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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8 3부 : 사랑의 증명법 (58/82)

00058 3부 : 사랑의 증명법 =========================

도윤이 호텔 밖으로 나온 것은 도착한 지 나흘이 지나고서였다. 나흘이나 꼬박 방 안에 틀어박혀서 룸서비스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낮이 되면 갈아준 호텔 이불에 푹 파묻혀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가끔 넷플릭스를 틀기도 했다. 무엇인가 사람 소리가 듣고 싶어 켰지만 내용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사람 떠드는 소리가 도윤에게 잠시나마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밤이 되면 빨갛게 빛나는 런던아이와 웨스트민스터의 야경을 보면서 넋이라도 놓은 듯 멍하게 있곤 했다. 뜨거운 물 한 잔 마시고는 다시 침대에 들어가서 파묻혀 버리고는 쏟아지는 잠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나흘 밤낮을 해가 뜨는지 달이 뜨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이 풀려 잠에 취해 누워 보냈을 때, 처음으로 눈물이 흘렀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오랜만에 말하는 것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갈라져 작게 나온다. 그리고는 눈물도 함께 나왔다. 도윤은 꼴사납게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느끼며 울다가 몸부림을 치며 침대 위를 구르기도 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침대보를 갈러 온 호텔 직원이 안부를 물어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우는 걸까. 이제는 그 의미도 모를 것 같았다. 그저 쏟아내듯이 통곡하고 몸부림칠 시간이 필요했다. 여섯 번의 회귀 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해야 할 차례가 왔다. 끊임없이 사랑을 향해 도전하고, 도전하는 동안 짓밟힌 희망과 마음을 쏟아낼 차례가.

도윤은 그날부터 다양하게도 울었다. 물을 마시면서도 울었고, 눈물이 나오지 않는데도 우는 소리를 내었고,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로맨스 영화를 틀어놓고도 울었고, 창밖에서 빨갛고 환하게 돌아가는 런던 아이를 보면서도 통곡했다. 지쳐서 물 한 잔 마시고 자고 일어나면, 또 서럽게 울어댔다. 그렇게 내장이 끊어질 것 같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미니바에 있는 음료수만 마시며 온 힘을 다해서 신생아보다 더 열심히 울었다.

어느 날, 아침 해가 밝았을 때 거짓말처럼 눈물이 뚝, 하고 멈췄다. 창밖을 쳐다보니 늘 붉은 빛을 내면서 돌아가던 런던아이가 새벽이라 뿌연 물안개와 함께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민혁에 대한 막막한 마음도 멈춘 것 같았다.

민혁은 김 팀장의 보고를 받고서 돌려보냈다. 이제 의미 있을 때나 보고를 하라는 말과 함께. 듣고 싶었다. 얼마나 도현이를 찾는 일이 진척되었는지. 하지만 매일 아침 여덟 시에 밤새도록 도윤만 찾았던 사람을 불러다 보고하게 하는 것은 효율이 떨어졌다. 이럴 시간에 도윤을 조금 더 찾게끔 하는 것이 나았다. 민혁은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내가 말한 사람들과 잡아 놓은 약속 일정 보고하세요.”

“네, 여기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비서실장이 큰형과의 경영권 싸움에 힘을 실어 주고 압박을 할 대주주들의 명단을 읊어 내려갔다. 민혁은 가만히 들으면서 형광펜으로 몇 명의 이름에 표시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조금만 신경 써도 내 쪽에 붙을 사람들입니다.”

“그럼 그분들을 위한 접대 일정에는 신경을 더 많이 쓰겠습니다.”

“한 번에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형을 못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J그룹의 맏이가 무능력하다는 것은 일반인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퍼진 이야기였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돌 정도라면, 이미 재계에서는 확정적인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J그룹의 둘째가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주주들은 민혁을 더 눈여겨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돈이 늘어난다면야 특별한 유대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기란 쉽다. 그러니 주주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민혁에게는 쉬웠다. 간단하게 말해서, 돈을 불리는 능력이 있으니까.

“이 사람들은 형과 어느 정도 유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별도의 뒷조사를 하겠습니다.”

“조사해서, ‘은혜’를 입힐 구석을 만들어 놔야 합니다.”

“모든 방법을 쓸까요?”

“그러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 C그룹 쪽 사람은 내연관계가 있으니 그쪽 위주로, B그룹 쪽 사람은 지금 경영권 다툼 중이니 첫째 쪽에 줄을 대는 식으로 접근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시기라 비서실 충원은 힘들겠지만, 끝나면 그만큼 포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비서실장이 인사하고 나가자 민혁은 고르지 않았던 숨을 토해내었다. 요즘 들어서 호흡이 어려웠다. 온통 도윤의 흔적과 그림자만이 보이는 세상 속에서, 민혁이 제정신을 가지고 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조금 전 비서실장과 이야기하면서 ‘은혜’를 언급할 때도 도윤은 얼굴을 비춘다. 자신이 김 팀장에게 베풀었던 최초의 은혜. 그 은혜 덕에 도윤을 만날 수 있었던 것까지 생각이 순식간에 닿았다.

그렇게 생각이 닿으면 목구멍 안쪽부터 숨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괜찮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눌러놓는다. 스프링처럼 심장이 튀었다. 두근거리는 것을 눌러놓으면, 눌러놓을수록 더 크게 반동이 왔다. 그리고는 숨을 의식해서 쉬어야 했다. 호흡이 흐트러지는 와중에도 민혁은 정신을 똑바로 잡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윤을 다시 볼 수 없을 수도 있었으니까.

소파 손잡이를 세게 쥐어 하얗게 변한 손마디에 힘을 푼다. 심호흡하면서 다시 머리를 붙잡는다. 민혁은 한숨을 쉬면서 스마트폰을 찾았다. 큰형에게 압박을 주는 것과는 별개로, 지한율 쪽을 뒤져보아야 할 가치는 충분했다. 한때 ‘관리자’였던 만큼, 지한율이 줄 수 있는 정보의 양도 많았으니까.

“....”

신호음이 들리고, 곧바로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번개같이 떴다. 지한율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민혁은 알고 있었다. 환강이 있는 곳에 대해서 어떤 정보라든 줬다면 지한율이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도움이 될까? 민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이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서는 지한율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자신이 도윤의 편지를 읽는 순간까지도 환강을 찾았던 놈이니. 민혁은 문자로 시간이 되면 연락이나 하라는 말을 남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윤은 처음으로 가운을 벗었다. 따뜻한 물을 틀어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입국할 때 입고 온 청바지와 티셔츠로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를 신었다. 한율이 준 카드도 챙겼다. 밖을 나와보니 런던에서도 보기 드물다는 맑은 날씨였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멈춰 걸을 때 다리가 유난히 가볍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오랜만에 다리에 힘을 실어 자신의 몸을 온전히 지탱하면서 걷는 느낌이 들었다. 가볍게 걸어가지는 기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도윤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걸었다. 낮은 온도의 공기가 폐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도윤은 무작정 걷다가 옷가게로 들어갔다. 옷가게에서 영수증이 자기 키만큼 길게 나올 때까지 옷을 샀다. 큰 종이가방 두 개에 옷을 꽉꽉 채워 넣었다. 이건 내 몸에 맞을까, 이걸 입으면 어울릴까. 그런 시시콜콜한 걱정이 점점 샘솟기 시작하며 도윤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카페에 들어가 무슨 음료가 가장 달고 시원할까 걱정하며 시키는 것도 좋았다. 제일 때가 타지 않는 운동화는 뭘까 고민하며 고르는 것도 좋았다.

그러니까, 너무 멀쩡한 게 문제였다.

편했다. 자신만을 걱정할 수 있다는 게. 자신만을 위해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다는 게 너무 생소하고 좋았다. 여섯 번의 삶 동안 계속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아왔다. 부모님일 때도 있었고, 형제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며 젊음이 시작될 나이에는 지민혁과의 사랑에 매여있었으니까.

“이렇게까지 괜찮아도 될 일인가...”

삼일 밤낮을 통곡하며 몸부림치고 울었던 기억은 어디로 간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도윤이 배시시 웃었다. 당분간 옷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옷을 가득 샀다. 그리고는 홀린 듯이 단 음료수를 얼음 소리가 날 때까지 흡입했다. 짐을 호텔 프런트에 맡겨두고는 또 럭셔리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옷을 또 샀다. 그리고는 걷다가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 번호만 보고 메뉴를 시켜 마음껏 먹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너무 괜찮은 것 같았다. 너무 괜찮아서, 이상했다. 더 울어야 할 것 같은데. 더 통곡하고 슬퍼해야 할 것 같은데. 마음이 잔잔해지는 속도가 정말 급격했다. 무서울 정도로 잔잔해지는 마음에 도윤은 가슴께를 꼭 눌렀다.

저녁에는 빅벤과 런던아이가 보이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칵테일을 마시기로 마음먹었다. 몰랐었는데, 자기가 묵은 호텔은 멋진 야경과 스카이라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국에서였더라면 민혁이 생각날 타이밍이었다. 언젠가의 민혁은 자신과 함께 조그만 칵테일바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달콤하고 시원한 칵테일이 혀끝을 자극하고, 서로를 사랑스럽게 보던 순간이 있었다. 보라색과 파란색의 조명이 빚어내는 아지랑이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기억났다. 그 기억과 함께 마음이 따끔해야 하는 타이밍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쥐뿔만큼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묘하게 짜릿한 느낌을 주었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로 주세요.”

달다고 홀짝거리다가 한 방에 훅 가버린다기에 시켰다. 오늘은 뭔가 취하고도 싶었다. 취해도 될 것 같은 날이었다. 하늘은 런던답지 않게 맑았고, 도윤의 날도 그만큼 맑은 것 같아서. 도윤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테이블 위에 팔을 베개 삼아 엎드렸다. 그리고 왈칵,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민혁아...이상해...”

이상한 날이었다. 기분이 멋대로 널을 뛰는 날. 그래도 괜찮았다. 죽음을 선사해 줄 회장님과 화를 내는 지민혁을 피해 도망쳐 온 날 중 처음 웃었던 날이었으니까. 스물네 시간 중 절반 이상은 울지도 않고 멍 때리지도 않고 즐겁게 무언가를 하면서 보냈으니까. 점점 이렇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만 울다가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때문에 빛이 번져 더 찬란해 보이는 런던아이가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저 멀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혁이 정말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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