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3 3부 : 사랑의 증명법 =========================
테이트 모던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온 뒤에 에드워드의 집에 가 보니 에드워드의 고용인들이 벌써 도윤의 짐을 다 싸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은 민혁의 런던 집으로 옮겨갈 줄은 알았지만, 에드워드가 벌써 짐까지 다 싸 놓을 정도였던 것은 몰랐기에 갑작스럽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도윤에게 오히려 에드워드가 웃으며 먼저 말했다.
“이제 가야죠, 도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어요.”
“여기에 오래 머물면 파트너가 안 좋아해요.”
에드워드는 그렇게 말하며 민혁을 보았다. 민혁 역시 에드워드가 베풀어 준 순수한 호의를 잊지 않았다. 도윤과 함께 테이트 모던에서 밥을 먹으며 두 사람이 했던 이야기 중에는 에드워드와 이브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에드워드.”
“민혁. 이야기가 잘 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다 에드워드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녜요. 난 둘이 잘 된 걸 보니까 참 좋네요.”
“혹시 에드워드, 앞으로 어떤 일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꼭...”
“그런 걸 바란 건 아니에요.”
에드워드가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영국인답지 않게 성급하게 말꼬리를 자르며 들어올 정도라면 아주 진심이라는 뜻이다. 민혁은 자신이 에드워드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 까봐 순간 걱정하는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보았으나 다행히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풀어주세요. 내가 도윤에게 그랬듯.”
“에드워드...”
“그리고 나와 이브가 잘 되기를 빌어줘요. 그거면 괜찮아요.”
에드워드의 진심에 도윤이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 또한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하나만 더 욕심부리면 한율을 미워하진 말아요.”
“...”
“한율은 좀 덜 자란 어린애 같은 사람이죠. 아예 용서하란 말은 못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한율 덕분에 두 사람이 온전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민혁의 말에 에드워드가 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혁은 정중히 악수를 받아들였다. 에드워드의 집에서 도윤의 짐을 들고 나오면서 그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도윤과 민혁은 고개를 숙였다. 차가 출발하며 도윤은 슬쩍 뒤를 보았다. 에드워드가 동네 주민 누군가와 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
도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 사람은 언젠가 에드워드가 보여주었던 이브와 닮은 것 같았다. 아니, 이브인가. 도윤은 귓속말로 민혁에게 에드워드가 이브와 만난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에드워드의 행복을 동시에 빌고 있었다.
…
저녁이 되어 6시가 되자 민혁은 도윤과 함께 FIVE GUYS의 햄버거를 샀다. 도윤은 햄버거를 사는 민혁의 행보에 의아해했지만 곧이어 도착한 장소에서 아연실색했다. 도착한 곳은 런던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저녁 6시면 문을 닫는 이곳에 민혁이 온 이유는 확실했다.
“설마 그거 기억하는 거야?”
“당연하지.”
언젠가 자신이 말했던 런던 자연사박물관이나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하룻밤 자 보고 싶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런던 자연사박물관 공룡전시실에는 커다란 공룡뼈가 하늘 위에 떠 있고, 뉴욕 자연사 박물관 해양전시실에는 실제 크기 모형의 흰긴수염고래가 푸른 등 밑에서 헤엄치듯 떠다니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박물관, 그런 전시물 밑에서 한 번 전세내서 자 보고 싶기야 했지. 하지만 말로만 하던 걸 진짜로 할 수 있는지도 몰랐고 해 줄 수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이 없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에 도윤과 민혁의 발소리만 울려 퍼진다. 나이트 가드도 보이지 않는 이 적막한 공간에 둘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윤의 가슴이 괜시리 뛰었다. 민혁도 마찬가지인지 마주 잡은 손을 더 꽉 잡았다.
메인홀로 가 보자 커다란 공룡 뼈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룡뼈 바로 아래에 희고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주위에는 저마다 다양한 크기의 전등이 빛나고 있었다. 전시물마다 아직 꺼지지 않은 조명, 그리고 오래된 석조건물, 위쪽으로 나 있는 창으로 보이는 하늘, 흰 침대와 그런 침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조명.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설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윤은 참지 못하고 민혁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이 어마어마한 것들을 다 해내는 능력도 좋았고 그가 가진 힘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어느 날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해 주었다는 그 사실 자체였다.
흰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둘은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웠다. 지민혁이 팔을 뻗어 도윤을 끌어당겼다. 도윤이 민혁의 팔 안으로 온전히 쏙 들어왔다. 민혁은 도윤을 끌어안았다. 이불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쳐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과 코튼 냄새, 그리고 박물관의 정경, 눈을 뜨면 보이는 서로의 얼굴에 둘은 키득거리며 껴안았다. 너무나 행복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도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하늘이 천장에 보였다. 어두컴컴한 밤 하늘 아래 박물관의 조명만이 빛나고 있었다. 도윤이 졸린 눈을 꿈뻑거리며 몸을 돌렸다.
“일어났어?”
“민혁아, 지금 몇 시야?”
“몰라. 그래도 상관없어.”
“지금까지 안 잔거야?”
“네 얼굴 보다가 그만.”
“여긴 몇 시까지 있을 수 있어?”
“아쉽게도 오전 9시까지. 하루종일 빌리고 싶었어.”
“그 정도면 늦은 시간까지 잘 수 있겠네.”
“오전 10시가 개관이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이것도 차고 넘치는 걸.”
“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어쩔 수 없었어. 도윤아, 난 너에게 최고만 주고 싶은데...”
민혁이 그렇게 말하며 도윤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도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넘실대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도윤의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윤은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감에 웃음을 지으며 민혁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민혁은 도윤을 꼭 안았다. 민혁의 품속에 도윤이 쏙 하고 들어왔다.
그냥, 그냥 참 좋았어. 민혁이 그렇게 말하며 도윤을 쳐다보았다. 도윤이 자신에게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기고 무방비하게 눈을 감은 것이 좋았다. 자신을 완전히 믿었다는 것 같아서,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 같아서. 그렇게 도윤의 눈, 코, 입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속눈썹이 많은 눈. 오똑한 코. 그리고 빨간 혈색이 도는 입술. 그렇게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깨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몇 시인지 불렀을 때는 애써 괜찮은 척 했지만 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도윤아...내일은...”
“내일은?”
“내일은 파리에 갈 거야.”
“파리? 프랑스 파리?”
“응. 거기서 쇼케이스 행사가 있어. 에펠탑 앞에서.”
“오랜만에 수행비서 역할로 가는거야?”
“수행비서 역할이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연인으로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연인으로 갔다가 네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상관없어. 큰형이 나가 떨어지면서... 아니다, 이건 그냥 네가 안 들었으면 좋겠어.”
“무슨 이야긴데.”
“좋지 않은 이야기.”
“말해줘. 온실 속 화초로 키울 셈이야?”
“아니 이야기 해 줄수 있어. 그냥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으면서 편하고 즐겁게 살았으면 해서. 원한다면 언제든 온실을 나가도 좋지만...”
“좋지만?”
“나도 내가 뭔가 잔인해지는 순간을 네게 보이긴 좀 망설여지니까.”
“걱정마.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만 버리지 않으면 되는데.”
“가장 소박한 소원을 비네, 민도윤.”
그렇게 말하며 민혁은 도윤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멀리서 공룡뼈와 화석, 그리고 석조건물 양식과 조명에 둘러싸인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