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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6 3부 : 사랑의 증명법 (66/82)

00066 3부 : 사랑의 증명법 =========================

원데이클래스를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자수 원데이클래스에서 손수건에 신나게 바늘을 찌르는 것 자체는 무척이나 재미있었으니까. 물론 결과물은 훌륭하지 못했지만. ‘I WILL SURVIVE’를 꼼꼼하게 새겨놓는 동안 사람들은 도윤과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도윤은 신나게 자수를 놓기 시작하면서 이것저것 다양한 것을 시도하게 되었다.

“도윤, 그나저나 오늘은 뭘 할 거야?”

“오늘은 뮤지컬 보러 갈 거예요.”

“무슨 뮤지컬?”

“맘마미아요.”

“그거 좋지.”

“어떤 의미로요?”

“가 보면 알게 될 걸.”

에드는 웃으며 도윤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도윤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무슨 뜻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공연에 와서야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도윤은 입을 떡 벌렸다. 수영복 하의만 입은 근육질의 남자들이 공연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스에 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스에 온 것 같은 기분에 도윤은 내내 웃으며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공연 끝나는 시간에 맞춰 기사를 보내주겠다는 에드의 말에 도윤은 공연장 앞에서 기다렸다. 코벤트 가든 근처에 있는 런던 노벨로 극장 앞에서 차를 기다렸다. 이윽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소리 난 곳을 향하자 도윤은 왠지 부끄러워져 서둘러 차에 탔다.

“저거 정도현 아닌가...? 김 팀장님 조카?”

환강은 라이온킹 뮤지컬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코벤트 가든 쪽에는 다양한 극장이 있었다. 누구도 환강이 여기 있는지 알리지 말아 달라는 지민혁과의 계약과 위약금이 떠올라 아는 체는 하지 못했지만. 환강은 도현도 자신처럼 민혁이 시킨 일종의 출장을 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쟤도 힘들겠다.”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말고 2개월 동안 런던에서 실컷 살아보란다. 그 집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것도 유급휴가로, 체류비 지원도 나오게. 살면서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냐 싶었다. 그러나 환강은 사람들이 공짜로 돈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런던에서 이렇게 희희낙락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아마 무언가에 이용되고 있을 거란 생각에 뒷맛이 찝찝했다. 그런데 김 팀장님 조카도 이런 일에 말려들다니.

“참 회장님들 더럽게 살아.”

환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우버를 잡아 런던에서 민혁이 지정해 준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 들어가자 민혁이 고용한 고용인이 환강에게 다가왔다. 평소에 말이라곤 인사와 간단한 대답 정도였던 고용인이 이야기를 하려는 느낌으로 다가오자 환강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환강님.”

“왜요?”

“한국으로 이번 주 주말에 돌아오라는 지시입니다.”

“아니, 지금 두 달 다 안 됐는데!”

“대표님께서 서둘러 돌아오시랍니다.”

환강은 두 달의 휴가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깊은 분노가 스믈스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쩌랴. 자신은 까라면 까야 하는 사노비인 것을. 환강은 짐을 챙겨달라 부탁하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고용인이 조용히 티켓을 내려놓았다.

“이거, 정도현 와서 내가 나가는 거 아냐!”

그리고 벌떡 일어나 자신의 추리를 읊어대면서 환강은 억울해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맞는 말인지도 모른 채로. 그저 두 달간의 꿀 같은 유급휴가를 빼앗긴 슬픈 직장인의 괴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때요, 좋았어요?”

“재미있었어요. 마지막에 극장에서 다 같이 일어나서 춤도 췄어요.”

맘마미아 뮤지컬의 마지막 커튼콜은 콘서트와 다름없었다. 후끈 달아오르는 공연장의 열기에 모두들 즐겁게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바의 노래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도윤은 그것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도윤에게 좋은 선택을 했다며 다음에는 다른 것도 보러 가라 몇 가지의 공연을 추천해 주었다.

“도나의 선택에는 만족해요?”

맘마미아는 주인공 도나 셰리던이 세 명의 남자 중 자신의 남편을 선택하는 내용이었다. 샘 카마이클과 해리 브라이트, 빌 오스틴 세 명 중에서 도나 셰리던은 결국 한 사람을 선택하게 된다. 도나 셰리던의 선택은 많은 사람이 영화나 뮤지컬을 보고 난 뒤의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에드워드 역시 도윤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제가 만족할 게 뭐 있나요. 주인공이 만족하면 그만이지.”

“그럼 도윤이 도나라면 누굴 선택하고 싶어요?”

“제가 도나라면요?”

“네.”

“사실 전 도나보다 도나의 딸 소피에게 눈길이 갔어요.”

도윤은 도나의 딸인 소피 셰리던에게 더 눈길이 갔다. 도윤처럼 나이가 어리다는 점에서 공감이 간 걸까. 그녀는 결혼식 대신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을 보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윤은 다시 살아가다 조그만 부분에서 지민혁을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어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어느 그리스의 섬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두 남녀였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까 싶어서.

“오, 그런 사람도 있죠.”

“그런가요.”

“당신 파트너가 생각나던가요?”

“네.”

도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웃고 있었으나 난감한 기색이 잔뜩 배여 있었다. 도윤은 뮤지컬에서 들었던 어느 가사를 떠올리며 에드워드에게 조용히 말했다.

“더 사랑한 사람이 결국에는 더 많이 버리고 더 많이 잃는대요.”

“...”

“에드도 이브를 만나면 다 버릴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럴 각오로 살고 있어요.”

“그럼 내 파트너도 나를 위해 이번에는 그렇게 해 줄까요?”

“얼마나 가진 것이 많길래요?”

“내 파트너는 정말 다 가졌거든요.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았어요.”

“도윤은 말해봤어요?”

“뭐가요.”

“나는 아버지가 유명한 정치가에요. 우리 집도 정치가 집안이고. 내가 이브와 사랑하고, 스캔들이 난다면 정말 많은 말이 오갈테죠.”

“그거 경험에서 나오는 말인 거죠?”

에드워드는 말없이 웃었다. 네 번의 1000일동안의 사랑. 첫 번째 사랑에는 너무나 서툴러 사랑만을 믿고 모든 것을 무시한 결과는 참혹했다. 유명한 정치가의 아들이 게이라는 것은 물밑공격과 언론플레이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언론의 더러운 기사를 견뎌내기에 그들은 각오가 덜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1000일이 되기 전 이브와 한 번 헤어졌을 때가 있었다. 이브와 에드워드는 마주 보고 있었다. 사랑 하나만 가지고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그들이 가진 사랑은 너무나 작고 연약해서 그들을 온전히 막아줄 방패가 되기 부족했다.

“서로가 너무 미안해했어요.”

“왜요?”

“자신이 너무 잘못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잘못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느껴졌어요. 내가 너무 약한 건지, 아니면 힘들어서 우는 건지도 몰랐어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든 사랑을 끝낼 때 적어도 이브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 주고 싶었어요. 한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를 전부 빌려서 거기에서만은 둘이 조용히 헤어지고 싶었어요.”

이브와 에드는 서로 안아주지도 못할 만큼 너덜너덜해졌다. 사랑은 크고 위대하지만, 너무나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뻗어 손을 잡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상처투성이뿐이었던 이별마저 맞은편 호텔에서 대기하고 있던 쓰레기 언론에 찍혀 전국에 알려졌던 것을 생각했다. 에드는 그때 처참해진 이브를 보며 과연 무엇이 사랑일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도윤.”

“에드. 듣고 있어요.”

“나처럼 어설프게 아버지 때문에 얻은 후광밖에 없다면 그 사람은 당신을 보호해 줄 힘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많은 걸 이미 자신의 손으로 가졌다면 그걸 꼭 버리라고 하지 말아요.”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그것들로 도윤을 지켜줄 수 있으니까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1, 2회차의 민혁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풋내기와 다름없었으나 3, 4회차의 민혁은 조금 달랐다. 그리고 지금의 민혁은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강한 민혁이었다. 도윤은 에드워드를 만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민혁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과는 달랐지만, 에드워드의 이야기는 민혁의 많은 부분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민혁은 환강을 데려오란 지시를 하고 난 뒤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으나 곧 깼다. 요즘에는 이상한 꿈을 계속 꾸었다. 일어나면 눈물이 줄줄 흘러 앞을 볼 때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민혁은 머리를 짚었다. 이번에는 대학생인 자신이 도윤을 만나자마자 도윤과 함께 도망가는 꿈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아버지 때문에 또 헤어져야 했었다. 프랑스로 보내진 민혁은 또다시 도윤의 죽음을 겪어야 했다는 것에 절망했다. 민혁은 깨고 난 뒤 한참 동안 가시지 않은 진한 슬픔과 절망의 여운에 당황해했다.

“이건 뭐야, 도대체.”

계속 반복되는 꿈. 그리고 깰 때마다 꿈 속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심장이 아파올 정도의 고통과 절망. 그런 것들이 민혁의 손끝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꿈속의 자신이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윤의 말을 들었을 때는 자신은 회귀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민혁은 머리가 아파와 머리를 짚었다. 무언가 왜곡된 꿈인지, 잘못된 정보인지, 아니면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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