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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9 3부 : 사랑의 증명법 (69/82)

00069 3부 : 사랑의 증명법 =========================

“에드워드 필립 러셀씨 되십니까?”

“네, 에드워드 필립 러셀입니다.”

“저는 지민혁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혹시 도윤의 파트너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시간 괜찮으신가요?”

아침 일찍 에드워드 필립 러셀에게 직접 전화한 지민혁은 당황했다.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에드워드의 목소리도 낯설었지만, 대뜸 만남 요청을 하는 것이 의아했다. 당장 나갈 수 있으니 도윤을 만나기 전에 한 번만 만나달라는 소리에 헤롯 백화점 근처에서 11시 30분까지 만나기로 엉겁결에 승낙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에드워드 필립 러셀이 도윤을 ‘도윤’이라고 부르는 것을 몹시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 그가 꼭 도윤을 만나기 전에 만나달란 이야기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마음에 걸렸다.

지민혁은 백화점이 개장하자마자 가서 헤롯 백화점을 말 그대로 들었다 놓았다 하기 시작했다. 파텍 필립의 시계부터 시작해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샀다. 도윤을 생각하며 여러 종류를 결제할 때마다 쇼퍼도 셀러도 모두 공손해져갔으나 민혁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 민혁은 이런 백화점에서 사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도윤은 이것보다 더 대우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불러 도윤만을 위한 것을 만들고 싶었다. 도윤과 함께 할 시간이 영광스럽게도 생긴다면, 손에 끼우면 무거운 다이아몬드 덕에 살짝 돌아갈 정도의 큰 반지를 맞춰 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런저런 생각 덕에 11시를 마지막으로 흰 수국 꽃다발을 토파즈가 달린 실크 리본에 묶어 들고 백화점을 나가게 되었다. 민혁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에드워드 필립 러셀과의 약속장소를 향해 갔다. 마음이 떨렸다.

민혁은 근처 조그만 카페를 향했다. 의외로 에드워드는 약속장소로 소박한 곳을 지적했다. 민혁도 그편이 편했다. 민혁은 모든 사람을 물리고 에드워드 러셀과의 약속장소를 향했다. 사진에서 본대로 더티블론드를 편하게 내리고 청회색 눈동자를 한 에드워드 러셀이 있었다. 에드워드 러셀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지민혁 씨. 에드워드 필립 러셀입니다. 에드워드라고 불러주세요.”

“안녕하세요, 러셀 씨. 저는 지민혁입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예의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난 뒤에 침묵이 찾아왔다. 에드워드가 일어나 무슨 커피를 마실거냐고 물어본 뒤 다즐링이라 대답하고 나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덩치 큰 두 남자는 두 잔의 다즐링 티가 두 사람 앞에 놓였을 때 에드워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만나자고 하셔서 매우 의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네. 적극적이셔서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식 화법에 꽤 익숙하신데요.”

“연이 닿아 영국 학교에서 다닐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시군요. 잘하면 동창일 수도 있었겠는데요.”

“대학교는 미국 쪽을 나왔습니다.”

“저는 영국에서 모든 과정을 마쳤습니다. 아쉽네요.”

“만났으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겠는데요.”

민혁이 그렇게 말하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즐링의 부드럽고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하지만 도윤이 걸린 이야기다. 따뜻한 차가 목구멍을 적시지만, 민혁의 입은 안쪽부터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본능적으로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답게 민혁의 초조함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판단하는 데는 어떤 근거도 없었으나 그냥 알 수 있었다.

“혹시나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도 관리자 출신이고 찾아야 할 파트너가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도윤씨랑 어딘가 연애감정으로 얽힌 적은 없으니 안심하라는 말부터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행이군요.”

“다만 도윤씨와 많은 이야기를 했었죠.”

“부럽군요. 에드워드.”

“같은 일을 다른 각도에서 겪었다, 그 정도가 딱 알맞은 이야기 같군요.”

에드워드는 죽은 연인을 두고 있었고, 도윤은 죽었던 연인이었다. 서로의 절망을 나누며 둘은 자신의 사랑에서 보지 못한 부분을 더 볼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도윤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했다. 에드워드는 도윤이 민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만 너무 힘들어 그만 사랑에 손을 떼고 잠시 도망간 것일 뿐.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두 사람이 다시 마주 보고 그들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다리를 놓아주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브를 다시 마주 보게 할 용기를 준 도윤에 대한 에드워드만의 답례였다.

“지민혁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전 도윤이 당신과 한 번 이야기해 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응원하고 있고요.”

“그렇게 잘 해주시는 까닭이...”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서 불쑥 말하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관리자가 된 이유는 제 연인이...”

에드워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짧은 호흡에 민혁이 다시 말을 걸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 연인이... 계속 세상을 떠났거든요.”

“당신의 상실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감사해요. 긴 이야기지만, 도윤이 용기를 주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도윤에게도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요. 어젯밤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지금 도윤은 자고 있나요?”

“제가 나올 때는 자고 있었어요.”

에드워드가 도윤의 안부를 묻는 민혁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파트너의 안부를 먼저 묻는 그 자세는 에드워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민혁은 에드워드의 말에 도윤이 적어도 자신처럼 잠을 설치며 악몽에 시달리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했다.

“도윤은 아마 늦잠을 잘 거에요.”

“어젯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셨군요.”

“거의 동이 틀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죠.”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민혁의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 절절한 그리움에 에드워드는 이브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말씀드리고 싶지만... 도윤에게서 직접 듣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우리 집으로 가요. 도윤은 우리 집 게스트룸에 있어요.”

“감사합니다.”

“도윤 옆으로 데려다 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민혁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민혁은 에드워드가 무언가 요구한다면 거의 다 들어줄 요량으로 왔다. 하지만 내민 손에는 순수한 호의 말고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민혁은 처음으로 자신과 도윤의 관계에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이 고마웠다. 같은 관리자 출신이지만 한율은 제 사랑만 챙길 줄 알았다. 지독하게도 믿지 못할 놈. 하지만 에드워드 필립 러셀은 달랐다. 제 사랑을 다른 사랑에 거울처럼 비추어 공감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과 한율이 알게 되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당신과 한율이 알게 된 게 신기할 정도군요.”

“다들 그런 말을 하죠.”

한율도 내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가 환하게 웃었다. 민혁을 안내받은 한율의 차에 타자마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제 정말, 멀지 않았다. 먼 곳에서 도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민혁은 검은 대문 앞에서 대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대문을 열면, 도윤이 있다. 민혁은 북받치는 감정에 울고 싶었으나 아직까지 참을 만했다. 그리고 도윤이 말한 것을 민혁은 늘 잊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에 취해서 눈앞의 연인을 놓치지 말 것. 도윤이 어떠한 맥락으로 말했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그 말로도 이미 민혁은 자신의 모든 희노애락을 억누를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문 앞에 서자 조용히 문이 열리고 집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도윤은?”

“2층 게스트룸 침대에서 주무십니다.”

“조용히 들어갈게. 고용인들은 오늘 하루 2층에는 얼씬도 말라고 해줘.”

그리고는 에드워드가 민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올라가서 2층 왼쪽 제일 깊숙한 방이에요, 민혁.”

“고맙습니다.”

“민혁.”

행운을 빌어요.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는 웃어주었다. 민혁은 그 미소에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숨을 죽인 뒤 천천히 2층을 향해 올라갔다. 조금만 걸어가면, 아주 천천히 조금만 걸어가면 도윤이 제 앞에서 평화롭게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계속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며 터져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혁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내내 마룻바닥이 삐걱이지 않나, 자신의 발소리가 너무 크지 않나 조심하면서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문을 열고 무언가 침대 속에 파고든 형체를 본 순간, 민혁은 한참 동안 거기 서 있었다. 반투명한 흰 커튼 사이로 적절한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침대 캐노피가 만들어 놓은 그늘 사이로 도윤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고통도 없고 오직 평안함만을 가득 담은 채로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아주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민혁은 그런 고요함 속에 편하게 있는 도윤을 보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기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민혁은 도윤을 깨워 당장 자신이 왔다고 알리지 않았다. 그저 근처의 등받이 없는 의자를 조용히 들고 와 도윤의 옆에 앉아 그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창밖 너머에서 그를 비추는 햇살처럼, 열린 창 틈으로 들어오는 실바람처럼. 그저 도윤의 곁에 머물러 도윤이 깨기까지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지루할 수 없는 안락함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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