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3부 : 사랑의 증명법 =========================
어두운 밤을 등에 잔뜩 올려놓은 것 같은 무거운 날이었다. 지민혁은 들어와 나갈 때와 달리 깨끗하게 치워진 자신의 거실을 바라보았다. 일주일째였다. 들어오면 술을 취할 때까지 마셨다. 하지만 광공의 특성상 제대로 취하지도 못했다. 계속 마시면 약간 술이 듣는 순간이 왔는데, 그때가 되면 제정신으로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잔을 던져서 깨거나 양주병을 박살 내곤 했다. 손발도 한두 번 찢어진 게 아니니 아마 이쯤 되면 아버지 귀에도 들어갔을 법하겠지.
민혁은 서서히 침잠해가고 있다. 이따금 아주 천천히 자신의 발끝부터 물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곤 했다. 찬물에 담긴 채로 점점 끓어가는 솥 안의 개구리가 된 절망감이 들 때가 있었다. 큰형도 꼴에 재계에서 견뎌내고 살아남는 것을 보니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는지 도윤을 꼭꼭 숨겨 놓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김 팀장이 빨리 도윤을 찾아낼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견뎌 낼수록, 후회가 목 끝까지 차올라 질식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후회가 들었다. 모든 순간이. 환생하기 전부터 도윤과 함께한 교육시간의 순간순간마저 후회가 되었다. 자신은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저 100억이라는 돈에 눈이 팔려 사랑을 앞에 두고 바보 천치처럼 군 자신이 한심했다. 왜 그때 나는 돈만 생각했을까. 얼굴이 가려진 전생의 연인이 있었다면, 최소한 위화감 정도는 들었어야 했다. 민혁은 손을 뻗어 유리잔을 쥐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쳤다.
“밤은 왜 이렇게 긴 걸까, 도윤아.”
잠이 들면 생생한 악몽으로 나타나 괴로워하는 도윤이 보였다. 계속 자던 도중 깨어났다. 중간에 깨어나면 습관적으로 도윤을 찾았다. 살아 있을까 싶어서. 온전히 살고 있을까 싶어서. 크루아상과 커피를 들고 왔던 이번 생의 다정한 도현의 모습을 찾다가 결국 유리조각을 밟거나 불이 꺼져가는 서울의 야경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다. 여기가 현실이라고. 도윤이 없는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런데 나는 아직 너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
손에 잡혀야 무언가를 해 주는 법이었다. 손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 도윤을 그린다. 민혁의 상상은 늘 최악으로 치달았다. 도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먼저 고통받는 생각이 들었다. 큰형에게 납치되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겁에 질려 있는 도윤을 상상하고, 지한율에게 홀딱 넘어가 함께 자신을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도윤을 상상한다. 혹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기 전까지는 풀어주지 않는다고 협박을 받는 도윤이 상상이 미친다. 그러면 민혁은 눈을 감고 도리질을 치다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했다.
도윤이 없는 민혁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
민혁이 없는 도윤의 삶은 그럭저럭 흘러가고 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지도 3주가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 나흘은 폐인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처박혀 있다가, 다음 열흘은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기를 쓰고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하루에 2만보씩 걸으면서 유명한 관광지란 곳은 열심히 가 보았다. 밀레니엄 브릿지에서 걸으며 석양을 보면서 버스커들의 연주를 들었다. 타워 브릿지에서 도개교가 열리는 것을 본 날도 있었다. 영국박물관에서 하루종일 조각상 앞에 앉아 조각상을 그리기도 했고, 내셔널갤러리에서 전함 테메레르 앞에서 한참 서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앉아있기도 했다. 하이드 파크도, 캠든 마켓도 발이 닿는 대로 열심히 걸어 다니다 보면 시간이 갔다.
제정신으로 제대로 본 것은 없었다. 눈에 당장 새로운 것이 보이니 지민혁 생각이 덜 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덩달아 울음도 줄었다. 무엇보다 돌아오면 많이 걸어 지쳐 쓰러져 잠들 수 있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발이 아프고 온몸이 피곤에 절어 있다 보면, 생각이 줄어들고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달력을 보았을 때, 시간은 꽤 꾸역꾸역 지나가 있었다.
“벌써 온 지 삼 주나 된 거야?”
도윤은 삼 주 동안 자신의 쉼터가 되어준 M호텔을 바라보았다. 빅벤과 웨스트민스터가 보이고 런던아이의 불빛이 보이는 야경이 마음에 들었지만, 3주가 지났으니 블랙카드는 폐기해야 하고 숙소도 옮겨야 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막상 캐리어를 드니 짐을 챙기기가 귀찮았다.
“귀찮은데...아...”
그리고는 작게 웃었다. 떠난 직후에는 살아 숨 쉬는 것 하나도 버거울 만큼 힘들었는데, 이제는 짐 싸기가 귀찮다고 하고 있다. 점점 민혁 없이 생각보다 괜찮아지는 자신의 생활을 돌아볼 때마다 참 낯설다. 도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사 온 큰 캐리어에 하나 둘 씩 옷가지를 넣기 시작했다.
- 띵동
늦은 오후다. 침대 정리를 해 줄 호텔 직원이 올 시간대는 아니었다. 도윤은 의아하게 여기며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누구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꽤 길었고, 문 너머에서 멀게 들리느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도윤은 체인을 건 상태로 문을 살짝 열었다. 바깥에 서 있는 것은 한 남자였다.
더티블론드에 넘긴 머리. 청회색 눈동자. 키는 거의 민혁만큼 커 보였다. 곧 터질 것 같은 검은색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사람이 문 옆 기둥에 기대고 서 있다가 환하게 웃어 보인다. 너무 잘 생긴 사람이 환하게 웃어 보이자 도윤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도윤은 더듬거리며 영어로 물었다.
“누구세요?”
“한율이 부탁 받고 왔어요.”
“아!”
“이한율.”
“관리자 출신이시죠?”
“그쪽도 그렇네요.”
관리자 출신인 건 관리자끼리는 알아볼 수 있다고 한율이 그러던데.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도윤은 여전히 관리자 출신을 구별할 수는 없었다. 기억을 지운 후유증인 걸까. 도윤은 투덜대며 걸쇠를 열어 그 사람을 들어오게 했다.
“나는 에드워드 러셀이에요.”
“전 민도윤이요.”
“도...운?”
하필이면 여기서 그 이름이 튀어나올 줄이야. 도윤은 실없이 웃었다. 도윤의 웃음에 에드워드가 무슨 문제냐는 듯 쳐다본다. 도윤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을 덧붙엿다.
“그건 내 동생 이름이에요. 여기서 들을 줄은 몰라서요.”
“그래요? 정확한 발음은 뭐에요?”
“윤. 도윤.”
“도윤.”
“잘 발음하시네요.”
“난 에드라고 그냥 줄여서 불러줘요.”
“알겠어요, 에드.”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가지가 온통 널려있는 방에 사람을 들이자니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도와준다고 찾아온 사람을 바깥에 세워두고 홀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드가 소파에 앉았고 도윤은 재빨리 거기 널부러져 있던 옷가지를 개어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한이 도와달라고 해서 왔어요. 공으로부터 도망 다닌다고.”
“한이요?”
“한율을 한이라고 불러요. 마지막 발음을 워낙 못해서 한이 허락해줬어요.”
확실히 한율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옷가지를 집어 침대 쪽으로 던진 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뻔뻔스럽게 웃음을 지으며 물어본다.
“좀 지저분하죠?”
“제가 약속 없이 방문한 탓이죠.”
“그래서, 어떻게 도와줄 거예요?”
“와, 성격이 정말 멋지시네요.”
“이봐요, 에드. 난 영국인이 아니라서요. 둘러 말하는 건 못해요.”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영국 특유의 빙빙 돌려 말하기가 계속되자 도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다른 사람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빙빙 돌려 말하고 반대로 말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실제로 겪으니까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내뱉고 말았다.
“영국사람이라고 하기엔 환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거 아녜요.”
“음. 들켰나요?”
“그나마 당신이 잘생겨서 화가 나진 않네요.”
“그거 다행이네요. 나는 미인공이었으니.”
“그 말 여기서 들으니까 진짜 이상하네요.”
“나도 말할 때마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려요. 미인이라니. 내 입으로.”
에드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건 상관없어요. 그렇게 치면 난 도망수인데. 그거 무슨 탈옥수처럼 들리는 거 알죠?”
“그건 그렇네요.”
“짐 쌀게요. 한율이 그러는데 당신이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들었어요.”
“내 저택에 게스트룸이 있어요. 거길 쓰면 될 거에요.”
“저택이요?”
아, 잊고 있었다. 지한율 역시 화려한 학력을 가진 재벌 3세였다는 걸. 영국 사립학교를 나올 정도였으면 아마 어마어마한 자제들이랑 얽혔을 터였다. 집도 좋겠지. 일단 미친 집값을 자랑하는 런던에 저택이 있다는 것부터 어마어마하다. 도윤은 자신의 도망이 지금까지 친 도망 중에 가장 편하고 안락한 도망이 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