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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4 3부 : 사랑의 증명법 (64/82)

00064 3부 : 사랑의 증명법 =========================

맥주 한 캔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도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에드도 입을 열기 시작한 터였다. 에드는 정치인인 아버지를 돕기 위한 캠페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최초의 만남은, 그러니까 최초의 삶을 말하는 거예요. 알죠, 도윤? 무슨 말인지. 우리 아버지의 정치 이미지 때문에 끌려나간 캠페인 때문이었어요.”

“그런 걸 좋아할 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집도 편안함도 아버지가 주신 거니까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기란 어렵죠.”

“그래서요?”

“아버지의 비서 중 하나가 이브(Yves)였어요.”

“이브?”

“이브 생 로랑의 이브랑 철자가 같아요.”

“한국어로 쓰면 이브와 철자가 같아요. 왜, 그 아담의 아내 있잖아요.”

“이브(Eve)? 이브요?”

“네. 아담과 이브.”

“재미있네요.”

“에드, 당신의 이브를 다시 만나면 그 이야기 꼭 해줘요.”

“알겠어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겠네요.”

“그래도 당신은 다시 만나면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렇죠. 왜 그렇게 말해요? 당연히 보낸 연인을 다시 만나니 행복하죠.”

“난 남은 게 없어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정말 텅 비어버린 것 같아요.”

“아....”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기억해뒀다가 언젠가 말해줘야지, 이런 식으로 후일을 기약하지 않게 되나 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둘은 술을 들이켰다. 맥주 여섯 캔은 축구를 보면서 금방 사라졌다. 곧 맥주가 떠나가고 남은 빈자리는 럼으로 채워졌다. 독한 럼을 둥글게 깎은 얼음에 부어 온더락으로 마실 때마다 얼음이 크리스털잔에 부딪히면서 예쁜 소리를 내었다.

“이브 만났을 때 이야기나 해 줘요, 에드.”

“이브는... 우리는 정치 캠페인을 통해서 젊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내가 아버지와 함께 참여했던 거고요.”

“에드의 얼굴이라면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으니까. 내가 아버지라도 데리고 나갔을 것 같아요.”

“나쁘지 않네요, 그 말은.”

“좋다는 뜻이죠, 그거.”

“하하, 어쨌든 이브는 거기에 온 사람 중 커리어에 한 줄이라도 추가해보려고 들어온 인턴이었어요. 우리가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여러 가지 체험을 해 주는 부스도 운영했거든요.”

“맞춰볼게요. 그 부스 중 하나를 운영했죠?”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도윤이 맞춰줘야죠.”

“이브는 뭘 하고 있었어요?”

“애들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을 그려주고 있었어요.”

“미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나요?”

“디자인학과 학생이었어요. 그 행사를 대표하는 사진 중 하나에 이브가 찍혔어요. 아직도 사진이 기억나요. 오른쪽 옆모습을 찍었는데, 네 번째 손가락에 파란 물감과 흰 물감이 번지듯 묻어있었어요. 이브는 검은 머리를 올리고 있었고, 검은 뿔테안경에 작업복으로 검은색 상하의를 입고 있었어요. 팔찌는 흰색으로, 실팔찌를 차고 있었어요.”

“엄청 자세하게 기억하는데요.”

“첫눈에 반한 순간이니까요.”

“...이해 가요.”

도윤은 최초의 만남을 떠올렸다. 입학 전 새내기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자신의 조에 배정되어 술을 함께 마시던 ‘선배 지민혁’의 모습을. 네가 민도윤이니? 라고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야구 점퍼와 청바지, 그리고 흰 맨투맨. 아주 기본적인 옷차림인데도 빛나 보일 정도로 멋있었다. 자신과 민혁이 나란히 앉은 것을 보고 저 조는 얼굴로 술을 마신다며 한 마디씩 얹고 가던 선배들이 말했었다. 그 말을 들으며 민혁을 보고 얼굴을 붉혔었지. 도윤은 눈을 감았다.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상처받아 찔리고 울퉁불퉁한 마음 사이사이로 민혁이 물처럼 녹아 스며든 통에 잊지 못한 것이 선명하게 남아 숨을 쉬고 있었다.

“이해 가죠?”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와의 사랑은 늘 사고사로 끝났어요, 1000일이 되는 날, 늘.”

“사고사요?”

“이제 내가 관리직을 수행해서 조금 인과율이 달라졌을 거라고 믿어요.”

도윤은 입을 막았다. 이런 경우라면 자신과는 또 다른 아픔이었다. 에드워드는 이브가 사고를 당해 죽는 것을 매번 보아야 했다는 이야기였다. 도윤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에드워드는 미소를 지면서 도윤의 어깨를 살짝 쳤다.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말아요.”

“난 몰랐어요.”

“몰랐으니까 괜찮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제 이브가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오히려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도 어떤 상황이든 이브를 다시 보게 되는 순간에는 매번 우는 것 같아요. 에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반복되는 삶에서는 정말 이럴 거면 차라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생각도 했어요.”

“차마 못한 거죠, 에드워드?”

“너무 사랑했으니까. 뭐라든 하고 싶었어요.”

“저도 몇 번의 삶에서 같은 사람과 사랑에 계속 빠지는 제가....”

“싫을 정도죠. 공감해요.”

“정말 바보 같은데 또 사랑에 빠지게 되지 않아요?”

“세 번째 만남에서는 이브와 난 정말 엉망진창이었어요. 이브는 나와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연인인데 난 이미 6년을 넘게 사랑한 연인처럼 굴었거든요.”

“그래서요?”

“엉망뿐인 사랑이었죠. 나와 함께 있으면 이브가 죽을 거라는 편집증에 빠져 계속 헤어지려고 했고, 그런 날 이브는 잡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웃었던 기억은 없어요?”

“세 번째 만남은 처음 만나면서부터 내가 질질 짜면서 시작한 터라...”

에드워드는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와 달리 눈은 슬픔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도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죽어 사라지는 연인을 보고 그 슬픔을 견뎌낼 때쯤 다시 시작하는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도윤은 관리자로서 이걸 ‘새드엔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엔딩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관리자가 되어 다시 돌아와 자신에 주어진 인과율을 뜯어고친다.

“당신이 왜 관리자가 된 건지 알 것 같아요.”

“그래서 난 기다리고 있어요.”

“이브를요?”

“이브를요.”

자신의 크리스털 컵을 내려놓은 에드워드가 웃었다. 에드워드는 도윤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쓰다듬어 주었다. 분명 사랑의 기간은 도윤이 훨씬 더 긴데, 그 감정의 간절함과 깊이는 에드워드가 훨씬 더 깊은 기분이 들었다.

“도윤.”

“에드.”

“당신의 파트너와 이야기 한 번 해봐요.”

모든 걸 겁내지 말라고 하고 싶었어요. 관리직을 수행하면 인과율이 바뀌는 건 알잖아요.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가 일어섰다. 난 자러 갈게요, 잘 자요. 에드워드는 저녁 인사를 남겼다. 도윤은 인사를 한 뒤 소파에 아주 오래 앉아있었다. 자신의 삶은 멍투성이의 삶이었다. 사랑의 끝이 곧 그 삶의 끝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쪽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는 없었다.

“과연 민혁이도 날 생각했을까?”

내가 떠난 뒤에 민혁이는 어땠을까. 아파했을까? 견뎌냈을까? 아니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도윤은 처음으로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떠난 뒤의 민혁은 어떤지. 도윤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아본 적은 늘 없었다. 자신의 삶은 그 뒤를 볼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도윤이 자신이 살기 위해 도망치면서, 한국에 두고 온 민혁에까지 생각이 닿았다. 무언가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혁은 한율을 보냈다. 김 팀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gps정보 확보뿐만 아니라 블랙박스 오디오 입수까지 성공했다는 말이었다. 민혁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한율이 도윤에게 관련이 되었는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었다. 민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았다. 도윤이 사라진 뒤로 매번 날을 세우고 정상적인 생활이란 것을 하지 못했다. 민혁은 수면제가 든 약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의식이 끊기듯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민혁은 어느 대학교에서 도윤을 만났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도윤에게 자꾸 눈이 가고, 술이 가고, 손이 갔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국 내 인맥을 위해 입학한 한국대학교에서 민혁은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 중 빛이 나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여전히 꿈에서도 찬란한 도윤이었다.

대학에서 그들은 사랑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나이었으나 자신들이 사랑이란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던 나이였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민혁은 도윤을 지켜낼 힘이 없었다. 도윤의 정체 자체가 아버지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이별은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다.

여름방학에 프랑스 파리로 강제로 보내진 민혁은 거기에서 도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혁은 숨이 차오르는 폐부터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공기 중에 사금파리라도 잔뜩 들어있는지 숨을 쉴 때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무 마룻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울어 바닥도 손가락도 성할 날이 없었다. 욕조에서 손목을 찌르듯 깊게 그으려고 했다 경호원에게 저지당한 것도 수차례였다.

그렇게 도윤을 잃어버리고 버석하게 말라가던 날이 계속되며 꿈이 끝나고, 막이 내리고, 민혁이 깊은 물 속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깨어났다. 일어난 민혁의 눈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민혁은 이런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꿈이 늘 그러하듯 가장 강렬했던 감각을 상처로 남기고 서서히 잊혀 갔다. 그 감각은 ‘슬픔’이라고 간단하게 표현되며,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섬세함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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