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4 3부 : 사랑의 증명법 =========================
다음 날 파리로 출국하기 위해 비즈니스석을 예약한 민혁은 도윤에게 서울로 돌아갈 때는 꼭 일등석으로 가자면서 쩔쩔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런던에서 파리로 가는 직항 비행기에는 일등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윤은 저가항공사의 맨 뒷자리에 타고 가도 상관없었지만 그런 민혁의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맘에 걸려?”
“아무리 급해도 전용기를 가져올 걸 그랬나 봐.”
“전용기?”
“이렇게 사람 많은 데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별로 맘에 안들어서.”
네가 서 있는 것도 싫고. 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도윤을 껴안아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시도 때도 없이 입맞춤하는 통해 도윤은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민혁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많은 사람을 뚫고 비즈니스석에 타니 서로가 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 구조 탓에 민혁과 도윤은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거 하나는 좋네.”
“내 전용기에서도 이건 할 수 있어.”
늘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던 민혁도 도윤 앞에서만큼은 투덜댄다. 도윤은 그런 민혁이 귀여워 그저 웃었다. 민혁은 자신이 도윤이 가르쳐 준 광공스러운 행동에서 벗어났다 싶은지 아차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지만. 민혁은 성급하게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파리 샹드마르 잔디밭 광장이 있어. 그 광장이 에펠탑 바로 앞에 있는 곳이거든. 거기서 부스를 설치할 거야.”
“뭘 하는데?”
“쇼케이스. 새로 개발한 앱이랑 다른 회사랑 협력해서 핸드폰까지 합동 쇼케이스를 열 거야.”
“대단해, 지민혁.”
“무엇보다 부스 설치까지 시간을 잘 맞춰가면 좋지.”
“뭐가 좋은데?”
“보통 에펠탑 근처에는 사람들이 많거든. 사진을 찍거나 감상할 때 사람들이 늘 많아서 에펠탑을 보려면 시야에 가리는 경우가 많아. 사진도 찍을 때 다른 사람이 나오곤 하고.”
“하지만?”
“임시부스를 설치하는 동안에는 위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통행을 잠깐 멈추곤 해. 그때 잠깐 우리가 들어가서 사진을 찍거나...”
“민혁아, 그럼 지금 에펠탑 쇼케이스 행사 중에 우리가 슬쩍 데이트를 하자는 거야?”
“그...그렇지?”
“아니 왜?”
급작스럽게 변한 도윤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민혁이었다. 도윤은 잔소리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기업 일인데 사사로운 감정을 넣으면 안 된다, 우리 좋자고 다른 사람을 방해하면 쓰나 등등. 갑자기 연인에서 수행비서가 되어버린 도윤을 보며 당황해 입을 다물고 만 것은 민혁 쪽이었다. 민혁이 입을 다물고 도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아무 표정이 없어 보이겠지만, 오랜 교육과 사랑의 시간을 거친 도윤은 저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알겠어. 너무 시무룩 해하지 말고.”
“말고?”
“10분 정도쯤이면 뭐...”
도윤이 슬쩍 허락하자 민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부대로 너무 길게는 끌지 않을게요, 민 수행비서님.”
“도운이랑 헷갈리지나 말아 주라.”
“이젠 절대 안 헷갈려.”
민혁이 그렇게 말했다. 부탁한 화이트 샴페인이 도착하자 두 사람은 잔을 살짝 부딪치며 샴페인을 조금 마셨다. 목 뒤로 넘어가는 샴페인이 시원했다.
…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픽업을 위해 이미 T그룹 쪽에서 사람이 나와 있었다. 도윤도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어제 민혁의 말을 듣고서 수행비서로 가리라 마음먹었기에 공항에 가기 전 백화점에 들러 급하게 정장을 샀다. 민혁이 한국에서 맞춰 준 것 만큼 편하지는 않았지만 몸에 잘 맞는 옷이었다.
부드러운 프랑스어가 들리고, 민혁은 도윤에게 손짓을 했다. 아쉽게도 영어만 할 줄 아는 도윤이라 민혁이 전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민혁은 도윤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도윤은 민혁의 웃음에 순간 넋이 나갔다. 민혁이 저렇게 환하게 소년처럼 웃는 모습은 참으로 낯설고 그리운 것이었기에. 그리고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도윤아?”
“어, 으응.”
“샹드마르 광장까지 제 시간에 맞춰서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그거 잘 됐네.”
“도윤아, 갑자기 말을 왜 더듬어. 무슨 일 있었어?”
민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인종차별로 유명한 프랑스라 혹시나 짧은 시간에 도윤이 해를 입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은 키도 덩치도 워낙 인간적으로 큰지라 그럴 일을 당하지 않았지만, 도윤이라면 다를 수 있으니까. 민혁이 주위를 둘러보려는데 도윤의 귀 끝이 눈에 들어왔다. 귀끝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오랜만에 활짝 웃길래...”
“내가?”
“응, 민혁아. 그냥 그게 너무 보기 좋아서.”
그래서 잠시 그랬나봐. 도윤이 어색하게 웃자 민혁은 그런 도윤이 사랑스러웠다. 결국 차에 타자마자 민혁은 도윤의 입에 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원래라면 혼자 오게 될 줄 알았던 파리 쇼케이스장이었다. 이 쇼케이스를 위해 할 일도 어려움도 많았지만, 도윤이랑 오게 되니 그저 모든 것이 어렵지 않게 잘 되었다는 기분이 드는 민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