕!”

“안녕.”

식당 앞에서 인사를 받아 주는 이림을 보며 고개를 갸웃한 김지우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누구? 우리 과는 아닌데.”

“음…… 몰라.”

몰라?

인사하면 다 받아 준다는 소문이 난 건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까지 길에서 마주치면 말을 걸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의 김지우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은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커피를 쪽쪽 빨며 수업이 있는 학관으로 향했다.

세련된 학관 앞 벤치에는 오늘따라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정확히는, 한 명이 앉아 있었고 그 한 명을 중심으로 다수가 서 있는 상태였다.

이상했다.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으니 앉아 있는 이는 머리꼭지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림도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자꾸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아예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니 그도 느낀 건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이림은 숨 쉬는 것도 잊고 남자를 바라봤다.

보이는 건 눈과 머리카락 정도였지만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전신에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그게 무슨 감정이었는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모든 사물이 흐려지고 그의 또렷한 눈빛이 제 발목을 옭아맨 감각은 여전히 기억한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고 손은 긴장으로 식은땀이 났다.

그 심장 소리는 누구나 평생에 한 번은 겪는다는 흔한 설렘 같기도 했고 더 이상 다가가지 말고 도망치라는 경고음 같기도 했다.

마냥 행복하지는 않지만 삶을 그럭저럭 견디며 한평생 고요히 살았던 이림에게 이런 강렬한 감정은 후자에 가깝게 다가왔다.

결국 억지로 시선을 돌려 발걸음을 돌렸다.

“어? 강이림! 어디 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걷던 이림은 그 남자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을 느끼고 걸음을 빨리했다. 건물 뒤편으로 가서야 숨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뛰어온 김지우는 이림을 발견하고 짜증을 냈다.

“아, 갑자기 왜 그래? 그 선배한테 말 좀 걸어 보려 했더니. 글렀다, 글렀어.”

“선배? 누구?”

“응? 누구인지 몰라? 아까 앉아 있던 선배 말이야. 서명대 재단 쪽 사람이잖아.”

서명대는 자신이 다니는 한국대와 더불어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이었다. 오히려 국제적으로는 서명대가 더 높은 대학 순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저명한 인재와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서명대 재단이 어딘데?”

“야……. 너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 이성전자 재단이잖아.”

“그럼…… 이성그룹이라고?”

“그건 아니 다행이구나.”

아직도 가르칠 게 많겠어.

김지우의 쓸데없는 잡소리를 들으며 뒷문으로 들어가면서도 이림은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 있다니. 신기하기도 했으나 왠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회피하는 성격이 강한 이림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와 계속 얽히고 엮일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무섬증이 일었다. 그것은 이림의 본능과 같은 직감이었다.

‘눈에 띄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한 이림은 강의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던 탓일까. 자리가 별로 없었다. 특히 두 자리가 남은 곳은 보이질 않아 결국 따로 자리를 찾았다.

그때 김지우가 이곳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보고 다가가 앉았다. 두 자리는 없었지만 앞뒤로 비어 있어 지우가 앞에 앉고 이림이 그 뒤 의자를 꺼냈다.

“……!”

아무 생각 없이 짐을 풀고 자리에 앉으며 무의식적으로 옆을 보다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아까 벤치의 남자였다.

민망하지도 않는지 제가 얼어붙은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이림을 빤히 바라봤다. 왠지 관찰당하는 느낌에 앉지도, 그렇다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다리를 구부린 이림을 보던 도한은 씩 웃었다.

“강이림, 맞지?”

얼굴 다음으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페로몬이었다. 처음 느껴 보는 시원하고 상쾌한 페로몬. 이 남자는 지금 몹시 즐거운 상태라는 것을, 시원하고 가벼운 페로몬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잘 정돈된 짙은 눈썹, 아래로 휘어진 눈과 입술. 그는 자신의 기분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턱을 괴고 자신을 올려다봤다.

언뜻 거만해 보였으나 맑게 웃고 있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더러운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 교수가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는데, 도한의 책상은 깨끗했다. 필통 하나 없이 마치 놀러 나온 상태였지만 그 누구도 이런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신입생의 패기로 매번 전공 서적과 필기도구, 노트까지 야무지게 챙기고 다니는 이림으로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이림은 저도 모르게 공포는 잊고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으세요?”

“나?”

“아……. 죄송합니다.”

“그럼 나 노트 한 장만 찢어 줘.”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교수님이 수업을 시작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빤히 자신을 바라봤다. 저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얼른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소리 나지 않게 노트를 찢어 잽싸게 건네자 이림의 마음을 알았는지 더는 괴롭히지 않고 앞을 바라봤다.

조용한 강의실에는 교수님의 필사 소리와 책 넘기는 소리가 종종 이어졌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노리는 이림으로서는 집중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왠지 옆자리가 신경 쓰여 필기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때야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 없이 넘겼지만, 지금은 가끔 생각나는 추억이었다. 서로의 영역 안에서 상대를 탐색하던, 어지럽고 정신없던 나날들.

그 이후로 매일은 아니지만 이 넓은 캠퍼스에서 일주일에 두 번은 마주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벌써 사귀는 거냐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림이 보기에 그의 행동은 아리송하기만 했다. 도한은 음식점에서 이림을 보면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 음식까지 전부 계산해 줬지만, 같이 밥을 먹지는 않았다.

도서관에서 만나면 이림이 꺼내지 못했던 높은 책장에 꽂힌 책을 대신 꺼내 줬지만 옆자리에서 함께 책을 읽지는 않았다.

이렇듯,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 단순히 후배를 귀여워하는 건지 모를 아리송한 행동이 이어지면서 난리를 치던 친구들도 차츰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림은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만약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온다면 화들짝 놀라 피하기 바빴겠지만 감정의 색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행동들이 계속되니 오히려 그 의도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게 됐다.

영역 가장자리에서 선을 넘을 듯 말 듯 두리번거리며 도한을 찾다가도 막상 그가 성큼 다가오면 숨어 버렸다. 피하기 바쁜 이림의 태도에 지쳐 떨어질 법도 하건만.

도한은 속을 알 수 없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이림이 도망치면 그 자리에 서서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이림은 도한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공부를 전혀 하지 못해 침대에 누워 멍하니 한숨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중간고사가 끝났다. 하지만 쉴 틈 없이 바로 조별 과제가 시작되면서 수면 시간도 줄여야 했다.

신입생이지만 조별 과제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밤을 새우다 보니 머리에 꽉 차 있던 도한의 생각이 흐려진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고민을 끝내기 위해 도한을 찾아 ‘나한테 왜 이래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꾹 참고 있었다.

사실 도한은 아무 생각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저렸으나 이림은 애써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림과 도한이 본격적으로 말을 트게 된 것은, 그가 자료 조사를 끝내고 도서관을 나올 때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해가 기울어 노을이 구름에 너울지던 어느 저녁에 자료 조사를 마무리하며 에너지를 전부 소모한 이림이 비틀비틀 도서관을 나왔다.

그때, 담배를 피우던 무리 중 한 명이 반갑게 손을 들었다.

“어, 이림아. 안녕!”

“아…… 안녕하세요.”

흐릿한 얼굴이 말을 걸었다. 언뜻 선배였던 것이 기억나 존댓말로 인사한 뒤 걸어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언뜻 보기에 열성 알파인 것 같은데, 열성이라도 함부로 오메가의 몸에 손을 대는 건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학과 선배다 보니 대놓고 싫은 티를 내지 못해 고개를 수그렸다. 이림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는지 그는 능글거리며 말했다.

“우리 이림이는 애인 있어?”

“…….”

“야야. 겁먹었잖아. 얘가 너 같은 면상이랑 사귀어 줄 것 같냐?”

와하하하-!

담배를 피우던 무리 중 한 명이 놀리자 곧이어 다른 알파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조용했던 공간을 메웠다. 이림은 어쩔 줄 몰라 식은땀만 흘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하면 사귀자고 할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찍힐 것 같았다. 제 어깨에 손을 얹은 남자는 친구들의 비웃음에 억지로 웃으며 이림을 바라봤다.

“진짜야? 응?”

“그…… 그게.”

“뭐야, 씨발. 진짜 그렇게 생각해?”

체면치레인 웃음을 지운 남자의 얼굴이 험상궂어졌다. 이림은 차마 사귀는 사람이 있다, 라는 거짓말도 치지 못할 만큼 순진하고 노련하지 못했다.

뒤늦게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남자는 위협적으로 몸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오메가 주제에 좀 곱상하게 생겼다고 존나 잘난 척이네. 안 되겠다. 너 과방으로 따라와. 넌 진짜 오늘 좆된 거야.”

“죄송해요……. 죄송…….”

남자는 거듭 사과하는 이림의 사과를 듣지도 않고 억지로 어깨를 끌어당겨 과방으로 끌었다. 따라가지 않기 위해 발끝에 강하게 힘을 줬지만 알파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결국 질질 끌려가고 있었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둘을 덮쳤다.

“뭐 해?”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이제껏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커다란 장신이 둘을 막고 있었다. 멍하니 올려만 보는 이림과 다르게 남자는 황급히 이림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선,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뭐 하냐고 물었는데.”

“그게…… 죄송합니다.”

“……너, 이름이 뭐라고?”

“네! 주재환이라고 합니다!”

“재환이…… 아! 이름 기억난다.”

도한이 즐겁게 웃자 눈치를 보던 주재환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도한의 말로 그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버렸다.

“좆 빠져라 신입생 후리고 다니는 복학생이 있다던데. 너구나.”

“…….”

“작작 좀 하고 다니자. 응?”

“…….”

“그리고 얘한테 사과해.”

“알겠습니다……. 미안하다.”

“다시 해.”

“미안하다……. 내가 죽을죄를 졌다…….”

“다시.”

“……죄송합니다, 후배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주재환은 허리를 숙이며 울면서 사과했다. 부담스러운 사과를 받은 이림은 안절부절못하며 도한은 넓은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말투지만 아무렇지 않게 명령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물론, 주재환은 정말로 자신이 정말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듯 진심 어린 반성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비굴함은 철저하게 자신보다 높은 알파에게 취하는 복종의 의미였다.

왠지 보지 말아야 할 알파들의 서열 싸움을 본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는데 도한은 이에 끝나지 않고 주재환의 어깨를 꽉 쥐었다.

커다란 손에 힘을 주자 주재환은 처절하게 비명 질렀다.

“아악!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음……. 알았어.”

도한은 고민하는 척하다, 언제 어깨를 잡았냐는 듯 손을 뗐다. 주재환의 옷은 그가 어깨를 움켜쥔 부분만 잔뜩 구겨져 있었다.

어찌나 아팠는지 주재환의 목은 고통으로 잔뜩 붉어져 있었고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방금까지 담배를 피우며 깔깔거리던 주재환의 친구들은 항의 한 번 않고 고개만 움츠리고 있었다.

이림이 현실감이 없어 멍하니 눈물을 쏟아 내는 주재환을 보는데, 도한이 시야를 가로막고 물었다.

“술 한잔할래?”

***

“이림아.”

“으음…….”

“꿈꿨어? 열이 너무 높아. 내일 히트 사이클 오겠는데?”

죽음과도 같던 꿈에서 강제로 깨어나니 도한이 잘생긴 얼굴에 한껏 걱정을 담고 있었다.

꿈속의 도한보다 더 성숙해져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스물아홉의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히트 사이클에 대한 욕망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었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볼을 몇 번 쓸던 도한은 서랍을 열어 안정제를 건넸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이림의 등을 받쳐 일으키고, 살짝 벌려진 입에 알약을 넣었다. 물컵까지 손수 대령한 뒤 안정제를 삼켰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그냥 억제제를 주면 될 것을.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히트 사이클을 조금 늦추기 위해 안정제만을 허락하는 그의 속내가 너무 훤히 보였다. 내일 자신이 퇴근하면 함께 몸을 맞추기 위해서겠지.

도한은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안정제 먹었으니 이제 좀 나을 거야. 내일 바로 올게.”

“그냥 억제제 줘…….”

“안 돼. 네가 밥도 안 먹고 시위했잖아. 여기서 억제제처럼 강한 약 먹으면 속 다 버려.”

“나 위하는 척하지 마……. 한 번도 억제제 준 적 없으면서.”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는 이림의 얼굴은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눈가가 붉게 충혈되고 숨을 헐떡이고 있어 도한에게는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

도한은 더 변명하지 않고 이림의 동그란 이마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명백한 거절이었다.

안정제가 들어가고 있는지 아까보다는 몸의 떨림이 잦아졌다. 그러나 내일 그가 퇴근할 때까지 이림은 이 미열과 흥분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다음 날, 전신을 파고드는 열감에 이림이 천천히 눈을 떴다.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몸이 욱신거리면서 온몸에 쥐가 난 듯 저렸다.

“하아…… 학.”

몸을 일으키는 데만 3분이 넘게 걸렸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몽롱해 한참을 침대 헤드에 기대고 숨을 골랐다.

오메가로 발현한 뒤 벌써 수년째 맞는 히트 사이클이지만 겪을 때마다 힘들었다.

이성이 흐려지고 본능이 앞서는 짐승으로 변하고 있는 육체를 느끼면서 몸을 떨었다. 느릿느릿 눈을 들고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오후 두 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나마 늦게 일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도한은 이림이 히트 사이클을 맞으면 오후 다섯 시에는 집에 도착했다.

히트 사이클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면 이림은 거의 반 정신을 놨기 때문에 사실 처음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급하게 도한의 옷자락을 쥐고 제발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세 시간 뒤 시작될 폭력적인 정사를 견디려면 어떻게든 한술이라도 떠야 했다. 이림은 간신히 일어서서 식탁까지 느릿느릿 간 뒤에 다 식은 반찬들을 내려다봤다.

비싼 식재료로 정성껏 만들었으니, 훈기가 식고 조금 말랐다 한들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음식물은 생 곤약을 씹는 것처럼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입천장과 잇몸도 열기로 인해 부어올랐고 혀도 감각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감기와 비슷한 어지러움에 흥분까지 더해지면서 이림은 참지 못하고 식탁에 얼굴을 박았다.

***

도한은 마지막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고 책상을 정리했다.

“오늘 일찍 퇴근합니다.”

그 말에 도한의 비서 차일원은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도한이 낙하산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뭇 전문 경영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 왔으니 오늘 하루 일찍 퇴근하는 건 아무 제약이 없었다.

애초에 근무시간을 훌쩍 넘겨서 퇴근할 때가 대부분이었고 주말과 휴가도 반납하고 일을 해 왔으니, 가끔은 이렇게라도 해 줘야 직원들이 눈치를 덜 볼 것이다.

시계를 보자 네 시가 조금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이림이 좋아하는 음식과 과일을 사서 출발하면 딱 다섯 시에 도착할 것이다.

주문해 둔 음식을 픽업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지만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이림에 대해서는 그의 부모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자신을 보는 이림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결국 본능을 이길 오메가는 없었다. 오메가들이 저주처럼 생각하는 것이 알파를 향한 욕구였지만 오늘 다시 한 번 믿어 보기로 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알면 경악하겠지. 이림의 순한 눈은 자신만 보면 독기가 서렸다.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이상하게 섬짓한 느낌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네, 아버지.”

-시연이가 찾는다. 와라.

“……지금 갈 상황이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도한아. 이제 얼마 안 남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단호하지만 지친 목소리가 공허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씨발…….”

왜 이렇게 풀리는 게 없지. 한 걸음 나갈 때마다 일이 꼬이는 느낌이다. 익숙지 않은 갑갑함에 짜증이 나 손에 쥐고 있던 음식들을 모두 집어 던졌다.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도한이라도 아버지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민 끝에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 비서, 부탁할 게 있습니다.”

***

“저기요. 저기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기절하듯이 잠든 이림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처음 보는 베타 남자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초인적인 힘으로 이불을 잡고 몸을 숨겼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상무님 비서, 차일원이라고 합니다. 상무님은 급한 일이 생겨 오시지 못합니다. 대신 억제제 드리려고 왔습니다.”

“네……? 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이 열기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림을 보던 차일원은 주사기를 꺼내 팔을 소독 후 억제제를 주입했다.

“흐으…….”

도대체 몇 시지…….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낮과 다르게 이제는 손을 들 힘조차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 시계를 바라보니 시계는 벌써 저녁 7시가 넘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딱히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도한이 보이지 않으니 왠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림은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 눈을 꽉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차일원은 뒷정리를 끝내고 나갈 준비를 했다. 이림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려 하자 차일원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네……. 뭐…….”

일원은 말끝을 뭉개며 시선을 치웠다.

순간, 이림의 미간이 좁아졌다. 처음에는 지극히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태도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약간 좁아지는 눈매라든지, 잘 가라는 말에 대답하는 말투에서 왠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례해…….’

안 그래도 히트 사이클로 인해 몸과 마음이 허약해져 있을 때 이런 혐오 가득한 눈빛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불쾌한 티를 드러내면서 똑같이 바라봐 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 시선을 보고 대놓고 콧방귀를 뀐 차일원은 이림에게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나갔다.

“짜증 나……. 짜증 나!”

평소에는 고요히 흐르는 물처럼 잔잔함을 유지했을지라도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의 감정적 변화는 억제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알파가 히트 사이클이 한창일 때 혼자 내버려 뒀다는 것과, 생판 모르는 남이 집에 들어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는 자신을 보며 은근히 깔보는 듯한 눈빛을 했다는 것 때문에 이림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불을 움켜쥐고 떨던 이림의 눈가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분노로 머리가 벌겋게 익는 느낌에 당장 전화기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도한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본 것은 손에 꼽았다. 그것조차 도한이 억지로 시켜서 몇 번 안부를 물어본 것일 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붙어 있는 마당에 왜 해야 하나 싶어서 일부러 하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제발 전화를 받아 줬으면 싶었다. 전화기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뚜르르-.

당장 그에게 전화해서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냐고, 차일원이라는 사람 누구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길어지는 수신음에 불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고 감정의 조절이 어려워진 이림은 어느새 도한이 제발 전화만 받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뚜르르-.

제발…… 제발 받아……. 바로 끊어도 좋으니까.

뚝-.

-여보세요.

“…….”

이 목소리…… 누구였더라.

아, 알겠다. 정희민이구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하세요.

“…….”

-강이림 씨. 일을 안 해 봐서 모르나 본데, 이럴 때는 ‘네 알겠습니다.’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럼.

전화가 끊겼다.

전화가 끊겼음에도 여전히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뜨겁고 불타오르던 감정은 모두 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빛을 흡수하는 검은 블랙홀처럼, 이림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참 우습지……. 그렇게 싫으면 그 자식한테 가서 얘기하면 될 것을…….”

이도한에게 말할 용기는 없으니 자신을 탓하는 것이리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지만 이림은 이제 억울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가슴이 갈가리 찢기다 못해 너덜거려서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콱 죽어 버려야지……. 그래……. 죽자.”

마른 입술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작 몸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로 몸에 힘을 줘 봤지만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점점 잠이 쏟아졌다.

***

그렇게 이림이 곤욕을 치르는 동안, 도한은 두 시간을 달려 한 대학 병원에 도착했다. VIP 층으로 들어가자 벌써 경호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중 한 명에게 재킷을 건네고 제일 앞에 있는 특실로 들어가니 힘없이 누운 여자와 그 여자의 손을 간절히 붙잡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인기척에 가까스로 얼굴을 돌린 여자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도한이…… 왔구나.”

핼쑥한 중년 여성은 병색이 완연한 와중에도 젊은 날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천천히 도한을 불렀다.

“스스로 염치도 없구나 싶다가도, 나 같은 인간도 사람이라고 살갑게 대해 준 우리 도한이 생각이 나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얼른 회복하셔야죠.”

“아니야. 살 만큼 살았지. 욕심껏 사니까 이 지경이 된 거야.”

서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한과 그의 형, 그리고 여동생 모두 아버지의 정실인 임정숙으로부터 태어났으니 둘째 부인인 서시연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말이 둘째 부인이지 사실 정부나 다름없었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티 내지 않고 오히려 죽은 듯 살았다.

서시연은 20대에 공항에서 근무 중 업무 차 공항을 오가던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후 이 저택에 들어오기를 자처했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만 있을 아버지가 아니었다. 결국 가족, 친구 등 모든 인연이 끊어졌고 직장 또한 자연스럽게 관둘 수밖에 없었다.

어린 도한이 아버지 몰래 그 별채에 놀러 가면 서시연은 항상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팔다리에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허약하고 무기력했다.

잠깐 과거 회상에 젖던 도한이 단호히 말했다.

“욕심대로 산 것은 아버지인데 왜 그러세요.”

“그래……. 고맙구나……. 우리 도한이는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사랑한다 얘기해 주고…… 예쁘다 쓰다듬어 주고…… 그 사람이 하고 싶다고 하는 건 다 들어줬으면 좋겠어. 알겠지?”

“……예.”

왠지 그 말이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몇 년째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작금의 상황을 알 리 없음에도, 죽음을 앞둔 초연한 눈빛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짧지만 길었던 면회 시간이 끝나고 도한이 밖으로 나오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눈꼬리가 올라가서 가만히 있어도 새침해 보이는 얼굴이 도한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까 경호원에게 넘겨 둔 재킷을 언제 발견했는지 희민이 도한의 재킷을 가지고 있었다.

“여긴 웬일이야?”

“당신 쫓아온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아버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제가 먼저 온 거예요.”

“할 말?”

“네. 그런데 뭐. 다 틀렸네요.”

희민은 근 몇 달간 도한의 아버지 이동욱을 설득하려 병실을 들렀다. 그에게 잘 보이려 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도한의 아이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워낙 철두철미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싫어하는 듯한 도한이니, 그의 아버지에게라도 부탁해 보려 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던 참에 손에 든 재킷 안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려 이림의 전화를 받고 잔뜩 쏘아 준 참이었다.

그러나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서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도한은 금세 시선을 거두고 재킷을 입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확인한 순간 도한의 동공이 확장됐다.

“너…… 내 전화 받았어?”

“…….”

솔직히 충동적으로 받기는 했지만, 잠금이 걸려 있으니 당연히 통화 기록 삭제는 힘들었다. 언젠가는 걸릴 줄 알았지만 지금 당장일 줄은 몰랐다. 희민은 속이 타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입을 열지 않는 희민 때문에 속이 터진 도한은 직접 통화 녹음 내용을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도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얼굴의 변화를 보면서 희민 또한 아닌 척했으나 내심 겁이 나기 시작했다. 평생 오냐오냐 자라 성격이 불같고 제멋대로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리 분별을 못 하지는 않았다. 야차처럼 험악해진 그의 얼굴을 보며, 희민은 처음으로 이림에게 멋대로 군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정희민.”

“…….”

“이혼 절차 밟자.”

“……뭐라구요?”

도한은 녹음된 음성 속에서 희민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었다. 그에 비해 이림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왜 억울할 텐데 듣고만 있어, 왜.

휴대폰을 끄고 바라본 희민의 표정은 황당하다는 듯이 구겨져 있었다. 마치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이다.

“그딴 오메가 때문에 이혼을 하자구요? 정신 좀 차려요. 이건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 잘 알지. 그래서 계속 선을 넘어도 여태 참아 줬잖아.”

“…….”

“내가 약혼했을 때 너를 속였었나? 글쎄…….”

한쪽 눈을 올리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하는 도한이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희민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요. 당신을 실제로 보고 욕심이 생겼어요. 내가 그 새끼보다 뭐가 부족한데요? 그딴 사회성도 없고, 내가 하는 말에 아무 말도 못 하는 머저리-”

“그만.”

“…….”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어떻게 할지 몰라. 내가 얼마나 참아 주고 있는지 모르겠어? 씨발……. 말이 통하는 상대여야 신사적이게 하지, 원…….”

“뭐…… 뭐라구요?”

시장 잡배 같은 욕설을 내뱉는 도한을 보며 깜짝 놀란 희민을 버려두고, 도한은 복도의 의자에 털썩 앉아 담배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피곤한 듯 이마를 매만지는 도한이 나른하게 말했다.

“걔를 그렇게 만든 건 나야. 그리고 네가 그런 말 지껄일 만큼 고생한 건 아닐 텐데.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 거야? 아…… 하긴 그래서 호스트바도 갔나 보지?”

“……!”

“네가 항상 지명하는 그 자식, 묘하게 날 닮아서 기분이 더러워.”

그걸 어떻게 안 거지?

희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잿빛으로 변했다. 심지어 어떤 호스트를 지명했는지까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자주 간 것도 아니었고 비밀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폐쇄형 호스트바에 몇 번 간 것뿐이었다.

그것도 시간을 쪼개서 업무 중에 다녀온 건데……. 어떻게 안 걸까. 실제로 희민이 지명하는 호스트는 희미하게 도한을 닮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그를 가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 왔다.

치부를 들킨 희민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한은 시선도 주지 않고 할 말을 계속했다.

“나도 딴 살림 차린 마당에 네가 거기 간다고 해서 뭐라 할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이렇게 나오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제발요……. 제발, 저희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저 죽어요!”

희민은 재빨리 다가가 도한에게 매달렸다. 아무리 오냐오냐 자랐다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결혼할 때 가족들끼리 얼마나 이성그룹 사람들을 욕했던가.

더러운 놈들이라고, 뻔뻔한 철면피라고, 짐승같은 놈들이라고……. 심지어 아버지는 내 자식이었으면 골프채로 죽사발을 냈을 것이라고 껄껄 웃기도 했다.

이림의 존재로 인해 희민의 집이 챙겨 받은 암묵적인 보상금과 주식은 그 가치를 헤아리기 버거울 정도였다.

결혼식을 할 때 작성한 혼인 계약서에서는 분명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명시되어 있었다. 이 사실이 모두 밝혀지면 그 보상금을 모조리 뱉어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집안의 경멸 어린 눈초리까지 받게 될 것이다.

어느새 무릎까지 꿇고 싹싹 빌며 태세 전환을 했지만 도한은 오히려 희민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의자에 앉혀 줬다.

무릎까지 털어 줬으나 귓가에 박힌 말은 가시처럼 날카로웠다.

“잘 생각해 봐. 우리 이혼.”

곧이어 복도에는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는 희민만이 남아, 텅 빈 공간 속에 존재했다.

***

이림은 다시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정답을 찾기 위해 꿈속으로 도망쳤다.

“선배님…… 선배님 유명한 사람 아니에요?”

“응?”

도한이 고기를 굽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에 면역이 없는 이림은 벌써 반쯤 취한 상태였다. 성인이 되었지만 딱히 술을 즐겨하지 않았고 애초에 주량도 약해서 소맥 두 잔에 해롱해롱거리며 평소라면 꺼내지도 않았을 말을 중얼거렸다.

도한은 술주정이라고 생각하며, 윤기가 흐르는 한우 한 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

“아아…….”

젓가락을 놓고 술주정을 피우다가 다시 냠냠 먹는 이림을 보며, 도한은 제일 비싼 곳을 고르라고 했더니 우물쭈물하다가 ‘한우……?’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아까 재환 선배 무리에서 저 꺼내 주신 건 감사해요……. 하지만 선배 같은 유명인이 그렇게…… 그렇게 남의 어깨를 콱 잡으면 어떻게 해요?! 기사 같은 게 나면 어떡하죠?”

“큽…… 괜찮아. 그 새끼들이 먼저 시작했는걸. 여차하면 후배 괴롭힘을 막아 줬다고 기사 정정해서 보도하면 되고.”

“아…… 그렇군요. 여튼 조심하셔야 해요…….”

“말 놔.”

예? 눈을 크게 뜨던 이림은 작은 머리로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놀란 얼굴을 무너뜨리고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선배.”

“선배 말고. 형.”

“싫어. 선배.”

은근 고집 세다니까. 도한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선배 해.”

이림은 가지런한 치아가 한껏 드러날 정도로 크게 미소 짓는 도한을 멍하니 바라봤다. 위협적인 몸과 대비되는 청량한 미소였다.

눈이 반달로 접히고 쭉 뻗은 높은 콧대도 살짝 찡그려졌다. 언제나 그림 같은 미소를 짓던 도한이었지만 오늘같이 진실된 미소는 처음 봤다.

아마 지금 이 웃음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도 그 그림 같은 미소가 진짜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에게만 보여 주는 미소. 그 깨달음이 마음을 충만하게 물들였다.

결국 이림도 사랑이 주는 착각에 눈이 멀기 시작했다.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도 사랑이라는 늪에 몸을 던져 버렸다.

그렇게 가슴 벅찬 나날이 시작되었다. 수업을 듣고 나면 그 이후의 시간은 모조리 도한과 보냈다. 붙어 있으면서도 더 안기고 싶어서 꽉 끌어안아 온종일 페로몬을 삼키기도 했다.

도한은 이림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혔다. 거기에 애정까지 듬뿍 받으니 이림은 학교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고 활기찼다.

미모에 물이 오르니 주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학생회장도 아닌데 외부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학교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다.

도한에게 받은 것을 다 갚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앞가림만은 스스로 해내고 싶다는 마음에, 이림은 이런 제의도 다 수락하며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뉴스만 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도한이 다른 오메가와 약혼한다는 보지 않았더라면.

뉴스에 나오는 훤칠한 얼굴은 이도한과 똑같이 생겼다. 참 이상했다. 어제까지 밤늦게 한 침대에서 뒹굴고 부끄러운 말들을 잔뜩 속삭이던 사람과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에 이림은 도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아니라고 해 줬으면, 바보 같은 나를 탓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티브이에서는 연일 도한과 이성그룹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었고 기사는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뭘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건지, 일주일이 넘게 연락이 없었다. 속이 까맣게 타다 못해 지쳤지만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미련하다고 욕할까 봐, 그리고 자신의 상대가 도한인 것을 들킬까 봐 이림은 끙끙 앓았다.

땀을 비 오듯 흘려 대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한테 놀아났다는 것을, 모든 게 다 심심풀이였다는 것을 이림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학교에 나가는 것도 관두고 점점 정신을 놓아 갈 때쯤 도한이 찾아왔다.

처음에 그를 만나면 불같이 화를 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버려진 것처럼 느껴졌고 불안했다. 한참 애가 끓는 차에 나타난 도한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저, 저 뉴스에서 선배랑 똑같이 생긴 사람 봤어요. 그 뉴스 봤죠? 뭔가 이상해……. 이상해요.”

도한은 매달리는 이림의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네가 본 게 맞아. 하지만 우리 사이가 달라지는 일은 없어. 이건 결혼이 아니라 계약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래서 결혼한다는 거예요?!”

“난 네가 우리 집에서 살았으면 해.”

“잠깐……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결혼을 하는 건 맞는데, 계약은 또 뭐고……. 날 데려간다는 건 무슨 말일까?

이림은 혼란스러워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그와 자신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격차가 느껴진다. 이림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전 싫어요!”

“나도 네가 실망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너의 가족들까지 평생을 책임질게.”

“누구 마음대로 그런 걸 정해요? 싫어요. 전 싫다구요! 선배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예요.”

“이림아…….”

언젠가 고등학교 때, 친구가 이림의 앞으로 핸드폰을 들이민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어느 대기업 자제의 성생활에 대한 추측성 글이 가득했다.

오메가를 성 노리개 취급하는 것으로 유명한 재벌가였으므로 다들 그와 결혼한 오메가를 불쌍히 여기는 분위기였다.

[A기업 총수들의 어두운 그림자]

어느 기업인지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 이림은 알 수 없었지만 이성그룹만큼 커다란 대기업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총수들의 이런 만행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오히려 화들짝 놀라는 이림이 순진하다고 놀리기도 했다.

‘돈이 궁하니 오히려 직접 찾아가서 다리 벌리는 오메가도 있는걸.’

‘말도 안 돼.’

‘왜 안 돼?’

그들은 단호히 부정하는 이림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평생을 정직하고 청렴하게 살아온 이림으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 되는 세계였다. 그래서 금세 의식적으로 지워 버렸다.

왜 지금 그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내가 그 당사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 걸까? 친구들은 매춘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 하면서도, 구태여 혐오를 숨기지는 않았다.

난 사랑을 했던 건데, 결국 같은 꼬리표를 달게 생겼다. 그것이 참을 수 없었다.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하물며 혐오까지 받을 자리는 탐나지 않았다. 이림은 낮게 중얼거렸다.

“선배에게 정말 실망했어요. 어떻게 생각이 그런 쪽으로밖에 안 흘러가는 거예요? 그냥 헤어지자고 하지 그랬어요.”

“잘 이해가 안 가네. 네가 손해 볼 건 없잖아. 설마 나 말고 다른 새끼 생겼어?”

“선배! ……흐윽…… 그냥 헤어져요. 이만 가 볼게요.”

급격히 험악해진 도한의 태도에 황당함과 실망을 느낀 이림은 결국 헤어짐을 고했다. 잘못한 건 저 새끼인데 왜 자신이 울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이림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도한은 문을 열어 주면서 이림을 붙잡고 속삭였다.

“내 번호로 연락해.”

이림은 처음으로 그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며 그를 노려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한은 한참이나 그곳에 서서 배웅하듯 이림을 바라봤다.

“결국 네가 돌아올 곳은 내 옆이야.”

집에 돌아온 이림은 이불을 몸에 둘둘 싸고 웅크려 덜덜 떨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코웃음을 치며 애써 부정했다.

집이 가난하다지만 당장 한 끼도 편히 못 먹을 만큼 부족한 건 아니었다. 장학금도 받고 있고, 부모님은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고, 자신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까.

그에게 가서 빌어먹을 만큼 힘든 건 아니었다. 그 걱정이 사그라들자 도한의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추악한 본성을 알고 나서는 그에게 실망하고 그가 미웠지만 그럼에도 싫어지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런 버거운 감정을 나눌 수만 있다면 아예 가슴이 텅 비어 버리도록 떠안기고 훌훌 털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히 이림 자신만의 일이었고 이도한의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이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불에 얼굴을 숨기고 소리죽여 우는 것밖엔 없었다. 그렇게 울다 지쳐 잠에 들고 지옥 같은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그는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도한이 없어도 삶은 여전히 어둡고 씁쓸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터덜터덜 아르바이트를 가고 있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네, 아버지. 잘 지내세요?”

-그럼. 우리 이림이 안 본 지도 오래됐네.

“죄송해요. 이번 방학에는 꼭 갈게요.”

그와의 연애에 푹 빠져 있느라 주변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혀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자책할 때, 아버지가 힘없이 말했다.

-괜찮다. 별일은 아니고…… 이제 장사 접으려 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주인이 월세를 올려 받겠다네. 이 인근 재건축한 아파트가 거의 완공됐다고……. 주변 상가들까지 다 월세를 올렸나 봐.

“그럼 어떡해요? 월세도 간신히 내고 있었는데……!”

-이림아, 우리 걱정은 하지 말아라. 서울 떠난다는 것만 알아 두고. 자리 잡으면 알려 줄게.

그렇게 전화가 뚝 끊겼다. 동생에게 전화해 보니 상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뒤 폐업 정리에 들어간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을 드신다고 했다. 수험생인 동생은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수능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이런 상황을 맞자 매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몇 개월째 다니던 학원까지 모조리 끊었다는 말을 듣고 이림은 참을 수가 없었다. 3년 내내 전교권 안에 드는 동생의 노력이 무너지는 것은 형으로서 참을 수 없었다. 세상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일주일이 넘게 고민하고 의심하고 절망했다. 급하게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돈을 모았지만, 수시 원서 접수비나 학원비만 해도 한 학기 등록금 가까이 나왔다.

결국 고민 끝에 휴대폰을 들고 그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차마 재빨리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 평생 자존심 지키며 산 적은 없었으나 지금은 수치심과 굴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설마 이 모든 걸 그가 저질렀을까. 아니, 아무리 그가 힘이 있더라도 2년 전부터 시작된 재건축과 관련 짓기는 어려웠다.

이림은 손의 식은땀을 닦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세상의 모든 사물이 한 방향을 가리키는 듯했다. 나의 영역이 뒤틀리고 종내에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발붙일 곳이 사라진 이림은 결국 그의 영역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했다.

신호음이 세 번째 울렸을 때, 그가 곧바로 받았지만 이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꽤 일찍 전화했네.

“…….”

-지금 갈게. 기다려.

그 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일이 해결됐다는 안도감에 잠이 들었었지. 자신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뜨끈한 손에 얼굴을 부볐던 것 같다.

당연하게도 눈을 뜨니 도한이 있었고, 그는 화가 난 듯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날 떠나서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응? 대답해 봐.”

이림은 패배자처럼 아무 말도 없이 그를 껴안은 후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이고 들어가는 이림의 태도에 그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잠잠해졌다.

그 후에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이, 불과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이림이 그에게 묶여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멍청한 사랑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돈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알파에게 보호받는 것이 좋았고 그의 사랑에 파묻혀 고요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다.

답답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5년을 버텨 왔다.

가족들 얼굴이 희미했고 친구들은 아예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친구들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놀이기구를 타고, 집에서는 그와 텔레비전을 보며 서로의 다리에 누워 웃었다. 수업 시간에 걱정 없이 잠깐 졸기도 하고 벌벌 떨며 발표를 해 보기도 했다.

바늘의 첨단처럼 예리하고 자극적인 감각 속에 살던 이림은 이 고요하고 무딘 생활에 몸부림치면서도 숨죽인 채 지냈다. 그가 있었으니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빛을 흡수하듯 더욱 환하게 빛나는 그가 내 곁에 있었으니까,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넓은 품에 숨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그것이 나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히트 사이클에 오메가를 내버려 두는 것은 오메가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다. 이림은 악몽에서 깨어나려 몸을 비틀면서 그와 자신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고찰해 봤다.

차 비서의 혐오스럽다는 눈빛, 정희민의 따가운 말과 표정. 자신을 봤을 때 기겁하던 고용인들. 이림을 숨 막히게 감시하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는 없는 이도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이제는 도한에게조차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림에게, 오메가에게 히트 사이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면서도 옆에 없는 도한을 얼마나 더 받아 줘야 하는 걸까?

만약 그가 일찍 억제제를 줬다면, 헐떡이는 꼴을 비서에게 보이지 않고 바로 억제제를 먹었다면 덜 화가 났을 수도 있겠다. 아니다. 정희민이 도한의 전화를 대신 받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겠다.

아니, 차라리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악몽에서 깨어나며 눈을 떴다. 눈가는 눈물이 흥건했고 입술과 볼은 여전히 붉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림의 눈빛만은 마치 무엇을 결심한 듯 총명하고 밝았다.

이림은 굳게 마음먹었다.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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