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3 3부 : 사랑의 증명법 =========================
눈을 뜨자 병원 천장이 보였다. 온몸이 쑤실 듯 아파왔다. 민혁은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조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누군가가 와서 자신의 등을 잡아주었다. 괜찮다고 말하려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민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한율이었다.
“‘형’이 내 얼굴 보기 싫은 거 알아.”
“말이라고. 동생이란 사실도 끔찍해.”
“그래도 이건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뭔데.”
“난 원래 경영은 관심 없어서. 큰형에게 붙었던 사람들이 내게 연락해왔어.”
하. 민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 관심 따위 없는 주제를 들고 온다. 지한율은 자신은 경영 싸움에 전혀 관심이 없다며 선을 긋고 있었다.
“큰형 쪽 사람이 내게 붙으려고 하면서 회장님이 날 예뻐한단 이야기를 하더라. 아니 예뻐하시기야 하지만 그 노인네 성격에 나한테 기업을 줄 리가 없는데.”
“상관없어.”
“왜. 갑자기 J그룹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걸 봤는데.”
“내가 잘못 짚었던 거니까.”
“잘못?”
“도윤이 찾으러 가는 데 짐만 하나 더 붙인 꼴이 되었지.”
민혁은 자조했다. 어떤 멍청한 짓을 한 것인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민혁은 자조하다 갑자기 김 팀장의 말을 떠올렸다. 아마 제대로 일을 하고 있다면 지금쯤 한율의 이동기록을 알기 위해 차량 gps나 내비게이션을 뜯어보고 있을 지도 몰랐다. 민혁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줘야 했다.
“도윤일 찾아?”
“도윤이가 회사에 나오질 않아.”
“그것뿐이야? 둘이 뭐 한 거라도 있어?”
“뭐 한 거라니?”
“유대라도 있었냐는 거야.”
“...있었다고 해 두지.”
“그럼 없는 거나 마찬가지 일 수도 있어.”
“그건 아니야.”
“아버지 쪽은 생각 안 해봤어? 아버지가 형 결혼에 눈독 들이고 있잖아.”
“결혼 문제보다 다른 쪽이 더 걱정될 뿐이야. 뒷방 늙은이는 뭘 한 게 없어.”
“그거 자신만만한 말인데.”
아버지는 민혁을 입맛대로 조종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자신만의 큰 기업체를 버젓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돈으로도 뭔갈 할 수 없었다. 큰아들이란 놈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셋째인 지한율은 연예인이 되어 전혀 관심이 없다. 선택지가 하나인 싸움에서는 결국 회장은 지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민혁은 그것을 믿고 날뛰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이 세계에 환생하고 나서 그런 것은 아주 작은 문제였다. 민혁에게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아무리 마음을 쏟아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이란 것이 가장 큰 문제일 뿐이었다.
“J그룹에는 이제 관심이 없어. 다만 큰형이 도윤이를 가지고 있나 싶어서 건드려 봤던 건데, 아무 의미 없는 짓이 되었지.”
“그런가?”
“그런가, 하면서 어물쩡 넘어가려 하지 마.”
“무슨 말인지, 형.”
“사람을 시켜 이미 알아봤어. 도윤이도 너도 그날 인천에 있었어.”
“그래서?”
“큰형이 아니라면 너를 봐야지, 이젠.”
“그거 선전포고야?”
“대답해. 인천에는 왜 간 거지, 그날?”
“난 매니저가 잡아주는 스케줄 대로만 움직여서.”
한율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민혁은 그 태도에 오히려 확신했다. 멍청한 큰형처럼 아득바득 자신이 아니라 우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시원한 대답을 내놓는 것도 아니라 슬쩍 피해간다. 민혁은 다른 곳에 답이 있음을 알아냈다. 지한율과 지민혁의 팽팽한 기싸움이 막이 올랐다. 서로의 사랑을 패로 쥐고서.
…
“도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컴퓨터로 축구 경기나 보던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에드였다. 에드는 한 손에는 맥주 6캔이 번들로 묶인 식스팩이, 한 손에는 봉투가 들려있었다. 말 안 해도 뭔지 알 것 같았다.
“에드는 무슨 팀 응원해요?”
“전 맨시티요.”
“요즘 한창 신나겠어요.”
“도윤은 응원하는 팀 없어요?”
“딱히 없어요. 그냥 토트넘 경기하면 관심 가지고 보는 정도에요.”
“그럼 잘됐네요. 오늘은 토트넘이랑 번리의 경기니까.”
“어... 다른 경기 보고 싶으면 다른 경기를 봐도 괜찮아요, 에드.”
“그럼 에버턴이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경기를 볼게요.”
“에버턴을 응원하려고요?”
“당연하죠.”
맨시티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라이벌로 이름을 날리니까. 신나게 에버턴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 방송을 틀었다. 전반 경기가 한창이었다. 에드는 맥주 한 캔을 도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사 온 먹을 것을 내려놓았다. 봉지가 어째 크다고 했더니 피자였다.
“에버턴을 응원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목적도 있어요.”
“뭘 노렸는데요?”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면 말이 없어지거든요.”
“아.”
“도윤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서요.”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같은 출신이잖아요. 관리자 출신.”
그러고 보니 외국인 관리자는 도윤으로써도 처음이었다. 외국인공 부서에서 온 사람인가. 아니, 애초부터 외국인공이란게 말이 될까. 영국에서 태어난 미인공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도윤의 머리가 복잡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된다. 관리자라는 유대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주 독특한 경험이 필요하니까. 전생의 기억도 가지고 있었야 하고, 사랑에 실패도 해 보아야 한다는. 마침 에버튼 선수의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고 튀어나갔다. 화면을 보며 와, 하고 에드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나왔다.
“저건 아쉽네요.”
“그러게요. 골포스트 맞고 튀어나갈 때가 제일 심장이 쫄깃하죠. 적이나 아군이나.”
“응원하는 팀이 저러면 짜증이 말도 못 하죠.”
“에드도 저런 적 있었어요?”
“관리자가 되기 전에요?”
네. 도윤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비전에서는 달려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를 태클해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는 아픔을 호소했고, 결국 에버튼 선수에게 옐로카드가 발급되었다. 심판이 옐로카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에드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도윤은 어쩌다가 관리자가 되었어요?”
“너무 잘 도망쳐서요.”
“잘 도망쳐서요?”
“동료들에게는 그렇게 말했어요. 너무 잘 도망쳐서, 내 파트너가 잡으러 오지 않았다고.”
“그럼 사실은 따로 있다는 뜻인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학교에서...아, 에드는 차를 아마 타고 다녔겠지만.”
“그렇죠. 학교는 기숙학교였구요.”
“나는 공립초등학교에 다녔거든요. 외국에서. 비가 오면 부모님이 자기 아이 우산을 가지고 오셨어요. 그럼 꼭 안 오는 애들은 그렇게 말해요.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라고.”
“도윤의 파트너는 어땠나요?”
“못 왔다고 말하고 싶은데, 안 온 것 같아서요.”
도윤이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 여러 번 만났는데 끝이 너무 안 좋았어요.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면, 에드도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요.”
“다시 회귀해서 기약 없는 길을 가야죠.”
“에드는 몇 번이었어요?”
“전 네 번요.”
“비슷하네요. 전 여섯 번.”
“비슷하다고 말하기엔 몇십 년 차이 나는 거 알죠?”
“알아요.”
도윤은 넋두리같이 자신의 첫 만남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캠퍼스에서 같은 대학교의 대학생으로 만난 처음을. 잘생기고 인기 많았던 지민혁과 드디어 공부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가득 차 밝았던 민도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말하는 동안 에드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후반전 연장시간이 되어 에버튼의 선수가 한 골을 넣을 때 이야기가 절묘하게도 끝났다. 에버튼 서포터즈의 환호성과 함께 1:0으로 끝나는 경기를 보며 도윤은 침묵에 빠졌다. 자신의 첫 삶은 저렇게 박수받으며 끝날 수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끝없는 어둠, 어둠,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