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3부 : 사랑의 증명법 =========================
도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이미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깔끔하게 뒤처리도 한 직후였다. 도윤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곳저곳 쑤시지 않은 데가 없었다. 목이 말라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새 민혁이 다가와 시원한 물을 건넸다. 물이 들어가자 마른 목이 물을 반긴다.
“지금 몇 시야...?”
“오후 5시가 넘었네.”
“그렇게 오래 잤어?”
“응.”
민혁이 도윤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도윤은 갑자기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기절하듯이 잤는데! 도윤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기절하기 전 광경을 떠올렸다. 에펠탑의 낭만으로 시작한 키스가 마지막에는 존댓말이 오가는 섹스가 되어 있었다. 도윤은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잘 만하네.”
“그렇지.”
“미안하다고 해줘.”
“미안해, 도윤아.”
민혁은 도윤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도윤은 또다시 약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도윤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베고 있던 베개를 던지고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민혁은 이불을 뒤집어 쓴 도윤에게 내어줄 달콤한 미끼를 준비했다.
“J그룹에서는 해외의 박물관 하나를 정해 늘 후원하고 있어.”
“하나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어쨌건 그 중 하나가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이야.”
도윤은 눈을 감았다. 이건 졌다. 도윤이 살짝 고개를 들자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만족스럽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언젠가의 민혁이 읊은 아리아나 그란데의 가사는 참으로 적절한 가사였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할 만큼 큰돈이 없는 것이란 걸. 도윤이 한숨을 쉬며 민혁을 바라보자 민혁이 다정하게 말한다.
“나랑 오랑주리 미술관 가지 않을래, 도윤아?”
내 작품은 일반 시민에게 공개해 달라던 조건을 수련을 그린 모네가 알면 땅을 칠 만한 지민혁의 소신이었다. 지민혁은 막대한 양의 기부금을 약속했다. 단, 매우 급하게 요청한 것을 생각해, 미술관 문을 닫고 나서 별도의 프라이빗 관람을 요구했다. 망설일 때마다 막대한 양의 기부금을 억 단위로 가차 없이 깎아버리는 지민혁의 태도에 미술관은 결국 손을 들었다. 한두 시간 미술관의 문을 열고 억대의 기부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어느 미술관이나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도윤이 알게 하지는 않았지만.
“알겠어.”
도윤이 입을 쭉 내밀면서도 좋아하는 기색은 숨기지 못해 얼굴을 붉혔다. 민혁은 그런 미소 한 줌에 모든 것들이 다 하찮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란 그런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후 6시 30분. 둥근 방 안,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도윤과 민혁은 서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모네의 그림이 그 둘을 반겨주고 있었다. 푸른빛과 보랏빛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물결과 수양 버드나무가 온 방 안에 물결치고 있었다. 흰 방 안에서 마치 영화의 한 주인공이 된 듯한,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에 와 있는 듯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도윤은 저도 모르게 민혁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도윤이 볼을 붉히며 말한다. 이 한마디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돈을 들이붓든, 얼마나 많은 힘이 들었든 간에. 도윤이 그저 고맙다고 한마디 하는 것이 민혁에게는 큰 기쁨이었으니까. 민혁은 도윤을 에스코트하며 다음 수련의 방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 보여줄 것이 많았다.
하염없이 이것저것을 보다가 오랑주리를 나와보니 벌써 파리의 하늘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뛸르히 가든에서 센 강을 끼고 10분 정도 민혁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봄이 다가오는 파리의 날씨는 매우 선선하고 좋았다. 센 강을 끼고 있는 노점과 사람들의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사람을 들뜨게 한다. 민혁은 자신의 손을 이끌고 천천히 자신의 발에 맞춰 걸었다. 노란 가로등이 하나 둘씩 불을 밝히고 저마다 걸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벌써 저녁이야, 민혁아.”
“배는 안 고파?”
“응.”
“그럼 나랑 한 군데 더 다녀오고 식당으로 가자.”
노을이 반쯤 져 가는 하늘 위로 노란 불빛이 병정처럼 늘어서 있었다. 마치 궁전에서 가로등을 떼 와 다리 위에 하나하나 박아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다리가 거기 있었다.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다리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어느 화가의 그림처럼 완벽한 순간이었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야.”
민혁이 너무 예쁜 다리라 건너기를 주저하고 있는 도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도윤은 도윤을 따라갔다. 아름다운 날씨, 그리고 지민혁이 있는 완벽한 풍경에 도윤의 마음이 뜨거운 물에 빠진 아이스크림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내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채 다리 한가운데서 민혁은 도윤을 잡아당겼다. 노란 불빛과 함께 민혁이 다가온다. 눈을 감았다. 민혁의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이 너무나 평화로웠다.
…
야닉 알레노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미슐랭 3스타 파빌리옹 레스토랑의 가장 좋은 자리에 민혁과 도윤이 앉았다. 튈르히 공원과 샹젤리제 거리 사이의 파리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였다. 민혁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주문을 하는 동안 도윤은 그런 민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혁이 주문을 마치고 자신을 쳐다보는 도윤을 바라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도윤은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었다. 도윤이 웃자 민혁의 얼굴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웨이터가 와서 와인을 따라주자 둘은 천천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그래, 민도윤.”
“그냥, 오늘 하루가 너무 좋아서.”
“오늘 하루만 좋았어?”
“아니, 민혁이 네가 나를 찾은 이후로 빠짐없이 좋았어.”
“어떤 점이 가장 좋았는데?”
“가장 좋으란 것 한 가지만 뽑기가 어려운데.”
“그럼 좋은 것부터 말해봐, 도윤아.”
“그냥 좋은 것들?”
“응.”
“네가 나에게 차려준 아침 식사.”
“얼마나 좋았는데?”
“테이트 모던에서 먹은 셰프의 식사보다 좋았어.”
“그 셰프는 잘라야겠네.”
“그런 뜻 아닌 거 알지? 맛으로 치면 그게 훨씬 맛있었어.”
“알겠어. 걱정하지마. 안 잘라.”
“테이트 모던에서의 식사도 좋았어. 바로 앞에 밀레니엄 브릿지도 보였고. 나가니까 셰익스피어 글로브도 볼 수 있었잖아.”
“풍경이 좋았구나. 역시 요리는 내가 나은 걸로 하자.”
“그러던가.”
도윤은 못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하루 잔 것도 좋았어. 따뜻한 햄버거를 못 먹고 자 버린 건 아쉽지만.”
“식은 햄버거는 먹었잖아.”
“그렇긴 한데 식으니까 맛은 없었어.”
“나중에 FIVE GUYS 햄버거는 미국에 가서 먹어보자. 매장도 사 줄 수 있어.”
“매장까지는...그건 괜찮아.”
“그럼 또 뭐가 좋았는데?”
“그렇게 좋았단 말이 듣고 싶은거야?”
“정확히는 네가 좋았단 말이 듣고 싶은거지.”
모든 건 네 미소, 네 행복 하나 보자고 시작한 것들이니까. 민혁이 그렇게 말하며 마주보고 앉은 도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에 도윤이 밝게 웃었다. 언젠가 가장 최초의 도윤이 최초의 민혁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밝게 웃었다.
“파리에서는 에펠탑에서 식사한 것도 좋았지만,”
“거기 자리 잡느라 꽤나 힘들었어.”
“거기서 일하는 모습이 훨씬 더 멋있었던 것 같아.”
“일하는 모습이?”
민혁은 의외라는 듯 도윤을 바라보았다. 도윤은 민혁이 언제나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 눈에도 유능하고 멋있어 보이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에펠탑 앞에서 세 그룹의 연합 쇼케이스를 준비하는 모습은 그런 느낌이 있었다. 세 회사의 실무진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지시를 내리는 모습은 대표님으로서의 민혁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너에게 늘 열중하고 있는데, 연인으로서의 나는 아직 노력해야 하나?”
“더 노력하도록 해!”
도윤이 장난스럽게 쏘아붙이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비눗방울을 크게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남자가 보였다. 도윤은 자기도 모르게 비눗방울을 크게 만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재미있겠다...”
그리고 민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