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7 3부 : 사랑의 증명법 =========================
인천 국제공항에서 민혁과 한율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율의 팬들이 한율 때문에 몰릴까 봐 걱정한 탓이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언론과 사람들 앞에서 친한 척 하기 싫은 것이 컸다. 지한율과 지민혁이 걸어가는 것은 언론이 노릴만한 멋진 그림이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는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어야 했다. 둘이 적당히 친한 그림이 나와야 할 텐데, 차라리 서로 뺨치기 시합을 하기가 더 쉬웠다.
“그런 짓을 너랑 어떻게 할까, 동생아.”
“나도 마찬가지야, 형. 죽어도 싫지.”
이런 데에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지씨 형제였다. 서로가 이렇게 뜻이 맞는 것 조차 싫어하던 찰나에, 차 뒷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대표님. 안녕하세...”
뒷좌석으로 들어오던 환강이 말을 멈춘 것은 지한율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환강이 입을 딱 벌렸다. 대표님이 자신을 데리러 왔던 것 부터가 수상한데, 문을 열었더니 자신의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었다. 한율은 환하게 웃으며 환강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요, 반가워요, 환강씨.”
“아, 네, 네.”
“5분 있다가 들어와요, 환강씨.”
환강은 멍하게 차 안으로 끌려 들어오려다, 민혁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차 문을 닫았다. 지민혁은 환강 앞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척하는 한율을 바라보며 가증스럽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자신의 사랑만 생각하는 철처하게 이기적인 놈이었다. 도윤의 머리를 튀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갚아 주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도윤에 대한 정보를 줄 때까지 그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윤이 먼저였으니까.
“왜 그래. 왜 나가게 시켜.”
“우리가 나가리?”
“당연한 거 아냐?”
“너한테나 예쁜 사람이지, 나한테는 부하 직원이야.”
“나중에 꼭 빼돌릴 테니까, 잘 모시고 있어.”
“웃기고 앉아있네. 그 정도로 나에게 중요한 사람일 것 같아? 시끄럽고, 빨리 도윤이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
“그럴까?”
“내가 네 ‘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잘 모셔온다고 했지. 저 얼굴이 무슨 고난이라도 겪은 것 같아?”
“그건 아니야. 약속은 약속이니 말해줘야지.”
“잘 생각했어, 우리 ‘동생’.”
“만약 내가 알려주지 않으면, ‘형’이 날 부숴버릴 거니까. 그 말은 거짓말 아니란 거 알아.”
내가 또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한 한율이 조그만 명함을 꺼내 민혁에게 건네주었다. 민혁이 명함을 받아 세세히 보았다. 에드워드.P.러셀이라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밑에는 한율이 별도로 적어둔 직통 전화 번호로 추정되는 번호가 보였다. 44로 시작하는 번호이니, 영국일 것이다.
“그 친구 집에서 지내고 있을 거야.”
“사실이겠지.”
“그 전에는 M호텔 스위트룸에서 지냈어.”
“그건 어떻게 알지?”
“내 카드를 썼거든.”
“든 돈 불러.”
“그렇게 큰 돈도 아닌데.”
“나도 마찬가지야. 다만 너에게 도윤이가 신세졌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다는 거지.”
“낭만적인데. 좋아. 나중에 청구서 보낼게.”
“그럼 난 바로 비행기를 타러 가 보지. 넌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해. 환강씨와 원하는 곳에 데려다 줄 테니.”
“그러지.”
“아. 그리고.”
“왜?”
“내가 널 놔 두는 이유는 단 하나야.”
“뭐, 나도 제법 한 가닥 한다고 인정해주는 건가? 다시 건드리면 좀 성가신?”
“그건 아니고. 너에게 신경 쓸 시간도 아깝다는 거지. 도윤이가 나에겐 우선이거든.”
“...”
“그 점을 다행으로 생각해. 아니면 넌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을걸.”
“설마.”
“자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상큼하게 웃은 뒤 더러운 것을 피하듯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 환강이 어정쩡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자신의 상사와 자신의 최애 연예인이 함께 공존하다니 천국과 지옥이 같이 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민혁은 환강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싫었지만 환강은 아무 죄가 없었다. 민혁은 환강에게 조그만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재택근무 하다가 돌아와.”
“네?”
“이 차를 타고 네가 좋아하는 지한율과 놀다 오라는 뜻이지.”
“감, 감사합니다.”
막 차 안으로 들어가려던 환강이 잠시 멈추고는 민혁에게 물었다.
“저, 대표님.”
“왜 그러지?”
“혹시 저 말고 이런 출장 보낸 직원이 또 있나요?”
“그건 왜 묻지?”
“저... 정도현을 봐서요. 런던에서.”
그 말에 민혁은 피식 웃었다. 한율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자신을 어려워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환강의 성격이 이번에도 자신에게 도움을 준다. 환강은 늘 자신이 도움을 주는 것 조차도 모르지만. 그래서 민혁은 한율을 자근자근 밟아놓으려다 환강을 보고는 늘 멈추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민혁은 환강에게 인심을 쓰기로 했다.
“유급휴가로 일주일.”
“네?”
“재택 말고, 유급휴가로 일주일 줄 테니 넉넉하게 쉬다 오란 뜻이야.”
“네, 감사합니다.”
영문을 모르지만 어쨌든 기쁜 얼굴이 된 환강이 인사를 하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환강과 한율을 싣고 떠나가는 차를 본 뒤 민혁은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수행원도, 비서도 없이 혼자 비행기를 타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가볍고 빨랐다.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고 성급하게 자기 자신을 재촉한다. 도윤을 만나러 가는 길이 드디어 열렸다.
“런던행 퍼스트 클래스 한 장 부탁드립니다.”
…
에드워드는 전화기를 닫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무언가에 매진하고 있는 도윤을 바라보았다. 요즘의 도윤은 처음 올 때보다 많이 밝아졌다. 처음 한율의 간곡한 부탁에 호텔에 가 보았을 때의 도윤은 폐인과도 같았다.
도윤의 말로는 그 때의 자신은 그래도 좀 나아진 편이라고 했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호텔의 스위트룸을 빌릴 때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기본적인 본능과 욕구에 따라 움직였다고. 그저 누워서 멍하게 있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에드워드는 그런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브가 죽었을 때 이브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겪은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격렬하게 거부했었다. 이브는 죽지 않았었다고. 이브는 살아있을 거라고.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 에드워드는 계속 죽은 이브의 시체를 만졌다. 아직 따뜻한 이브의 주검은 꼭 이브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심폐소생술을 하던 이브의 목구멍에서 아직 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도윤.”
“에드워드.”
“도윤, 미안한데 우리 이야기 좀 할까요?”
“무슨 이야기요.”
“좀 성급하긴 한데, 그래도 한 번은 누군가에게 도윤이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요.”
“에드, 그냥 말해도 괜찮아요.”
도윤은 에드워드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다. 도윤도 에드와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도윤은 누군가와 민혁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가는 용도가 아니라, 깊은 마음속까지 털어놓고 바닥을 보여가며 몸부림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도윤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였으니까.
“우리 당신 파트너와의 이별에 대해서 말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있잖아요, 에드워드.”
에드워드는 초조해졌다. 만약 여기서 도윤이 싫다고 말한다면 문제였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일찍 꺼내서 도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에드워드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때 죽음이라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경험해 본 에드워드였다. 도윤과 도윤의 파트너는 아직 적어도 살아있지 않은가. 그들은 최소한 무언가를 해 보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고통스럽더라도 그들이 서로 이야기는 한 번쯤은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한율에게서 조금 전에 온 전화, ‘도윤의 파트너가 가고 있다’라는 전화는 중요한 전화였다.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조금 이른 것 같아 걱정했는데.”
“아녜요, 난 민혁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해 보긴 했어야 하니까요.”
내가 평생 이렇게 가슴에 묻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어요. 고마워요, 에드워드. 어려웠을 텐데 먼저 물어봐 주어서. 그렇게 말하면서 도윤은 조금 떨며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