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파란 (1/14)

목차

1. 파란

2. 결심

3. 떠날 준비

4. 그의 손바닥 안에서

5. 동상각몽

1. 파란

내가 이도한을 만난 것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됐을 때였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즐거울 나이. 그때 선배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

달칵-.

가정부 아주머니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림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점점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해가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면서 온 세상이 빨갛게 물들었다. 집 밖의 소담한 연못, 그 앞에 핀 하얀 코스모스, 마당에 놓인 벤치도 모두 시뻘겋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중문을 열었다.

다닐 수 있는 곳은 중문까지. 그 너머는 허락되지 않았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어진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하며 중문 앞에 놓인 식재료 키트를 손에 잔뜩 들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도한은 이림이 직접 해 준 요리를 좋아했다. 다만 아무리 자취생으로 오래 살면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고 해도 까다로운 도한의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맛있게 먹었다.

그런 모습이 좋다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이해해 보려는 시도는 예전에 포기한 지 오래다. 도저히 자신의 상식으로는 선배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키트 안에 든 양파와 손질된 감자, 버섯 등을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이니 간단하게 찌개가 완성됐다.

구수하고 조금 매운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팔팔 끓는 냄비를 앞에 두고 행주를 들어 조심조심 옮겼다.

달칵-.

“이림아, 나 왔어.”

가만히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이림을 보던 선배는 반응 없는 이림이 익숙하다는 듯 볼에 입을 맞추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이림은 밥을 펐다.

수트를 벗는 그의 얼굴은 조금 피로해 보였다. 넥타이핀이 작게 흐트러진 모습이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몇 가닥 내려온 이마를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쓸어 올리는 모습을 흘깃 바라봤다.

그도 잠시, 도한이 알아챌세라 황급히 눈을 내리깐 이림은 가볍게 씻고 나온 그의 앞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이밀었다.

언제나 반복되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 숟갈 떠먹은 도한이 환하게 웃으며 칭찬했다.

“맛있다. 역시 너는 뭐든 잘하는 것 같아.”

“응…….”

사실 자신은 물에다 재료를 전부 넣고 끓이기만 한 게 다였다. 심지어 된장도 준비되어 있었으니 자신은 한 게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도한은 낯짝 두껍게 웃으며 칭찬을 퍼부었다.

예전에는 이 말투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오해할 때도 있었지.

이림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입에 쑤셔 넣었다.

선배가 씻을 동안 잠깐 티브이를 켰다. 가끔은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숨 막힐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그런 타이밍이다.

제대로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털며 나온 도한은 티브이를 바라보는 이림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묵묵히 예능만 보고 있자 애교를 피우듯 큰 덩치를 구부려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오늘은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똑같지.”

처음에는 이 질문 또한 시비 거는 말처럼 들렸다.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을 쳇바퀴처럼 사는 것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몇 번 겪어 보니 진심으로 그가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이림은 똑같이 대답한다. 그러나 도한은 항상 진심으로 물어보고 귀 기울여 준다. 한때는 그 행동에 얼굴이 빨개질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황당할 뿐이다.

“그럼 나 머리 쓰다듬어 줘.”

그러고선 한참 어깨에 얼굴을 비비더니 벌렁 누워 버렸다. 커다란 몸에 비해 작은 얼굴이다. 옆으로 눕자 그의 높은 콧대가 더욱 두드러졌다.

쓰다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기에 서서히 손을 올려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넘기니 그의 눈이 조금씩 감겼다. 소리도 없이 조용히 잠든 모습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평온했다.

“참나…….”

도한은 여전히 망가져 버린 관계를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기막힌 점은 그의 힘과 능력으로 어찌저찌 이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내가 선배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그의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소리였다.

만약 도한이 들었다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라 하겠지. 그리고 이림이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이다. 선배, 이도한과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지독한 애증이었다.

***

다음 날, 느지막이 눈을 뜨자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분명 함께 소파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뜬 곳은 침대였다. 덮인 이불을 치우고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 쪽지를 바라봤다.

<다녀올게. 사랑해.>

그 쪽지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집어 손장난을 쳤다. 손가락 사이에 끼우기도 하고 다시 엄지와 검지로 집어 빼내기도 했다. 그리고 콱 구긴 후에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냥 휴대폰을 주지…….”

몇 번 부탁했지만 자꾸 말을 돌려서 이미 포기했다. 이도한은 눈치가 상당히 빨랐기에 어느 때는 입으로 꺼내기도 전에 먼저 이림이 하려는 말을 알 때도 있었다.

그런 그가 자꾸 말을 무시한다는 것은 듣기 싫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림은 괜히 짜증이 나 식탁에 차려진 점심은 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왔다.

잘 가꿔진 잔디밭 한쪽에는 차양이 설치된 벤치가 하나 있었다.

집 안쪽으로도 핀 코스모스가 주변에 살랑거리니 잡지에서 나오는 풍경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 지저귀는 소리와 잎사귀가 서로 비벼지는 소리가 귓가에 흘러 들어왔다. 그 외에도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희미하게 리모컨으로 자동차 문을 여는 소음이 들리기도 했다.

이림이 살고 있는 이 집은 본채 안의 별채로,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입구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나오는 거대한 저택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올 때 잠깐 봤지만 이 저택의 끝이 어디인지, 누가 얼마나 살고 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는 이림이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꽁꽁 숨기더라도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지금처럼 차를 움직이는 소리라든가, 철없는 애들이 이 안쪽까지 들어와 작게 발소리를 낼 때가 그런 것이다.

벌써 몇 년째, 보는 사람이라고는 선배와 고용인 몇 명뿐이지만.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문을 열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나가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보고 경악하던 얼굴들. 놀란 자신을 둘러싸고 조곤조곤 타이르던 남자의 수행원들. 마치 왜 나왔냐는 의미였겠지.

벌써 이곳에서 산 지 5년째였다.

대학은 다 마치지도 못한 채 팔려 오듯 이 집 안에 들어앉았다.

이림이 지내는 곳은 거대한 저택 기준으로는 작은 수준이었지만,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가 딸려 있어 둘이 지내기에는 넉넉했다.

자신이 들어오기 전에 허물고 새로 지었다고 하니 모든 것이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했지만 어쩐지 정이 들지는 않았다.

화가 나서 아무리 어질러도, 때려 부숴도 다음날이면 멀쩡히 같은 제품이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숨 같은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갔다.

배가 고파 다 식은 밥을 몇 번 퍼먹다가 도한의 서재로 들어갔다. 잘 정돈된 서재 한편은 모두 책으로 빽빽했다. 책상 한쪽에는 서류가 종류별로 정리되어 고이 놓여 있었다. 이림은 그것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책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아무리 같이 살 맞댄 지 수년이 지났다 할지라도 척 봐도 중요해 보이는 문서를 아무렇지 않게 꽂아 둔 것은 이림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잠시 그곳에 시선을 주던 이림은 곧이어 꽂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쓸다가 경영책 한 권을 꺼냈다.

대학생 때 복수전공으로 배웠던 경영학 수업이 새록새록 생각나기도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읽었을까. 정신없이 읽던 책에서 눈을 떼자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울컥 짜증이 나서 책을 움켜잡았다.

찌이익-.

몇 장을 동시에 찢기도 하고,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이십 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섯 권이 넘는 책이 너덜거렸다.

책상에 놓인 서류들도 난장판이 되어 찢은 종이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헉…… 헉.”

탁-.

“이림아.”

“…….”

분명 아까까지는 낮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퇴근할 때가 되었나 보다. 집에 들어온 후 급하게 이림을 찾고 있었는지 항상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조금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우리 둘은 말없이 호흡을 고르며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음울한 감정들이 응축된 시선만을 주고받기를 한참.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이도한이었다. 이림을 번쩍 들어 책상에 앉히고 어깨를 쥐어 왔다.

침묵을 지키며 제 어깨를 쓸다가 목 뒤도 한 번 쥐었다. 움찔, 어깨를 움츠리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자.”

이한은 자신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을 번쩍 들어 침실로 갔다. 이림이 커다란 침대에 눕혀져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자 넥타이와 핀을 풀던 그가 픽 웃었다.

“피곤하지? 자.”

함께 저녁을 먹고 싶어서 매일 오전 일곱 시에 출근해서 휴일도 없이 열 시간 넘게 일하는 선배가, 하루 종일 집에 처박힌 자신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눈을 꼭 감고 잠으로 빠져들었다.

***

‘또 자? 아무 데서나 잠들고.’

대학교 다닐 때는 매일 알바를 가다 보니 막상 학교에 가면 쪽잠을 잘 때가 많았다.

교수님이 들어오기 10분 전에 누워서 잔다든가, 한적한 벤치에서 팔짱을 끼고 잔다든가. 과방에서 책을 얼굴에 덮은 채 잘 때도 많았다.

도대체 잠든 이림을 어떻게 찾는 건지, 열 번이면 여덟 번은 일어나기도 전에 찾아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낮지만 상냥한 목소리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나른한 꿈을 헤매면서도 들리는 꿈결 같은 말은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림의 삶에 안정을 주는 듯했다. 밥을 사 준다고 차를 타고 나갈 때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조수석에서 픽 쓰러져 자도 마냥 귀엽다, 괜찮다고 말하며 웃던 선배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선배가 없었다면 그 힘들고 빈곤했던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까.

“……래서, 많이 안 좋은 상태입니다. 지금 당장 입원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입니다.”

“집에서는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흠……. 지금 우울증 고위험군이라 하루빨리 치료에 들어가야 하는 상태지만……. 그렇다면 일단 환자가 마음을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필요합니다.”

“그럼…… 지금 나는 거기에 해당이 안 된다는 말입니까?”

“환자분의 상태를 보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약은 처방해 드릴 테니 꼭 제시간에 먹이시고…….”

또 의사가 다녀갔나 보다. 하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도한이 과연 저 말을 들을지 의문이다. 샛길을 이용하든 멀리 돌아서 가든,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은 반드시 이뤄 내는 사람이니까. 결국 저 의사에게 제가 듣고 싶은 말을 꺼내도록 만들겠지.

옛날에는 집요함이 설렐 때도 있었다.

아무리 밀어내도 다가오고, 힘들 때 도와줬던 사람.

우성 알파가 자신을 쫓아다니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그 집요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애정이 두렵고 싫었다.

하지만 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하는 자신도…… 다를 건 없다.

다음날, 오후 늦게 일어나 보니 그가 또 편지를 남겼다.

사람들이 없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려고 하니 준비하라는 편지였다.

보여 줄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는데, 왜 그런 비싼 옷을 몇 시간 동안 고르고 사야 하는 걸까. 이 모든 게 구색 맞추기로 느껴질 뿐이었다.

또 편지를 구겨 버리곤 밖으로 나갔다.

마당으로 가다 슬쩍 서재로 가서 문을 열어 봤다. 어제 그 난동이 환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멀끔하고 깨끗했다.

아니, 오히려 더 비싼 가구와 책들이 들어와 있었다. 이림에겐 그 모든 게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거겠지.

신경질적으로 마당으로 나가 맨발로 잔디 위를 걸었다.

누운 풀들이 맨발바닥을 갉작이며 여기저기 쓸렸다. 이림은 창고 한편에 놓인 목장갑, 삽, 화분, 흙을 꺼냈다.

목장갑을 끼고 작은 돌 몇 개를 화분 바닥에 내려놓고 삽으로 흙을 퍽퍽 채워 냈다. 절반 이상 채우고 손가락을 움직여서 아주 작게 홈을 만든 후에, 씨앗을 넣었다.

살살 쓰다듬듯이 흙을 덮고 물을 뿌렸다.

오랜만에 집중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물을 주면서 흥얼거렸다.

어느 때는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숨이 막힐 때가 있지만 또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취미를 즐기며 별것 아닌 일에 즐거워하기도 했다.

어제 떨었던 지랄이 무안할 정도로 별채의 시간은 평화롭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오늘도 알차게 허송세월을 보낸 이림은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옷장을 열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그가 좋아하는 옷을 입어야겠다.

그는 노출이 없으면서도 두껍지 않은 옷을 입으면 좋아했다. 가을 날씨에 맞춰 하늘하늘한 셔츠를 입고 자연스럽게 팔을 걷었다. 목이 살짝 노출되면서도 입기는 부담 없었다. 시곗줄이 가는 시계를 차고 검은 슬랙스를 입었다.

“이림아. 다 했어? 세상에…… 너무 예뻐.”

이림은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자신과 비슷하게 입은 사람이 거리에 수십 명은 넘을 것이다.

대놓고 비웃음을 지어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부드럽게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

“가자.”

아닌 척하지만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오랜만에 중문과 현관을 넘어 별채 밖으로 나간다.

별채에는 작은 마당이 딸려 있지만 사실상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중문을 통해서 그의 방을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외출을 할 때는 정문을 통해서 나가지 않고 옆문을 통해서 나갔다. 그래 봤자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넓고 커다란 문이었지만.

왠지 정부로 사는 제 처지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 같아서 이림은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어두워진 이림의 표정을 보자 차에 올라탄 그는 볼을 잡고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나오니까 힘들어?”

“아니…….”

“그래. 오랜만에 밥도 먹고 쇼핑도 가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미련이 남는다는 듯, 얼굴을 잡던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제 손을 잡아 왔다. 커다란 손이 깍지를 끼고 엄지로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그 작고 의미 없는 손장난은 음식점에 다다를 때까지도 계속됐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사람 없는 백화점은 왠지 음산했다. 눈부실 정도로 사방이 빛으로 번쩍였지만 정작 자신이 찾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도한과 강이림, 수행원 한 명이 전부였다.

텅 빈 홀에는 몇 개의 발걸음 소리만 작게 울렸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자신과 다르게 손목을 잡아끄는 그는 즐거워 보였다.

“이림아, 이건 어때? 이건?”

“모르겠어.”

“괜찮아, 다 예뻐.”

습관적으로 칭찬한 도한은 이림의 몸에 한 번이라도 닿은 옷은 전부 구매했다. 이림은 들기도 버거울 정도로 쌓이는 쇼핑백을 보다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숨으면 아무리 이도한이라도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아닌가? 페로몬 때문에 10분 안에 찾을지도 모르겠다. 터벅터벅 걷자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어디 가?”

“그냥…… 여기저기 보고 있어.”

그것 하나도 기다리지 못하는지. 숨이 막히는 듯해서 깊게 숨을 마시고 내쉬었다. 그때 지나치던 매장에서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스쳤다.

“아…….”

화려한 매장 사이에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정통 주얼리샵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매장 옆 통유리 창에는 결혼식을 예상케 하는 콘셉트로 한 면이 전부 꾸며져 있었다.

마네킹이 입은 옷의 하의는 통이 넓은 바지였지만 상의는 몸의 라인을 언뜻 드러내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하얀 자수가 꼼꼼히 들어가 멀리서는 단아해 보이고 가까이서는 화려해 보였다.

그래, 마치…… 결혼식에서 남성 오메가가 입을 것 같은 옷.

그 마네킹의 맞은편에는 턱시도를 입은 커다란 마네킹이 있었다. 마치 청혼을 하는 듯 몸을 구부린 상태였다.

숨 막히도록 풍성한 장미와 모조진주로 화려하게 장식된 장식장에서, 마네킹 사이에 고정된 보석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이도한과의 결혼을 상상하며 얼마나 가슴을 끓이며 보냈었던가.

농밀한 스킨십이 오가던 때에도 풋풋한 설렘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정한 손짓 한 번에 온몸이 긴장되기도 했고, 그가 자신을 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미쳐 버릴 것 같을지라도, 그때는 그랬다.

이도한이 손에 결혼반지를 끼워 주는 그 순간을 염원했었다.

“왜. 갖고 싶어?”

이림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 후 처음 나온 긍정적인 반응에 이도한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흥분으로 물들었다.

얼른 장식장 뒤로 가서 목걸이와 반지를 모두 빼낸 그는 이림의 가까이 다가섰다.

“손 줘 봐.”

장난스럽게 웃은 이도한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는지. 괜히 밑단을 구겨져라 세게 잡으며 시선을 피했다.

긴장 속에서 마주친 눈은 곱게 휘어 있었다. 전등이 반사된 눈동자는 별이 박힌 듯 반짝거렸다.

“너무 예쁘다. 신부 같아.”

“그만해…….”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의 어리광에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이림을 품에 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내려가고 싶은데, 그가 놓아 줄 생각을 안 했다.

“내려 줘.”

“싫은데?”

매몰찬 거절과는 달리 허리가 아프지 않도록 자세를 고쳐 안으며 둥개둥개 얼렀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긴장과 설렘, 부끄러움으로 범벅된 몸이 풀리면서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푸흐…….”

이림은 웃음을 들키기 싫어 목에 얼굴을 묻었지만 움찔움찔 떨리는 입꼬리가 그의 목을 자극해 결국 눈치챘다. 그는 이내 이림을 번쩍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를수록 놀이기구처럼 빠르게 돌았다. 결국 함박웃음이 터져 그의 어깨를 잡고 웃음을 쏟아 냈다.

텅 빈 백화점에 둘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울다가 웃다가. 매일 감정이 빠르게 달라진다. 자신의 감정이건만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어 힘들다. 비가 잔뜩 온 뒤 가뭄이 시작되는 땅에서는 풀 한 포기조차 제대로 자랄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인가 보다. 웃다가 지쳐 바르작대는 자신을 깊숙이 껴안는 품에서 눈을 감았다.

시원한 페로몬 향이 점점 온몸을 덮쳐 왔다.

***

어제는 참 이상한 날이었다. 평소와 같이 밥을 먹고 옷을 사는 익숙한 루틴이었는데, 왜 그렇게 즐거웠던 걸까.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가슴에 단비가 내리듯 조금씩 따뜻한 감정이 움텄다.

아마 오래전, 선배와 꿈꿨던 결혼 때문이겠지.

다시금 씁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힘차게 이불 밖을 나섰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도한처럼 숨 가쁘게 살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살고 싶었다.

“오늘은 정원에 물도 주고 음식도 만들어 볼까……. 음…… 폭립 먹고 싶다.”

빠르게 전화기 앞으로 다가가서 7번을 누르자 내선 번호로 연결되며 도우미에게 전화가 걸렸다.

“아, 오늘 폭립을 만들어 먹으려고 하는데요. 네. 그거랑……. 음, 또…… 책도 준비해 주세요. 네? 아뇨. 제가 만들어 보려구요.”

왠지 부끄러워져서 몸을 비틀다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지런히 일어나 이불을 개키고 청소기를 돌리는 등, 깨끗한 집 안에서 괜히 부산을 부렸다.

뭔가 의욕은 넘쳐 나는데 딱히 할 게 없었다. 하루에 두 번 도우미가 집을 청소하고 음식을 내온다. 옷은 매일 아침 문 너머로 깨끗이 클리닝 된 채 배달됐다.

그렇다고 놀 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다. 책이라고는 모두 전공 서적과 경영 도서였고, 자신이 밖으로 연락할 수 없도록 휴대폰과 태블릿, 노트북 같은 전자기기는 다 치웠기 때문에 거의 보지도 못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그를 위해서 음식을 만들거나 꽃을 관리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

이림은 무력한 제 상황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에휴…….”

멍하니 있다가 결심한 듯 눈을 빛내던 이림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기계적인 멜로디가 흐르길 몇 초. 밝지만 사무적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저…… 아까 전화 드렸었는데요.”

-어머. 네! 뭐 또 준비할 게 있나요?

“다른 건 아니고. 회계 책 좀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회계요……?

“그냥…… 좀 무료해서요.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공부해 보고 싶어서요.”

-그치만…….

그건 아무 쓸모도 없잖아요.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말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게다가 대화하는 상대가 거의 이도한 한 명뿐인 이림에게는 필요 없는 게 맞았다. 하지만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밖에서는 취업하려고 한다지만 저는 굳이 필요 없긴 한데…… 하지만 모든 공부를 취업하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너무 지루해서 그래요.”

-네. 제가 너무 주제넘었죠? 같이 준비해 드릴게요.

“아녜요. 그런데 저……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는데…….”

-어떤 거요?

“제가 책 갖다 달라고 한 건 선배에게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말하셔도 괜찮기는 하지만…… 어디 쓸 데도 없고. 그냥 제 취미 생활이니까.”

-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자신이 매달 꽃씨와 화분을 주문하는 것처럼 별일 아니라는 어투로 들리게 하기 위해, 이림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미안하다는 듯 말을 잇던 여자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책 하나 준비해 달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울 수가. 이림은 한숨을 푹 쉬었다.

띵동-.

“앗, 왔다!”

소파에서 다리를 달랑이며 코코아를 마시던 이림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벨이 울리고 10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쳇. 혀를 차던 이림이 커다란 박스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박스 안에는 각종 채소와 고기가 한가득 들어 있었고, 맨 위에는 비닐로 포장된 책이 몇 권 올려져 있었다. 센스 있게 볼펜과 연습장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그것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벌써 공부를 놓아 버린 지 몇 년이 지났다. 그때는 공부가 그렇게 지루하고 싫었는데. 지금은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미래가 온통 암흑이었지만 한 줄기 볕 들 날을 꿈꾸며 책에 얼굴을 박고 열중했었다.

소박하지만 꿈이 있고 미래가 있던 나날들은 세월이라는 빠른 물살을 타고 흘러가 버렸다.

무력감에 몸을 웅크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지금 제 처지를 비관하는 것이 우울증의 시작이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이 처지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자신은 무기질의 인형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 멀리 들리는 웃음소리, 자동차 배기음 등 이제나저제나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부산한 소리를 모두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희망을 꿈꿔 보기로 했다. 비록 보여 줄 사람은 없다 하더라도.

***

“오늘은 기분이 많이 좋나 보네.”

도한은 부지런히 식탁에 음식을 나르는 이림을 보며 빙긋 웃었다.

최근 그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흰 얼굴은 잔뜩 집중한 표정이었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그를 훔쳐보던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반드르르하게 윤이 나는 고기를 썰어 예쁘게 세팅한 이림은 조금 긴장된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자리에 앉았다. 도한은 그런 이림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고기를 집어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아…….”

“잠깐만.”

검은 서류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은 도한은 전화를 받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보니 오늘 식사는 글렀다 싶다.

“하……. 오늘은 안 된다고 했잖아.”

“…….”

“뭐? 왜 모셔왔는데? 하아…… 알겠어.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짓 하지 마.”

눈살을 찌푸리며 작게 욕설을 내뱉던 도한은 이림의 눈치를 보며 전화를 끊고, 가만히 앉은 연인에게 다가갔다.

“이림아, 어쩌지?”

“…….”

“회사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이림은 대놓고 비웃음을 지었다. 회사의 건립을 함께한 부모님을 등에 업고 빠르게 승진한 도한이 제 아랫사람에게 저런 말투를 쓸 리 없었다.

정중하지만 다분히 명령조가 섞인 사무적인 말투를 여러 번 들었던 이림은 어렵지 않게 본처가 그를 불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또 그 오메가가 불렀나 보지.’

정희민. 국내의 저명한 반도체 회사의 외동아들이었다. 이림이 뒷방주인, 정부, 기생충 등등으로 불릴 때 가장 환한 양지에 서서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미모나 우성 오메가라는 큰 장점 외에도 학벌, 배경 등 어느 것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도한이 철저하게 막은 탓에 별로 부딪힐 일은 없었지만,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경멸 어린 눈초리. 그의 깊은 눈매에 이림을 향한 혐오감이 가득했다는 것을 이림도 알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제 남편이 결혼하자마자 대놓고 정부를 데려오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억울한 점은 자신은 절대 이곳에 발을 딛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만히 옛 생각을 하는 이림이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정장으로 다시 갈아입은 그는 이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갔다 올게. 먼저 먹고 있어. 응?”

싸늘한 낯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자 그가 급히 포크를 집어 들고 음식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었다. 기가 차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자 음식을 삼킨 도한이 가는 목덜미를 한 번 주무르고 집을 나섰다.

“참 부지런하네……. 쓸데없이.”

나 같으면 이렇게 살라고 해도 못 살겠다.

혼자 중얼거리던 이림이 접시를 집어 싱크대에 부었다. 어차피 선배는 본가에서 이것보다 더 호화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올 것이다. 자신이 몇 시간 동안 노력한 요리가 보잘것없어 보여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이림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싱크대를 붙잡고 조용히 눈물을 떨궜다.

***

이림은 작은 손에 펜을 쥐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회계 기초 용어를 무작정 노트에 옮기며 단어를 외우는 거였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손에 쥐니 어색해서 글씨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적성에도 안 맞는 요리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림은 문 열리는 소리에 파드득 일어섰다.

급하게 문을 열고 나오니 도한이 신발을 벗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활짝 웃는 그의 앞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섰다.

벌써 며칠째 비밀 아닌 비밀이 생긴 참이었다. 그가 회사에 나가면 바로 책을 펴서 공부를 시작했다. 밥을 먹고 꽃을 돌보고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여섯 시간 이상 공부를 하는 셈이었다. 모르는 단어와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땅거미가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은 정신없이 머리를 싸매고 단어를 외우다 보니 그가 오는 소리도 못 들었나 보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텅 빈 식탁을 보던 도한은 이림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힘들게 준비할 필요 없어. 뭐 시키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치킨.”

조용히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오히려 들킬 것 같아 빠르게 음식을 정했다. 고개를 끄덕인 도한이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옆에서 우물쭈물 서 있던 이림은 한 문제가 해결되자 다른 문제를 고민 중이었다.

사실 공부를 하면서 여러 문제가 있었다.

일단 어려운 회계 용어를 무작정 외우기만 하니 매우 답답하다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휴대폰이 있으면 검색이라도 가능하겠지만 벌써 몇 년째 뺏긴 상태고, 마찬가지로 노트북이나 태블릿도 없었다.

은근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이림은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지금 스트레스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반쯤 정신 줄을 놓고 입을 열었다.

“저…… 선배, 저 부탁이 있는데.”

“응? 뭔데?”

옷을 벗던 도한은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세상에 좋다는 것은 다 갖다 바쳐도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던 이림이 제게 뭘 부탁하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의 수행원이나 도우미에게 말할 뿐,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데 갑자기 부탁이라니. 귀 기울이는 도한의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이림은 결국 긴 시간 끝에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왜, 뭔데. 응? 내가 해 줄게.”

계속되는 추궁에도 손을 내젓던 이림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끊긴 대화에 거실은 썰렁함만이 맴돌았다. 그 긴 침묵 속에서 도한은 서서히 눈가를 좁혔다.

다음날, 이성그룹의 자회사인 이성건설에서 업무를 보던 이도한은 연락을 한 통 받았다. 이림이 가정 도우미에게 전자사전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전자사전?”

-네……. 그게 사실은…… 얼마 전에도 책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그걸 왜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도한은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림은 언제나 이랬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멍하고 순진한 얼굴로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 놓은 다음, 제가 원하는 것을 야금야금 부탁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입이 아프도록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하라 명령했건만, 결국 또 이런 일이 생긴다.

도한은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한쪽으로 치우고 컴퓨터를 켰다.

몇 번 클릭하자 화면이 바뀌고, 여러 개의 화면이 나왔다. 분할된 화면은 각각 이림이 있는 집의 거실, 현관, 부엌, 안방 등을 비추고 있었다. 넓은 책상에 팔을 기대고 손깍지를 낀 그의 손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림이 있을 때는 절대 끼지 않는 결혼반지다. 하지만 그 집을 나서는 순간 가장 먼저 착용하는 것이 이 반지였다.

이림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몸을 구부린 채로 무언가를 열심히 끼적이고 있었다. 잘 풀리지 않는다는 듯 엎어지기도 하고 머리를 감싸기도 했지만 꽤 오래도록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는 거의 보여 주지 않는 생기 있는 모습이다. 저택에 들어온 뒤 예민함과 짜증이 많아지고 금세 싫증을 느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한 자리에 진득하니 머물고 있었다.

그것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 도한의 얼굴이 서늘히 가라앉았다.

***

드디어 생긴 전자사전을 손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가지고 놀던 이림은 문 열리는 소리에 후다닥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오늘은 사전을 사용해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은 굳이 자신이 나서서 집안일을 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었고, 도한도 그걸 원하진 않았기에 자신이 할 일이라고는 그가 퇴근했을 때 맞아 주는 것뿐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차가운 낯을 보기 전까지는.

매일 열두 시간이 넘는 근무를 하면서도 집에 들어올 때는 웃는 낯으로 들어오던 그는 웬일인지 무표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을 굴리던 이림은 괜히 욕실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바깥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이림은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나오자 빤히 바라봤다. 그때까지 표정 없는 얼굴을 유지하던 도한이 드디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왜? 할 말 있어?”

“아니…….”

“나는 오늘 먹고 왔는데. 넌?”

“으응……. 나는 아직.”

“기다려 봐. 내가 차려 줄게.”

“안 그래도 돼.”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주방으로 다가간 도한은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매일 다양한 반찬이 배달되기 때문에 먹을 때는 덥혀서 먹으면 끝이었다.

반찬을 데우고 물과 수저까지 차려 둔 도한은 이림에게 손짓했다.

여전히 그의 눈치를 슬슬 보던 이림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밥을 퍼서 식탁에 내려 둔 도한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속으로는 제발 방 안으로 들어가 줬으면 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억지로 식사를 시작했다.

이림은 메추리알과 계란말이를 입에 넣고 콩나물무침을 집었다. 꾸역꾸역 먹다가 고개를 들자 무심한 표정의 도한과 눈이 마주쳤다. 무심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 것 같다.

표정은 언뜻 보면 무심한 듯했으나 그 안에 담긴 눈빛은 사람을 꿰뚫을 것 같은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벌써 그와 오랜 시간 몸을 섞은 이림이 모를 리가 없었다. 멈칫, 수저질을 멈춘 이림의 앞으로 물컵을 가져다 대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이림아.”

“…….”

“요즘 집에서 잘 지내? 나한테 뭐 부탁할 건 없고?”

“으응……. 똑같지, 뭐.”

순간 마시던 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는 당황한 자신의 표정을 다 봤을 것이다. 애써 빠르게 표정을 바꿨지만 이미 다 들켰을 것이라는 낭패감이 이림을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고요한 전쟁터로 변해 버린 식탁 위에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팽팽한 싸움이 시작됐다. 사실 이림은 필사적으로 방어 중이었을 뿐 도한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도한이 상냥하던 분위기와 낯을 없애면 이렇게 갑을관계가 선명히 드러났다. 이림이 그 부분을 참을 수 없어 한다는 것을 알고 그도 웬만하면 자신이 지고 들어갔으나,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림도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자신이 도망갈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돈을 꿍쳐 둔 것도 아니다. 쓸데도 없는 공부를 하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추궁하는 것에 슬슬 눈치를 보고 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림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징징-.

차가운 정적 속에서 그의 휴대폰이 눈치 없이 소음을 만들었다.

몇 번 거절하던 도한은 결국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의 전원을 꺼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먹으라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림의 뒤에서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도한의 목소리가 들려 이림은 흠칫 떨었다.

“준비하고 방으로 와.”

“그치만, 오늘은…….”

“이림아.”

“…….”

“준비하고 와.”

그 말을 끝으로 방문이 닫혔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이림은 체념 어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하니 이를 닦고 몸을 씻으면서 생각했다. 눈치로 보면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말을 안 할까.

평소라면 투덜대며 잠자리를 피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을 한 이상 자신이 수그리고 들어갈 차례였다.

도한은 문을 열고 다가오는 이림을 빤히 바라봤다. 하얀 몸은 물기를 머금어 더욱 뽀얗게 빛났고, 길쭉한 몸에 실크 파자마를 가볍게 걸치니 오히려 더 음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무심함을 연기했던 얼굴에서 깊은 욕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

그날 이후 도한은 이림이 공부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있었다.

도한이 매사 하는 일에 짜증이던 이림이 저자세로 나오자 오히려 더 공부하라고 밀어 주고 싶은 정도였다. 사실 어떻게 해도 그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깟 것. 어차피 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딛지 못하게 할 생각이니, 뭘 한다고 해도 쓸 곳은 없었다.

대신 집요하리만치 철저한 도한은 안 그래도 철창 같던 집을 더욱 조여 촘촘하게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공부가 정말로 그가 집을 나가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도한은 잘 정돈된 갈색 머리를 한 번 더 머리로 넘긴 후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서랍을 뒤져 담배 한 갑을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창가로 다가가자 금속 재질의 시계가 빛에 반사되며 번쩍였다.

솔직히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배워 왔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숨겨진 연인, 어머니의 정부 등을 보면서 자랐었다.

어렸을 적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부를 때 정부라고 해야 하는 줄 알았던 적도 있었다. 명실상부 최대 규모의 자본과 계열사를 지닌 이성그룹은 우직하고 청렴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환락과 욕망이 넘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사실 재벌들은 암암리에 뒷사람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따지자면 이성그룹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담배를 훅 빨며 이림을 생각했다. 그리고 뒤이어 아버지의 말이 아른거렸다.

‘원래 다 그런 것이란다. 웬만하면 우리가 져 줘야지. 매일 갇혀 사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해 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알겠니?’

그들은 진심으로 연인들을 사랑했다.

이성 사람들이 감춰 두고 사랑했던 이들은 대부분 일반인이었고, 정략적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정재계 인사들이나 국내외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견실한 기업의 자녀였다.

이성그룹이 대놓고 뒷사람을 꿰차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들 그러려니 했다.

또한 옳다구나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를 보며 같이 맞바람을 피워 대는 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 말도 안 되는 체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슬슬 적응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림이 벌써 이 집에 들어앉은 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스무 살의 풋풋하고 싱그럽던 이림은 이제 관능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그 위험한 분위기가 나이를 먹어서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별채의 야릇한 기운 때문인지는 도한조차 알 수 없었다.

도한이 상념에 젖은 사이, 조용함만이 감돌던 별채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안절부절못하는 이림과 다르게 소파에 앉은 남자는 차분했다. 다소곳이 앉은 그는 도한과 정식으로 결혼을 올린 정희민, 우성 오메가였다.

새카만 머리에 하얀 얼굴을 가진 고전적인 미인인 정희민은 개울에 핀 여린 가닥의 갈대 같은 이림과 달리, 온실 속에서 한껏 보살핌을 받고 자란 난 같았다.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걸친 옷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정말 그의 옆자리가 잘 어울리는 오메가였다. 이림은 괜스레 어깨를 좁혔다.

“남편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네.”

“괜히 형이 신경 쓰는 건 싫으니까. 그냥 오늘은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

“일주일 전에 시부모님하고 식사 자리 있었던 건 아세요?”

“아니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화를 받기는커녕 아예 전원을 꺼 버렸더라구요. 어찌나 당황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림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유달리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 그날, 계속 울리는 전화가 짜증이 났는지 그는 전원을 꺼 버렸었다. 양부모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웬만해서는 그 장단에 맞추는 그가 전화조차 받지 않고 모두를 바람맞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날을 말하는 거구나. 그래도 자신이 가지 말라고 애걸복걸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것도 아닌데, 왜 자기에게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림이었다.

그래서 입을 비죽 넣었다가 황급히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희민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강이림 씨, 나잇값 좀 하세요.”

“…….”

“뭐, 사실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었어요.”

“네?”

“도대체 언제까지 빌붙어 살 거예요? 벌써 오 년째인 건 알고 있어요?”

이림의 얼굴이 화르르 불탔다. 누군가 머리에 구정물을 뿌린 것 같은 모욕감이 단전에서부터 치솟았다. 창백한 얼굴이 눈에 띄게 빨개지자 그것 보라는 듯 작게 코웃음 친 희민은 작게 명함을 내밀었다.

“오늘은 급하게 오느라 아무 준비를 못 했어요.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연락해요.”

“무슨 말인지…….”

“자꾸 한심한 질문 좀 하지 마세요. 돈이든 뭐든 다 해 주겠다는 거니까. 하아, 나도 참. 이런 답답한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이제는 대놓고 비꼬는 말을 내뱉는 희민을 보고 울컥한 이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검게 불타는 시선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 팔짱을 낀 희민은 어디 말해 보라는 듯이 조용했다.

“저라고, 있고 싶어서 여기 있는 거 아닙니다. 그 대단하고 잘나신 댁 남편이 붙들고 있는 거죠.”

“아, 난 또 뭐라고. 그거 얘기하려고 폼 잡은 거예요?”

“예?”

이림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나름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데, 희민의 신경 하나 거스르지 못했다.

다시 맹한 표정으로 돌아간 이림은 멍하니 희민을 바라봤다.

이림의 성격이 순하고 바보같이 착한 이유도 있겠지만, 우성 알파 못지않게 오만하고 기가 센 우성 오메가의 특징을 그대로 가진 희민은 곱게 자란 주변 환경까지 더해져 웬만한 언행으로는 그의 가슴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그를 모르는 이림은 쏟아지는 비수를 힘없이 받아 내고 있었다.

“그거 모르고 결혼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눈치껏 이쯤이면 질려서 떨구겠다 싶었지.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그렇게 좋은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

“하여튼 남편이 정신을 못 차리니, 나라도 와서 좀 깨우치라고 말하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곧 그이한테도 말할 거니까.”

혼자서 속사포 같은 비난을 쏟아 낸 희민은 할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중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하아…… 하.”

숨을 가쁘게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희민은 다급하게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제 말을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수그리던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가련한 주인공처럼 보였다. 비록 그가 볼품없다 지껄였지만, 청초한 얼굴은 그렇다 쳐도 강이림만이 갖고 있는 미묘한 분위기는 특출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업무에 시달리는 도한은 그런 자신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이림의 그런 면모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희민은 그런 생각을 하니 신경질이 나서 거칠게 발을 옮겼다.

숲을 연상케 하는 거목들이 담장을 대신하여 우뚝 선 채로 거대한 저택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나무들을 지나치면 수십 채의 기와집이 나왔다. 이림을 만나고 온 뒤 저택 중 한곳에서 차를 들이켜며 고용인들이 정성스레 가꾸어 둔 소담한 정원을 바라보던 희민의 앞에, 그가 나타났다.

쾅-!

“정희민.”

“왔어요?”

태연자약하게 인사를 건넨 희민을 음산하게 바라보던 도한은 화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를 악물자 단단한 턱과 목에 새파란 핏줄이 섰다. 화가 났을 때 짐승이 털을 곤두세우듯 거대한 몸이 호흡을 다스리기 위해 들썩거렸다.

도한의 감정과 태도가 시종일관 미적지근했던 것만 보아온 희민에게는 굉장히 낯선 모습이었다.

“너, 거기는 왜 간 거야? 도대체 생각이란 게 있어?”

“제가 뭘요?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일?”

웃음이 터졌다. 당당하게 제 말을 주장하던 희민의 얼굴에 금이 갔다. 정말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눈까지 접어 가며 웃는 도한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크게 웃던 도한은 차가워진 희민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네가 할 일이란 게 뭐지?”

“……전 당신과 결혼했어요. 그렇다면 당신 몸에 달라붙은 쓸모없는 기생충은 제가 없애야죠.”

“…….”

쨍그랑!

희민이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차가 담긴 주전자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희민은 제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도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후각까지는 어찌하지 못해, 시원하고 차가운 페로몬 향이 맡아졌다. 바다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오는 넓은 강가의 으슬함처럼 느껴지는 그 향은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그러나 벼락같은 낮은 목소리가 귀에 꽂혀 들어왔다.

“너도 다 알고 들어왔잖아. 내가 널 속였어?”

“…….”

“싫다면 지금이라도 이혼해. 난 너 말고 그 자리에 있을 다른 대체품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거든. 하지만 강이림은 아무도 대체할 수가 없어.”

“뭐…… 뭐라고요?”

“나와 혼인하면서 네가 잃은 게 뭐가 있는데? 넌 다 가졌으면서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단 한 가지마저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 거야. 이 결혼을 누가 쌍수 들고 환영했는지 잊었어? 너잖아, 정희민.”

“…….”

“내 말이 틀려?”

물론 그렇게 쉽게 이혼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디로 뻗칠지 모르는 저 성질머리를 감당하려면 이 정도 협박은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희민이 막무가내로 약속장소로 불러내거나 훼방을 놓아도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폭력성을 보이지 않던 도한이 위협적으로 굴자 희민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차올랐다.

잔뜩 젖은 얼굴을 보며 기가 차다는 헛웃음을 짓던 도한은 닿기도 싫다는 듯 몸을 일으킨 뒤 옷을 털었다.

“다시 한 번만 그곳에 얼쩡거린다면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 뒷돈 쥐여 주려고 명함 같은 것도 내밀지 말고.”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희민은 확 소름이 돋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 집에 들어간 건 주변 눈이 있으니 당연히 들키겠다 싶었지만, 집 안에서 한 이야기까지 그가 알 수는 없었다. 분명 집 안에는 강이림 한 명뿐이었고 자신은 조곤조곤하게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말했었다.

설마…….

점점 눈이 커지는 희민을 보던 도한은 뒤를 돌아 제 말만을 던지며 나갔다.

“전화번호는 바뀔 테니 그렇게 알아.”

***

이림은 힘없이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두 손을 곱게 포개고 멍하니 천장을 향해 앉아 빛이 스러지고 어둠이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던 공부도 팽개치고, 그가 다녀간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둘이 살기에 넓다고 생각한 이 별채도 숨이 막혔고 희민에게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자신이 어물어물 해명하는데도 자신의 말만 쏘아붙이던 희민도 싫었다.

그리고 가장 열 받는 사람은…….

달칵-.

“이림아.”

이림은 일어나지도 않고 조용히 누워서 도한을 바라봤다. 희민과 만난 것을 티 내면 안 되는데. 누군가 이 집에 출입했다는 것을 알리면 더욱 통제당할 것을 알면서도 무표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그럼에도 기댈 사람은 이도한밖에 없어서.

복잡한 심경이 목을 짓눌렀고 그 울화는 식도를 타고 가슴으로 흘러들어 맺혔다. 이 일로 이림은 한층 더 우울해지고 한층 더 화병이 돋고 있었다.

이를 모르지 않는 도한은 꼼짝 않는 그에게 다가가 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좋아하는 거 먹자.”

그는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들을 포장해 왔다. 치킨, 아이스크림, 케익 등 한식을 좋아하는 도한의 취향과는 아주 거리가 먼 종류의 음식들이었다.

딱히 음식을 가리지 않는 이림은 차려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었지만 가끔은 외부 음식을 당겨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휴대폰도 없는 판에 배달을 시킬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설령 있었다 한들 복잡한 저택 내부에 고립된 이림이 음식을 받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그가 입에도 대지 않는 음식을 꺼내 들이미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마 희민이 깽판 치고 나갔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 테다.

사실 생각이 많은 타입의 이림은 지금 아주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닭다리를 던지면서 내가 왜 너 대신 욕바가지가 되어야 하냐고 화를 내야 하는지,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닭다리를 입에 넣어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래서 둘 다 하기로 했다.

입에 치킨을 넣고 씹어 대면서 그가 눈치챌 만큼 노골적으로 노려봤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눈을 흘기며 아무 말 없이 빠르게 손만 놀리는 이림을 보던 그는 피식 웃었다.

“아이스크림도 먹자.”

배가 불러 늘어져 있던 이림을 가볍게 안아 들고 소파에 앉은 도한은 바둥거리는 이림을 그제야 놓아 줬다. 하지만 놓아 준 곳이 제 허벅지 위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단단하고 움틀거리는 허벅지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져 괜스레 얼굴을 붉힌 이림이 소파로 내려오려 하자 잽싸게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읍…….”

“맛있어? 네가 좋아하는 초코 맛인데.”

뭐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리자 또다시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을 채웠다. 얼결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주는 대로 전부 받아먹었다. 또 그가 원하는 대로 휘둘리고 있었다.

맛있긴 하네…….

울컥한 것은 그런 것이고, 오랜만에 느껴 보는 달달한 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구한 날 코코아나 먹다가 제대로 달달한 초콜릿 맛을 느끼니 아까까지 세상만사 다 귀찮고 피곤했던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그래도 제가 붕어도 아니고, 이깟 거 한두 개 사 준다고 그를 용서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한이 집에 온 지 한 시간이 넘었지만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언수행 중인 이림을 빤히 보던 남자가 말없이 아이스크림 통을 긁고 있는 작은 몸을 옆에 내려놓았다.

“이림아.”

“…….”

“내가 미안해.”

도한은 그 사과 외에 어떤 말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성의 없게 들리기도 했다.

이림은 때로는 그가 할 말을 자신이 모두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함께 살면서 그의 눈을 더욱 깊게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서 그런가. 격한 감정이 몰아치면 약간씩 달라지는 홍채의 색이 언뜻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이 뜻하지 않게 올라와도 누르고 통제하는 것이 익숙한 도한도 오래된 연인의 예리한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림이 딱히 눈치가 빠르다거나 몸이 예민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살 맞대고 살다 보면 얕은 변화라 하여도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가 조금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이림의 예상대로, 그가 말하는 미안하다는 사과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정희민이 우리 둘의 공간에 들어오게 해서 미안해. 심한 말을 듣게 해서 미안해. 보호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림을 집 안에 가둬서 미안하다는 사과는 없었다. 그것까지는 알지 못한 이림은 체념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내려 두고 도한이 있는 방향으로 팔을 올렸다.

시무룩한 척 눈을 내리깔고 있던 도한이 그 신호를 재빠르게 캐치하고 달려들었다. 여전히 뽀얗고 여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도한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이림은 멍하니 그 사과를 듣고만 있었다. 도한은 낮에 별채에서 난리가 것을 알고 정희민에게 가서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 후에는 이림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사서 화를 풀어 주려 노력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이림이 그의 사과를 받든, 받지 않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정희민은 여전히 그와 부부였고, 도한은 승승장구하는 이성건설의 상무직을 맡고 있었다. 누군가가 정부를 둔 그의 부덕함을 욕한다 할지라도 그는 다정함을 모방한 얼굴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혼자만 이를 드러내고 있으면 결국 이림 자신만 손해였다. 반강제로 사과를 받아 줘야 하는 처지였지만,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도망……?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가족,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 5년이 넘었고 집을 경호하는 경호원들의 눈을 피해 달아나기도 벅찼다. 당장 이 대궐 같은 저택을 나간다 해도, 도저히 경제적으로 자립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이 또한 도한이 의도한 것이지만 이림은 자조하며 자신을 탓했다.

그렇게 굴을 파는 이림의 귓가에 도한이 속삭였다.

“이림아, 네 페로몬 냄새 많이 진하다…….”

“…….”

“힘들어지면 언제든 말해……. 알았지?”

이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한이 억제제는 모조리 치워 버려서, 히트 사이클이 오면 그와 함께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는 도한이 회의 중 이림에게 히트 사이클이 와서 그가 회의를 중단하고 달려온 적도 있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이불에 얼굴을 박고 죽고 싶었다.

욕망이 가득 침잠해 짙은 갈색으로 변한 눈과 눈을 마주치던 이림이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참으면 돼……. 내가…….

이림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목덜미부터 슬그머니 다가오는 입술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도한은 하느작거리는 여린 몸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허공을 더듬던 눈이 점점 감겼다. 이림은 그 품 안에서 기묘한 안락함을 발견했다.

그래……. 어쩌면 이런 삶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떳떳하진 못하지만 안락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이림은 잘 알고 있었다.

여린 몸을 숨 막히게 끌어안은 넓은 등 위로 하얀 손이 올라왔다. 그리고 자장가를 읊듯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

하지만 그다음 날. 이림은 정희민으로부터 받아 숨겨 놓았던 명함이 바뀐 것을 보고 다시금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어제 정희민에게 명함을 받은 후, 이림은 방금 찍어 낸 듯한 빳빳한 명함은 버리기도 애매했고, 가지고 있는 것도 불안한 상태였다.

어떤 식으로든 도한에게 들킨다면 의심과 추궁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장롱을 열어 옷가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도한과 이림의 옷방은 분리되어 있었고 클리닝 서비스를 맡길 때는 이림이 옷을 직접 꺼내 놨기 때문에 이 장롱을 만지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로 연락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라는 가정을 두고 남긴 것이었다.

그러나 도한이 퇴근하자마자 자신에게 정신없이 밥을 먹이고 사과하는 둥 부산스레 굴어서 명함의 존재는 반쯤 잊어 버렸다. 또 이림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갈피를 잡은 것도 있었다.

정희민이 다녀간 이후로 크게 상심하여 팽개쳤던 공부에도 다시 열을 올리던 이림은 휴식 중에 그 명함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생각난 김에 없애는 게 좋겠어.’

귀찮다고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림은 그 자리에서 두꺼운 펜과 가위를 들고 일어났다.

펜으로 누구의 이름과 번호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훼손하고 갈가리 찢어 휴지통 깊숙한 곳에 버릴 요량으로 장롱을 열었다.

잘 개켜진 옷을 몇 벌 헤집으니 어제와 똑같이 뻣뻣한 명함이 나왔다. 별생각 없이 검은색 펜으로 번호와 이름을 모두 지워 버리려, 펜을 명함에 가까이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

번호가 달랐다.

이림은 곧잘 맹하고 순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렇다고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 명문대에 입학한 것이다.

이 명함을 받을 당시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두세 번 훑어보긴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봐도 번호가 달랐다.

“1을 7로 바꿨잖아…….”

명함의 글꼴이 특이해서 언뜻 보면 1과 7의 구별이 힘들었다. 그것도 숫자 열 개 중 네 번째에 있어서 찾기도 어려웠다.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아 명함을 이리저리 뒤집고 쓸어 봤다.

재질, 글꼴, 크기. 모두 정희민이 준 것과 똑같았다. 다른 것은 숫자 한 개뿐.

순간 소름이 쭉 돋았다.

이림의 머리는 제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빠르게 돌아갔다. 어제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모두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들이닥쳐 폭언을 퍼부은 정희민, 용서를 구한 이도한.

‘이도한. 네가 없앴구나.’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가슴 깊이 배신감, 수치심, 분노, 공포 등 부정적인 색감으로 점철된 어두운 감정이 뿌리내려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 혀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입을 꽉 다물고 몸을 웅크린 이림은 몇 초 뒤 의문을 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바꾼 거지?

정희민을 만나 언쟁을 했던 것 자체를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저곳에 보이지 않게 경호원이 배치되어 있고 등장도 요란스러웠으니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집 내부에서 있던 일은 다르다. 명함을 숨길 때 이림은 집에 혼자 있었고, 방문까지 꼭꼭 잠근 채 숨겼는데.

상식적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첫째, 먼저 누군가 의도치 않게 명함을 없애 버렸다. 둘째, 의도적으로 명함을 없앴다.

일단 첫 번째 가정은 거의 가능성이 없었다.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이었고, 새 옷 사이에 끼워 둔 옷이기 때문에 클리닝을 맡길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가 유리한 원인이었지만 차마 그쪽으로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 집에서 누가 자신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건가?

급격한 공포감에 몸을 덜덜 떨던 이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옷을 꽉 쥐었다.

그러나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목덜미를 느끼며 눈을 꽉 감았다가 떴을 때 그의 눈은 확고한 의지로 짙어졌다.

모든 열쇠는 이도한이 쥐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림은 도한의 퇴근을 기다리며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요 한 달 새 자신의 마음을 헤집는 여러 가지 일들이 정신없이 생겼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 이 상황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차라리 모든 게 자신의 망상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고요하게 삶을 죽이던 이림에게 불쑥불쑥 여러 충격이 겹치면서 꽁꽁 숨었던 욕구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만약 자신이 혼자 살고 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자신은 지체 없이 이도한을 불렀을 것이다. 그의 품에 안겨 자신이 느꼈을 공포, 섬뜩함 등을 토로하면서 그의 위로를 받았겠지.

그러나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도한이 이 일을 벌인 사람이었다면.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림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이림아, 몸은 좀 어때? 아직도 열나?”

오늘도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도한의 얼굴에 물든 희미한 기대감은 숨겨지지 않았다. 이림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온몸의 피와 땀이 증발한 듯 서늘했다.

어제 화해한 게 아니었나? 태평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도한은 간단하게 몸을 씻고 환복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림을 보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인을 찾다 어떤 결론에 도달했을 때, 이림이 입을 열었다.

“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뭔데?”

“명함. 바꿔치기 했어요?”

싸늘한 정적이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도한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으나 그는 목소리만큼은 아무렇지 않게 꾸며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명함이라니. 무슨 명함?”

“선배. 정말 들킬 줄 모르고 한 거 아니잖아요.”

벌써 그와 이십 대의 절반을 함께 했음에도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정확히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이곳에 가둬 놓는 건지,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건지. 사소한 것부터 모르는 것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몇 년간 같이 살다 보니, 그가 철두철미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명함을 없애 버린 건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다 알고 있음에도 가식적인 그가 이림은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일그러지는 이림의 표정을 보던 도한은 서서히 굳은 표정을 풀고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는 피곤함과 짜증이 뒤엉켜 있었다.

“그게 뭐.”

“뭐…… 네?”

“먼저 거짓말한 건 강이림, 너야.”

이림은 멍하니, 업무에 치여 나른함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훑어봤다.

집 안에서 여러 가지 가정들을 해 보며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반응들을 상상해 봤다. 아무렴 아무리 이도한이라도 당황하기는 하겠지, 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깨어졌다.

적반하장에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며 울분을 토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명함을 숨겼잖아. 그걸 가지고 정희민에게 연락이라도 하려 했나?”

“그, 그건…… 그래. 내가 말하지 않은 건 맞아. 하지만 그전에, 숨겨 둔 것을 어떻게 찾았는지 대답부터 해.”

“정말로 내 입으로 듣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점점 다가오는 그의 몸은 여린 오메가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답답하도록 제 목줄을 단단히 틀어쥔 사내였지만 그만큼 항상 자신에게 애정을 쏟아 붓는 만큼, 한 번도 무섭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림은 도한의 애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의 정상과는 거리가 먼 사고가 끔찍하고 무섭기는 했지만 육체적으로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한 번도, 한 번도 억지로 한 적은 없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와서 잔뜩 상심해 잠자리를 거부하고 사소한 스킨십도 안 하겠다 밀쳐 내던 이림을 몇 달 동안 구슬려 함께 밤을 보냈을 때도, 도한이 위협적으로 행동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제가 알고 있던 도한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이림에게 거침없이 다가간 이도한은 그를 벽으로 밀었다. 서로의 페로몬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지자 그가 커다란 손을 들어 뒷덜미를 감싸 안았다.

“읏……!”

“어제 정희민이 건방지게 제가 주인인 것처럼 널 뒤에 두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데. 한 대 패 주지 그랬어?”

“…….”

“저번 주에는 또 뭘 했었지……. 아…… 책은 거의 다 풀었던데. 이제 선생이라도 붙여 줘?”

이림은 비아냥거리는 도한의 말에도 꼼짝할 수 없었다. 깜짝 놀란 얼굴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모든 일상을.

짝!

이림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도한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작은 손에 닿은 얼굴은 약간 옆으로 움직였을 뿐, 올곧게 이림만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은 눈빛에 압도된 이림은 입술만 깨물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한은 잘못 맞아 찢어진 입술을 대충 손으로 훔치고 피가 묻은 손으로 벽에 바짝 선 이림의 머리칼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서…… 밥 먹고, 화분 가꾸고, 좀 자다가 공부하고……. 내가 퇴근하면 황급히 마중 나오잖아.”

“…….”

“그런 너를 볼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해. 하루 종일 나만 기다리는 널 볼 때마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야.”

“그게 지금 할 소리야?”

“그런데 자꾸 네가 다른 마음을 먹는 것 같잖아.”

치욕감을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이림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귀 가까이 속삭인 도한은 즐겁다는 듯 눈을 빛냈다.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하는 그 모습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지.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 제 일상을 줄줄 읊는 도한이 진심으로 무서웠다.

벗어나야 해.

그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그를 밀치고 달아났다.

일단 품을 벗어나기는 했는데, 갈 곳이 없었다. 안절부절못하고 눈을 굴리던 이림이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문을 열기 위해 통유리로 만들어진 문을 여는데, 어느새 뻗어져 나온 커다란 손이 이림의 순을 쥐고 열린 틈을 닫았다. 희미하게 불던 시원한 바람이 금세 꺼졌다.

“이림아…….”

“…….”

도한이 내뱉어 이 뜨뜻미지근한 공기 속에 퍼뜨려진 제 이름은 어떤 문장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져 버렸다.

거세게 문을 닫은 손이 이번에는 작은 어깨를 꽉 쥐었다.

곧이어, 잘못 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작은 어깨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도망가지 못하게 몸을 밀어붙여 이림이 전면이 창으로 된 문을 짚도록 만들었다.

정적 이후. 긴장감에 몸을 떠는 이림의 옷을 거칠게 벗기기 시작했다.

“아, 윽!”

찢기듯 벗기는 거친 손길에 옷에 살결이 여러 번 눌린 이림은 반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배려 없이 속옷까지 모두 벗긴 도한은 여전히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평소의 가면 같은 다정한 웃음은 사라지고 무표정한 모습이 남았다.

도한이 예고도 없이 페로몬을 풀자 시원하고 깊은 향이 거실을 뒤덮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맡은 이림의 전신이 흥분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푼 페로몬에 의도대로 착실히 반응하는 제 육체가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뒤는 점점 젖어 가고 있었다.

언제나 꽉 다물렸던 뒤는 어느새 애액으로 반질거렸고 흰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페로몬으로 무방비 상태가 된 이림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쓰다듬던 도한도 얼마 참지 못하고 옷을 벗었다.

하지만 침대가 아니라 거실에서 시작되는 정사에 강력한 거부감을 느낀 이림이 몸을 뒤틀며 반항했다.

아무리 이 주변에 사람이 없다지만 전면이 훤히 비치는 유리문에서 하는 것은 싫었다.

분명 그 사실을 알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이림을 제압한 도한이 느긋하게 옷을 벗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성욕을 내리누르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옷을 벗은 것일 뿐. 그의 페니스는 발기한 지 오래였다.

“흐으…… 여기서 하지 마……. 하지 마!”

“싫어? 그런데 왜 여기는 이렇게 음란하게 젖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어느새 흠뻑 젖은 구멍으로 두껍고 긴 손가락이 들어왔다. 도한은 매주 쉬지 않고 좆질을 해 대는데도 언제나 좁은 내벽을 더듬으며 입구를 넓혔다.

음란한 소리가 쉼 없이 들릴 정도로 손가락으로 피스톤질을 하자 말랑한 엉덩이가 그의 손에 부딪혀 짜부라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왠지 굴욕적이라 눈을 질끈 감던 이림은 빠져나가는 손가락을 느꼈다. 이내 다가온 성기를 느끼며 다시금 흠칫 긴장했다.

끈적이는 애액이 잔뜩 묻은 입구를 페니스로 둥글리며 장난치던 도한은 그대로 밀어 넣었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한 번에 몰아붙여 압박감이 상당했다.

“악!”

비명을 지르며 창문으로 몸을 무너트린 이림을 일으켜 세워 골반을 붙잡은 도한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움직여 이번에는 뿌리까지 완전히 성기를 집어넣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시작된 움직임에, 입을 벌린 채 이림이 압박감과 쾌감을 견뎌 냈다. 평생 남자라고는 이도한 한 사람밖에는 모르는 이림의 순연하고 음탕한 몸이 도한의 움직임에 착실히 반응했다.

“으읏…… 아아…… 아!”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만족스럽게 듣던 도한이 자그마한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피가 몰린 목덜미 아래로 이어진 하얀 나신은 땀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짐승이 마운팅을 하듯 제 살을 겹친 도한이 색사에 취한 목소리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도 너한테 알려 주기는 싫었어……. 하아…… 하지만 그딴 쓰레기를 숨기는 게 더 싫었으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으응……. 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말을 매듭진 도한이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아……!”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따뜻한 색감으로 지어진 별채. 화사한 꽃들이 풍성하게 흔들리는 마당. 평화로이 흘러가는 구름 같은 온유함으로도 숨기지 못했던 냉기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

밤새 시달렸던 이림은 서서히 눈을 떴다.

어제의 폭력적인 정사의 충격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 삼십 분을 멍하니 누워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도 어제의 일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아주 무서운 악몽을 꾼 느낌이다. 그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무의식중에 꿈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건 꿈이야.’

그렇게 믿은 이림은 몸을 일으켜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갔다.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구부려 장롱을 열고 다시 곱게 개킨 옷을 헤집었다. 하지만 그 하얀 명함이 있을 리 없다.

“거짓말……. 이건…… 거짓말이야.”

첫사랑에 취해 들떠 있던 스무 살의 이림이 도한에게 계약서를 받았던 그날과 비슷한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끝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눈물의 의미는 단지 공포만은 아니었다. 도대체 자신이 사랑했던 그 다정한 남자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 겪는 사랑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재벌들이 암암리에 오메가 정부를 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순진한 이림이라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개중에는 호의호식하며 인생이 활짝 편 오메가도 있었지만, 사람 잘못 만나 오히려 전보다 못한 삶을 사는 오메가도 있었다.

그럼 과연 자신은 어디에 해당되는 걸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림의 무지를 비웃는 듯 벌어지는 사건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옷 무덤에 얼굴을 파묻고 울다가 그대로 기절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온몸에 전혀 힘이 없는데도 계속 열이 올랐다. 뜨거운 모래 안에 갇혀 말라 가는 식물처럼 몸이 하느작거렸다.

가물거리는 시야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잡혔다. 몸에 딱 맞는 슈트를 벗지 않은 도한의 얼굴은 걱정으로 어두웠다.

“정신이 들어?”

“하아…….”

“많이 힘들지. 그래도 한술만 뜨자.”

이림은 지금 당장 물이든 죽이든 삼키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지만 그냥 고개를 돌렸다. 배고픔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심했기 때문이다.

지난 5년 동안 도한은 이림이 뺨을 치든, 마구잡이로 주먹으로 때리든 그대로 맞아 주기만 할 뿐 그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적 폭력만이 폭력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림은 지금 정신적으로 도한에게 학대당한 상태였다. 다 포기하고 살면 괜찮아질까, 하다가도 도한이 불쑥불쑥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 떨어진 일들을 벌이면 제정신을 잡기가 힘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목적을 찾아다닌다. 이림도 마찬가지였다. 스무 살 전에는 다른 사람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서 버텼고, 스무 살에 납치되듯 이 집에 들어섰을 때는 그를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치욕스러운 삶을 견뎠다.

스물다섯에는 빈한한 제 처지를 상기하며 살기 위해 그의 옆에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모르겠다.

언제부터 카메라를 달아 놓은 걸까. 선배는 나를…… 사람으로 보긴 하는 걸까?

이림은 죽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는 도한을 모른 척하며 이불을 덮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권했다.

“조금만 먹자. 응?”

“싫어.”

“이것만이라도…… 제발, 이림아. 너 지금 병원 가기 일보 직전이야.”

이림이 뒤집어쓴 이불은 도한의 다그침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림이 외면한 죽을 싱크대에 버리며 도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서에게 연락을 취한 후 다시 슈트를 걸치고 밖에 나오는 길에 분노가 솟구쳐 잠시 멈췄다.

“하아…….”

이림과 밖으로 나올 때 옆문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정문이 있는 방향으로 걸으면서 심기 불편한 티를 잔뜩 표출했다.

이림과 있을 때 옆문을 사용하는 것에 사실 별 이유는 없었다. 커다란 문을 열면 펼쳐지는 자그마한 정원을 함께 걷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계절에 맞춰 피는 꽃들과 마당 곳곳에 설치된 하얀 등 옆에 이림과 단둘이 서 있을 때면 이곳이 보금자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 밑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 정원에서 이림이 꽃을 보며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림과 있을 때일 뿐. 혼자서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기에 굳이 먼 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림이 옆문을 사용해 도둑처럼 빠져나간다는 것에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게 안타까웠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가지면서 사람답게 살겠다고 이곳을 뛰쳐나가는 것보다는 제 처지를 비관하면서 웅크려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도한은 거만하게 생각했다. 누군가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한 적이 없었기에 생겨난 결과였다. 심지어 형제들도 경쟁 상대 중 하나로 생각될 뿐이었다. 이런 이도한의 가치관을 일찌감치 알아챈 첫째 형, 이도현은 혀를 끌끌 찼다.

‘오늘 또 한 번, 네가 동생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어.’

이성그룹의 둘째로 태어난 이도한은 장남의 의무나 이미지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고 자랐다. 하지만 도한의 대담함과 총명함을 알아챈 조부는 이성건설을 물려받을 차기 후계자로 그를 낙점했다.

배경을 차치하고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타고난 단단한 체격의 장신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선이 곧아 수려하면서도 곱상한 얼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않았다. 같은 알파 수백과 함께 앉아 있다한들 결국 주도권을 잡는 주인공은 그였다. 이 흐름이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다 보니 이도한과 친해지려 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옆을 차지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마저도 제게 이득이 되는 사람만을 취할 뿐이었다.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이림이 유일했다.

그러나 도한은 그 애정이 비틀어져 오히려 이림의 숨통을 조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이림이 자신과 같은 소유욕을 보였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자신은 향기롭고 안락한 이림의 품에서 언제나 고요한 안식을 느꼈다. 언제나 이림이 주는 애정에 목마른 도한은 가끔 심술을 부리듯이 이림을 곤란하게 했다.

명함 따위, 그저 전화번호를 바꾸면 바꿔치기를 할 필요도 없었지만 이림이 자신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란 듯 바꿔치기를 했다.

난 너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 그것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막상 사실을 안 이림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자 뻔뻔하기 짝이 없는 도한조차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도한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이든 간에 이림이 섞인 화제라면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의미 없는 상념을 정리한 도한은 트레이닝 룸에 들어가기로 결정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끔 스트레스를 풀고자 회사에서 고용하는 용역 대신 뒤가 구린 일들을 직접 맡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불안정한 이림을 멀리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서 작은 인영이 보였다. 희민은 책을 읽으려 한 것인지 한 손에 시집을 들고 있었다.

밤늦게 조명을 받아 약간 채도가 낮아진 얼굴은 가련함을 품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혹하듯 그 자리에 멈춰 빤히 응시하는 희민을 냉정하게 무시한 도한은 그대로 지나쳤다. 그때, 희민이 다급히 붙잡았다.

“이 시간에 어디 가요?”

“내가 그것까지 보고해야 하나?”

안 그래도 잔뜩 예민해져 있는 도한은 평소의 여유로움을 잃어버리고 짜증을 냈다.

잠깐 주춤했던 희민은 용기를 냈다. 도한은 언제나 퇴근을 하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곧장 별채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잠깐만…….”

희민은 나긋한 말로 상대의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팔뚝을 잡으려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그도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도한은 그 손이 닿기도 전에 바로 손을 빼 버렸다. 모두가 숨죽인 고요한 밤에 차가운 파열음만이 울려 퍼졌다.

“정희민.”

“…….”

“왜 그러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피곤하니까 관둬.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못 알아들은 건 아니겠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성큼성큼 걸어 사라지는 도현을 바라보던 희민은 입술을 짓씹었다.

살면서 이런 굴욕을 당한 것은 처음이다. 솔직히 자신은 유혹에 능숙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해도 다들 먼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설사 뒷배경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누군가의 호감을 얻어 내는 것은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기에 이런 매몰찬 거절은 충격적이었다. 항상 남들 위에 오만하게 서 있던 희민이었기에, 만약 이 꼴을 누군가에게 보였다면 그대로 접시에 코를 박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을 차지했는데. 언론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쉽게 얻어진 자리라고 비난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제 남편이 정부를 두고 사는 것을 제정신으로 두고 보려면 엄청난 의지가 필요했다.

“언젠간 꼭 이 싸움에서 이기고 말겠어.”

희민의 눈이 의지로 불타올랐다.

한편 별채의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른 후, 둘 사이에는 전에 없던 찬바람이 불었다. 햇빛이 창을 뚫고 이림의 하얀 얼굴로 퍼져 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도한은 천천히 일어섰다. 재킷을 걸치며 준비하는 부산스런 움직임을 알면서도 날씬한 인영은 조용히 숨을 내쉬기만을 반복했다.

“다녀올게.”

“…….”

“…….”

끝내 말이 없는 이림을 한 번 보던 도한은 표정의 변화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자는 척했던 이림이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하……. 깨어 있던 건 당연히 알았겠지.”

그에게 이런 어설픈 거짓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이림은 또 도한을 어떤 낯으로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울함을 삼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무기력함에 몸을 이불 안으로 숨기고 웅크렸다.

술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잔뜩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혼자 배달 음식 하나 못 시켜 먹는 처지인데. 이림은 자조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슬쩍 이곳저곳을 살폈다. 도대체 어디에 카메라가 달렸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 지경까지 왔지만 지금도 현실감이 없었다.

나름 정붙이고 살았던 아늑한 집이 순식간에 지옥의 구렁텅이로 변해 버렸다.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눈을 굴렸다.

하지만 도저히 어디에 감춰 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목구멍이 따갑도록 물을 거칠게 들이켰다.

정성스럽게 봐 온 상을 매몰차게 외면한 이림은 밖으로 나왔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바깥부터 뒤져 보기로 했다.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슬리퍼를 신고 잔디를 밟은 이림은 고즈넉하고 아담한 마당을 한 번 둘러보기도 하고 지붕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찾으면 찾을수록 혼란에 빠졌다.

먼 숲속에서는 산새가 울고 벌레가 잡풀에 몸을 낮추고 있는 평화로운 한낮에, 오로지 이림만이 망연하게 이곳저곳을 쑤셨다.

“하아…….”

결국 삼십 분이 넘도록 하나도 찾지 못했다. 바지가 흙으로 뒤덮이도록 엎드려 낑낑대며 찾던 이림은 결국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나 무릎을 탈탈 털었다.

안 그래도 벌써 이틀째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데, 몸을 쓰니 머리가 빙빙 돌았다. 포기하고 비척비척 집 안으로 들어가려 몸을 움직이는데 저 멀리 마당 구석에 둔 화분이 눈에 스쳤다.

눈가를 가느스름하게 좁히고 다가가 쭈그려 앉자 그 정체가 조금 더 선명히 보였다. 물끄러미 화분을 내려다보던 이림이 손으로 잎을 톡 쳤다.

“싹 나왔다…….”

심은 사람이 아니면 어떤 종류의 것인지조차 모를 만큼 작고 연약한 싹이었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심은 후에 물을 준 것밖에는 없었지만 이 취미가 이곳에서 한 그 어떤 일보다 값지게 느껴졌다.

한 번 더 만지고 싶었지만 잎이 망가질까 봐 더 건들지 못하고 손을 거뒀다. 이림은 괜히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았다. 그런데 화분의 맞은편 덤불이 뭔가 이상했다.

“원래 이런 게 있었나?”

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덤불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철저하게 관리되는 이 마당에서 두텁게 얽히고설킨 커다란 덤불은 굉장히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아니, 사실은 무엇보다도 어떤 감이 뒤통수를 찔렀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주 찾는 화분이 정면으로 보이는. 마당에서 이림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을 찍는 것이라면 저 수상한 덤불이 제일 유력했다.

이림은 홀린 듯이 천천히 다가간 뒤에 덤불을 손으로 헤집었다. 손에 뻣뻣한 잎사귀가 상처를 내도, 덤불에 숨어 있던 새가 짜증을 부리며 포르르 날아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으로 덤불을 뒤적였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카메라를 발견했다.

“미친 새끼.”

알고 있었지만, 이걸 찾아다니긴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온몸에 피가 빠진 듯 차가워지고 식은땀이 났다.

작은 카메라를 손에 꽉 쥐고 화분으로 걸어갔다. 색색의 꽃이 핀 화분 옆에는 호미와 삽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중 삽을 들고 카메라를 옆에 내려놨다.

팍! 팍!

그리고 미친 듯이 후드려 팼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작은 모종삽으로 렌즈를 마구 때리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아…… 하.”

결국 깨져 버린 카메라를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 거실로 들어가 물을 따랐다. 다시 물을 마시면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의 눈으로 도한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고 어떻게 하면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사랑은 믿음과 이해를 전제로 꾸려 나가야 한다는 이림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는 아주 큰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도한에게서 한 발짝 멀어진 순간이었다.

다시 기운이 사라져 소파에 누웠다. 가물거리는 시야로 앳된 모습의 도한이 아른거렸다. 너무 다정해서 이상했던 선배.

그의 뒷모습을 몰래 훔쳐봤다가 막상 다가오면 줄행랑을 쳤던 이림. 아주 먼 과거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시절로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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