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3부 : 사랑의 증명법 =========================
도윤이 몸살기가 가라앉고 나서야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쉽지만 한국에서의 자리를 길게 비울 수가 없었다. 민혁은 잠시 대표며 회장이며 모두 때려치울까 했지만, 도윤에게 안겨줄 수많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머무르기로 했다.
“정말 퍼스트 클래스네.”
“도윤아, 내가 가장 좋은 것들만 준다고 했잖아.”
“비행시간은 왜 이렇게 길어.”
“같이 있고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도윤이 민혁의 집에 들어와 같이 살기로 했다. 도윤이 짐도 챙기고 집에도 알릴 겸 잠시 본가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두고도 민혁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도윤에게 몸만 오라고 했지만, 도윤은 그럴 수는 없다며 민혁을 달래 놓았다. 그 결과가 집으로 돌아가는 30시간짜리 퍼스트 클래스 비행이었다. 그것도 두 좌석이 붙은 채로.
“좌석은 편하니까 30시간 정도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30시간 동안 붙어있으니까 난 좋은데.”
“민혁아, 그래도 다음에는 비즈니스도 괜찮으니까 빨리 돌아가는 걸로 해줘.”
“도윤이 너랑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면 좋겠다 싶어서 그런 건데.”
“누가 보면 영영 헤어지는 줄 알겠다.”
“그런 소리 하지도 마.”
민혁이 정색을 하자 도윤이 살짝 웃었다. 도윤은 그런 민혁을 보았다. 민혁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이 도망갈까봐 겁을 내며 집착스러운 모습을 잠깐씩 보이곤 했다. 그런 것이 결코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집착이 의심이 되고 결국에는 사랑을 병들게 할 수도 있었다.
“민혁아.”
“응, 왜?”
“난 도망 안 가. 이제는.”
도윤이 민혁의 손을 잡고 진심을 담아 민혁을 쳐다본다. 네가 날 먼저 떠나가지 않는 이상은 난 너에게서 도망치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온 진심을 다해 한 자 한 자 똑똑히 말해주었다. 민혁은 경청하고 있었다. 마치 신의 음성을 듣는 사제처럼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귀를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고마워.”
“아니야, 나도 고마워. 그러니까 너무 겁내지 마.”
사랑을 가장 움츠러들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갈까 봐, 아플까 봐, 싫어할까 봐. 모든 행동을 다시 한번 더 숙고하게 한다. 그러다 하지 못하는 말이 생기고 하지 못하는 행동이 늘어나며 겁쟁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치 모든 기억이 난 뒤 지레 겁먹고 도망쳤던 민도윤처럼. 민도윤을 찾았을 때 그의 앞에서 그저 미안하다는 말 빼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지민혁처럼. 도윤은 민혁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깰 필요가 있었다.
“민혁아, 예전에 내가 가져간 너의 조각들... 기억나?”
“도윤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왜?”
“내 조각이 네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널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내가 너에게 끌렸다고 생각하면 그게 차라리 안 돌아왔으면 했어.”
민혁은 자신의 조각들을 잃어버렸던 순간을 생각했다. 그때는 돌려달라고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자신의 조각들이 도윤에게 있었기 때문에 도윤을 만난 순간 그 사람이 도윤인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조각이 도윤에게 있었기 때문에 도윤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굳이 돌려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대로 무언가가 빈 채로, 그러나 도윤을 만났을 때는 충만한 삶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운명이 빚어준 완벽한 계약 같아 보였다.
“네가 날 온전하게 하잖아.”
“...”
“네가 없는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들어줘.”
“민혁아...”
“그래서 내가 너에게 벗어날 수 없게 해 줘.”
그러면 민혁의 마음도 한결 편할 터였다. 도윤은 손을 뻗어 민혁의 귀밑머리를 넘겨주었다. 민혁은 자신을 쓰다듬는 도윤의 손에 한껏 기대어 도윤의 온기를 느꼈다. 도윤이 보기에는 마치 호랑이가 자신의 손안에서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처럼 느껴졌다. 도윤은 말을 천천히 이었다.
“민혁아, 내가 뭘 어떻게 하지 않아도 나랑 만났잖아.”
“너랑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
“원래 네 것이었던 조각들이 천천히 돌아가겠지. 네 곁으로.”
“그걸 막을 순 없어?”
“응. 아침도 커피 말고 다른 걸 먹기 시작했잖아.”
민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하게 구속되는 거라 생각했는데, 딜레마가 있었다. 자신의 조각을 돌려받고 싶지 않으면 도윤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 도윤과 붙어 지낸다면 자신은 점점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돌려받으며 온전해질 것이다. 도윤이 언젠가 강조하던 광공스러운 모습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 혼란스러움에 민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얼굴을 찌푸리는 민혁을 도윤이 조용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조각은 상관없어, 민혁아. 그게 돌아가든 말든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꼭 그런 식으로 사람이 온전해지는 건 아냐. 그리고...”
“그리고?”
“불안해하지 말고 날 믿어. 난 널 사랑해.”
도윤은 민혁의 손을 꼭 잡고 말을 이었다. 도윤의 손이 큰 민혁의 손을 힘주어 잡고서는 하나하나 또박또박 말한다. 민혁의 마음에 닿도록. 민혁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사랑도 이제는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도록.
“나는 널 사랑해, 민혁아.”
불안에 차 혼란스러워 보이던 민혁의 얼굴이 점점 차분히 가라앉았다. 도윤은 민혁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이제는 도망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나는 과거의 회귀로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믿음. 언젠가의 에로스가 말하길 사랑은 의심과 함께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랑은 서로에 대한 믿음 위에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도윤은 그런 믿음을 민혁에게 주고 싶었다.
“나도 널 사랑해, 도윤아.”
민혁이 도윤의 의중을 깨달은 듯 차분히 말한다. 도윤은 민혁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 지난 회귀를 통틀어 이번 회자의 민혁은 가장 강해 보였다. 아버지의 그늘에 갇혀있기는커녕 첫째 형은 귀양을 보냈고 아버지의 그룹마저 먹어치우고 있다. 직접 자신을 찾으러 온 것도 처음이었고 자신을 찾아내자마자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용기를 내어 말한 첫 민혁이었다. 도윤은 자신이 관리자로서 민혁을 잘 가르쳤다는 것을 알았다. 민혁은 성장했다. 도윤은 그런 민혁을 보면 믿음이 생겼다.
서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뒤 민혁이 도윤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도윤의 입술에 민혁의 입술이 내려앉았고, 곧이어 도윤의 입술을 살짝 깨물 듯 물어 입을 벌렸다. 민혁이 도윤의 입천장과 혀 아래쪽을 부드럽게 자극하다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는 도윤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 번 하고 떨어졌다. 둘은 사랑하고 있었다. 굳건해지는 믿음 위에서
…
한국에 돌아온 뒤 민혁은 자신이 정도현을 찾아 데려왔다며 김 팀장에게 무한한 신뢰를 얻게 되었다. 물론 부하 직원을 아끼는 마음이 아닌, 도윤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김 팀장은 당장 회장실의 테이블을 덮고서 민혁 앞에서 통곡했을 것이다. 새파란 조카 놈의 미래를 위해서. 그러나 김 팀장은 까맣게 모르고 그저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도윤은 그 날로 수행비서가 되었다. 사정을 아는 도운만이 그저 형이 불같은 사랑에 빠졌구나 싶어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도윤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도운이 모르는 수천 시간이 민혁과 도윤 사이에 있었다. 그것을 쉽게 깨져버릴 것들이 아니었다. 도윤은 그것을 모르는 도운에게는 그저 가벼운 웃음으로 안도감을 줄 뿐이었다.
평생 인생에 낙이란 건 없이 살아온 둘째가 파리와 런던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데이트를 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들어오는 정보는 민혁에 의해 제한되거나 왜곡되었으며, 뒷방늙은이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민혁이 회사를 집어삼키는 것을 보며 아버지는 내가 다음 차기를 잘 키웠다며 그저 만족하며 한율을 가끔 지켜보고 첫째를 타박하는 것이 전부였다.
수행비서는 24시간 7일 365일 내내 대표의 일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민혁의 다소 강압적인 주장이 힘을 얻어, 도윤은 민혁의 집에 상주하게 되었다는 발표가 내려왔다. 김 팀장은 조카 도현의 격무를 걱정하였으나, 곧이어 대략적인 월급을 보고서는 그냥 그곳에 뼈를 묻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며 지원해주었다. 물론 도윤이 할 밤일은 좀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오늘은 일 좀 하자니까! 지민혁!”
자신의 셔츠 단추를 슬금슬금 뒤에서 풀어내며 계속 볼에 키스하는 지민혁을 향해 도윤이 난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민혁은 능글맞게 웃으며 그저 아무 말 없이 도윤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낼 뿐이었다. 결국 도윤은 에라 모르겠다 고개를 저으며 민혁의 키스를 받아주며 말했다.
“빨리하자, 빨리.”
“누구 기준으로?”
그렇게 말하며 민혁은 도윤을 들어 침대로 향했다. 24시간 7일 365일 상주 수행비서의 밤은 오늘도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