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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70 3부 : 사랑의 증명법 (70/82)

00070 3부 : 사랑의 증명법 =========================

에드워드는 민혁이 지나간 자리에서 열린 문틈으로 조용히 살펴보았다. 도윤이 흰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어있었다. 민혁은 그 옆에 조용히 앉아 도윤을 굽어살피듯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이제부터는 저 연인들이 시간이었다.

도윤은 드르륵하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키 큰 누군가가 창문을 닫고 있었다. 어두워진 방 안, 그리고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에 비가 내리고 있어서 에드워드가 창문을 닫아주는 줄 알았다.

“에드워드? 내가 닫을게요.”

그러나 그 사람은 말이 없었다. 조용히 창문을 닫은 채로 한참을 뒤돌아 서 있었다. 뒤태가 눈에 익었다. 저 머리칼도, 목선도. 그리고 어깨에서 팔로 떨어지는 그 선도. 그 사람이 조용히 뒤를 돌았다. 도윤은 졸린 기색이 싹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정말 지민혁일까? 여섯 번의 삶 동안 민혁이 자신을 찾아온 적이 없었기에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민혁...?”

“안녕, 도윤아.”

민혁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민혁은 도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하나에 자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자는 모습을 보며 하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는데, 말들이 그저 무너져 내리며 허공에 흩어졌다. 그저 자음과 모음이 결합 되지 않은 채로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것 같았다.

“잘 지냈어?”

안부를 묻는 민혁의 목소리가 형편없게도 갈라지고 떨렸다. 도윤이 민혁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민혁의 두 눈이 곧 눈물로 차오를 것 같았으나 도윤을 향해 뻗은 시선은 흔들림 없이 곧았다. 눈물을 애써 누르며 웃어 보이는 그의 표정이 몹시나 도윤의 마음에 아프게 다가왔다. 도윤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을 것 같아?”

민혁의 목소리만 떨린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도윤은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도윤은 이제까지 민혁이 민혁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은 자신을 다시 찾아와 주는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어디든, 어디에서는 자신을 찾아내 주는 것. 그것이 먼저 자신의 곁을 떠나 도망가 버린 민혁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는 알았을까. 도망수라고 둘러댔을 때의 도망은 자신이 친 것이 아님을. 그래서 다음번에는 당신에게서 내가 먼저 도망치고 말겠다는 경고의 표시임을. 위기가 닥치면 다시는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며 사랑에 뛰어들 용기가 더 이상은 남아있지 않음을.

“내가 당신에게 난 도망을 잘 친다고 말했잖아.”

“응, 잘했어.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런데 도망을 치니까 너무 힘들더라.”

도윤의 눈에서 눈물이 먼저 흐르기 시작했다. 민혁은 정신을 다잡았다. 자신은 도윤이 눈물을 흘릴 때, 같이 울기보단 도윤의 눈물을 다 닦아주고 나중에 울겠다 다짐했었다. 그것이 도윤이 떠나간 이후에 생각했던 후회의 한 단편이었다. 민혁은 손수건을 들고 조심조심 다가갔다. 거구의 사내가 살얼음을 들고 옮기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남겨졌을 때...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것 같았어.”

“그걸 어떻게 알아.”

“꿈을 꿨어. 내가 프랑스로 가 버리는 꿈.”

도윤은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민혁이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기억이 돌아온 까닭이었다. 도윤은 늘 기억이 없는 민혁을 바라보며 부러워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이 없는 민혁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증명이 필요하다면. 도윤은 늘 그렇게 말했다. 민혁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민혁은 자신을 끝까지 찾지 못했으니 사랑하지 않는다고. 민혁이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민혁은 전생의 기억이 없었으니 그를 온전히 사랑한다 말할 수 없노라고. 그리고 이번 생의 민혁은 그 모든 명제가 불합리함을 증명해냈다. 도윤의 가정이 틀렸음을. 도윤의 생각이 산산조각이 나며 도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이 되었다. 도윤은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할 핑계를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찾았어?”

“온 힘을 다해서.”

다만 너무 늦어서 미안해. 민혁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꺼냈다. 마치 평생을 뒷골목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평생을 힘내 모은 은화로 손수건을 사 저 높은 존귀한 공주에게 건네듯, 민혁은 손을 덜덜 떨었다. 민혁은 떨리는 손으로 도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도윤이 손을 들어 민혁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작은 따스함이 민혁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민혁의 숨이 떨렸다.

“잘 지냈냐고 했지...?”

“응.”

“아니, 잘 못 지냈어.”

“미안해.”

“민혁아... 나는 네가 없으면 덜 아플 줄 알았어.”

도윤은 말없이 손을 뻗어 민혁의 뺨을 쓸어내렸다. 민혁의 눈가를 도윤이 매만지자 민혁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떨리는 눈꺼풀 뒤에서 맺힌 눈물이 흐트러진 호흡과 함께 몰아쉬듯 나왔다. 도윤이 손 위에 떨어진 눈물이 그대로 흘러내려 도윤의 손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아니더라.”

“응, 응.”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민혁은 눈물을 툭, 툭 흘리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도윤은 자신보다 훨씬 크고 거대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민혁이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잔뜩 자신을 낮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이 이 남자를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작아진 채 떨게 하는지, 도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사랑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람은 이렇게 민혁처럼 연약해진다. 사랑 앞에서 사람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된다.

“네가 없는 게 더 아픔으로 다가오더라.”

“응.”

“난 내가 괜찮아진다고 생각했어.”

너의 부재가 내 삶에 특별함으로 다가오지 않는 줄 알았는데, 실은 다시 만나고 보니 너무나 큰 부분이 떨어져 나갔기에 오히려 몰랐던 것이었다. 도윤은 민혁이 자기를 찾아와 앞에서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온몸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본 도윤은 자신이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이번에는 다시 사랑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또 다시 보는 순간, 마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민혁이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소리가 나서 또다시 사랑을 하고 싶게 만들어졌다. 도현을 눈을 감았다. 자신이 이미 사랑을 하고 있다 증명하게 되는 순간이다. 사랑은 사람을 어리석게 한다.

“그런데 널 보는 순간, 나는 또다시 돌아가.”

“미안해, 정말. 모든 게 왜 네 탓이니, 도윤아.”

“왜 네가 미안해.”

“....”

“넌 너무 다정해.”

“도윤아...”

“그래서 그런지 몰라. 매번 나는 다시 널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도윤은 미소를 지었다. 민혁은 눈앞을 바라보았다. 채 닫지 못한 창문 근처에 있는 희고 얇은 커튼이 눈이 아플 정도로 흔들린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렸고 비를 피하기 위해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비에 젖어가는 흰 침대가 있었다. 그 침대 위에서 막 잠에서 깨어 갈색의 부스스한 머리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다 고백하고,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었다. 자신에게 또다시 사랑한다 먼저 말하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민혁도 도윤을 따라 눈을 감았다. 자신들은 또다시 사랑하기 위해 뛰어들고 있었다. 사랑이 있다 모두가 깨닫는 순간, 사랑은 사람은 강해지고 용기가 넘치게 만든다.

민혁은 떨리는 손으로 도윤을 일으켰다. 도윤은 순순히 민혁의 손길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민혁은 도윤을 일으키며 속상한 듯이 팔을 매만지며 말했다.

“왜 이렇게 말랐어, 도윤아.”

“민혁이 넌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

두 눈을 떴을 때는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늘 도윤은 자신이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이되 자신이 추억하고 간직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위태로움 속에 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나 더 아름다운 현실을 마주하는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

민혁은 몸을 잔뜩 구부려 도윤의 이마 위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도윤의 몸에서 전해지는 따끈한 온기에 감사했다.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에 원을 그리며 툭, 툭하고 떨어졌다. 밖에서 내리는 비가 방 안에서도 톡톡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마를 조심스럽게 뗀 민혁이 도윤을 쳐다보았다. 다시 없을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온통 이미 실금이 가버린 유리컵을 다루듯, 얼음 조각을 옮기는 사람마냥 민혁은 그렇게 도윤을 귀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민혁의 입술이 다시 한번 도윤을 보고 정확히 내려 앉았을 때, 도윤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온전한 도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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