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3부 : 사랑의 증명법 =========================
지민홍이 손발이 다 잘려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미 민혁이 가지고 있는 지분의 양이 더 많았고, 손에 쥐고 있는 패가 더 많았다. 지민혁은 지민홍을 작은 계열사 하나의 경영인으로 인정해주며 한 발 물러서는 것 같았다. 실상은 민혁이 자신의 기업에서 키운 힘으로 J그룹까지 집어삼키며 무능한 형을 쉽게 이겨 먹는 꼴이었지만. 주주총회에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간 형은 끝까지 어리석었다. 민혁은 큰 소란에 대해 주주들에게 사과하였으나 주주들은 오히려 박수로 환영했다. 역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누구인지는 주주들이 가장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민혁은 너무나도 쉽게 떨어져 나간 큰 형을 내려다보았다. 주주총회가 끝난 뒤 큰형은 자신의 경호원들에게 부축을 받아 J그룹의 소형 회의실에서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정장을 보니 새로 맞춘 티가 난다. 정말 오늘이 자신이 좌초되는 날인지도 모른 채 왔다니. 심지어 자신의 경호원들조차 한참 전에 자신에게 매수되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민혁은 큰형이 한심스러워 피식 웃었다.
“웃기냐?”
“지민홍, 그래도 J그룹 계열사 하나는 건졌잖아?”
“미친 거 아냐? 그건 원래 내 거였어.”
“그게 왜 형 거야. 내가 형이 잠깐 엉덩이 비빌 수 있게 자리 내 준거지.”
“너...너!”
“그러길래 내 사람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애초부터 계속 내 사람, 내 사람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더 잘 알 텐데.”
민혁은 딱딱하게 말했다. 형은 이 상황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못 알아먹고 있었다. 민혁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이 정도로 형이 멍청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일일지. 민혁은 형이 앉은 바퀴 달린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형이 앉은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우당탕 소리를 내었다.
“형, 왜 갑자기 의자를 빼. 걸려서 넘어졌잖아.”
“너, 이게 무슨 짓이야! 폭행죄로 고소해버릴 거야.”
민혁이 그 말이 끝나자마자 큰형의 안주머니를 거칠게 쥐어뜯듯이 잡은 민혁이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꺼내 지문 인식기에 형의 검지를 강제로 놓았다. 이럴 줄 알았다. 녹음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멍청하기는. 잠금 해제가 된 핸드폰에서 녹음 어플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민혁은 힘에서까지 동생에게 철저하게 밀린 형에게 녹음본을 모두 지우고 스마트폰 초기화 버튼을 누른 뒤 돌려주었다.
“연락처 다시 복구하려면 꽤 걸리겠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갑자기 의자 뺀다고 헛소리할 때부터 알아봤어.”
“집에 가면, 경호원이나 좀 바꿔놔.”
그 말에 큰형의 눈이 커졌다. 살집이 두둑한 몸을 오들오들 떨어댄다. 지민혁은 경멸어린 표정으로 큰형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광공의 삶을 살기 위해 이 사람과 형제로 엮였지만, 정말 단 한 구석도 자신을 닮은 곳이 없는 형제였다. 차라리 그 지한율과 형제라면 어디 믿을 구석이나 있겠지만. 민혁은 큰형을 쳐다보면서 손바닥을 털었다. 마치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이.
“그러니까 내 사람, 이제 내놔. 아니면 계열사까지...”
민혁을 겁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는 큰형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이지만, 늘 민홍은 민혁이 어려웠다. 완벽하지만 감정적으로 결여된 무언가를 대하는 느낌이 들어서.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이라는 것이 보여서. 민홍은 헛웃음이 나왔다. 왜 이런 우월한 새끼가 계속 이상한 말을 하지? 민홍은 너무 궁지에 몰리자 악에 받치기 시작한다.
“알겠어, 알겠어.”
드디어 큰형이 인정한다. 찾았다. 도윤을 찾았다는 생각에 희미하게 웃음이 나온 민혁이 큰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마자 큰형은 자신의 코에다 대고 주먹을 날렸다. 민첩하게 고개만 살짝 돌려 피한 민혁은 큰형의 다리를 걸어 다시 주저앉게 했다. 민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큰형을 바라보고 있자, 큰형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진짜 모른다고! 난 모른단 말이야!”
“뭐?”
“왜 자꾸 니 사람을 건드렸다고 해! 난, 나는!”
“뭐....?”
“나는 무서워서라도 그런 건 안 해, 내가 그렇게까지 멍청한 줄 알아?”
소리 지르며 형은 악을 쓰기 시작한다. 그제야 민혁은 자신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는 것을 알았다. 원점이었다. 저렇게까지 몰아붙이고 주저앉혔는데, 허세가 많은 큰 형이 엉망인 꼴로 무너지며 결백을 시인하고 있었다. 민혁은 표정에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능한 큰 형을 작살나게 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는 것을.
자신이 매수한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는 형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민혁이 털썩 하고 바퀴 달린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이윽고 비서진들이 들어와 큰형에게 공격당한 줄 아는 민혁을 위해 의료진을 불렀다. 하지만 민혁을 주저앉게 한 것은 큰형의 허우적거리는 몸짓도, 주주총회의 승리 뒤에 풀어진 긴장감도 아니었다. 다시 도윤을 찾아야 한다는 절망감, 또 틀렸다는 죄책감이었다. 민혁은 눈을 감았다. 도윤아, 넌 어디 있는 거니.
…
“저 거실에서 책 읽고 있어요.”
도윤은 에드의 이름으로 개통한 스마트폰을 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 사회에서 스마트폰 없이 살 순 없었다. 필요해서 스마트폰이랑 유심칩을 파는 곳이 어디냐 물었더니 에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집사를 불렀다.
‘스마트폰 하나. 적당한 걸로 부탁할게.’
그리고 채 1시간이 되지 않아 최신 기종의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이어폰이 도착했다. 에드는 도윤의 두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영어를 못 알아들을까 봐 천천히, 퀸즈 잉글리쉬의 똑똑한 발음으로 때려 박듯이 말해주었다. ‘우리 집에 있는 동안 필요한 거 있으면 집사 불러.’라고. 그 말 속에는 돈이 드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도윤은 거기에 대해서 차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도윤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에드가 도윤의 어깨를 만졌던 곳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에드.”
“응, 도윤.”
“왜 이렇게 손아귀 힘이 세요.”
“무슨 소리야, 도윤?”
“오늘 아침에 너무 꽉 쥐어서, 조금 멍든 것 같아요.”
“진짜? 집사에게 봐 달라고 할까?”
“농담이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떼었을 때 얼얼한 정도였어요.”
“네가 너무 작은 탓도 있어.”
다음부턴 조심할게. 에드가 그렇게 말하고 끊었다. 도윤은 새로 산 스마트폰에 방금 걸려온 번호를 저장했다. 다 저장하고 난 뒤, 일어서서 지하실에 있다는 체육실이나 갈까 했는데 집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오는지 궁금했다. 의문은 집사가 들고 있던 구급함을 보자마자 풀렸다.
“에드가 치료해 주라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별 걸 다 신경 쓰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잠깐 확인만 하겠습니다.”
정말 괜찮은데...도윤이 그렇게 말하며 집사 할아버지의 눈을 보았다. 조금도 빈틈이 없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오버핏으로 입은 스웨터의 어깨 부분을 내렸다. 손자국이라 할 것도 나 있지 않은 깔끔한 어깨에 민망스러워진다. 도윤은 재빨리 어깨를 옷으로 다시 가렸다.
“보세요. 정말 괜찮죠?”
“그렇게 보고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요.”
“네.”
“혹시 버리는 옷 있을까요?”
“왜 버리는 옷은 찾으시는지요?”
“체육실에서 좀 운동을 하고 싶은데, 운동복이 없어서요.”
“그러면 따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부탁드릴게요.”
“천만의 말씀을. 기다려 주세요.”
집사가 층을 이동하는 것을 보고 도윤은 그제야 침대 위에 누워서 다리를 쭉 폈다. 몸이 편하니 마음도 빨리 편해지는 것 같았다. 가끔 순간순간마다 민혁이 생각나곤 했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사라질 민혁이 아니었다. 여전히 민혁은 어디에서나 머물러 있었다.
커피를 마실 때 향과 맛에 집중하지 않으면 민혁과 함께 마시던 카페의 햇살이 연달아 생각났고, 아침에 졸린 눈으로 칫솔질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느슨하게 놓고 있으면 뒤에서 민혁이 껴안고 아침 인사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옆에서 에드같이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 있으니 저절로 힘이 된다. 환생한 관리자인 만큼 사연이 없지는 않겠지만, 에드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덩달아 자신의 고민도 참 작은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런 힘이 있었다. 도윤은 이따가 운동이나 하면서 생각을 또 털어내야지, 라며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