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3부 : 사랑의 증명법 =========================
민혁은 김 팀장의 보고를 받으며 이번에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 팀장은 도현이가 아닌 ‘도윤’이라는 사람과 만난 것 같다고 보고했으나 지민혁은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블랙박스에서는 ‘도윤’과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민혁은 더 찾아보겠다는 김 팀장을 나가게 하고 컴퓨터에 USB를 연결해 블랙박스 화면을 틀었다.
「내가 다 기억나게 해 줄게.」
그리고 겁에 질린 도윤이의 목소리. 민혁은 구역질이 나는 것 같았다. 민혁은 먹은 것도 커피 한 잔밖에 없었다. 기억나게 해 주겠다는 말에 무슨 말이냐며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민혁은 참지 못하고 오디오 파일을 멈춘 뒤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들어 그대로 토했다. 검은 커피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당장 멈추라고 말하고 싶다. 민혁은 소매로 입을 꾹 눌러 참으며 다시 재생했다.
「네가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선택하게 해 주겠다는 뜻이지.」
민혁은 그 말에서 차라리 정신을 놓았으면 싶었다. 그래서 기억 난 결과는 도윤이 자신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윤이 기억이 돌아왔다는 건. 기억이 돌아올 수 있는 줄도 몰랐고, 돌아왔다는 전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관리자로서의 도윤은 기억을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민혁은 치아에 힘을 주어 꽉 입을 닫았다. 도윤이, 타의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의에 의해 사라진 것을 확인했으므로.
「한율아, 내가 기억나지 않게 해 달랬잖아.」
「또 사랑한 거니 내가?」
오디오 속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아프게 박힌다. 멈출 수가 없었다. 민혁은 울고 있었다. 눈물을 닦은 민혁은 그 자리에서 음성 파일을 닫고 한율에게 전화를 했다. 회사를 원한다면 회사를 던져주고, 환강을 돌려달라면 다시 돌려줄 수도 있었다.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도 있으니, 도윤에게 닿기만 하게 해 달라고. 도윤이에게 자신은 맹세했으니까.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지한율. 우리 이야기 좀 하지. 도윤이랑 당신 ‘수’에 대해서 말야.”
“나도 좋아, 형.”
…
도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데이클래스요?”
“한창 생각 많을 때 아닌가요?”
“그렇긴...하죠.”
“그럴 때는 오히려 머리를 비우는 연습도 필요해요.”
“머리를 비우는...”
“원한다면 여기로 사람을 불러와서 1:1 강습도 시켜줄 수 있어요. 그런데 도윤이 다른 사람과 만나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정도로 신경 써 주시면 너무 미안해요, 에드.”
“또 내 그 표정을 보고 싶은 거에요?”
에드와 도윤이 친해지며 도윤은 에드의 ‘부르주아적 모먼트’에 대해 말하곤 했다. 돈이 드는 일에 대해서 도윤이 쩔쩔매거나 미안하다는 뉘앙스를 풍길 때, 에드가 짓는 표정이었다. ‘난 돈이 많은데 그 정도 돈 가지고 뭐가 문제라고 저러지?’라는 의문을 가득 담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도윤이 울컥해져서 한다고 소리치는 것을 노린 효과였다.
“아, 알겠어요. 그럼 해 볼게요.”
“좋아요, 도윤. 잘 들어요. 이 앱을 다운로드 받아 봐요.”
“이거요, 에드?”
“그 다음에 이렇게 내 카드를 등록하고...”
“에드 돈으로요? 괜찮아요?”
“....?”
“또 나왔네요. 그 부르주아적 모먼트.”
“하하, 이번 건 좀 다분히 의도적이었어요.”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된 거죠! 이제 원하는 원데이클래스를 들으러 다닐 수 있어요.”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도윤. 원래 원데이클래스는 잘하러 가는 데 아니에요.”
“그건 그렇네요. 처음 해 보는 거니까.”
“그냥 그걸 평생의 업으로 삼지만 않으면 될 일이죠. 어서 하나 신청해봐요.”
“그럼 전 이거요.”
도윤이 손으로 가리킨 것은 손수건 위에 이름을 수놓는 자수공예 원데이클래스였다. 에드는 좀 더 활동적인 걸 할 줄 알았다면서 그것도 좋다고 칭찬해주었다. 도윤은 에드의 도움을 받아 원데이클래스를 신청했다. 에드는 자기 손수건을 하나 주겠다면서 여기에 원하는 자수를 놓고 가지라고 건네주었다. 도윤은 받은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윤이 잠깐 감상에 젖으려는데 에드가 히죽 웃으며 도윤의 어깨를 쿡 하고 찔렀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저기 도윤.”
“왜요.”
“그거 아주 비싼 거예요.”
“아 좀 이제는 그만 해요, 이 부르주아야!”
…
“계열사도 싫어.”
“그럼 뭐지.”
“생각해 봐, 형. 난 일찌감치 환생하자마자 아버지의 왕국에서 뛰쳐나왔다고.”
“형이라고 부르지 마. 재수 없으니까.”
“알겠어, 형.”
“하.”
“적당한 계열사도 싫어. J그룹 전체를 준다 하더라도 난 안 받아.”
“그럼 원하는 게 뭐지.”
“간단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그럼 민도윤을 되찾고 싶다면 제환강에 대한 정보를 달라는 거군.”
“맞아. 하지만 도윤이을 되찾는 건 형의 몫이고. 도윤이 앞에 모셔다 드릴 순 있어.”
“...”
“빨리 결정해. 도윤이가 갑자기 어디로 가버리면 어쩌려고.”
“도윤이 적어도 억지로 납치되어 있거나 감금되어 있지는 않다는 말이군.”
민혁의 말에 혀를 놀리던 한율이 입을 닫았다. 민혁은 한율을 냉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한율은 이래서 민혁이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태어나기를 맹수처럼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맹수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앞에서 먹잇감이 된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제 갈길만 꾸준히 가는 한율도 더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환강은...”
“...?”
“잘 지내고 있다. 어딘가에서 아주 훌륭한 대접을 받고 있지. 납치하거나 감금하지 않았어, 나 역시.”
“고, 고마워.”
“이번 주 주말까지 네 ‘수’를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예쁘게 데려다 네 눈앞에 놓아주마.”
한율은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분명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도 지민혁은 전혀 불리해 보이지 않았다. 목 근처에서 힘만 살짝 주면 물릴 것 같은 느낌에 한율은 저도 모르게 민혁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도윤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
“날, 날 어떻게 이렇게 믿어?”
“널 믿는 게 아냐. 날 믿는 거지.”
민혁은 마시고 있던 찻잔을 톡하고 손가락으로 밀었다. 찻잔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한율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건 경고인 것이다. 도윤이가 만약 다치기라도 했다간, 도윤이가 있는 곳을 모르면서 아는 척 했다는 게 밝혀진다면, 혹은 찾아간 곳에 도윤이가 없다면.
“하, 형. 죽이기라도 할 거야?”
“아니.”
민혁은 한율을 바라보았다. 표정에 아무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싸늘한 표정이었다. 조각같은 얼굴이 그런 표정을 하니 정말 조각상 같은 느낌을 주었다. 죽은 표정과 어두운 눈빛이 한율의 온몸을 샅샅이 훑으며 말한다. 말이 없어도 말을 하는 것 같다. 압도적인 분위기에 저절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네 수와 너의 척추뼈를 부러뜨려 버릴 거야. 다시는 걷지 못하게. 평생 휠체어를 타고 서로 밀어주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거야.”
“...”
“익숙해지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식물인간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괴롭혀야겠군. 정신이 말라가거나 미쳐가는 것도 좋겠네. 그런 것에 대한 믿음이지.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런 걸 죄책감 없이 태연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게, 아버지가, 허락하실 것,. 같아?”
“우리 사랑하는 동생 한율아. 우리 존경하는 지 회장님께서는 자기가 일군 J그룹을 자기 자식 중에서 가장 아끼시는 거 알잖니.”
“하, 하하.”
“그래서 자신의 그룹을 이을 인재는 나밖에 없는데. 아버지의 그 종잇장 같은 방패를 너무 신뢰하는 거 아니니.”
지민혁은 손을 들어 한율을 쿡하고 찔렀다. 그러니까 까불지 마렴, 동생아. 난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게 벼려진 창이란다. 도윤이의 손에서만은 얌전하게 잡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