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3부 : 사랑의 증명법 =========================
결국 민혁이 주장한 대로 파리 에펠탑을 민혁과 관람하게 된 도윤이었다. 민혁의 핸드폰으로 사진도 잔뜩 찍고 난 뒤부터는 엄청난 스케줄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법한 한류 아이돌, 그리고 유명한 핸드폰 회사, 민혁의 회사에서 출시한 어플리케이션의 삼위일체로 구성된 엄청난 행사였다. 그 행사의 최전선에서 깔끔하게 현장을 지휘하는 민혁의 모습은 멋있었다. 자신이 준 능력이라지만, 어쩔 수 없이 콩깍지가 씌는 법이다.
“벌써 7시네요.”
“그렇네요, 민 수행비서님.”
쇼케이스 행사는 오후 2시에 시작해 7시에 끝이 났다. 사람들이 많은 앞에서는 혹시나 몰라 존댓말을 쓰자며 도윤이 졸라대 어쩔 수 없이 상호 존댓말을 썼다. 하지만 민혁은 존댓말을 할 때마다 민 수행비서님이라고 꼬박꼬박 붙여 말하는 바람에 듣는 도윤만 민망해졌다.
“저녁은 어떻게 하실 거에요?”
“애인이랑 먹을까요, 수행비서님과 함께할까요?”
이쯤 되면 슬슬 그만 놀리지. 살짝 약이 오른 도윤이 민혁을 살짝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대표님, 함께 드시죠.”
“수행비서님과 함께 들게 되었네요.”
민혁은 웃으며 도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윤은 아직 에펠탑 주위에 사람이 많다며 거절했지만, 민혁은 막무가내였다. 도윤의 손을 잡고 에펠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도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왜 에펠탑으로 가요?”
“수행비서님께 좋은 식사를 대접해드리려고요.”
파리 야경 보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민혁은 도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수많은 사람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에펠탑 2층에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도윤은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런던에서부터 자신에게 정말 많은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민혁아.”
“응, 왜?”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도윤은 걱정스러웠다. 민혁이 처음부터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물론 에펠탑 레스토랑을 예약하거나 박물관을 빌리거나 하는 돈이 민혁에게는 그다지 큰돈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에게 처음부터 너무 모든 것을 쏟다가, 언젠가는 그게 고갈되어 버릴까 도윤은 무서웠다.
“이건 나한테 애쓰는 게 아니야, 도윤아.”
“그게 아니라...너무 처음부터 이러면...”
“응, 듣고 있어.”
“너무 처음부터 이러면 나중에 무감각해질까 봐...”
“그럼 내 잘못으로 해 둬.”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에게 세상의 찬란한 것들만 보여주고 싶은 건 내 마음이야. 늘 새로운 걸 보여줄게.”
“언젠가 너도 무감각해질까 봐...”
너도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기계적으로 하고, 나도 기계적으로 받아들일까 봐 덜컥 겁이 나. 도윤은 조용히 민혁의 손을 잡았다. 에펠탑 2층이라 제법 거센 바람이 불었다. 하나둘씩 도시의 조명이 켜지는 그 속에서 민혁이 도윤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네가 불안하면, 겁이 나면 몇 번이고 말해줄게.”
“...”
“도윤아, 사랑해.”
“...”
“그리고 불안하면 몇 번이나 확인시켜줄게. 불안하지 않을 때까지.”
“....”
“이렇게 온 힘을 다해서.”
민혁은 도윤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너무나 힘든 사랑을 해 왔기에 갑자기 닥친 행복에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마치 장애물을 만나 그대로 멈춰버린 말처럼. 민혁은 이럴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이를 증명하는 것. 도윤은 수없이 겁먹을 테고, 자신은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어야 했다. 도윤은 눈물이 약간 어린 눈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민혁아.”
아마도 민혁의 생각은 맞는 것 같았다. 사랑의 상처는 사랑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말이 있다. 사랑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말뜻에 대해서 몰랐다. 사랑이 남기고 간 상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여행을 가거나, 혹은 그저 푹 쉬는 것만으로도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가장 손쉽고 강력한 방법은 더 큰 사랑으로 그 자리 위를 덮는 것이었다.
도윤을 에스코트해 들어간 식당에서 민혁과 도윤은 사이요궁이 보이는 창가 자리로 배정을 받았다. 조명으로 빛을 받아 황금의 궁전처럼 보이는 사이요궁을 보며 두 사람은 저녁을 들었다. 저녁은 아주 맛있었다.
…
밥을 먹고 도착한 곳은 에펠탑 근처의 어느 한 호텔이었다. 이 층에 있는 모든 스위트를 다 빌렸으니 아마 오늘 이 층을 돌아다닐 사람은 없을 거라는 민혁의 말에 도윤은 입을 벌렸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민혁의 스케일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도윤은 이 방값의 1/10도 안 될 조금 전 먹은 저녁에서 보인 우울함이 부끄러워졌다.
도윤은 바깥의 발코니로 향했다. 발코니에서 빛나는 에펠탑이 바로 보였다. 에펠탑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에펠탑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밤 정각마다 반짝거리는 에펠탑의 모습이었다. 도윤은 소리를 질러 민혁을 불렀다. 민혁은 갑자기 도윤이 소리를 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왔다. 거기에는 반짝이는 에펠탑이 있었다. 민혁은 조용히 에펠탑을 쳐다보았다. 도윤은 신나 보였다.
10분 정도의 점등 쇼가 끝나자 민혁은 도윤의 어깨를 잡았다. 난간에 기대고 선 민혁은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도윤아, 재미있었어?”
“응. 예쁘네.”
“내가 널 만난 날, 프랑스로 가는 꿈을 꿨다고 했지.”
“그렇지.”
“넌 아마 그게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지난 과거라고 했었고.”
도윤은 이제 에펠에서 눈을 떼고 조용히 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말이 생각났다. 민혁과 한 번 지난날의 이야기를 해 보라고. 민혁은 먼 옛날을 회상하듯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꿈을 꾸었을 때 가장 강렬한 부분은 바로 프랑스 파리 부분이야.”
“네가 프랑스와 연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어.”
“어떻게?”
“불어를 조금 쓸 줄 알았잖아.”
“아, 광공이 되려고 열심히 배웠을 때?”
“응. 그때 영어는 못하는 것 같으면서도 프랑스어는 잘 했잖아.”
“그런가 봐. 아버지가 날 여기로 억지로 보냈거든.”
“아버지가?”
“다시 돌아가려고 파리에 아버지가 마련해 준 집 밖을 경호원을 따돌려서 어떻게 뚫고 나왔거든. 너에게 다시 돌아가려고.”
“응.”
“그런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더라고. 네가 죽었다고.”
“...”
“당신 손으로 직접 처리했으니 시체도 볼 생각 말라고 하셨어.”
“그래서...”
“난 그 말을 믿고 달려가던 길거리에 주저앉아서 통곡했어. 그리고 얼굴을 드니까 에펠탑이 보이더라. 어떻게 왔는지 몰랐는데 달려서 여기 샹드마르까지 오게 된 거야.”
“원래 집은 어디였는데?”
“모르겠어. 하지만 꽤 먼 거리였다고 생각해. 어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파리 집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 봤는데...거긴 가 보지 않았어.”
“왜?”
“예전에는 갈 일이 없어서. 지금 다시 가 보라고 해도 안 갈 거야. 거기 가면 내가 꿈에서 본 장소일 것 같아. 그럼 보기 싫지.”
민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담담히 그날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도윤은 민혁이 자신을 먼저 떠났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이 민혁의 아버지가 말해 준 사실이었으니까. 민혁의 목소리까지 녹음해 들려주느라 그것을 꼼짝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민혁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목소리는 짜깁기 된 것이나 조작된 것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때는 너무 정신이 몰려 있어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결국, 이별을 납득하지 못한 도윤이 민혁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려고 했었다. 비행기 탑승을 눈앞에 두고 도윤은 정신을 잃고 그 뒤는 기억나지 않았다.
“샹드마르 광장에서 잔디밭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경호원이 날 데리러 왔어. 난 그저 힘없이 끌려갔지. 네가 죽었다는 소식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거든.”
“민혁아...”
“그저 의미도 없고, 아무런 생동감도 들지 않고. 현실 같지는 않았고 아버지의 말이 거짓이라고도 생각했어. 그렇지만 부자간에 왜, 아는 느낌 있잖아. 정말 하셨다는 거.”
“...”
“경호원이 일으켰을 때 에펠탑이 반짝거렸는데, 그게 꼭 네가 반짝이는 것 같았어.”
“보기 싫어? 그럼 더 이상 보지 말까?”
“아니, 그래서 좋다는 거야. 네가 옆에 있는데 에펠탑이 반짝거리니까, 지난 날의 일들이 다 거짓말 같아서. 네가 실제로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도윤을 으스러지게 안았다. 점등 쇼가 끝난 에펠탑이 두 연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가장 사랑을 고백하기에 낭만적인 장소라는 에펠탑을 보며, 민혁과 도윤은 서로의 어깨에 무너져 내려 그저 기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