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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79 3부 : 사랑의 증명법 (79/82)

00079 3부 : 사랑의 증명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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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디즈니랜드에 와야 하면 꼭 봐야 한다는 두 가지인 퍼레이드와 일루미네이션까지 둘만이서 보는 감각은 기묘했다. 놀이공원이라는 장소 특성상 사람이 많아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둘만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넓은 공원에서 퍼레이드를 보는 것은 신기할 정도였다. 심지어 퍼레이드에서는 퍼레이드 카를 캐스트들과 함께 타보기도 했다. 이제 둘은 불꽃놀이와 조명의 절묘한 조화라는 일루미네이션 쇼가 시작한다는 시간을 기다리며 두 손을 꼭 잡으며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있을 때 오고 싶은 마음은 없어, 도윤아?”

민혁은 도윤에게 다정하게 묻는다. 사람들이 있는 분위기를 원한다면 적당히 날을 골라 다시 한번 올참이었다. 민혁은 많은 사람과 함께 부대끼는 것에 익숙지도 않고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도윤이 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괜찮아. 난 디즈니 좋아하거든.”

“특히 뭐가 좋았는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원한 소리가 뻗어 나가며 라이온킹 주제가가 나온다. 미키마우스와 티몬의 표정이 보였다. 시선을 빼앗긴 도윤이 그쪽을 홀린 듯 쳐다본다. 민혁 역시 도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사랑과 가족이 빠지지 않는 디즈니답게 사자의 이야기에도 사랑이 나온다. 오늘 밤에 어울리는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이 나온다. 민혁은 그런 도윤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춘다. 도윤이 그제야 정신이 살짝 돌아온 듯 하다. 눈만은 떼지 않고 디즈니의 성을 보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인어공주.”

“응?”

“인어공주를 제일 좋아해.”

민혁은 디즈니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떠올렸다. 안데르센이 쓴 원작과는 달랐지 아마. 아틀란티카 왕국에 막내 공주 에리얼은 늘 육지를 동경한다. 어느 날, 지상의 왕자 에릭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폭풍우로 난파된 배에서 에릭을 구한 에리얼은, 우르술라와의 계약을 통해 결국 다리와 목소리를 바꾸고 만다.

“거기서 왕자가 우르술라와 에리얼을 혼동했지.”

“그랬었어. 마치 너처럼.”

“도운이 우르술라는 아니잖아.”

“말 돌리지 말고.”

일루미네이션에서 마침 기막히게도 인어공주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다. 디즈니랜드에게 야단맞는 느낌이 든 민혁이 미안하다고 다시 한번 말하며 도윤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둘은 손을 꼭 잡고 물과 불, 그리고 불꽃과 조명의 환상으로 가득 찬 디즈니 일루미네이션의 시간을 보냈다.

일루미네이션이 끝나자 민혁은 도윤을 데리고 신데렐라의 성 위로 올라갔다. 일루미네이션 때 쓴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남아 있었지만, 밤중에 아름다운 조명을 받은 성 위로 올라가는 것은 무척이나 낭만적인 일이었다. 도윤이 웃으며 둘 만을 위해 환하게 이곳저곳을 밝힌 디즈니랜드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유성우가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동시에 미래의 세계를 그린 디스커버리 랜드 쪽에서 빨갛고 하얀 불빛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메인스트리트에서는 파랗고 하얀 불꽃이, 프론티어랜드 쪽에서는 노랗고 하얀 불꽃이 터졌다. 디즈니랜드를 가로질러 펑펑 터지는 가지각색의 불꽃을 도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민혁은 도윤을 자신을 바라보도록 돌려세웠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다음 다이아몬드 반지는 손가락에서 돌아갈 정도로 큰 걸 줄 거라서.”

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짤랑거리는 무언가를 꺼냈다. 언젠가 도윤이 골라주었던 노랗고 빨간 커프스 핀과 같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민혁은 뒤를 돈 도윤에게 목걸이를 걸어준 뒤, 자신이 매듭지은 부분에 입을 맞추었다. 민혁은 도윤을 뒤에서 안고 속삭였다.

“사랑해, 도윤아.”

“나도, 민혁아.”

디즈니랜드에서 돌아온 뒤 도윤은 그야말로 끙끙 몸살로 앓아누웠다. 5일 동안의 미친 일정과 ‘허리가 부서질 정도로’ 뒹군 후유증이었다. 굳이 무엇이 도윤의 몸살에 이바지했나 그 기여도를 따지면, 아마 도윤은 후자라고 할 테지만. 민혁과 밤을 보내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울면서 제정신이 아닐 때 즈음 끝나는 통에 다음날이면 온몸이 얼얼하게 아팠다. 그런 상태로 또 데이트를 나갔으니. 몸이 무리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광공으로 단련된 민혁의 경우야 다르겠지만.

“도윤아, 괜찮아?”

민혁이 야채죽이 놓인 상을 들고 도윤이 누워있는 침대 위로 다가왔다. 열이 올라 따끈한 도윤의 머리를 짚는다. 도윤이를 다시 보게 된 기쁨에 5일 동안 너무 신나게 놀았나 보다. 민혁은 도윤이에게 미안해졌다. 그룹을 이끌기 위해서는 시간이 없다 보니, 도윤과 이렇게 오래 해외에서 데이트를 즐길 시간이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너무 신나버렸다.

“응, 어제보다는 좀 낫네.”

그저께 디즈니랜드에서 돌아온 직후 도윤은 대충 씻고서는 잠에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바깥에서 돌아다니라 체력적으로 고갈되었을 거라 예상해 민혁도 굳이 깨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밤중에 기묘한 기분에 벌떡 일어나 도윤의 머리를 짚었을 때는 열이 오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정말 난장판이었지.’

흔들어도 일어나지 못하는 도윤을 보며 호텔 로비에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호텔 측에서 긴급히 보내준 의사에게 도윤을 보여주자 아마 무리한 것 같다면서 푹 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수액과 주사를 놓아준 뒤 의사가 떠나고 나서 민혁은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도윤이 깰 동안 계속 옆을 지키며 간호했다. 도윤은 그 밤 꼬박 잠을 잤다.

“자다 중간에 한 번 일어나서 물 달라고 했던 건 기억 나?”

“민혁아, 나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열이 올라서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보다.”

“그런가?”

“힘든지 내가 보고 있어야 했는데. 미안해.”

“내가 힘든 건 내가 알지. 내가 먼저 내 몸 상태 알고 말할걸.”

“디즈니랜드로 살살 구슬리는 게 아니었어.”

“그럼 예약한 디즈니랜드는 어떻게 되는 건데?”

“취소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디즈니랜드 통째로 빌렸던데. 그걸 어떻게 취소해.”

“그냥 날리는 거지, 뭐.”

“봐봐, 이럴 줄 알고 가자고 한 거야.”

“하지만 난 네가 더 소중한걸.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야.”

이제 J그룹마저 손에 들어온 민혁은 도윤에게 충분히 쓸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도윤에게는 아니었다. 민혁이 말할 리도 없지만, 도윤도 묻지 않았다. 금액을 듣는 순간 어쩐지 좀 무서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다지만 돈은 가끔 사랑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지표로 사용할 수 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민혁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도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윤이 이불 속에서 꾸물거릴 때 디즈니랜드고 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이 꾸물댈걸. 도윤이 아픈 것을 보니 심장이 떨어진다. 건강이 가장 소중한 법이다. 도윤의 건강이라면 더 소중했다.

“네 건강이잖아. 이건 양보 안 할 거야, 민도윤.”

“하긴, 양보한다고 했으면 내가 서운해할 일이겠다.”

“그때는 나한테 화내줘.”

“정작 너무 큰 돈이면 내가 화 못 낼걸.”

“그럼 내가 화낼 일을 안 만들면 되겠네.”

민혁이 결론을 잘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민혁은 경애와 사랑의 의미를 가득 담아 도윤의 따끈한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입을 떼고는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열에 속상한 마음으로 쳐다보자 도윤이 미안함에 미소를 배시시 지었다.

“앞으로 조심할게.”

“알겠어.”

민혁은 도윤을 쳐다보다 깨달았다. 아픈 도윤을 보다 생각난 것이었다. 도윤을 찾지 못했을 때, 도윤이 자신을 떠났을 때 늘 자신을 지배하던 극심한 두통과 불면증이 사라졌다는 것을. 온 세상에서 도윤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볼 때면 늘 머리가 아파 왔다.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존재 자체가 도윤의 흔적이라는 것이었다. 그저 숨을 쉬듯 도윤 생각이 날 수밖에 없었고 그 뒤에는 머리가 흔들릴 정도의 두통이 찾아왔다. 밤에는 편히 잠들 수 없었다. 눕기만 하면 어둠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와 끊임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너무나 불길한 것들로.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라곤 없었다. 도윤과 눈물이 쏟아지던 재회를 한 이후로는. 그 때 흘린 눈물에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간 듯 깨끗하게 사라졌다. 늘 머리 한쪽의 말초적인 고통으로 찾아오던 두통도. 밤중에 자신을 악몽으로 인해 잠 못 들게 하던 나날도. 모두가 도윤이 준 구원이었다. 민혁은 자신을 구원해 준 도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도윤을 다시 만난 이후, 세상이 다시 재구축되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민혁은 도윤을 끌어당겨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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