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2 3부 : 사랑의 증명법 =========================
“일어났어?”
“응, 민혁아.”
잠이 깬 도윤이 눈을 떴다. 어제 소리를 엄청나게 지른 탓인지 목이 다 쉬어 있었다. 민혁은 어느새 일어나 아침식사 테이블을 가지고 왔다. 위에는 아침식사가 간단히 차려져 있었다. 한 달 정도 여기에서 살았지만 침대 위에 놓는 테이블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었던 도윤이 의아해했다.
“이건 어디서 난거야?”
“아, 에드워드가 빌려줬어.”
도윤은 민혁을 보았다. 웃통은 벗고 아래쪽은 헐렁한 바지만 입은 상태였다. 물론 몸매가 조각 같긴 했지만 그래도 집주인에게 훌렁 웃통을 벗은 모습을 보여주다니 예의가 없다. 도윤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옷 얼른 입어.”
“왜. 보기 좋지 않아?”
“보기 좋긴 한데... 여기 민혁이 네 집도 아니잖아.”
“그런 의미라면야, 알겠어.”
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옷을 입었다. 에드워드가 빌려준 셔츠였는지 몸에 적당히 들어맞는다. 둘 다 체격이 비슷해서 그런가, 도윤은 자신이 저 옷을 입으면 아주 헐렁해서 빅사이즈 셔츠를 입은 것 같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민혁아.”
“응.”
“오늘은 네 집으로 갈 거야?”
“아니,”
우리 들를 데가 있어, 도윤아. 민혁이 다정하게 말하며 도윤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민혁은 웃으며 도윤의 볼과 입에 입맞춤을 짧게 한 다음 말했다. 도윤이 민혁의 얼굴을 쫓아가듯 내밀었다가 웃으며 다시 눈을 떴다. 민혁은 상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도윤을 번쩍 들어 앉히고 다시 상을 놓았다.
“이건 네가 한 거야, 직접?”
“그래. 잘 했지?”
“가정부는 이렇게 안 태워먹어.”
도윤이 웃으며 민혁에게 말했다. 민혁은 웃음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환하게 웃는 도윤의 모습에 저절로 행복해져 같이 웃음을 지었다. 민혁은 식탁 너머로 도윤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을 떼면 도윤이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 다시 미소지었다. 오늘은 도윤이에게 런던을 선물로 주고 싶은 날이었다.
…
영국 정부의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결과물 중 하나인 테이트 모던은 템즈 강의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진 현대미술관이었다. 원래 화력발전소의 매연이 나가던 99m짜리 굴뚝이 서 있어 독특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데려오고 싶던 데가 여기야?”
“응. 테이트 모던.”
둘에게는 당연하게도 프라이빗 가이드가 붙었다. 민혁은 급하게 런던으로 오느라 잘 아는 교수님을 모시고 왔으면 좋았을 거라 말했지만 도윤은 정색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며.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번에 도윤이 테이트모던의 그림을 좋아하고 행복해한다면 자주 이렇게 도윤을 데리고 갈 예정이었다. 테이트 모던을 한 바퀴 둘러본 후에 나가려던 도윤을 민혁이 잡았다.
“좋았어?”
“좋았어. 그런데 난 역시 현대미술은 어려운 것 같아.”
“그래서 프라이빗 가이드를 부탁했는데.”
“아냐, 덕분에 잘 봐서 좋았어.”
“다음에는 내셔널갤러리나 영국박물관 같은 곳으로 가자.”
“다음은 거기야?”
“아니. 우린 테이트모던에서 밥을 먹을거야.”
그러고 보니 투어할 때 보았다. 옥상에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테이트 모던 7층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이 있어 그쪽으로 향하려던 도윤을 민혁이 잡았다. 민혁은 도윤이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가 갈 레스토랑은 그쪽이 아니야.”
“여기에 레스토랑이곤 이쪽밖에 없는데?”
“아니야. 따라와, 도윤아.”
민혁은 도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만을 주고 싶었다. 도윤이 싫어하지만 않았더라면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받아도 좋으니 가는 곳마다 비로드로 길을 깔아줄 수도 있었다. 그런 정신에 따라 민혁은 그 중 테이트 모던 7층의 이스트룸을 통째로 빌렸다. 통유리로 되어 있어 런던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150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오늘은 도윤과 민혁 하나만을 위해 열리는 공간이었다.
“이게 뭐야!”
도윤이 탄성을 질렀다. 네 벽면 중 세 벽면이 모조리 통유리였다. 한쪽에서는 셰프로 보이는 사람이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고 공간 한가운데에는 동그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주변에는 테이트 모던의 전시품인 것 같은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도윤은 민혁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점심식사에 놀랐다. 민혁은 도윤이 창밖을 정신없이 구경하는 것을 보고 뒤로 다가가 도윤을 품 안에 쏙 들어오게 안아주었다. 한 손으로는 도윤을 꼭 잡고 한 손으로는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저 사랑스러울 따름이었다.
“맘에 들었으면 좋겠어.”
“너무...너무...”
너무 벅찰 정도로 좋아. 그렇게 말하고 환하게 웃는 도윤의 모습에 민혁의 기분도 좋았다. 도윤이 좋아하며 기꺼이 받는 것을 보니 민혁의 마음도 편하고 좋았다. 이 순간이 꿈결같이 행복해서, 민혁은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어색한 손짓으로 도윤에게 내밀었다.
“나는 셀카 찍으면 안 된다며.”
“아직도 잘 지키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찍어줘.”
“민혁이 널?”
“아니, 우리 둘이랑 이 순간.”
민혁이 그렇게 말하며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동그란 이마에 입술이 내려앉자 도윤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민혁은 귀 끝을 만지작거리며 거기에도 입을 맞추었다.
“도윤아, 넌 귀가 빨개지네.”
“응. 난 얼굴이 잘 안 빨개져. 귀만 달아오르고.”
“그러게. 내가 그걸 봤어야 했는데. 미안해.”
“이제 잘 봐두면 되지.”
다시 한번 도윤이 민혁에게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는 런던을 배경으로 민혁과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확인해보니 강한 햇살에 배경은 날아가고 두 사람의 웃는 얼굴만 남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저 좋을 뿐이었다. 사진을 보고 좋아하고 있는 도윤의 손을 슬그머니 민혁이 잡아당겼다. 그제야 도윤은 자신이 민혁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핸드폰.”
“그게 목적은 아니었는데.”
민혁이 웃으며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도윤의 손을 잡아당겼다. 손을 잡아달란건가? 도윤이 민혁의 손을 잡자 민혁은 가볍게 웃었다. 그것이 원래 목적은 아니었지만, 도윤이 손을 잡아오는 감각은 너무나 좋았기에 민혁은 도윤의 손을 따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는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도윤아, 이번 반지는 무릎을 꿇고 주진 않을 거야.”
“알아, 너무 빠르지?”
“아니. 너에게 어울리는 반지를 줄 때 무릎을 꿇고 싶거든.”
“응?”
“이 반지는 너무 작고, 너보다 찬란하지 않지만. 그래도 너와 내가 같이 무언가를 가지고 다니고 싶어서.”
“그러다 평생 못 꿇는 거 아냐? 민혁이 네 맘에 차는 게 있으려고?”
그러게, 그럼 어떡하지. 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작은 하늘색 케이스를 꺼냈다. 3캐럿의 다이아몬드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생각보다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에 도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민혁.”
“응?”
“작다며.”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로 줄 때는 알이 너무 커서 반쯤 돌아갈 정도가 딱 적당해.”
“그건 웨딩 링 기준이잖아.”
“내가 주고 싶으니까 주는 것 뿐이야.”
도윤은 그 말에 웃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겠다던 말이 정말 늘 지킬 진심이었구나. 도윤은 조용히 손가락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왼손 넷째 손가락에 박혔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